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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웁... 우욱...!"


처참한 광경으로 학살당하는 것을 처음 본 감상은... 솔직히 말해 최악이었다. 팔과 목이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온통 바닥에 피가 흩뿌려지는 모습,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날아다니며, 유려한 춤사위를 뽐내는 무희처럼 칼을 휘두르는 리제의 모습은 무서웠다.


철충이었다면 별 생각이 없었을 지도 몰랐지만, 나와 같은 사람의 형상을 한 것들이 토막나고, 잘리는 모습은 처참함, 그 자체였다. 공식 만화에서 멸망 전 브라우니가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 본 감정이 이랬을까.


확실히 리제는 강했다. 순식간에 병사들을 도륙내어버렸으니까. 하지만 내 앞에서 마치 칭찬해달라는 듯 웃는 그녀의 모습은 내가 그간 봐왔던 라스트오리진 게임의 리제가 맞나 의심이 들었다. 물론... 리제의 성격 자체가 단순하며, 직관적이긴 했지만 전투 의지를 잃고 도망가는 병사의 등에 칼을 꽂으며 낄낄거리는 모습은 차마 두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다.



"... 하아... 하으..."

"주인님, 괜찮으세요?"



먹을 것이 없어 연신 위액과 침을 뱉어내던 때, 레아가 다가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리제가 병사들을 도륙냈을 때도 말리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제야 나는 어렴풋 체감할 수 있었다. 레아와 리제를 비롯한 바이오로이드들은 전투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생명체였다. 전쟁이란 것을 전혀 상상하지 않던 나와는 다른 아이들이었다.



"... 하아... 하... 우웁... 하아..."



잘린 몸에서 쏟아진 내장, 사후 경직으로 꿈틀거리는 손. 그리고 울컥거리며 베인 목, 경동맥에서 빠져 나오는 피. 필사적으로 목을 타고 오르는 공포를 애써 삼킨 난 천천히 일어섰다. 크게 숨을 들이 마셨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길 바라야겠지. 최대한 유화적으로... 끝내야겠지.


그리고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아이들을 제대로 통솔할 수도 없을 것이었다. 확실히 이곳은 이 세계였고, 필요에 따라선 그 누구도 서슴없이 죽여야만 했다. 그리고 어느 모습에서도 나는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이를 앙다물고 나는 몸을 틀었다.



"응? 하하- 하아... 응. 괜찮아, 갑자기 속이 좀 안 좋아서..."

"주인님... 정말 괜찮으신 거죠? 어디 문제는..."

"없어. 레아."



애써 웃은 뒤 고개를 들었을 땐 리제가 칼의 날에 담뿍 묻은 피를 탈탈 털고 있었다. 자신이 입은 메이드복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신조라도 있었는지, 그녀의 앞치마에는 어떠한 티끌의 피도 묻지 않았다. 무섭도록 단순한 리제에게 다시금 공포감이 느껴졌지만 애써,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 잘했어. 리제."

"정말요 주인님? 헤헤- 저 잘했죠! 네?"

"응. 정말, 잘했어."



아무래도 다음부터 리제 대신, 최대한 비폭력적인 성향의 아이를 전투에 보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살육이 끝난 숲을 지나, 수인의 마을에 다다랐을 때, 손발이 묶인 수인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주변에 널브러진 칼을 들곤 그들에게 묶인 밧줄들을 풀은 뒤 입을 열었다.



"다들 괜찮으신가요?"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중, 장로로 보이는 곰의 귀를 가진 노인이 내게 인사를 했다. 처음에는 나와 레아, 그리고 리제를 경계하던 수인들도 천천히 긴장을 내려놓고 있었다.



"혹시, 당신이 이 마을의 촌장이신가요?"

"... 예? 아, 아 그렇습니다."

"죄송한데, 일단 저희가... 묵을 곳이 없어서요. 제 일행을 며칠 동안이라도 이 곳에 머물게 해도 될까요?"

"저희를 구해주셨는데, 어찌 저희가 당신들을 내쫓겠습니까..."



어쩐지 촌장은 내게 여전히 여러모로 의심을 가지는 것만 같았다. 하긴, 병사들과 외견이 똑같은 인간의 모습이니 당연할 지도. 아... 그러고보니, 바르그가 오면 조금 경계심이 누그러지지 않을까? 바르그도 어쨌든 늑대 귀가 달리긴 했으니까. 나는 레아에게 남은 인원들 모두, 이곳에 불러달라 말했다.


