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화


모음집


소완 씨와의 대화는,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시는 라비아타 씨가 제너레이터를 연결한 채 파지직거리는 대검을 들고 오시고는 그레고르 씨의 멱살을 잡고 질질 끌고 나가신 뒤에야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레고르 씨처럼 누군가가 접근했던 적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고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차 한잔을 소완 씨에게 건넸다. 싸구려 티백에서 우린 물건이라 반응이 시큰둥하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소완 씨는 차를 천천히 음미하시고는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셨다. 내 예상만큼 깐깐하진 않으신 건가? 아니면 콘스탄챠 씨가 차를 잘 타신 건가? 이유야 어쨌건, 소완 씨는 대화할 마음이 생기셨는지, 표정을 조금 푸시고는 입을 여셨다.

 

“그렇사옵니다. 인류의 멸망 이후로 제가 요리수행을 해 온 시절만 어언 80년. 새로운 재료나 조리법을 찾기 위해 세상을 이리저리 떠돌며 수많은 생존자 집단을 만났고, 그럴 때마다 합류를 요청받았사옵니다. 그 횟수는...짐작조차 어렵군요. 워낙에 많은 곳을 거쳐온지라.”

 

80년 동안 방랑이라니, 사실상 인류의 멸망 이후로 계속해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셨다는 의미다. 그 긴 세월 동안 정처도 없이 떠돌 수 있으시다니,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여러모로 비범하신 분이시다.

 

“허나 전 요리의 극을 추구하며 길을 떠나는 몸. 어느 한 군데에 정착할 뜻은 없었기에 항상 그 요청을 거절했지만, 에석하게도 그들은 포기라는 걸 할 줄 모르는 족속들이었기에, 각종 회유와 거짓말로 소첩을 끌어들이려 했사옵니다.”

 

“그리고 그 거짓말이라는 게 ‘마지막 인류가 있다’라는 거였고요?”

 

“그렇사옵니다. 자기들에게 마지막 인간이 있다며, 그 분이 깨어난다면 소첩의 실력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하였사옵니다. 처음 몇 번은 소첩도 속는 셈 치며 그들의 본거지로 발걸음을 돌려봤으나...그들이 말하는 ‘인류’라는 건 가동이 멈춘 지 10년은 족히 넘은 냉동 수면 장치에 잠들어 있는 산송장들이나 인류의 형상을 본떠 만든 조악한 모조품 같은 것들이 전부였사옵니다.”

 

마지막 대목에서 소완 씨의 표정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마치 기억하기 싫은 기억이 멋대로 떠오른 듯한 그 반응에, 나 역시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내 속마음을 알아차리신 듯, 콘스탄챠 씨가 옆에서 착잡한 표정으로 입을 여셨다.

 

“바이오로이드에게 인간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정신적인 영향을 주는 존재에요. 아마 처음에는 그저 정신적인 위안을 위해 그런 거짓말을 만들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이게 된 거겠죠...마치 광신도처럼.”

 

정신적으로 몰린 사람이 심리적 방어기제로 인해 현실을 부정하며 살아가는 일은 흔하다. 인간과 동일한 정신 구조를 가진 바이오로이드 역시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고장 난 냉동 수면 장치에 10년이 넘도록 방치된 신체나 사람의 형상을 본떠 만든 모조품이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어야 그런 상황까지 벌어지게 됐는지, 그 '사람'이라는 것들이 어떤 형태였을지는 상상조차 하기 싫다. 소완 씨는 그런 광경을 몇 번이나 보셨다는 말인가?

 

“아무튼, 그런 상황이 계속되다 보니, 소첩도 점점 남들의 이야기를 믿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옵니다. 특히 인류가 살아있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착잡해져가는 내 속과는 다르게, 소완 씨는 마치 일기장에 쓰인 사소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듯한 무덤덤한 말투로 말을 이으셨다.


"이번에 그 그레고르 사령관이라는 분과 마찰을 일으킨 것도 그 이유가 컸사옵니다. 물론, 인간의 뇌파가 느껴지긴 했사옵니다만, 그 외형이 너무나도 철충과 유사했던 터라, 그저 철충의 변종 내지는 또 다른 바이오로이드 집단이 만든 조악한 모조품이라 생각하여...”

 

“그건...그렇긴 하죠.”

