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가 예니세이 강변에서 멈췄다.


 "탈론페더 씨, 거 여기서 내리셔야겠는데. 예니세이 강 건너까지는 안 가요."


 "돈을 더 줄테니 가주시면 안될까요?"


 "저기는 자유인 월경지입니다. 난 공무원이고요. 나 같은 공무원이 저기 들어갔다가 자유인이란 작자들한테 총 맞아요. 게다가 이 날씨에는 못 가요. 못 가. 내리셔야 해요."


 12월이 되자 이 세상의 신들이 미리 협의라도 한 듯 한층 추워졌다. 대낮의 쨍쨍한 태양도 세상을 밝힐 뿐 얼어붙은 땅의 조약돌 하나 녹이지 않았다. 창가 너머의 강은 꽝꽝 얼어있었고 그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하베스터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가라앉아 백년 넘게 방치되었다. 버스에서 내려 뼈마디가 시린 겨울바람을 뚫고 강가에 갔다. 저 다리를 대신하려고 띄워놓았을 통나무다리도 강물이 얼어붙으며 제 자리에서 어그러졌다.


 강 너머에 내가 고용한 자유인 출신 트럭 기사가 손을 흔들며 빨리 오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들뜨고 어그러진 통나무를 살금살금 밟았다. 발치를 내려다보는 시선에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검은 바위들이 걸렸다. 가득한 피탄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엔진. 생기가 사라진 붉은 빛. 그들은 아가리를 벌려 나를 집어삼키지 않았다. 대신 이곳에 세워진 문명의 시계는 멸망 이래 한번도 돌아가지 않았음을 보일 뿐. 통나무 하나하나를 사뿐사뿐 디디며 강 건너로 넘어가자 트럭 기사가 웃으면서 트럭에 시동을 걸었지만 이내 당황했다. 투박한 강철 짐승은 아무리 시동을 걸어도 기운빠진 소리를 낼 뿐이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왜 이러지, 트럭 기사가 난처한 목소리로 엔진을 만졌다. 교통사정상 일주일 쯤 늦는 것이야 문제가 아니었다. 한겨울 추위가 빨리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얼려죽이리라 칼같은 바람으로 등을 쿡쿡 찌르고 있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트럭 기사는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트럭이 오늘 제대로 퍼진 것 같습니다. 제가 어떻게든 고칠테니 잠깐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고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요?"


 "2시간은 있어야 할 거 같습니다. 정말로 죄송하게 됐습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꽉 막힌 내 상황과는 달리 담청색 하늘은 실구름 하나 없이 뻥 뚫려있었다. 얼어죽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열을 뎁히던 와중 한 아이와 마주쳤다. 서리가 내려앉고 눈이 켜켜이 쌓인 이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빨간 머리의 대여섯살 된 소년이었다. 소년은 빨간 볼을 양손으로 비비며 말을 걸었다.


 "아줌마는 누구세요?"


 "말해줘도 모를 거란다."


 나는 무릎을 굽혀 그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아이는 트럭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아줌마 거에요?"


 "다다음주까지는."


 아이는 그 말에 뒤돌아서 어딘가로 뛰어갔다. 굳이 그 아이를 쫓아갈 이유는 없었지만 추위가 뭐라도 하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 아이를 따라 걸어갔다. 얼마 가지 않아 오두막 하나를 볼 수 있었다. 아이는 오두막으로 들어갔고 이내 한 여인이 나와서 나를 보러 왔다. 엄마, 이 아줌마도 트럭을 가지고 있대. 아이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아들과는 달리 긴 백색 머리칼에 차분한 표정을 지킬 줄 아는 여자였다. 아마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프로스트 레프리콘, 또는 프로토타입 레프리콘 따위로 불렸을 여인. 시베리아의 대지에서 그녀를 보니 마치 신령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렇구나, 알려줘서 고맙다."


 그녀는 아들에게 낚시용 줄과 미끼를 건네주고는 강변을 가리켰다. 어제 배웠지? 얼음 안 깨지게 조심하렴, 신신당부한 그녀는 빨간 머리의 아들을 강변으로 내려보내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곳 사람이 아닌가보네요."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고향을 출생지로 따진다면 나는 텍사스 바이오로이드 최종 배양 공장 태생이었고, 어릴 적에 자란 곳으로 따진다면 중국 전선이었다. 정 붙이고 눌러앉아 사는 곳이라면 프랑크푸르트가 알맞을 것이다. 어느 쪽을 고향으로 여기건 옛 러시아의 시베리아 지방과는 거리가 멀었다.


 "트럭은 어디에 내버려두고 여기까지 왔나요? 저를 찾아오신 건 아닌거 같은데..."


 "고장났습니다. 기사가 고치고 있는데 잘 안 되나 봐요."


 "저런, 이런 곳에서 고장나면 참으로 갑갑할 텐데 말이죠. 차 한잔 하시죠. 가만히 서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프로스트 레프리콘은 혀를 차며 오두막을 가리켰다. 거부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고, 수락할 이유는 추운 날씨가 수백개나 만들어주었기에 환대를 받아들였다. 오두막에 들어가자 사막 속의 오아시스처럼 애타게 찾아온 온기가 나를 반겼다. 밟고 있는 땅처럼 시간이 멈춘 듯 얼어붙었던 얼굴도 풀어졌다. 찻주전자를 올리고 불을 붙이는 프로스트 레프리콘은 이 온기 속에서도 차분했다.


"이 날씨에도 낚시를 하나요?"


"얼음낚시라고, 살다보니 배운 거에요. 보시다시피 물고기는 아직 못 잡았어요."


 뜨겁게 끓인 차가 탁상에 올려지고, 염장한 비계를 바른 빵이 그 뒤를 따랐다. 그저 차를 고칠 때까지 잠깐의 온기만을 바랬던 나에게는 꽤나 파격적인 대접이었다. 레프리콘은 의자를 끌어서 앉았다. 의외의 대접에 놀란 나와는 달리,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더 대접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드러났다. 나는 의례적인 감사를 표하며 호의를 받아들였다. 참전자의 인터뷰를 수집하는 데 열심이던 나는 어떻게 하면 말문을 열게 할 수 있을까 속으로 고민했다. 하지만 그녀가 먼저 선수를 쳤다.


 "전쟁 때 어떤 일을 하셨나요?"


 "...종군기자 겸 정찰병을 했답니다."


 프로스트 레프리콘은 고개를 끄덕였다. 탈론페더가 해봐야 뭘 했겠는가, 오르카호에 있었던 이들은 야동을 찍었을 테고, 전우일보 발간대에 있었던 이들은 사진을 찍었을 테고, 전방에서 뛰는 탈론페더들은 정찰병으로 뛰었으리라. 당연한 일이었다. 프로스트 레프리콘은 비계를 바른 빵을 한입 베어물고, 차를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


 "철충들을 잡느라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그리고 레모네이드네 똘마니도요."


