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라붕이 일행이 미국을 떠난 직후)


틱, 틱, 틱.


레모네이드 오메가는 검지손톱 끝으로 책상을 규칙적인 박자로 두드리고 있었다. 그 행동에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짜증나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하고있는 것 뿐이었다.


지금 그녀의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원인은 바로 그녀의 손아귀에 있어야 했을 두번째 인간이었다. 오르카호 사령관이 아닌 또다른 인간, 그 인간이 그녀의 영토인 북미 대륙 안에 들어왔었는데도 붙잡지 못하고 도망가는 것을 허용해버렸다. 


달칵. 비서인 유미가 그녀 앞에 커피잔을 내려놓자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멎었다. 유미를 한번 흘겨본 오메가가 손을 내저어 축객령을 내리자 유미는 눈치빠르게 허리를 한번 굽히고선 집무실 밖으로 사라졌다. 문이 닫히는 걸 본 오메가는 블랙 커피를 홀짝이면서 조금씩 분을 삭혔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떻게 그 두번째 인간을 잡아야 하나. 위치추적할 수단도 없고, 짐작가는 행선지도 없다. 가진 거라곤 배를 훔쳐 태평양으로 떠났다는 단편적인 정보 뿐. 


오메가의 세력만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한정돼있다. 그렇다면 다른 다섯 레모네이드한테도 정보를 공유해서 수색망을 넓힌다면...


"...아니, 그럴수는 없지."


살짝 인상을 찌푸린 오메가가 중얼거렸다. 두번씩이나 인간을 놓쳤다는 오점을 알린다는 건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남은 다섯 레모네이드들한테 털어놔봐야 결국 이 일을 맡을 레모네이드는 하나밖에 없다.


"그래... 어차피 바다에 있는 놈을 잡으려면 그 년한테 맡기는 게 제일 합리적이니까."


오메가는 홀로그램 자판을 두들겨 누군가한테 연락을 시도했고, 상대방은 금방 그 연락을 받았다.


[여어, 무슨 일이지? 회의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무슨 볼 일이 있길래 친히 전화하셨을까?]


전화를 받자마자 신랄하게 비꼬는 상대방의 태도에 곧장 오매가의 미간이 좁혀졌으나, 지금은 기싸움보다도 더 중요한 안건을 전달했어야 했기 때문에 가까스로 분노를 참을 수 있었다.


"쓸데없는 말은 집어치우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얼마 전에 제 관리 하에 있던 화물선 한 척이 탈주했습니다. 그 배를 찾는데에 협력하도록 하세요."


[고작 배 하나 찾는데 내 해군을 쓰겠다고? 대체 그 배에 뭐가 실려있길래 이리 안달이 난거지?]


"살아있는 인간입니다. 오르카호의 사령관이 아닌, 또다른 인간."


[호오...]


카메라가 꺼져있어 상대방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목소리 톤으로 보아 흥미를 끄는 데 성공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세히 말해봐.]


그들의 통화가 끝난 후, 레모네이드 감마의 해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배는 한반도를 떠나 스발바르 제도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최대한 빨리 도착해야 했기 때문에 베링 해협을 통해서 가기로 결정했다. 가는 길에 펙스의 눈에 띄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배 위에선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까.


지금 난 아침이 밝았음에도 선실의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면서 백수 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그래도 어디 갇혀서 아무것도 안하고 앉아있거나 누워있을 때랑은 천지차이다 ...그보다 이러고 있어도 되는건가? 할 일 아무것도 없나? 


사령관새끼는 오르카호가 잠항하는 동안에도 뭔가 업무를 했을텐데, 여긴 업무라고 할 만한 게 없다. 라오에서 스테이지에 안나가고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더라. 제조같은 건 시설이 없어서 못하니까... 기지 시설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오르카호처럼 여길 아예 작정하고 거점으로 개조하는 거지. 아 근데 개조할 수 있는 인원이 포츈이랑 그렘린 뿐인데다 그 포츈은 배 모느라 바쁘구나. 그렘린 한 명한테 시키기도 미안하고. 지금 그렘린은 애들 장비 수리해주고 있다고 했던가.


그럼 다른 애들은 뭐하고 있을까.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침대 옆에 의자 하나 두고 앉아있는 이그니스가 무슨 책을 읽고있는 게 보였다. 


북한에선 쉐이드를 데리고오기 위해 억지로 몸을 움직였지만 원래는 아직 총상을 회복해야 하는 기간이라면서 최소 한 명은 간호를 위해 내 곁에 남기로 했다, 그렇게 내 간호를 담당하게 된 게 남 돌보는 데 적합한 이들 중 한 명인 이그니스였다.


