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키오네가 불쑥 중얼거린 말에,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던 리리스와 스노우 페더가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후회?"


잠시 침묵이 흐르고,


"응. 만약 그때... 나와 내 언니들이 처음부터 델타와 싸우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해서."


나직이 말한 알키오네는 찻잔에서 뗀 입술을 혀로 핥았다. 어쩐지 목이 마르다는 듯이.


"그러면 적어도, 내 자매들이 목숨만은 보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거든."


리리스는 잠시 알키오네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델타와 싸운 걸 후회하나요?"


"...언니들이 희생당한 걸 생각하면, 가끔. 용맹함을 자칭하는 '가디언'이 할 소리는 아니지만 말이지."


찻잔을 홀짝이는 알키오네의 눈빛이 떨렸다.


리리스와 스노우 페더는 잠시 서로 마주보았다.


알키오네 자매들은 과거, 레모네이드 델타에게 쫓기던 머메이드 부대를 받아준 것 때문에 델타와 부딪혔었다. 그 결과 모두 죽거나 사라지고 알키오네 혼자 살아남고 말았다.


실은 두 사람도 알키오네의 과거를 알고 있는지라 일부러 묻지 않았지만, 알키오네가 먼저 과거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다.


겉으로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역시 자매들의 죽음은 큰 상처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었다. 침을 계속 삼키고 시선이 불안정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리리스가 알키오네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위로했다. 친자매는 아니라도 자신의 핏줄이란 생각이 들면 소중히 여기는 그녀였다.


"알키오네, 자책은 하지 마세요. 어차피 항복했어도 델타가 자매들을 곱게 놔두진 않았을 거예요. 또, 항복한다고 한들 머메이드 친구들을 버릴 수도 없는 거잖아요?"


"...뭐, 그렇지. 우리들 성격상 결국 그년과 싸우긴 했을 테니까. 어떻든 망하는 결말이었으려나."


"설령 싸우지 않았더라도, 나스호른 씨처럼 자매들이 모두 델타를 돕는 모양이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나스호른 씨야 쉽게 전향했지만... 잘못하면 주인님 보기 껄끄러워질 일이 됐을지도 모르고."


리리스와 페더, 그리고 최근 합류한 알키오네가 모시는 마지막 인간 남자는 현재 군을 이끌고 레모네이드 세력들과 대립 중인 것이다.


"그것도 그거 나름대로 곤란한 일이긴 하네."


알키오네는 쓴웃음 지었다. 리리스가 재차 위로했다.


"끝이 좋다기엔 좀 뭐하지만, 주인님께 구원받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면 어떨까요."


페더가 얼른 거들었다.


"저... 그, 실은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어요. 제 실수긴 했지만요."


"음?"


"전 예전에 요정 마을이란 곳에서 살았거든요. 알키오네가 몰타의 마을에서 살았듯이요."


알키오네가 눈을 깜빡이며 페더를 보았다.


"그때, 저는 레모네이드 오메가를 제 마을로 안내했어요... 처음엔 그저 여행하는 사람으로만 여겼거든요. 하지만, 그녀는 제 마을을 곧 꼭두각시처럼 만들어 버렸어요. 뒤늦게 흉계를 알았지만 너무 늦어서, 제가 알던 분들이...."


페더의 표정이 말하면서 점차 흐려졌다.


과거에 레모네이드 오메가는 페더를 길잡이 삼아 요정 마을을 찾아내고, 그곳을 세뇌와 신체개조 등의 실험장으로 삼았었다. 그리하여 페더가 믿고 따르던 마을 리더 이하 거의 모든 이들이 한동안 오메가의 실험체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다행히도 남자가 요정 마을에 찾아와서 오메가의 실험을 중단시킨 덕분에 페더의 친구들과 주민들 대부분은 무사히 합류할 수 있었다.


페더의 이야기를 듣고 알키오네는 다소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주인님이 말한 다른 레모네이드의 피해자가 바로 페더 언니였구나. ...확실히, 나랑 비슷한 케이스네."


리리스가 페더의 손을 어루만졌다.


"페더,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알키오네처럼 오메가는 결국 마을을 찾아냈을 테니까... 너무 자책할 건 없어. 그리고 이제 주인님 곁에 있으면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예, 알고 있어요. 그냥, 갑자기...."