 

아닌 게 아니라 그레고르 씨의 외형은 좀 심하게 인간이 범주를 벗어나긴 했다. 본체든, 슈트든. 그나마 슈트는 인간의 형상을 띄고 있긴 하지만, 철충을 사람 모양으로 억지로 구겨 넣은 형상에 군데군데 붉은 페인트까지 칠해진 모습은 누가 봐도 피칠갑을 한 신종 인간형 철충이라고밖에 볼 수 없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첩이 그분에게 무력을 휘두른 게 정당하다고 할 수는 없사옵니다. 외형은 평범하지 않을지언정 그분 역시 엄연한 오르카의 사령관이자 인간. 어떤 처분이건 달게 받겠사오니, 부디 저에 대한 처벌을-”

 

“아아, 아니에요! 그런 건 딱히 신경 안 쓴다고 해야 하나, 애초에 그레고르 씨도 요즘 들어서는 은근히 그런 취급을 즐기시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오랜만의 1대1 근접전이어서 재미있었어’라고 하시기도 했고...”

 

애초에 누군가한테 존경을 받는 것보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걸 즐기시는 분이다. 오히려 소완 씨가 처벌을 받으신다면 다른 대원들이 겁먹는다며 제일 강하게 반발하실 분 아닐까? 워낙 다른 대원들이랑 부대끼며 친구처럼 지내시는 걸 좋아하시니까.

 

“오히려 저희가 소완 씨를 극진히 대접해드려도 모자랄 마당에 억지로 묶어서 끌고 온 걸 사과드려야 할 판이죠. 아, 손목은 좀 괜찮으세요? 혹시 아직 쓰라리시면 의무실에서 치료를 받으시는 게...”

 

“괘념치 마시길. 밧줄에 묶인 수준의 가벼운 생채기 정도는 소첩에게 아무 문제도 되지 않사옵니다. 그보다...”

 

요리사가 손을 다친 게 별일이 아닐 리가 없다. 요리의 요자도 모르는 내도 아는 상식이다. 하지만 내가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도 전에, 소완 씨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시며 묘하게 고양된 목소리로 말을 이으셨다.

 

“소첩이 주인께 간청하고 싶은 바가 하나 있사온데, 들어주시겠사옵니까?”

 

“간청이요? 네, 괜찮긴 한데...뭐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신가요?”

 

“후후, 별건 아니옵니다. 그저...”

 

                                                                                                

 

“여어, 소완, 금방 다시 만나네.”

 

식료품 창고 한구석에서 요리 대회에 쓸 재료를 파악하던 중, 콘스탄챠와 함께 들어온 소완을 보며 살갑게 인사했다.

 

“다시 만나 반갑사옵니다, 그레고르 사령관님. 바닐라 양과 리제 양도 오랜만이군요.”

 

내 인사에 시원시원하게 화답하는 소완과는 다르게, 내 옆에 있던 바닐라와 리제는 불쾌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싸늘한 눈빛으로 소완을 노려보았다. 뭐, 어쩔 수 없지.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서로 죽일 기세로 맞붙었던 사이니까.

 

“프란츠한테 들었어. 요리 대회 준비, 같이 해준다면서?”

 

“어? 벌써 전해 들으신 건가요? 어떻게?”

 

“아니? 그냥 찍어본 건데? 그 반응을 보니 정답인 모양이네. 마침 잘 됐어. 이것 좀 봐볼래?”

 

콘스탄챠는 ‘그럼 그렇죠’라고 중얼거린 뒤, 소완과 함께 내 곁으로 와 눈앞에 쌓인 식자재들을 눈으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음, 역시 반응이 찰져. 내가 이래서 콘스탄챠를 놀리는 걸 못 끊는다니까?

 

창고 한 구석에는 동결건조된 채소, 염장된 채 캔에 담긴 고기, 분말 형태로 보관된 각종 조미료가 창고 한쪽에 줄줄이 나열되어 있었고, 저쪽 한구석에는 밀가루, 쌀, 옥수수가루 등이 담긴 포대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모두 요리 대회에 쓰기 위해 꺼내놓은 식재료들이었다.

 

“우와, 오르카에 식료품이 이렇게나 많았나요?”

 

예상외로 많은 물자량에 놀란 듯한 기색을 보이는 콘스탄챠와 상반되게, 소완은 진지한 눈빛으로 물품들을 둘러보더니 잠시 고민하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 좋아, 딱 내가 기대했던 반응이네,

 

“...채소류는 이것이 전부이옵니까?”

