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골치 아프군. 하필 이 시점에..."


벤쿠버 섬 위에 세워진 야전 지휘소. 불굴의 마리는 대형스크린 위에 띄워진 벤쿠버 공항과 인근의 시애틀 군항이 담긴 지도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펙스 난민 호송 작전의 개시를 앞두고, 상황에 변화가 생겼다. 어나이얼레이터 호를 포함한 포세이돈 함대의 본대가 방금 전 시애틀 군항에 입항한 것이었다. 이 변화가 무슨 변수로 번질지 모르는 상황. 사령관은 당장 부를 수 있는 지휘관인 불굴의 마리와 무적의 용을 모아 급히 대책회의를 열었다.


"어니이얼레이터, 섬멸자. 1척만으로 1개 함대의 위력에 필적하는 포세이돈 인더스트리 최강의 기함. 저것의 주인인 감마에 대해선 저보다 더 잘 알고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리가 말을 끝마치자 사령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용에게로 옮겨졌다. 용과 감마는 멸망 전 연합군에서 각각 총사령관, 부사령관 자리를 맡았었기에 서로를 잘 알고있었다. 바통을 넘겨받은 용은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처음 만났을 땐, 그 자가 레모네이드 감마인 줄은 몰랐소. 포세이돈의 회장이 부사령관을 맡을 자라며 데리고왔었지. 감마는..."


"오, 내 얘기를 하고 있었나? 내가 딱 맞게 온 모양이군 그래."


더이상 들어올 사람이 없었던 지휘천막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눈빛이 변한 용이 홱 소리나게 뒤돌아보고, 동시에 사방에서 경보음이 울려퍼졌다.


"뭐야 저거, 여기 지형도잖아? 아, 그래... 펙스 난민을 대상으로 한 수송 작전이 한창 준비중이었나 보군."


자신에게 꽃히는 살기어린 시선에도 주눅들기는 커녕 제 집 안방처럼 당당하게 들어온 그녀는 잠깐 지도를 훑어본 것 만으로 단번에 이쪽의 작전을 읽어냈다. 용은 허리춤에 찬 칼자루에 손을 올리면서 불청객의 이름을 읊었다.


"레모네이드 감마...!"


그제서야 감마는, 지도에서 눈을 떼고 용을 지긋이 바라봤다. 마리와 리리스 뒤에 숨은 인간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태연하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야, 용. 깨어났다는 소식은 들었어. 이거 참, 솔직히 반쯤 의심하고 있었는데 그녀석이 말한 게 사실이었군."


"지금 무슨 소리를... 설마, 우리가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이오!?"


"아아, 신경쓰지 마. 혼잣말. 어차피 내가 어떻게해서 여기 온 건지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잖아? 지금부터 일어날 일에 신경써야지. 

참고로 다른 레모네이드 녀석들은 아직 이곳이 공격당하는 줄 몰라. 나는 녀석들에게 알릴 생각이 없고. 이유는... 알지?"


"...소관과 겨루기 위해서란 말이오?"


감마가 천천히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렇지. 바로 그거야. 이긴 쪽은 바다의 패자가 되고, 진 쪽은 목숨을 잃는다. 어때, 멋지지 않아?"


"대꾸할 가치도 없군... 본론이나 말하시오. 비무장 상태로 적진 한복판에 들어왔다는 건 필시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일테지?"


"흠. 뭐, 좋아. 나도 여기서 시간낭비하고 싶지는 않거든. 약속이 밀려있어서 말이야."


***


"나 왔다!"


"오셨습니까. 감마 님."


조종실의 문이 열리고 감마가 들어오자 카리나는 가볍게 목례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일이 잘 풀린 모양이군요."


"그래. 용은 반드시 올 거다. 이런 만남자리를 주선해준 그 인간한테 감사하다고 절이라도 해야겠는걸."


"어느 인간 말입니까?"


"그야 여기 있는 인간이지."


"풀어주실겁니까?"


"물론. 정보가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녀석을 풀어주는건 전쟁이 끝난 뒤다."


케스토스 히마스를 장비한 감마가 팔을 들어올리자 기이잉, 하는 기계음이 났다.


"저쪽에서 약속과 다르다며 항의할텐데요."


"이런저런 이유로 저 인간을 살려둬야 하는데, 곧 전쟁터가 될 이 근방에 내려줬다가 눈 먼 포격에 맞기라도 큰일이잖아? 어나이얼레이터 안에 있는 게 제일 안전할거다. 다 끝나고 안전한 곳에 내려주겠다고 하면 얌전해지겠지. 어차피 녀석이 할 수 있는것도 없고 말이야.

출항한다. 난 갑판에 가있을테니 자잘한 건 알아서 해라."


