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전쟁은, 9지역 스토리는 나랑 상관없는 곳에서 척척 진행돼가고 있었다. 밖에서 펑펑 울려퍼지는 대포소리가 실내까지 닿아 전쟁이 현재진행형이란 것만 추측할 수 있을 뿐, 할 수 있는게 없으니 남 일처럼 느껴진다. 감옥안에 딱 하나있는 창문은 위치가 안좋아서 뭐가 어떻게 되가고 있는건지 볼 수도 없다. 보이는 거라곤 이 배의 뒤에있는 다른 함선들의 앞면밖에 없다.


뜬금없이 위이잉 하는 장난감 자동차 바퀴소리 같은게 들리길래 뭔가했더니 창살 밖에 하얀 원반이 지나가고 있었다. 뭐야, 로봇청소기였나. ...아닌가? 어디서 많이 본 도색인데.


나보다 먼저 저것의 정체를 눈치챈 건 그렘린이었다.


"타, 탑돌아!"


"삐비빕!"


철컥철컥, 몸통 옆면이 열리면서 나온 3개의 다리가 몸을 일으켜세우고 윗면에선 기관포가 튀어나왔다. 탑돌이의 총구가 천장을 향해 돌아가더니 냅다 감시카메라를 쏴서 부숴버렸다. 그러자 잠시 후 포세이돈측 경비용 펍헤드 한 대가 달려왔다.


"총성이 들렸다. 무슨 상황인지 보고하-"


'투타타타타탕!'


탑돌이는 대답 대신 총구를 돌려 펍헤드를 순식간에 벌집으로 만들어버렸다 


"탑돌아! 여긴 어떻게 온 거니? 우릴 구하러 온 거야!?"


"쀼삡. 삡. 삐리빕."


"뭐? 정말? 다행이다..."


그렘린의 반응을 보아하니 맞다고 하는 거 같은데... 내가 해석해달라고 말 걸려던 차에 이번엔 천장에서 소리가 들렸다.


'퉁, 퉁, 퉁!'


"이보게! 여기일세! 환풍구! 누가 이 덮개 좀 열어주지 않겠나?"


낯익은 목소리, 그리고 낯익은 패턴. 클로버가 덮개를 뜯어내자 환풍구에서 주먹보다 조금 큰 크기의 구체 드론이 나와 내 얼굴 앞으로 슈웅 날아왔다.


"드론!"


"반갑네 대장! 구하러 왔다네!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쁘군. 어디... 10명인가. 한 명도 빠짐없이 다 있구만."


"아니 빠짐없이 다 있다니, 지금 뭔 소리를... 설마?"


"잡히지 않은 이들도 무사하다네. 여기있는 나와 탑돌이를 제외한 9명은 가까운 육지에서 자네들을 기다리고 있지."


"아니 잠깐만, 대체 어떻게 감마의 부하들을 피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야? 아저씨는 환풍구를 통해 다녔다 쳐도, 탑돌이는?"


트리아이나가 침상에서 일어서면서 묻자 드론의 렌즈가 그녀에게로 돌아갔다.


"어디부터 설명해야 하나... 감마한테 배가 두쪽난 그 날, 하늘로 피해서 살아남은 우리는 좌우좌가 쏘아보낸 모스신호를 받고 상황을 파악했었네. 가까운 육지로 가서 한시름 놓고, 자네가 말해준 대로 자네들이 배에서 떠날 때를 기다렸는데..."


"잠깐, 우리가 배에서 떠난다니 뭔 소리야. 분명 감마가 배에서 떠날 때가 기회라고 했잖아."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인... 아, 맞아. 뒷문장은 주어를 보지 못했었지, 그러고보니."


...그래서였냐...


"계속하자면, 자네들이 나올 기미가 안보이길래 우리가 먼저 움직이기로 했네. 나와 탑돌이가...

감마 휘하의 드론 부대가 물에 빠진 자네들을 붙잡았던 거 기억나는가? 당시 네오딤이 긁어모은 고철 잔해중에 그 드론도 몇 대 끼여있더군. 포츈이 그걸 해체해서 인식칩을 꺼낸 뒤 나와 탑돌이에게 이식했네. 그 덕분에, 포세이돈 AGS의 센서 상에 우린 아군으로 보이게 됐다는 거지! 감마같은 바이오로이드의 눈은 못속이지만."