"저기, 이그니스."


"아, 네. 부르셨나요?"


이그니스가 책에서 시선을 떼고 날 바라봤다.


"뭐 읽고 있어?"


"이 책이요? 포츈 양한테 빌려온 대형 선박 조종 메뉴얼입니다."


"...그걸 왜 읽고 있어?"


"그야... 이 배엔 읽을만한 책이 이런거 밖에 없어든요. 문자 그대로..."


음. 확실히... 여긴 놀거리가 하나도 없다. 포츈이랑 트리아이나는 용케도 이런 환경에서 수십년간 버텨왔구나.


"심심하신가요?"


이번엔 이그니스가 책을 덮고선 물었다.


"심심하네.

...물론 아무 일도 안일어나고 목적지에 도착하는 게 제일이긴 하지만."


일어날법한 일은 뭐가 있을까. 역시 용의 무적함대와 조우하게 되는 거겠지. 아님 감마의 함대라거나. 하긴 뭐든 만나게된다면 아군일 리는 없으니 적일 수 밖에 없구나. 오르카에도 펙스에도 소속되지 않은 배가 있을 가능성은... 야생의 머메이드같은 경우도 있으니 0%는 아닌가? 엠피시아 자매는 지금쯤 용한테 구조되어 오르카호에 합류했겠지만 멜리테랑 갈라테아는 아직이지. 그래봤자 이 망망대해에서 걔들이랑 마주칠 확률은 터무니없이 낮을테지만.


오르카 세력과 마주칠 경우 나하고 좌우좌만 숨는다면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지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걔들은 억지로 바이오로이드를 따르도록 강요하진 않으니까. 하지만 상대가 펙스라면...


"그러고보니 이그니스. 넌 감마 밑에서 복원됐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너희 이그니스들은 레모네이드의 명령권 밖이었고, 인간을 찾기위해 펙스를 따르는 것을 거절하자 감마는 분노했으면서도 전력감소를 우려해서 떠나는 걸 보고만 있었다고 들었는데, 맞아?"


"...어디서 그런 소리를 들으셨습니까?"


"어? ...아냐?"


이그니스가 어이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분명 이그니스 공식설정이 이거였을텐데? 금새 낯빛이 어두워진 이그니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희 자매들이 합류 거절 의사를 밝히자 분노한 감마 양은 저희들을... 몰살하려고 했었습니다. 화염방사병 부대로 쓰려고 대량으로 제조됐었는데, 그 백여 명의 자매가 살해당할 동안 열 명 채 안되는 자매들만이 도망치는 데 성공했었죠. 그마저도 뿔뿔이 흩어져서 다른 자매들은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지만요..."


뜻밖의 무거운 이야기를 들었다. 생각해보니 감마 그 또라이년은 8지에서 용과 싸울때 핸디캡이랍시고 자기편 전함 여러대를 격침시켰었다, 전함 한 대만 해도 가격이 수천억 원은 될텐데. 감마는 분명히 손익을 재는 성격이 아니다. 지 꼴리는 대로 행동하는 년이지. 내가 알고있던 초기설정처럼 이그니스가 나가려는 걸 곱게 보내줬을 것 같지가 않다.


"미안... 안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했네."


"괜찮습니다. 그보다 그걸 물어본다는 건... 감마 양과 마주칠 가능성을 걱정하시는 겁니까?"


"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반드시 도망쳐야 합니다. 감마 양은 대화가 안통하는 극도로 위험한 인물입니다. 그녀가 이끄는 군대는 두말할 것도 없고요. 대장님을 발견한다면 수단방법 가리지않고 잡으려들겁니다."


이그니스가 나한테 얼굴을 들이대면서 신신당부했다. 얘가 이렇게 인상 쓴 건 처음 본 거 같다.


"...알았으니까 좀 떨어져."


내가 훠이훠이 손짓하자 이그니스는 순순히 멀어졌다. 그동안 체감 못했었는데, 보기보다 감마한테 한이 많이 맺혔나보다.


"실례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 넓은 바다에서 펙스의 배와 마주칠 리는..."


그 때였다.


[대장! 지금 당장 조종실로 와줘! 비상상황이거든!?]


선내방송으로 포츈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상황파악을 위한 잠깐의 정적, 그리고 미칠듯이 치솟는 불안감. 


"설마..."


나와 이그니스는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조종실을 향해 달려갔다.


***


"포츈!"


