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사령관의 군대

 

위대한 가문을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문장인가? 아니면 웅장한 성인가? 

그도 아니라면 소유자의 격을 높아주는 번쩍이는 검과 갑옷, 혹은 그 권위에 충성하는 이들인가?

 

이 모든 것이 그 가문의 권위와 힘을 보여주는 척도일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한 곳에 모을 수 있어야 진정으로 그 가문의 힘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언덕 위의 웅장한 성을 포위한 저 펄럭이는 군기들처럼 말이다.

 

때는 황제께서 대관식을 하시고 11년차 되던 해, 제국의 황제이자 요한나 아일랜드의 영주, 괌의 공작, 오르카의 왕이요 정력가이자 철충심왕이신 철남투스 1세에 반기를 든 펙스 왕국의 왕, 레모네이드에 충성하는 영주의 성을 황제파의 군대가 포위한 상황이었다.

 

마치 바닷속의 청어때처럼 은빛 비늘과 지느러미를 번쩍이며 대열을 갖춘 군세는 당당하게 자신들의 군기를 휘날리며 전진하고 있었으며 후열의 진지에는 거대한 트리뷰셋(하단에 위치한 무게추를 이용해 돌을 날리는 후기형 투석기)이 무려 3대나 조립되고 있었다.

 

거대하고 웅장한 성을 포위한 그보다 더 거대하고 웅장한 군세를 황제께서는 동원하신 것이었다. 

 

굳건하게 버티는 성을 향해 철권은 전진한다.

북소리처럼 울리는 발소리가 공기를 가득 채우고 땅을 울린다.

일촉즉발의 상황, 갑작스럽게 황제파의 군세가 멈춰선다. 

 

방진의 선두에 선 황제의 충성스런 헤트만이자 스틸라인의 영주인 마리경은 홀로 대열에서 이탈하여 성벽 바로 아래로 전진한다.

화살이 아닌 짱돌을 던져도 위험한 거리임에도 개의치 않고 전진하던 마리경은 당당하게 외친다. 

 

“주의 가호가 함께하길, 용맹한 팩스의 백성들이여! 대군의 앞에서도 주군을 향한 충성을 자랑스럽게 내보이며 저항하는 그대의 충심은 실로 숭고하다. 그러나 그대들이 진정으로 충성하여야 할 분은 정당한 제국의 황제이신 철남투스 1세 뿐이시다! 항복한다면 자비로우신 황제 폐하께서는 군세를 돌려 반역자들을 향해 나아가실 것이며, 거절할 경우 그대들을 반역자로 간주하고 공격할 것이다!” 

 

그녀의 말을 잠자코 듣던 영주는 그녀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이 당당한 어조로 말한다.

 

“주의 가호가 함께하길, 용맹한 황제 폐하의 신하들이여! 우리의 충심을 존중해주는 그대들의 뜻과 자비심에 깊은 존경과 감사를 표하는 바요! 그러나 우리 가문은 펙스 왕국에 충성하고 있으며 공성전 시작 시점으로 40일간 저항하기로 맹세하였소! 귀족으로써 맹세를 어기는 불명예를 떠안을 바에 죽는 것이 낫다는 것은 그대들 또한 동의할 것이요!”

 

그러자 마리경은 눈썹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간다.

 

“그 말을 그대로 폐하께 전해도 되겠소?”

 

“그러시오.”

 

영주의 말이 끝나기 마리경은 무섭게 말머리를 돌려 되돌아가고 잠시동안 정적이 흘렀다.

짧았던 깃대의 그림자가 점차 길어지던 그때, 저 멀리서 성난 숫소의 울음소리 같은 뿔나팔 소리가 들려오고, 곧이어 그보다 큰 병사들의 함성이 “와아아!”하고 울려 퍼진다.  

 

저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트리뷰셋들이 마치 바위를 던지는 거인처럼 거대한 팔을 크게 휘둘러 육중한 바위를 던진다.

바람을 가르며 거대한 바위들은 성벽에 충돌하여 천둥과도 같은 소리가 ‘쿵!’ 하고 울린다.

아직 성벽은 굳건하나 트리뷰셋을 점차 조정하여 성의 취약점을 노릴 것은 저명한 사실이다.

 

안타깝게도 시간은 황제의 편을 들고 있었다.

트리뷰셋을 막지 못하면 머지않아 성벽에 구멍을 낼 것이고, 성벽에 구멍이 나면 저 대군이 홍수처럼 밀려들 것이다.

그렇다고 항복하자니 수도의 가족들과 명예가 위험했다.