"그렇게 해서 들키지 않고 들어올 수 있었다는 거군요? 인식칩으로 AGS를 속일 생각을 하다니, 역시 포츈 언니! 그럼 우리 탑돌이가 로봇청소기처럼 바퀴 단 것도?"


"맞네. 포츈이 힘 좀 써줬지. 아무튼 그렇게해서, 좀 전에 이 배가 시애틀에 정박했을 때 숨어들은 거라네. 궁금증이 다 해결됐다면 서둘러 움직이도록 하세. 자네들 장비가 보관돼있는 무기고 위치도 봐놨다네."


"그건 또 언제 찾았어?"


"내가 오르카호에도 숨어들어가본 스파이 드론이었다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환풍구 안에 방범설비라도 설치해놓지 않는 이상 내 세상이지.

포세이돈은 오르카랑 싸우느라 우리에겐 신경쓰지 못할걸세. 마침 감마도 배를 떠났고, 여기 AGS도 대부분 다 갑판으로 나가서 선내는 텅텅 비었으니 장비를 되찾은 뒤엔 탈출정에 타서 달아나도록 하세."


"...아니, 탈출정이나 구명보트 정도로는 안돼. 우리 수도 많기도 하고, 그런 작은 배로는 저 군함으로 가득찬 바다를 빠져나가기 힘들거야. 훔친다면 더 큰 배를 훔쳐야지. 경비 AGS도 바쁜거라면 지금이 기회야. 드론, 문을 열어줘."


"아, 맡겨주게나! 간만에 내가 활약할 때로군!"


쇠창살로 된 문으로 날아간 드론이 몸 안에 수납돼있던 레이저커터를 꺼내 문의 잠금장치를 녹이기 시작했다.


***


압도적인 병력의 차이. 호라이즌 입장에선 바닷물보다 갑판이 더 많이 보일 정도였다. 포세이돈은 봐줘가면서 싸우고 있었는데도 호라이즌은 간신히 적의 맹공을 막아내고 있었다. 이를 보다못한 무적의 용은 방어선을 뒤로 물린 뒤 홀로 섬에 남아 감마에게 결투를 신청했고, 이 순간만을 기다려온 감마는 이것이 시간벌이임을 알면서도 도전을 받아들였다.


전 함대 대기. 감마가 용과의 일기토를 위해 배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내린 명령이었다.


어나이얼레이터 함교 최상층의 조종실에 있는 카리나는 묵묵히 감마와 용이 싸우고있는 섬을 응시하고 있었다. 감마가 주먹을 휘두를때마다 지형이 바뀌는 섬을 보면서도 호라이즌이 움직이지 않을까 수시로 살펴봤지만 저쪽도 충실히 자리를 지키며 싸움을 관망하고 있었다.


카리나는 외적을 경계하느라 배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건지는 전혀 신경쓰지 못했다. 선내를 비추는 감시카메라 중 하나가 꺼진 것도 모르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거친 불소리에 카리나가 놀라 뒤돌아보자 굳게 닫혀있는 문이 고열로 빨갛게 달아오른채 도려내지고 있었다. 문에 난 구멍너머로 푸른 불꽃이 보였다. 바깥에서 누군가가 고열절단기 따위를 사용해 억지로 들어오려고 하고있었다.


아니나다를까, 잠금장치가 녹아내린 문이 부숴지듯이 열리면서 한손에 수중용 절단기를 작동시킨 노란 잠수정 로봇이 쳐들어오고, 뒤이어 수많은 바이오로이드들이 몰려들어왔다. 거기다 인간 한 명까지.


"카리나! 배를 넘겨라!"


침입자들이 일제히 무기를 겨눈 순간 카리나가 미간을 좁히더니 곧장 커틀라스를 뽑아들고 그들을 노려봤다. 대장의 일행 중 반은 화기류가 아닌 냉병기를 쥐고있었음에도 그녀는 방심하지 않았다. 카리나와 같이 조종실에 있던 포세이돈 측 AGS인 램파트, 에큐토스도 침입자를 감지하자마자 무기를 들었으나 바로 덤비진 않고 지휘권자의 공격신호를 기다렸다.


"감마 님이 자리를 비운 틈에 탈옥이라, 나 뿐이라면 이길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나?"


"두번 말하게 하지마라! 어나이얼레이터는 우리가 점령한다. 지금이라도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해!"


