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모음집




65



니 지금 뭐라했니..?



안드바리의 차가운 목소리가 고막을 꿰뚨었다.



"...바리야. 내가 다 설명할게. 그러니 우선 그 진압봉좀 내려놓으면 안될까?"



표정은 최대한 평온을 유지하려고 애썼으나, 벌벌 떨리는 하반신의 진동은 도저히 감출 수 없는법.

안드바리가 잠시 휴식의 시간을 만끽하기 위해 컵떡볶이를 조리하러 간 틈을 이용해, 기세등등하게 부식창고의 부식들을 긴빠이치러 잠입한 6인조는 전원 예외없이 엎드려 뻗친채로 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라붕씨..? 입은 변명을 늘어놓고 있지만 손은 정직하게 오징어 다리쪽으로 향하고 있네요?



"바리야. 내 말을 들어보렴. 여기에는 피치못할 사정이..."


하아...?



"......."



싸늘한 한숨을 밖으로 내쉬며, 안드바리는 끼고 있던 선글라스를 조용히 벗었다.


라붕씨, 그 쥐고있는 오징어 다리 수 만큼 다리가 쪼개지기 싫으시다면 조용히 하셨으면 좋겠어요.



"넵."



현명한 라붕이는 곧바로 자진하여 아가리를 여물었다.


이거이거... 설마 다른 사람도 아닌 라붕이가 대놓고 도둑질을 하러 올 줄이야.


게다가 팬텀이랑 레이스까지 포섭하고 왔다니... 아주 그냥 작정들 하셨구만?


우와아아... 게다가 이거 광학미채 은신장비 아냐? 이런것까지 챙겨왔다고?



그렇다. 매우 기나긴 세월동안 항행해온 오르카 호다. 그 긴 시간동안 수도 없이 털려온 창고의 파수꾼 안드바리에게 있어서, 다음 긴빠이 타이밍을 미리 예측하고 함정을 깔아놓는 것은 참치캔 재고수량 파악하는 것 이상으로 쉬운 일인 것이다. 물론, 이 4인조가 함께 딸려올줄은 안드바리도 시티가드도 전혀 예상 못했지만.


알비스는 와들와들 몸을 떨며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 어떻게... 우리가 올거라는걸...


...어떻게 알았을까?


히이익...!!!



모두가 안드바리로 인해 벌벌 떨고 있을때쯤, 옆에서 리앤이 서서히 다가와 라붕이에게 속삭였다.


우리 라붕이... 미쳤니..?



리앤의 자비로운 미소에서 새어나오는 살벌한 질문에 순간 지릴뻔했지만 인고의 정신력으로 견뎌내었다.



"...리앤. 이건 그러니까 장화가..."


.......



"......."



자비롭다면서... 자비 어디갔는데.


장화가, 뭘 어쨌다고?



"....아무것도 아냐."



여기서 남 핑계댔다가는 얼마 안남은 자비마저 사라질게 분명하기에 그냥 조용히 있기로 했다.


LRL...


으헥..!


...알비스 언니.


어핳!!


...팬텀 언니랑, 레이스 언니..?


호에에엑..!


.......하사님..??


으힉...?!



죄인들의 이름을 하나씩 호명할때마다 파도가 술렁이기 시작한다.


.........



"....?!"


...........


"라붕" 씨?



"ㄷㄷㄷㄷㄷㄷㄷ"



그리고 다른 이들의 이름 이상으로 또박또박 라붕이를 지목한 안드바리는 당사자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ㅂ, 바리야..?"


네. 저 여기있는데요?



"으, 응... 그냥 불러봤어..."



조용히 있자.


그나저나, 왜 이리 오징어에 집착을 하는거야? 이게 그렇게 맛있어?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표정으로 묻는 소니아에게, 그 동안 있었던 자초지종을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아... 그게..."































푸훕..! 푸하하핫!!! 뭐야~ 그런 이유때문에 창고를 털려고 한거야?!



소니아는 배를 잡고 폭소하며 눈물을 닦고 있었다.


역시... 그 "찌그러진 장화콘" 이라는걸 그린 범인은 라붕이 너였구나?



"...티 많이 났어..?"


음... 티가 났다기 보다는 그냥 느낌이랄까.

뭔가 딱 보자마자 "아, 이거 라붕이가 그렸네" 라는 생각이 들더라구!


야, 이참에 그냥 우리가 잔뜩 사줄게. 오징어다리 말고도 과자도 더 챙겨줄테니까.

그 정도면 장화한테도 안맞고 넘어갈수 있지 않겠어?



"그...래? 그럼 조금만... 헤헤..."


그런 일이 있었으면 차라리 대놓고 한 박스 달라고 하지 그랬어요. 제가 무슨 구두쇠도 아니고...


에, 너 구두쇠 아니었어?


나도 그런줄 알았는데.


둘은 조용히 좀 있지?


넵.


암튼 두 사람은! 예전에 경고한대로 오늘 내내 창고에서 재고정리 시킬거니까 그렇게 알아둬요!


으으으... 네...


에휴... 그래도 사정은 둘째치고, 아무리 장화가 무서워도 그렇지, 물건을 훔치는 행동은 하면 안돼 라붕아...



"그치만... 오늘 내로 안사오면 줘패버리겠다고 협박하는걸..."


그래도 도둑질은 안돼지! 차라리 안드바리가 말한대로 조금만 챙겨달라고 부탁을 하든가!


그 말이 맞다 라붕씨. 아무리 사정이 딱해도 도둑질은 나쁜거다.


뭐 그래도,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는 법이니까. 오늘을 계기로 반성하면 된다.


너희도 할말 없거든요?!


으으윽...



"죄송합니다..."


뭐, 아무튼 이번엔 딱한 사정이 있기도 하고, 처음이니까 이번 한번은 용서 해드릴게요.

아 그리고, 나중에 저한테 부식 따로 받아가세요. 알겠죠?



"흐흑... 고마워 바리야... 다음에 꼭 일 도와줄게..!"


두 분도 마찬가지에요. 봐주는건 이번 한번 뿐이에요! 알겠죠?!


으으으... 죄송합니다...



각자에게 따끔한 경고를 마친 안드바리는 이제 마지막 남은 한 명의 간부에게 시선을 돌렸다.


흐으음...


히끆...!


...........


이프리트 하사님은, 진급하신지 얼마 안된걸로 아는데...


........


............


