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리마토르가 질문을 권했으나 이번에도 물음을 던지는 이는 없었다. 청중을 향한 눈길을 강의 교안으로 옮긴 그는 잠시 끊겼던 강의를 다시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기술 인본주의를 통해 구 인류 사회가 왜 멸망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저는 철학적 고찰의 결여와 기술 인본주의의 근본적인 한계를 가장 큰 멸망 원인으로 꼽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전자(前者)가 구 인류의 멸망에 있어 차지하는 지분이 더 큽니다. 제 밥벌이와 관련된 주제이기 때문이죠.”

 

무거운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그가 농담으로 분위기를 희석하자 청중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나왔다. 웃는 이들과 달리 고된 연구 과정을 알고 있는 하르페이아는 차마 순수한 웃음을 터뜨리지 못했다. 그녀가 마지못해 짓는 쓴 웃음으로 그를 바라보자 리마토르는 강의를 속행했다.

 

“구 인류에게 없었던 철학적 고찰은 무엇이었을까요? 자기 반성, 기술 윤리 등 다양한 답이 나올 수 있지만 저는 앞에서 이미 힌트를 드렸습니다. 바로 ‘바이오로이드의 존재’에 대한 고찰이죠. 인간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인 인격체를 다루면서도 그 존재의 무거움을 제대로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철학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분과를 꼽으면 십중팔구 형이상학을 꼽을 겁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은 수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죠. 자기 자신을 탐구하는 일은 혼란스러운 시기에 더욱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찾아야 외부의 파란(波瀾)에도 길을 잃지 않고 자신의 뜻을 관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사례를 들자면 자연주의가 득세하며 형이상학을 포함한 철학 전반에 그림자가 드리우던 20세기 초반, 에드문트 후설이 현상학을 제시하며 ‘지금은 철학의 위기다’라고 말한 게 있습니다.”

 

리마토르는 기억을 더듬어 과거의 페이지를 들추었다. 자신이 무얼 해야 하는지 알려주었던 먼 옛날의 스승이 전해준 말을 지금의 자신이 말하는 스스로를 보며, 그는 자신이 바라보았던 성 교수의 자리에 이제는 자신이 있음을 체감했다.

 

“저는 구 인류가 멸망한 원인을 분석하며 한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바로 우리 세대는 과거를 거울로 삼아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구 인류가 하지 않은 바이오로이드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시도했고, 오랜 시간을 들인 끝에 마침내 해체주의를 통해 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자, 길고 지루한 제 연구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해체주의라는 사상이 무엇인지 알아야겠죠. 해체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푸코, 데리다, 들뢰즈로 이어지는 철학 계보를 가볍게 짚고 가보겠습니다.”

 

화면으로 리마토르의 강의를 듣던 사령관은 그의 말을 듣고 일순간 모골이 송연해졌다. 어떤 주장을 꺼내서가 아니라, 교수인 그의 입에서 나온 ‘가볍게’라는 단어가 대단히 반어법적인 사용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사령관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런 느낌을 받았다. 미리 강의 과정을 전달받은 하르페이아도 난데없이 추가된 푸코와 들뢰즈에 대한 설명이 있으리라는 말에 당황한 표정으로 리마토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당혹스러움을 전달하기에 충분한 수단이었으나, 리마토르는 그저 싱긋 웃어주는 걸로 모든 답을 대신하고 능숙하게 강의를 시작했다.

 

“먼저 미셸 푸코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미셸 푸코는 현대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력이 사회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연구한 푸코의 철학은 리가 세계로부터 통제받고 있다는 구조주의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재미있게도 정작 푸코 본인은 구조주의자라고 불리는 걸 거부했지만 말이죠.

 

푸코는 1926년 프랑스의 푸아티에라는 지역에서 의과대학 해부학 교수의 장남으로 태어납니다. 소위 말하는 부잣집 도련님이었죠. 푸코의 아버지는 장남이 자신처럼 의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푸코는 아버지의 뜻과 정반대에 서 있는 철학과로 진학합니다. 재수 끝에 장폴 사르트르, 시몬 보부아르 등 걸출한 철학자들을 배출한 프랑스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한 푸코는 인생에서 가장 불안정한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왜 그랬을까요?”