그렇게 레아가 숲으로 날아가 버린 후, 나는 촌장과 함께 거처에 들어가 이 세계에 대한 정보를 물어보기로 했다.



"정보 말씀이십니까?"

"... 그게. 아, 저희가 좀 먼 곳에서 왔거든요."

"먼... 곳 말씀이십니까?"

"네. 아, 그... 그게. 아, 음... 그러니까, 다른 차원... 에서 왔다고... 해야 할,"

"서, 설마! 동쪽 숲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렸던 게..."



타이런트가 난동부린 걸 말한 거겠지...?



"아, 그게..."

"호, 혹시... 그 거대한 드레곤과 사투를 벌이신 분들이..."

"드레... 곤이요?"



타이런트가 입에서 플라즈마 포를 쏘긴 하지만... 그게 드레곤이랑 비슷하게 보였나?



"아? 해피 말씀이신가요? 그게... 그 아이가 제 부하? 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잠깐 말을 안 들어서..."

"여, 역시나 마족이셨군요! 그 강대한 드레곤을 굴복시키고 사역하시다니!"



그러더니 촌장은 대뜸 내게 납작 업드렸다. 그리고 싹싹 손을 빌며 내게 빌기 시작했다. 촌장의 말로는 아침부터 굉음 때문에 마을 청년들을 시켜 순찰을 했었는데, 저 멀리서 엄청난 크기의 드레곤이 난동을 피웠으며 바람과 번개를 부리는 마족들의 전투를 보며 두려움에 떨었다고 말했다.


더 말하면 뭔가 일이 더 꼬이는 것 같았다. 라스트오리진의 세계관을 구구절절히 설명해봤자 믿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니, 그냥 촌장의 생각에 토를 달지 않기로 했다.



"하 그래요... 그, 아무렇게나 생각하시고... 일단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예... 예 마왕 폐하..."

"아니, 그, 폐하라고 말은 안 해도... 아, 그냥... 부르세요 예."



... 머리가 아파왔다.


더는 마왕으로 부르니 뭐니 토를 달진 않기로 한 나는, 이 세계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요구했다. 촌장은 낡은 가죽 스크롤을 가져 와 나무 테이블 위에 펼쳐주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숲의 이름은 '라 만차' 대삼림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숲이라 했다. 이 숲은 지금 내가 전이한 이 세계의 대륙에서 가장 큰 규모의 숲이었으며 수인, 드워프, 고블린... 등등의 여러 인외 종이 사는 지역이라 했다. 하지만 숲이 너무 넓은 탓인지, 아니면 수인종이 바깥과 교류가 없었는지 많은 정보를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저 대략적으로 파악한 것이라곤 아주 단편적인 정보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당신을 잡으러 백작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 헬반도 왕국이다, 이 말이죠?"

"그렇습니다."



생각보다 헬반도 왕국은 작은 땅덩어리를 가진 국가였다. 지금 우리가 전이된 라 만차 대삼림보다 약간 큰 왕국이었고, 나라의 주요 산업은... 라 만차 대삼림의 여러 인외종을 포획하고 다른 나라로 수출하는... 노예무역을 주로 하는 나라라고 했다. 아하, 그래서 수인들을 생포하려고 했던 거구나.


그리고 헬반도 왕국 의 주변에 위치한 나라들에 대해선 자세한 정보를 알진 못했다. 촌장이 설명하길 두 나라가 더 있다고 들었는데, 한 나라는 여섯 여왕이 연합을 이루는 왕국이었고. 다른 한 왕국은 자신도 모르는 체제로 돌아가는 왕국이라 설명했다.



"특이하네... 여섯 여왕이 연합을 한 왕국이라고요?"

"그렇습니다. 듣기로는... 헬반도 왕국보다 훨씬 국력이 강한 국가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쪽, 그러니까... 이 여섯 여왕의 위에 붙은 나라는 어떤 나라인지도 모른다고요?"

"그렇습니다. 폐하... 듣기로는 자기를 구원자라고 칭하는 한... 신이라는 사람이 지배를 하고 있는 국가라 들었습니다."

"정확한 규모는 어떻게 되나요?"

"그게, 저희도 바깥 세상은 잘 몰라서..."