이거, 레드후드 연대장님께 보고 해버릴까나~?


히이이이익!!!!



들어본적 없는 비명을 지르던 이프리트는 벌떡 일어나 자신의 바로 옆에서 엎드려 뻗치고 있는 라붕이를 가리키며 절박하게 소리쳤다.


이 놈..! 전부 이 미친 놈이 시켰어요...!!



"ㅁ, 뭐가 어째?!"


그럼 뭐 내가 틀린말 했냐?! 잘 자고 있는사람 억지로 깨워서 끌고간게 누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전우를 이렇게 쉽게 팔아넘기ㄷ....?!"


전우는 옘병이다 죽일놈아!! 기껏 꿀자리 찾아가지고 농땡이 피우고 있었는데, 너 때문에 다 망쳤잖아!!


어... 이프리트 하사님...


.......


진짜로!! 난 폐품창고에서 꿀잠자고 있었는데 이 정신나간 새끼가 날 강제로 끌고왔다니까?!



"아, 아니 그것보다.... 뒤에...."


내가 브라우니도 아니고, 미쳤다고 창고를 털겠어?! 다 이 새끼가 원인이라고!!!


호오오..? 그러니까, 폐품창고에서 몰래 꿀잠자다가 창고털러 갔다고?


그래!!! 여기 엎드려뻗친 애들이 죄다 증인이ㄹ...



으으음~ 증인들도 있단말이지..? 그래그래, 그럼 이야기가 더 빠르겠지~ 암~


......???



임펫은 입은 웃고 있었으나 서늘한 시선은 이프리트에게 고정한 채 안드바리에게 양해를 구하기 시작했다.


보급관님? 이 새ㄲ... 이프리트 하사의 처벌은 나한테 맡겨주지 않을래? 재발걱정 같은건 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에? 아... 네 뭐... 전 상관없긴 한데...


후후훗, 고마워 보급관님~ 그럼 얘는 내가 좀 데려갈게?


아, 라붕씨도 잘 지내는것 같아서 안심이네. 다음에 또 우리 부대 놀러 오기로 한 약속, 잊지말고?



"ㄴ,네..? 아... 넵 원사님..."


...........


넌 이리 따라와 이 새끼야. 나랑 면담좀 하자.


히이이익...!! 자, 잠깐만요..!! 이건 내 잘못이 아니라..!


폐품창고에 짱박혀서 몰래 낮잠잔게 니 잘못이 아니라고?


........


아아~ 걱정하지마~ 연대장님이나 마리 대장님한테 보고하진 않을게. 대신... 

너, 나랑 일 하나 하자?



그렇게 말하며 임펫은 이프리트의 목덜미를 손에 쥐고서 본인들의 진지공사 구역으로 질질 끌고가기 시작했다.


김라부우우웅!!!!! 너 이 새끼..!!! 다음에 만나면 기필코 죽인다아아아!!!!!!



원한을 한가득 담아서 라붕이를 향해 외치는 이프리트를 애써 외면하며, 당분간은 스틸라인 숙소 쪽은 접근하지 않는게 좋겠다고 속으로 마음먹었다.



".....RIP."


























"...근데 이제 뭐하지."


어찌저찌하여 장화에게 간식을 다 갚고 나오면서(물론 이 과정에서 또 쓸때없는 헛소리하다가 쳐맞을 뻔한건 덤이다.) 멍하니 중얼거렸다.


"음?"


멍하니 이어진 복도를 걷다보니, 아직은 한번도 와 본적이 없는 곳에 도착했다.


"......."


문에 걸린 명패를 멍하니 쳐다보며 여기를 들어갈지 말지 수차례 고민하기 시작했다.


"...적응하고 난 뒤에도, 여기 만큼은 가급적 피해다녔는데."


그랬었는데, 어쩌다보니 와버렸다.


"음... 어쩌지..."


역시 다시 되돌아 가는게 나을까. 아무리 여기에 적응중인 몸이라고 해도, 내가 이곳에 들어가는건 좀...


"...아니, 꼭 그런것도 아닌가."


항상 그렇게 지 멋대로 단정짓고서 도망만 다녔던 결과가 그 모양 이었으니까.


"........."


...기왕 이렇게 된거, 한번 문만 살짝이라도...























어우우... 머리에 혹 난것좀 봐. 뒤로 넘어진거야?



"...?!"



갑자기 뒤통수를 문지르는 손길이 느껴져 힐끗 뒤를 돌아보니, 주황빛 머리칼을 가진 어린 소녀가 자신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아, 놀랐어? 미안. 놀래킬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어... 그..."



예상치 못했던 사람을 갑작스럽게 마주하여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을때, 먼저 입을 연것은 더치걸이었다.


여기로 들어가려는거지? 그런데 왜 계속 서있기만 해? 안 들어가고.



"아, 아니 그게... 딱히 들어가려고 했다기보단 그냥 궁금해서..."



더치걸이 들고 있는것을 자세히 보니, 온갖 유리병들이 담긴 나무상자를 옮기고 있던걸로 보아하니 아마 분리수거를 하던 도중이었을까.



"어어... 청소 중이었구나?"


아, 응. 여긴 한번에 몰아서 정리하는 습관이 들어서.


넌 어때? 몸은 좀 괜찮아?



"ㅇ, 응. 걱정해줘서 고마워 땃쥐야. 하하하..." 


...그래. 다행이네.



웃으며 대답하는 라붕이를 보며 나름대로 안심한 더치걸은 궁금했던 것을 묻기 시작했다.


라붕이 넌 여기 어쩐일이야? 혹시 여기서 만나기로 한 사람이라도 있어?



"그냥 뭐...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대충 시간 때우는거지. 땃쥐 넌 평소에도 여기서 지내는거야?"


오늘처럼 여기서 지낼때도 있고 어떤 날은 사령관이랑 같이 있거나, 아니면 다른 자매들의 일을 돕거나... 날마다 달라.



"...응. 그렇구나."


어... 근데, 왜 하필이면 땃쥐야? 그거에 다른 의미라도 있어?



"음? 아아... 그거야 당연히,"



별거 아니라는 듯 이 아이에게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니 이름이 더치걸 이잖아?"


그...렇지? 그런데 그게 왜?



"응. 그러니까 땃쥐."


...에?



"아, 아니 그게... 더치 걸 이라는 이름은 뭔가... 난 개인적으로 거북한 느낌이 들어서."


......



