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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 백작 각하- 보고드릴 게 있사옵니다!"

"지금 보고를 받아야 할 이유가 있느냐?"



타이런트와 바이오로이드들이 거대한 수해(樹海), 라 만차 대삼림에서 한바탕 준동을 일으켰던 그 시간, 병사로 보이는 한 남자가 조심스레 노크를 했다. 중년, 대머리. 그리고 기품 없이 디룩디룩 살이 붙은 한 남자가 짜증스레 신경질을 부리며 문에다 외쳤다.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마, 마치... 마, 마왕의 재림을 방불케 하는..."

"마왕? 그게 무슨 소리냐, 수인종들이 반란 활동이라도 하는 게 아니고?"

"아니었습니다! 수인종 따위의 소요 사태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금방이라도 군대를 파견하시어..."



밖에서 들려 오는 보고 목소리에 유라 백작은 쯧, 혀를 찼다. 귀찮다는 듯 미간을 연신 좁히다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 보고가 거짓이라면 내 즐거운 시간을 방해한 값을 톡톡히 치뤄야 할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각하!"



문 쪽에서 병사의 기척이 사라지자 백작은 알몸에 옷을 걸쳤다. 그러면서도 침대를 보다 희죽거리며 번들거리는 웃음을 내비쳤다.



"넌 나중에 더 상대를 해주마."

"... 아윽... 흐윽..."



침대에는 수갑이 결박된 여자 아이가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하얀 고양이 귀, 하지만 투박한 귀걸이가 걸려있었고 푸석한 백발이 난잡히 흐트러져 있었다. 온몸에 멍이 가득했고 고양이 모양의 발톱은 몽땅 뽑힌 채로 가쁜 숨을 쉬는 그 모습을 보자 백작은 클클 웃었다.



"좋아, 이 김에 라 만차 대삼림을 토벌하는 상소를 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이젠 수인종도 질리는데... 삼림 안 쪽에는 엘프도 산다지? 그렇다면... 그년들을 노예로 삼아 즐겨보는 것도 나름 재밌을 것 같군."



그 목소리에 수인종 여자 아이의 꼬리는 두려움에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



타이런트를 가까스로 진정시킨 후, 나는 이 일의 전후 관계를 따지기 위해 아이들을 불렀다. 여기가 혹시나 라스트오리진의 세계 속인지, 아니면 전혀 상관이 없는 이상한 세계인지 확인을 해봐야 했다. 고민을 하던 난, 그래도 지휘관 개체라고 할 수 있는 메이에게 이야기를 차근히 들어보기로 했다.



"메이... 어떻게 된 건지 나한테 설명 좀 해줄 수 있을까?"

"흥, 팔자 좋게 기절만 하고 있었으면서 이제 와 사령관 노릇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얘는 액정으로 봤을 때도 그랬지만 그 입만 좀 고았으면 얼마나 좋을지 모르겠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곤, 한 쪽 다리를 거만하게 꼬아 멸망의 옥좌에 앉아있는 메이에게, 나는 최대한 낮은 자세로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했다. 일단 라스트 오리진 세계관에서도 지휘관 바이오로이드인 만큼 현 상황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돌아갔으니까. 그래도 한 편으론 조금 듬직한 무적의 용이나 불굴의 마리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이 들었다.



"미, 미안해. 그, 그니까. 내가 지금 정신이 없는 상태라서.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정말... 모르겠어. 알려줄 수 있겠어?"



재차 내 부드러운 질문에 메이는 퉁명스럽게 볼을 부풀리더니, 후우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옥좌 한 쪽을 비키더니 대뜸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타라는 걸까? 얼떨떨하게 쳐다보기만 하자 버럭, 메이가 소리를 질렀다.



"메이, 그거 1인용 아니냐?"

"상황 설명을 해줘야 하는데 나보고 뭘 어떡하라고! 빨리 타! 조, 좁은 대로 일단 끼어 타기라도 해!"



항복의 표시로 결국 고개를 끄덕거리곤 옥좌에 앉았다. 최대한 메이와 딱 붙어 앉은 뒤, 메이가 패널을 조정하자 옥좌가 부유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숲의 커다란 나무를 벗어나 부유하자 끝없이 쭉 뻗은 수해가 눈에 보였다. 타이런트가 난동을 부린 구역이 왜소해보일 정도로 숲은 너무도 넓었다.