최소한 40일은 버텨야 재산과 명예 모두 지킬 수 있는 것이었다.

 

 

 

 

 

 

 

 

 

 

 

 

 

 

 

 

 

 

 

 

  1. 창잡이

 

또 돌들이 후웅~하고 날아가더니 쿵! 하는 소리를 내며 성벽에 부딪쳐 조각난다.

성벽은 생각보다 튼튼해서 견디고 있지만 자신이 보기에도 성벽은 오래 가지 못할 것 같았다.

레모네이드왕의 지원군이 오지 않는 이상 아마 항복하던가 내려앉은 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하거나 둘 중 하나 일 것이다.

곧 성벽에 구멍이 날 것이니 미나는 수성군과 맞붙을 대비를 하였다.  

 

밀집모자처럼 넒은 챙이 달린 철재 투구와 상아색 갬비슨(두꺼운 천으로 만든 방상 내피와 비슷한 갑옷)을 점검하고 느슨하게 쥐던 파이크를 단단히 쥐었다.

몇번의 전투에 참전하며 기른 눈치다. 틀리지 않지는 않지만 늙은 농노의 무릎처럼 상당히 잘 맞았다.

아니나 다를까 미나의 주군이신 스트라이커의 영주인 티아멧경이 외쳤다.

 

“곧 성문이 열릴것이다! 모두들 대비해라!”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뿔나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전신을, 혹은 일부만 번쩍이는 갑옷을 걸친 맨앳암즈(신분에 상관없이 중무장한 병사를 포괄하는 개념. 앞으로 중보병이라 칭함)들은 사슬갑옷과 판금이 부딪쳐 짤랑이는 소리를 내며 돌격하고 그 뒤를 시민들로 구성된 징집병들이 따르고 그 방진과 조금 거리를 두고 어떤 빨간머리 여자가 이끄는 등에 커다란 방패를 맨 석궁병들이 그 뒤를 따른다.

 

“와아아아~!”하는 함성이 무기와 갑옷이 부딪치며 내는 소리와 발소리에 뒤엉키고 성과의 거리는 점차 좁혀진다.

희미하게 반짝이던 것이 황소도 드나들 만큼 커다란 구멍이 된 성벽이라는 것이 식별되기 시작하고 구멍은 점차 선명해져 성문 안의 병사들의 윤곽이 보인다.

병사들의 모습이 점차 선명해질 수록 의식하지 않던 심장소리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점차 커지고 손에서 땀이 나 장갑 안이 습해질 지경이었다.

머리를 짓누르는 투구와 자신을 둘러싸는 어깨들에 시야가 가려져 눈 앞의 적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는 운이 좋은 편이다.

훅훅 거칠게 숨을 뱉으며 성큼성큼 전진하는 것과 눈 앞의 적들에 만 몰입한 그녀를 누군가의 고함이 깨운다.

 

“화살이다!” 

 

놀란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어째서 여태 몰랐을까?

연못가에 모여든 날벌레처럼 무수히 많은 화살들이 하늘을 가려 땅을 그림자로 검게 물들인 것을.

바람소리는 점차 가까워지고 화살은 점차 선명해진다.

 

“주여….”

 

잊고 있었던 그녀의 신앙심이 갑작스레 차오르더니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흘러 입으로 세어 나왔다.

부디 주님께서 자신의 독실한 신앙심을 어여삐 여겨 화살이 빗나가기를 가슴속으로 기도하며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움츠렸다.

 

“악!”

 

화살은 날카로운 바람소리를 내며 빗방울처럼 사방에 박히고 비명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온다.

투구에 화살 2발이 부딪혀 튕겨 나가고, 1발의 화살은 갬비슨을 뚫고 왼팔을 가르고 박혔다. 

피부에 생긴 상처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나와 상아색 갬비슨에 붉은 꽃을 서서히 피운다.

다행히도 상처는 그리 심각하지 않은 듯하였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팔에 박힌 화살을 잡는다. 그리고 스읍! 하며 이빨 사이로 숨을 들이쉬고 최대한 빨리 화살을 뽑았다.

 

“아악!”

 

몇 번의 전투를 겪으며 나름 경험이 쌓였다고 자부했으나 화살을 뽑는 고통과 감촉은 몇 번을 겪어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화살을 뽑는 것을 주저하던 어느 징집병의 상처가 더 깊어져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꼴을 본 이후 그녀는 화살을 뽑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는 재빨리 허리춤에 묶어 놓은 붕대를 풀어 어깨에 칭칭 감는다.