기본적으로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의 명령에 거스를 수 없다. 카리나는 천천히 칼 끝을 내렸다. 그러나 그건 항복의사가 아니었다. 카리나는 이미 오래전에 포세이돈의 회장을 명령권자로 등록했었기에 타인의 명령권은 통하지 않았다.


"거절하지."


카리나가 재빠르게 달려들자 포세이돈측 AGS도 공격을 개시했다. 


*


카리나가 나를 향해 내지른 칼은 '카앙!' 소완이 내리친 중식도에 부딪혀 궤도가 틀어졌다. 다른 애들이 AGS들을 상대하는 동안 소완은 한 손에는 사시미를, 다른 한 손에는 중식도를 잡고선 카리나를 상대했다. 소완의 날카로운 맹공이 몰아치는데도 카리나는 칼 한자루만으로 막아냈다. 칼날끼리 부딪힐때마다 쨍한 금속음이 울리며 불티가 튀었다.


소완도 어디가서 약하다는 소릴 들을 정도는 아닐텐데, 감마의 부관이라면 그 자체적인 전투력도 상당하다는 건가. 카리나가 조금씩 우세해지는 것 같자 나는 황급히 증원을 붙였다.


"베로니카!"


호명된 것 만으로 내 의중을 알아챈 베로니카가 접었던 낫을 펼쳐들고 뛰어들어 소완에게 가세했다. 눈을 부릅 뜬 카리나가 확 숙이자 그녀의 목을 노렸던 낫은 애꿏은 선장석만 가로로 두동강냈다. 베로니카가 한 손으로 낫을 허공에서 한바퀴 돌린 뒤 두 손으로 고쳐잡고 카리나를 향해 아래에서 위로 올려그었다. 카리나는 그 낫을 흘려내 반격할 기회를 잡았으나, 그랬다간 지금 옆에서 날아오고 있는 중식도가 그녀의 허리에 박힐 것이 분명했기에 그녀는 공격 대신 방어를 선택했다. 


2대1로 싸우게 되자 아까보단 상황이 호전됐으나 여전히 승기를 잡을 수가 없었다. 램파트의 총격을 막고 에큐토스의 진압봉을 피해 주변의 AGS를 처리했음에도 셋의 싸움에 끼어들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러던 도중 그렘린이 달려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대장님! 이대로는 안돼요, 카리나한테 명령권을 쓰세요!"


"뭐? 어떻게? 아까 명령 안통하는거 봤잖아!"


"바이오로이드는 모든 인간한테 봉사하도록 설계됐습니다. 레모네이드 정도 되지 않는다면 명령권자가 아닌 인간의 명령이라도 어느정도는 먹혀요!"


"구체적으로 그 범위가 어떻게 되는데?"


"정식 명령권자에게 해가 가지 않고, 명령권자한테 받은 명령에 상충되지만 않는다면 통할거에요! ...아마!"


카리나가 기존에 받은 명령이라면... 아마 감마처럼 회장이 깨어날 때까지 포세이돈 병력을 온전시켜라, 이런거겠지. 그렇다면 '항복해라'라거나 '배를 넘겨라'라는 명령은 당연히 안통할수밖에.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건...


'카가가각-!' 소완과 카리나의 칼이 맞부딪힌 상태에서 카리나가 팔을 돌리자 소완의 왼손이 사시미를 놓쳐 빈손이 되었다. 이윽고 카리나가 공격하려 팔을 치켜든 게 보이자 나는 급히 생각해낸 명령어를 외쳤다.


"기다려!!"


그 순간 카리나의 몸이 우뚝 급정지했다. 무슨 일인 일어난 건지 알아챈 카리나가 날 매섭게 노려보기를 잠시, 바로 그 직후에 베로니카가 카리나의 뒷무릎을 차서 무릎 꿇리고 소완이 중식도 손잡이로 머리를 내려쳐서 넘어뜨렸다. 베로니카는 카리나의 등에 한쪽 발을 올려 무게를 실었다. 카리나가 일어나려고 힘쓰자 베로니카는 카리나의 목 아래에 낫을 밀어넣어 날과 목의 위치가 반전된 단두대같은 형상을 만들어냈다. 소완이 땅에 떨어진 커틀라스를 발로 차서 멀리 밀어냈다.


"움직이지 마시지요. 목 날아가기 싫다면 말입니다."


소완의 비웃음 섞인 경고에 카리나는 이를 으득 갈았다. 이그니스의 복수다 이년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구원자님? 이 자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원하십니까?"