설명을 정리해보자면, 이 세계에서 가장 큰 국력을 가진 국가는 세 국가였다. 헬반도 왕국, 그리고 여섯 여왕을 모시는 나라, 그리고 자신을 신이라 칭하는 사이비 종교 국가. 근데 뭐랄까, 왜 이 세계가 조금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단 생각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뭐랄까... 라스트오리진에서 나오는 오르카, 펙스의 여섯 레모네이드... 그리고 철의 교황으로 대표되는 철충 세력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깊게 생각하진 않기로 했다. 이 세계는 라스트오리진에서 나오는 발달된 무기들을 앞세운 과학 세계가 아니라,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였으니까. 아무래도 이 세계에 대해 정확히 알기 위해선, 이 숲을 나가 직접 조사를 해봐야 할 것 같았다.



*



하루가 지난 뒤, 수인마을과 가까운 '유라 백작'의 영지를 염탐하기 위해 길을 나서기로 했다. 그리고 나의 호위를 목적으로 같이 가는 바이오로이드를 정했는데...



"사, 사령관! 나도 갈 수 있다고!"

"... 메이. 염탐이 목적인데 그 둥둥 뜬 옥좌를 타고 다니면 눈에 띄지 않을까?"

[사령관. 최강의 호위를 약속하지.]

"알바트로스... 넌 대놓고 다니기 좀 그런 외형 아니니?"

[문제 없다. 본 개체는 최강의 스펙을 가지고 있다. 사령관의 호위에 알맞는.]

"사양할게."



타이런트를 보면서 드레곤이네 뭐네 하면서 덜덜 떠는 이 세계 사람들한테 알바트로스 또한 인외 마물의 존재로 보겠지...


많은 고민을 하던 난, 결국 두 아이와 동행하기로 했다. 여행에 어느정도 필요한 바이오로이드. 혹시나 모르는 강자에게도 어느 정도 대항 할 수 있는 바이오로이드. 그렇게 생각한 내가 결국 동행하기로 결정한 것은.



"부군과의 여행이라니, 소첩, 가슴이 두근거리옵니다."

"주인님, 역시 리리스와 떨어지긴 싫으신 거죠?"



근접 경호 특화 바이오로이드자, 경호대장을 맡은 리리스와, 같이 있으면 밥은 굶지 않을 것 같은 소완을 데리고 가기로 했다. 그렇게 수인 마을에서 받은 가죽 망토를 두른 우리 셋은 백작의 영지로 향하기 시작했다. 깊은 숲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자 인간이 닦은 듯한 비포장 도로들이 보였고, 좀더 걸어가자 포석 도로가 깔린 길이 펼쳐졌다. 그렇게 숲에서 점차, 인간의 손길이 닿는 영역으로 걸어가다 어느새, 보이는 것은 굳건한 성벽이 보였다.


저기가... 유라 백작의 영지인가?


드문드문 보이는 농가들, 한가롭게 농사를 짓는 농민들을 지난 우리는 성벽 안의 도시로 들어올 수 있었다. 중세 유럽을 연상케하는 붉은 지붕의 집들, 그리고 그 사이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자 소완은 신기하다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위화감이 드는 것 같사옵니다. 북적거리는 거리라니..."

"그러게..."

"..."



하지만 리리스의 표정은 그렇게 밝아보이지 않았다. 어렴풋, 나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영지의 번화가 상점에서 누더기 옷을 입은 채 짐을 나르는 사람들은 인간이 아닌, 동물의 귀를 가진 수인이 대부분이었다. 수인들을 모티프로 만들어진 컴페니언 시리즈의 리더이자, 자매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리리스에게는 불쾌한 광경이겠지.



"... 주인님."

"어, 왜 리리스?"

"멸망 전 바이오로이드가, 이렇게 혹사당했겠지요?"

"..."



짝-


그때, 날카로운 채찍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 수인 여자가 신음을 애써 참으며 일어서려 하고 있었다. 움찔, 순간적으로 리리스의 손이 블랙맘바에 향하는 것을 소완이 제지했다.



"리리스양. 부군의 계획을 망치지 않길 바라요."

"..."