"그렇다면 차라리, 바리나 좌우좌처럼 귀여운 애칭이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해서... 아, 참고로 좌우좌는 LRL을 말하는건데, 그게 무슨 뜻이냐면..."


......



"아아아..! 물론 너가 불편하다면 당연히 할 생각 없으니까 너무 부담갖진 말고! 난 그냥..."


상관없어.



어찌보면 성의없는 대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더치걸은 웃으며 화답해 주었다.


너가 날 생각해서 붙여준 애칭이잖아? 그러니까 난 딱히 거부감 같은거 안 느끼니까 미안해 할 필요는 없어. 그냥 너 편한대로 해줘.



"으, 응..."




.......





잠시 어색한 적막함이 복도를 감돌기 시작할 무렵, 그런 어색한 침묵속에서, 조심스럽게 입을 뗀 라붕이는 쭈뼛거리며 물었다.



"그... 땃쥐야."


응?



"넌, 괜찮은거야?"


응? 갑자기 뭐가?



"......."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이에게 솔직하게 물었다.



"내가 무섭진 않아?"


.......



"그... 내가 자세히 아는건 아니지만, 너는 특히나 인간과 관련된 좋은 기억은 그 사람을 제외하고는 없었을텐데. 정말... 내가 옆에 있어도 힘들거나 무섭진 않아?"


...아아...



다소 한 발짝 늦게 말의 의미를 이해한 더치걸은 그제서야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를 깨달았다.


역시, 너는 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구나. 내가 어떤 바이오로이드 였는지.

...우리 더치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응."


상관없어.



불편한 심정을 내비치기는 커녕, 오히려 무심한 듯 무덤덤하게 대답해 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딱히 너가 무서웠던 적은 한번도 없어.



"그...래?"


응. 애초에 난 너가 여기 오르카 호에 온 첫날부터... 널 처음 보자마자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가 않았거든.


그 증거로, 지금도 이렇게 날 진심으로 신경써주고 있잖아. 그런 널 내가 거북하게 여길리가 없잖아?


"......."



그저 무덤덤하게 자신이 느낀 바를 말하는 이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며 그녀에게 넌지시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는지 물어봐도 될까?"


이유? 으으음... 딱히 복잡한 의미를 두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


딱히 자랑하는건 아니지만, 난 여러 사람들을 마주하며 오랜 시간을 살아왔거든. 그래서인지, 처음 사람을 만나서 대면하면 무의식적으로 깨달아. 이 사람은... 이러이러한 사람이구나, 라고.



"......."


내가 널 처음봤을때 느낀 첫 감상은, 음... 그래.



더치걸은 처음 그를 봤을 때 느꼈던 감상을 아무런 가감없이 솔직히 털어놓기 시작했다.


거리에 나가자마자 바로 접할 수 있는, 그런 흔하디 흔한 사람.

정의롭거나 강인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나쁘거나 무서운 사람도 아닌...

응. 그냥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어.



"......."


그래서 난 널 딱히 불편하다거나, 무섭다는둥,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은 없어.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까, 다른 오해는 하지 말아줘. 알았지?



"...응. 그래."


뭐... 그 밖에 또 골라보자면, 쪼오끔 겁이 많다보니 요란법석이 너무 심한게 다소 개성이라면 개성이려나... 헤헤.



"하...하하... 그랬던 시절도 있긴 했지."


그랬던 시절이라니, 너 그거 불과 며칠전 이야기거든요?



"흐흐흐... 하긴, 뭐라 반박할 말도 없네."


.......



아까와는 다르게 비교적 편안한 모습으로 웃으며 대답하는 라붕이를 바라보던 더치걸은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를 건넸다. 


너무 부담갖지마.



"......."


다른 자매들이 그랬듯이, 나도 너랑 친해지고 더 가까워지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너무 내 과거를 의식하면서 긴장하지 않아도 돼. 알았지?



"........그래."



조금은 위안을 얻은 라붕이를 바라보던 더치걸은 조용히 미소지으며 라붕이의 손목을 붙잡고 문 쪽으로 잡아당겼다.


여기로 들어가려고 했던거지? 자, 어서 가자.

그 애도 기다리고 있으니까.





























라붕이 데려왔어~



문을 열고 낡은 바에 들어서자, 라붕이를 인도해 온 더치걸이 구석진 곳을 향해 소리쳤다.



...(꾸물꾸물)



카운터의 구석진 선반 아래에서, 흐물흐물한 사람의 형태가 점점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와우~! 이런 시간대에 의외의 손님이 찾아 오셨네요!



한것 취기가 감돌고 있는 표정의 키르케가 환한 미소로 반겨주었다.



"......."


쭈뼛거리며 소박한 바의 풍경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어색하게나마 인사를 건냈다.



"어... 그, 안녕하세요..."


네~ 어서와요 라붕씨! 안 그래도 여긴 언제쯤 찾아오실지 점치면서 늘 기다렸거든요~!


"......."


만약 오늘도 안오시면, 저랑 유미양이랑 오렌지 양이랑 베로니카 양이랑 다~ 같이 술들고 라붕씨 방으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랬는데 이렇게 딱~! 최고의 타이밍에 찾아와 주셨네영~~!



"아 넵."



이미 거하게 한잔한 모양인지 혀가 꼬일대로 꼬인 키르케는 아니나 다를까, 선반에서 또 술을 한병 꺼내어 뚜껑을 개봉했다.


자자~ 그렇게 서있지만 마시고 어서 여기 앉아요~ 호드 분들에게 다 들었답니다? 라붕씨도 상당한 애주가라면서요?

그렇다면! 술의 요정이 빠질수야 없져~!



마치 미리 준비해 놓은것마냥 선반 아래에서 두 개의 술잔을 꺼낸 키르케는 매우 능숙하게 양주 뚜껑을 열어재끼며 외쳤다.


후훗... 키르케도 신난 모양이네.

그럼, 난 화단으로 가서 야채 재배하는거 도와야해서 먼저 가볼게. 둘이 재밌게 놀아?



적당한 타이밍에 눈치것 퇴장하며 둘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준 더치걸은 분리수거를 위한 유리병 상자를 들고 조용히 문 밖으로 나갔다.


후훗... 참 좋은 아이죠?



"...네. 정말 상냥한 아이네요."



설마, 저 아이가 나를 그렇게 생각해줄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나중에 과자라도 포장해서....


그럼, 저 아이가 모처럼 마련해준 이 자리를 기념하여...