 

잠시 맥을 끊고 질문이 던져지자 듣는 이들은 하나 둘 답으로 받아쳤다. 천재는 고독한 법이다, 부잣집 도련님으로 살아서 사회성이 떨어졌다,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전공의 맛을 보니 회의감이 들었다 등 다양한 답변이 텃밭에서 두더지가 튀어나오듯 툭툭 튀어나왔다. 일방적인 전달에서 쌍방 소통으로 바뀐 분위기를 보며 리마토르는 만족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좋은 접근입니다. 아까 질문할 때 이렇게 많이 해주셨으면 더욱 좋았을 텐데 말이죠.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프랑스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한 푸코는 다른 사람과 겉돌고 자주 충돌했으며, 심지어는 몇 번의 자살 시도까지 합니다. 그 이유는 푸코 본인이 동성애자였기 때문이었죠.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동성애자가 살기에 정말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주변에서 쏟아지는 눈초리와 내면에서 오는 수많은 괴로움에 맞서면서도 푸코는 25살의 나이에 교수자격시험에 합격합니다. 그렇게 젊은 나이에 심리학을 가르치게 되죠. 이 시기의 경험은 훗날 푸코의 철학이 싹을 틔우는 거름이 됩니다.

 

조교 일을 계속하며 석사 학위를 취득한 푸코는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자 해외로 자리를 옮깁니다. 스웨덴과 폴란드를 돌며 프랑스 문화원장 일과 박사학위 과정을 병행한 푸코는 마침내 1961년 박사학위를 취득합니다. 이때 제출된 박사학위 논문은 지도교수들이 지도 과정에서부터 격찬을 아끼지 않았고, 심사위원들과 격렬한 토론이 오갔음에도 매우 우수 등급을 받았죠. 이 논문이 바로 푸코의 전기 사상을 대표하는 <광기의 역사>입니다.

 

이런 경구가 있죠. ‘광기, 내 오랜 친구여’. 이 말이 보통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지 않는다는 점만 보아도 광기는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를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사례가 광인을 가리켜 비정상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그런데 생각해봅시다. 지금에 이르러 우리가 천재라고 추앙하는 이들은 당시에 광인으로 불린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예시가 철학계에서는 쇼펜하우어와 니체, 예술계에서는 빈센트 반 고흐죠. 이들은 비정상으로 취급되었지만 지금은 말도 안 되게 뛰어났던 인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럼 이들이 정상이었던 걸까요?”

 

리마토르는 다시 문제를 던졌다. 아까보다 명백히 난이도가 올라가서 그런지 이번에는 선뜻 답을 하려는 이가 없었다. 답변자가 없는 걸 확인한 리마토르가 말문을 열려고 하자 고민에 잠겨있던 하르페이아가 손을 들었다.

 

“정상의 기준이라는 게 상대적인 것 같아요. 전체적인 맥락에서 파악했을 때 혼자 벗어나있으면 비정상, 맥락에 부합하면 정상이라 여겨진다고 생각합니다.”

 

“오, 좋습니다. 푸코와 비슷한 결의 답변을 했군요, 하르페이아 조교. 모두 박수 한 번만 부탁드립니다!”

 

박수 세례가 강의실을 가득 채우자 하르페이아는 부끄러웠는지 볼을 살짝 붉혔다. 훌륭한 접근이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은 리마토르는 다시 해설에 착수했다.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지적한 내용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은 지극히 자의적이다. 모든 사회는 사람들을 정상인과 비정상인, 문명인과 야만인, 합리적 인간과 비합리적인 인간으로 구별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구별이 자명한 것처럼 생각하죠. 제가 앞에서 푸코는 동성애자였다고 언급했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이성애자는 정상으로 인정되고 동성애자는 비정상으로 치부됩니다.

 