 

“응. 신선한 야채는 없다고 보는 게 좋을 거야. 애초에 여기에 농사를 지을 공간도 없거든. 그나마 수경재배가 가능한 일부 채소 정도는 마련할 수 있을지도?”

 

“아쉬울 따름이군요. 육류는 가공육이 대부분인데다가 그마저도 캔이고...조미료와 곡류도 빈약하기 그지없사옵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지적이다. 애초에 오르카에서 식량 문제는 완전히 탐색 인원들에게 맡겨놓은 상황이니까. 대원들이 배를 곯을 정도는 아니긴 해도, 그 가짓수나 품질에는 큰 기대를 하는 게 어려운 게 당연하다.

 

“흠...조금 빈약하다고는 생각하긴 했지. 이걸로 요리 대회를 진행하는 건 역시 무리려나?”

 

“물론이옵니다. 아무리 좋은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한들, 이런 재료들로는 기껏 해봐야 볶음밥이 한계이옵니다. 요리 대회가 볶음밥 대회가 되는 건 그레고르 사령관님도 원하지 않으시는 바 아닙니까?”

 

“뭐, 온종일 볶음밥만 시식하는 건 사양이긴 하지. 여기가 무슨 중화요리 전문점도 아니고.”

 

자, 여기가 중요한 부분이다. 내가 소완을 오르카에 어떻게든 데려오려고 했던 이유. 그 중 하나는 요리 대회의 평가단을 맡아 줄 사람이 필요해서였기도 했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급양 사정에 해결책을 제시해 줄 전문가가 필요해서이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서 소완이 깔끔한 해결책을 제시해주게 된다면, 내 예상은 완벽히 들어맞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뭐 뾰족한 수 없어?"


그런 생각을 하며 소완에게 질문을 던지자, 소완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5분 정도 고민을 한 끝에, 소완은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입을 열었다.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겠사오나...지금 당장은 떠오르는 게 없사오니, 며칠만 기다려주시겠사옵니까? 소첩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지라.”

 

흠...그래, 아무리 그래도 오자마자 해결책이 딱 떠오르길 기대하는 건 기대치가 너무 높은 감이 있긴 하지. 그래도 내 예상 치고는 나름 잘 들어맞은 셈이니, 일단은 좋은 신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 느긋하게 생각해. 어차피 아직 대회 시작까지는 2주 정도 남았으니까.”

 

“알겠사옵니다.”

 

소완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창고를 한번 슥 훑어보기 시작했다. 가끔씩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뭔갈 중얼거리는 그 뒷모습이 참으로 든든해 보였다.

 

“이야, 전문가가 있으니 훨씬 든든하네. 근데, 너 되게 적극적으로 한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서줄 줄은 몰랐거든.”

 

어떻게 보면 소완 입장에서는 강제로 끌려온 곳에서 반강제로 번거로운 업무를 떠맡게 된 셈일 텐데, 싫어하는 기색을 찾아볼 수가 없다. 애초에 우리가 싸우게 된 이유도 요리 대회의 심사 위원을 맡아달라고 했을 때 매몰차게 거절한 것 때문이었는데, 뭔가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건가?

 

“그야 당연한 일 아니겠사옵니까? 소첩은 항상 요리의 극을 추구하나, 그 극 역시 먹어줄 누군가가 없다면 한낮 허울에 불과하옵니다. 지금까지는 소첩이 음식을 대접할 누군가를 찾지 못하여 방랑을 이어나갔지만, 이제는 주인과 그레고르 사령관님을 만났사오니, 그 방랑 역시 멈출 때가 된 것이죠. 그렇다면 차라리 이 요리 대회를 기회 삼아, 두 분에게 소첩의 능력을 보여드리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뿌리 박을 거, 확실히 눈도장을 찍어두겠다는 건가? 본인의 말마따나, 소완은 이 상황에 쓸데없이 튕길 이유도 없고, 비협조적일 필요도 없다. 오히려 본인이 말한 대로, 이 기회에 최대한 본인의 능력을 보여 오르카 내에서의 입지를 단단히 다지는 게 현명한 판단일 것이다. 첫 만남 때의 인상도 좀 지울 겸 해서.

