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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반도 왕국의 수도 아이오지, 종교를 바탕으로 강력한 군대를 육성하는 아이언 제국과,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여섯 여왕의 왕국인 펙스 연합 왕국과 다르게, 몬스터들, 그리고 여러 인외종들이 살아가는 라 만차 대삼림을 국경에 끼고 있었기에 유달리 많은 모험자들이 이 왕국에서 몬스터 퇴치와 호위를 명목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곳이었다.


헬반도 왕국은 총, 8명의 영주와, 한 명의 왕으로 통제되는 봉건 국가였다. 수도인 아이오지만을 통치하지만 8명의 귀족들에게 명령권을 가지고 있는 왕, 쿠쿨리우스가 직접 통치를 하고 있는 이곳은 귀족들의 주도로 생산한 모든 물자가 모이는 대도시였다.


그리고 대도시와 걸맞을 정도로 많은 인구가 모였고, 동시에 그림자 또한 커지고 있었다. 특히나 요즘은, 인외종을 제외한 '인간'조차 인신매매를 하는 범죄조직들 또한 늘어나는 추세였다. 특히나 라 만차 대삼림에 '해피'라고 불리는 강대한 드래곤과 그를 사역한 강대한 수인 여제, '마리아 리오보로스'의 등장으로 인해, 수인들과 엘프 노예들의 가격이 급상승하자 왕도인 아이오지를 중심으로 인신매매가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야, 언니. 엄청 예쁜데?"



그리고 뒷골목을 한가롭게 거닐고 있는 한 여자가 있었다. 빛이 들어오지 않았음에도 하얗고 탐스러운 장발에, 두툼한 겉옷을 껴입고 늘씬한 다리를 드러낸 여자였다. 기묘하게도 목에는 뱀을 두른 모습이었지만, 인신매매범들은 제법 아름다운 여자일 것이라 짐작하며, 품 속에선 칼을 꺼내들었다.



"언니. 우리랑 좀 가볼 곳이 있는데 말이야-"



그러자 여자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자 과연 절세의 소녀가 그들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 듯 볕이 들어오지 않은 골목에서도 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조금 요상한 복장, 이를 테면... 어디 북방 민족들이나 입을 법한 두툼한 코트에 이 세계에선 전혀 볼 수 없는 스타일의 신발을 신은 긴 백색의 장발을 가진 여자가 새파란 새로 동공을 반짝이며 그들에게 시선을 두었다. 쉬잇, 그녀의 목 언저리에 감긴 뱀이 낮은 위협을 가했지만, 인신매매범들은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홀린 듯 천천히 칼을 거머쥐며 다가갔다.



"이야- 존나 섹스한데? 창관에 갖다 팔면 제법 돈이 되겠어?"

"언니 이뻐할 아저씨들이 많은 곳에 데려다 줄게. 같이 연애만 해주면 되는 거야."



그러자 여자는 슬쩍, 혀를 내밀고 아랫입술을 훑었다. 살짝 갈라진 스플릿 텅, 마치 그녀의 목에 감긴 뱀과 같은 모양의 혀 모습에 흠칫했다. 분명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저 새로 동공의 눈 하며, 전설 속의 생물인 라미아(뱀 여자)를 떠올리는 듯한 형상이었다.



"어머- 아저씨들 진짜? 나를 좋아하는 아저씨들이 많은 곳으로 날 데려다 준다고?"

"그럼 그럼- 언니, 아니 아가씨 외모면 진짜 창관 탑 에이스지."

"우와- 보련이가 들었으면 엄청 좋다고 했을 텐데."



여자는 알 수 없는 여자의 이름을 대곤 깔깔거렸다. 그리고 이내 여자는 희번뜩, 파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근데, 나 이미 후다인데."

"그게 뭐가 중요해? 아가씨, 험한 꼴 당하기 전에 얌전히,"



인신매매범의 협박이 들렸지만 여자는 씩, 입꼬리를 들어 웃었다.




"얌전히, 정보 좀 물어봐도 될까? 아저씨들, 나 왕도는 처음이거든."

