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협사앙?"


감마가 어이없다는 듯 말꼬리를 늘리더니 어디 한번 해보라는 듯 턱을 까딱했다. 저번과는 반대로 카리나를 붙잡고있는 베로니카를 제외하곤 우리팀 모두가 감마를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었는데도 전혀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지금 감마의 외눈이 주목하고 있는 건 나 하나 뿐이다.


"우리를 풀어주고, 우리가 쓸 군함을 한 척 내놔!"


"군함? 남의 배에서 이 난리를 피워놓고서 또 배를 내놓으라고? 바라는 것도 많군."


"조건을 받아들여라, 감마! 어나이얼레이터와 함께 바닷속에 수장되기 싫으면!"


"이것봐라? 그게 협상이냐? 협박이지."


"니가 기존의 거래를 멋대로 파기해서 이렇게 된 거니, 그 정도는 감수하시지?"


"...흠, 어차피 여기 들어온 이상 물러설 구석도 없으니. 좋다. 내멋대로 풀어주는 걸 미룬 일은 사과하지."


전혀 미안하지 않다는 듯한 태도였다. 감마가 건틀렛을 툭툭 건드리더니 그 거대한 건틀렛이 철컹 풀리면서 팔에서 빠져나와 바닥에 쿵 떨어졌다. 오른팔이 가벼워진 감마가 어깨를 한번 돌렸다. 그리고선 대뜸 오른손을 펼쳐 나에게 내밀었다.


"조건을 수락하마."


...뭐 시발, 악수하자고? 감마의 발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기에 손을 맞잡으려면 내가 저쪽으로 가야만 했다. 지금 손을 올려두고 있는 자폭 스위치에서 손을 떼고 말이다. 이렇게 압박을 걸어올 줄이야. 근육뇌 주제에 머리를 쓰다니.

감마는 마음 변하기 전에 빨리 잡으라는 듯 손을 까딱거렸다. 감마의 성격을 고려해봤을 때 여기서 취해야 할 행동은...


"...약속은 지켜라."


나는 감마에게로 걸어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가볍게 한번 흔들었다.


"오."


감마는 흥미롭다는 듯 씩 웃어보였다. 역시 이게 정답이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협상이 잘 끝난 것 같았기에 나는 손을 놓았다.


손이 빠지지 않는다.


"?"


한번 더 어깨에 힘을 줘 당겼으나 손이 빠지질 않는다. 감마가 내 손을 붙잡은 채로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걱정마라.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다만 선약이 있어서 말이야... 널 꼭 만나보고 싶다는 친구가 있거든."


감마가 짓고있는 미소가 점점 진해졌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내 일행이 술렁거렸으나 내가 문자 그대로 잡혀있는 이상 섣불리 다가오지 못했다.


"...그 친구란 게 너한테만 친구인 거 아냐?"


감마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팔을 확 당겨 나를 자기쪽으로 끌어당기고선, 내 몸을 반바퀴 돌려 조금전까지 내 손을 잡고있던 오른손으로 내 어깨를 콱 움켜쥐었다.


"그건 지금부터 확인해보면 되는 일이지."


감마가 나와 어깨동무 한 채로 앞유리로 천천히 끌고갔다. 창 밖으로 공항 건물이 보였는데, 그 지붕 위로 검은색 헬리콥터 한 대가 착륙하는 게 보였다.

...내 고난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다.


"왜그래, 설마 겁 먹은 건 아니겠지? 아까같은 베짱을 보여주라고!"


감마가 태연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흔들었다. 저기서 기다리고 있는 게 누군지 짐작이 갔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여기서 벗어나겠다고 발버둥치면 이 년이 내 어깨뼈를 악력으로 으스러뜨릴테니까.


"...내가 다녀오는 동안 내 일행한테 손대지 마."


"대장!"


"대장님, 안됩니다!"


주변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울려퍼졌지만 이미 궁지에 몰린 상황이었다. 내 말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감마가 손을 거두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일행이 감마한테 달려들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물론, 그러도록 하지. 더이상 불필요한 반감을 살 필요는 없으니까. 하는김에 내 부관도 그만 놓아주겠나?"


베로니카는 잠시 감마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노려보다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말없이 발을 치웠다. 카리나는 일어서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옷의 먼지를 툭툭 털었다.