 

그건 그렇고, 목표와 속내를 저렇게 당당하고 직설적으로, 그것도 내 앞에서 말하다니, 대담하네. 솔직해서 마음에 든다.


“하, 저렇게 대놓고 얼굴에 철판 까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겠네.”

 

...뭐, 너무 솔직한 감은 없지 않아 있긴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리제와 바닐라가 혐오와 짜증이 뒤섞인 눈빛으로 소완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게, 이 둘은 소완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대치한 사이다. 서로에게 좋은 감정이 있는 게 더 이상할 사이인 것이다. 그런 마당에 낙하신 인사처럼 보이는 채용 과정을 거쳐 본인의 입지를 단단히 다지겠다는 야욕을 눈 앞에서 보인 상황이니, 바닐라와 리제한테는 화가 안 날래야 안 날수가 없는 상황일 것이다.


“어쩔 수 없죠. 상류층용 바이오로이드는 전체적으로 특이한 성격이 많은 편이니까요. 그렇다고 해도, 저희가 처음 붙은 뒤로 24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저렇게까지 사람이 변하는 건 좀 아니다 싶긴 하지만요.”

 

바닐라가 그렇게 말하며 소완에게 한 마디 던졌지만, 소완 역시 주눅이 드는 기색 하나 없이 바닐라를 조용히 응시했다. 아무래도 뭔가 맞받아칠 말을 생각하는 것 같은데...


“에이, 24시간은 고사하고, 나한테 말할 때만 태도가 싹 바뀌는 누군가도 여기 계시는데, 뭐. 딱히 이상할 것도 없-끄아아아악!!!”

 

이 이상 이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가 이어지는 건 위험하다 판단한 나는, 재빨리 바닐라의 말꼬리를 잡고는 늘 하듯이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그리고 그 대가는, 내 새끼발가락을 사뿐히 즈려밟는 바닐라의 체중 실린 구둣발과 통각 센서를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이었다. 이 정도면 싸게 뺀 편...인가?

 

“주인님? 제가 아무리 유능해도 돼지의 언어는 해석할 수 없습니다. 부디 사람의 말로 해주시겠습니까?”

 

발을 부여잡고 바닥에 웅크려 끙끙거리는 나를 보며. 바닐라는 한심하다는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그래. 이래야 우리 닐라 답지...그나저나, 어째 지난번보다 더 아픈데? 혹시 최근에 체중이 좀 늘-”

 

“...아직 덜 맞으신 모양이군요.”

 

어, 젠장. 아무래도 아픈 곳을 찌른 모양인데?

 

“어어어, 농담이야, 농담! 스톱! 스토오오옵!!!”

 

                                                                                                

 

그리고 그로부터 1주일 정도 지난 어느 날.

 

“흐음...아무리 생각해도 여기 있는 캔의 양이 전산 처리된 거랑 맞지 않는 거 같은데...다시 처음부터 세볼까?”

 

2시간째 식료품 창고의 물품을 세어보던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옆에서 이리저리 널브러진 캔들을 가지런히 쌓고 있던 리제와 바닐라가 질색하며 말했다.

 

“또요?”

 

“주인님, 이걸로 벌써 5번째입니다. 5번을 세서 5번 연속으로 285개가 나왔는데 도대체 뭐가 안 맞는다는 겁니까?”

 

“아니, 전산상에는 4개가 더 있어야 한다니까?”

 

아무리 내가 일자무식 근육뇌라고는 해도, 숫자는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285랑 289는 엄연히 다른 숫자다. 그러므로, 4개가 모자라는 건 명명백백한 사실이며, 이런 사실이 알려진 이상, 오르카의 사령관 비스무리한 내가 관여를 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럼 포티아 씨가 주방으로 몇 개 가져가시면서 수량 체크해두는 걸 까먹었나 보죠. 그냥 전산 오류인가보다 하시면 되는 걸 왜 그리 파헤치지 못해 안달이십니까? 솔직히 말하십쇼. 그냥 이거 핑계로 다른 서류 작업 빼고 싶으신 거 아닙니까?”

 

쳇, 역시 바닐라다. 눈치가 빨라. 서둘러 주제를 돌리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서류의 해일이 나를 덮칠 것이 틀림없다.

 

“에이, 무슨 말을 그렇게...그리고, 포티아는 전산 처리를 까먹는 애가 아니야. 봐봐, 여기 제대로 체크도 되어 있잖-”

 

“그레고르 사령관님, 여기 계시옵니까?”