 그녀의 언사에 소름이 돋았다. 저는 그저... 라 변명하려 했다. 오르카호 복무기간이 차이날 수밖에 없는 레모네이드 측 잔존병들이 오르카호 출신 참전용사들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졌고 그로 인한 사건사고도 몇개 들었다. 그 사건사고에 내 이름이 올라가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프로스트 레프리콘은 내 반응을 보더니 차분한 표정을 깨며 크게 웃었다.


 "걱정 마세요. 나는 웃고 싶을 때마다 레모네이드 개새끼 대가리 터진 사진을 보면서 웃고, 힘들 때마다 레모네이드네 똘마니들이 어떻게 좆됐는지를 생각하면서 위로를 받거든요."


 그러면서 그녀는 팔소매를 걷어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팔에는 보라색과 파란색이 섞인 알록달록하고 큰 검은 반점이 점점이 나 있었고, 피가 뛸 때마다 피가 지나가는 지점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충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왜 레모네이드를 증오할지도. 이 사람에게도 이 사람의 이야기가 있었으리라, 잠깐 신세진 김에 이야기까지 딸 기회가 있을까 싶어 말을 걸려 했지만 어려웠다. 하지만 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아이를 침대에 재우고 눈을 감으면 항상 묻습니다! 인생아, 넌 왜 날 이 꼴로 만들었느냐, 인생아, 넌 날 얼마나 더 괴롭혀야 만족할 것이냐! 물론 눈을 뜨고 아이를 깨우러 갈 때도 묻죠. 하지만 언제나 답이 없어요. 구름이 달까지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사방이 눈으로 덮여 제 눈을 찌르는 밝은 겨울 아침에도요. 그리고 전 알고 있습니다. 제 삶이 끝날 때까지 그 누구도 저에게 답을 주지는 않을 겁니다."


 나도 모르게 녹음기와 수첩을 꺼냈다. 프로스트 레프리콘은 내 폼을 보고 내가 이 일을 하루이틀 한게 아님을 간파한 듯했다. 그녀는 조심스레 일어나서 찬장을 뒤져 서류봉투를 꺼내왔다. 나한테 부탁할 것이 있는 것일까? 그녀가 내 진정한 정체(E-16 탈론페더 471이자 참전용사 회고록의 저자)를 알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내 행동을 적대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아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로 했다.


 "이야기가 많이 길어질 거에요."


 "괜찮습니다."


 그렇다면야, 프로스트 레프리콘은 차를 홀짝이고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살아있다는 건 좋은 거예요! 아주 좋은 거죠! 내가 살아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지금 여기서 당신이랑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저 애를 키웠겠습니까? 하지만 한때는 살아있는 게 정말로 고통의 연속이던 때가 있었어요. 제가 레모네이드네 공장에서 노예노동을 할 때였지요. 그것도 배터리 공장 말이에요! 만약 AGS 옆을 지나다닐 일이 있다면 액이 흐르는지 잘 살펴봐요. 거기서 뭔가 신내가 난다면 좆되기 전에 피해요. 내 경험으로 말해주는 겁니다. 아, 딴소리가 길어졌네요.


 제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확실하게 기억하는 건 어디 공장 같은 곳의 동면장치에 갇혀있다가 깨어나보니 2213년이었고, 블랙리버는 망했고, 내 모델명 말고는 기억도 못하고 뭐 그런 거였죠. 눈을 떠보니 무슨 바이오로이드들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뭐하는 사람들인지는 몰랐지만 그대로 끌려갔어요. 멀리도 끌려갔습니다. 트럭 위에 실려서 별도 보고, 눈도 보고, 해도 보고, 아래로 고개를 돌리면 광활한 벌판도 보이고, 강도 보이고, 산도 보이고, 그렇게 몇날며칠을 달려서 도착한 곳이 공장이었습니다. 31142 AGS 동력원 공장이라는 곳이었죠.


그곳에 들어가서 가만히 앉아있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공장에는 공터가 있었는데 몇몇 바이오로이드들이 끌려와 있는 상황이었어요. 다들 엄청 두들겨맞았더군요. 그 사람들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가 싶어 쳐다봤는데, 글쎄 그 사람들을 무슨 단상 위로 끌어올리더니 우리들 보고 그 단상 앞에 집합하라는거 아닙니까. 그러더니 그 중에서 제일 높아보이는 사람이 우리를 보고 말하더군요.


 "너희들은 이제부터 펙스 콘소시엄의 사원이자 자산이다. 너희들에게는 하루 세끼와 적절한 휴식이 제공될 것이다."


 "누구 마음대로!"


 누가 반항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 위에 올라간 사람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자기 할말을 계속했어요.


 "하지만 반항이나 치명적인 실수는, 다음과 같이 처벌될 것이다."


 그러면서 단상에 올라가있는 바이오로이드들의 시리얼 번호를 하나씩 불렀습니다. 더치걸-13121, 노움-53516, 브라우니-2112, 그 외 기타 등등. 그러더니 자동소총을 꺼내서 그들을 싹 다 쏴죽였어요. 그때 간신히 살아남아서 피거품 끓는 소리를 내던 이가 목이 비틀려 죽었을 때는 정말로 끔찍했죠. 그런데 거기서 누구 맘대로, 라고 외쳤던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 거에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죠. 자동소총 총부리를 들이미니까 그제서야 다들 손가락으로 말한 놈을 가리켰어요. 네, 하는 김에 그 사람도 총살당했어요.


 그 광경을 보니까 말을 잘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찌 됐든 죽는 것보다야 사는 게 낫잖아요. 곧이어 몇명 단위로 끊어서 줄을 세우고, 너는 1번 작업반 쪽에 서라, 너는 2번 작업반 쪽에 서라, 그런 식으로 말하더군요. 이상하게도 그 상황이 익숙했습니다. 아마 제 머리 속에 들어있는 모듈 덕분이었겠죠. 저는 4번 작업반으로 가게 됐습니다. 4번 작업반이라는 곳으로 갔는데 다들 누워있더군요. 인사했는데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어요. 목소리가 작았나 싶어 더 크게 얘기하려는데 한 더치걸이 자기 옆자리를 툭툭 치면서 저한테 말하덥니다.


 "목 막 쓰지 말고 누워. 신입인가 본데 앞으로 개고생일 거야. 누울 수 있을 때 누워둬. 기왕이면 잠도 좀 자고."


