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음 : https://arca.live/b/lastorigin/20710101

--------------------------------------------------------------------------------------------


 

 

 

시간이 많이 지났다.


그만큼 많은 것을 보았다.

 

해가 지평을 따라 180도를 도는 광경을 보는 것.

 

그와 똑같은 궤적을 매일밤마다 달이 그리는 것.

 

낮과 밤이 달라지는 것에 익숙해졌다는 이야기이다. 어쩌면, 그것에 익숙해져도 될 만큼 다른 모든 것에 적응했다는 이야기일 지도 모르겠다.

 

 

“사령관님. 여기 신재생 생태 도시 재건 관련 서류들입니다.”

 

“사령관님. 이틀 뒤에 스틸라인 4901 사단의 계급 승급식이 있습니다. 브라우니 34,920명, 레프리콘 5,431명, 노움 3,402명. 총 인원 43,753명입니다.”

 

“사령관님, 지중해 해역 정찰 결과 보고서입니다. 인양 작업에 결제가 필요합니다.”

 

 

이를 테면 이런 사소한 것들. 사람 목숨이 달리지 않은 간단한 것들에 대해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물론, 인간성을 상실해버렸다는 얘기는 아니다. 아침마다 새롭게 나타나는 종이 뭉치들을 보면서도 여유로움을 잃지 않게 되었다는, 대충 그런 사람이 되었다는 얘기다.

 

가끔씩은 그런 나도 놀라게 만드는 애들이 있긴 하지만.

 

 

“사령관님! 30분 전에 사거리 지역 술집에서 가스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낮 시간이라 술을 사러 들어간 사람 한 명만 발견됐다고 했는데-”

 

“누군데?”

 

“그... 얼마 전에 합류하신 블라인드 프린세스라고...”

 

“아, 걔는 냅둬.”

 

 

새롭게 부관으로 임명된 아이가 두 눈을 꿈뻑거리며 나를 쳐다본다.

 

그래도 뭐 어쩌겠나. 기차로 때려 박아도 흠집 하나 안 나는 아가씨를 상대로 고작 가스 폭발 따위가 뭘 어쩔 수도 없을 거고.

 

그래도 가끔씩 저런 이야기가 들려올 때마다 심장이 조마조마한다. 누구는 가스 폭발에 목숨이 왔다갔다 하기도 하지만, 또 누구는 눈앞에서 핵폭탄이 터져도 안 죽을 만큼 단단하니까.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나는 여전히 애들 한 명 한 명에게 휘둘리고 있는 유약한 인간인 것 같다.

 

아, ‘애’들이라고 칭하는 건 이제 금지하기로 했지.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 여보?”

 

“아무 생각.”

 

 

조용히 홍차를 마시고 있던 레오나가 말끝을 뭉그러뜨리며 물었다.

 

구름이 적당하게 흐릿해서 좋은 날씨라 오랜만에 티파티를 열었다. 위치는 오르카 호와 가까운 언덕. 더치걸들의 위령비를 올려놓은 완만한 숲속이었다.

 

여기 있어야 할 해충들은 리제의 심심풀이로 몰살되어버렸고, 땅에서 자라는 꽃은 페어리 아이들의 취미로 수십, 수백배로 불어났다.

 

자연에 손을 대는 것을 그리 즐겨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곳 주변에서 우리가 건들지 않은 것은 아마 솜털을 스치고 지나는 바람뿐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발키리, 우리가 했던 북극 유적 발굴은 어떻게 됐지? 생각해보니까 보고도 안 했네.”

 

“굳이 이런 자리에서까지 보고를 해야 합니까.”

 

“그럼 이런 곳에서 해야지. 어디 가서 하겠어? 빨리 얘기해 봐.”

 

 

레오나가 탁자 위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세라믹 재질의 탁자는 도자기로 만들어진 잔과 부딪히며 경쾌한 타공음을 내었다.

 

레오나를 따라 두 손으로 공손하게 차를 마시고 있던 발키리가 작게 한숨을 쉬며 자신들의 영웅담을 뱉어냈다. 북극의 칼바람 속에서 어떻게 헤쳐 나갔으며, 그곳에서 구인류들이 미쳐 다 파헤치지 못한 별의 아이의 유적을 어떻게 찾아냈고, 그 안에서 또 얼마나 이상한 것들을 발견했고...

 

 

“... 해서, 그렇게 된 겁니다. 별로 의미 있는 것들은 발견하지 못했죠. 결국 탐사의 결론은 더 이상 외계 문명에 의해 위협받지 않을 거란 얘기뿐이었으니까요.”

 

“흐음...”