하지만 생각해봅시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이 뭘까요? 문명인과 야만인,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는 그들의 속성 그 자체로 정상과 비정상이 판별되는 건가요? 파란 구슬과 빨간 구슬 중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가요? 푸코는 이렇게 사람을 정상인과 비정상인으로 구분하면서 차별하는 것에 근본적인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자살시도까지 했던 푸코는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구별이 극히 인위적이고 자의적인 구별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푸코는 전통적으로 광기는 창의성의 한 갈래로 여겨졌다고 말합니다. 르네상스 시기에 광기는 예술의 기반으로 여겨졌지만, 근대에 접어들고 이성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퍼지면서 광기는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점차 비정상적인 이를 사회에서 격리하는 데 집중하게 되었죠. 이게 푸코가 제시한 정신병원의 출발입니다. 필요한 이는 교화라는 방법을 통해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의 범주에 맞추는 식으로 광기를 배제하게 된 시대의 흐름은 이성과 광기의 대화가 단절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를 가리켜 푸코는 정신의학의 발달 하에 광인들이 철저하게 비이성적이고 비정상적인 인간으로 간주되어왔으며, 이로 인해 광인들은 항상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타인으로부터 정상적인 인간이라는 평가를 받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죄의식과 열등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이 와 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푸코의 주장은 우리의 일상에 곧바로 적용됩니다. 다들 식사 메뉴를 제육볶음으로 하자는데 혼자 돈까스를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요? 그 사람에게 눈치 챙기라는 압력이 가해지겠죠. 특히 사령관님이 주최하는 회식에서 사령관님이 제육볶음을 먹겠다고 하고, 절대 다수가 제육볶음을 고르는데 홀로 돈까스를 고른다면?  단순한 상황에서조차도 돈까스를 고른 이는 비정상이 되는 겁니다. 어떤가요,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는 게 보이시나요?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에 대한 푸코의 문제 제기는 인간을 이성적인 존재로 보는 근대적 인간관에 도전했다는 의의를 갖습니다. 근대적인 인간관에 의하면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자로서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스스로 판단하고, 판단 결과에 따라 자신을 규제할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푸코는 위에서 했던 이야기를 통해 이성은 사회적 권력을 정당화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박하죠. 이성을 포함한 사회적 가치관은 역사 속에서 가공된 관념에 지나지 않다고 폭로한 겁니다.”

 

설명을 마친 리마토르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가 다음 교안으로 화면을 넘기려고 리모컨에 손을 올릴 즈음, 하르페이아가 든 손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교수님, 질문 있습니다.”

 

“네, 말해보세요.”

 

“푸코가 말한 대로라면 저희가 생각하는 기준은 외부에서 맞춰진 게 아닌가요?”

 

“그렇죠. 그게 구조주의입니다. 세계의 구조에 따라 개인의 인식과 행위가 규정된다는 이론이죠.”

 

“그럼 푸코가 본 세계의 구조는 추상적인 역사 속 흐름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뒤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푸코는 세계의 구조를 결정하는 건 권력이며 역사는 하나의 배경이라고 했습니다.”

 

리마토르는 하르페이아의 질문에 고개를 저으면서 오류를 정정했다. 다음 교안으로 화면을 넘긴 그는 이제부터 푸코가 본 역사 이야기를 해볼 거라 덧붙였다.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 이어 출판한 <말과 사물>은 공전의 히트를 쳤습니다. 철학서로는 드물게 100만 부나 발행되었고 신문에서 푸코의 책이 빵처럼 팔려나간다고 표현할 정도였죠. 제 논문도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읽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앞서 본 <광기의 역사>가 광기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입지가 바뀌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말과 사물>에서는 사람들의 생각을 이끄는 역사의 인식 구조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푸코는 각 시대별로 사물들에 대한 분류와 정리를 규정하는 무의식적인 인식 구조가 있다고 보았는데, 이를 에피스테메(épistémè)라고 합니다.

 

에피스테메의 중요한 특징시대별로 변한다는 점과 연속성이 없다는 점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부분에서 의문을 제기하실 겁니다. 역사는 단절되지 않는 하나의 흐름인데 어떻게 에피스테메가 시대별로 뚝뚝 끊긴다는 걸까요? 직관적인 예시를 들자면 조선 초기 인물과 우리의 생각이 어떻게 다른가를 볼 수 있습니다. 조선 초기 인물은 왕정에 대한 절대 충성을 당연하게 여기겠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죠. 반대로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만인의 평등은 조선 초기 인물에게 천지가 개벽하는 이야기로 들릴 겁니다. 이렇듯 각 시대별로 대응되는 에피스테메가 단절되어 있다는 게 푸코의 주장입니다.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각 시대의 에피스테메를 제시했습니다. 한 번 살펴보도록 하죠. 푸코는 르네상스 시대는 유사성의 에피스테메가 지배하는 시대였다고 말합니다. 이 시대에는 유사성을 기준으로 사물을 분류하고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17세기에 들어오면서 이성이 대두되었죠. 유사성의 에피스테메는 붕괴되고 사물들을 서로 구별하여 각각의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고전 시대가 지닌 분석의 에피스테메입니다. 18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는 마르크스의 철학이 득세했죠. 인간이 노동을 통해서만 자신의 삶을 고양할 수 있다는 주장에 따라 이 시기의 에피스테메는 인간을 중심으로 두었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인간이 어떻게 사고하는가에 중점을 둡니다. 과학은 모두에게 적용되는 무의식적인 규칙을 폭로하는 것을 과제로 삼고 있으며, 인간을 중심에 두는 관점은 사멸하게 됩니다.