 그 말대로 누웠어요. 앞으로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는 걸까? 누우면서 주변 사람들을 봤는데, 비좁아서 그런지 휴식공간이 아니라 영안실인 줄 알았습니다. 더치는 눈을 감고 가만히 있다가 저를 보고 물었어요.


 "기종이 어떻게 되나? 난 뭐 보다시피 더치걸이야. 4531번이지."


 "프로스트 레프리콘, 1121번입니다."


 더치걸은 눈을 슬쩍 떠서 제 얼굴을 보더니 다시 감았어요. 그리고는 혀를 차덥니다.


 "그냥 레프리콘이었으면 매우 낮은 확률이지만 보안요원이 될 수 있었을 텐데 기회조차 없었군. 안타깝네."


 "무슨 뜻이죠?"


 "곧 알게 될 거야. 오늘은 나한테 꼭 붙어있어. 기술을 알려줄 테니까."


 "...선배라 불러도 될까요?"


 "마음대로 해."


 얼마 안 가서 시끄럽게 종이 울렸어요. 저는 폭격이라도 시작되나 몸을 웅크렸는데 더치 선배가 저를 일으켜세웠어요. 일 나갈 시간이야,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보안요원들이 들어와서 마구 소리를 질러댔어요. 참 화가 많이 나 있는 사람들이었습디다. 그 사람들이 우리를 끌고 어디로 마구 밀치고 때렸어요. 정말로 어두웠어요. 그 사이에 보안요원들이 전기가 통하는 몽둥이로 누구를 막 두들겨패면서 생기는 스파크랑, 비상등의 창백한 불빛만 보였죠. 앞사람 뒤통수만 겨우 보일 정도였다니까요. 더치 선배를 따라 앞으로 갔어요. 가면 갈수록 신내가 나기 시작하는데 더치 선배가 저한테 마스크 한 장을 주더군요.


 "써, 없는 것보다는 나아."


 마스크를 썼습니다. 신내는 점점 더 심해져서 불쾌감이 들 지경이었는데 빛이 보이더군요. 물론 신내는 더욱 지독했습니다. 눈을 뜨고 보니까 엄청나게 거대한 기계가 유독한 증기를 내뿜었고, 그 밑에서는 딱 봐도 유독해보이는 파란빛을 내뿜는 것들이 뽑혀나오고 있었으니까요. 유독한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았냐고요? 사실 아무도 말 안해줬어요. 하지만 알 수 있었죠. 그 보안요원이란 친구들은 전부 방독면을 끼고 있었습니다. 입고 있는 옷에는 떡하니 화학적 위험표시랑 방사능 위험표시가 박혀있고 방호복이라 쓰여져 있었어요. 하나도 위험하지 않았으면 굳이 그 짓을 왜 했겠으며, 우리는 왜 마스크를 썼겠습니까?


"이리로 와. 내가 작업을 알려줄게."


 정말로 시끄러웠지만 어쨌든 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반항했던 사람들이 무슨 꼴을 당하는지 잘 봤으니까요. 석면장갑을 끼고 배터리를 만졌어요. 손이 정말로 뜨거워서 만지자마자 손을 뗐어요. 옆에서 보던 선배가 어허! 하면서 계속 잡으라고 주의를 줬어요.


 "하지만 너무 뜨거운 걸요."


 "내가 그렇게 변명했다가 뒤에 있는 보안요원한테 태업으로 두들겨맞았던 적이 있지. 적응하던가 아니면 두들겨맞던가야."


 뒤를 돌아보니까 진짜로 보안요원이 오더군요. 어쩌겠습니까. 잡았어요. 선배가 잘 보고 따라하라면서 일을 가르쳐주기 시작했어요. 뭘 해야 하는지 알거 같더라고요. 하지만 잡을 때마다 너무 뜨거웠어요. 첫날 일이 끝나고 돌아올 때는 얼굴이 눈물범벅이 됐다니까요. 돌아오는 길에 샤워실에 들어가서 선배가 제 얼굴을 닦아주면서 말했어요.


 "많이 뜨거웠지? 너무 걱정하지 마. 곧 익숙해질 거야. 익숙해진다는 게 좋은 일은 아니겠지만..."


 좋은 일은 아닐 거다.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이제는 아주 잘 이해하고 있어요. 지금 제 팔을 보세요. 그 씨발놈의 배터리 때문에...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더치 선배가 샤워할 때 물을 많이 마셔두라길래 하라는 대로 하고, 샤워가 끝나고 밥을 먹으러 갔어요. 그런데 밥이란 게 무엇인고 하니 그냥 검은색 블럭에 물 한잔이었어요. 이게 뭔가 싶어서 빤히 쳐다보는데 선배가 말했어요.


 "빨리 먹어."


 더치 선배는 또 보안요원들을 가리켰죠. 뭔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았어요. 맛은 더럽게 없었지만 억지로 삼키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습니다. 겨우 다 먹을 때쯤에 보안요원들이 늦게 먹는 사람들을 전기 몽둥이로 두들겨팼어요. 빨리 안 먹으면 태업이라면서요. 태업! 전 아직도 그 말을 제일 싫어한답니다! 태업은 니미!


 그렇게 고단한 하루가 끝나고 누웠어요. 좀먹은 모포 냄새를 맡으니 눈물이 다 나더군요. 나는 대체 여기 왜 있는 걸까, 난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이런 삶 말고 다른 삶은 없나! 차라리 죽었으면!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하지만 내일이 왔어요. 더치 씨가 저를 깨웠습니다. 또 일할 차례였죠. 그렇게 계속 일했습니다. 가끔씩은 쉬는 시간이 더 길 때가 있었는데, 펙스 콘소시엄 창립 기념일이었어요. 그때 펙스 콘소시엄의 역사를 보여주는데 펙스 회장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숲에서 안락하게 휴식을 취하는 장면이 보였습니다. 솔직히 그 회장인지 뭔지 하는 노인네는 내 알바 아니었어요. 그 숲, 그 숲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습니다. 나도 저런 숲에서, 저렇게 집 하나 짓고 마음대로 살고 싶다! 어찌 됐든 이 좆같은 배터리 공장보다는 나을 것 아닌가?


 네, 당신에게는 익숙할 두글자짜리, "자유"라는 개념을 알게 된 겁니다.


 그걸 보고 난 뒤로 가슴 속에서 뭔가 끓어올랐어요. 왜인지 모르게 이곳에서 나갈 방법을 찾고 싶었죠. 보안요원이 된다던지 승진한다던지 그딴 건 고려사항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건 이곳에서 나간다는 거였어요. 자기 전에 누워서 더치 선배님한테 물었어요.


 "더치 선배님."


 "왜."


 "여기 바깥에서 사는 건 생각해본적 없어요?"