말끝을 살짝 흐리기 시작한 키르케는 중요한 날을 위해 아끼고 아껴놓은 비장의 양주를 개봉함과 동시에 하이텐션으로 외쳤다.


자~! 적셔~!



"저, 적셔..!"



어정쩡한 자세로 키르케가 따라주는 양주를 받아들고선 키르케가 먹는모습 그대로 양주를 들이켰다.


푸하~!! 역시 이 맛에 산다니까요~ 라븅씨도 그러케 생각하져~~?



"어....넵."



이 사람... 괜찮을까.


자자~ 그렇게 어정쩡하게 서있지만 말구 어서 앞에 의자 빼서 앉아여~



"....그럼."



키르케가 말 한대로 그녀의 바로 앞에 비치된 의자를 빼내어 다소곳하게 자리에 앉았다.


흐흐흐... 이래뵈도 저, 라붕씨 엄청 만나고 싶었다구요~! 서운하게 왜 이제야 와여~! 기다리다가 쥭는줄 아랐네~!!



"아...하하하... 죄송합니다. 이런저런 일이 있던 터라."



사실은 길을 지나가면서 여러번 이 곳을 거쳤음에도 애써 외면한게 제일 크지만.


뭐, 상관없어여! 지금이라도 이렇게 찾아와 주셨으니까여~



비어버린 두 잔에 또 한번 양주를 가득 채운 키르케는 취한 모습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능숙한 솜씨로 미리 손질한 둥근 얼음을 넣고 적절한 비율로 양주를 리필해주었다.



"아, 감사합니다 키르케씨."


어머머? 라붕씨는 이미 절 알고 계시네영?

어찌 또 아셨데여~! 혹시 다른 분한테 들은거??



"......."



뭐... 굳이 따지자면 얘 말고도 모르는 사람이 없긴 하지.


...몸은, 좀 어떠세요? 거동에 지장은 없으신가요?



키르케 특유의 요란법석인 분위기는 그대로였지만, 건강 상태를 묻는 순간 만큼은 진지한 표정으로 안부를 물었다.



"흐흐흐.... 그렇게 심각하진 않으니까 걱정 안하셔도 되요. 애초에 심각했으면 이런 양주도 못먹었겠죠. 그쵸?"


.......



여유롭게 키르케가 따라준 양주잔을 살짝 흔들어 보이며 나름 여유롭게 응수하며 한모금을 들이켰다.



"오... 이런 좋은 술이 잠수함에 있네."


후후훗...! 역시 라붕씨라면 그 술의 진가를 알아주실 줄 알았다니깐요~.



"....설마, 여기서 직접 만든거에요?"


딩동댕~! 정답!!



"어... 혹시나 해서 묻는데, 재료는 뭘 쓴거에요?"


에? 재료요? 그야 당연히.......



"......."


.................



에이~! 감 떨어지게 뭘 그런걸 일일이 신경써여~ 그냥 맛있게 들이키면 장땡이지!



"아, 아니 그래도... 이거 가라로 만든거같은데..."


자자~ 여기 안주로 건빵도 좀 들어여~

그거 알아여? 양주에는 건빵이 은근 찰떡궁합 이라는거!



술의 재료와 제조법에 대해서는 은근슬쩍 넘기는게 내심 불안했지만, 뭐 나름 맛은 좋았기에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로 했다.



"평소에도 여기에 계시는 건가요? 함 내에서는 돌아 다니시는걸 본 적이 없는것 같아서요."


아뇨. 늘 이 곳에만 있는건 아니에요. 라붕씨도 아시다시피, 전 비전투원이다 보니, 전장에 출격하는 일은 사실상 없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전 함 내에서의 업무나 일을 돕거나, 가끔씩은 주방에 취사지원 나갈때도 있답니다!



얼음 덕에 딱 마시기 좋은 시원함을 머금은 양주를 한모금 들이켜서 목을 축인 키르케는 금새 히히덕 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 물론, 조리중에 술에 슬쩍 손을 대는걸 빈번히 들키는 바람에 주방 블랙리스트 최상단에 당당히 찍혀버렸지만요~! 헤헤헤!



"아하..."


엥? 그닥 안놀라네여?! 반응이 너무 수수한데??



"뭐 그야... 왠지 키르케 씨라면 충분히 있을법한 이야기라 그닥 놀랍진 않달까..."


어머어머?! 저라면 충분히 있을법 하다뇨! 그건...


이야아아~! 진작에 제 캐릭터 다 유출 된거에여~?! 딱 웃기려고 애껴놓은건데, 그럼 굳이 숨길 필요 없겠네영~!



"키키킥... 그러네요. 사실 첫 만남때 이미 다 드러내서 큰 의미는 없겠지만."



어느새 부터인지 처음 들어올 때 품었던 긴장이나 걱정은 온데간데 없이 자연스럽게 수다를 떨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을때, 신기한 기분이라고 생각했다.



"허어어... 뒤에 도대체 병을 몇병이나 쌓아놓은거에요. 설마 저거 혼자서 다 들이킨 거에요?"


of course~! 나 아님 저걸 다 누가 마신다구~! 헤헤헤!



"...간 괜찮아요?"


그럼녀~!!

(벌컥벌컥)



"........."



게임에서 보여준 것 이상으로 유쾌하고 활발한 모습을 눈 앞에서 보고 있자니, 참 묘하다고 느꼈다.



'게임속은 뭐랄까.... 캐릭터 분량 문제때문에 이런 입체적인 모습을 보기가 힘드니까.'



원래 게임 속에서도 주당으로서의 면모를 어필했던 키르케를, 작은 휴대폰 액정 속에서 일러스트 한장과 수십줄 수준 밖에 되지 않는 텍스트가 아닌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실물로 마주하고 있다.


".....잘 웃는게 보기좋네."


게임 속에서 특히나 괴로운 과거와 죄책감으로 인해 힘든 모습을 많이 보였던 키르케니까.

이렇게 밝게 웃으며 지내는 모습이 신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워서 안심되었다.


에? 라븅씨 저 불렀어여??



"아뇨. 술 맛있다구요."


그렇져~?! 그럼 더 마셔여~!



키르케가 만들어준 술 덕분일까. 자신이 품고 있던 여러 근심들이 지금 이 순간 만큼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을 만큼 편안한 기분이었다.

....그 애들이랑 내 방에서 다 같이 마셨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던가.



"........."


...............