조종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자 포츈이 눈에서 망원경을 떼고 홱 돌아봤다.


"아, 대장! 지금 진짜 큰일났거든? 저것 좀 봐봐!"


포츈은 내가 온 걸 확인하자마자 망원경을 건네주며 팔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앞유리 너머로 안개 낀 바다가 보였다. 안개라고 해봤자 저 멀리있는 수평선을 뿌옇게 가릴 정도여서 시야 확보에 크게 방해가 되진 않았다. 그런데 그 정중앙에, 그림자가, 배의 그림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저거 설마... 배야?"


"맞아. 자세한 식별은 안되지만... 아무래도 적이겠지? 일단 배를 세우긴 했는데, 어떡할까? 상대는 우릴 발견 못한건지 아직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어."


망할, 말이 씨가 된다더니...진짜로 이렇게 되는 거냐고. 도망쳐야 하나? 아님 싸워봐? 하다못해 제발 펙스만 아니여라.


하지만 정말 재수없게도, 쓸 일 없을거라 생각됐던 통신장비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내 기대를 산산조각 내주었다.


[미확인 선박은 들어라. 여긴 포세이돈 기함 어나이얼레이터 호다. 너흰 지금 포세이돈의 영해에 들어와있다. 신원을 밝혀라, 그렇지 않으면 군사적 대응조치를 시행할 것이다.]


"어나이얼레이터라면...!"


이그니스가 눈을 부릅 떴다. 그녀뿐만 아니라 나도 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다. 어나이얼레이터, 포세이돈 인더스트리가 만들어낸 최강의 군함. 그리고 거기 타고있는 것은 분명...


"...레모네이드 감마."


시발... 시발 진짜...!


왜 하필 다른놈도 아니고 감마년이 튀어나오는 건데!? 곧 9지잖아! 미국에서 놀고 있던가!! 저 멀리있던 배가 점점 앞으로 다가오니 군함같은 형체가 보였다. 진짜 어나이얼레이터인가보다 좆됐다.

그보다 방금 그게 감마 목소리야? 생각했던거랑 좀 다른데?


"이그니스, 설마 방금 그게 감마야?"


"아뇨. 그 목소리는 분명... 그녀의 부관인 카리나 양입니다."


아 아니구나. 어쩐지 단어 사이사이에 지성이 느껴지더라.

...그런데 카리나? 감마의 부관이라고? 걔 부관이 카리나란 애였어? 게임에선 직접 등장한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부관이 말한 거라면 감마 본인은 안타고 있을 가능성도 있는건가?


포츈이 어떡하면 좋냐는 눈빛을 보내자 나는 뭐든 변명하라고 말했다.


[미확인 선박. 지금 내 말을 무시하는-]


"여, 여긴 레모네이드 오메가 휘하 화물선의 선장 포츈입니다."


다시 통신장비에서 응답을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리자 포츈이 이판사판으로 마이크 버튼을 누르고 입을 열었다.


[어디... 그렇군. 평소 다니던 항로에서 이탈한 모양인데, 이유가 뭔가?]


"저흰, 오메가님의 명령으로 어떤 화물을 가지러 아시아에 들렸다가 미국으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그 화물이란 게 뭐지?]


"그것까지 알려줄 의무는 없습니다."


포츈이 말하는 중간중간 내 눈치를 살피면서도 침착하게 변명을 이어나갔다. 포츈의 대답을 다 들은 카리나는 잠깐동안 침묵하다가 답을 내놓았다.


[...알았다. 지나가도 좋다. 그대로 항로를 유지하도록.]


통신이 종료되고, 포츈은 고개를 푹 숙이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들키는 줄 알았어... 어떻게 잘 둘러댄 것 같으니, 이대로 지나가면 될 것 같거든?"


"좋아, 조용히 지나가도록 하자. 최대한 캥기는 게 없는 척 해야돼."


"하지만... 으음..."


이그니스는 뭔가 석연찮은 표정이었지만 반론을 제시하진 않았다. 포츈이 선내방송으로 상황을 설명하고, 곧 포세이돈의 배를 지나칠테니 모두 선내에 숨어있되 혹시모를 사태를 대비해 무장한 채로 대기하고 있으라고 말했다. 배가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괜찮을 거야. 우리 저번에 러시아에서 감마의 기지에 들어갔을 때도 잘 속여서 넘어갔었잖아."


"그 때는 상대가 낮은 지능의 AGS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요...! 카리나 양은 바이오로이드, 그것도 포세이돈 함대의 부함장을 맡을 정도로 머리가 비상한 여자입니다. 배에 가까이 갔다가 대뜸 짐검사를 하겠다며 붙잡거나, 수상하다며 대포 한 번이라도 쐈다간..."


