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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카 호를 떠난 지도 벌써 5년이 흘렀다.

 

떠났다는 표현은 조금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나는 오르카 호에게 그리 달가운 손님이 아니었을 테니까.

 

뻔뻔하게 사는 게 내 특기긴 하지만 아무리 그런 나라도 그 사람들의 시선을 견뎌낼 만큼 단단한 철면피를 까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 그러니까 굳이 말하자면, 나는 도망쳐 나왔던 거다. 평생 사람을 죽이던 내가 사람이 무서워서.

 

 

 

“오늘은... 이 정도만 해놓으면 되겠지.”

 

 

 

길거리에서 주운 나무판자를 손으로 잘게 뜯어 담 사이사이를 기워 놓았다. 옆으로 시선을 돌리면 길게 늘어진 철조망 사이로 내가 직접 쑤셔 넣은 나무 조각들이 보였다.

 

리오보로스 가의 대저택.

 

언젠가 정신을 차리고 나니, 먼 길을 떠나 내가 처음 눈을 떴던 곳으로 돌아온 뒤였다.

 

대규모 산업 도시였던 독일의 프랑크프루트. 공장의 매연과 거대한 기업 시설의 데이터베이스 역할을 하며 나라의 중추로 발전했던 이 도시는 마천루처럼 솟아오른 빌딩들로 발 디딜 틈이 없는 곳이었다.

 

딱, 철충의 공격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나중에 레모네이드 델타라는 년이 바이오로이드를 문자 그대로 갈아 넣으면서 전선을 러시아 쪽으로 물러내기는 했지만, 그때까지 도시의 수많은 건물이 무너지고 먼지로 변해버렸다. 

 

게다가 전쟁이 안정화되기 전에 이 도시는 이미 폐허로 변해 있었다. 유럽 내에서 아직 쓸만한 가치가 있는 곳들은 델타가 바이오로이드 설비 지구로 사용하기 위해 재건 작업을 진행했지만, 이곳은 그런 것 없이 완전히 버려져 버렸다.

 

도시에 전력을 공급하는 발전소는 무너지고, 태양관 패널을 달아 놓은 가로등들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초저녁인데도 벌써 바깥은 칠흑처럼 어둡다.

 

길바닥에 고인 웅덩이 위에는 멸망 전에 사용되던 오토마타들의 시체가 죽은 것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전쟁의 폐허가 이 시가지의 하늘을 덮은 이후로 저 애들은 빛을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다행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 정도의 저택이 뼈대라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 말이다.

 

 

 

“담 보수 작업도 이제 마무리 단계고, 녹슨 쇠창살도 약간만 갈아주면 될 테니까... 이 정도만 하고 끝내자.”

 

 

 

일을 끝마치기 위해 붉은색 녹으로 완전히 덮어버린 창살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 다음, 단숨에 위로 찢어버리듯이 올린다.

 

콰드득-

 

그러면 짜잔, 겉면에 붙은 녹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다시 광을 낸 것처럼 반짝거리는 쇠창살에 남아있는 녹을 건틀렛의 손톱으로 살살 긁으면서 손바닥의 찰과상을 살폈다.

 

 

 

“아야야야... 아파라.”

 

 

 

살짝 통증이 밀려오긴 하다. 하지만 예전처럼 고통스럽진 않다.

 

오르카 호에서 받은 강화 시술 효과인 것 같기도 하고, 그날 내가 미친 척하고 입에 쏟아 넣은 오리진 더스트 덕분인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신경 쓸 정도로 아프진 않다.

 

녹이 손바닥에 몇 덩어리 정도 박혀있긴 하지만 탈탈 털면 무 뽑히듯이 쑥쑥 뽑힌다. 게다가 파상풍 정도는 옛날부터 여러 번 겪어본 탓에 걱정하려고 해봐야 안 된다.

 

 

 

‘뭐 하면 근처 약국 가서 알코올 좀 구해다 뿌려주면 되니까.’

 

 

 

그래도 흉터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남아있던 연구 자료들을 보니까 블랙 리버에서는 팔다리를 잘라도 다시 재생하는 바이오로이드 같은 걸 만들고 있던 것 같은데, 난 그런 플라나리아 년들은 못 되는 모양이다.

 

상처가 나아도 흉은 진다. 그 덕에 지금 내 손바닥은 붉은 반점 같은 상처들이 생겼다 아물었다 생겼다 아물었다를 쉴 새 없이 반복하고 있다.