"부관, 내 말 잘 이해했지?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기다리고 있으라고."


"알겠습니다."


확답을 받은 감마가 이제 만족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다녀올게. 믿고 기다리고 있어줘."


"인간."


좌우좌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감마한테 안들리게 좌우좌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살려줘.'


그리고 나는 감마와 함께 함교를 나섰다.


***


감마의 뒤를 따라 공항 안을 걸었다. 서로 아무런 호위나 부관도 대동하지 않은 채 나와 레모네이드 감마 단 둘만. 물론 감마 본인의 무력이 제일 위험하니 호위같은 게 필요없지, 나 혼자만 좆된 상황이다. 여기서 도망친다던가 기습한다던가 해봤자 1초만에 제압당하고 이년이 들쳐매고 가게 될 게 뻔하다.


공항 건물은 완전히 무너지진 않았어도 전쟁의 여파로 생긴 파괴흔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안그래도 불도 몇 개 나가있는데, 배를 나설때만 해도 화창했던 날씨가 금새 흐려져서 햇빛도 안들어오게 되었다. 그렇긴 해도, 멸망 후에 버려진 폐건물인줄 알았는데 의외로 펙스의 관리하에 있었던 모양인지 을씨넌스럽긴 해도 생각보다 깨긋했다. 하긴 그러니 오메가의 병력이 여기까지 진을 치고 있었던 거겠지.


"왜그래, 너무 조용한 거 아닌가? 우리 둘밖에 없는데 데이트하는 기분이라도 들지 않나?"


"나란히 걷고있는 것도 아닌데 무슨..."


"호오, 그게 불만이었나? 손이라도 잡고 걸어줄까?"


"필요없어..."


가끔 감마가 분위기라도 풀려는 건지 아님 조롱하려는 건지 시덥잖은 농담을 던지고는 했지만 대꾸할 때마다 기운만 빠졌다.


"벌써부터 죽을상이군. 걱정마라, 저기서 살아 돌아오기만 하면 약속한 대로 배든 뭐든 내어주지! 아, 어나이얼레이터는 빼고. 원하는 배의 이름만 말해라, 배 안에 실린 짐과 승무원은 덤으로 얹혀주지."


...원하는 배를 지목하라고 해봤자 내가 아는 포세이돈 군함은 어나이얼레이터 뿐인데 뭐 어쩌라는거지. 정확한 이름을 대지 않으면 주지 않겠다는 뜻인가. 그냥 적당한 배를 추천해달라고 해야하나 하다가 문득 어느 한 이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작중 이름이 공개된 포세이돈 군함은 어나이얼레이터 외에도 하나가 더 있었다.


"...프리드웬."


앞서가던 감마가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섰다.


"그래. 프리드웬을 건네줘."


감마가 천천히 나를 뒤돌아서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표정에선 어느덧 웃음기가 사라져있었다.


"그 이름을 어떻게 알았나?"


"그건 거래랑은 상관없는 내용이지. 줄 거야, 말 거야?"


감마는 잠시동안 침묵하다가 다시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프리드웬은,"


목소리가 가라앉은 감마가 말했다.


"오래전에 파괴됐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 사이에 어떠한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다시 감마가 입을 열게 된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였다.


"여기다."


감마가 방문을 끼익 열고 먼저 가라는 듯 옆으로 비켜섰다. 내가 머뭇거리자 감마는 내 어깨를 잡고 방 안으로 밀어넣은 뒤 문을 닫았다. 


방 안은 상당히 넓었는데 들어가자마자 보인 건 방 중앙에 휑하니 배치된 탁자 하나와 의자 두 개 뿐이었다. 뭐지 여긴, VIP용 응접실이나 대기실 뭐 그런건가? 문이 있는 벽을 제외한 나머지 삼면이 전부 유리로 되어있어서 비가 주륵주륵 내리고있는 바깥 풍경이 훤히 보였는데 정작 날 기다리고 있다는 사람은 안보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두리번거리던 그 순간-


"꽤나 무례하다고 생각되지 않나요?"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고,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국에 허락없이 발을 들여놓고선 제게 얼굴도 비추지 않고 빠져나가려하다니 말이에요. 그것도 두 번 씩이나."


