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자, 자크 데리다에 대해서 알아볼 시간입니다. 자크 데리다는 해체주의의 창시자로, 당시 철학계에 뜨거운 화두로 떠올랐던 구조주의를 비판했습니다. 단순히 구조주의를 비판한 것만으로 데리다가 철학사에 이름을 남기지는 않았겠죠. 데리다가 철학자로서 보여준 모습을 아주 거칠게 표현하면 사기꾼과 철학자 사이에 서 있는 자로, <LA 타임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상에서 가장 큰 논란이 된 철학자’였습니다.

 

이런 논란이 벌어진 이유는 데리다가 글을 일부러 어렵게 꼬아 썼기 때문입니다. 아래에서 설명하겠지만 데리다는 구조의 해체를 주장하며 기존 문법 체계를 따르지 않았고,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동음이의어나 다의어를 사용한 언어 유희를 잔뜩 사용했거든요. 이러니 어디 글을 정확히 읽을 수 있나요, 배울 대로 배웠다는 학자들도 두 손 두 발 다 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거죠.

 

대체 왜 데리다는 글을 어렵게 썼을까요? 해체주의가 뭐길래 그러는 걸까요? 이 일련의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데리다 이전에 있었던 철학계의 맥락을 살펴봐야 합니다.”

 

리마토르는 자료 화면을 넘기며 청중을 눈으로 살폈다. 쉼 없이 바로 강의를 들으니 슬슬 체력적으로 부담이 될 시기였다. 그의 생각대로 강의를 듣는 이들 중 상당수가 목을 좌우로 돌리거나 기지개를 켜면서 몸이 뻐근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데리다에 대한 설명을 빨리 끝내지 않으면 다들 잠들 것 같다는 생각에 리마토르는 핵심을 머릿속으로 추렸다.

 

“자, 앞선 설명이 길었으니 이번 설명은 최대한 빨리 끝내보겠습니다. 이번 설명이 끝나면 쉬는 시간을 넉넉하게 드릴 테니 여기까지만 집중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가 안경 위로 떨어지는 땀을 닦으며 휴식 시간을 약속하자 청중들도 다들 바라던 바였다는 눈치로 박수를 쳤다. 얼마 안 남은 집중력을 끌어모은 리마토르는 집중력이 깨지지 않도록 열정적으로 강의에 임했다.

 

데리다 이전의 서양 철학은 플라톤 이래로 내려온 이분법의 사고방식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구조주의를 구축(構築)한 레비스트로스의 표현을 따오면 +에 대응하는 -가 있는 이항 대립의 구조였죠. 세상 모든 것이 상호 대응하는 관계 속에 있다는 주장 속에는 말과 글도 있었습니다. 말과 글은 문화권을 막론하고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대척점에 서 있는 관계로 여겨졌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어록 중에도 ‘쉬지 말고 기록하라. 기억은 흐려지고 생각은 사라진다. 머리를 믿지 말고 손을 믿어라.’라는 말이 있죠. 소크라테스도 그랬습니다. 글보다 말을 더 중시한 소크라테스는 평생 단 한 권의 저작도 남기지 않았죠.

 

여기서 중요한 점을 하나 더 짚고 갑시다. +와 -가 있는 이항 대립의 구조를 가진 문화권에서는 어느 쪽이 더 귀하고 어느 쪽은 덜 귀한지가 구분되었습니다. 동양 철학에서는 전한 시대 유교를 국교로 만든 철학자 동중서가 자신의 저서 <춘추번로>에서 양존음비(陽尊陰卑) 사상을 드러냈고, 서양 철학에서는 플라톤이 이데아의 세계와 이데아의 그림자 세계를 구분하며 이데아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다시 말해 중심과 주변을 구분했죠.