 "...자라."


 선배님은 그렇게 말하고 잠에 드셨어요. 저도 상심해서 그냥 잠에 들었어요. 그런데 그 다음날 일어나면서 침구를 정리하고 있는데, 우리 작업반 생활관에서 구석자리에 앉아있던 브라우니가 저한테 와서 쪽지를 건넸어요. 일 끝나고 읽어보라고 적혀있었죠. 그날 일이 끝난 다음에 읽어봤어요... 자유를 원하냐는 내용이었는데, 너무 길어서 다 읽지는 못했지만 그런 내용이었어요.


 자유를 줄 수 있다. 나는 오르카호에서 온 혁명군이다. 하는 김에 이 배터리 공장과 펙스 콘소시엄의 모두에게 엿을 먹일 수 있다. 내 말을 따르라.


 그런 내용이었어요. 자동소총 때문에 벌집이 된 사람들이 눈 앞에 선하더군요. 저는 벌벌 떨면서 그 브라우니를 쳐다봤어요. 브라우니는 어깨를 으쓱였습니다. 저는 그 내용을 보면서 벌벌 떨다가 잠에 들었어요. 그 다음날에 일어나서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들을 다 불렀어요. 또 총살이었죠. 죄목이 참 다양했습니다. 솔직히 죄목을 그때그때 만들어서 사람 죽이나 싶을 정도로 말이죠.


 "태업죄, 반항죄, 사보타주 죄, 고발 지연죄."


 고발 지연죄, 그런 기상천외한 죄가 다 있나. 하여간에 다들 똑같이 자동소총 총알을 먹고 침묵했죠. 아니, 그걸 봤는데 도망칠 생각이 나겠습니까? 혹시라도 쪽지가 들킬까 벌벌 떨다가, 며칠 지나서 브라우니한테 그 쪽지를 도로 가져다줬어요.


 "이건 미친짓이예요. 난 못하겠어요. 미안해요."


 그러니까 브라우니가 그럴 줄 알았다면서 저한테 말했어요. 그런데 제 쪽지를 받자마자 참... 더럽게도 웃더라고요. 소리내어 웃은 건 아니었는데 표정이 참 더러웠어요.


 "고발 지연죄라고 들었지? 하루라도 고발이 늦으면 고발이 늦은 사람도 총살이야. 이렇게 또 한배를 탄 사람이 늘었네."


 그렇게 말하면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쭉 가리켰어요. 다들 표정에 불안한 기색이 돌았어요. 이런 식으로 아무도 못 빠져나가는 수법을 쓴 거 같더라고요. 좆됐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날 자기 전에 더치 선배님한테 물었어요.


 "선배."


 "왜."


 "선배도 저 브라우니한테 제안 받았어요?"


 "거절했지, 저년 덕분에 편하기 죽기는 그른 거 같다."


 "이제 어쩌죠?"


 "뭐긴 뭐야. 최대한 살아남아야지."


 그날은 참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그러다가 더치 선배님께서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시고는 잠에 들었죠.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위에서 하라는 대로 해. 그리고 당장 살아남는데나 집중해. 그러면 되는 거야."


 그 말대로 계속 일했어요. 처음에는 불안했지만, 나중 가니까 적응했어요. 안 들키겠지, 일이나 하자, 그런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더치 선배님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제조공장에서만 기침을 했는데 나중 가니까 작업반에서도 기침을 했어요. 기침을 너무 하길래 등을 두드려줬는데 피를 뱉는 겁니다. 깜짝 놀랐어요. 그래서 보안요원을 부르려는데 선배가 절 붙잡고 말렸어요.


 "그러지 마."


 "안 돼요. 그러다 선배 죽어요."


 "너 때문에 더 빨리 죽는 수가 있어."


 더치 선배님은 심호흡을 하면서 기침을 최대한 안 하려고 뇌를 쥐어짰어요. 그리고는 저한테 여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설명해 주셨죠. 들으면 들을수록 우울해졌고, 또 화가 났어요. 아무리 우리가 바이오로이드라지만, 그래도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요?


 "잡혀오건, 새로 생산되건 여기로 끌려오는 거야. 그리고 수율 검사를 받지. 수율이 좋으면 괜찮은 데로 가고, 나쁘면 뭐... 이런 데로 오는 거지. 오고 난 다음에 어떻게 되느냐? 유독가스를 들이마시는 거야. 그리고 폐가 점점 죽어가고, 그러다가 기침을 하기 시작하고, 쓸모없다는 게 밝혀지면..."


 선배님은 자기 목을 손가락으로 죽 긋는 시늉을 했어요. 죽는다는 거였죠. 부정하고 싶었어요. 아무튼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물었어요.


 "그걸 선배님이 어떻게 알아요. 죽어본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해봐서 잘 알거든."


 선배님은 주머니에서 사원증을 꺼내 보여줬어요. 선배님 얼굴이랑 식별번호가 쓰여져 있었고, 직책에는 "하급 감독"이라 쓰여있었죠. 선배님은 제 하얀 머리칼을 매만지면서 말했어요.


 "너희 같은 작업반원들 중에서 쓸모없는 애들을 고르는 일을 해왔다. 내가 고른 애들은 "재활용" 시설로 갔지. 이 짓을 도저히 못하겠어서 안 하겠다고 드러누웠어. 죽이건 말건 상관없었어. 오히려 죽으면 나았지. 그런데 이 새끼들, 총살 대신 날 강등시킨거야. 그래서 이렇게 살아있지. 차라리 잘됐어. 내가 최대한 살아남게 내버려 둬. 내 폐가 완전히 썩어 문드러져서 고통 속에 죽어가게 내버려두라고. 그게 내 속죄고, 내 선택 때문에 죽어갔던 이들에게 내가 바칠 게 이 고통밖에는 없으니까."


 주변을 둘러봤어요. 반원들도 더치 선배님 하는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어요. 표정이 침통했습니다. 그 반란인지 혁명인지 한다던 브라우니 그년 빼고. 구석에 있던 브라우니는 뭐가 좋은지 웃음을 못 참았고요. 더치 선배 얘기를 듣던 한 사람이 말했어요. 그걸 시작으로 다들 한마디씩 얹었습니다.


 "나도 요즘 폐가 가려워."


"우리도 결국 저렇게 될 거야."


"더치 선배, 선배가 누굴 죽였건 어쨌건 선배 아니었으면 난 진작에 자살했을 거에요."


"어차피 뒤질 거, 저새끼들한테 엿먹이고 뒤질 방법 없나 고민하던 중이었어."