리리스는 조용히 블랙맘바에서 손을 땠다. 하지만 망토 안에 숨긴 로자 아줄이 신경질을 내듯 낮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가까스로 리리스는 분을 삼킨 뒤, 우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정보를 찾을만한 곳을 찾다, 갑옷을 입은 사람과 모자와 망토를 쓴 사람들이 어떤 건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이 제법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보니, 얼추 정보를 얻을 수 있겠구나 싶어 그곳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치 판타지 만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철갑 갑옷을 입은 사람, 로브를 입은 사람, 그리고 도적의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단박에 이곳이 어딘지 유추할 수 있었다. 판타지 세계에서 자주 등장하는 '모험자 조합' 이었다. 우리들은 후드를 더욱 깊숙이 뒤집어 쓴 채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걸어갔다.


이 세계에서 통용될 법한 글씨들이 쓰여 있었다. 말은 통하지만 문자는 다른 경우라... 정보를 쉽사리 읽긴 힘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리리스가 귓속말로 내게 말했다.



"주인님... 글을 알아 보시겠어요? 리리스는 통 모르겠어요..."

"나도 잘 모르겠어. 아마 이 세계에서만 통용되는 글씨인 것 같아."

"골치 아픈 일이옵니다 부군."



소완도 뚫어져라 쳐다봤지만 역시나 글씨를 읽을 리가 없었다. 우리 셋은 외부 세계에서 이 세계로 전이된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렇게 멍하니 우리 셋은 알림판을 쳐다보던 그때였다. 별안간 우리의 등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아, 에? 예?"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접수원으로 보이는 한 여자가 우리의 뒤에 서 있었다. 재빨리 소완은 소매에 숨기고 있던 중식도를 꺼내려 했고, 리리스는 나의 앞에 서서 경계 자세를 취했다. 접수원은 유난히 경계를 하는 두 여자를 보자 황급히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으며 두 손을 들었다. 나는 둘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그러자 둘은 중식도와 블랙맘바에서 손을 떼어낼 수 있었다.



"미안합니다. 제 동료들이 워낙... 경계심이 많아서."

"아, 괜찮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혹시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네. 제가 그... 여기 써 있는 정보가 좀 필요한데."

"아, 의뢰공고 말씀하신건가요?"

"그, 의뢰... 아, 그게..."

"혹시 죄송하지만 모험자 증표를 가지고 계신가요?"

"아뇨. 가지고 있진 않아요."



증표? 뭐... 모험자 신분증, 이런 거 말인가?



"그럼 저희 조합 의뢰를 받으실 수 없으십니다. 조합에 가입하셔서 정식 등록 절차를 받으셔야 의뢰를 받으실 수 있으십니다.."

"... 아 그렇군요."



생각해보니, 나와 리리스, 그리고 소완이 가진 돈은 무일푼이었다. 혹시라도 의뢰를 받고 돈을 벌 수 있으면 장기간 이 도시에 있으며 정보를 모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리리스와 소완에게 귓속말로 대답했다.



"계획을 변경해야 할 것 같아. 리리스, 그리고 소완."

"에 주인님?"

"원래는 정보만 모으기로 했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우리가 알고 싶은 정보를 충분히 모으기 위해선 돈이 필요할 것 같아."

"... 돈, 말씀이시옵니까?"

"그래. 용병 같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건 어떨까? 여기 있는 사람들은 여러 곳을 여행하는 사람들이거든. 이 사람들이랑 교류하면서 정보를 알아가는 것도 좋은 것 같아."



언제까지 수인 마을과 도시를 돌아다니며 정보 수집을 할 순 없었다. 특히나 우리가 이 영지의 영주가 소유한 사병을 멋대로 죽인 걸 들키는 것도 언젠간 시간문제일 테고.



"주인님, 남아있는 다른 인원은 어떻게 할까요?"

"일단 수인 마을에 머물게 하면서 최대한 숨어야지. 숲에서 타이런트가 난리친 게 이 나라에선 여간 큰일이 아닌가 봐."



결국 소완과 리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초 계획에는 없던 일이었지만 생각해보면 오히려 더 나은 일이 될지도 몰랐다. 백작의 행동도 감시할 수 있으며, 무일푼인 우리에게 수입도 보장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모험가들과 어느 정도 정보 교류까지 가능하니,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왜 이세카이 라노벨 애들이 모험자를 하는 건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모험자 등록 계약을 마치고, 나와 소완, 그리고 리리스는 최하급 모험자의 증표인 아이언 메달을 받았다. 다행인 것은, 이 모험자 메달이 일종의 신용카드 역할을 하는 것인지 어느 정도의 외상을 허용해준다는 것이었다. 꼼짝 없이 노숙을 해야 하나 싶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모험자 조합을 나와, 조합의 하부 기관에서 운영하는 숙소를 찾아가 문을 열었다.