"처음?"

"그래, 처음이야. 근데 아저씨들, 웬만하면 칼 내려놓고 대화하자- 무섭게 왜 그래?"

"천천히 우리를 따라와서 같이 대화 해준다면 칼은 내려놔줄게."



비아냥거리는 듯한 범죄자의 말에 여자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저씨들이 사태 파악을 제대로 못하고 지껄이는 것 같은데... 지금 그 칼 내려놓고 얌전히 내 말에 대답만 해줘도, 아저씨들 몸 성하게 지나갈 수 있다?"

"... 뭐?"

"미치겠네 진짜... 말귀 좀 빨리 알아 듣자. 응?"

"무, 무슨 헛소리를..."



그리고 여자, 천아는 패딩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순간, 스르륵, 어둠에 녹듯 사라졌다. 범죄자들은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별안간 위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두 명의 범죄자 정수리에 빛이 번쩍 깃들더니 이윽고, 수박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퍽- 퍼억-


마치 과즙처럼 뇌수가 터져 올라왔다. 그대로 범죄자가 쓰러지자 순식간에 남은 남자는 단도를 떨어뜨렸다. 방금까지 허공에서 나이프를 던졌던 여자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지금 자신은 타겟을 잘못 설정했다는 것이었다.


숨진 동료를 확인할 새도 없이 그대로 뒤를 돌아 도망치려는 순간이었다. 어둠 속에서 푸른 안광과 함께 비웃음 소리가 들리더니, 그대로 자신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잡아당기는 촉감이 들었다.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이내, 그의 경동맥에 겨눠진 칼을 보자 입을 다물었다.


그의 귓가에서는 조곤한 목소리로, 여자가 말했다.



"아저씨... 나 말이야, 냄새나고 더럽고 씻지도 않는 아저씨들 백허그하는 거 싫거든? 그러니까... 빨리 말하자? 아저씨 귀족들한테 인신매매하는 사람이지?"

"뭐?"

"모른 척하긴- 아까 전에도 만난 아저씨들 목 좀 따면서 얻은 정보거든? 근데 그 아저씨들은 말이야... 내 몇 가지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안 했어. 아저씨는 븅신같은 말 그만하고 대답 잘 했으면 좋겠다, 알겠지♥?"



장난기 가득한, 하지만 어느새 살기를 머금은 여자, 천아의 목소리가 그의 목덜미에 시퍼런 죽음을 드리우는 것 같았다. 위협스레 백아가 남자의 목으로 기어와 금방이라도 물어 뜯을 기세로 혀를 날름거렸다. 남자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아... 알았어! 다, 다 대답해줄게! 그, 그러니까... 사, 살려줘!"



치욕스러웠지만, 그는 울며불며 천아에게 빌어야만 했다. 그렇게 그녀에게 몇 가지 대답을 들은 후,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남자를 풀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천아는 그대로 달려나가 역수로 나이프를 쥔 뒤, 그대로 남자의 목을 쳐버렸다. 서걱, 둔중한 무언가가 잘리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목이 그대로 굴러떨어졌다. 경동맥이 터져 피를 사방에 흩뿌렸고, 천아는 나이프를 톡톡 털며 말했다.




"근데, 아저씨. 정보 수집 과정에서 얼굴 본 사람을 살려준 정보원은 세상에 없는 거 알지?"



*



늦은 밤 회의가 끝난 후, 황급히 달려간 곳은 페로가 머물고 있다는 숙소였다. 낡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느새 자신보다 먼저 이곳으로 한아름에 달려 온 리리스가 페로를 껴안고 엉엉 울고 있었다. 정작, 페로는 눈을 연신 깜빡거리며 그녀를 어색해하고 있었을 뿐이었지만.



"페로, 페로 맞지요? 리리스 언니라고요! 기억 안 나요?"