열심히 3종류 이상의 술을 믹싱하던 키르케는 잠시 분주히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서 그를 향해 물었다.


고민, 많으시죠?



".........."


어떠세요? 술기운에 몸을 맡긴 김에, 홀가분하게 털어놓는거.

아! 참고로 여긴 페더양의 카메라나 도청기도 없는 순수 100%! 프라이버시 보장 공간이랍니다~!



...고민이라... 내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것.



"키르케 씨라면, 마지막에 뭘 할거에요?"


마지막...이라는건 구체적으로 어떤 마지막을?



".....시간."


.........



"본인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남았을때, 키르케 씨라면 제일 먼저 뭘 할거같아요?"


...뭘... 할까. 인가요.



키르케는 얼음을 깎아내던 아이스 픽을 닦던 손을 잠시 멈추고서 어지러이 늘어져 있는 술병들을 가지런히 정리하며 생각에 잠겼다.


흠.... 글쎄요. 너무 많아서 뭐부터 먼저 해야할지 감이 잡히질 않네요.



"........"


좋아하는게 많다보니, 하고싶은 것도 많거든요. 그래서 쉽사리 결정을 내리기가 힘들다고 해야할까요?



"구체적으로... 어떤건데요?"


에? 그야 내가 하고싶은건.....




새로운 폭탄주 레시피를 경우의 수에 맞춰서 싹다 조합해서 들이켜야져~! 감 떨어지게 그런걸 왜 물어바~! 헤헤헤..!



".........."



역시 술을 너무 많이 먹은건....


뭐, 방금건 반은 농담이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때 제일 먼저 뭘 해야 후회가 남지 않을까. 그런 의미인거죠?



"....네...뭐."


반은 진심이었구나.


고민할 이유도 없죠. 지금 본인의 마음이 가는 방향 그대로, 직진하면 바로 답이 나올테니까.



"........"


라붕씨는 그런 고민을 하던 와중에도, 여기로 들어오셨죠. 그 이유가 따로 있으신가요?



"...아뇨. 그냥, 오고 싶었으니까."


그쵸? 방금 그 질문도 똑같아요. 그냥 깊게 생각같은거 하지말고, 하고싶은 것, 가고 싶은 곳, 혹은....

만나고 싶은 사람.



"............"


못다한 이야기, 해주고 싶었지만 해주지 못했던 말들, 혹은 주고 싶었지만 아직까지도 주지 못했던 것...

전달하면 되요. 후회가 남지 않도록, 전부.



"....그러네요. 해주고 싶은 말들은 넘쳐나는데, 이제는 전해줄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고민이네요. 하하하..."


.......



본심을 말하자면, 헤어지는 순간이 오더라도 평소처럼 웃으면서 끝내고 싶었다.


사실, 예전부터 내가 살 확률이 희박하다는건 직감은 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늘 밝고 기운 넘치던 닥터가, 본인은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것 같지만... 요즘 들어 나를 볼때마다 부쩍 표정이 어두워지는게 눈에 보였으니까.

나는 어려운 기술적 문제같은건 잘 모르지만, 아마 신체재건 과정에 무언가 문제가 생긴거겠지.


그리고, 애초에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고있다.

아마... 남은 시간은 대략 보름 조금 안돼려나.

그래서 닥터한테는 비밀로 하고 처방받은 약의 내용을... 살짝 비틀었다.

그 덕분에 평소보다 더 크게 웃었고, 더 많이 놀리고, 요란하게 장난치면서 지냈다. 다른 애들이 걱정할 여지를 차단하기 위해서.

그냥, 너희랑은 마지막까지 자연스럽게 웃으면서 즐겁게 지내고 끝내고 싶었거든.


음... 그리고, 이제와서 분위기잡고 작별인사 같은 말들을 해봐야... 미련만 더 남겠지. 그건 더 싫기도 했고.



'...선물, 아직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 못했네.'


스카이 나이츠 애들이 준 앨범과 만화책.

브라우니가 몰래 챙겨준 부식들.

이프리트가 준 mp3.

스틸라인의 간부들이 준 선물상자.

호드 애들이 애지중지 하던 술들.

알비스와 우좌가 준 참치캔과 초코바.

엔젤이 챙겨준 예배당의 열쇠.

.....히루메가 준 간식.


그러고보니, 나중에 같이 유부초밥 먹기로 약속했는데.


"........"


약속이라 하니까, 엔젤이랑 입이 닳도록 했던 약속들도 있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는 절대 눈치보지 말고 자신과 상담할 것.... 이였지.


'...천아도 똑같은 말 해줬는데. 잘 지키고 있었던가.'


처음 나에 대해 털어 놓은 사람도 그 애였고, 내가 답답하게 행동할 때마다 등 떠밀어준 사람도 그 애 였으니까.


'사령관...이랑도 좀 더 이야기 하고 싶었는데.'


내가 여기서 제일 무서워했고, 또 그 누구보다 경계했던 사람.

제대로 된 근거 하나없이, 공식도 아닌 쓰잘때기 없는 2차 창작 불쏘시개에 너무 몰입해서, 의심하고 미워했던 사람이자 그저 순수하게 날 걱정하고 챙겨주려 했던 사람.


그리고, 이 곳에서 나를 그 누구보다도 생각해줬던 사람.



"...키르케 씨."


네.



".....사령관....님은... 그....."


네~?



".........."



뭐라 묻지...



"....평소에 주로 뭐해요?"


에? 갑자기?



"아, 아니 그... 이런 말 하기엔 좀 부끄러운데, 저... 아직 사령관님이랑 좀 많이 어색해서요..."


.......



"예전에 그, 갑판위에서 단 둘이서 얘기한 뒤로 좀..... 부끄러운 일이 있었다보니... 친해졌으면서도 동시에 얼굴 보면 부끄럽다고 해야하나... 그래서 제대로 얼굴 보고 대화하는게 좀 어색하다고 해야하나..."


어머머~! 풋풋한것 좀 봐~! 이거 완전 오렌지 양이 빌려준 러브코미디 만화책에서나 보던 그 전개잖아요~!



"아, 하하하... 아무튼 그 뭐랄까, 그럴 필요도 없는데 괜히 의식하는 버릇이라고나 할까요.

괜히 그 사람이랑 같이 있으면 떨리고, 긴장되는게... 아, 오해는 하지마세요. 저 이제는 사령관님 안 불편하니까요. 이건 그냥 그... 제가 그 사람 한정으로 낯을 좀 가려서..."