...사실 나도 불안하다. 엄청. 근데 마주친 이상 다른 선택지는 싸운다 아니면 도망친다인데 둘 다 성공확률이 낮으니까. 애초에 이건 화물선이라 자체적인 무장도 없어서 싸운다면 백병전밖에 못하고... 그런 생각을 하던 중 트리아이나가 조종실로 들이닥쳤다.


"캡틴! 아, 대장도 있네. 아, 아니지.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포세이돈이라니!"


"말한 그대로야. 그래도 배 한 척밖에 없으니까,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지나가면 될..."


"한 척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아까 갑판에서 보니 엄청 많이 있던데! 함대라고! 정말 저 사이를 지나가는 거야!?"


"뭐?"


나와 포츈, 이그니스는 동시에 앞유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시간이 지나며 안개가 조금 걷혀서인지, 저쪽이 이리로 다가오면서 안개 밖으로 나와서인지, 아까보다 더 많은 수의 배가 줄지어 수평선을 매우고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모든 배들은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뱃머리뿐만이 아니라, 함포까지 말이다. 나는 천천히 눈에서 망원경을 뗐다.


"유턴해..."


"으, 응?"


"유턴하세요! 당장!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그니스가 내 명령을 복창하자 포츈은 급박하게 조타륜을 붙잡고 최대한 오른쪽으로 꺾었다. 선체가 기울어질 정도로 급커브를 돌면서 앞유리 너머의 풍경이 탁 트인 바다로 바뀌었다. 스발바르 제도고 뭐고 더는 중요하지 않게 됐다. 


여기서 도망쳐야만 한다.


***


"타깃이 우현으로 급선회하기 시작했습니다."


카리나가 저 멀리서 유턴중인 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머리에 한 쌍의 뿔을 연상케 하는 장비를 쓴 백발의 여성이 그녀를 지나쳐 앞으로 걸어나왔다.


"완전히 바보는 아니로군. 이래야 잡을 맛이 나지."


레모네이드 감마가 씩 웃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전속항진. 놈들한테 포세이돈의 함포 맛 좀 보여줘. 아직 수장시키진 말고."


"알겠습니다."


자잘한 준비는 이미 끝내놨었다. 상정한 상황 중 하나였으니까. 카리나는 마이크를 잡고 선내방송을 켰다. 그리고 딱 한 마디만 했다.


"발포하라."


그녀의 지시에 무수한 함포가 불을 뿜었다.


***


배를 돌리던 도중 포세이돈 군함에서 발사된 포탄에 갑판 위에 있던 컨테이너 몇개가 꿰뚫리고 밀려나면서 바다에 빠졌다. 심지어 딱 하나 있던 토미 워커까지 한 방에 파괴되었다.


배가 180도 다 돌아서 달아나기 시작하니 뒤에서 대포를 펑펑 쏘면서 우릴 뒤쫓아오고 있다. 배 바로 옆에 포탄이 떨어지면서 물기둥이 솟구칠 때마다 심장이 벌렁거린다. 체급차이 고려 안하냐고 나쁜새끼들아, 오르카나 괴롭히러 가던가.

그래도 거리가 멀어서인지 선체가 직접 대포에 맞지는-


'쿠웅-!'


배가 흔들렸다.


"...방금 맞은거야!?"


아니 진짜로 맞췄다고? 저기요 시발 여기 연약한 인간이 타고있거든요! 왜 안봐주는건데!!


"괜찮아! 아직 움직이는 데엔 문제없거든?"


"포츈, 따돌릴 수 있겠어!?"


"이 배는 수송선이거든!? 화물을 다 버려도 속력이 30노트를 넘기지 못해! 군함을 상대로 도망치긴 힘들어!"


"적어도 화물 다 버리면 지금보다는 빨라지는 거지?"


나는 마이크 버튼을 누르고 선내방송을 켰다.


"모두 주목! 화물을 모두 버린다! 갑판에 있는 컨테이너 전부 다 바다에 빠뜨려버려!"


선내의 웅성거림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그니스와 트리아이나가 돕겠다면서 조종실을 뛰쳐나가자 얼마 안있어 애들이 갑판으로 우르르 몰려나오는 게 보였다. 비교적 힘이 약한 애들은 컨테이너 고정 장치를 풀고, 힘이 센 애들은 컨테이너를 밀어서 하나씩 바다에 빠뜨렸다. 뿐만 아니라 컨테이너를 고정시키는 데 사용됐던 철골 구조물도 네오딤이 초능력으로 철거하고 있었다.