"...네가 말하는 자비가 살려두자는 거야 아님 죽여서 주님 곁으로 보내자는 거야?"


"..."


베로니카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살려둬.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그렇다고 낫을 거두진 않았다. 카리나는 제 목이 낫에 닿지 않게 하기위해 계속 팔에 힘을 주고 있어야만 했다.


뭐 아무튼간에. 어나이얼레이터를 손에 넣었다! 이제 육지로 돌아가서 애들 싣고 튀어야지. 나는 제압된 카리나를 뒤로하고 조종석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금새 새로운 난관에 부딪혔다. 배를 몰 줄 아는 포츈이 이 자리에 없다.


"...누구 배 몰 줄 아는 사람?"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나는 눈동자를 굴려 할 수 있을법한 애들을 몰색했다.


"좌우좌? 너 전에 배 몬 적 있지?"


"낚시배였지 그건. 이런 대형 전함은 완전히 다른 물건이라고."


우좌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렘린? 너는?"


"공순이라고 무슨 기계든 다 다룰 수 있는 건 아니라구요... 해체해본다면 어떻게 움직이는건지 알아낼 수 있겠지만...?"


"포츈한테 전화해서 이리로 날아오라고 해볼까?"


"이 함대의 대공망을 뚫고서? 무리지 그건!"


그 때 스피커가 치직거리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선내에 울려퍼졌다.


[전 함대 전속 항진! 목표는 공항이다!]


용과 싸우고있을 감마의 목소리였다. 공항이라면 오르카의 육군과 공군이 난민들을 옮기고 있을 장소였다. 그리고 우리 애들도 아마 거기 있을테지. 나는 9지 스토리를 기억해냈다, 용과의 싸움이 만족스럽지 않았던 감마는 용이 진심을 발휘하하게 만들기 위해 공항을 포격하겠다고 협박했었다.


용은 감마를 '악인은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감마가 평소 보여준 모습은 아스널처럼 호방한 여장부 타입이었긴 하다. 평소에는 그렇다. 허나 이래뵈도 칠죄종 중 분노를 담당하는 레모네이드, 화나면 눈에 뵈는 것이 없어진다. 투쟁이라는 목적을 위해선 팀킬은 물론, 민간인 학살도 마다하지 않는다. 용 미친년아, 이게 악인이 아니라고?


아무것도 안건드렸는데도 배가 주변의 배들과 맞춰서 해협을 따라 북상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3개의 주포탑까지 저절로 공항을 향해 돌아갔다. 이런 방식으로 공항에 가고싶지는 않았는데.


"배가 제멋대로 움직이다니... 무슨 술수를 부린 것이옵니까? 전부 이실직고하시지요."


"어나이얼레이터의 함선 제어 시스템이다. 손대지 않아도 감마 님이 명령만 내린다면 스스로 움직일 수 있지."


"배는 브레이크가 어느거야? 뭔가, 긴급정지 버튼같은 거 없어!? 이 덮개 씌워진 빨간 버튼인가?"


"손대지 마라! 자폭 버튼이다!"


내가 빨간 버튼를 가리는 투명한 덮개를 올리자 처음으로 당황한 카리나가 소리질렀다.


"자폭 버튼은 왜 달아놓은건데!?"


"핵융합로를 탑재했으면 당연히 이렇게도 쓸 수 있으니까."


그래, 원작에서 호라이즌의 활약으로 어나이얼레이터 주포가 무력화되자 감마는 최후의 수단으로 이 배를 공항에 꼴아박아 자폭시키려고 했었지. 안에 탄 카리나나 트리톤같은 지 부하들은 ㅈ도 신경안쓰고.


"그럼 저 대포 끄는 방법이나 말해봐! 멋대로 충전되기 시작했는데!"


"어차피 용을 도발하기 위한 위협사격일테니 걱정 안해도 된다."


"널 어떻게 믿고! ...발사까지 얼마나 남았지?"


"..."


"말해. 명령이다."


"...어나이얼레이터, 1번 주포 충전 상황."


[1번 주포탑 충전도: 86%] 


카리나의 음성을 인식한 함선 제어 시스템이 답을 들려주었다. 얼마 안남았군.


배가 점점 가속이 붙어 빨라지더니 '쿠구웅!' 느닷없이 충격을 받아 흔들렸다. 느껴본 적 있는 감각이다. 배가 함포에 맞았다. 호라이즌이 움직이기 시작한건가, 어나이얼레이터를 막기 위해. 