그 곳엔 검은 색의 긴 웨이브 머리를 한 여자가 나를 등진채로 창 밖을 보며 서있었다. 이윽고 그 여자는 몸을 돌려 나를 마주보았다. 나는 저 얼굴을 알고있다.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게임 속에서 본 적이 있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만나게 되어서 참 다행이네요. 두번째 인간님?"


레모네이드 오메가가 비릿한 미소를 그리자, 나는 긴장감이 심장을 옥죈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제대로 알 수 있었다. 8지역의 사령관 때와는 달리 이 자리에 내 편은 아무도 없다. 총에 맞은 자리가 지끈지끈 쑤셔오는 것 같았다.


"다리도 아프실텐데, 앉으시죠?"


또각또각 구둣소리를 내며 테이블로 걸어온 오메가가 한쪽 의자에 앉아 태연히 건넨 말에 나는 마지못해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녀를 마주보는 위치의 반대쪽 의자에 앉았다. 내가 앉는 걸 확인한 오메가는 커피 포트를 들어 잔에 커피를 따랐다. 자기 앞에있는 잔에 먼저 따르고, 그 다음에 내 잔에. 자기 잔에도 따른 걸 보니 독 탄 건 아닐것 같은데, 설마 내 잔에 독이나 수면제 같은걸 발라놓은 건 아니겠지. ...그보다 난 커피 써서 싫어하는데.


슬쩍 뒤돌아보니 감마는 문을 지키겠다는 듯이 팔짱끼고 문에 기대어 섰다. 나랑 오메가가 하는 대화를 지켜보겠지만 끼지는 않겠다는 의사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인간님. 제가 누군지는 설명 안해도 아실거라고 믿어요."


오메가가 커피를 홀짝였다.


"아니, 난..."


"이미 그 맹랑한 꼬맹이한테 필요한 만큼은 다 들었을테죠?"


나는 나도모르게 시치미떼려던 입을 꾹 닫았다. 좌우좌, 한때 펙스의 간첩이었던 그 아이가 같이 활동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펙스의 이름이 가진 위상을 알면서도 도둑질이라니. 참 대담하다고 해야할지, 어리석다고 해야할지..."


"..."


"그러질 말았어야지."


달그락. 오메가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내가 저지른 짓을 비난한다기엔 매우 평온한 어조였다. 감마가 나를 보는 눈빛에는 약간의 흥미가 섞여있었는데 지금 오메가의 눈에선 아무것도 안느껴졌다. 살아있는 인간을 잡았다는 기쁨이라던가, 펙스 소유의 배와 바이오로이드를 훔쳐간 도둑에 대한 분노 등 그런 감정이 전혀 안느껴졌다. 오메가는 그저 무표정으로 나를 보고있었다. 그 시선이 무서웠다. 내 유일한 무기인 세 치 혀는 이빨과 입술이라는 초라한 방패 뒤에 숨어서 감히 밖으로 나올 생각을 못했다.


"어머, 뭘 그리 긴장하고 계시는건지... 여자를 혼자 떠들게 하실 생각은 아니겠죠?"


"...그래서 날 잡으러오셨다? 벤쿠버가 난장판이 될 동안 코빼기도 안비췄으면서? 꽤나 바빴나 보지?"


"할 말을 가려서 하는 게 좋을걸요. 오늘은 안그래도 그 다른 인간 때문에 기분이 약간... 안좋거든요."


그래, 오르카호의 사령관. 니가 미국 동부에 가서 뻘짓하는 동안 꿀 다 빨고 나갔지. 언제 유턴한 건진 모르겠지만 말이야. 감마새끼가 꼰지른 건 확실한데. 감마랑 용이 있던 섬에 대포 쏜 뒤인가? 아님 그 전? 오메가가 개입하지 않은 채로 9지역 스토리 시작됐던거 보면 시애틀에서 출항한 뒤인것 같은데.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나를 왜 부른거지?"


"제가 원하는 건 딱 하나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살아있는 인간. 다시 말해, 휩노스 병의 치료제죠."


"...정말 원하는 게 그것뿐이야?"


"...무슨 의미죠?"


 내가 잡기 쉬운 사냥감이란 건 사실이지만, 오메가가 사적으로 원한을 품은 상대는 바로 사령관이다. 나는 오메가가 나를 실험쥐로 쓰겠다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선수를 쳤다.