"타이런트가 1주일은 난동을 부려야 파괴될 거 같은데?"

"바보야! 중요한 건 그게 아냐! 지금 이 숲들을 봐, 너랑 같이 지구를 돌아다녔어도 이런 숲은 본 적이 없었어."



메이의 말대로, 아마존 밀림처럼 열대의 기후가 아니었다. 적당히 선선한 바람이 부는 낙엽수림이었다. 기껏해봐야 한국 날씨 정도 되는 기후인데 끝도 없이 울창한 나무들이 융단처럼 퍼진 숲이었다. 혹시나 이 숲이 인류가 멸망한 뒤 나타난 환경 변화로 생긴 숲이 아닐까 물어보려던 때였다. 메이는 옥좌에서 부유하는 홀로그램을 내게 보여주었다.



"이상해. 폭탄 작약량, 인공위성 수신, 폭격기 호출 모두 먹통이야."

"메이, 그럼 넌 어떻게 미사일을 쐈던 거야?"



그래, 메이는 둠브링어. 다시 말해 오르카의 전략폭격 지휘관이었다. 미사일과 핵이 컴퓨터에 의해 통제되는 만큼, 이것이 먹통이라면 메이는 그저 깡통을 타고 다니는 '존만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까 타이런트를 무자비할 정도로 폭격을 하던 모습은 어떻게 한 것인가? 내 질문에 메이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투로 패널의 버튼을 꾹 눌렀다.


그러자, 별안간 허공에서 붉은 오망성의 수식이 그어지더니 이내 허공에 구멍이 뚫리듯 검게 변했다. 그리고 나는 놀라운 상황에 직면했다. 마치 '워프'를 연상하듯 소이탄들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메이는 다시금 패널의 닫기 버튼을 누르자 눈 녹듯 허공에 소이탄들이 사라졌다. 그녀는 자신 조차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이제 이해 돼?"

"..."

"여긴 우리가 철충과 싸워 온 세계가 아닌 것 같아."


맙소사.


그야말로 이상한 양판소에서나 보던, 마법이 존재하는 뭐... 일본 라노벨 이세카이에 들어 온 것이라는 소리밖에 되지 않았다. 라스트 오리진에서도 차원을 열어 폭탄을 투하한다는 설정 따윈 본 적도 없었으니까.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지만, 마력이니 체력이니... 이런 스테이터스가 존재하는 세계이다... 이 말인가?



"... 씨발."



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라오 챈에서 보았던 수많은 사령관 빙의물이니 뭐니 이런 것들을 보면, 그 세계관에서 통용되는 설정이나, 세계관... 다시 말해, 철충이 득시글거리는 세계관에 떨어지곤 했었다. 지금 내가 사령관으로 빙의를 한 입장에서 오히려 그 세계에 떨어진다면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짜 '이세카이'라니.


다시 말해, 라스트오리진에서 통용되던 모든 물리 법칙과 설정이 붕괴된 나는 그냥... 자지만 달린 동물에 가깝지 않을까. 물론, 로비 프리셋에 저장해둔 최애들과 떨어진 세계관이긴 했지만, 이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할 수 없었다. 라스트 오리진 세계관에서의 라붕이는 지휘라도 하지, 나는 대체 여기서 뭘 할 수 있는 거람.



"하아... 메, 메이. 다른,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은 없어? 왜 너희들 밖에 없는 거야?"

"... 기억 안 나 사령관?"



그때였다. 메이가 불현 슬픈 표정으로 내게 되묻는 것은.



"기억... 그게..."

"철충과 최후 교전을 벌이려던 그날 밤, 별의 아이들이 우리를 별안간 우리를 습격했던 거."

"... 별의 아이?"



스X트X이 그 씨발 병신이 대충 던져놓은 맥거핀 말인가? 그러고보니 라스트 오리진이 서버 종료를 하기 전, 개발노트에 별의 아이의 떡밥을 푸느니 뭐니 했던 건 기억이 났다. 아니 근데, 여기로 건너 오게 된 게, 그 병신 같은 맥거핀 별뢀뢀루 때문에 그렇다고? 나는 머리채를 쥐어 뜯고 싶을 수밖에 없었다. 그 병신들이 대충 던져놓은 떡밥 때문에 내가 이상한 세계로 전이를 했다고?