창 밖을 내려다보니 포탑과 갑판 곳곳에서 불이 붙어 까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배나 주포가 완전히 망가졌다는 뜻은 아니다, 아직도 멀쩡히 움직이고 있다. 드론 여러대가 화재를 진압하려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거기서 시선을 조금만 아래로 내리니, 갑판에 서서 함교를 멀뚱히 올려다보고있는 트리톤과 눈이 마주쳤다.


"......"


ㅅㅂ맞다 저놈도 있었지. 조종실 점령한 건 아무것도 아니었네, 어쩐지 내가 하는 일 주제에 잘 풀리더라. 설마 자기네 배 함교에다가 미사일을 쳐박진 않겠지? 로봇이라 표정이 없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건진 모르겠는데, 일단 당장 공격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진 않는다.


또 한번 배가 흔들리더니, 이번엔 호라이즌 부대원들이 직접 배에 승선해서 포세이돈 AGS들을 공격했다. 그제서야 트리톤도 내게서 눈을 떼고 호라이즌과 교전을 개시했다. 벌써 9지역 막바지까지 왔구나.


"그럼 이제부터 저 오르카의 병사들이랑 협력해야 하는건가? 포세이돈을 무찌르기 위해서?"


클로버가 창밖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현재로선 우리가 쟤들이란 손 잡을 수 있는 위치는 못되지. 우린 우리끼리 알아서 하는 수 밖에. 카리나, 남은 시간은?"


"...1번 주포 충전 상황."


[1번 주포탑 충전도: 92%]


호라이즌은 아직 주포를 파괴하지 못했고, 주포는 여전히 공항을 겨눈 채였다. 다른 군함에서 발사될 함포도 문제지만 어나이얼레이터의 주포 만큼은 막아야 한다. 그렇지만 호라이즌만으론 시간 안에 발사를 막을 수 없다. 여기 네오딤이 있었다면 주포 방향을 억지로 트는 것도 가능했을텐데.


"제가 해보겠습니다!"


"...이그니스?"


이그니스가 조종간으로 성큼 걸어와서 이것저것 누르며 조작하더니 조타륜을 덥석 잡았다.


[자동 항해 모드 종료. 수동 모드로 전환.] 


조타륜을 돌리자 그에 맞춰 배가 나아가는 방향도 바뀌었다. 그런데 너무 급하게 돌린 모양인지 배 전체가 기울어져 금방이라도 전복될 것처럼 아슬아슬해졌다.


"으앗, 잠깐...!"


"뭐든 붙잡고 계세요!"


이번엔 황급히 반대방향으로 돌리자 배의 기울기가 원상태로 돌아오나 싶더니 반대쪽으로 너무 기울어졌다.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서있는 바닥도 계속 이리저리 기울어져 제대로 균형을 잡을수가 없었다.


"이그니스! 대체 운전을 어디서 배운거야?"


"독학했습니다!"


"...전에 선박 조종 메뉴얼 읽은 그거!?"


함포가 발사되는 요란한 굉음이 울렸다. 배와 함께 함포가 겨눈 끝도 틀어진 탓에 포탄은 공항이 아닌 애먼 바다에 빠져 물기둥을 터뜨렸다. 한편 갑판도 좌우로 출렁거리면서 난리난 건 마찬가지였는데,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호라이즌 부대원들은 비교적 영향이 적었지만(네리 제외) 포세이돈측 AGS는 균형을 못잡고 넘어져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나마 트리톤은 원래부터 무게가 있는데다 지지대까지 꺼내서 세운 덕에 어떻게든 버티는 모양이었다.


포격이 빗나간 사실에 안심하던 찰나, 2번 주포탑에서 포격이 발사됐다. 두번째 포격은 공항 건물을 살짝 비껴나가 그 뒤의 산을 터뜨렸다.


어나이얼레이터의 주포탑은 총 3개다. 즉, 마지막 포격이 남아있다. 아직 마음 놓을 때가 아니다. 나는 이그니스한테 한번 더 방향을 돌리라고 말하려다가 멀지않은 곳에 있는 섬에서 바위언덕 하나가 대포에 맞지도 않았는데 지 혼자 쿠르릉 무너져내리는 게 보였다. 감마와 용이 저기서 싸우고있다.


나는 배를 뒤집히지 않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이그니스를 불렀다.


"이그니스! 저 섬으로 방향을 돌려!"