**



아이언 메달부터 실버 메달까지 투숙이 가능한 모험자 조합 하부 여관, [피그]. 음식값이 싸고 숙소가 저렴했지만 모험자와 도적의 언저리를 오가는 불량한 자들의 아지트이기도 했다. 오늘 의뢰를 마치고 돌아 온 실버 메달의 모험자 매라노는 동료들과 술을 마시며 여흥을 즐기고 있었다.



"이봐 매라노- 오늘 저녁에 뒷골목 좀 가지 않을 텐가?"

"좋지. 이번에 창관 물은 좀 좋나?"

"이번엔 제법 반반한 수인 년들을 잡아왔다 하더군- 이참에 매라노 자네가 아다를 떼주면 꽤 즐겁겠지?"

"좋지- 닳아버린 애들한테 쑤시는 것도 슬슬 질리더라고."



그때 낡은 문을 열며 누군가 들어왔다. 자연스레 매라노의 눈길은 세 사람에게 쏠렸다. 낡은 망토를 두른 세 사람은 초라한 행색이었다. 그는 맥주를 마시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 동료에게 물었다.



"이봐, 자네. 근데 따먹을 돈은 있나?"

"좀 아슬아슬하구만."

"자네. 그럼 저 모험자들한테 한탕 좀 뜯어내 볼까?"

"나쁘지 않지."



그렇게 매라노와 남자들은 낄낄거렸다. 딱 봐도 세상 물정 모르는 하급 모험자. 어리숙하게 덤터기를 쓴다면 창관에 갈 돈이 생길지도 몰랐다. 특히나 고양이 타입의 수인인 묘인족이 취향이었던 매라노는 꼬리를 잡아당긴 채 사정없이 묘인족의 보지를 쑤시는 상상을 했다. 침을 꿀꺽 삼킨 매라노의 자지가 팽팽하게 솟구치는 듯했다.



"후드를 벗고 메달들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주인이 성의없는 말로 묻자, 그들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뒤집어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저 얼치기 모험가에게 어떤 방식으로 돈을 뜯어낼까 고민을 하던 매라노와 동료들은 말을 잃고 말았다.




먼저 후드를 벗은 사람은 연보랏빛 장발에, 에메랄드 빛이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여자였다. 너저분한 후드를 입은 것과 다르게 마치, 어느 귀족의 조리사를 연상시키는 옷을 입고 있었다. 짧은 바지 같은 것을 입고 있었지만 아슬하게 가리는 앞치마, 그리고 그 아래에 농염한 허벅지를 가진 미녀였다.


저런 외모를 가진 여자를 겨우 요리사로 썩히고 있는 저 자의 정체가 궁금해질 정도. 여자는 자신의 목에 걸린 메달을 주인에게 보여주었다.



"이거면 되겠사옵니까?"



주인조차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의 외모를 빤히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매라노는 물론이고 이 숙소에 있는 모든 남자들의 숨이 막혀버렸다.





백은발의 장발을 휘날리는 호박색 눈동자의 여자. 물론 패션 센스는 검은색과 흰색을 제멋대로 조합한 괴상한 복장이었다. 하지만 얼굴과 몸매는 뭇 귀족의 영애들을 압살해버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단지 조금 흠이라면, 목과 양팔에 노예와 같은 구속구를 차고 있었다. 수인인가? 하지만 수인의 특징인 동물 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세 번째로 후드를 벗은 사람은, 더벅머리의 평범한 남자였다. 조금 특이하지만 어딘가 고결해보이는 옷차림을 보니, 어느 부유한 귀족의 아들인 것 같아 보였다.



"귀족... 인가?"

"매라노. 저게 어떻게 귀족이야? 귀족이 모험자 일을 한단 소리는 못 들었어."

"그게 아니라면 저 미녀들은 어떻게 설명할 거지? 딱 보아하니 말만 모험자지, 사실상 저 귀족 도련님의 밤시중을 드는 여자들 아니겠어?"

"그나저나 정말 아름다워... 한 번 저 여자가 내 허리 위에서 돌려주면 금화 30닢도 아깝지 않을 텐데..."



