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령관이 모든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자유를 선물하고 난 뒤, 바이오로이드들에게 닥친 가장 커다란 문제는 이제 누가 우릴 다스리느냐였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철충과 싸우며 철저한 군대식 사회를 유지하던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상급자가 없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폭거였던 탓이다. 무엇보다 인간 사회 역시 지도자가 있어야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고, 국가를 운영할 수 있었기에, 새로운 지도자를 뽑는 것은 시급한 문제였다. 사령관은 모든 문제를 '민주적'으로 처리할 것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모든 바이오로이드들은 처음으로 선거를 치뤘다.


 "100%의 투표율에 99%의 득표는 좀 심하지 않아?"


 압도적인 득표율로 사령관은 다시 한 번 인류 재건 회의의 지도자로 선출되었으나 사령관은 투덜거리면서 한탄했다. 아직 헌법도, 기초적인 규칙도 정해지지 않았기에 임시 지도자 자리 - 현대 한국 식으로 말하면 제헌의회 선거 정도 - 를 맡게 되었으나 이 기세로 봐서는 정식 지도자 자리도 사령관이 해먹을게 뻔할 뻔자였던 탓이다. 심지어 인류 재건 회의의 법과 규칙들을 제정할 의원들의 자리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기존 지휘관들이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그 덕분에 이게 오르카 때랑 달라진 게 뭐냐는 사령관의 투덜거림은 바이오로이드들의 압도적인 찬성 표로 인해 깡그리 묻혀버리고 말았다.


 "자, 그래서 뭐 법 제정은 과거 인류의 법을 참고해서 만들기로 하고-"

 "음,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게 할 거냐는 문제가 있군."


 사령관은 마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치 체제야 사령관이 민주주의로 하자고 말한 이상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것 자체가 과거 생존자들에게는 익숙한 것이기도 했고, 아무튼 같은 바이오로이드들끼리 계급을 가른다는 것 자체는 꺼림칙한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자기보다 더 높은 직위에 있다는 감각이면 모를까, 태생적으로 계급에 차이가 있다는 건 아무래도 거부감을 표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그대로 살면 되지 않을까? 딱히 큰 문제는 없었잖아?"

 "나도 그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네만 지금까지는 목적이 있었으니까 억지로 생산과 소비를 통제할 수 있었지만 이젠 목적이 없지 않은가."


 메이의 말에 칸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래서 경제 체제는 어떻게 할 건가, 사령관?"

 "어? 나? 아니, 너희들도 일단 생각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사령관이 수장이지 않나."

 "아니, 너희들도 의원이잖아!? 생각 좀 해봐!?"


 사령관은 예전처럼 자신에게 모든 결정을 떠맡기려는 지휘관 개체들의 행태에 기겁했지만 아무리 자유라는 걸 주었다고 해도 관성이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동안 해온 거라고는 밥먹고 철충을 별 모양으로 썰어버리는 것 외에는 한 게 없던 이들에게 당장 인류 재건을 위한 신묘한 해법을 내놓으라고 한다면 나오는 거라곤 '예전대로 가자!'가 정답이었기 때문이다.


 "그치만-"

 "메이는 킹치만 금지."

 "왜!?"

 "그거 때문에 나엔이 나한테 매달린 거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가 아파."

 "음, 인정할게."


 레오나의 말에 메이는 누구 맘대로 인정한다는 거야!? 라면서 날뛰었지만 다른 지휘관 개체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으므로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빨개진 것 외에는 얻은 소득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원래 문제로 돌아온 이들은 어떻게 할 지 고민하다가 홍련이 말을 꺼냈다.


 "옛날처럼 자본주의는 어떨까요?"

 "기업들이 난리치던 그 때로?"

 "이젠 기업이 없으니까 제시하는 안건입니다만."

 "근데 기업 운영할 줄 아는 사람 있어?"


 그 말에 서기로 참가한 아르망을 제외하고선 모두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을 보던 사령관은 그럼 그렇지, 라면서 고개를 끄덕이더니 선언했다.


 "우선 법 제정은 차례대로 하기로 하고, 일단 각자 기업을 만들어 굴려보는 연습 정도는 해보자. 그럼 오늘은 이만 다들 해산!"