 

이런 푸코의 주장은 많은 반론과 직면했습니다. 각 시대의 에피스테메가 절대적으로 단절된다는 푸코의 주장과 달리 르네상스 시대의 코페르니쿠스와 고전 시대의 갈릴레이, 현대의 아인슈타인 사이에는 단절성 못지않게 연속성이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 시대에 하나의 에피스테메만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동일한 시대에 여러 에피스테메가 경합할 수도 있음을 시사합니다.”

 

리마토르가 설명을 마치자 하르페이아는 다시 손을 번쩍 들었다. 적극적인 자세로 강의에 임하는 그녀의 모습에 리마토르는 학자의 기본자세가 잘 잡혀있다고 그녀를 치켜세웠다. 하르페이아는 과찬이라는 말로 그의 말을 받은 뒤 본론으로 넘어갔다.

 

“교수님, 그 말씀은 구 인류와 현 세대의 에피스테메가 연속성을 띨 수 있다는 뜻인가요?”

 

꽤나 도발적인 하르페이아의 질문에 리마토르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흥미를 돋우는 도전에 어떻게 응수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행동이 반역과 연구로 달리 판단될 터였다. 

 

‘이 강의를 하고 있는 이유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잖아.’

 

갈림길에 선다고 해서 그의 선택이 바뀌지는 않았다. 리마토르는 답변할 내용을 체에 거르며 하르페이아가 아닌 카메라를 응시했다. 카메라 너머에 있는 사령관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자신의 강의를 노림수로 쓰는데 최선을 다한 답변을 돌려주었다.

 

“네, 구 인류의 에피스테메가 현재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리마토르의 입에서 나온 말에 사령관은 더욱 관심을 갖고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리리스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블랙 맘바에 손을 올렸지만 자신의 주인이 내린 명령이 있었기에 그 이상 손을 쓰지 못했다. 부들부들 떨리던 손을 내린 리리스는 속으로 쓰린 마음을 태웠다.

 

‘저 말을 해석하면 구 인류가 가졌던 폭력성과 야만성이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야. 그런데 그게 이어지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부활시킬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잖아. 이미 나랑 주인님에게 좋은 감정은 없을 텐데 저런 말을 한다는 건, 철저히 이상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주인님의 뜻에 거스르겠다고 경고하는 행위지. 미리 싹을 잘라버려야 하는데 주인님이 하지 말라고 했으니....

 

주인님... 이러다가 나쁜 리리스가 될 지도 모른다고요...’

 

리리스는 간절한 눈으로 사령관을 힐끔 바라봤다. 하지만 사령관에게 그녀의 뜻은 닿지 않았다. 사령관의 눈길을 사로잡은 화면 속에는 그녀가 그렇게 경계해마지 않는 리마토르 교수가 추가 설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것 참, 제가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혹여나 저를 구 인류와 같은 부류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푸코의 대표작인 <감시와 처벌>에 의거한 답변이기 때문이죠.

 

<감시와 처벌>은 많은 분들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만큼 푸코의 사상을 집약하고 있는 중요한 저서이며 철학계에 미친 파장이 컸죠. 푸코는 이 책을 통해 시대의 흐름을 꿰뚫는 건 에피스테메와 같은 담론이 아니라 권력 구조임을 조명합니다. 이제부터 한 장씩 뜯어보도록 하죠.

 

<감시와 처벌>은 1757년, 루이 15세를 살해하려다가 실패한 죄인 다미엥의 처벌로 시작합니다. 절대왕정 시기 국왕은 단순한 지배자의 의미를 넘어 세계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국왕을 공개적으로 시해하려 든다? 문자 그대로 세계의 규칙을 공공연하게 거스르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우리의 상황에 맞게 비유하자면 사령관을 대놓고 제거하겠다고 공언하는 것과 다름없는 거죠. 당연히 다미엥은 온갖 고문을 받았습니다. 불에 달군 쇠집게로 온몸을 지지다가 끝에는 사지가 네 마리의 말에 묶여 찢어지는 거열형에 처해지죠. 

 

지금 보면 문제가 많아 보입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악인이라고 해도 원칙에 입각하여 처벌해야하는데, 이런 식으로 가벼이 처리한다니.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 시기는 절대왕정 시대였습니다. 국왕은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통치권을 쥐어야 했고, 통치권의 누군가에게 침해되었다고 판단되는 사건이 있으면 금이 간 통치권을 회복하기 위해 자신이 건재함을 대중에게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이른바 ‘국왕에게 도전하면 이렇게 된다’였죠.