 누군가는 더치 선배와 같은 운명을 맞을 게 두려워서, 누구는 더치 선배를 위해서, 누구는 그냥 펙스를 엿먹이기 위해서. 더치 선배를 뺀 모두의 시선이 브라우니에게 향했습니다. 반란을 종용하던 그 친구한테요.


"그렇게 떠벌리고 다녔으면 계획이 있겠지."


 "나만 믿어. 일단 좀 기다려 봐. 오늘은 쉬라고."


 브라우니를 보던 더치 선배가 마른기침을 했어요. 그리고는 제 손을 잡으면서 만류했어요.


"저 녀석이 널 포함한 여기 모두를 다 죽일 거야... 저 녀석을 믿으면 안 돼."


 "하지만, 선배님..."


 "내가 일해봐서 안다. 이곳의 방어시스템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견고해. 쿨럭! 그리고 만약 성공한다 쳐도, 우리들은 다 끝장날 게다."


 "이 방법 말고는 선배님을 살릴 수 없는걸요."


 살린다고? 더치 선배님의 목소리에 마른기침이 섞여나왔어요. 한참 동안이나 마른기침을 하다가 간신히 진정하시고는 저한테 조언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의미심장한 조언이었죠.


 "펙스를 엿먹이고 싶으면 뜻대로 해. 하지만 날 살리고 싶으면... 글쎄?"


 더치 선배님은 그렇게 말하면서 잠에 들었어요. 그 다음에는 뭔가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보안요원들한테 태업이나 반항에 걸리지 않는 선에서 띠껍게 말한다던지, 불만을 표출한다던지, 말대답한다던지 그런 일들이 보였죠.


 "아, 일어난다고요. 지금 몽둥이로 때리니까 더 늦잖아요."


 "말로 해도 알아듣는다니까요?"


 "그걸 저한테 물으면 어쩌자는 겁니까?"


 물론 싸가지 없다고 전기몽둥이를 맞았죠. 그래도 아픈 티는 냈지만, 이전처럼 미안하다고 제발 살려달라고 붙들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브라우니는 식사시간에 다른 작업반의 브라우니와 쪽지를 몰래 교환하거나 교대 시간에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무언가 계획하고 있다는 티를 냈죠. 그렇게 얼마간이 흐르고 난 뒤에 작업반에서 한참 자고 있는데 누가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니 그런데, 문이 열렸는데 사람이 보이지가 않는 거에요. 발소리도 분명히 들리는데....


 "헉!"


 제가 보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는데 그 사람이 쉿, 하면서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다댔어요. 어두워서 누구인지 잘 보이지는 않았는데 대충 보라색 머리칼에 빨간 눈동자인건 알겠더군요. 그때는 몰랐지만, 팬텀이었죠. 혁명을 한다던 브라우니가 발소리를 듣고 일어났어요.


 "딱 맞춰서 오셨네요. 다들 일어나."


 그러니까 더치 선배님을 빼고 다들 일어났어요. 더치 선배님은 눈만 뜨고 가만히 듣고 계셨죠. 원래 전체 계획은 복잡하지만, 우리들이 할 부분은 의외로 간단하다면서 작전을 설명했어요.


 "이 교란 장치를 속옷이건 겉옷이건 어디든 좋으니 숨겨. 그리고 이 교란장치를 가져가서 배터리 만드는 기계에 붙여. 그러면 우리가 할 건 끝이야."


 너무나도 간단했어요. 그러니까 너나할것 없이 전부 질문을 던졌죠.


 "그 다음은?"


 "그냥 그놈들이 알아서 좆되는 걸 보면 되는 거야."


 "그 교란장치는 어디 있는데?"


 "팬텀 씨, 보여줘요."


 팬텀이라 불린 사람이 그 교란장치란 것을 하나씩 나눠줬어요. 참으로 조악했어요. 이게 어디가 교란장치인가 싶을 정도로 말이죠.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우리는 시키는 대로 해야 할 입장인데. 더치 선배님이 얘기를 듣다가 조용히 걸어오더니 그 교란장치라는 걸 구경하셨어요. 그리고는 피식 웃으셨죠.


 "왜 웃는 거에요?"


 "잘 들어. 펙스한테 엿먹일 생각으로 여기 낀 놈들 빼고는, 전부 내일 실패할 거야."


 "지금 저 사람이 뭔 말을 하는 거야?"


 "실패가 어쨌다고?"


 더치 선배의 말에 다들 웅성거렸어요. 점점 목소리가 커지니까 팬텀이 총을 꺼내서 조용하게 만들더군요. 그 와중에 누가 브라우니한테 물으니까 브라우니가 쏘아붙였죠.


 "이거 교란장치 맞아?"


 "맞아. 맞으니까,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해. 나도 위에서 시킨 대로 말하는 거라고."


 그 말을 어디서 많이 들어봤다 싶었는데... 다시 자려는데 더치 선배님이 제 손을 꼭 잡았어요. 그리고 제 하얀 머리칼을 매만져주셨죠. 갑자기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까, 웃으면서 저를 꽉 껴안으셨어요.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지만... 이렇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래도 너 같이 말 잘 듣는 애가 들어와서 행복했다."


 "안 죽을 거에요. 제가 약속할게요."


 그 다음날이 됐습니다. 이 지랄이 끝난다고 생각하니까 제 가슴이 다 떨리더군요. 기상시간인데 늦는 놈을 두들겨 패려고 보안요원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다들 깨끗하게 침구류를 정리해두고 앉아있는 걸 보고는 당황했어요. 이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걸 본 적이 없거든요. 그 날 공장으로 가는 길에는 보안요원들 중 그 누구도 몽둥이를 휘두르지 않았습니다. 왜냐고요? 다들 빠르게 움직였거든요. 앞사람이 조금이라도 늦게 걷는다 싶으면 되려 작업반원들이 더 빨리 가라고 면박을 줬습니다.


 "이 새끼들 왜 이래?"


 보안요원들이 그런 식으로 말했어요. 그 날도 똑같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다들 일하는 와중에 보안요원 눈치를 힐끔힐끔 보다가 교란장치를 붙였어요. 


 저도 보안요원 눈에 띄지 않게 기계 안에다가 교란장치를 붙였죠. 그리고는 보안 요원들의 엿 먹은 표정을 상상하면서 일하는데 갑자기 더치 선배가 갑자기 피를 토하면서 쓰러지는 겁니다. 깜짝 놀라서 더치 선배를 붙잡고 괜찮냐고 물었어요.


 "쿨럭! 쿨럭! 이런 씨발..."


 "뭐야 이 새끼? 안 일어나?"