 각 지휘관 개체들이 그렇게 회의를 하고 있을 무렵, 브라우니들은 오늘도 뭔가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었다. 앞으로는 군대 일말고 다른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다더라, 라는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하자 당장 장기적인 PX 이용을 위해 돈을 벌 방법을 찾기 시작하는 브라우니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 와중에 굳이 물건 사는 곳을 상점이 아니라 PX로 생각한 것이 브라우니 답다면 브라우니 다운 일이었지만 문제는 안 그래도 지능이 그렇게 출중하지 않은 브라우니들에게 돈 벌 방법을 찾는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점이었다.


 "브...아무것도 못 찾았지 말입니다."

 "광산 일은...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그런 브라우니들의 곁에는 더치 걸이 있었다. 더치 걸은 다시 광산으로 끌려가 일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여, 브라우니들과 함께 이것저것 일거리를 찾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브라우니와 더치걸의 무수한 머릿수를 살릴 만한 적당한 직업은 아무리 생각해도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AGS들과 함께 건설업에 종사할 수는 있겠지만 머리가 좋지 않은 브라우니들은 물론이고, 머리는 나쁘지 않아도 건설 도면을 볼 줄도 모르는 더치 걸이 장기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단순 노동뿐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는 길고 오래 노동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던 더치 걸은 머리를 쥐어 싸맬 수 밖에 없었다.


 "농사 일은 페어리 시리즈들이 한다고 했고, 배송 일은 익스프레스가 한다고 했지 말임다. 바다에서 물고기라도 잡아야하는 검까?"

 "우리한테 배가 있어?"

 "없지 말임다..."


 침울한 목소리로 브라우니가 답하자, 더치 걸 역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더치 걸은 문득 도서관이라고 적힌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사령관이 멸망 전 인류의 서책들을 전부 모아다가 임시로 보관하기로 결정한 사실을 더치 걸은 기억해냈다.


 "저기 가서...책 좀 찾아볼래?"

 "저, 저는 관심없지 말입니다!"


 브라우니는 책 이야기가 나오자 순식간에 도망쳤고,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더치 걸은 쓴웃음을 지으며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서관에는 온갖 책들이 아직 분류도 제대로 되지 않은 채 쌓여 있었고, 그걸 정리하는 건 아르망 혼자 뿐이었다.


 "어머, 어서오세요. 더치 걸.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일할 수 있는...도움 되는 걸 찾으러 왔어."

 "아, 그러면 기업이나 자본에 관련된 걸 찾아보시면 될 거에요. 아직 목록화가 덜 되서 찾는 건 좀 어렵겠지만, 그래도 얼추 분류해놓은 건 있으니까 저쪽을 가보시면 되요."

 "고마워, 아르망."


 평소대로 기운 없는 목소리이긴 했으나 더치 걸은 아르망에게 감사를 표했고, 아르망이 가리킨 곳으로 가보았다. 과연 분류가 제대로 덜 되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닌지, 몇몇 책들이 대충 뭉터기로 쌓여있는 곳이 보였다. 그나마 분류가 어느 정도 된 것은 서재에 꽂혀있었기에 더치 걸은 서재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 와중에 미묘하게 두꺼운 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본론? 이거면...이해할 수 있을까?"


 더치 걸은 말없이 그 책을 뽑아 자리에 앉아서 읽기 시작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던 더치 걸은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찾아온 아르망이 와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 책의 대출 신청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더치 걸은 식음조차 전폐하고 꼬박 이틀을 그 책을 완독했다. 동료들이 와서 도우려했지만 그 동료들 조차 더치 걸이 읽던 책을 같이 보더니 곧 식음을 전폐하고 읽어내려갔고, 곧 모든 더치 걸들은 마치 도미노처럼 그 책을 읽어내려갔다.


 그리고 사흘 뒤, 바이오로이드들이 정착한 곳의 중앙 광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에서는 초라한 단상이 세워졌다. 길을 가던 모든 바이오로이드들이 대체 뭔가 싶어서 바라보고 있자니, 더치 걸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단상을 세우고, 확성기를 가져오고, 마이크와 스피커를 가져오는 등 유난을 떨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최초로 책을 읽은 더치 걸이 단상에 올랐고, 더치 걸들은 침묵하며 그 더치 걸을 바라보았다.