 

가끔씩은, 일을 끝맞치고 나면 그 상처들에게 눈길이 가고 만다. 신경 쓰고 싶지 않지만, 그냥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오늘 같은 날처럼.

 

 

 

‘... 그 사람은 이런 거 싫어하려나...’

 

 

 

...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고작 5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떨쳐내야 할 생각을 제대로 지우질 못했다. 이럴 때는 나도 내가 옛날에 어떻게 살았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고개를 도리도리 좌우로 움직였다. 그때와 다르게 조금 자라서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이 내 눈을 쳤다.

 

 

 

“아야! 아이씨...”

 

 

 

매운 기운이 시신경을 타고 흘렀다. 멍청하게 찔끔 흐른 눈물을 빨리 소매로 닦아 냈다. 쓸데없이 커다란 건틀렛의 뒤쪽 천쪼가리가 이럴 때는 도움이 된다.

 

사실 녹 제거 작업은 와이어로도 할 수 있다. 쇠창살을 와이어로 몇 번 감아준 다음 위 아래로 쓱쓱 문질러주면 어지간한 녹들은 전부 다 뜯어낼 수 있다.

 

하지만 날이 어두워졌다. 무너져 내린 빌딩의 창가로 주황색 불빛이 순간 반짝였다가 사라진다.

 

이 버려진 도시에서 살아남은 바이오로이드. 아니, 부랑자들.

 

해가 지기 전에 보수 작업을 끝내야 하는 이유가 저놈들이다.

 

 

 

“하아... 진짜 지치지도 않고 또 찾아왔네.”

 

 

 

손아귀를 몇 번 움켜쥔 다음 와이어를 손목에 채워 넣었다. 넣자마자 와이어의 소켓에서 붉은빛이 발하며 와이어를 뜨겁게 가열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주홍빛으로 변하는 철제 와이어.

 

발걸음을 저택 밖으로 옮겼다. 이 저택에는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아아, 통신망 체크. 내 목소리 들리면 들린다고 해라.”

 

 

 

어깨 전면에 달린 작은 무전기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이건 엠프레시스 하운드 전용 채널로 연결되어 있는 무전기다. 그러니 만약 이 주변에 있는 부랑자들이 엠프레시스 하운드 소속이라면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다.

 

장소가 장소인 만큼 이해는 한다. 나 같은 장화가 또 없으리란 보장도 없고, 그 애들이라면 이 저택을 전부 불태워서라도 마리아, 그 개 같은 년에게 복수하고 싶어할 테니까.

 

하지만 이 버려진 도시에서 쉼터 역할을 할 수 있는 건 저 저택 밖에 없다. 그러니 만약 복수 때문에 이곳에 온 애들이 있다면 말로 설득을 해보려고 하는 거다.

 

 

 

“다시 말한다. 내 말 들린다? 그럼 걸어 나와.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

 

“좋게 말하는 건 이번 한 번뿐이야.”

 

 

 

근데 그것도 잘 얘기가 될 때의 경우고.

 

지금처럼 들려오는 말이 없다? 그럼 둘 중 하나다.

 

나와 말하는 것보다 이 집을 태워 없애버리겠단 생각으로 가득한 복수귀거나, 아니면 그냥 눈에 보이는 모든 걸 약탈해가려는 도적들이거나.

 

그리고 내 경험상, 둘 모두 다루는 방법은 하나다.

 

 

 

“하아, 대답이 없네. 그렇지?”

 

 

 

실력 행사.

 

무전기의 채널을 전체 공개로 바꾼 다음 입술을 씹으면서 말했다.

 

 

 

“지금 내 목소리 들리는 애들 주목. 지금 니들 눈엔 이 건물이 무슨 대단한 보물 상자처럼 보일 텐데 털어갈 만한 건 하나도 없으니까 빨리 사라져.”

 

“......”

 

“생각을 해봐라. 니들이 보기에도 그렇게 보이는데 다른 애들은 안 그랬을까? 이거 뼈대만 멀쩡한 쭉정이니까 괜히 서로 불편하게 하지 말고 갈 길 가자. 응? 나도 지켜야 할 게 있단 말이야.”

 

 

 

침묵만 가득한 무전기 너머.

 

채널을 바꾸면 저쪽도 나에게 말을 할 수 있을 텐데 아무 말이 없다? 그럼 더 얘기할 필요가 없다.