"그래, 오르카 호 전멸... 용도, 레오나도, 마리도... 나앤도... 모두 다... 죽고 이렇게 남은 거야."



그 씨발 좆 같은 별참피 새끼 때문에 이렇게 된 거냐 묻고 싶었지만, 메이의 표정이 음울한 것만 같아 속으로 생각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내 시점에서는 내가 갑작스레 넘어온 거지만, 섹돌들 입장에서는, 별의 아이들과 전투를 벌이다 모두 거의 몰살을 당하던 와중 이 세계로 전이를 했다는 것이었다.


씨발, 스X트X이 때 스토리 같은 소리네, 싶었지만 메이는 생사고락을 같이 나누던 동료들이 생각난 건지, 이내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존만이라고 놀려대긴 했지만 막상 이리도 작은 꼬마 애가 서럽게 펑펑 울어대니, 나는 결국 어깨를 빌려주기로 했다. 서러웠는지 이내 메이는 내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



"흐읍... 흐윽... 그, 그래도 다행이야... 사령관... 너 없었으면 정말... 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어."

"메이..."

"이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나는 몰라... 하지만, 사령관이라면, 끝까지...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아... 나앤처럼, 나 떠나지 마... 흐읍... 흐윽... 흐아앙..."



게임 속에선 티격태격 거리더니 나앤이 죽자 정말 슬펐나 보다. 생각해보니 둘이 케미가 정말 잘 맞긴 했었지. 게다가 나앤이 유능한 부관이었던 만큼 그녀의 부제는 메이에게 있어 큰 슬픔이나 다름 없으리라. 원래라면, 메이에게 나는 사실 너희들과 함께 하는 사령관이 아니며, 다른 세계에서 건너 와 사령관의 몸에 빙의된 일반인이라 말하려 했지만.


아무래도 그 말은 조금 유예해야 할 것 같았다. 지휘관인 메이가 이렇게 흔들릴 정도면, 다른 아이들 또한 동요할 테니까. 나는 게임에서 나왔던 사령관처럼 일 중독에 사망자 0명을 달성하는 유능한 사령관은 아니었다.


하지만,



[함께해요, 이 세상 끝까지...]



라스트 오리진의 목소리가 쟁쟁히 내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그리고 메이는 게임 상에서, 나와 서약을 한 부인과도 다름 없는 아이였다. 그리고 나는 메이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볼 수 있었다. 물론 게임 데이터 상이긴 했지만 드레스를 입으며 내게 발그레한 미소를 짓던 그녀의 모습, 영원히 함께하자며 '좋아해, 멍청이 사령관♥'이라 말한 그녀의 행복을 지켜주기로 했다.


나는 그저 사령관에 빙의된 라붕이에 불과했지만, 현실에서 그녀들을 사랑했던 만큼, 그 게임을 사랑했던 만큼. 나는 그녀들에게 든든한 사령관이 되기로 했다.



"메이, 나앤이 하늘에서 너 내려다보면 걱정되서 투덜거리겠다. 그만 울자."

"... 흐읍... 나앤... 흐윽... 엔젤... 흐읍... 실피드..."



나는 메이의 자그마한 어깨를 말 없이 토닥였다.



**



"칫, 양갈레 햇츙... 주인님을 데리고 어디까지 날아간 거야?"

"일단 주인님께 모든 상황을 설명해야 하지 않겠느냐, 리제."

"강아지 햇츙, 설마 그 양갈레 햇츙이 주인님을 데리고 혼자 도망간 거면..."



한편 거의 폐허나 다름 없던 숲 한복판, 메이를 제외한 바이오로이드들은 모두 자리에 앉아 사령관이 오길 기다렸다. 리제는 연신 자신의 등에 달린 가위를 매만졌다. 다른 한 손으론 손톱을 톡톡 물어뜯으면서. 바르그는 그런 리제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 재해에서 살아 남은 동료가 심각한 얀데레라니.