남자와 두 여자는 키를 받곤 2층 숙소로 가는 계단을 올라가려 했다. 그리고 매라노는 남자의 몸에 일부러 맥주잔을 대었다. 당연히 맥주잔이 엎어지고 끈적한 술이 매라노의 옷을 적셨다. 슬쩍 남자가 옆을 보자 매라노는 벌떡 일어서곤 자신의 근육을 자랑하듯 보여주며 위협했다.



"이봐 형씨, 실례지만 내일 몬스터 퇴치에 입고 나갈 옷이 젖었는데, 이거 어쩔 거야?"

"... 하아."



남자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매라노의 동료들도 앞을 가로막고 서더니 이죽거리며 두 여자를 끈적히 훑어가며 말했다.



"이게 얼마짜리 옷인줄 알아? 너 같은 아이언 메달 모험자가 꼬박 모아도 못 사는 옷이라고-"

"..."

"이봐 형씨. 돈이 없는 거야 설마?"

"..."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매라노와 동료들은 어느새, 슬쩍 두 요리사와 고급 노예로 보이는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린 후 남자에게 위협하듯 말을 이어갔다.



"특별히 넘어갈 수는 있지. 하룻동안 이 여자들을 빌려준다면 말이야-"

"워워, 이 요리사, 웃는 거 봐. 벌써부터 아랫도리가 뜨거워졌나? 물이 줄줄 흐르지? 응? 내가 생리 예방 포션을 놔줄 수."



그리고 그때였다. 구속구를 찬 백발의 노예가 어깨에 올린 매라노의 동료 손을 잡았다.



"주인님에 대한 적대행위로 간주해도 되겠습니까?"

"죽지 않을 만큼만 손 좀 봐줘. 리리스."

"네- 주인님."



구속구를 찬 백발의 노예, 리리스는 그대로 남자의 손을 비틀었다. 순식간에 갑주 째로 손이 비틀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악!"

"후후... 절 침대 위에서 가버리게 만들겠다던 분이 이런 거 하나 못 버텨서 어떡하시나?"



남자는 황급히 손을 빼려 했다. 하지만 마치 바위에 손이 끼인 듯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갑옷이 우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비명이 커져갔다. 



"아아악! 살려줘! 미안해! 잘못... 잘못... 으아아악!"

"어머♥ 비명이 매력적이네요-"



그리고 리리스는 순식간에 남 남자의 팔뚝을 반대 방향으로 꺾어버렸다. 관절의 반대 방향으로 꺾인 팔을 부여잡으며 매라노의 동료가 비명을 질렀다.



"이 씨발 노예년이! 내 동료를 팔 병신으로 만들어?"

"그만 두시지요."



그때였다. 가만히 이 상황을 보고 있던 요리사 여자가 담담하게 매라노에게 답했다. 매라노는 대답 대신 검을 뽑아 휘둘렀다. 하지만 요리사 여자, 소완은 매라노의 검을 가볍게, 검지와 중지로 잡았다. 나름 파티에서 전사를 담당하는 매라노였고 실버 메달의 여행자이기도 했지만...



"뭐, 뭐... 읏?"



단지 두 손가락으로 끼웠을 뿐인데 단단히 끼인 것처럼 검은 소완의 손가락에서 빠지지 않았다. 소완은 나른한 웃음을 지은 뒤 검을 잡은 두 손가락을 비틀었다. 매라노는 두 손으로 검을 부여 잡았지만 소완의 두 손가락에 질질 끌려가다시피 했고, 이내 검은 볼품 없이 구부러졌다. 매라노가 검을 떨어뜨렸고 동료는 완전히 꺾여진 팔을 부여잡으며 비명을 이어갔다.



"가도 되겠습니까?"

"히... 히익!"



두 여자를 거느린 남자의 질문에 매라노의 동료들은 모두 그들에게 비켜섰다. 상황이 종료되고 세 사람이 계단을 올라 숙소에 들어간 후, 모험자들이 웅성거렸다. 아이언 메달의 모험자 일행이 너무도 쉽게 실버 메달의 모험자들을 제압해버렸다. 모험자의 메달 색깔은 곧 모험자의 무력과 정비례했다. 몬스터 퇴치를 업으로 삼는 모험자들에게 있어 높은 색깔의 메달은 강함의 계급이었다.


매라노는 넋이 나간 듯 털썩 주저앉았다. 아까의 충돌 속에서 여유롭게 웃고 있었지만 소완은 어느새 다른 손에 식도를 든 채 그를 지긋이 응시하고 있었다.