"나를 펙스 밑에서 일하게 해줘. 그럼 네가 정말로 원하는 걸 얻게 해주지."


"흐음...?"


오메가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든 대화의 주도권을 끌고왔다. 이젠 내 운을 이 길에 걸어보는 수밖에 없다.


***


두 명이 하선한 직후, 어나이얼레이터의 안. 

드론은 자신과 똑같이 생긴 수리용 드론 한 다스가 배를 수리하는 모습을 쳐다보다가 툭 말했다.


"이런 결과를 바라고 온 게 아니었건만..."


드론이 몸을 돌리니, 태블릿을 들고 수리 작업을 지시하는 중인 카리나가 있었다. 그녀는 대장 일행이 여기서 나가지 않도록 감시하는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에이잇! 생각할수록 짜증나네! 뭐? 먹여주고 재워줘? 영창에 쳐넣어놓고선 그게 할 말이야!?"


"언룰리 빗치! 브레인레스 브루트! 그 안하무인한 태도에 만들던 드레스도 찢어버릴 정도로 열이 뻗치는군요, 정말!"


"붑, 부우웁-."


"봐요, 탑돌이도 저기압이네요."


그렘린과 오드리가 목청껏 불만과 욕설을 토해내는 동안 탑돌이는 야유하는 듯한 전자음을 냈다. 카리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그들을 째려봤다.

사실, 그녀들이 이러고 있는 이유는 카리나의 주의력을 분산시키기 위함이었다.


"대장이 살려줘, 라고 했어.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했어."


좌우좌가 가까이 있는 사람들한테만 들릴 정도로 소근소근 말했다. 가장 먼저 반응한 건 클로버였다.


"대장 혼자한테 맡기고 구해지는 건 한 번으로 족해. 우리가 나설 때야."


"으음... 캡틴 쪽은 뭐하고 있지 지금?"


"조금 전에 유미와 통신하는 데에 성공했다네. 상황을 전달하니 뭔가 도울 방법이 없냐고 하더군."


"감마한테서 대장을 되찾아오는 것도 문제고, 달아날 수단을 확보하는 것도 문제고... 어느 쪽도 현재로선 방법이 없네."


오르카가 철수한 탓에 포세이돈의 잔존 병력이 자기들을 감시하고 있으니까. 그나마 대장이 떠나기 전 손대지 말라고 말했었던 덕에 어디 갇히지도 않고 추가적인 구속 조치도 당하지 않고 서있을 수 있었다.


"...방법이 있사옵니다."


소완이 카리나를 슬쩍 흘겨보며 말했다. 주위에서 의문을 표하자 도로 자신을 쳐다보는 이들을 응시하며 턱을 아래로 살짝 당겼다. 입 다물고 지켜보라는 신호였다. 소완은 카리나 쪽으로 걸어갔다. 알비스가 카리나한테 삿대질하면서 따박따박 따지고 있었다.


"애초에 감마가 한 말대로면 곧 풀어줄 사람들인데 왜 아직까지 포로취급하면서 붙잡고 있는건데? 니들은 무슨 해적이냐?"


"펙스다."


"Geez. 더 악질이었군요."


"한가하면 입 다물고 무기나 닦아라. 목을 닦으면 더 좋고."


프로불편러들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건성으로 대꾸하던 카리나는 소완이 다가오자 본능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직접 싸워봤기에 안다. 그녀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감히 주인의 위장에 쓰레기같은 전투식량만 하루 3끼 집어넣도록 만든 년이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군요."


"어차피 무슨 말을 해도 들을 생각이 없겠지. 내가 인도적으로 대해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계속 입을 놀린다면 무력으로 그 입을 닥치게 만들어주겠다."


"당신의 잘나신 상사께서 저흴 건드리지 말라고 명령하셨으니, 신경끄시지요."


"그럴 순 없지. 니년들이 조금이라도 난동 피우려는 기색을 보였다간 즉각 제압해야 하니까. 포세이돈의 병력이 얌전히 있는 것도 내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만이다. 너무 기어오르지 않는 게 좋을걸."


아니면, 한번 해볼테냐? 카리나가 칼 손잡이를 쥐고 노려보자 소완은 다소곳이 눈을 깔았다.