"...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페로! 오르카 모르는 건가요? 처음 주인님을 만난 것도 우리였잖아요! 페로, 자세히 기억 해봐요!"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리리스는 페로를 다그쳤지만, 페로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나는 말없이 컴페니언의 자매를 응시했다. 자신의 자매들을 끔찍하게 아낀 맏언니, 그리고 그 언니의 부관으로 열심히 사령관의 경호를 담당했던 컴페니언의 2인자 페로. 나 또한 오르카의 페로에게 있었던 여러 일들이 기억났다. 페로의 외전부터 시작하여, 포이와의 경쟁구도나, 그리고 카페 아모르, 바니슬레이어의 일까지.




"리리스님? 제가 왜 리리스님의 동생인지 모르겠네요. 리리스님은 수인종이 아니신 것 같은데..."




"페로! 혹시 이 세계로 건너올 때 기억을 잃으셨나요? 아니에요 페로... 저는 페로를... 아니 나는 너가 페로라는 걸 알고 있는데!"



결국 리리스는 경어 쓰는 것도 잊은 채 페로에게 서운 하다는 듯 소리쳤다. 하지만 나는 이미 바르그에게 보고를 들어 어느 정도 페로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만난 페로는 역시나, 이 세계에서 창조된 올리비아와 같은 '이 세계의 바이오로이드'였다. 다시 말해, 델타의 유전자 공학으로 태어난 존재였기에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명백히 우리와 다른 바이오로이드였다.



"... 리리스."

"네, 네? 주인님..."

"서운하고 혼란스러운 건 알겠지만, 잠깐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을까? 페로랑 이야기를 좀 하고 싶거든."



리리스는 머뭇거리다 내 얼굴을 응시하더니 꾸벅 인사를 했다. 잠시 추태를 보여 죄송했다고, 그렇게 말한 뒤 페로의 숙소를 빠져나갔다. 여전히 이불을 덮고 있던 페로는 킁킁거리며 내 냄새를 맡더니,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 인간이신가요?"

"그런 셈이지. 정확히는... 아니지만, 설명하면 기니. 그냥, 인간이라고 하자. 그럼 내가 너한테 물어봐도 될까?"

"..."

"너는... 인간한테 노예로 있다 이곳까지 탈출한 수인이었다면서? 근데 어째서, 나한테는 크게 적개심이 없는 건데?"



내 질문에 페로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 대답했다.



"바르그란 분께서, 좋은 인간이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혼란스럽네요... 제가 봐 온 인간들은 하나 같이 힘 없는 수인종을 핍박하고... 도구 취급이나 하고..."



그래, 나도 이 세계를 몇 번이고 들락거리다보니, 이 곳이 인외종을 다루는 수준은 하등, 라스트오리진에서 멸망 전 인간들이 바이오로이드를 다루던 취급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단 생각이 들었다. 역시 인간은 선천적으로 '악하다' 라는 성악설이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페로는 나도 그 쓰레기 같은 인간들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해?"

"아, 아닙니다... 하지만, 그... 아,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애써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며 둘러대고 있었지만 페로의 동공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천천히 나는, 의자를 끌어 페로가 누워있는 침상으로 다가갔다. 순간 페로의 눈이 심하게 파르르 떨리더니, 본능적으로 이불을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심하게 겁에 질린 것 같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다가가는 것을 멈추었다. 라스트오리진에서 보았던 페로의 까칠하면서도 귀여운 모습이 아니었다. 길고양이처럼 사납고, 경계심이 가득했다. 살짝 야윈 모습의 페로는 손톱이 모두 뽑혔으며, 온 몸에는 채찍에 의한 상흔이 길게 그어져 있었다.



"... 오, 오지 마."



그리고 페로는...



"오, 오지 마, 거, 거기까지... 하아... 하아..."



남성에 대한 공포증까지 생긴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직감했다. 페로가 잡혀있었던 동안, 어떤 일을 당했을지 떠올리기 싫은 상상이 마치 생생하게 구현되는 것 같았다. 강철 수갑에 쓸려 짓무른 팔목을 보자, 더욱 확실해졌다.