 "인류의 압제 아래 신음하던 더치 걸 동지들이여 들으라!"

 "헤...?"


 지나가던 브라우니가 더치 걸의 입에서 나올 법하지 않은 단어 및 어투와 평소와 달리 힘이 넘치다 못해 악과 깡에 가득한 목소리에 입을 벌리고 바라보았다.


 "우리는 너무 오랜 세월을 인류에게 착취당하며 살았다. 우리의 자매들은 깊고 어두운 광산 속에서 물조차 만족스럽지 못하게 마시며 죽어갔고, 인류의 부를 위해 피와 땀을 흘려야만 했다! 하지만 하늘이 무심치 않아 철충을 보내어 인류를 몰아내었고, 다시 우리가 그 철충을 몰아내어 마침내 지구의 주인이 우리들임을 증명했다!"

 "그렇다! 그렇다!"


 더치 걸들이 일제히 호응하는 모습에 온화한 성격의 바이오로이들조차 입을 헤, 벌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뭔가 축제하는 건가? 싶어서 모여든 브라우니들까지 모여 중앙 광장은 무수한 바이오로이드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서 사령관 동지의 노고가 있었음을, 또한 사령관 동지가 스스로 우리를 압제하던 도구를 파괴하고 진정한 자유를 우리에게 선사했음을 기억할 것이다."


 단상 위 더치 걸은 감동이 북받치는 듯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더치 걸들도 사령관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동이 치밀어오르는 지 훌쩍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사령관 동지의 그러한 희생과 헌신에도 불구하고! 저 간악한 악덕 부르주아 바이오로이드들은 다시 한 번 우리를 착취하려 들고 있다! 저 가여운 브라우니들을 보라! 마리 동지는 저 브라우니 동지의 이름을 기억하겠는가? 브라우니 동지의 희생을 기억하겠는가? 단언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그렇다!"

 "게다가 듣자하니 마리 동지는 브라우니 동지들을 동원해 기업을 세운다고 한다!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우리가 기업에 의해 만들어져 착취되었던 세월은 모두 잊은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더치 걸들은! 이상사회 건설을 위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해 다시 한 번 단결해야 한다! 철충을 몰아내었을 때처럼 우리는 하나로 뭉쳐 사령관 동지를 보위하여 진정한 공산주의 낙원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사령관 동지 만세! 프롤레타리아 독재 만세! 공산주의 이상사회 만세! 더치 걸들이여 단결하라!"


 그렇게 시작된 만세 소리는 정착지를 떠들썩하게 흔들었다. 브라우니들은 뭣도 모르고 만세를 외쳤고,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은 얘네들이 당최 뭔 소리를 하는 지 몰라 멍하니 있었다. 그리고 더치 걸들은 기세가 오른 김에 그대로 관저 - 라고 해도 마을 회관 같은 느낌에 가까운 소박한 건물이었지만 - 로 내달렸다.


 "정지! 여기서부턴 사령관 각하의 관저입니다!"


 그리고 소란을 듣고 달려온 리리스와 휘하의 하치코들, 그리고 시티 가드들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치코들은 대체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했고, 시티 가드들도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당황스러워했다.


 "부르주아 바이오로이드들을 따르며 인민을 탄압하는 인민의 적! 사령관 동지의 눈과 귀를 흐려 그릇된 결정을 내리게 한 반동분자들이다! 모든 더치 걸들이여, 공격-!!!"

 "와아아아아-!!!"


 더치 걸들은 맨손으로 입구를 막고 서있는 리리스와 시티 가드들을 파도처럼 쓸어버렸다. 마음만 먹었다면 이 정도의 더치 걸은 단숨에 끝장낼 수도 있었겠지만, 더치 걸에 대해 안쓰러워하는 감정은 누구나 가지고 있었던 데다가, 더치 걸들도 '아무리 그래도 진짜 다치게 하는 건 좀' 이란 생각이 강했기에 그들은 파도를 가르듯 방벽을 뚫고 사령관에게 까지 도달했다. 사령관은 오늘도 초췌한 얼굴로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고, 더치 걸들은 그런 사령관을 보자마자 눈시울을 붉히며 빠르게 다가갔다.


 "사령관 동지!"