뜨거운 피가 팔을 적시고는 굳어 차갑고 끈적한 감촉을 자아내고 왼팔에 끔찍한 고통이 느껴지고 힘이 빠졌다.

그러나 그녀는 쉴 틈이 없다. 숙달된 궁수들은 화살 여러 개를 땅에 꽃아 놓기에 몇 초만 있으면 다시 화살을 쏠 것이다.

그러기 전에 차라리 적과 가까이 붙어서 뒤엉키는 편이 생존율이 높은 것이다.

 

시야를 가린 어깨가 줄어들어 시야가 넓어진 것을 느낀 그녀는 조금 보폭을 늘려 앞으로 나아갔다. 전열에 구멍이 생기면 그 구멍을 후열의 인원이 메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다음은 자신의 차례다.

그녀는 죽음에 한걸음 다가갔음을 느꼈다.

보병들 뒤에 숨은 것도 모자라 방패까지 세워놓고 멀리서 석궁이나 쏘면서 봉급은 더 많이 받는 저 겁쟁이들이 원망스러웠다.

애초에 저 성벽 위의 궁수들을 처리하는 것이 저들의 임무가 아니던가?

마침내 뒤에서 화살이 날아온다.

궁수들이 맞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겁쟁이들이 조금이라도 쓸모 있는 짓을 했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역시 겁쟁이 같은 궁수는 쓸모가 없었다.

 

다시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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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벌 분량 존나 질질 늘어지네. 완결까지 가면 소설책 한권 나오겄다.


여담이지만 황제의 어원은 라틴어로 군 사령관을 의미하는 임페라토르(Imperator)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유럽 최초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로마군의 최고사령관 직위를 이용해서 로마내전의 최후의 승자가 되었는데, 카이사르는 로마의 모든 것을 시민과 원로원에 넘기겠다고 선언하며 왕의 칭호를 쓰지 않을 것을 원로원에 약속했고 대신 원로원에 요구한 것이 종신 호민관 특권과 군의 통솔권이였어.

호민관은 시민의 대표로써 원로원의 결정에 대하여 거부권과 신변에 대한 신성불가침이 있었는데 이런 특권을 평생 누리면서 로마군을 통솔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된 아우구스투스는 제1시민(원로원의 1인자라고도 번역함)이라는 뜻에서 '프린캡스'라는 칭호를 사용했어.

이 중 사령관이라는 뜻의 임페라토르가 황제를 뜻하는 칭호로 불리게 되었고 이 임페라토르가 영어 발음으로 바뀌면서 엠퍼러라는 단어가 생겼지.

그래서 철남충이 사령관이나 왕이 아니라 황제라고 불리는거야. 말하자면 사령관이라는 뜻이니까.  


글고 헤트만은 왕의 따까리 중 왕초인데, 원래 왕의 군대를 통솔하는 군 사령관 포지션인데 나중에는 지역 영주의 대장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변경된 관직이야.

가장 왕의 신임을 받는 영주가 받는 영광스러운 칭호라서 공식 설정으로 사령관이 가장 신뢰하는 장군인 마리한테 줌.


글고 여기서 궁수나 석궁병을 존나 까는데 이는 그리스 시대부터 내려오는 전통으로 역사적으로 원거리병종은 남들 얼굴 맞대고 맞붙는데 멀리서 뿅뿅 쏴된다고 천시받았어. 이게 절정에 달한게 100년 전쟁인데, 프랑스 기사들은 제노바 석궁병들한테 파비스라는 대형방패도 없이 성에 닥돌하라 요구했고 그 결과 잉글랜드의 롱보우 궁병한테 쳐발리고 제노바 석궁병들의 명성에 금이 갔어.

근데 편견과 달리 딱히 안전하지도 않은게 원딜러 특성상 적의 집중공격을 받아서 이들이 욕먹는 것은 존나 부당한 처사였어.


어쨌든 뭐 그렇다고. 근데 난 고증에 딱히 신경 안쓰고 쓸거라 이걸로 중세사에 대해 배우려 하지 마.

당장 철남충도 라틴어식 작명법과 리처드 1세, 앙리 4세 등 이 시기에 안맞는 인물들 이름에서 따온거고 나도 잘 몰라.

이번화도 재미없어서 미안해. 그나마 다음화에서 공성전 마무리 짓고 아스널경 같은 다른 등장인물들도 나와서 대사도 나올거임.

전투중인데다가 주인공이 창병 1이라서 딱히 이야기를 할 껀덕지가 없네. 

그렇다고 배경에 가까운 엑스트라한테 대사를 주면 글이 난잡해지고.

어쨌든 봐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