 

말과 글도 이런 사고방식을 적용받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이 중심이고 글이 주변이라고 생각했죠. 왜 그럴까요? 이는 소크라테스가 중시했던 산파술(産婆術)을 떠올려보면 답이 보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말은 그 자리에 있는 생생한 영혼의 사유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끊임없이 대화하며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함으로써 영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고귀한 행위가 말이었죠. 반대로 소크라테스에게 글은 이미 지나간 말의 껍데기를 주워 깁은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대화할 때 들어오는 상대의 표정, 분위기, 발화 시간과 장소 같은 여러 조건이 조합되어 문자로 형용할 수 없는 내용까지 전달할 수 있는 말과 달리, 글은 대화에 참여한 이들이 어떤 말을 나누었는지만을 적게 되어 대단히 한정된 정보를 담게 됩니다. 맥락으로 전달되는 정보는 사라지기에 대화 상황을 잘 아는 이가 보면 글로도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대화 상황을 모르는 이가 보면 엉뚱한 해석이 나올 수도 있는 겁니다. 그렇기에 소크라테스는 말이 중심이고 글이 주변이라 보았고 이 사상은 서양 형이상학의 중심에 자리를 잡게 되었죠.

 

중심과 주변, 말은 귀하고 글은 그렇지 않다. 이 두 구조는 철학사에서 오랫동안 쭉 이어져 왔습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이 나타났고, 첫 번째 구조인 중심과 주변은 압도적인 힘에 의해 파괴됩니다. 힘이라, 과연 누구일까요?”

 

리마토르가 장난스럽게 묻자 청중 중 누군가가 “라비아타 통령입니다!”라고 외쳤다. 그 말에 좌중이 웃음을 터뜨리며 분위기를 짓누르던 피로가 날아가자 리마토르는 강의에 박차를 가했다.

 

“하하, 안타깝게도 철학에서 말하는 힘은 물리적인 힘보다 욕망 내지 사고력에 가깝습니다. 철학사를 통틀어서 힘을 추구한 철학자라고 하면 한 명이 추려지죠.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입니다. 니체는 중심에 앉아있는 신을 주변에 있는 인간이 죽여 버렸다고 외쳤습니다. 하지만 공석이 된 중심에는 이성이 새로운 주인으로 들어가 앉았죠. 그럼 신이 중심에 앉아있을 때와 뭐가 다른가요? 이성 중심 철학도 인간을 철학의 부속물로 보는 건 그리스도교 철학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에, 니체는 힘을 통해 중심에 앉아있는 이성을 끌어내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자, 위버멘쉬(Übermensch)가 되어 중심과 주변의 세상을 탈피해야 한다고 말했죠.

 

데리다는 이런 니체의 사상을 이어받으면서 후설의 현상학을 첨가합니다. 그 결과 세상의 구조라고 여겨진 중심과 주변 관념을 이제 버릴 때가 되었다고 말했지만, 니체처럼 마구잡이로 완전히 부수지 말고 전체를 일부로 나누어 부품처럼 해체하고 이상적인 형태로 재조립해야한다고 말했죠. 이것이 해체주의입니다. 데리다는 해체주의를 통해 중심-주변 관계를 분해했습니다. 이를 다룬 게 그의 저서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목소리와 현상>, <글쓰기와 차이>로, 데리다는 여기서 말을 글보다 우위에 두는 관점도 해체합니다. 해체주의에 대한 배경지식이 마련된 것 같으니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 보죠.”

 