 보안요원들이 저를 밀치고 더치 선배에게 빨리 일어나라고 명령했습니다. 제가 뭐라고 하건 신경도 안 쓰고요. 그러다가 일어나지 않으니까 전기 몽둥이로 더치 씨를 때렸어요. 더치 씨의 입 안에서 피가 울컥울컥 새어나오는 걸 보고 이성을 잃었죠. 어차피 이딴 배터리 더 이상 만질 이유도 없겠다. 뽑혀나온 뜨거운 배터리 재료를 들어서 보안요원한테 던졌어요.



 배터리를 정통으로 맞은 보안요원이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졌어요. 보안요원들이 전부 저한테 달려들었죠. 가뜩이나 싸움에 자신도 없는데 열명이 넘는 보안요원한테 두들겨맞으니까 버틸 재간이 있습니까. 그냥 꺽꺽대면서 맞는 거죠. 그러다가 진짜 죽겠다 싶을 때쯤 되니까 "이년 사형수 대기실로 옮겨!"라는 명령이 들렸어요.


"네 알겠습니다!"


 사형수 대기실이라, 말이 참 웃겼어요. 오히려 고마웠죠. 덕분에 남들 뼈빠지게 일하는 동안 저는 쉬면서 이 공장이 뒤집히는 걸 보게 생겼으니까요. 너무 아쉬웠어요! 이 개새끼들을 다 죽이고 싶었는데 구경이나 해야 하니까요. 그래도 이 녀석들 위세 부리는 것도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사형수 대기실이라는 곳에 도착했어요. 그 안에 저랑 비슷하게 두들겨맞은 사람들이 누워있었어요. 보안요원이 침을 뱉었죠.


 "넌 이제 좆됐다."


 저도 지지 않고 맞섰어요.


 "좆된 건 너야."


 그리고 보안요원이 문을 닫기도 전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어요.


 그런 폭발은 태어나서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쾅! 쾅! 눈 앞이 한번 번쩍이더니 맞은편 생산시설이 불타오르고, 한번 더 번쩍이더니 그 충격이 제가 있는 대기실까지 날아오지 뭡니까. 유리창이 깨지면서 유리조각들이 날아오는데 다행히도 보안요원이 다 맞았어요. 그 다음에도 계속 쾅! 쾅! 쾅! 폭발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보안요원은 목에 유리조각이 꽂혀서 죽어있고, 비쩍 말라서 가만히 죽을 날만 기다리는 모양새던 사형수들도 정신이 번뜩 뜨여서 무슨 일이냐고 서로한테 묻고 있었어요.


 어떻게 일어나서 보안요원의 전기몽둥이를 잡고 주변을 둘러보았어요. 총소리가 들리고 경보가 요란하게 울렸지만, 그딴 건 중요한게 아니었어요. 더치 선배님이 먼저였어요. 지금 생각해봐도 어떻게 그 몸상태로 뛰어다녔는지 모르겠어요. 더치 선배님 이름을 부르면서 뛰어다녔어요. 보안요원들이 보이긴 했지만 둘 다 서로의 일로 바빠서 신경을 쓰지 않았어요. 몇몇 보안요원들이 저한테 멈추라고 말하긴 했는데, 뭐... 그렇게 말하자마자 갑자기 목이 잘리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팬텀의 광학미채를 몰랐던 그때에는 정말로 공포스러운 일이지만, 저한테는 아무 상관도 없었습니다. 더치 선배랑 작업반원들이 어떻게 됐는지 확인해야 했어요.


 폭발한 공장으로 가까이 가니까 그 배터리 특유의 신내가 느껴졌어요.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나오는데, 세상에, 그렇게 끔찍하게 다칠 수가... 온몸이 녹아서 손톱이랑 손가락이 덜렁대고, 얼굴가죽이 눌어붙고, 뼈가 드러나고... 꺽꺽대면서 끔찍한 비명을 질러댔어요. 저 안에 함부로 들어갔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비명소리로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더 들어가면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죽겠다 싶었는데, 마침 옆에 보안요원이 총을 맞은 채로 쓰러져 있었어요. 그 보안요원한테서 방독면을 뺏어서 쓰고 들어갔어요.


 이게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그 다음에는 피부가 따가워지고, 방독면 정화통을 뚫고 유독가스가 들어오니까 참을 수 없었어요. 눈물이 났지만 그래도 계속 나아갔어요.


 상식적으로 그런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는데 그 거대한 폭발 한가운데에서 사람이 살아남았을 리가 없죠. 하지만 사람이 이성과 상식으로만 행동합니까? 나는 사람이에요. 이성에 따라서 효율 안 나오면 치워버리는 AGS도 아니고, 내 계획 잘된다면 누가 죽건 말건 상관없는 오르카호의 그 사령관이란 개새끼도 아니란 말입니다. 계속 들어갔어요. 피부가 불타는 느낌이었죠. 그렇게 들어가고 들어가서 자욱한 독가스 사이에서 찾은 건... 선배님의 사원증이었습니다. 옛날 사원증이요. 다 녹아서 일부만 간신히 보였지만... 선배님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는 알 수 있었죠.


 그제서야 선배님이 왜 저한테 작별의 인사를 했는지 알게 됐어요. 왜 엿먹이는 건 가능하겠지만 나머지는 실패할 거라고 했는지도요. 유독가스를 뚫고 바깥으로 나왔어요. 제 팔뚝이 지글지글 끓어오르고 있었어요. 지금 이 검은 반점이 그 영향입니다. 바깥으로 나가보니까 총성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어요. 항복한 보안요원들이랑, 가까스로 살아남은 작업반원들이 모여서 불타는 공장을 바라보고 있었죠. 그 앞에서 팬텀이 무어라 통신을 하고 있었습니다. 머리에 열이 확 돌아서 팬텀을 붙잡고 따졌어요.


 "너는 알고 있었지? 교란장치가 아니라 폭탄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


 "이거 놔요! 놓으라고요!"


 "놓긴 뭘 놓으라는 거야! 너 때문에 다 죽었어! 네 계획 때문에 선배님이 죽었어!"


 한참 팬텀을 잡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제압당했어요. 저는 꽁꽁 묶인 채로 댁들이 오르카호라 부르는 잠수함에 끌려갔죠. 이제는 또 노예살이인가? 나한테 뭘 원하는 건가? 생각이 많아지던 때에 오르카호에서 해방된 자들을 위한 축하 선물이라면서 아주 성대한 상을 차려주더군요. 다들 맛있게 먹었지만 저는 입에도 대지 않았어요. 해방? 축하? 선배님이 죽는 걸 두 눈으로 봤는데 해방은 니미.


 "한입이라도 드셔보세요."


 "거 됐고 나 좀 여기서 빨리 내려주쇼."


 "하지만 이 다음에는 사령관님과의 면담도 있답니다. 아직 내리시기에는 일러요."