 

다리에 힘을 주고 뭉친 어깨를 빙빙 돌렸다. 내가 저쪽을 볼 수 있었으니 저쪽도 나를 볼 수 있었을 거다. 청각을 집중해 보니 자세한 말은 들리지 않지만 성대가 찢어진 것처럼 기괴한 목소리들이 재잘거리는 게 느껴진다.

 

멸망하고도 120년. 거기에 5년을 추가로 더 하면 125년. 그 정도를 이 폐허 속에서 살아남은 것들이다. 이런 싸움에는 잔뼈가 굵은 것들이란 뜻이다.

 

그런 애들을 상대로 싸우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이건 니들이 자초한 거야.”

 

 

 

무전기를 떼어버리고 손바닥으로 땅을 짚었다. 그와 동시에 오른쪽 다리에 근육을 한계까지 수축시킨다. 한계가 느껴지면 오리진 더스트로 혈류를 가속시켜 더욱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단숨에 놓아버린다.

 

용수철처럼 뛰어오른 몸이 한순간에 건물 6층 높이로 솟구쳤다. 아직 몸의 가속이 사라지기 전에 눈동자를 돌렸다.

 

찾는다.

 

 

 

“빙고.”

 

 

 

그리고 찾았다.

 

등쪽의 가속을 팔로 이동시켜 허공에서 몸을 비틀었다. 그 반동을 이용해 아까 보았던 창가로 와이어를 던졌다.

 

콰직!

 

낡은 콘크리트 벽에 낚시줄처럼 걸리는 와이어.

 

그와 동시에 이두근을 수축시켜 내 몸을 건물 쪽으로 쏘아 보냈다. 와이어로 균열이 가있던 건물벽은 내가 부딪히자마자 모래알갱이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뭐, 뭐야 씨발!”

 

 

 

진입하자마자 보이는 바이오로이드.

 

5명 정도. 무리가 크다. 아직 연기가 피어오르는 화톳불. 끈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시간을 보아하니 내 무전을 듣자마자 끈 거다. 상황을 주도적으로 지휘하는 리더가 여기엔 없다는 뜻.

 

 

 

“뭐, 뭐해! 빨리 죽여!”

 

 

 

그나마 뒤쪽에 숨어 있던 바이오로이드가 악을 쓰며 다른 애들에게 말했다.

 

화염을 분출하며 총구가 불을 뿜는 게 느린 화면처럼 보인다.

 

그와 동시에 날아오는 총알과... 전기? 생체 전기다. 블랙리버의 실패작들 중 하나일 터. 당황해하는 걸 보니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년이다.

 

총알이 총구에서 발사되는 모습을 보며 궤적을 그렸다. 일직선 상에 정조준 되어 있는 내 이마. 

 

왼쪽 허벅지에 힘을 주어 땅을 박차고 피한다.

 

콰지직!

 

 

 

“아, 아, 아아아아아! 저리 꺼져! 이 괴물!”

 

 

 

그와 동시에 와이어를 뻗어 머리카락이 솟구치는 전기뱀장어 같은 애의 손목을 잡았다.

 

손목에 묶이는 이질감을 느꼈던 것인지 와이어를 붙잡고는 전기를 흘려보냈다.

 

파츠츠츳!

 

전류가 강하다. 와이어는 내가 달궜던 것보다 훨씬 뜨거워져 거의 선홍색으로 변해버렸다.

 

 

 

“어?”

 

파팟!

 

 

 

와이어를 쥐고 있던 손을 거세게 흔들었다.

 

S형으로 물결치는 철사. 그와 동시에 손목이 묶인 전기뱀장어도 휘청거렸다. 순간 붕 떠오르는 신체에 녀석이 눈을 왕방울처럼 뜬다.

 

아주 잠깐의 찰나, 전류가 약해진 틈에 나는 와이어를 수도(手刀)로 잘라냈다. 힘의 발원지가 사라진 와이어는 그대로 날아가 벽 위에 두꺼운 자상을 남겼다.

 

 

 

“그러니까 내가 말했지.”

 

 

 

와이어를 건틀렛 안에 집어넣고 발가락 끝에 힘을 모았다.

 

동시에 총알처럼 쏘아 올린 신체. 어깨에 힘점을 응축시켜 허공에 떠오른 녀석의 몸을 벽으로 날려 보냈다.

 

쿵!

 

와이어처럼 벽에 박혀버린 신원불명의 바이오로이드. 

 

여기까지가 5초.

 

상황을 보니 저 애가 이 부대의 핵심이었을 것이다. 안 그랬으면 지금도 총을 쏘든 뭘 하든 나에게 반격을 했을 테니까.