바르그는 역시나 초조한 눈빛으로 다리를 연신 흔들고 있는 장화를 보았다.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바르그는 들을 수 있었다.



"설마... 너, 날 버리고 그 여자애랑 멀리 도망간 건 아니지? 그치? 그, 그러니까... 너, 나 사랑한다고 그랬잖아... 나한테 반지도, 반지도 줬잖아..."

"두 분 모두 가관이시군요. 부군을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찌릿, 장화와 리제의 날 선 시선이 소완에게 향했다. 바이오로이드 부대원들간의 교류가 적은 엠프레시스 하운드였지만 소완 또한 장화와 리제 만큼이나 위험한 성향이 짙은 바이오로이드란 소리를 바르그는 들었다. 그런 소완이 아주 침착한 목소리로 기다리고 있다니. 하지만 그도 잠시, 소완은 검정미식(檢定美食)이란 식칼을 꺼내 살펴본 후 연녹색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바르그양. 요새 메이 지휘관께서 살이 조금 찌셨던데... 해체하면 제법 근수가 나가겠지요?"

"..."

"으흥- 왜 그렇게 쳐다보시는지요. 농입니다, 농-"

"... 농이 아닌 것 같군."

"이 숲을 뒤지다보면 제법 맛있는 식재료를 구하겠지요. 설마 제가 식인을 하겠사옵니까 바르그양?"



어쩌면 장화와 리제보다 더 위험한 인물이 아닐까, 바르그는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하아... 하필 왜 이런 애들이랑 넘어왔나 모르겠네. 똥강아지에, 울보 지휘관에... 싸이코패스 셋... 아니, 넷인가?"

"천아씨. 저는 좀 빼주시겠어요?"



천아가 눈을 돌리자 그곳에선 못마땅한 표정으로 로자 아줄과 블랙맘바를 만지작거리는 리리스가 보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는 탄창을 확인한 뒤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뭔가 조금 피곤하군요... 기가 빨린 느낌이기도 하고..."

[경호대장 또한 그러한가? 본 개체 또한 그런 것과 비슷한 느낌이군.]

"알바트로스씨는 기계가 아니신가요? 어째서 피곤하다 느끼는 거죠?"

[모르겠군. 이상한 곳으로 넘어오며 본 개체에도 문제가 생긴 것 같다.]

"저도 뭔가 이상한 느낌이에요. 분명, 타이런트씨와 싸울 때 자꾸만... 뭔가 빠져 나가는 느낌이었."

[하지만 본 개체는 최강- 핑계를 대진 않겠다.]



유달리 최강을 강조하는 알바트로스의 언사에 리리스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리리스는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바트로스씨... 이곳에 오기 전 당신은 모든 ags 사단을 잃으셨죠?"



리리스의 질문에 알바트로스는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그렇다.]

"... 혹시, ags도 부하를 잃는 감정이나... 이런 게 느꺄지나요?"

[그렇진 않다. 우리는 사령관을 위해 최선을 다하여 싸웠을 뿐이다.]



리리스는 알바트로스의 대답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곳으로 넘어 오기 전, 별의 아이에게 맞선 컴페니언 대원들을 하나 하나, 그녀는 떠올렸다. 사령관의 밀착 경호를 담당하는 그녀들로서, 그녀들이 죽고 사령관이 살았다는 것은 다시 말해, 컴페니언 대원들의 사명을 다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끝내 죽어가던 페로와 하치코, 포이, 펜리르, 스노우 페더의 처절한 몰골이 다시금, 그녀의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경호대장은 슬픈가?]

"..."

[다시 묻겠다. 경호대장은 대원들을 모두 잃은 슬픔이 큰가?]

"... 아닙니다. 저희 또한 알바트로스씨처럼 최선을 다해 주인님을 구했습니다. 아이들 또한 먼 곳에선 후회 없이 자랑스러워하고 있겠죠."

[미안하군. 같은 처지지만 본 개체는 ags인 만큼 바이오로이드의 감정에 공감해줄 수는 없다.]

"공감해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리리스는 애써 한줄기 눈물을 훔쳐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내심, 대원들이 모두 살아 온 엠프레시스 하운드의 멤버들을 차례대로 지켜보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째서, 저 셋은 무사히 살아남았는데 자신의 자매들은 모두 처참한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는지. 하지만 리리스는 감정을 쉬이 드러낼 수 없었다.