"소첩은 어디까지나 칼잡이가 아닌 한낱 요리사이옵니다. 요리사로서, 소첩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지요."


"흥..."


카리나는 칼에서 손을 떼고 소완에게서 등을 돌렸다. 소완의 입꼬리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그러니-"



"잠드시옵소서."


푹. 카리나의 목에 주사바늘이 꽃혔다. 당황한 카리나는 곧장 대응하려 했으나 그러질 못했다. 주사기에 담겨있던 약물이 목을 타고 금새 전신으로 퍼졌다. 온몸이 나른해지고 정신은 몽롱해졌다. 공격명령은 커녕 정상적인 판단도 할 수 없었다. 소완이 빈 주사기를 쏙 빼내 손에 들어보이며 쿠후후 웃었다.


"너... 너어...."


"당신이 경계해야 할 것은 소첩의 칼솜씨가 아닌 요리솜씨였사옵니다."


"...이걸 요리라고 부를 수가 있나요?"


"있사옵니다. 소첩이 손수 조제한 약이니 말이옵니다."


"크레이지..."


소완은 오드리의 태클과 주변의 그건 아니지 하는 시선을 태연히 받아남기며 말을 이어갔다.


"주인을 위해 아껴두었던 비장의 약을 쓰게 만들었으니 값은 톡톡히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감히 구원자님께 저 수상쩍은 약물을 먹일 생각이었습니까?"


"방금 주사한 그것이 딱 하나뿐인 완성품이었으니 넘어가시지요. 약효가 떨어지기 전에 서둘러야만 하옵니다. 포세이돈의 AGS 군단은 지휘권자의 명령이 없다면 빈 깡통일 뿐. 소첩덕분에 어떤 배든 무혈입성할 수 있게 되었으니 감사하십시오."


"확실히 이 꼴을 보고도 주변의 로봇들은 움직이질 않는군. AI코어를 싸구려로 교체해놓으니 이런 사단이 일어나는거구만."


카리나가 제압된 것 만으로 포세이돈 AGS들은 자연스레 허수아비가 되었다. 추가적인 명령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감마와 대장이 돌아오기 전에 포로한테 손대지 마라'는 기존의 명령만을 충실히 수행하기 때문이다. 주변을 슥 둘러본 드론이 다시 스피커를 열었다.


"군함은 아직 많이 남아있네! 멀쩡히 움직일 수 있는 걸 찾아 탈취하도록 하세. 탈출수단 확보는 우리가 맡도록 하지."


"그럼 제일 중요한 대장 구출은?"


"그건 저쪽에 맡겨야하지 않겠나. 솔직히, 우리팀 중 제일 강력한 전력들은 클로버만 빼고 저쪽에 몰려있으니 말일세."


"아무리 그래도... 우리도 뭔가, 무장해야 하지 않을까요? 상대측 병력이 얼마인데, 우리도 또 싸울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램파트 총이라도 뺏어서 들고다닐까?"


"그것보다는... 파괴된 AGS의 잔해를 이용해 무기로 개조해볼 수 있겠네요. 여기있는 건 램파트, 폴른, 포트리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포대 정도는 만들 수 있을거에요."


그렘린이 턱을 짚고 고민하던 중 올리비아가 그녀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고선 함포를 가리켰다. 그냥 저걸 쓰면 되지 않냐고.


"...아뇨, 저건 못써요. 제겐 군함을 조작하는 전문적인 지식도 없고, 그렇다고 저희가 쓸 수 있도록 개조하자니 그건 너무 오래 걸릴거고요."


"저기, 그럼 함포만큼 강력한 AGS라면 어때?"


트리아이나가 끼어들자 그렘린이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엄청 쎄보이던 커다란 AGS 그거 있잖아! 바다에 빠진 걔!"


트리아이나는 크기를 표현하려는 듯 팔을 양쪽으로 쭉 뻗었다. 그녀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아챈 그렘린의 눈이 커졌다.


"그거에요...! 트리톤을 인양하죠!"


그들은 이내 크레인이 달려있는 배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약차차! 라붕이 파티에 소완을 넣은건 이 장면을 넣기 위함이었다!

삽화 그리다보니 오메가 기럭지가 너무 길어져버린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