사령관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신은 좋든 싫든 구 인류의 유산 위에 서 있는 현재를 타파하기 위해 창조적 파괴를 생각했는데, 그와 반대로 리마토르는 현재를 분해했다가 재조립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사령관은 그가 어떻게 과거와 현재, 미래를 바라보고 바이오로이드의 존재를 해석했는지 좀처럼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자신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사령관은 설명을 이어가는 리마토르의 입에 청력을 집중했다.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그의 저서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목소리와 현상>, <글쓰기와 차이>에서 자세하게 설명되었습니다. 이 중에서 많은 분들이 ‘그라마톨로지’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보실 텐데 그라마톨로지는 문자학(Grammatology)라는 뜻입니다. 제가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데리다가 일부러 글을 어렵게 썼다고 했는데 그것도 문자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했으니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데리다는 말이 글보다 더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는 주장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글은 말의 단편적인 인상을 전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신체와 정신에 남겨진 기억을 함축하고 있다고 말했죠.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어떤 분이 ‘이 교수 수업은 어렵다’라고 강의 평가를 남겼습니다. 여태까지의 서양 철학에 따르면 저 문장은 ‘리마토르 교수의 수업은 이해하기 힘들다’라는 단편적인 지식을 전달할 뿐, 어떤 부분에서 왜 어려웠는지와 같은 구체적인 정보는 강의 평가를 작성한 당사자의 발화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데리다는 ‘리마토르 교수의 수업이 어떤 점에서 어려웠고, 어떤 점이 설명이 미흡했다’라는 구체적인 기억이 문장에 담겨 있다고 주장합니다. 수업을 처음 듣는 사람이 난이도가 높은지 낮은지를 정확히 알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죠. 수업이 어려웠다는 건 이전에 쉬운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있고, 그 기억에 견주어서 어려웠음을 뜻합니다. 바꿔 말하면 과거의 수업에 대한 기억이 텍스트로 구체화된 거죠. 그럼 저 강평을 작성한 이의 말은 뭘까요? 데리다는 강평을 작성한 이의 말은 사유라고 합니다. 추상적인 사고가 텍스트로 구체화된 것이 ‘이 교수의 수업은 어렵다’라는 문장이므로 텍스트가 없으면 사고를 실재(實在)로써 드러낼 수 없. 더 쉽게 말하면 닥터가 새로운 원소를 발명 내지 발견했는데, 그 새로운 원소의 개념은 존재하나 표현할 단어가 없는 거에요. 이게 바로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에서 밝힌 텍스트가 가진 힘입니다. 말이 글보다 귀하다는 기존의 관념을 해체해서 재배치했죠.

 

나아가 데리다는 문자는 ‘대리보충(supplément)’의 힘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문자가 상황을 대리하는 동시에 보충한다는 말이죠. 이건 또 무슨 말일까요?”

 

“그래, 저건 무슨 말일까. 당최 감이 잡혀야지.”

 

화면 너머로 리마토르의 강의를 듣던 워울프는 체념을 담은 혼잣말을 툭 던졌다. 하이에나와 샐러맨더가 동의를 표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퀵 카멜은 한쪽에 밀어두었던 술잔을 셋에게 내밀었다. 세 명이 한 잔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퀵 카멜은 탈론 페더에게 나름대로 생각한 내용을 내밀었다.

 

“페더, 앞에서 교수가 ‘글이 말보다 더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고 그랬지. 데리다의 주장에 따르면 말은 상황에 대한 사유에 해당하니까, 사유를 담는 그릇인 글은 말이 표현하고자 하는 상황을 현실에 드러내는 역할을 할 거야. 이걸 가리켜서 대리라는 표현을 쓴 게 아닐까?”

 

“오, 그거 말이 되는데요? ”

 

“방금 그 대답 훌륭했습니다!”

 

탈론 페더가 퀵카멜의 생각에 감탄하는 와중, 리마토르의 칭찬이 들리자 퀵카멜과 탈론 페더는 동시에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면 안에서는 아까처럼 하르페이아가 답변을 하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장면을 본 퀵카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휴, 놀래라. 설마 나한테 하는 말인가 했네.”

 

“그러니까요, 이게 무슨 소설도 아니고요.”

 

퀵카멜과 탈론 페더는 싱거운 웃음을 짓고 다시 강의에 집중했다. 어려운 내용임에도 능동적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하는 대원들의 모습에 마음이 흐뭇해진 칸은 한결 편한 마음으로 리마토르의 강의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무도 그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의 존재는 조금씩 그녀 자신에게 물들었었다. 어느새 그의 색을 흠뻑 머금은 칸은 자신의 주변으로 퍼지는 그의 색을 보고 많이 바뀐 상황에 안정감을 느꼈다. 그녀가 속으로 리마토르에 대한 생각을 더하는 사이에도 리마토르는 강의를 이어갔다.