소완은 그 검을 잡은 손과 팔을 통째로 잘라버리겠다는, 명백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



"주목 받기 싫었는데..."



라스트오리진에선 삼얀이라고 하며 낄낄거렸고, 나름 캐미가 좋아 애착가던 아이들이었는데, 같이 다니다보면 정말 시한폭탄을 발목에 차고 다니는 것만 같았다. 소완이야 그래도 적당히 선을 지켜주어서 고마웠지만 리리스는 아예 모험자 하나를 불구로 만들어놨으니...



"주인님... 죄송해요... 그냥 조금... 힘을 줬을 뿐인데..."

"인간과 바이오로이드의 근력은 다르다는 걸 모르시옵니까, 리리스양?"

"알고 있어요 소완씨!"

"후후... 리제양을 멍청이 스토커라고 폄하하시더니 상황 판단 못하시는 건 두분이 참으로 똑같사옵니다."



소완의 팩트폭격에 리리스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곤 비아냥거리듯 물었다.



"적어도 속이 음흉한 소완씨보단 멍청이가 되는게 낫겠지요. 주인님의 식사에 약이나 타는 그 졸렬한 인성."

"어머, 농으로 던진 말에 부들거리시다니. 옛날 생각이 나 제법 재밌사옵니다-"

"아냐. 소완도 잘했고, 리리스도 잘 했어. 둘다... 잘... 했어."



... 그냥, 이럴 거였으면 바르그랑 천아를 데려올 걸 그랬었다. 그렇게 중얼거리던 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리리스가 문을 열자 그곳에는 식사를 가져 온 수인 노예가 덜덜 떨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드. 드세요... 모험자님들..."



리리스가 음식들을 받아들자, 수인 노예는 바들거리더니 냅다 문을 닫고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때. 리리스의 눈에 무언가가 띄었는지, 그녀는 황급히 빠져나가려는 수인 노예를 불렀다.



"잠깐만요."

"네... 네, 네엣?!"

"... 궁금한 게 있었는데요."



리리스는 수인 노예를 빤히 보더니, 이내 가슴께 위에 그려진 진분홍 문양의 문신을 가리켰다. 수인은 수치스럽다는 듯 황급히 가리려 했지만 리리스의 눈빛에 결국 자포자기하듯 자신의 가슴께를 가리던 손을 내렸다.



"이게 뭐예요?"

"노... 노예인입니다."

"노예... 인이요?"

"네... 주인과 노예 사이에 계약하는 문신이에요. 노예인을 새긴 자는... 주인에게 복종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인장에 담긴 전기 속성 고문 마법을 받아요."

"주종... 관계네요?"



그런데 리리스는 뭔가 흥미가 돋았는지 내게 식사를 가져오지도 않은 채 그 노예인장에 대한 것을 묻기 시작했다.



"특별한... 관계... 주인과... 노예... 꽤 흥미롭네요...?"

"... 예? 흐, 흥미로우시다고요?"



리리스는 조용히 식사 쟁반을 내려놓은 뒤 수인 노예의 가슴께에 있는 진분홍 모양의 요사스러운 문신을 보자 무언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좀... 더... 특별한... 짜릿한...♥?"

"저기,리리스?"



리리스는 어느새 내가 부르는 것도 잊은 채 수인 노예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노예인 어디서 새길 수 있어요?"

"예? 그거야 노예상한테..."

"혹시, 노예가 아닌 사람은 못 새기나요?"

"그게... 새, 새길 수야 있지만... 굳이... 노예가 아닌 사람이 새기는..."

"비용이 많이 드나요?"

"그, 글쎄요... 자발적으로 하시는 분이 안 계셨어서 저도 잘은 모르겠어요..."

"후후... 됐어요. 식사 맛있게 할게요-"



그렇게 말한 리리스는 수인 노예를 내보냈다. 문을 조용히 닫은 뒤 고개를 돌려 행복한 미소를 띄운 채 내게 말했다.





"주인님, 모험자라는 일, 리리스는 정말- 해보고 싶어요♥"



리리스가


... 뭔가 이상한 쪽으로 관심이 생긴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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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리쮸도 서약반지 낀 애들만 있으니 자기만의 특별한 걸 해보고 싶지 그럼 그럼.


그나저나 판타지는 읽기만 했는데 처음 써보니까 생각보다 벅차네...


소완 삽화 출처(츠나마요): https://www.pixiv.net/users/5004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