***


"하아... 하아..."


"네 부하들이 제법 열심히 활약하고 있는 모양이군. 어나이얼레이터가 단 한방도 맞추고있질 못하다니 말이야! 그래도 계속 쏘다보면 뭐라도 맞지 않겠어?"


숨을 고르는 용을 앞에 두고서 감마는 태연히 말을 이어나갔다. 


"자, 그건 그거고! 우린 우리끼리 끝을 봐야지! 다시 자세 잡고!"


감마가 돌진하기 위해 팔을 뒤로 당기고 상체를 굽히자 용은 검을 고쳐쥐려다 멈칫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감마의 뒤로, 어나이얼레이터의 선미가 지금 그녀가 발을 딛고 서있는 섬을 향하고있는 모습이 눈에 비춰졌기 때문이었다.


"...!! 피하시오!"


"음?"


용의 돌발행동에 위화감을 느낀 감마가 뒤돌아본 그 순간, 어니이얼레이터의 3번 주포탑이 불을 뿜었다. 용과 감마가 양쪽으로 갈라져 포탄을 피하자, 이윽고 작은 섬 하나가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


하하 꼬시다. 이 참에 둘 다 죽어줬으면 좋겠는데, 워낙 명줄 질긴 애들이니 살아남았을 지도 모르겠다. 대포도 다 뺐으니 이제 공항으로 가도 되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배가 뭔가에 부딪혀 크게 흔들려 넘어질 뻔 했다. 함포에 맞은 게 아니다. 어나이얼레이터가 다른 포세이돈 군함과 추돌한 것이었다. 다른 군함들은 나란히 일직선으로 가는데 어나이얼레이터만 혼자 90도 회전했으니 그야 부딪힐 수 밖에 없었긴 했지... 


부딪힐 때의 충격으로 갑판에 있던 트리톤이 쿠당탕 넘어져 바다에 첨벙 빠졌다. 이런 식의 퇴장은 예상 못했는데. 정신을 차린 호라이즌이 함교 1층에 있는 함선 통제 장치를 파괴하자 배가 완전히 침묵했다. 이그니스가 레버를 밀고당기거나 방향키를 이리저리 돌려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호라이즌이 허둥지둥 철수하고 나자 배엔 우리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누구 바이올린 가진 사람있으면, 지금이 타이타닉 브금 연주할 타이밍이야."


"삐↗↗↗ 삐→ 삐↘↘↘↘"


탑돌이가 전자음으로 타이타닉의 그 노래를 연주해줬다. 나이스 어시스트.


"지금은 조크할 타이밍이 아니에요, 미스터! 배가 가라앉지는 않았지만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다고요."


"그럼, 어... 다른 배 훔쳐서 달아나야겠네."


"헌데 보아하니 다른 전함들도 지들끼리 엉켜서 못움직이는 거 같군."


"움직일 수 있는게 하나는 남아있겠지 설마..."


공항 쪽에서도 마지막 비행기 뜨는 게 보인다. 슬슬 오르카도 철수하려는 모양이다. 애들 챙겨 함교에서 나가려던 순가 갑판에 뭔가가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이번엔 또 뭐지 하고 창 밖을 내다본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감마가 어나이얼레이터에 올라탔다. 감마는 그대로 쿵쾅거리며 함교로 달려와 1층 정문을 박살내고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 우리가 있는 조종실이 최상층이니까 감마가 올라올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콰앙!' 쓸모없는 생각이었군. 문을 틀어막은 쏘우피쉬를 쳐서 옆으로 치운 감마가 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대장, 내 뒤로 물러서!"


"잘도 저질러줬군...! 선상반란은 이제 끝이다!"


"...아직은 아니지."


내가 손가락 하나를 탐스러운 빨간 스위치 위에 올려두자 감마가 움찔하더니 걸음을 멈췄다. 비록 함선 통제 장치는 호라이즌의 손에 망가졌지만 아직 수동으로 기폭시킬 수단이 남아있다. 내 손가락 바로 밑에. 


"대장, 그건...!"


"미안 얘들아... 최악의 경우 나랑 같이 죽어줘."


"...물론이지!"


클로버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반면, 감마는 내 얼굴을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정말로 내가 죽음 따위를 두려워할 거라고 생각하나?"


"글쎄. 그보다 용과의 결투는 어땠지? 만족스러웠나?"


"어디사는 누구씨가 방해하는 바람에 흐지부지 됐버렸지."