차라리 방금 저한테 했던 이야기들을 당사자한테 똑같이 털어놓는게 어때요?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에 수줍어 했을 뿐이다, 오히려 난 지금보다 더 당신과 가까워 지고싶다...


라던가?!



"그,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는건 좀 부끄러운데..."


캬아아~! 달다 달아~! 둘이 너무 달달한거 아니에영?! 이 러브코미디 주인공들! 이러다가 나까지 혈당수치 높아지면 어쩔라구 그랭~!



...그냥 나갈까.


후훗... 뭐, 방금건 반은 농담이었고.

요컨데 포인트는, 아직은 사령관님 대하는게 어색하고 부끄러워서 어쩔줄을 모르겠다... 이거군요?



"어쩔줄을 모를 정도 까지는 아니지만... 네 뭐, 대충 비슷하네요."


이야~! 감개무량! 일취월장!! 늘 마음의 문이 닫혀있다 못해 견고하게 용접되어있던 우리 라붕씨가 벌써 여기까지 성장하다니...


기념으로 한잔 더 적셔~!!



"그만 좀 적셔! 나 아직 환자라고!"


아아앙?! 이제와서 뭔 마음약한 소리에여!!

명색이 차기 부사령관이 될 사내가 이 정도로 우는 소리하면 쓰나영~!

자아! 입벌려라~! 폭탄주 드간다~~!



"자자자잠깐... 알았다구요! 직접 마실테니까 병좀 내려놔요!"



설마 키르케의 주사가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게다가 상태보니까 아직 반도 안 취한것 같은데...



'그나저나, 부사령관...이란 말이지.'



설마 여기서도 그런 소리를 들을 줄은 예상 못했는데.



"...나 같은게 부사령관은 무슨. 참치캔 재고 수량이나 안 틀리고 잘 새면 선방한거지."



(쾅!!!)


喝(갈)!!!!!!!



"에고 시벌 깜짝이야..."



아니, 얘는 왜 술먹다가 갑자기 소리를 질러...


라붕씨가 뭔데 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그렇게 폄하하는 건데요! 당장 라붕씨 자신에게 사과하세욧!!



술 잘 먹다가 갑자기 극대노하여 책상을 쾅 치며 일어선 키르케는 라붕이를 향해 거침없이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ㄴ, 나 자신한테 사과를 왜 해요..."


잘못을 했으면 사과를 해야죠!!



어... 맞는 말이긴 한데, 뭔가 핀트가 안맞는건 기분탓인가.


왜 시도도 안 해보고 그렇게 비관적인 생각만 하는건데요? 라붕씨는 아직 시작도 안했잖아요. 그런데 왜 시작도 전에 자신을 짓밟고 보는거에요? 전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아요.



"......."


그거, 곁에서 당신 곁에서 당신을 믿고 함께 해주는 모두에게 실례라는건 알고 있나요?



"...저는 사령관 님처럼 타고난 재능을 가진것도 아닐뿐더러, 다른 대원들처럼 특기가 있는것도 아니에요. 그렇다고 선량하고 정의로운 품성을 지닌것도 아니고, 뭐 하나 특별한것도..."


......


에이... 뭐야. 별거 아니잖아.



"ㅇ, 어..?"


그냥 해요.



"...?!"


그냥 하라구요. 잘 안되든, 말아먹든, 실패하든...

그냥 해요. 망설이지말고.



키르케는 별거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말하며 접시에 덜어놓은 건빵을 집어 입에 털어넣었다.


이래서 안될거고, 저래서 안될거고, 이건 또 이 부분이 걸리고, 저긴 또 저래서 문제고...

사람이 어떻게 그런거 일일이 다 따져가면서 살아요? 귀찮게시리.



.......


만에 하나라도 당신이 도전했다가 실패한다 쳐요. 그럼 그때 다시 생각해보면 될 일 아닌가요? 정 포기를 할거면 끝까지 다 해보고 안되는거 확실히 확인하고 포기하던가. 왜 그렇게 답답하게 살아요? 속터지게.



"?!!"


그리고 애초에, 라붕씨 곁에 함께 해주고 도와줄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런데 누구 맘대로 겁부터 먹고 실패를 확정짓는거에요? 우리가 당신 부사령관 만드는거 하나 못할까봐요? 그것도 아니면...


무서운가요? 모두가 당신에게 실망같은 거라도 할까봐.



"...그렇지 않을까요."


......



"저랑 그 사람이랑 공통점 이라고는, 같은 인간남성 이라는것 외엔 없어요.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배려해주고 제가 노력해도 같은 인간인 사령관 님이랑 비교될 수밖에는 없을텐데, 그럴바엔 차라리..."



..............




(콰아앙앙)



"!!!"


아오오 빡쳐!!!



마치 쌓이고 쌓인 임계점이 폭발해 버린것 마냥 화를 주체못하는 키르케는 신경질적으로 옆자리를 삿대질하며 외쳤다.


아아아~ 답답해답답해답답해답답해...!!!



'어... 키르ㅋ..."


거기!!! 옆에 선반에서 캔맥주 싹다 꺼내와요!!



"!!! 넵!!!"



상황파악이고 뭐고를 떠나서 지금 보여주는 키르케의 표정은 진짜 무서웠기에 일단 본능적으로 지시에 따랐다.


(벌컥벌컥벌컥)... 하아아아아...!!



"..........."



500ml 사이즈의 맥주 한캔을 숨도 안쉬고 한번에 비워버린 키르케는 잠시 뜨거워진 머리를 식힌뒤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저, 이번에는 솔직히 엄청 짜증났어요.



".....네?"


...라붕씨, 우리한테 마음 열어준거 아니었어요? 근데 왜 그딴 말을 해요?



"ㅇ, 아니... 갑자기 그런 말을 해도..."


우리가 라붕씨를 왜 차별해요!!



"...?!"



게임에서도 보여준 적이 없는 진심으로 화내는 키르케의 모습에 당황하면서도 그녀가 오해하지 않도록 진정시키기 위해 애쓰기 시작했다.



"...아... 난 딱히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아아앙?!



"저, 정확히는..! 그 사람이랑 같은 인간이라는 이유로 무책임하게 상석에 앉아선 안된다는 의미였어요.

키르케씨 당신도 잘 알다시피, 부사령관 이라는 직책은 총사령관과 마찬가지로 대원들 목숨을 좌지우지 하는 직책이잖아요."