"알겠습니다."


감마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카리나는 꽤 시끄러워지겠군 하고 생각하며 선내방송을 위한 마이크를 켰다.


***


"저 망할 년이!"


"싸움밖에 모르는 무식한 년!"


"두개골 두께 10cm인 년!"


"델타보다 조금 나은 년!"


방송이 끝나자 순간적인 상황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방에서 욕이 터져나왔다. 


안전? 여기가?? 그래 물론 일반적인 상황에서야 어나이얼레이터에 해를 입힐 수 있는 건 없겠지만, 이번 상대는 주인공 버프를 받은 오르카 팀이다. 감마 쪽이 수가 훨씬 많음에도 불구하고 개털린단 말이다. 심지어 막바지엔 어나이얼레이터를 자폭시키려고 하지. 결과적으로는 호라이즌의 활약 덕에 불발로 끝나긴 한다만.


배는 이미 항구를 떠나고 있었다. 솔직히 내가 있는 곳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는게 아직 실감이 잘 안나긴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직접 탈출하는 것 밖에 답이 없다. 


"분명 감마가 배를 비울 때가 기회라고 전달했었는데, 아무도 안오다니... 그 때 메시지를 못받은 건가?"


"그럴 가능성도 높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대뜸 빛 번쩍거린 건데."


"좀 있으면 감마가 용과 일기토 뜨러 다시 배에서 나갈테니, 그 때를 노려봐야겠는데..."


"우린 여기서 나갈수도 없는데 감마가 배를 떠났는지 어떻게 알아? 걔가 나가기 전에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인사라도 하겠대?"


"그건, 그... 생각해봐야지...?"


순간 우좌의 눈이 가늘어진 것 같길래 나는 시선을 다른데로 돌렸다.


"그보다 너희들, 부상은 괜찮아?"


"걱정 마 대장, 충분히 움직일 수 있으니까. 그것보단 무기가 없는 게 문제지."


이그니스, 클로버, 그렘린은 감마와의 전투에서 무기를 잃어버렸다. 좌우좌, 트리아이나, 소완, 베로니카는 여기 붙잡히면서 전부 압수당했고, 나랑 오드리, 올리비아는 처음부터 비무장 상태였다. 감마를 제외한다 하더라도 나머지 포세이돈 병력을 상대할 힘도, 그전에 이 영창에서 나갈 방법도 없다.


"...누구 맨손으로 쇠창살 구부릴 수 있는 사람?"


"이건 대 바이오로이드용 합금이라서 장비 없으면 힘들어요..."


"거기다 창살 밖에 있는 CCTV가 계속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데, 탈옥 시도같은걸 했다간 바로 AGS들이 몽둥이 들고 달려올걸."


...전에도 이런적이 있었지. 탈옥을 해야겠는데 탈옥할 방법이 없다. 왠지 시작부터 망한 거 같군. 9지 스토리 끝날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나는 침상에 양반다리로 앉아 애들이랑 머리를 맞대고 탈옥방법을 모색해봤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들키지 않고 감옥을 나간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냥 드러누웠다. 시발.


***


"...네, 사령관님. 정보가 들어오는데로 보고드릴게요. 후우, 이제 진짜 시작이구나."


이어피스를 꾹 눌러 통신을 종료한 오렌지에이드는 표정을 갈무리한 뒤 활짝 웃는 얼굴과 활기찬 목소리로 주변 펙스 난민들의 이목을 끌었다.


"여러분, 벤쿠버 국제공항에서 수송기가 대기하고 있어요. 서둘러 움직이셔야 돼요!"


오랜지에이드의 안내에 끝이 안보이는 난민의 행렬이 한 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제 이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다, 살아있는 인간이 있다는 오르카 저항군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런 희망을 품고선.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같은 낙원을 향해 걷고있는 건 아니었다.


"저기..."


"네, 안녕하세요. 난민 분이시죠? 앞에 분들을 따라가시면 되요. 맘 같아선 직접 안내해드리고 싶은데, 후열에 계신 분들도 안전하게 대피하는걸 확인해야 되서 같이는 못갈 거 같아요..."


"아뇨, 그게..."


"아, 혹시 난민분들의 리더에 대해서 알고 있는게 있나요? 만나는 분들마다 물어보고 있는데 아무것도 모르시는 분들이 태반이더라고요."


"...저에요."


"...네?"


안경을 쓴 정장차림의 유미가 오렌지에이드에게 접근하는 한편, 목소리는 들리진 않되 모습은 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서 한 바이오로이드 그룹이 수근거리고 있었다. 바로 대장과 떨어지게 된 대장의 일행이었다.