 

“... 뭡니까. 대장. 이 정도면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거 아닙니까?”

 

 

발키리가 연분홍색의 눈으로 레오나를 쳐다보았다. 이전에 그녀의 기계 안구 속에서 들리던 값싼 톱니 바퀴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아니. 내가 원한 건 그런 게 아니야. 난 그냥 평범한 ‘보고’를 듣고 싶은 거라니까?”

 

“... 대체 뭐 어디서 어떤 맥락으로 평범한 걸 듣고 싶으시다는 겁니까? 충분했다고 생각하는데.”

 

 

레오나는 고개를 휙 돌리곤 도리질을 했다. 입을 삐죽거리며 눈까지 꼭 감은 모습이 귀여운 철부지 어린애 같다. 철혈이라는 이명은 아이를 낳으면서 함께 씻겨져 내려가 버린 것처럼.

 

발키리는 여전히 감을 잡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평생 사선을 넘겨온 시간이 있을 텐데, 요새 레오나의 히스테릭은 도통 감을 잡지 못하겠다고 나에게 상담까지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발키리가 이런 레오나에 익숙해지려면 아마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발키리.”

 

“네, 각하.”

 

“북극에서 먹은 밥 얘기 좀 해줘. 재미있을 것 같아.”

 

 

레오나가 원하는 보고는 그냥 이런 일상적인 이야기니까.

 

차를 마시면서, 숨을 쉬듯이 할 수 있는 얘기들. 멸망 전 드라마 속의 엑스트라들이 허물없이 주인공의 뒤편에서 떠들던 얘기들. 매일 똑같은 일상이지만 신기하게도 매일 같이 달라지는 이야기들.

 

레오나도, 발키리도, 이런 이야기를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좋은 엄마가 되는 법>이란 책에 ‘아이와 함께 평범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만 나오지 않았어도 이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 배우지 않았을 테니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려는지, 잔뜩 미간을 찌푸리던 발키리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찻잔 안에 담겨 있던 것은 그냥 맹물이었다.

 

 

“으... 응애애애!”

 

“에, 에? 도, 도련님! 갑자기 왜!”

 

 

찌푸린 발키리의 얼굴을 보더니 문득 아기 울음 소리가 들렸다.

 

레오나의 품에 들려서 자고 있던, 아니, 자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던 레오나와 나의 아이였다. 멸망 전 세계의 기준으로 따지자면, 불행하게도, 아들이었다.

 

이야기를 떠올려야 한다는 부담감보다 아이의 울음에 당황해버린 발키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팔을 허공에 버둥거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당황해하는 건 초보 엄마인 이 아가씨도 마찬가지였다.

 

 

“으, 으아아? 자, 자 착하지? 엄마 여기 있으니까 너무 울지마렴. 뚝!”

 

 

이리 흔들어보기도 하고, 저리 흔들어보기도 하고,

 

자기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허둥거리며 달래는 레오나의 모습에서 왠지 모르게 전장의 암사자 시절이 떠올랐다.

 

눈동자에 핏덩이가 튀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던 백전불패의 아가씨가 이제는 자기 아이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여, 여보! 어떻게 해야 해? 배가 고픈 건가? 아니면 우리가 너무 시끄러웠나? 부, 분유는 챙겨 왔는데?”

 

“여기 분유통 있습니다! 지금 타드려야 하나요? 아, 아니면 모유가 낫나?”

 

 

발키리와 레오나가 산더미처럼 들고 온 아기용품 속을 헤집고 있는 동안, 나는 레오나의 품에서 아이를 받아 들고 조용히 언덕 위를 빙빙 돌았다.

 

당황해하는 엄마와 이모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신기하게 울음을 멈추는 아들내미. 아직 말도 떼지 못했는데 이렇게 반응하는 걸 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대, 대장! 여기 분유 준비 다 해놨습니다! 혹시 몰라서 기저귀도 챙겨왔고요!”

 

“기저귀가 문젠가? 아, 아닌데... 분명 볼일을 본 느낌은 전혀...”

 

 

여전히 호들갑을 떨고 있는 두 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그만해. 애 잔다.”

 

“에?”

 

 

양손에 딸랑이를 들고 서 있는 발키리가 고개를 빼꼼 돌린 채 내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아빠 품 안에서 다시 잠든 아들. 바람 소리처럼 잔잔한 숨결이 흘러 나온다. 아기 엄마와 이모는 그게 신기한지, 들고 있던 아기용품들을 내려놓는 것도 잊은 채 눈을 꿈뻑이며 내 품에 있는 아들을 보았다.

 

 

“애가 운다고 엄마들이 그렇게 같이 당황해하면 어떻게 해. 그러면 당연히 더 울지.”