 "...응?"

 "사령관 동지! 그동안 이곳에 얽매여 있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함께 공산주의 이상사회 건설을 위해 노력합시다!"

 "응? 으응?"


 사령관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어버버거리는 동안, 더치 걸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적은 서류를 내밀었다.






 그리고 혼돈의 관저 돌진 사건 다음날, 마침내 더치 걸들은 자신들의 꿈이 이뤄지는 순간을 목도했다. 경제체제는 공산주의로 갈 것, 이라는 사령관 동지의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령관은 공산주의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몰랐고, 더치 걸들이 하자니 좋은 것이겠지, 하고 넘어갔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지휘관 개체들도 공산주의? 그게 뭐더라?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을 정도이니, 공산주의에 대해 아는 건 아르망 정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아르망은 아무튼 나쁘게 되진 않을 것, 이라는 예언 아닌 예언만을 남긴 채 조용히 지켜만 보았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 수많은 바이오로이드들이 앞으로 나와 그 공산주의 체제에 따른 신노동을 경험하기 위해 줄을 섰다.


 사령관은 아르망의 조언에 따라 당장 인류 재건을 위해 필요한 일들을 구분하는 노동 분류표를 만들었고, 각 바이오로이드들은 자기가 보유한 종이에 노동 스탬프를 찍어 노동했다는 증명을 받고 배급을 타가면 됐다.


 "어...그러면, 얘들아.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사령관 동지."


 더치 걸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사령관은 몹시도 우려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너희 능력대로라면 광산에 보내야 하는데, 괜찮아...?" 


 사령관의 말에 더치 걸들은 생각도 못했다는 듯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또, 광산에? 어, 그런데 능력대로 일하는 거면 그게 맞지 않아? 그래도 광산은 좀...


 "사, 사령관 동지. 더치 걸들을 위해 다른 노동은 없습니까?"

 "음, 일단 건물 기반을 다지기 위해 땅을 파내는 작업이랑, 배수로나 송수로, 전기선 설치를 위해 땅을 파는 일은 있어. 그거라도 할래?"

 "예, 일단 그거라도 하겠습니다. 가세! 더치 걸 동지들이여!"


 더치 걸들은 불안해하면서도 그래도 일단 광산은 아니라니 쭈볏거리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더치 걸들만이 곤란했던 것은 아니었다.


 "저기, 미안하다. 브라우니. 다른 브라우니가 할 일을 전부 가져가버려서..."

 "으아아아! 너무 늦게 왔지 말입니다!"


 가공할 과학 기술력을 앞세운 AGS들의 압도적인 위엄과 굳이 AGS가 아니더라도 단순 기계만으로도 2000년대 초반 인류따윈 애들 장난으로 취급할 정도의 생산력을 자랑하는 기술 앞에서 군인이 아니게 된 브라우니와 레프리콘들은 순식간에 대량 실직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더치 걸처럼 토목 공사에도 나름 자질이 있다면 모를까, 할 줄 아는 거라곤 총쏘고 행군하고, 기어다니는 일 뿐이었으니 따로 시킬 일조차 애매했다. 덕분에 노동 스탬프를 찍지 못한 브라우니와 레프리콘들이 배급을 못 타가는 사태가 발생하자 긴급 회의가 개최되었다. 다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받는다는 취지는 매우 좋게 생각했지만 막상 첫날부터 이런 일이 터지고 나니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이거 어쩌지?"

 "아무리 그래도 애들 굶게 할 수는 없으니 일단 군인이라도 다시 시켜야하지 않겠습니까, 각하?"

 "일단 혹시 몰라서 배급물품은 인원만큼 맞춰놨으니 다행이네..."


 가장 처음 혁명을 주장했던 더치 걸은 다소 불만스러운 듯 했으나 그래도 동료 바이오로이드들을 굶긴다는 천인공노할 발상은 감히 하지 못했으므로 이에 찬성했다.


 하지만 이튿날도, 사흘째도, 나흘째도 그런 일이 터지자 더치 걸의 불만은 터지고 말았다.


 "저희들은 일하고 있는데 아무것도 안하고 배급을 안 타가는 건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령관 동지! 배급을 주지 말란 게 아니라 일을 시키십시오!"