이 아이를 붙잡고 있었던 사람은 지독한 고문을 했으며, 원치않은 성 접촉까지 했다는 것. 물론 라스트오리진의 페로와, 이 세계의 페로는 달랐지만, 처음으로, 이 세계의 인간들에 대한 분노가 차올랐다. 우스갯소리로 델타가 오드리 자매를 인간가구로 학대했을 땐 그저 드립 취급 했었다. 당연히 가상의 픽션이니까. 게임 속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눈 앞에서 학대당한 바이오로이드를 본 내 기분은 끔찍함을 넘어 인간에 대한 역겨움까지 만들게 했다. 바이오로이드는 기본적으로 오리진 더스트라는 물질을 통해 강화한 만큼 인간보다 확실히 강력했다. 하지만 그런 바이오로이드라고 하여 고문에 강한 것도 아니며, 똑같이 통증을 느끼는 존재였다.


단지 귀가 달렸단 이유로, 다른 수인종들보다 튼튼하다는 이유로, 이 페로에게 얼마나 모진 고문을 가했을까. 나는 어깨를 덜덜 떨고 있는 페로를 향해 조용히 물었다.



"페로."

"... 하아... 오, 오지 마... 오지 마..."

"알았어. 멀리 떨어질게."



나는 결국 의자를 뒤로 끌었다. 페로는 몇 번이고 헉헉거리다 그대로 심장에서 손을 놓았다. 여전히 오드아이의 동공을 불안하게 놀리며 그녀는 몇 번이고 숨을 고르다 내게 말했다.



"하아... 죄, 죄송해요..."

"... 페로."

"네..."

"널 그렇게 만든 사람이 누구야?"



내 질문에 페로는 떠올리기도 싫다는 듯 입술을 꾹 깨물곤 이불을 가슴 끝까지 끌어 올렸다. 이내 그렁거리며 눈물까지 보이던 그녀는 가만히 앉아있는 나를 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씀해주신다면... 복수라도 해주실 건가요?"

"어?"

"... 어차피 말해봤자, 달라지는 것도 없을 텐데요. 이미 제가 갇혀있던 헬반도 왕국은 수인종을 노리개 내지는 도구로 써먹는 게 익숙한 나라라고요. 그 사람 한 명만... 당신이 죽이면 끝날 것 같나요?"

"..."

"하하... 말도 안 되는 소리죠..."



페로는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하곤 고개를 다시 돌렸다. 나는 그런 페로에게 물었다.



"만약, 내가 그렇지 않은 세상을 만든다면?"

"... 네?"



페로가 몸을 틀어 나를 바라보았다. 물론, 지금의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 따윈 없었다. 이 세계에 대한 정보는 전무했고, 이 왕국의 전력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었으며, 섣불리 이 왕국에 적대적 태도를 취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내가 이 세계를 긍정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내가 라스트오리진이란 게임을 사랑했던 이유는, 단지 야해서, 스킨이 꼴려서 그런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성격에 문제가 있던 리제도, 멸망 전 혹사를 당했던 더치 걸도, 60년 동안 등대에 유기된 LRL의 이야기도 라스트오리진의 외전 이야기와 이벤트에서 보곤 했었다. 그 아이들의 모든 것들을 나는 보았고 이해했기에 아이들에게 애정이 생겼고 서비스 종료에 그 누구보다 마음이 혼란했었다.



"이해해. 페로. 너가 겪은 걸 모두... 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나도 이해해."

"..."

"솔직히 말할게. 나랑 나와 같이 온 아이들은... 너가 이해하긴 어렵겠지만, 다른 세계에서 왔어."

"다른 세계?"

"그래. 거기엔 너랑 똑같이 생긴 페로도 있었어. 참 웃긴 건, 그 페로는 너랑 달랐어. 도도하고... 살짝 차가우면서도, 할 말은 다 하면서도..."



나는 페로에게 웃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 날 믿고 사랑했었어. 지금 나를 따르는 저 아이들처럼."

"그러니까, 평행 세계의 나는... 그러니까, 저 리리스란 사람이 있던 그 세계의 나는, 학대 받지 않았었다는 말이에요?"