 

내가 한창 세 치 혀를 놀리며 주제를 바꾸려고 하던 차에, 누군가가 창고 안으로 들어오며 내 이름을 불렀다. 소완이었다. 절묘한 타이밍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어, 여기 있어. 무슨 일이야?”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옵니다만...아마 그레고르 사령관님께서도 기뻐하실 자그마한 소식을 하나 들고 와 보았사옵니다. 요리 대회에 관해서 말이옵니다.”

 

소완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며칠간 소완과 일하면서 그녀의 성격에 대해 알아낸 점이 있다면, 본론을 꺼내기 전에 충분히 밑밥을 깔아두는 편을 좋아한다는 편이란 것이다. 이번에도 밑밥을 잔뜩 깔아두는 걸 보니 뭔가 중대한 발표를 할 생각인 거 같은데, 난 잔뜩 신이 난 사람에게 초를 치는 취향은 없으니 그냥 장단에 맞춰주기로 했다.

 

“작은 소식? 뭔데?”

 

“소첩이 며칠간 고민을 좀 해본 결과, 현재 상황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 같사옵니다.”

 

“뭐어?! 벌써? 대단한데?”

 

“후후, 소첩의 보잘것없는 재주를 좀 부려 보았을 뿐이옵니다,”

 

겸손한 태도와는 다르게 한껏 의기양양해진 소완을 바라보는 리제와 바닐라의 시선이 점차 싸해지는 게 느껴졌기에,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그 방법이라는 게 뭐야?”

 

“요리 대회에서 재료가 부족한 이유는 각 참가자가 최대한 많은 것을 선보이고 싶어 하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옵니다. 물론 그것이 올바르지 않다고는 하지 않겠사오나, 한정된 식자재를 가지고 대회를 진행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참으로 복잡한 문제이옵니다. 허나 이는 곧, 참가자들이 선보이는 요리의 개수를 조절하면 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사옵니다.”

 

“그럼 참가자당 선보일 수 있는 요리의 개수를 제한하자는 건가요? 그건 그리 좋은 해결책이 아닌 것 같은데요?”

 

“맞아. 주최 측의 사정이 있다고는 하지만, 요리하는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하고 싶어 하지 않겠어?”

 

소완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바닐라와 리제가 의견을 내자, 소완도 그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사옵니다. 참가자들의 자유를 제한하는 건 하책 중에서도 하책. 허나, 참가자들의 자유를 크게 제한하지 않으면서도 재료의 소모량을 줄이고, 종류는 늘리는 방법이 있사옵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소완은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뜸을 들였다.

 

“참가자들을 팀으로 꾸리는 것이옵니다. 바닐라 양, 리제 양.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사옵니다. 만일 두 분께서 팀을 이루어 그레고르 사령관님에게 진상할 요리를 만든다고 하면, 두 분은 같은 요리를 만들어 제출하시겠사옵니까?”

 

“그럴 리가.”

 

“어떻게든 메뉴가 안 겹치게 식단을 짜겠죠.”

 

“바로 그것이옵니다. 팀을 짜게 되면 자연스레 겹치는 메뉴가 줄어들게 될 터. 만일 두 분이 똑같이 볶음밥을 만들 생각이셨다 해도, 팀으로 엮이는 순간 한 분은 볶음밥이 아닌 다른 요리를 만들게 되실 것이옵니다. 이 방식이라면, 대회에서 한 가지 요리만 과하게 나오는 문제는 당연하고, 그로 인해 한 가지 식자재만 집중적으로 소모되는 일도 방지할 수 있사옵니다.”

 

“...게다가 팀을 만들어서 한 명은 메인 디쉬, 한 명은 사이드 디쉬를 담당하는 식으로 역할을 배분한다면 더욱 그럴싸한 요리도 기대할 수 있겠네. 머리 좀 굴렸네, 해충?”

 

흔치 않은 리제의 칭찬에 어깨에 더욱 힘이 들어간 소완은, 계속해서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했다.

 

“거기에 더해 소첩이 지난 요리 수행을 통해 알아낸 각종 요리법의 일부를 참가자들에게 전달해드린다면, 같은 재료로도 다양한 형태의 요리를 즐길 수 있을 것이옵니다.”