 

“대리보충은 말 그대로 문자가 그 상황에 부재하는 존재를 대신하는 동시에 보충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만 말하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으니 예시를 하나 들어보도록 하죠. 작전 결재를 받는 종이를 보면 실무자, 부관, 지휘관, 사령관님 순으로 직인을 요구합니다. 결재가 끝나면 사령관님의 권한에 따라 실무자는 작전을 실행하죠.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봅시다. 권한을 부여하는 건 실제 사령관님인가요, 아니면 결재가 된 문서인가요?

 

당연히 전자라고 생각할 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사령관님이 직접 모든 팀을 다 돌아다니면서 모든 작전 계획을 확인하고 피드백을 주시는 건 아닙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어떤 부대는 사령관님을 실제로 뵙고 작전을 입안하는 게 아니라 서류 결재만으로 작전을 실행하게 되죠. 사령관님을 실제로 만나 뵙든 아니든 작전은 허가되고 실행됩니다. 그럼 실재하는 사령관님이 진짜라고 할 수 없죠. 작전 허가의 근거는 결재 서류에 있으니까요. 이처럼 문자가 존재하는 무언가를 가리킬 때, 존재가 부재(不在)하더라도 원래 존재를 대신해서 효력을 발휘하죠. 이 상황에서 보면 문자는 사령관님이 실제로 나타나지 않아도 그 역할을 하게 한 겁니다. 그리고 부족한 의미를 더하는 일을 하죠. 이게 바로 대리보충입니다.

 

데리다는 리보충하는 대상 사이의 관계에서는 ‘대리보충의 대리보충’을 통한 역전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바로 위의 사례에서 사령관님이 급한 업무로 부재중이라고 해보죠. 그럼 바로 다음 지휘권자인 지휘관이 사령관님의 결재를 대행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지휘관이 사령관님을 대리보충하는 것이죠. 그런데 실무자들은 사령관님의 피드백을 받지 않고 바로 지휘관의 피드백을 받으니 그들 입장에서는 지휘관이 사령관보다 더 권한이 크게 느껴질 겁니다. 또한 지휘관의 주장을 실무자들이 받아서 처리하면 할수록 지휘관은 사령관님과 독립된 판단을 내릴 겁니다. 이 상황이 대리보충의 대리보충입니다. 대리보충 관계지만 실질적으로 와 닿는 관계 속에서 대리보충의 대상이 원본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권위를 갖게 되는 현상이죠.

 

여기서 생각해볼 점이 하나 있습니다. 대리보충의 대리보충을 보면 세계는 계속해서 대리보충으로써 원본을 대체합니다. 위의 사례에서 사령관님의 부재를 지휘관이 메우고, 지휘관마저도 없으면 부관이 투입되는 식으로요. 그런데 그럼 뭐가 유일한 진리일까요? 끊임없이 대리보충하는 관계라면 이전의 개념은 문제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데리다의 주장대로면 대리보충하는 단어로 쓰이지 않더라도 또 다른 단어들과 대리보충 관계를 맞겠죠. 이런 상황에서는 무엇이 순수한 원본인지 알 수 없죠. 다시 말해 어디에도 ‘순수함’이 없는 겁니다.

 

데리다는 순수함의 개념을 부정했습니다. 순수하다는 건 원본과 대리보충물이 따로 있을 때 비교의 목적으로 쓰이는 어휘죠. 그런데 계속해서 대리보충 관계를 갖고 있는 것들을 보면 무엇이 원본인지 감이 오지 않습니다. 여기서 어떤 분은 이런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겁니다. ‘지휘관과 부관이 대리보충하는 게 사령관님이므로 원본이 존재하지 않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계속 이야기한 건 ‘결재의 효력’이기 때문에 사령관님의 부재로 지휘관이 서류를 결재하더라도 근무에 큰 문제가 생기지 않듯이, 결재의 효력은 대리보충을 통한다면 누가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될 때 무엇이 원본이고 순수한지를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고 본 겁니다.”