 

 

 

“... 5, 5초...?”

 

“대장이 10분은 버티라고 했는데.”

 

 

 

얼어붙은 바이오로이드들이 주저앉은 채로 손바닥으로 바닥을 기었다. 쌓여 있던 먼지들이 뿌옇게 일어나며 몇몇은 도망갈 준비를 하려는 듯했다.

 

하지만 이내 금방 멈춰 섰다. 그와 함께 얇은 와이어들이 거미줄처럼 팅, 하고 울렸다. 바이오로이드들의 뒷목, 턱, 손목의 진동이 와이어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는 동안, 나는 뒤에서 말만 하고 있던 바이오로이드의 어깨를 짓누르면서 무릎 꿇렸다.

 

 

 

“아아아아아!!”

 

“좋게 좋게 끝내자니까 왜 이렇게들 말귀가 어두워. 나 그렇게 착한 사람 아니란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힐긋 어깨 자락을 벗겨 상처를 살폈다.

 

101921, 확실하게 보이는 실험체 넘버와 그 옆에 인두로 지진 듯 검게 남아있는 블랙리버의 심볼.

 

아마 근처에 있던 실험실에서 나온 바이오로이드일 것이다. 어깨는 백인처럼 새하얀데 팔 쪽부터는 흑인인 것처럼 온통 갈색이다. 

 

아마 옛날에 돈 많은 부자가 ‘개인 튜닝’을 신청한 개체인 것 같은데, 실험 도중에 연구소가 무너진 모양이다. 이 공업 지구 단지 지하엔 이런 특이 취향 아재들을 위해 각종 서비스들이 제공되고 있었으니 드문 케이스는 아니다.

 

괜한 연민이 들기 전에 빠르게 물었다.

 

 

 

“너, 대장이 따로 있다고 했지?”

 

“으, 응... 있어.... 으아악!”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앞으로 넘어지는 바이오로이드. 자세히 보니 상처 부위의 실밥이 뜯어지고 있었다. 내가 손 덴 어깨가 아니라 반대쪽 어깨의 실밥 말이다.

 

거부 반응? 실험의 부작용인가? 어쨌든 상처 속으로 새빨간 근육의 절단면이 훤히 보인다. 전문가가 아닌 내가 봐도 항생제가 없으면 얼마 못 가 죽을 게 뻔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이 애의 어깨에서 손을 뗀 후였다. 그래도 심문은 계속 해야 했다.

 

 

 

“저기 있는 저택을 털러 온 거냐? 지시한 사람은?”

 

“어, 없어! 그냥 대장이 세운 계획이야!”

 

“그럼 그 대장이란 애는 지금 어딨지?”

 

“저... 저기 옆쪽 4번째 빌딩. 우리가 쳐들어가서 들쑤셔 놓으면 대장이 와서 뒤처리를 한다고 했어...”

 

 

 

쓰러져 있는 애의 말을 들은 다음 벽 뒤에 몸을 숨기고 저택 쪽을 살폈다.

 

어느새 건물 밖으로 나와 담쪽을 향해 뛰고 있는 바이오로이드들. 그중에서 가장 잘 무장된 놈이 두꺼운 도끼 같은 것을 들고 허공에 손짓을 하고 있었다.

 

무리는 둘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저택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놈들. 나머지는 내가 있는 곳을 응시하고 있는 놈들.

 

그 잠깐 사이에 무리를 나눈 걸 보면 경험은 제법 있는 녀석인 것 같다.

 

 

 

“미, 미안해! 네 집을 털려고 한 건 고의가 아니었어! 그냥 버려진 건물인 줄 알고 그랬던 거야! 우리를 봤으면 보, 본대도 이제 그만둘 테니까...”

 

“그럼 저기 있는 애들은 내가 나왔을 때 포기했어야지.”

 

“어... 어? 아직도...?”

 

 

 

뜯어지는 어깨를 주변 동료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붙인 바이오로이드가 물었다. 찌푸려진 미간에는 당혹감이 역력하다.

 

뻔하지. 아마 적당한 애들 모아 놓고 고기 방패로 써먹은 다음, 자기는 유유히 안으로 들어가 물건들을 쓸어 담겠다는 생각이었을 거다.

 

이런 곳에서는 흔한 수법이다.

 

 

 

“내, 내가 대장한테 말해볼게! 이렇게 보여도 나름 직급이 높아서 내 말은 들어줄 거야!”