 

“하,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데...”

 

“가만히 있으라고는 안 했거든요. 그냥 적당히 자장가만 불러주면 돼. 우리 아기 엄마는 노래 부르는 거 잘하잖아.”

 

 

곤히 잠든 아이를 다시 레오나에게로 넘겼다. 그제야 레오나는 엉망이 된 자신의 앞섬을 발견하고 재빠르게 치웠다. 제법 정돈된 옷자락을 엄마 품에 안긴 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꼭 움켜 쥐었다.

 

아마 저게 다시 엉망이 되는 건 30분도 채 걸리지 않을 거다.

 

 

“... 노래는 나보다 아스널이 더 잘하는 거 알면서.”

 

“누가 애들 앞에서 전국노래자랑 하래? 엄마 목소리가 뭔지 기억만 하게 해달라는 거지. 뭐 하면 발키리가 대신 자장가 불러줄레?”

 

 

내 시선이 닿은 것을 느끼자 발키리가 아까보다 세찬 손놀림으로 손사래를 쳤다. 들고 있던 딸랑이에서 방울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얼굴이 사과처럼 새빨개져가지곤 조용히 아기용품을 내려 놓았다.

 

예전에 지휘관급 아이들을 데리고 노래방에 같이 갔던 적이 있었다. 왜, 그 나이 또래 애들이 좋아할 만한 게 그런 거잖아. 물론 정신 연령은 이미 백 살도 지났다지만 새로운 문물 앞에선 신체 나이를 따라가는 법이다. 

 

조그마한 방과 두꺼운 노래방 책, 그리고 탬버린. 난생 처음 보는 기구들 앞에서 이것 저것 신기하듯이 만져보는 건 총지휘관인 용이나 스틸라인 대장인 마리나, 다 똑같았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거기서 우리 지휘관들의 노래 실력 순위가 매겨졌다. 논란의 여지가 없을 만큼 깔끔하게.

 

 

“... 나 노래방 다시는 안 갈 거야. 여보. 나 부르지 마.”

 

“그래서 그날 이후론 안 불렀잖아. 그래도 가끔씩은 둘이서 같이 가자. 레오나가 불러주면 좋겠는 노래가 있거든.”

 

 

발키리처럼 새빨개진 얼굴로 입술을 툭 내미는 레오나.

 

그래도 사람 좋은 웃음으로 물어보면 한 5초 정도 있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여준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안 그래도 가득 쌓여 있는 애정행각 욕구가 터져버릴 것처럼 솟아오른다.

 

하지만 이제 나도 전문 아빠. 이 정도 애정 공세는 아무렇지 않게 참을 수 있다.

 

 

“저, 각하. 차 좀 드시겠습니까? 손 떨고 계십니다.”

 

“... 아니. 괜찮아.”

 

 

물론 인내에는 약간의 후유증이 있는 법이다.

 

 

“아무튼. 이제 나 없이도 아이 돌보는 건 잘할 수 있지? 말했다시피 앞으로 일주일 정도 어디 잠깐 갔다 와야 하거든.”

 

“진짜 가야 해? 당신 없으면 조금 어려울 것 같은데...”

 

“발키리도 같이 있는데 뭐. 적어도 칸보다 어렵진 않을 거 아냐.”

 

“... 아하하... 그렇지.”

 

 

가만히 눈을 감고 칸과 칸의 아이가 호드 숙소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는 떠올려보았다.

 

일단 이불 속 깊이 숙성되어있는 담배 냄새부터 빼겠다고 숙소 벽면을 통째로 날려버린 하이에나가 떠오른다. 

 

그 뒤로는 애들 교육에 해가 된다며 스스로를 도박 근절 캠페인에 집어넣고 일주일 동안 반 폐인이 되어버린 샐러맨더. 칸의 명령으로 술병 컬렉션을 싸그리 빼앗긴 워울프와 기가 막힌 솜씨로 숨겨놓은 카메라들을 또 기가 막힌 솜씨로 부숴버린 칸과 무너진 카메라들을 보고 대성통곡을 한 탈론 페더.

 

그 술병들 옮기기 귀찮답시고 기계 촉수로 들고 움직이다가 죄다 깨먹어버린 스카라비아와 그걸 대걸레로 빡빡 닦느라 진땀을 뺀 케시크.

 

 

“... 갑자기 우리 애들이 막 자랑스러워지려고 하네.”

 

 

눈을 꼭 감고 사색에 잠겨 있던 레오나가 헛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야. 일주일도 많이 잡아서 일주일이니까. 정 뭐하면 아스널이랑 같이 있어. 에밀리가 아기 돌보는 건 선수더라고.”