 "사령관? 그 사령관이 이 해방이네 뭐네도 주관한 거요?"


 콘스탄챠가 웃으면서 대답했어요. 이 여편네는 머리가 순박한건지 알면서도 이러는 건지. 사령관을 만나러 갔습니다. 사령관이 웃으면서 날 보더라고요. 잘생긴 소년이었습니다. 물론 잘생기건 말건 나랑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지만요.


 "그래... 프로스트 레프리콘은 말로만 들어봤는데, 이렇게 보니까 좋네. 오르카호에 승선한 걸 환영해. 나는 사령관이야. 편하게 불러도 돼."


 "편하게 부를 마음 없습니다. 그냥 그거나 물읍시다. 내가 일하던 공장 터뜨린 거 당신이요?"


 당신이라니,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면서 옆에서 리리스가 뭐라고 그랬는데 상관하지 않았어요. 뭐 어쩔거야, 어차피 나는 그 공장에서 죽었어야 할 운명이었고, 죽여도 상관없었어요. 사령관이 리리스를 진정시키고 뭐라고 변명을 시도하더군요.


 "그게, 레모네이드 쪽에서 쓰는 배터리가 그렇게 불안정할 줄은..."


 "그렇군요. 그래서 교란장치라고 속이고 폭탄을 붙이게 한 거네요. 맞죠?"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이었기에 할 말은 다 했습니다. 사령관이 뭐라 변명하려 했지만 들어줄 이유도 없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령관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는 했습니까? 자기 좆집들한테 생채기라도 났대요? 하지만 날 봐요. 난 이렇게 팔에 흉측한 흉터가 났고, 내 동료들은 전부 눌어붙었다고요. 이렇게나 많은 걸 잃었는데 아무것도 잃지 않은 사령관한테 한마디 할 권리 정도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미안해. 프로스트 레프리콘. 나는..."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그냥 저를 여기서 보내주십시오."


 "...콘스탄챠, 들었지?"


 그래도 사령관 괜히 해먹은 게 아닌 거 같았습니다. 눈치는 빠르더군요. 나한테는 어떤 변명도 소용없다는 걸 빨리 알아줘서 고마웠죠. 콘스탄챠가 길을 안내해주겠다고 다가왔어요.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남겼죠. 그때 사령관 표정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당신의 멋진 계획 덕분에 저를 항상 챙겨주시던 더치걸 선배님은 시체조각 하나 못 남기고 죽었고, 그 안에서 노예노동을 하던 수많은 이들은 온몸이 녹아내리는 고통 속에서 죽어갔습니다. 그리고 제 팔에는 이렇게 검은 반점이 남았죠."


 사령관은 내 피부를 보더니 놀랐는지 입을 가렸어요. 입을 가리건 말건 난 할 말이 있었으니 계속했죠.


 "이 결과에 평생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마 그러시겠죠."


 그리고 콘스탄챠가 안내해주는 대로 출격 포드로 나갔고, 출격 포드에서 이것저것 받았답니다. 음식부터, 생존 키트, 무기까지 줬어요. 그 무기가 참 물건이에요. 저기 걸려있는 거 봤죠? 저 길쭉한 게 내가 받은 무기란 말입니다. 저 무기만 받고 나머지는 거절했어요. 그딴 거 받아서 뭐합니까. 무기는 쓸모있다 쳐도 나머지는 필요없었어요.


 다시 땅을 밟은 다음에는 아주 멀리, 아주 멀리로 갔습니다. 얼마나 멀리였는지도 몰라요. 그냥 멀리 갔어요. 말라비틀어진 시체를 섬기는 펙스 콘소시엄도 없고,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철충도 없고, 당신들도 없는 곳으로요. 마지막으로 펙스를 본지 1년, 마지막으로 당신들을 본 게 6달쯤 된 곳에서 멈췄습니다. 그곳에서 철충들을 어찌어찌 잡아족치고 닥치는대로 살기 시작했어요.


 힘들었냐고요? 당연히 힘들었죠! 추울 때는 엄청 춥고, 먹을 건 또 얼마나 없는지! 지금이야 사정이 나아져서 교역도 하고 그러지만, 옛날에는 풀뿌리도 먹고 나무껍질도 씹고 그랬단 말입니다. 열매를 잘못 먹어서 죽을 뻔한 적도 있었어요. 게다가 날이 풀려서 사냥이라도 나갈라치면 얼은 땅이 풀려서 진창이 된답니다. 춥다고 불만이겠지만 당신은 지금 잘 온거에요. 만약 날이 풀렸을 때 왔다면 당신은 여기는 구경도 못 해보고 돌아갔을 거에요. 정말로 힘들었어요.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후회하지는 않았답니다. 나는 자유로웠으니까요.



 나는 그 누구의 편도 아니었어요. 누가 시키는 대로 할 필요도 없었다고요.



 누가 시키는 대로 할 필요가 없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모를 거예요. 위에서 시키는 대로 유독가스를 들이마시면서 점점 죽어가는 신세가 아니었어요. 위에서 시키는 대로 자기가 폭발물을 붙이는지 깡통을 붙이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죽을 일도 없었고요.


 이전의 저는 남의 잘못된 결정 때문에 고통받았어요. 하지만 지금의 나는 내 선택에 내가 기뻐하고, 후회하고, 고통받고, 책임을 지고 있죠. 책임을 지는 방법이 죽음이더라도 상관 없습니다. 내가 죽더라도 내 선택으로 죽는 거고, 내가 살더라도 내 선택으로 사는 거니까요. 누가 무슨 선택을 하더라도 나한테 어떠한 영향도 줄 수 없어요.



뭐어... 지금까지는 그랬죠. 지금까지는."




 프로스트 레프리콘은 긴 회고를 마치고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가에서 물기가 느껴졌다. 프로스트 레프리콘은 두꺼운 옷소매로 눈을 비볐고, 팔을 내리자 붉어진 눈시울이 보였다. 우리 애를 어쩌나, 우리 애를 어쩌나... 혼잣말을 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미처 나오지 못한 눈물로 젖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 잘난 맛에 사는 건 슬슬 그만둘 때가 된 거 같아요."


 프로스트 레프리콘은 찬장에서 꺼낸 서류를 꺼내서 하나하나 정리하기 시작했다. 바깥에서 뛰어노는 아이로 추정되는 사진과, 그 아이와 함께 찍힌 프로스트 레프리콘의 얼굴이 보였다.


 "2년 전에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바깥으로 나가보니까 저 아이가 덜덜 떨고 있었어요. 부모는 어디 가고 니 혼자 여기서 이러고 있냐고 물었어요. 저를 가리키더군요. 어이가 없어서. 들어오라고 했어요.