 

“흠, 나쁘지 않은 방법이네요. 그런데, 그런 식으로 대회를 진행한다고 한들, 결국 재료의 가짓수가 모자라면 전부 허사 아닌가요? 아무리 다양한 요리법을 사용한다고 해도, 캔에 담긴 가공 햄으로 산나물을 무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바닐라의 날카로운 지적에, 소완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아픈 점을 제대로 찝은 모양이다.

 

“...안 그래도, 그 문제 때문에 계속 골머리를 앓고 있사옵니다. 허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서...”

 

역시 거기까지는 무리인가. 아니, 여기까지 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일이다. 요리사인 소완으로서는 자신의 요리법을 공유할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큰 결심이었을 것이다. 이 이상 뭔갈 바라는 건 너무 도둑놈 심보겠지.

 

다행히, 그쪽 문제라면 내가 어떻게든 해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무튼, 이제 남은 문제는 재료의 종류가 모자란다는 거지? 그 문제라면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참말이옵니까?”

 

“어이쿠, 그렇게 기대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면 너무 부담스러워지는데? 그리 거창한 건 아니니까 너무 기대하면 좀 곤란하다? 리제? 닐라? 연장 챙겨.”

 

반신반의하며 나를 바라보는 소완의 눈빛을 뒤로 한 채 리제와 바닐라에게 지시를 내리자, 둘은 내가 미리 창고 한구석에 챙겨놓았던 짐들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결국 문제는 재료가 모자란다는 거잖아? 양은 상관없지만. 그렇다면 간단한 해결책이 있지. 어차피 대회 시작까지는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기도 하니...”

 

나는 그렇게 말하며 옆구리에 항상 끼고 다니는 가방으로 손을 뻗어 꼬깃꼬깃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주인님과 단둘이 산을 누비며 먹거리를 모은다니, 이것도 어떻게 보면 데이트...일까요? 후후후.”

 

밀짚모자와 청바지를 입고, 목장갑을 낀 손에는 식물 사전을 들고 있는 리제와,

 

“이 세상 어느 커플이 산나물을 캐면서 데이트를 한다는 겁니까. 차라지 저처럼 낚시를 한다면 모를까.”

 

낚싯대와 뜰채를 등에 메고, 통발과 아이스박스를 든 바닐라가 내 뒤에 떡하니 섰다. 그 모습을 본 소완의 표정에는 혼란이라는 감정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각자 필요한 걸 캐오면 되지. 안 그래?”

 

그렇게 말하며 가방에서 꺼낸 종이를 천천히 펼치자, ‘특별 개최! 식재료 사냥 콘테스트!’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인쇄된 포스터가 그 자태를 뽐냈다.

 

음...내가 디자인했지만 참 잘 뽑혔단 말이지, 이거. 특히 묘하게 싼 티가 나면서도 가독성은 그런대로 있는 점이 마음에 들어. 포스터 배경에 보노보노1)를 못 넣은 게 못내 아쉽긴 하지만.

 

“후후후...식재료가 필요하다고? 그래, 원한다면 얼마든지 주지. 잘 찾아보라고, 세상의 모든 식재료를 두고 왔으니까.2) 크으으...이 대사, 한번쯤은 쳐보고 싶었단 말이지.”

 

"스스로 재료를 사냥해서 요리한다니, 재미있겠네요. 운이 좋다면 희귀한 버섯이나 들짐승을 만날 지도? 덩치가 커지는 버섯이라던지3), 달을 삼키는 두꺼비라던지4)!"


“...주인님이 리제 양과 취미시간에 같이 뭘 하시는지 알 것 같군요.”


                                                                                                


패러디 목록


1) 디자인이 구린 PPT의 대명사로 불리는

이 PPT의 배경에 있는 캐릭터.


2) 만화 '원피스'의 등장인물 '골 D. 로저'의 명대사. 저 대사 하나로 원피스 스토리가 시작된다.


3) 게임 시리즈인 '마리오 시리즈'에서 단골로 나오는 아이템인 '슈퍼 버섯'


4) 만화 '토리코'에서 나오는 식재료인 'GOD'


기말고사가 끝나고 드디어 올리는 최신화


계속 써야지써야지 생각은 하는데 키보드에 손이 안 가는 내 행동력이 원망스럽다



그래도 기말 끝났으니 이제 좀 자주 올릴 수 있겠지?



...자주 올릴 수 있겠지?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