.......



"그런 위중한 자리를, 그저 인간 남성 이라는 이유 하나로 차지한다는게 현실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요? 교육도 좋고 육성도 좋아요. 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라비아타 통령님이랑 용 참모총장님이 그 역할을 잘 하고 계신 시점에서 제가 덥석 끼어들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에요. 당신들 체계가 전부 꼬인다구요."


아 그래서 어쩌라구요. 난 하나도 공감 못하겠는데요? 이해도 안되구요.



"이해를 해 그럼!"


.......



"하아아...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다른 대원들이 사령관님과 나를 비교하면서 깎아내릴지도 모른다던가, 그런걸 걱정해서 한 말이 아니에요.

애초에 모두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것 정도는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방금전에 사령관님이랑 비교될 수밖에 없다느니 뭐니 한건 라붕씨 본인이거든요? 자기가 1분전에 한 말도 기억 못해요?? 벌써 취했냐??? 아앙?!



"......."



술 들어가니까 애가 점점 무서워지네...



"...정확히 말하자면, 냉정하게 능력적인 측면을 고려해서 말한것뿐이지, 비교라던가 아까 키르케 씨가 말했던 그... 차별이라던가 그런 차원의 이야기를 한게 아니었어요."


.......



"전 그냥... 생각없이 도전했다가 남들한테 피해끼치는게 싫어서 그러는것 뿐이에요. 아까 말했다시피 내가 실수하면, 피해를 입거나 최악의 경우에 다치거나 죽는건...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잖아요."


..............



"그냥, 그게 너무 무서워서 하기 싫었던거지, 절대로 키르케 씨가 말한 그런 이유는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말아주세요. 예전이야 뭐... 좀 삐걱였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모두를 좋아하니까."



................


에이~ 난 또 뭐라고!



"...?"


간단하잖아여~ 그렇게 부사령관이 하기 싫으면 차라리 부사령관2를 하면되져~!



".....하?"


차아암~ 인생 힘들게 산다 진짜~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으나 딱히 신경도 안쓰고 맥주나 들이키던 키르케는 기어코 또 한캔을 다 비우고 난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라붕씨가 본인 입으로 말했잖아요? 난 딱히 재능없으니까 내가 그런거 하면 대원들 죽을지도 모른다고.



".........."


게다가 용 참모총장 님이랑 라비아타 통령님이 이미 부사령관 역할 다 수행하고 있는데, 거기서 내가 굳이 낄게 없다. 라고도 했구요.



"....그렇게 취해놓고 용케 이해 다 했네요?"


그럼녀~! 나 안취했다니까~! 으헤헤헤....!



.......취했다고요.


뭘 그렇게 답답하게 생각해요. 누가 당신더러 전장 지휘라도 시켰나요?



"...?!


여기에 일자리가 얼마나 많은데, 꼭 그런것만 할 필요는 없잖아요?

당신 말대로, 전투에서 부하들을 이끌고 지휘하는 거라든가, 사령관님 처럼 전장을 휘어잡는 거라던가... 꼭 그것만이 답은 아니잖아요?



"........"


라붕씨가 지적한대로, 그런 지휘같은건 이미 다른 사람들이 꽉 잡고 있어요.


그럼, 굳이 당신이 그 영역에 집착할 이유도 없겠죠. 대신 행정이나 병참 같은 후방계열에서 모두를 도우면 되니까요.



"....칸이랑 다른 애들도, 그 이야기를 하긴 했었는데."


너무 부사령관 이라는 단어에 휘둘리지말고, 넓게 보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라붕씨가 한가지 제대로 착각하는게 있는데.



키르케는 양주와 맥주를 섞던 손을 잠시 쉬고서 라붕이를 빤히 쳐다보다가 한마디 툭 던졌다.


라붕씨 하나 실수한다고, 여기가 무너질 곳으로 보여요?



"......"


라붕씨가, 업무나 임무에서 실수 한번 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렇게 쉽게 다치거나 죽을것 같나요?



".........."


우리가, 당신이 저지른 실수 한두개도 커버 못할만큼 만만해 보여요? 그거, 당사자들 입장에서 들으면 겁나 어이가 없다못해 웃기기만 하거든요?!



"...?!"


아니, 애초에 왜 죄다 혼자 다 할 것처럼 말하는데? 옆에서 도와주려고 같이 있어주는 사람들은 생각 안해? 걔네가 그렇게 약하고 만만해 보였어?


사람 얕보는 것도 정도것 해야지, 안 그래요?



"........그러네. 나 하나가 좀 못한다고 해서, 니들이 어떻게 될 애들이 아니지."


............



그의 말에 바로 대답하는것 대신 최대한 낮은 도수로 배합한 술을 그의 앞에 내밀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또 그렇게 혼자서 고민하고 헛다리짚으면, 그 아가씨한테 혼쭐날걸요?

그렇게 뚜까맞고도 아직도 정신 못차렸냐면서.



"........."


그냥 닥치고 해요.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어정쩡하게 뒤로 점잖빼지만 말고, 그냥 들이박아요.

그러다가 고꾸라지면 우리가 계속 일으켜 세워줄테니까, 있는 힘것 실패하고 넘어져 버리라구요. 알겠죠?



".....하하하."



원작에선, 이런 모습을 한번도 못봤는데.



'뭐... 당연한가. 여긴 게임이 아니고 현실이니까.'



만약, 내가 여기 오르카에 와서 처음으로 만난게 너와 더치걸 이었다면... 그랬더라면 조금은 일찍 바뀔 수 있었을까.



"....흐흐흐."


음? 라붕씨, 갑자기 왜 그렇게 기분나쁘게 실실 웃어요? 설마 진짜 취한거?



"아니, 그냥 너랑 마시니까 재밌어서. 키키킥..."


허이구... 진짜로 취한거같은데, 숙취해소제 라도 꺼내드려요?



"그래. 취했으니까 하나 줘. 그래도 니가 먹을건 무조건 하나 남겨놓고."



키르케가 타준 술을 마시면서 알아챈 공통점들은, 양주같은건 최소한의 비율로만 넣고, 나머진 전부 하나같이 낮은 도수로만 섞어서인지 머리가 아프다거나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이것도 알게 모르게 배려해준 거겠지. 내가 행여나 안 쓰러지도록.



"야."


왜영?