저 짐들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모두가, 심지어 어린 애들까지 마다하지 않고 이 궃은 일에 참여하는 모습에 고마움을 느끼는 동시에, 갑판에 나와있는 애들이 포탄에 맞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머릿속에 맴돌고 있다.


내가 그런 걱정을 할 때가 아니란 걸 깨달은 건 그 직후였다.


'퍼엉!!'


뒤에서 날아온 포탄이 함교를 관통했다, 이 조종실을 포함해서. 방에 앞뒤로 구멍이 뚫리면서 눈 깜짝할 새 난장판이 됐으나 다행히도 나와 포츈은 충격파에 넘어지기만 했을 뿐 크게 다치진 않았다. 근데 심장 멎는 줄 알았다. 진짜로.


뒤에 생긴 구멍으로 조금 전보다 더 가까워진 함대가 보였고,


"주인님!!"


앞에 생긴 구멍에선 레아와 네오딤이 날아서 올라온 게 보였다. 그 와중에 네오딤은 금속 구체는 놔두고 몸만 날아왔다. 레아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내 어깨를 콱 붙잡았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의식은 멀쩡하신가요? 저 알아보시겠어요!?"


"레, 레아, 진정해. 괜찮아, 우린 무사해."


"대장, 아파? 머리에 피 나."


네오딤의 말에 이마에 손을 대자 따듯한 액체가 주륵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그 느낌을 더듬어 손을 조금씩 올리자 따끔한 부분에 도달했다. 상처를 인식하고 나서야 통증이 나오기 시작했다.


"...걱정 안해도 돼. 파편에 스친 것 뿐이야."


스친 게 아니라 직격했다면 죽었을테니까, 라는 말은 안했다. 할 수 없었다. 지금 레아가 짓고있는, 살의가 넘쳐흐르는 싸늘한 표정이 눈에 들어오자 나도 모르게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마치 눈앞의 레아가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저 얼굴, 그래, 완전히 티타니아의 얼굴이다. 심해의 색처럼 초점이 사라진 그녀의 눈이 향한 곳은 우릴 뒤쫓고있는 포세이돈의 함대였다.


내 시선을 의식한 레아가 나를 보며 방긋 웃었다. 그러나 눈은 여전히 죽어있었다.


"걱정마세요 주인님. 감히 주인님의 정원을 더럽히는 해충들은, 전부 제가 구제할테니까요."


내 어깨에서 손을 뗀 레아가 만세하듯 양 팔을 들자 한 쌍의 페어리 드론이 하늘 위로 올라갔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먹구름 속에서 천둥이 쿠릉거렸다.


"저기 있지, 모든 배에는 파뢰침이 기본으로 달려있거든? 그래서 번개는 큰 효과가 없을 것 같...!"


조종간을 짚고 일어선 포츈이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또다시 수많은 포탄과 미사일이 이리로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인상을 쓴 네오딤이 손바닥을 펼치자 포탄들이 배에 닿기 직전 허공에서 멈추더니, 같은 극의 자석끼리 밀어내는 것마냥 일제히 네오딤의 반대방향으로 날아갔다. 포츈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네오딤과 함대를 향해 날아가는 포탄을 번갈아봤다.


"괜찮아. 나도 여기 있어."


자기 공격에 고스란히 당한 포세이돈의 배에서 펑펑 폭발이 일어나더니 그 중 몇 척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그 자리에서 정지했다.



"정말 잘했어요 네오딤. 언니가 칭찬해줄게요. 하지만 아직도 주인님을 노리는 해충이 남아있나 보네요."


레아는 계속 힘을 모으고 있었다. 바람이 더 강해졌다.


"응... 대장을 아프게 했어. 용서못해."


네오딤의 주변에 보랏빛 기류가 일렁이더니 사방에서 금속이 덜덜 떨리는 소리가 났다. 


"싸... 싸우려고?"


"죽일거에요."

"죽일거야."


둘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동시에 대답했다. 그들은 무력하지 않다. 그들이 나를 위해 화내주고 있다. 그렇다면 나도 호응해줘야겠지.


"...한번 해보자."



화났어요.


사실 작품에 창작 바이오로이드 넣는건 별로 안좋아하는데... 여기서 감마 부관을 등장시켜야겠는데 계속 이름없는 엑스트라인채로 출연시키기도 뭐해서 적당히 카리나란 캐릭터 만들어서 집어넣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