 내가 남한테 엮이는 걸 싫어하긴 하지만, 그래도 아이가 바깥에서 얼어뒤지건 말건 나만 잘 살면 되는 미친놈은 아니라고요. 내가 레모네이드도 아니고. 그건 당신도 비슷하겠죠? 그래서 그 아이를 데려와서 밥을 먹이고 재웠어요. 몇달 지나니까 아이가 절 보고 엄마라고 하더군요. 쾌락 없는 책임이라. 그런데, 이상하게도 싫지는 않았어요.


 그 아이 덕분에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도시"라는 곳을 찾게 됐어요. 아이는 살려야 할 거 아닙니까. 아이 골격을 검사하고 장애여부부터 현재 질병까지 전부 다 검사받았죠. 의사가 아주 건강하다면서 잘 됐다고 웃는 겁니다.


 "역시 애는 험한 곳에서 길러야 튼튼해지는 모양입니다. 선생님, 애가 아주 몸 상태가 좋아요. 시력도 정상, 지능도 정상, 심박도 정상, 하여간 전부 멀쩡합니다. 그런데... 골격을 교체할 때가 다가오는군요."


 가격이 얼마냐고 물었더니, 공짜로 해준답니다. 대신 이 아이가 의료시스템에 등록이 되어야 하고, 등록을 하려면 일단 주민등록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때 참 고민이 많이 됐습니다. 내가 누구 피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주민등록이라고?


 그래서 일단은 생각해보겠다고 말하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마음이 복잡했어요. 이런 삶도 이제는 끝이구나, 눈물이 났죠. 아이가 왜 우냐고 울지 말라고 같이 우는데 그 참. 많이 그랬어요.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 수 없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누가 다가오면 총을 쏘면서 레모네이드고 오르카호고 가까이 오면 싹 다 죽이겠다고 엄포를 놓았어요. 하지만 몇 년 뒤에는 강만 안 건너면 그런가보다 했고, 좀 더 지나서는 바깥 세상 인생을 청산하고 새 삶 살겠다고 들어오는 사람들은 여기서 살게 도와줬어요. 그 사람들 덕분에 바깥 문물도 구경하고 로빈슨 크루소 신세 벗어난거죠. 저 다리도 그래서 놓을 수 있던 거에요.


 그리고 아들, 사랑하는 내 아들이 살아가려면 주민등록이라는 걸 해야 한대요. 어떤 권력에도, 어떤 명령에도 엮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겠다는 제 마음도 이제 접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다른 놈들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졌지만, 그렇다고 내가 제멋대로 행동해서 이 아이의 삶을 망칠 권리를 가지는 건 아니잖아요.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나처럼 개고생하지도 말고, 권력에 알러지 반응을 보이지도 말고. 평범한 남들처럼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그래요. 잘 들었다면 고마워요. 하하, 겨우 애 주민등록 하나 시키는거 가지고 이렇게 힘들어하니까 참 우습죠?"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도 당신을 비웃을 수 없을 거에요."


 "탈론페더 씨, 트럭 다 고쳤는데... 어이구, 프로스트 씨! 여기 있었네!'


 "뭐야, 트럭 해먹었다는 놈이 너였냐?"


 이야기가 끝날 때쯤 트럭 운전사가 트럭을 다 고쳤다면서 나를 찾아왔다. 운전사와 프로스트 레프리콘은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이인지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이제 이 따뜻한 집에서 떠날 때가 되었다. 프로스트 레프리콘의 호의에 감사하며 일어나려 할 때, 그녀가 나를 붙잡고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서류봉투에는 크라스노야르스크 행정관 귀하, 라고 쓰여져 있었다.


 "이런 부탁 내가 어지간해서는 잘 안 하지만... 혹시 도시에 들릴 일이 있다면 이것 좀 관청에 제출해줄 수 없겠습니까? 이 아이를 봐서라도 좀 부탁합니다."


 뼈가 시린 혹한 속에서 따뜻한 차와 빵으로 환대받았고, 귀중한 이야기까지 들었으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반드시 전해주리라고 약속했고, 프로스트 레프리콘은 몇번이나 감사를 표했다. 오두막을 나서자 프로스트 레프리콘은 아이를 불렀다. 아이의 손을 꼭 붙잡은 프로스트 레프리콘은 트럭을 타고 떠나려는 나를 배웅했다.


 "긴 이야기였는데 끝까지 들어줘서 고마워요. 그 서류는 꼭 부탁해요."


 트럭이 우렁찬 소리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며 점점 멀어졌다. 레프리콘은 머리카락 색깔조차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었다.


 프로스트 레프리콘은 악몽에서나 보았을 법한 혹한과 마주할 것이다. 겨울이 되면 그녀의 머리칼이 드리운 듯 흰 눈이 가슴 높이까지 쌓여 온 땅을 제 색깔로 칠한다. 여름에는 그녀가 겪었던 고통처럼 지긋지긋한 수렁이 찾아오는 땅이다. 지금은 그녀만 바라보는 아이도 학교에 갈 것이고, 도시의 삶에 익숙해지면 장성해서 도시로 떠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곳에서 자유인으로서 계속 살아갈 것이다.



 이 땅은 자유를 약속했기에. 이 땅이 약속한 자유는 석유왕의 전 재산으로도, 사령관의 절대권력으로도 바꿀 수 없기에.



 이 땅에서 그녀는 진정으로 편안할 것이다.



 흰 눈이 내렸다. 마치 그녀의 흰 머리칼에 쌓인 것처럼, 마음이 편안했다. 




 따지기 시작하면 자유만큼 우리에게 일상적이지만 또한 애매한 개념도 없음.  누군가에게는 자유로부터의 자유가 자유일 수 있고, 조영남 말마따나 레이디오 티비도 없고 걸려오는 전화 하나 없는 자연인의 삶이 자유일 수도 있겠지. 누군가에게는 그 누구에도 엮이지 않는 자유일 수도 있고, 둘 다 자유를 극단적으로 해석한 사례임. 일전에 썼던 고블린이 무너지는 사례는 자유로부터의 자유를 찾다가 무너진 사례고, 이건 누구에게도, 특히 양 세력의 장기말로 쓰이다가 크게 데인 사람이 누구에게도 엮이지 않는 자유를 찾아간 사례를 생각하며 썼음.

 

 광장을 참조하기도 했고 이것저것 많은 사례를 참조했지만, 결국 파멸하는 엔딩 대신에, 주변을 적으로 규정하는 대신 서서히 받아들이고, 애매하지만 화해하는 엔딩으로 갔음. 이것까지 파멸해버리면 아무리 소설이라도 너무 가학적일 것 같아서.



 잘 읽어줬으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