 

하지만 이는 결코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까 <말과 사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뭐라고 했죠? 시대별로 담론인 에피스테메가 변한다고 했습니다. 절대왕정이 끝나고 만인의 평등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시대가 흐르자 사회계약론이 등장했습니다. 종래 국왕의 통치권을 확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인 처벌은 사회계약에 대한 위반으로 벌어진 과오를 시정하기 위한 것으로 목적이 바뀌었습니다. 아울러 범죄자를 사회로 복귀시켜 두 번 다시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교정하는 목적도 부과되었습니다.

 

자, 여러분이 교도관이라고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이 담당한 죄수가 죄를 뉘우치고 사회로 복귀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시작은 하나로 귀결됩니다. 바로 ‘자신이 어떤 죄를 지었는가 인식하기’입니다.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인 분들은 공감할 겁니다. 자신이 지은 잘못을 직시하는 데서 시정이 이루어지죠. 이렇게 과거의 가혹한 고문은 사라지고, 대신 죄수의 하루 시간을 통제하는 감금 제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처벌의 중심이 육체에서 정신으로 바뀌었죠.

 

푸코는 이것이 권력 의지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이전의 사회는 인간의 정신을 변화시키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나, 몽주의 사회는 인간의 정신마저도 변화시키려고 했죠.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격언이 말해주듯 정신이 건재하면 인간은 육체가 쇠약할지언정 다시 일어섭니다. 반대로 정신을 꺾으면 육체가 얼마나 건강하던 무너져 내립니다. 이를 고려할 때 감옥에 작용하는 권력 의지는 한 개인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거죠. 푸코는 근대의 감옥을 근대사회의 본질적인 특징을 집약적으로 표현하는 예시로 사용했습니다.

 

푸코가 본 근대는 사방에서 오는 통제와 감시의 시대였습니다. 근대인은 가정, 학교, 직장 등에서 이루어지는 갖가지 규칙의 강요, 까다로운 검사, 신체 구석구석까지 가해지는 치밀한 통제를 통해서 권력에 복종하는 양순한 인간으로 육성됩니다. 푸코는 이러한 감시와 규율은 각 개인의 신체에 집중된다고 보았습니다. 정신을 복종시켜 신체를 틀어쥐는 행위는 곧 우리가 역사와 사회로부터 독립적인 불변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제가 앞에서 말했던 제육볶음과 돈까스를 고르는 예시를 다시 떠올려봅시다. 제육볶음을 고른 절대 다수의 인원들이 타인의 선택과 무관한 본인의 순수 의지만으로 그런 선택을 내렸을까요?

 

우리는 권력의 감시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소설 <1984>에 나오는 빅브라더를 연상하거나,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고 주장하시면 매우 곤란합니다. 푸코가 말하는 권력은 실재하는 무언가의 능동적인 작용이라기보다는, 사회 전체에 도사리는 분위기에 더 가깝다고 봐야합니다. 이를 가리키는 게 그 유명한 판옵티콘의 예시지요.

 

영국의 판사이자 양적 공리주의자였던 제러미 벤담은 가장 효율적으로 감옥을 관리할 시스템을 고안했습니다. 감옥의 가장자리를 원형으로 만들고 그 한가운데에 감시탑을 두는 아이디어였죠. 이 감시탑의 가장 큰 특징은 정보의 단방향 전달이라는 겁니다. 감시자들은 수감자들의 각 방을 들여다볼 수 있지만 수감자들은 감시자를 보지 못하게 설계되었죠. 이러한 설계 구조에 상응하게 벤담은 자신이 설계한 감옥에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눈’이라는 의미의 판옵티콘(Panopticon)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런 감옥 구조는 정신적 지배에 탁월한 효과를 발휘합니다. 수감자들은 자신들이 끊임없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되죠. 또한 이 감시 체제에서 감시자는 수감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수감자들의 행동에 상응하는 형벌을 줄 수 있는 지위를 갖게 됩니다. 푸코는 근대사회를 이렇게 모든 것이 감시되는 판옵티콘의 사회라고 보았습니다. 타인의 눈치를 살피고 분위기에 맞는 선택을 하기 위해 욕망을 꺾는다, 욕망을 굽히지 않은 이는 지적이나 따돌림 같은 사회적인 린치를 가한다. 어떤가요, 푸코의 주장이 와닿나요?