"저 사람이 대장님이 말한 그 유미구나. 그리고 오르카호에서 심었다는 스파이까지... 우연히 난민 행렬에 합류했다가 저 사람들까지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거든."


"으에, 저랑은 완전 딴판이네요. 같은 기종인데도 저렇게까지 바뀔 수 있구나... 눈밑에 다크서클 진 것좀 봐요, 나보다 더하네. 얼마나 고생하면서 살아왔길래..."


포츈과 유미가 제 시야에 들어온 비서 유미를 보며 중얼거리듯이 소감을 말했다.


"그나저나 여긴 펙스의 눈을 피하기엔 적합하지만 역으로 저희도 감마의 함대를 관측할 수가 없는 위치군요. 막상 들어오고 나니 빠져나기도 눈치가 보여 힘듭니다."


네오딤의 금속 구체 위에 붙어있는 와쳐가 말했다. 여기서 비행했다간 적에게 위치를 알려주는 꼴이 됐었기에 와쳐는 엔진을 끄고 네오딤에게 얹혀서 이동중이었다.


"이 많은 수의 바이오로이드가 주인님이 아닌 그 사령관이란 놈한테 간다는 거죠..."


대장이 포로가 된 탓에 워낙 예민해진 레아가 난민들을 아니꼬운 눈으로 흘겨보았다. 그리고선 시선을 오렌지에이드에게로 돌렸다.


"저것도 주인님을 위협했던 해충 중 하나... 죽일까요? 아님 인질로 잡아서 사령관이란 놈을 끌어낸다던가..."


"어이어이, 그럼 안되지. 죄없는 난민들까지 몰살당하게 둘 셈이야?"


"인질은 안돼. 그건 감마가 한 짓, 나쁜 짓이야."


니키와 네오딤이 만류하자 레아는 지긋이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예민해진 것 같네요."


"그... 빨리 대장이랑 재회했으면 좋겠다. 그치?"


"...네. 그렇네요."


레아 옆으로 다가온 더치걸이 대장을 언급하자 레아의 표정이 약간 풀렸다.


"저기. 스파이하니 떠오른건데, 우리 이대로 행렬에 섞여 오르카호에 들어간다면 대장을 위해 스파이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사령관 암살까진 무리더라도, 오르카호 내부에서 정보를 모아 대장한테 몰래 전해준다던가..."


"무리야. 드론이 한 말 있었어? 거긴 시티가드에 080기관까지 아주 빵빵하게 갖췄다고. 무슨 독심술 쓰는 바이오로이드도 있다고 하던데. 적도 바보가 아닌이상 이렇게 많은 수의 인원이 들어오는데 그 중 간첩이 섞여있지 않은지 당연히 검사하겠지. 

우리야 펙스를 따르진 않으니 그런 질문은 문제없지만 또다른 인간을 본 적 없냐, 하는 질문이 나오기라도 한다면 우린 바로 아웃이야. AGS가 아닌이상 금방 들킬걸."


엘븐이 꺼낸 말을 니키가 반박하자 엘븐은 아차하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짚었다.


"...드론 아저씨와 탑돌이는 잘하고 있을까?"


더치걸이 말을 마치자 조용해졌다. 그 둘은 바이오로이드나 크기가 큰 와쳐에 비하면 난민 행렬에서 빠져도 눈에 띄지 않았기에 여기서 나가 어떤 임무를 수행중이었다. 레아가 더치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럴거에요. 분명히."


***


둠 브링어가 지상 정리를 위한 폭격을 마쳤다.


아머드 메이든을 실은 수송선이 난민들을 실어나르기 위해 벤쿠버 공항으로 출발했다.


펙스 난민 행렬 또한 오렌지에이드의 안내를 따라 공항으로 나아갔다.


벤쿠버 도심 남쪽, 벨링햄에 주둔 중인 펙스 신속 대응군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령관은 전술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고 상황을 살폈다. 레모네이드 감마가 언급한 정보원에 관해서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또 한 명의 인간은 초조하게 방을 거닐고 있었다. 남들의 미래는 알아도 자신의 미래는 모르는 그는 끊임없이 앞일을 생각했다.


무적의 용이 이끄는 호라이즌과 머메이드는 군도에 자리잡아 적을 요격할 준비를 끝마쳤다.


바다 위에 정박한 포세이돈 함대는 개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용의 움직임을 주시하고있던 감마는 바다의 짠내를 뒤덮을 정도의 화약 향기를 맡으며 미소지었다.


"그럼 시작해볼까, 용. 전 함대... 전속 항진."



드디어 메인 9지역 돌입!

35화가 되서야 처음으로 철남충 직접 등장, 하지만 대사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