 

“와, 역시 카멜! 평소에 강의를 열심히 들은 티가 나네요!”

 

리마토르의 설명이 끊기자 탈론 페더는 놀라운 눈으로 퀵 카멜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얕은 추측이 얼추 들어맞자 퀵 카멜도 놀랐지만 곧 소 뒷걸음 치다가 쥐 잡은 격이라며 겸양의 태도를 보였다. 

 

“아니야, 나도 적당히 찍었는데 들어맞아서 신기하네.”

 

“그건 아니죠. 그런 생각 추측이 가능할 정도로 기저에 쌓인 기본기가 있다는 뜻이니까요.”

 

“맞아. 훌륭한 추측이었다네. 의견이 거의 들어맞은 걸 보니 카멜 자네에게서 대학원생의 자질이 보이는군.”

 

칸이 한 마디를 거들며 자연스럽게 대학원 진학서를 건네자 퀵 카멜은 어떻게 예의 바르게 거절을 표현해야하나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갈 곳을 잃고 그녀와 눈을 못 맞추는 퀵 카멜의 모습에서 난감한 그녀의 심정이 배어나자 칸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대학원 진학을 한 번 더 권했다.

 

“지금 석박사 통합과정을 시작하면 학위가 1+1이라네. 학위 복사버그를 놓칠 수 있겠는가?”

 

“그, 그... 아직 저는 배움이 부족하므로 조금 더 학식을 쌓고...”

 

“더 많이 배우기 위해서 가는 곳이 대학원이 아닌가?”

 

“아... 그... 아! 대학원에서 학자로서 거듭날 자신이-”

 

“그건 리마토르가 잘 지도해줄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네. 지금 내 남편의 지도 실력을 못 믿겠다는 건가?”

 

“아닙니다! 그, 그건.... 그....”

 

퀵 카멜이 무슨 말을 꺼내도 칸은 기가 막히게 활로를 차단해 그녀를 궁지로 몰고 갔다. 더 이상 거절의 의사를 표현할 말은 없는데 그렇다고 차마 대학원에 입학하겠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는 퀵 카멜의 난처한 모습을 보던 칸은 속으로 쿡쿡 웃으며 낚싯바늘을 거두었다.

 

“뭐, 대학원 과정이 워낙 고되다고 하니 내키지 않을 수 있지. 나중에 진학 의사가 생기면 말해주길 바라네.”

 

“네! 알겠습니다!”

 

거절할 말을 찾지 못해 우물쭈물하던 퀵 카멜은 칸이 제안을 철회하자 큰 환난을 피한 심경으로 대답했다. 소위 말해 ‘살았다’라는 표정으로 답하는 퀵 카멜의 모습을 지켜본 칸도 짓궂게 웃으며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긴 설명을 마치고 마른 입을 축인 리마토르가 강의를 재개하고 있었다.

 

“휴, 이제 절반 정도 왔습니다. 이렇게 많이 설명했는데 겨우 반이라니 경악하는 분들도 계실 텐데 다행히 여기서부터는 조금 쉬워집니다.

 

앞에서 데리다가 말이 글보다 귀하다는 통념을 해체했고, 문자는 대리보충의 힘을 갖고 있다고 했죠. 대리보충을 거듭하는 각 대상 사이에는 원본이라 할 수 있는 순수함이 없다고도 했습니다. 데리다는 이 점에 주목했습니다. 자,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를 떠올려봅시다. 플라톤은 우리 세계와 이데아의 세계가 따로 있으며, 이데아의 세계가 진짜라고 했습니다. 우리 세계는 가짜인 셈이죠. 그런데 원본이 없으면 어떻게 되나요? 가짜가 없어집니다. 진짜라는 원본과 비교⦁대조해서 차이가 있으면 가짜로 판정하는데, 기준이 될 원본이 없으니 진짜/가짜를 가리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건 ‘차이’를 가질 뿐이죠. 빨간 구슬, 파란 구슬, 노란 구슬은 서로 다른 구슬이지 어느 하나에 틀린 구슬이 아닌 것처럼 말이죠.