 

 

 

그랬으면 널 고기 방패로 썼겠냐.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난 그냥 말없이 와이어를 회수했다.

 

그리곤 다시 내가 들어왔던 곳으로 걸어갔다. 건물 6층 높이에서 부는 바람은 눈을 뜨기 힘들 정도였다.

 

 

 

“필요한 게 뭐지?”

 

“피, 필요한 거? 물 조금이랑 식량 조금... 그리고 가능하면 의약품 같은 것도.”

 

“그럼 너네 대장에게 기다리고 있으라 말해. 하지만 그래도 말 안 들으면 내 책임은 아닌 거다.”

 

“아, 알았어.”

 

“그리고.”

 

“그리고?”

 

 

 

마지막 와이어가 건틀렛 속으로 들어왔다. 착, 하고 닫히는 소켓의 소리가 콘크리트 벽 안에 부딪혔다.

 

뒤쪽을 흘겨보며 뭉친 어깨를 풀었다. 여기서 싸운 건 몸풀기도 안 돼서.

 

멍해 보이는 바이오로이드를 향해 말했다. 구름을 뚫고 내려온 달빛에 겨우 저 애의 얼굴이 보였다. 전기뱀장어 녀석도.

 

 

 

“저 집은 내 꺼 아니야.”

 

“응?”

 

 

 

저 집은 내 것이 아니다.

 

마리아 리오보로스 것도 아니고.

 

건물 벽을 타고 흐르는 바람에 몸을 실었다. 그와 동시에 내 몸은 처음에 설치했던 와이어를 따라 부드럽게 내려갔다.

 

공중에서 조용히 떨어지는 내 소리에 몇몇이 고개를 돌려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대장 노릇을 하던 놈은 눈앞의 쇠창살을 뜯어버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년의 머리 위에서 와이어를 끊었다.

 

 

 

“흐흐흐, 이런 폐허에서 자기들만 좋은 곳에 살면 안 되지. 원래 이런 건 좀 같이 나누고 해야 하는-”

 

콰자작!

 

 

 

중력이 내 발목을 잡아 끌어내렸다.

 

땅에 닿기 직전, 놈의 등 뒤에 달린 도끼를 뽑아내 쿠션으로 삼았다. 내 발이 손잡이에 닿자마자 거대한 도끼를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반으로 갈라져버렸다.

 

녹슨 철 부스러기가 허공으로 날았다. 거대한 덩치의 대장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날아온 파편들로 등 뒤가 엉망이 되었다.

 

순간 멍하니 서 있는 대장.

 

손을 탈탈 털면서 말했다.

 

 

 

“10분? 10분을 버티라고?”

 

“너, 너 뭐-”

 

“재밌는 얘기네. 기회를 줄게.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적당한 선에서 가져다 줄 테니까. 내가 착한 사람은 못 돼서 한 번만 말하는 거다.”

 

“... 가져다줘? 물건을?”

 

 

 

목덜미 뒤로 보이는 블랙리버의 심볼. 이 애도 실험의 부작용으로 생긴 바이오로이드인 것 같다.

 

덩치가 내 세 배는 될 것 같은 년이 눈 깜짝할 사이에 몸을 비틀어 내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크하하하! 그거야 말로 재미있는 소리군! 안에 있는 건 죄다 필요하니까 싹 다 가지곳-”

 

 

 

콰드득-

 

하지만 내 주먹이 더 빨랐다.

 

놈이 비트는 궤적을 따라 정확히 반대로 팔을 뻗었다. 어깨에 뭉친 근육을 풀어주는 느낌으로. 꽉 쥔 주먹의 등은 삼각근을 채 펴기도 전에 대장의 턱을 가격했다.

 

손등에 맞은 턱뼈가 으지직 부러지는 것이 눈으로 보였다. 굳이 내가 힘을 줄 필요도 없었다. 자기 몸을 돌리는 속도만 해도 충분히 빨랐으니까.

 

뭐, 그래봤자 ‘눈 깜짝할 새’라는 건 우리에게 그다지 빠른 속도도 아니다.

 

찰나의 충격에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놈의 몸을 향해 세 번 더 주먹을 휘둘렀다. 명치와 어깨, 다리 무릎이었다.

 

주먹에 신체가 푹 파이는 것이 느껴졌다. 치명상이 되기 전에 주먹을 거두고 마저 쓰러지는 놈의 얼굴을 구경했다. 여기가 내 집이라고 생각하는 게 보일 만큼 멍청한 얼굴이었다.