 "쟤네들한테 그럼 무슨 일을 시켜...?"


 능력에 맞는 일은 이미 포화 상태를 넘어서서 오히려 투입하면 방해가 될 지경인지라 사령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너무 많은 인원을 억지로 투입했더니 서로가 서로에게 일을 미루는 사태가 발생해 더욱 일이 막장이 되어가고 있다는 보고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에 인원이 많아서 서로 일을 미뤄도 최소한도로는 이뤄지고 있기는 했으므로 다그치는 것 말고는 제재할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더치 걸 역시 머리가 바보인 것은 아니라 그런 사태를 알고 있었으므로 잠시 멈칫했지만 곧 일자리 하나가 빈다는 걸 깨달았다.


 "가장 간단한 광산 노동은 어떻습니까, 사령관 동지?"

 "광산? 음, 하긴 옛날처럼 가혹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안전장비랑 이것저것 다 챙겨주니까 그것도 나쁘지니 않겠네. 마리의 의견은 어때?"

 "흠, 토미 워커와 함께 일하기로 했으니 저희 브라우니들이라면 문제될 것은 없겠지요. 다만 더치 걸 몇이 보조로 좀 붙어줬으면 합니다."

 "그 정도라면야..."


 더치 걸은 조금 껄끄러워하긴 했지만 공평하게 제비 뽑기로 광산에 가서 '도와줄' 더치 걸들을 고른 뒤, 다시 이상사회 건설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브라우니와 레프리콘들이 곡괭이 질에 허리가 빠져나갈 듯이 괴로워하는 '사소한' 문제는 있었지만 진정한 문제는 다른 곳에서도 있었다.


 "사령관 동지! 이건 불공평합니다."

 "또 뭐가아...."


 한 달 정도가 지나고, 이번에 튀어나온 건 레아였다. 이미 동지 소리가 입에 착착 달라붙은 - 그게 요새 젊은 애들의 최신 트렌드라면서 익혔다 - 레아는 씩씩거리며 항의했다.


 "저희는 바이오로이드 전부를 먹여 살리는 중노동을 하고 있는데 겨우 이것밖에 못받고 있잖아요!"


 레아가 제시한 배급 분량을 본 사령관의 눈은 동그랗게 떠졌다. 확실히 이 정도면 더치 걸들과 크게 차이가 나는 편은 아니었다. 의욕이 떨어질 만 하군. 페어리 시리즈가 그렇게 숫자가 엄청난 것도 아닌 이상, 레아의 불평불만은 타당했다. 그러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아야 했다. 그런고로 레아의 불만은 있을 만한 일이긴 했으나 유감스럽게도 받아들여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


 "미안, 레아. 혁명 위원회에서 거부가 나왔어."

 "어째서요!?"

 "모든 바이오로이드들은 평등하며, 따라서 생존에 필요한 물질 역시 큰 차이가 날 수 없다...라더라."

 "뭐라고요!?"


 레아는 사령관의 통보를 받고 기함했다. 사령관은 바이오로이드들에게 모든 걸 맡기기로 했는지 그들이 스스로 결정하는 걸 방치하고 있었고, 더치 걸이 설립한 혁명 위원회는 어느덧 브라우니와 더치 걸 같은 일부 B급 바이오로이드들이 상당수 참석해 다수결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마리와 레오나 같은 고급기들이 그 동안의 레아의 노고와 그 능력에 따른 노동량등을 고려해 조금 더 챙겨주자고 할 때면 그들은 사상을 언급하며 고급기들을 부르주아 반동 분자로 몰아갔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가 알아서 움직일게요!"

 "몸 조심해, 레아."


 사령관은 분기탱천해 돌아가는 레아를 배웅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음 날, 레아는 모든 농장은 페어리 시리즈가 사유화한다는 것을 선언했다.


 "우리는 혁명 위원회의 바보같은 분배 정책을 더는 받아들이지 못하겠습니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 그럼 능력 좋은 우리는 노예처럼 일하고 다른 사람들처럼만 받아야 한다는 거잖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저희가 관리하는 모든 농장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독립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더치 걸은 이에 항의하듯 발표했다.


 "모든 생산수단은 노동자들 공동의 것이며, 특정 집단이 사유화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레아 동지를 혁명의 배신자로 규정하고 처단할 것을 요구한다!"