[크하하하하! 꼴 사납게 징징 짜기는 애송이!]



그때, 거대한 포효가 구덩이에서 들렸다. 그간 애써 무시하고 부여잡으려던 멘탈이 끊긴 리리스는 그대로 블랙 맘바를 든 채 일어서 구덩이로 다가갔다. 꼴사납게 배를 납작 깔고 누워있던 타이런트는 연신 비웃으며 그르렁거렸다.



[그렇게 분하고 징징 짤 거면, 너 또한 그 별의 아이에게 달려가 목숨을 버리면서 싸우면 됐지 않느냐! 하하하하!]

"시끄럽습니다, 타이런트씨."



철컥 소리와 함께 리리스가 블랙맘바를 겨누었다. 웅웅 소리와 함께 로자 아줄도 그녀의 주위를 호위하며 타이런트에게 위협하듯 기동했다. 리리스가 그대로 블랙맘바의 방아쇠를 당기려던 그때였다. 누군가 등 뒤로 다가 와 조용히, 리리스를 껴안았다. 뒤를 돌아보자 레아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레아... 씨..."

"진정하세요, 리리스님. 지금 이 상황에선 대원들 한 분 한 분 모두가 소중한 전력이에요."

"..."



자신의 자매들을 다 잃은 채 혼자 살아남은 이 슬픔을 당신이 어떻게 아냐며 레아에게 따지려던 순간, 리리스는 보았다. 레아의 볼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레아 또한 리제를 제외한 자매기들 전부가 별의 아이들에게 몰살당했다. 다프네도, 아쿠아도, 티나티아도, 그리고 드리아드까지. 


한 명이 살았든, 모두 몰살당했든... 그 슬픔은 모두 똑같았다. 하지만 레아는 필사적으로 참아내고 있었다. 메이와 지금 이 상황을 이야기 하고 있을 사령관에게 조금이라도 심려를 끼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정신이 불안정하여 자매기들을 모두 잃었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어떻게 폭주할지 모르는 리제를 억압하기 위해.



[재미없군, 제법 강한 것 같아 붙어보려 했더만.]

"타이런트씨... 사령관님을 위해서라도 그만,"

[역시 니년은 나이가 많아서 그런 건가? 도발도 제법 잘 참는군.]

"아...?"



그때였다. 리리스를 잡은 레아의 손에 무지막지한 힘이 들어간 것은. 그리고 순식간에 레아의 위로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어어, 당신. 참아내라고 할 땐 언제고 '나이'드립에 이러는 거야? 리리스가 필사적으로 말리려는 그때였다. 멸망의 옥좌가 하늘 위에서 내려왔고, 사령관이 땅에 내려왔다. 모두들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사령관은 잠시 헛기침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다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럼 남은 인원을 점검하겠다."



그리고 사령관의 시선은 알바트로스에게 향했다.



"ags로보테크 군단장, 알바트로스."

[HQ1 알바트로스. 명령 대기 중.]

"그래. 다음은..."

[본 개체는 로보테크 군단장 보단 '최강' 군단장으로 불러주길 바란다.]

"..."



사령관은 대답 대신 시선을 메이에게 돌렸다.



"둠브링어 폭격 지휘관, 메이."

"그래, 너의 멸망, 여기 있어."



살짝 퉁퉁 부운 눈을 애써 비비며, 메이는 당찬 어조로 대답했다. 사령관은 구덩이 속에 납작 개처럼 엎드려 있는 타이런트에게 물었다.



"해피야-"

[주인! 그 치욕스러운 별명은 집어 치워라!]

"그렇게 안 부르면 또 날뛸 거잖아."

[주인, 대체 이 몸의 제어 명령어를 왜 그 멸칭으로 설정한 거냐! 인정할 수 없다!]


 사령관은 몇 번이나 꼬리를 땅으로 찍으며 항의하는 타이런트를 외면 한 뒤, 시선을 옮겨 레아와 리제를 응시했다.



"레아. 그리고 리제."

"네, 주인님. 레아 여기 있어요-"

"리제도 여기 있어요 주인님!"