 

 

 

“커... 크억...!”

 

“그러니까 말했잖아. 나 착한 년 아니라고.”

 

“괴... 괴물 같은 년...! 이래서 선발대가 여기를 못 털었...”

 

“뭐야, 그것도 너네였어?”

 

 

 

파벌 싸움이 심한 동네라는 건 알았는데 이 정도로 규모가 컸던가?

 

이 도시가 얼마나 영양가 없는 곳인지 시간만 있다면 알려주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백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도시에 갇혀 있던 애들이 그런 걸 이해할 리도 없으니.

 

헛수고는 내 취향이 아니다. 그래. 확실히 아니야.

 

 

 

“필요한 건 보내줄 테니까 여기는 내버려 둬.”

 

“크... 크흐흐, 욕심도 많은 년이군... 이 넓은 곳은 너 혼자 차지하겠다고...?”

 

“... 왜 자꾸 나 혼자라고 하는지 모르겠네.”

 

 

 

이럴 줄 알았으면 담 보수 공사가 아니라 푯말부터 세울 걸 그랬나.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 잡으면서 나머지 패거리들을 향해 와이어를 휘둘렀다. 허공에 길게 궤적을 그린 30미터 길이의 철사가 저택 주변으로 거대한 포물선을 그렸다.

 

그러자 선 뒤쪽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나머지들. 머뭇거리는 애들도 내 행동의 의미는 확실히 이해한 것 같았다.

 

쓰러져 쿨럭거리는 대장 년을 뒤로한 채, 나는 저택 안으로 다시 걸어들어왔다.

 

사실상 폐허나 다를 바 없는 건물의 내부. 하지만 이런 곳도 다른 곳에서 살다 온 녀석들에겐 궁궐이나 다름없을 거다. 나름 리오보로스 일가의 건물이라고 가정용 AGS들이 수리를 하긴 했으니까.

 

그렇게 안으로, 복도 벽에 걸린 촛대를 살짝 앞으로 당겨 나오는 통로 내부로 걸어 들어갔다. 달그닥거리는 외벽은 여기도 상황이 멀쩡하지만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어 들어갔을까, 그림자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이끼 냄새가 사라질 때쯤이 되어서야 계단이 끝이 났다. 그 입구가 있는 곳의 복도 저편에는 아직 불이 들어오는 비밀 시설이 있었다.

 

 

 

“... 이래서 여기가 싫어.”

 

 

 

내가 처음 눈을 떴던 곳. 마리아 리오보로스가 내게 목덜미를 채웠던 곳.

 

아직도 목 주변에는 괴사해버린 피부가 남아있다. 사람의 피부가 너무 꽉 조이면 붉어지다 못해 푸른색으로 질려버린다는 사실을 이걸 보고 처음 깨달았었다.

 

그럼에도 여기에 물건들을 저장해놓는 건 다른 이유가 없다. 공기가 차가워서 보관에 용이하기도 하고, 비밀 설비니까 누군가에게 도난당할 걱정도 없고.

 

무엇보다도, 지금 내가 여기 있는 이유가 모두 여기서 자고 있기 때문이었다.

 

날이 어두운 밤이라 내려온 내 발걸음 소리를 듣는 아이들은 없었다. 모두가 넓은 회랑 안에서 이불을 덮고 자고 있었다.

 

쌕쌕거리며 가뿐 숨을 몰아 쉬고 있는 아이들.

 

몇몇은 또래 애들 같이 오글거리는 잠꼬대도 하고 있었다.

 

 

 

“헤헤... 선생님...”

 

 

 

나는 조용히 아이들이 깨지 않게 창고로 걸어가 물과 의약품을 조금 챙겼다.

 

 

 

“......”

 

 

 

... 그래. 이상하다.

 

내가 이런 소리를 듣는다는 게 많이 이상하다.

 

그럼에도 이 도시에는 버려진 어린 바이오로이드들이 너무 많았다.

 

사람이 버리고 나서부터 가장 먼저 버려진 것이 어린 바이오로이드들이다. 모성애를 느끼는 바이오로이드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애들이 살아갈 만큼 프랑크프루트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난 그냥 그런 애들을 주워왔을 뿐이다.

 

 

 

“......”

 

 

 

그래서... 그러니까...

 

...... 으으.

 

 

 

“... 몰라.”

 

 

 

...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그렇게나 사람을 죽이고 다니던 장화가 지금은 애들 보모 노릇이나 하고 있다는 얘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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