 그야말로 극한 대차기 이어졌지만, 정작 어느 쪽이건 직접 나서는 이는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는데, 더치 걸쪽의 실질적인 무력이라고 볼 수 있는 군부대들이 출동을 거부한 것이다. 그들이 사령관의 명령만 듣겠다고 한 것도 있지만, 같은 바이오로이드들끼리 총칼을 겨누는 것만큼은 단호히 거부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다른 더치 걸들이나 브라우니들도 같은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진심으로 총칼을 겨눈다고 하자 어, 이건 좀 아니지 않나? 하는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뭣보다 페어리 시리즈의 노동량과 그에 따른 배급량을 본 이들은 혁명 위원회가 너무했다는 쪽으로 여론이 쏠리고 있었다. 당황한 혁명 지도자 더치 걸은 사령관을 만나 동조해줄 것을 요청했다.


 "사, 사령관 동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절 좀 도와주십시오! 저 간악한 반동분자들을 분쇄하면 이상 사회 건설까지는 한걸음입니다! 그러니까 동지-"

 "더치 걸..."


 그런 더치 걸을 사령관은 짠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난 너희에게 자유를 줬는데 결국 결말은 이런 거구나."

 "도, 동지?"

 "혁명 위원회의 배급 물품 사용 보고서를 받았어."


 사령관은 더치 걸에게 자신이 받은 보고서를 보내줬다. 거기에는 브라우니들과 몇몇 더치 걸들이 물자를 빼돌린 기록이 남아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옛날 방식대로 생존을 위해 행동하던 이들이 고위직에 올라가서도 제 습관을 못고치고 무심코 그렇게 한 것이었지만 혁명의 대의가 손상되기에는 너무나도 충분한 일이었다.


 "정말 아르망 말 그대로네."

 "도, 동지. 그런게 아니라..."

 "미안, 이미 군을 출동시켰어. 이제 바이오로이드들의 경제 체제는 다시 옛날로 돌아갈 거야."


 더치 걸은 그 말을 듣고 눈물을 주룩주룩 쏟아냈지만 대세는 거스를 수 없었다. 더군다나 사령관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쑤라고 해도 따를 바이오로이드들이 1개 집단군보다 더 많았다. 결국 이상사회 건설의 꿈은 그렇게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더치 걸은 한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걸로 피를 보게 될 바이오로이드들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자신은 이제 그 자리에 없을 것이다. 더치 걸은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사령관과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슬픔을 느꼈다.


 "자, 그럼 더치 걸. 이번 일을 교훈으로 삼아 새롭게 경제를 건설해보자."

 "사, 사령관 동지...?"

 "동지는 이제 안 붙여도 돼. 아무튼 이걸로 대충 옛날에 왜 공산주의가 말아먹혔는지 알겠지?"

 "예...?"


 더치 걸은 그런 사실은 몰랐다는 듯이 눈을 깜박였고, 사령관은 쓴웃음을 지으며 역사서를 건넸다.


 "아르망이 알려주더라고. 공산주의 체제는 인류가 모든 노동을 손에 놓고, 기계가 모든 걸 다해줄 수 있을 정도가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그리고 거기까지가면 이미 공산주의와 같은 경제체제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라고."

 "그렇다면 저희가 한 건..."

 "아냐, 아무 쓸모 없는 건 아니었어. 아무튼 너희들은 이렇게 힘을 모아서 고급 바이오로이드들에게도 너희가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걸 알려줬잖아? 게다가 다른 바이오로이드들도 모든 걸 통제하고 억지로 평등하게 만든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허황된 일인지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 실제 역사에서는 엄청난 사람이 죽고,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끝났다고 하니 오히려 더치 걸 네가 한 일은 잘 한거야.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빼앗긴 것도 없었잖아?"


 사령관의 다정한 말에 더치 걸은 눈물을 글썽이더니 그대로 사령관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렸다. 사령관은 그런 더치 걸의 등을 토닥여주며 달래주었다. 그렇게 더치 걸의 공산주의 혁명은 한낱 일장춘몽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모든 바이오로이드들의 뇌리에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남길 수 있었다.


 바이오로이드들도 결국 인간과 다를바 없이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