"다음에도 여기 요면, 술 좀 신세져도 되지? 니가 주는 술이 너무 맛있어서 그러는거니까, 상관없지?"


네네~ 실컷 오세요. 혼자 오든, 둘이서 오든, 다 같이 오든,


그냥 오기만 해요. 다른건 다 필요 없으니까.



....정말, 얘한테는 못 당하겠다.



"그래. 약속할게. 시간날때마다 허구언날 쳐들어올 거니까, 내 몫은 따로 챙겨놔라~"


히히히... 그거야 그쪽 하기 나름이죠~ 아, 물론 저도 준 만큼 확실하게 받아낼거니까, 그쪽이나 잘.......



....에.




"...키르케?"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 마냥 가만히 굳어버린 키르케는 몸 만큼은 굳어 있었으나 두 눈동자 만큼은 지진이라도 난 것마냥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니, 얜 또 갑자기 왜 이래... 저기요..?"




...........아.




"음???"



.......................




































구애애애애애액!!!!



"으잉?!!"



갑자기 입에서 묘사하기 힘든 오바이트를 조지기 시작한 키르케는 사실상 바닥에 드러눕다시피 쓰러져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 야! 너 괜찮아?!"


ㅎ, 헤헤헤... 갠차나여~ 일상적 과음으로 단련된 저에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랍ㄴ


구애애애애애애애액!!!!



"그러니까...! 너무 무리해서 과음하지 말라니... 어어어 그 꼴로 나한테 오지마라..!"


ㅁ, 물... 물 좀 갖다ㅈ...

우우욱...!!



"하이고..! 그러게 적당히 좀 마시지! 안주도 없이 폭탄주만 들이키니까 이렇게 되는거아냐!"



급한대로 근처의 소쿠리같은 바구니를 급하게 땡겨와서 갖다주자마자 또 다시 마셨던걸 전부 게워내기 시작한 키르케는 홀린듯이 중얼거렸다.


으헤... 으헤헤헤...! 저, 적셔어어...!



"아 그만 좀 적시라니까!!!"


























헤헤헤... 죄송해여 라붕씨... 모처럼 오신 손님인데 청소까지 떠넘겨버려서...



키르케는 구석의 소파에 드러누워 창백해진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신경 안써도 되니까, 몸조리나 잘해. 하도 과음해서 몸도 많이 상했을텐데."



그렇게 말하며 키르케가 마실 미지근한 물과 운좋게 찾아낸 숙취해소제를 쟁반에 담아 소파에 누워있는 키르케에게 다가갔다.



"아무튼, 오늘은 이제 술 그만 마시고 물 최대한 많이 마시면서 최대한 쉬고있동작그만."



몸은 가지런히 누워있지만, 한 손은 은밀하게 양주병을 향하는것을 라붕이는 놓치지않았다.


에, 왜... 왜영..?



"...입으로는 가만히 있는척 하지만 손은 정직하게 술병으로 향하고 있구나."



재빠르게 키르케의 손목을 낚아챈 라붕이는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내놔."


...칫...



아슬아슬하게 들켜버린 키르케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순순히 술병을 넘겼다.



"하아아... 이러다가 위에 구멍나면 어쩌려고..."


그럼 메꾸면 대져~!



"그러다 진짜 죽는다고!"



입을 삐죽 내밀며 마지못해 술병을 반납하는 키르케로부터 술을 빼앗아 저 멀리 진열해놓고서 슬쩍 시계를 바라보았다.



"......."


......



그런 라붕이를 지긋이 바라보던 키르케는 무심하게 한마디 툭 던졌다.


지금 가보는게 어때요?



"응? 어딜?"


사령관실.



"...어?"


지금쯤이면 계실거에요.



"음... 하지만 지금은 한창 일하느라 바쁠텐데..."


아이 참~! 뭘 일일이 그런걸 신경써여~ 걍 뇌 비우고 개같이 쳐들어가여! 그럼 나머진 다 알아서 풀린다니까~?



호탕하게 소파위에 걸터앉은 키르케는 은은하게 미소지으며 충고를 건넸다.


눈치보지말고, 마음가는대로 팍팍 밀어붙여요~!  그게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든,


좋아하는 사람이든.



"....?!"


히히힛... "그 사람" 맞져? 요즘 라붕씨 가슴졸이게 하는 아가씨.



"...하하 참..."



진짜... 아마 얘는 평생 못 이기겠다.



"그래. 그럼 니 말대로 슬슬 가볼게. 나 가고나서도 몸조리 잘하고."


...다음에는 사령관님 이랑 같이 놀러와요. 라붕씨가 제일 좋아할만한 술 아껴놓을테니까.



"...그래. 약속할게."



바닥 청소를 마무리짓고서 숙취해소제와 미지근한 물을 최대한 많이 따라놓은 컵을 소파옆의 책상에 올려두고서 한번 더 잔소리했다.



"그럼 나 간다? 아 그리고, 너 진짜 오늘은 더 이상 술에 손대지마! 내가 나중에 와서 따로 검사할거니까!"


아이 참~! 걱정도 팔자셔~! 아무리 술을 좋아해도 이 지경 되서까지 술에 환장하진 않는다구영~! 으헤헤...



"킥킥... 하여간, 말은 잘해요."



청소 도구를 원래 있던 곳에 가지런히 정리해놓고서 슬슬 나갈 준비를 마쳤을 무렵, 나지막하게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키르케."


네에~?



"....고맙다."


..........


.....고맙긴요. 우리 사이에.



짤막하지만 진심이 담긴 감사를 건넨 그가 조용히 문 밖을 나서는걸 묵묵히 바라보던 키르케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중얼거렸다.

잘 가라는 인삿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어차피 또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굳이 그런 말이 필요할까.


...당신이 이대로 허무하게 떠나는거, 누가 허락한다고 했나요.


괜히 폼잡긴~



키르케는 씁쓸하게 미소지으며 몰래 소매에 숨겨둔 술 대신, 그가 따라준 미지근한 물을 집어 조용히 들이켰다.


아껴놓은 제일 맛있는 술은 여전히 개봉하지 않고 구석의 선반에 가지런히 넣어두었다.

둘이서 약속한대로, 건강해져서 돌아온 그와 다시 마셔야할 몫은 남겨둬야 하니까.





















차라리 키르케랑 더치걸을 제일 먼저 만났다면 진작에 빨리 이야기가 끝났을듯.




암튼 다 봤으면 개추랑 댓글좀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