 

데리다는 문자에 이 점을 접목합니다. 여기서 잠시 구조주의의 창시자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주장을 한 번 짚고 가겠습니다. 소쉬르에 따르면 ‘Dog’라는 영단어가 실제 동물 ‘개’를 의미하는 이유는 동물 ‘개’가 단어 ‘Penguin'이 아니고, ’Cat'이 아니고, ‘Eagle’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즉, 단어의 의미인 기의는 음운학적인 단어인 기표의 차이에 의해 구분되는 겁니다. 데리다는 여기서 한 단계 더 심화된 주장을 했죠.

 

예시를 하나 들어봅시다. 제가 하르페이아 조교에게 ‘책’을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주변이 시끄러워서 하르페이아 조교가 제 말을 전부 알아듣지 못했는데도 제게 책을 건네주었습니다. 어떻게 그랬을까요? 소쉬르에 따르면 ‘책’의 기의는 ‘창’, ‘빵’, ‘황’, ‘간’ 같은 기표들과 구분됩니다. 그래서 구분되는 기표들을 지우면 ‘책’의 기표에 도달하게 되죠. 데리다는 이런 구분이 거의 무한히 계속된다고 했어요. ‘책’의 기의는 ‘총’의 기표도 아니고, ‘칼’의 기표도 아니고, ‘뇌’의 기표도 아니고, ‘달’의 기표도 아니고, ‘눈’의 기표도 아니에요. 제가 말한 기표 외에도 어마어마하게 많은 기표가 있고, 그것들은 ‘책’의 기의에 해당하지 않기에 문자 그대로 끊임없이 차이가 발생하는 거죠. 그러면 ‘책’의 기의에 해당하는 기표가 무엇인지 정확히 판단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찾으려는 것과 달리 차이가 있으니 판단을 보류할 수밖에 없고, 판단을 보류하면 의미를 아는 건 지연됩니다. 데리다는 이를 가리켜 차연(différance)이라고 불렀습니다.

 

‘차연’이란 말을 여기 계신 분들 대다수가 처음 들어봤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차연(différance)은 프랑스어로 차이를 의미하는 ‘différence’의 어미에 있는 ‘e'를 ’a'로 바꾸어서 데리다가 만든 단어로, ‘차이(différence)’라는 의미와 ‘지연(différer)’라는 의미를 모두 갖고 있습니다. différance는 différence와 발음은 똑같지만 그 의미는 다른데, 이는 '목소리‘로는 구별되지 않던 단어가 '문자'로는 구별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고도의 언어유희입니다.

 

제가 앞에서 데리다는 모든 건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했죠. 데리다가 주장한 차연은 이 주장을 잘 뒷받침합니다. 저와 하르페이아 조교, 칸 대장, 아스널 대장은 모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동시에 서로의 차이점이 어떻게 구분되는지는 끝없이 지연되죠. 이야기를 시작할 때 말했던 중심-주변 관계도 차연을 통해서 해체됩니다. 중심과 주변 사이에는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며 둘이 어떻게 구분되는지는 끊임없이 유보됩니다. 이렇게 데리다는 차연을 통해 세상에 중심과 주변 개념이 없음을 확실히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들에 존재하는 차이와 그에 대한 지연은 ‘차연’ 그 자체에도 적용됩니다. 다시 말해 차연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차연되기 때문에 우리는 ‘차연이 정확히 이거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싶겠지만 차연 개념을 고안한 데리다 본인도 차연되는 차연 그 자체가 고정된 의미로 쓰이는 걸 방지하고자 자신의 저서에서 유보, 대치, 심지어는 처녀막으로 바꿔서 부릅니다. 이러니 글이 어렵다는 평을 들을 수밖에 없죠.”