"그래. 모두 나한테 사랑받고, 그 아이들도 나를 위해 노력했던 세계였어. 한 쪽이 강압적으로 무얼 하지도 않았고, 강압적으로 성관계를 맺지도 않았던 세계였어."



.나야 내가 사령관에 빙의되기 전 세계를 직접 체험할 순 없었지만, 게임을 하면서 사령관이, 그리고 그 사령관에 이입했던 내가 아이들에게 이입했을 정도였다. 오히려 그 아이들이 나와 동침표까지 만들어가며 나의 사랑을 원했다는 것을 이 아이는 모르겠지.



"페로."

"..."

"평행세계에서 너는... 날 얼마나 사랑했었는지 알아? 내가 술을 마시면, 너가 옆에서 따라주기도 했고, 포이... 아, 그래... 넌 모르겠지만, 평행세계에서 너 동생 중에 포이라는 애가 있었는데, 걔한테 지지 않으려고 너가 얼마나 나한테 잘 보이려 했는지 알아?"

"..."

"... 그래. 너는 내가 있던 세계의 페로는 아니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널 다른 아이로 취급하고 싶지 않아."



이 세계의 페로와, 내가 알던 페로는 별개의 존재라는 걸 당연히 자각했다. 그리고 델타의 부관으로 있는 올리비아 또한, 내가 오르카에서 지휘를 하던 올리비아가 아닌, 전혀 별다른 세계의 올리비아라는 것도 당연히 자각했다. 하지만, 내가 라스트오리진에서 사랑했던 아이들이었다.


스파게티 코드에 좆같은 운영자들의 운영에도 불구하고, 내가 접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내가 이 아이들 하나하나에게 애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데이터 쪼가리로서의 아이들이 아닌, 내가 이입하고 즐거웠던 캐릭터로서. 그리고 지금 그 아이들은 내 눈 앞에서 이야기하고, 포옹하고 나를 여전히 따랐다.


그렇다면 지금의 내가 보는 페로는 나와 같이 이 세계에 왔던, 이 세계에서 만들어지던, 내가 지켜줘야 할 아이였다.



"넌 의미 없었던 내 인생에서... 최고의 아이였으니까."

"의미... 없었다고요?"

"아, 방금 이야기는... 그냥 내 넋두리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그런데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 아이들, 그리고... 지금 네가 있는 이 세계에서도 행복해지고 싶다면..."

"..."

"나는 그 세계를 너희들이 원하는대로 만들어주고 싶어."



내가 애정하던 아이들과 이 세계에 왔다. 내 성욕을 풀기 위해, 내가 현실에선 전혀 말도 못 걸고, 범접하지도 못할 아름다운 아이들을 단지 나의 1차적인 욕구의 대상으로 풀기보단, 그 아이들이 믿고 따르는 '사령관'으로서의 나를 보여주고 싶었다.


라스트오리진의 설정 상, 유능한 사령관의 발끝 만큼도 따라갈 순 없겠지만, 적어도 이 아이들이 행복할 수 있도록 나는 노력해주고 싶었다.



"페로."

"..."

"너가 이 세계에서 정말 이렇게 힘들었다면, 그렇게 지옥같았더라면... 내가 바꿔줄게."

"..."

"그게 내가, 이 세계로 와서 다짐한 일이야."



두서가 없었지만, 최대한 진심을 페로에게 털어놓았다. 페로는 아무런 말 없이 침묵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가엔 그렁거리는 물기가 달빛에 반사되어 아른거렸다. 이 모습 만큼은 새로운 페로의 모습이었다. 라스트오리진의 세계가 아닌


지금 내가 머문 이 세계에서 처음 보는 페로의 모습이었다.



"페로."

"... 네."

"푹 쉬어. 정말 이곳에 잘 왔어. 뭐... 평행세계에선 너가 날 지켰겠지만."



이 세계에선 내가 널 지킬게.