 

“에밀리... 그 말솜씨 없는 애가? 신기하네.”

 

“그런데 각하, 가시는 이유가 뭡니까? 굳이 이제 와서 유럽까지 가시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습니다만.”

 

 

다시 맹물이 담긴 찻잔을 들고 차 마시기 연습을 하던 발키리가 물었다. 레오나도 함께 나를 바라보았다.

 

 

“그쪽 행정 구역은 개별 자치 구역으로 설정하셨으니 이제 와서 따로 섭정을 세우시려는 건 아닐 것 같고, 혹시 무슨 사고가 터졌나요? 전에 그... 이름이 뭐였더라. 아, 멀린이란 아가씨를 찾은 후론 딱히 신경 쓰고 계시던 곳은 아니시잖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내가 약속을 하나 하고 있었거든.”

 

 

바르그.

 

그녀가 내 마지막 임무를 도와주는 것으로 내건 조건은, 그녀의 어머니인 마리아 리오보로스의 장례를 치루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급한 일을 끝마치자마자 약속했던 대로의 장례를 준비하려고 했지만, 김지석의 묘에서 싸우는 동안 무언가 심정의 변화가 있었던 것인지 되려 그쪽에서 신경 꺼도 좋다고 했다.

 

 

‘어머니의 장례는... 조금 뒤에 해도 상관없다.’

 

 

그렇게 말한 뒤로 개인 임무를 받은 후 불현듯 오르카 호에서 사라졌다. 표면적으로는 대륙 내에 흩어져 있는 엠프레시스 하운드들이 더 이상 험한 짓을 하기 전에 찾아내는 것이 그녀의 목표였다.

 

그렇게 내가 아빠가 되는 연습을 하는 동안, 바르그는 처형자로서 버려진 엠프레시스 하운드들을 오르카 호로 모았고, 지금이 되어서야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제 약속을 지킬 때가 됐다고.

 

 

“... 각하께서도 참 사람 착하십니다.”

 

“내 말이. 지금 한가한 사람이면 또 몰라, 엄청 바쁘잖아. 당신.”

 

“알지. 아는데.”

 

 

엡실론이 남기고 간 조언이 계속 머릿속에 맴돈다.

 

 

-시간이 미친 듯이 훌쩍 지나가 버릴 거야.

 

“... 앞으로 몇 년은 계속 바쁠 테니까. 더 약속 미루기도 힘들어.”

 

 

단지 지금 있는 아이들만 키워야 한다면? 더 기다려달라 부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도, 아니, 당장 오늘만 해도 나와 동침 약속을 잡은 바이오로이드들이 십 수명이다. 이전에 있었던 정관 수술이나 콘돔도 없이. 생으로 정자를 집어넣어야 하는, 번식을 위한 동침 말이다.

 

그 말은 앞으로 몇 년 동안, 아니, 어쩌면 십 년 이상은 어린 아기들의 울음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상황에서 유럽으로 여행이라니? 내가 미쳤다고 그러겠나. 호로 애비라고 손가락질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러니까 우리 아기 엄마는 좀만 더 힘을 내줘요. 알았지?”

 

“... 그런 얼굴로 부탁하면 내가 어떻게 거절하겠어.”

 

 

레오나가 심술 난 개구리 같은 표정으로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나에게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레오나의 뺨은 당장 터질 것 같은 빨간색으로 색칠되어갔다.

 

쪽.

 

그 귀여운 볼이 터지기 전에, 나는 조용히 레오나의 볼에 입술을 맞췄다. 

 

찡긋, 레오나의 감은 눈이 살짝 떨렸다. 눈보다 살짝 아래, 홍조가 띄지 않는 살, 이젠 엄마로서 다크 서클이 조금 내려앉은 부드러운 뺨이 그녀의 예민한 곳들 중 하나였다.

 

 

“... 그래. 잘 갔다 와. 가서 이상한 짓 하지 말고. 바람 피지 말고.”

 

“내가 여기서 어떻게 더 바람을 피겠어... 그랬다간 내가 먼저 쓰러져.”

 

“그래도. 어디 가더라도 어깨 딱 피고, 허리도 쫙 피고, 몸 함부로 놀리지 말고. 딱 사령관답게. 알았지?”

 

 

레오나는 내 어깨 너머로 팔을 뻗으며 내 목을 단숨에 움켜 잡았다. 그대로 꽉 끌어안으려고 했지만 안고 있는 아이 때문에 갈등하는 것이 파르르 떨리는 팔목에서 느껴졌다.