 

리마토르는 잠시 말을 끊고 주변을 살폈다. 누군가는 머리를 싸매 쥐고 이해를 시도하고 있고, 누군가는 이미 포기하고 자고 있고, 누군가는 옆 사람과 논의하고 있었다. 어려운 개념을 더 쉽게 설명하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가 부끄러웠다. 자신은 교수로서 한참 멀었다는 좌절감이 파도처럼 몰려와 그를 덮쳤지만 리마토르는 차돌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듣는 이들로 하여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는 자신의 안에 뿌리내린 책들을 뒤져서 새로운 문장을 조립했다.

 

“아직 데리다의 주장이 명확히 이해가 안 되신 것 같으니 한 가지 개념을 더 들어보도록 하죠. 철학사에 커다란 변곡점을 남긴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이름은 아무리 철학에 관심이 없어도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칸트에게는 3대 비판서라고 불리는 저작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미학에 대해 비판하는 <판단력 비판>입니다. 여기 나오는 칸트의 주장 중에는 ‘예술은 무관심 속에 합목적성을 가져야 아름다운 예술이다.’가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으실 테니 차근차근 살펴보도록 하죠.

 

칸트는 인간이 선험적인 이해로 의식을 구속한다고 보았습니다. 쉽게 말해 대상을 제대로 들여다보기도 전에 선입견을 갖고 판단을 이미 끝내놓는 것이죠. 선입견에 사로잡힌 상황에서 새로운 판단이 가능할까요? 그렇지 않죠. 그래서 칸트는 대상에 대한 관심을 끊고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보라고 합니다. 무관심한 눈으로 보면 객관적인 접근이 가능하기 때문이죠. 합목적성은 문자 그대로 목적에 부합하는 특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목적은 비례성과 규칙성과 같은 예술적 성질입니다. 칸트는 비례성과 규칙성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아름다움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보았죠. 

 

예시를 통해 칸트의 주장을 되짚어보겠습니다. 예술작품을 만들기 위해 식기구인 포크를 규칙적으로 이리저리 비틀어놨습니다. 선입견을 가진 사람은 ‘포크로 밥도 못 먹게 만들어놨네’라고 생각하지만, 무관심을 통해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포크가 예술의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네’라고 바라봅니다. 예술의 목적에 부합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할 점이 있습니다. 칸트가 말한 합목적성의 목적은 오직 예술에만 해당해요. 실용적인 의미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실용적인 목적이 개입하면 예술적인 목적에 오롯이 부합하는 게 아니므로 합목적성이 결여된다는 뜻입니다. 예시를 통해 풀어보죠. 저 포크가 규칙적으로 비틀어놨지만 식사도구로서 사용 가능하다면, 이는 실용적인 목적과 예술적인 목적이 동시에 충족되는 상황이죠. 그러면 칸트는 이를 가리켜 ‘순수하게 예술적인 목적에만 부합하는 게 아니잖아. 이건 예술이 아니야.’라고 말한다는 겁니다. 이를 가리켜 칸트는 예술의 본질인 에르곤(ergon)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데리다는 이를 비판합니다. 예술에 본질은 존재하지 않다고 한 데리다 칸트의 에르곤과 상반되는 파레르곤(parergon)의 역할을 강조했죠. 파레르곤은 에르곤의 주변부, 그러니까 예술작품의 바깥에서 예술작품을 구성하는 걸 말합니다. 가령 작품을 비추는 조명이나 작품을 담은 액자처럼요.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대표적인 파레르곤 3가지로 작품의 액자와 조각상의 옷주름, 건축 회랑의 열주(列柱)를 꼽습니다. 전부 예술작품의 핵심은 아니지만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죠. 칸트는 이런 파레르곤이 에르곤을 잘 받쳐주면 좋은 파레르곤, 그러지 못하면 안 좋은 파레르곤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봅시다. 조명과 액자가 예술작품을 받쳐주는 역할만을 할까요? ‘백제의 미소’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서산 마애삼존불상은 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불상이 미소 짓는 정도가 달라집니다. 여기서 빛은 예술 작품을 구성하는 에르곤에 해당하죠. 액자는 또 어떤가요. 아무리 훌륭한 그림이라도 A4용지에 붙여두면 허접해보이지만, 황금색으로 칠해진 원목 테두리에 넣어서 걸어두면 휘황찬란합니다. 같은 에르곤이라도 파레르곤의 변화만으로 뚜렷한 차이가 발생하는 거죠.