나는 바르그에게 그랬던 것처럼 천천히 손을 뻗으려다 페로의 트라우마를 떠올리자, 살짝 손을 치웠다. 그리고 허공에서 머문 손을 바라보던 페로는 나직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미안해요... 다른 세계에서 저는... 당신에게 사랑 받던 존재였겠지만... 이 세계에서 저는 당신 손길 하나에도 불편하고, 화가 나고... 두려워 해서요."

"그게 미안할 필요가 있나."

"... 네?"



살짝 어색해하며 말을 얼버무리려는 페로에게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언제든 나한테 마음을 열고 싶을 때가 있으면, 그때 와서 열면 되는 거야. 페로는 귀여운 고양이잖아."




순간 페로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 너무 오글거리는 말이었나... 생각해보니 내가 현생에 살았을 땐 이성한테 아무런 말도 걸지 못했던 쑥맥이었는데. 어째서 이 세계의 나는 능수능란하게 페로한테 말을 거는지 모르겠네... 아니, 애초부터 쑥맥이었던 내가 리리스랑 소완 둘이서 쓰리썸을 한 것 자체가 말이 안 되겠지만...



"내가 살던 곳에선 이런 속담이 있었어. 강아지는 9번 잘못하고 1번만 잘해줘도 그 1번을 기억한다 했고, 고양이는 9번 잘해주고 1번을 잘못하면 그거로 토라진다고."

"제, 제가 그렇게 은혜 모르는 건 아니,"

"... 그러니까 앞으로 내가 10번을... 아니다, 100번을 페로한테 잘 해주면 되잖아?"



이런, 너무 감상에 젖다보니 계속 쓸데 없는 말만 나오는 것 같았다. 헛기침을 한 나는 슬쩍 뒤를 돌아섰다. 확실히 문과충이라서 그런지 이런 거에만 쓸데 없이 이입을 하게 되는 건가... 어색하게 뒷걸음질 치며 나는 페로의 숙소를 나와야만 했다.



**



며칠 후, 아이오지. 세 여자가 출입 허가를 받고 왕도에 발을 내디뎠다. 백발의 장발, 그리고 선선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겨울 옷을 꼭꼭 싸맨 하얀 장발의 여자 아이는 두 붉은 머리의 여자를 보자 희죽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아아- 큰 마님. 작은 마님, 이 천아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오?"




"시끄러 씨발! 내, 내가 왜 이딴... 윽?!"



붉은 단발, 그리고 자주빛 눈동자를 가진 날카로운 인상의 여자가 백발의 여자에게 신경질부리며 화를 내다가, 이내




"조, 조용히 해 바보야! 여기까지 와서도 니 성질 못 버려서 난리야?"



트윈테일을 한 붉은 머리칼의 키 작은 여자가 단발 여자의 발을 지근히 밟으며 꽥 소리를 질렀다. 물론 밟자마자 마치 죽일 기세로 건틀릿에서 철사를 뽑아내려던 여자와 트윈테일의 여자 사이에선 마치 스파크가 튀는 것만 같았다.



"너 같은 성격 파탄자 언니를 내가 해야한다는 게 맞아?"

"그 울보를 언니로 모시란 난 안 빡치고?"



그리고 그 둘의 신경전을 보던 애쉬드래곤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하하... 자매 분들 사이가 참..."

"하아, 원래 저 아가씨들은 그런 사이에요. 한 배에 태어났어도 어쩜 저렇게나 성격이 다르다니- 웃기죠, 애쉬드래곤씨?"

"아, 그러고보니 천아씨가 두 자매분을 모시는 분이라 하셨죠?"

"네? 아- 네- 아까 애기아... 아, 아니! 주, 주인님한테 소개 받으셔서 알겠지만, 저기 키 작은 트윈테일 빨간 머리가, 언니인 메이고요. 그리고 저기 키 작은 언니한테 대드는, 성격 지랄, 아, 아니! 성격이 좀 괴팍한 분이 장화라는 분이랍니다- 하하..."