 

 

“잘 다녀오십시오. 각하. 다음에 오실 땐 차 맛에 좀 익숙해지도록 하겠습니다.”

 

 

발키리가 물이 담긴 컵을 든 채로 말했다.

 

 

“그래. 그때쯤 되면 발키리도 여유롭게 보고하는 법을 알게 되겠지.”

 

“보고라... 모르겠습니다. 마냥 요원한 일인 것 같기만 한데. 만약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제대로 된 엄마도 될 수도 있겠죠.”

 

“아냐. 내가 볼 때 발키리는 지금도 충분히 훌륭한 사람이야.”

 

 

내 말에 발키리가 고요하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안다.

 

그 뜻이 조금 쓰다는 것도.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아직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왼쪽 다리를 보았다.

 

멀쩡하게 붙어있는 허벅지와 종아리.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다. 그게 원래 거기 있으면 안 되는 물건이라는 걸.

 

이따금씩 밤이 되면 발키리는 아직도 종종 옛날 얘기를 한다. 자신이 배신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그날 반란군에게 가지 않았다면, 자신이 조금이라도 일찍 인간을 믿었더라면, 아자젤의 교회 속으로 숨어들지 않고 오르카 호로 갔더라면.

 

그렇게 말하는 발키리는, 신기하게도 술에 취해 있었다. 어떤 독한 술을 마셔도 볼 한 번 빨개진 적 없던 그녀가 대체 얼마나 많은 술을, 얼마나 독한 술을 마셔야 그렇게 변할 수 있었을지 나는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발키리는 좋은 엄마가 될 거야. 나만 믿어.”

 

“이번만큼은 그러고 있습니다. 각하.”

 

 

발키리는 잔을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각하께서 찾아주신 몸이라는 이유로, 자해조차 하지 못한 채 매일 밤 혼자 술을 마셔야 했던 그녀는, 이제 제법 우스꽝스러운 손짓으로 대답할 줄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녀가 어떤 기분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녀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것은 그녀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녀가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되어도, 혹은 그 반대가 되더라도, 내가 모르는 지평 너머에서 그녀의 발자국은 계속 땅 위에 자신의 존재를 흩뿌린다.

 

남들의 이야기 위에 기생하며 살아야 했던 나 역시도.

 

모든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도 이야기는 계속된다. 

 

언제나 소설 속 해피 엔딩처럼, 혹은 베드 엔딩처럼 끝날 기회가 있었음에도 나는 여전히 이 낡은 잠수함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야기의 시작은 어지럼증이었다. 잠수함 속에서 느꼈던 기우뚱함과 함께 나는 눈을 떴다.

 

그 다음은, 더치걸이었다. 그녀들은 냄새가 났다. 살고 싶어 했던, 인간적인 냄새.

 

키르케도 있었다. 컴패니언과 페로, 리리스, 펜리르가 그 뒤에 있었다.

 

스틸라인, 마리, 브라우니의 이야기, 레프리콘과 레드후드.

 

수천명이 죽었고, 수만명이 죽을 뻔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었다.

 

아스널, 캐노니어, 에밀리.

 

골방 속 이야기. 죽어가는 곰팡이처럼 썩어가던 아이의 이야기도 있었다.

 

발키리. 발할라. 그 자매들.

 

반군과 라비아타. 용과 호라이즌. 바다 위에 이야기.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그들 하나하나의 선이, 너무도 많이 겹치고 겹쳐 드넓은 평야가 되어버릴 만큼. 또한 누군가에게는 까마득히 머나먼 과거로 잊혀진 채, 혹은 누군가에게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별이 되어버린 채, 

 

그리 많은 우화.

 

그리고 그만큼 많은 결말.

 

다만 나의 삶은 그 중 어느 것도 자신의 끝으로 선택하지 않았다. 낡은 잠수함으로부터 시작한 긴 삶의 여정은, 마치 보편적인 생존 본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선을 남들에게 의탁하여 잇고 또 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 비루한 이야기를 조금 더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의 삶을 위해 내가 선택했던 또 다른 이야기 중 하나.

 

무수한 꽃들 속에서도 유독 표독스러운 가시가 기억에 남았던 이야기.

 

 

-사령관. 바르그다. 하달된 임무를 완수했다.

 

 

바르그와 함께 했던 이야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녀의 약속 때문만이 아니라, 그저 내가 선택했기에 가서 지켜보아야만 하는 이야기.

 

나는, 붉은 장미의 끝을 보러 가야만 한다.

 

 

-장화를 찾았다.

 

 

삼일 뒤.

 

나는 독일 프랑크프루트로 떠났다.

 

 

 

 *



다음화: https://arca.live/b/lastorigin/80991905?p=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