 

이를 가리켜 데리다는 파레르곤은 에르곤의 주변부가 아니라, 결핍되어 있는 곳에 파레르곤이 끼어드는 무언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칸트가 무관심한 태도로 합목적성을 바라보라고 했던 걸 칸트 스스로도 예술이 모순임을 갖고 있다고 비판하죠. 데리다는 에르곤과 파레르곤이 명백히 갈리는 게 아니라, 파레르곤의 개입을 통해 어떤 곳에서 어떤 식으로든 예술이 탄생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에르곤을 중심에, 파레르곤을 주변에 두는 중심-주변 관계를 해체한 거죠.

 

여기까지 데리다의 철학을 살펴봤습니다. 아직도 데리다의 철학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가 안 되는 분이 있으실 텐데, 저는 이 점이 데리다 철학의 가장 큰 약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철학이 혼자 하는 학문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생각을 공유하며 발전한다고 보기 때문에, 최대한 쉽게 강의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반면 하이데거나 데리다, 들뢰즈처럼 어렵게 글을 써버리면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본인은 잘 드러낼 수 있을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죠. 그래서 철학이 점점 외면 받고 심하게는 불필요한 학문으로 매도당한다고 생각합니다. 데리다도 생전 이런 비판을 심하게 받았습니다. 오죽하면 1992년 케임브리지대학이 데리다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겠다고 발표하자 각국 철학자들이 사기꾼에게 학위를 줄 수 없다며 항의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 중에는 분석철학의 거두인 윌러드 콰인도 있었을 정도로 데리다의 철학은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의 화두였습니다. 

 

긴 이야기를 듣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1시간 정도 쉬고 들뢰즈에 대한 강의로 돌아오겠습니다.”

 

리마토르가 말을 마치자 열렬한 박수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는 자신에게 과분한 박수를 뒤로 하고 강단 아래로 내려갔다. 긴장감으로 흐른 땀이 입고 온 셔츠를 흠뻑 적신 걸 그제야 알아차렸지만 그는 옷을 갈아입을 여유도 없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소매 자락으로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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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났다.... 데리다까지 밖에 못 썼는데 벌써 복귀일이 다가와버렸다... 들뢰즈 편은 부대에서 한 번 써보고, 안 되면 아무래도 다음 휴가까지 밀릴 것 같다. 복귀 전까지 논문 발표 에피소드를 마무리 지으려고 했는데 또 한참 지연되게 생겼네. 기다리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이번 편에 등장한 자크 데리다는 해체주의를 창시한 포스트 모더니즘 철학자야. 프랑스 고등사범학교에 재학할 당시 조교였던 푸코에게 배운 적이 있어서 사상적 유사점이 있기도 해. 데리다도 비트겐슈타인처럼 전기 철학과 후기 철학의 결이 달라지는데, 이 소설에서는 전기 철학에 더 집중하기로 한 점도 있고 후기 철학까지 쓰면 도저히 휴가 복귀 전까지 데리다 편도 못 끝마칠 것 같아서 타자에 대한 유령 이론은 제외했어.


길고 불편한 글 읽어주는 모든 이에게 감사 인사를 올린다. 다들 오늘 하루도 좋은 일만 가득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