"그럼 삶에 미련이 있겠군. 죽는건 안 무서워도 용과 두번 다시 싸우지 못하게 될 거란건 아쉬울텐데, 안그래?"


감마의 눈썹이 꿈틀했다.


"어쭈... 그러는 네놈은 네 목숨을 걸 배짱은 있나?"


"우리만 좆되기랑 니년이랑 같이 좆되기 중에서 고를 수 있다면 닥후지."


"말은 잘하는군. 먹여주고 재워줬더니 뻔뻔하게 뒤통수나 치는 놈 주제에."


"그러는 너는 말 좀 똑바로 하시지. 용에 대한 정보가 사실이라고 확인했는데도 말 바꾸고 풀어주지 않은 년이!"


"내가 분명히 나중에 풀어주겠다고 했을텐데?"


"난 거기에 동의한 적 없거든!?"


"...그래, 일리가 있군. 그렇다면 이제 어쩔거지? 내가 널 죽이지 않겠다고 한다면 말이야."


"...협상을 하지."


감마를 대등한 입지로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는 방법, 그것은... 핵폭탄 스위치를 손에 쥐는 것이다! 

...시바 일단 지껄여봤는데 그래서 진짜로 이제 어쩌지.


***


시간을 조금 거슬러올라가...


오렌지에이드와 유미는 마지막 난민이 지나간 것을 확인한 뒤 공항으로 이동했다. 이 숲을 지나기만 하면 공항이 보인다. 그 둘은 숲을 빠져나가기 전, 출구 근처에 진을 차고 앉아있는 10명 남짓한 바이오로이드들을 보았다. 저쪽에서도 오렌지에이드를 보다니 자기들끼리 눈빛을 교환했다.


"어, 여러분? 여기서 뭐하고 계세요? 지금은 쉬실 때가 아니에요! 저기 공항 보이시죠? 저기로 가면 돼요!"


"저흰 가지 않습니다."


그들 중 레아가 한 말이었다. 눈이 동그랗게 떠진 오렌지에이드가 놀라 되물었다.


"네!? 무슨 말이에요, 그게? 걱정할 필요 없어요, 이미 아머드 메이든 분들이 안전을 확보했어요! 수송기에도 자린 충분해요. 그리고, 인간님 나오는 영상 그건 조작된 게 아니라 정말이에요!"


"응, 믿어. 인간이 있다는 것 쯤은. 그렇가도 해도 우린 안갈거야."


"펙스를 따르지 않는 것과 그 '최후의' 인간 밑으로 들어가는 건 별개의 일이지."


레아뿐만 아니라 더치걸과 엘븐까지 이제와서 거절 의사를 밝히자 오렌지에이드와 유미는 진땀을 흘렸다. 둘 다 이런 상황은 전혀 상정하지 못했었다. 불안함에 동공이 요동치는 유미가 물었다. 


"왜... 왜 그러는거죠? 드디어 오메가한테서 벗어날 수 있잖아요."


"있지, 그 인간한테 가는 것만이 꼭 정답인 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포츈,


"난 안 가. 안 갈거야."


네오딤.


"우리가 갈 데는 따로 있어."


알비스. 모두 같은 의견이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안경 쓴 비서 유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후드 쓴 유미가 작게 미소지으며 회답했다.


"정말로 괜찮아요. 유미 씨, 저희가 오메가 밑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셔서 정말 고맙게 생각해요. 하지만 여기서부턴 저희가 알아서 빠져나갈테니 걱정해주지 않으셔도 돼요."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잖아. 적이 더 오기 전에 어서 이륙하라고 해."


니키가 쐐기를 박자 오렌지에이드와 유미는 잠시 고민하다가 마지못해 그들 사이를 지나쳐 숲을 빠져나갔다. 니키는 그 둘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 즈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최후의' 인간이라고? 흥. 두 번째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거군."


"드론씨에게선 아무런 연락도 없어요. 아마... 배에 통신수단이 없는 거겠죠. 분명 그럴거에요."


"주인님이 배 안에 갇혀있는 건 확실하고, 저쪽도 평생 배에 놔두진 않겠죠. 그럼 저흰 계속 기다리면 되는 일입니다. 주인님이 배를 떠나는 그 순간을..."



의문의 1승을 거둔 세이렌

소설 쓰면서 느낀건데 왠지 '그 때'라는 표현을 너무 자주 쓰는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