천아의 설명에 애쉬드래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머리 색만 같지 전혀 성격은 정 반대 같은 둘이 정말 자매가 맞을까... 게다가, 두 여자를 모시는 메이드 격으로 온 여자는 또, 보통 메이드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야말로 지금 세 여자는 모두 수도인 아이오지에서도 보기 힘들만큼 빼어난 미모를 가진 여자들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아이오지의 경비병과 경비대장 모두 그 빼어난 외모에 몇 번이나 넋을 잃은 것을 그는 보았다.



"하여튼... 라붕 공은 참 여자복이 많으시군요... 제가 아까 전 듣기론 라붕 공의 먼 친척이라 들었는데... 정말 두분 모두 아름다우십니다."



애쉬드래곤의 칭찬에 천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전 쟤... 아, 아니 저 아가씨들이 예쁜지 잘 모르겠네요?"

"두 분을 모시는 메이드이신데 그런 말을 하셔도 괜찮,"

"아, 아! 아, 아... 그러니까. 아주 옛날부터 모셔서 그래요! 하하... 하..."



씨발 못해먹겠네 진짜로... 천아가 궁시렁 거리는 소리를 애쉬드래곤이 되묻자, 황급히 그녀는 양손을 들어 손사래를 쳤다.



"그나저나, 누추한 곳에 세 분을 모시게 되어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좀 더 좋은 숙소를 제공하고자,"

"아닐 걸요. 주인님께서도 만족하실겁니다. 네!"



천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언제든 편의를 봐준다는 애쉬드래곤의 제안에 라붕이 제안한 것은 세 사람이 머물 숙소와 학비였다. 그는 잠시 고민을 했지만, 어떻게든 그와 좋은 관계를 맺고, 빚을 져둔다면 좋겠단 생각을 했었다. 며칠 전, 곡물장사 건에 대해서도, 수인족, 그리고 고블린과 오크를 동원하여 순식간에 교역이 될 만큼의 양을 생산한 것도 그렇고.


그 사건 이후로 애쉬드래곤은 생각했다. 라스트오리진 라붕 공하곤 계속해서 좋은 관계를 어떻게든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아니, 어쩌면 이 무능한 세계의 권력자들을 밀어내고 자신에게 더 큰 부를 안겨다 줄 귀인일지도 몰랐다. 그런 귀인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이야말로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나중에 라붕 공을 만나서라도, 잘 얘기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천아양."

"네, 그렇게 주인님께 얘기해드릴게요-"



천아가 해맑게 웃자 애쉬드래곤은 목례를 하곤 상단들을 이끌고 중심가로 이동했다. 소개받은 숙소로 걸어가던 장화와 메이는 역시나 서로가 마음에 안드느니 뭐니 투덜거리고 있었고, 천아는 그런 그들을 한심하게 보다가도 이내 입을 열었다.



"야, 너네 둘."

"왜."

"나 애기아빠가 알아보란 정보 좀 알아보고 올게."

"뭐야. 메이드 주제에 우리 보고 집 찾아가란 거야 뱀술년아?"



장화의 비아냥에 천아는 비꼬며 대답했다.



"아- 저는 애초부터 온 목적이 정보수집이고, 너네 두 좆만이 모시는 메이드는 그냥 설정이에요. 똑바로 아시길 바랍니다?"

"... 야. 천아 원래 좀 말이 저랬냐?"

"원래 저 뱀술년 사람 성질 살살 긁는 거 잘해."



메이와 장화가 툴툴거리는 사이, 이내 천아는 번화가의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야, 천아. 너 혼자 정보 수집하고 돌아다녀도 괜찮아?"



메이가 툴툴거리며 질문을 던지자 천아는 걱정 말라는 듯 손을 살짝 흔들었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살짝 돌린 천아의 보랏빛 두 눈이 미약하게 그늘이 드리워져 어두운 골목 안에서 반짝였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독사처럼, 그녀는 혀로 살짝 입술을 적신 뒤 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미안한데 애들아, 이 언니 말이야... 그 마귀할멈 밑에서 온갖 지저분한 일 다하던 언니였다?"



그리곤 이내, 으슥한 뒷골목 어둠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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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랑까진 일진 눈나 천아의 유쾌한 반란.


오늘도 봐줘서 고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