두 여자의 미소에 사령관은 같은 웃음으로 호응했다. 그리고 사령관은 바르그를 필두로 서 있는 세 여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바르그. 장화, 그리고 천아."

"네, 주인님.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치... 치이... 그 존만이랑 데이트나 했으면서 사령관인 척 지랄은... 읍?"

"자자, 미친년 여기있고, 핫팩 나도 있어. 확인♥"



천아가 분위기 파악이라도 하라는 듯 장화의 입을 틀어 막았다. 사령관은 셋에게 미소를 지은 뒤 시선을 옮겼다. 이번에 마주친 대원은 소완. 사령관은 천천히 이름을 불렀다.



"소완-"

"부군, 소첩 여기있사옵니다."



단아하면서도 은은한 녹색 눈동자를 반 정도 접으며, 나른한 표정의 소완이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령관은 리리스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경호대장, 블랙리리스."

"주인님- 저 여기 있어요."



리리스가 애써 웃으며, 당찬 미소로 대답했다. 사령관은 그렇게 모두를 바라보았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들, 혹은 많은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들의 눈빛으로. 그는 헛기침을 한 뒤 그들에게 말했다.



"지금 오르카 호의 대원들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고 다른 세계로 오게 되었다."

"..."

"앞서 일어났던 참담한 사건들은 모두, 사령관의 잘못된 판단이라 할 수 있다"



펙스를 괴멸시키고 철충을 벼랑 끝까지 몰고 온 역전의 사령관이 사과했다. 아니, 아예 함모를 벗곤 그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모두들 겸손한 그의 태도에 어쩔줄 몰라했다. 



"이런 사령관을 용서할 수 없는 대원들에게 사과하고 싶다."

"주인님, 그, 그러지 마세요!"

[사령관.]



보통의 사령관과는 확실히 다른 어투였다. 하지만 대원들은 모두 알 수 있었다. 별의 아이들의 침공 아래에, 정예. 인간의 구원자라 할 수 있는 오르카호가 괴멸되었다. 사령관은 진중한 어조로 그들에게 말하며 사령관으로서의 용서를 빌고 있었다. 이윽고 사령관은 주먹을 꼭 쥔 뒤 다시금 그들을 차례대로 지켜보곤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한 번만 더, 사령관을 믿어라. 현재 이 세계가 어떤 상황이고, 이 세계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대원들에게 말할 수 있다."



사령관은 심호흡을 한 뒤 선언했다.



"사령관은 너희를 모두 사랑하고 믿으며, 너희들을 이 세계에서 만큼은 모두 지켜낼 것이다."



사령관의 목소리는 단호했으며 깊게 바이오로이드들의 귓가에 쟁쟁히 울렸다.



*



그렇게 연설이 끝난 뒤 나는 한숨을 쉬며 홀로 나무에 주저앉았다. 평생 반장 선거에도 나간 적 없던 내가, 겨우 군대에 있을 때 중대장의 말투를 얼추 따라하며 말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중2병 걸린 미친 놈 같아보였다.


물론 나는 게임 속 사령관보다 무능한 사령관일지도 몰랐다. 나는 평범한 대학생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를 믿고 따르며 동료를 잃은 슬픔을 참아내고 여기까지 온 나의 아이들 앞에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그리고 진심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아이들과 이 세계에선 행복해지고 싶었다. 연설을 하며 잠시 곰곰이 생각해보았을 때, 나와 이곳에 전이된 섹돌들의 공통점은 모두, 로비 프리셋에 세워두고 서약까지 마친 나의 최애 섹돌들이었다. 그랬기에 떨지 않고 진심으로 그들이 나를 의지하고 따를 수 있도록 일장 연설을 한 것이리라.


"근데..."



ags... 알바트로스랑 타이런트는 롸벗이라 서약이 안 되는데. 왜 같이 전이 된 걸까?



"... 왜지?"



라고 생각하던 난, 문득 떠올려버리고 말았다.



"..."



천박하게 고간을 벌린 메이드 장화의 고간 위로 빛이 쏟아지는 이펙트를 타이런트와 알바트로스 다중 부관을 이용해 만들었다.



"알바트로스랑 해피 잘 대해줘야겠다..."



=



건전 로비를 생활화 합시다.


이제 프롤로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