푸코의 주장이 재미있는 점은 누가 감시자이고 수감자인지가 명확히 이분적으로 나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앞에서 푸코가 말한 권력이 사회적 분위기에 더 가깝다고 했는데, 이는 곧 사회적 분위기를 만드는데 동참하는 이들은 누구나 감시자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리는 이들은 누구나 수감자가 될 수 있죠. 모두가 감시자인 동시에 수감자인 셈입니다. 이렇듯 푸코가 본 권력은 사람들에게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지에 대한 각인시키는 존재였습니다. 근대 사회에서 일반 사람들은 어떻게 움직여야 내가 문제가 없는지 계속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수정합니다. 환경이나 사회적인 문제가 있어도 자신에게서 답을 갈구했죠. 이렇게 보면 이성을 통해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근대였지만 실상은 권력의 눈치를 보고 행동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럼 이런 권력을 어떻게 바꿔야할까요? 푸코는 그 답으로 앞에서 말한 담론을 제시합니다. 담론을 형성해서 권력의 흐름을 바꾸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서 있는 위치를 자각하게 됩니다. 그러지 못하면 여태까지 살아온 대로 사회 분위기라는 줄에 묶인 마리오네트로 지낼 뿐입니다. 즉,  푸코는 권력에 대한 담론이 없을 경우, 우리의 정신 밖에서 구조를 이룬 권력에 의해 우리는 한낱 장기말에서 더 나아가지 못할 거라 말합니다. 그러면 기존에 있었던 권력 구조가 우리를 침습할 텐데, 이전에 있었던 권력 구조는 다름 아닌 구 인류의 세계였죠. 그 시대에 우리를 집어던질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피해야만 하죠. 우리는 우리를 통제하려는 권력을 경계하기 위해 우리 자신과 이 세계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을 하나씩 해체해서 분해해보도록 하죠.

 

이렇게 푸코에 대한 긴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푸코의 사상은 데리다로 이어지는데 쉬지 않고 바로 넘어가겠습니다.”

 

리마토르는 가쁜 숨을 물로 틀어막으며 다음 설명을 시작했다. 영상으로 그를 보던 칸은 그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보고 커플젠가를 두었을 때 리마토르가 했던 말이 목을 타고 나오는 걸 느꼈다. 그녀는 그 위에 안타까움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렇게 힘들면 앉아 있기라도 하지... 조금은 쉬어도 되잖아. 내가 마음 주는 사람이 힘든 건... 보고 싶지 않은데.”

 

같은 시각, 리마토르의 연구실에서 그의 화상 강의를 청강하던 아스널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논문에 들어있지 않은 바깥 이야기였지만 다음 이야기를 이해하기에 더 좋은 발판이 마련되었기에 그녀는 춤을 추듯 즐겁게 생각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학문의 즐거움에 매료된 아스널은 그의 입에서 나올 다음 이야기를 기대했다.

 

“푸코와 데리다, 들뢰즈는 한 길 위에 서 있지. 푸코의 구조주의 다음에 나올 데리다의 해체주의가 어떻게 이어질지 궁금한 걸. 이번에도 흥미로운 설명 부탁할게, 교수.”

 

그녀들이 한 말은 리마토르에게 닿지 못했다. 하지만 리마토르는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이토록 고대하던, 새로운 세상을 위한 초석을 고안하는데 성공한 순간 옆에 있는 이들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훔친 그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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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참, 원래는 바로 데리다를 소개하려 했는데 프랑스의 포스트 모더니즘 3인방을 설명하는 걸로 틀이 바뀌었네. 이거 휴가 복귀하기 전까지 논문 설명 에피소드 마칠 수 있으려나....? 더욱 노력하는 수밖에 없겠구만...


이번 편에 등장한 철학자는 미셸 푸코야.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푸코 본인은 구조주의 철학자로 불리길 거부하기도 했고, 푸코의 철학 사조가 포스트 모더니즘에 해당하기도 하기에 푸코-데리다-들뢰즈를 묶어서 프랑스의 포더니즘 철학자 3인으로 부르기도 해. 이번 편은 푸코의 철학이 워낙 폭이 넓기도 하고, 형식이 논문 설명이라는 형식이다보니 너무 길어진 감이 있네. 읽은 뒤 피드백을 해주면 더 좋은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되니 적극적인 피드백 부탁할게.


긴 글 읽어줘서 고맙다. 읽어주는 사람들 덕분에 글을 쓰는 보람이 있다. 다들 좋은 하루 보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