비록 자신의 잘못은 아니지만 페더는 오랫동안 마음의 상처를 받았고, 지금도 다소의 죄책감을 지니고 있었다.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알키오네는 면목 없어 했다.


"어... 미안, 큰언니. 내가 쓸데없는 후회 따위를 해서 티타임을 망쳤네."


"괜찮아요. 사람인 이상 후회는 누구든지 하는 법이니까. 실은, 저도 후회 같은 걸 하거든요."


"...."


 "일테면 - 주인님을 뵙기 전에 동생들을 더 잘 지휘했다면, 희생이 적어지진 않았을까. 좀 더 빨리 주인님을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뭐 그런 거 말이죠."


말하는 리리스의 눈에 회한이 비치는 것을 알키오네도 흘끗 볼 수 있었다. 아마, 자신이 지은 표정과 같은 종류의 것이겠지.


누구든 아픔과 후회가 있는 법인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며, 알키오네도 그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만약이란 건 없지요. 중요한 건 앞으로 최선을 다하는 거잖아요? 주인님을 지키는 임무."


"으응, 그렇지. 가디언은 주인님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지켜야 하니까."


알키오네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그 얼굴은, 다소 응어리가 풀어진 듯해 보였다.


그날 밤이었다.


언제나처럼, 사정 후의 여운에 잠겨서 나른해 있던 남자가 리리스를 향해 돌아누웠다.


"그나저나, 오늘 알키오네랑 잘 놀았어? 경호팀 대장님은 어떻게 생각해."


장난스런 질문에 리리스도 웃으며 답했다.


"네, 역시 착한 아이에요. 겉보기처럼."


"말했지만, 그 애도 페더처럼 마음의 상처가 커. 나도 신경쓸 테니까 리리스도 프리가랑 같이 신경써 줘."


"물론이죠. 당연한 말씀을."


그녀는 남자의 넓은 가슴을 가늘고 깨끗한 손가락으로  간지럽혔다.


"...그런데 저기, 주인님은 후회를 한 적이 계신가요?"


"응? 뭐라고?"


리리스는 얼른 아무것도 아니라고 둘러대려다가,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마음을 바꾸었다.


"이야기하면서 알키오네와 페더가 후회를 하더라고요. 만약 예전에 자신들이 좀더 잘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그녀들 잘못이 아니야."


"네, 저도 그렇게 말해주었어요... 라고 말해도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지만요."


"어떤?"


리리스가 소리 없이 작게 웃었다.


"일테면, 리리스가 더 잘 했으면 어땠을까... 좀 더 동생들이 죽지 않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더 주인님을 안전하게 모실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거죠."


남자가 얼른 말했다.


"리리스는 잘 하고 있는걸. 예전 일은... 해줄 말이 없지만."


리리스는 눈을 감고 있다가 살짝 한숨지었다.


"그리고 또...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만약 주인님을 좀더 빨리 찾았으면 어땠을까. 좀 더 주인님께 빨리 다가갔으면 어땠을까, 라던지요."


"음, 글쎄? 잘 모르겠는걸."


"후훗... 리리스도 참, 동생들한텐 최선을 다하라고 해놓고는 막상 후회나 과거 생각이나 하네요."


남자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 난 지금의 리리스가 좋은 걸. 그러니까 너무 아쉬워 하지 않아도 돼."


"...."


"리리스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 오히려, 내가 부족한 때도 있었는 걸."


"엣, 아녜요. 주인님은 부족하지 않으세요."


"말을 하자면 그렇단 거지. 나도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하지만 결과는 별로인 경우가 종종 있더라고. 그렇다고 해서 과거로 돌아간다면 꼭 더 좋아질까? 반드시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해."


리리스가 눈을 깜박이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예를 들어, 리리스가 날 가장 먼저 발견했다고 해도, 내가 리리스를 지금처럼 좋아해줄 거란 보장은 없지 않겠니?"


"그건...."


그녀는 말문이 막혔다. 자신감 넘치는 그녀로서도, 사랑 문제에 관해서는 한없이 약해지는 것이었다.


그가 자신의 나쁜 모습을 보고 싫어하게 되지 않을까, 금방 질려버리진 않을까, 다른 누군가를 더 좋아하지 않을까.


만약 그녀가 그를 가장 먼저 발견하고 모셨다 하더라도, 지금과 달리 그에게 미움 받아 버리거나 마음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었다.


남자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리리스. 내가 좋아하는 리리스는, 지금까지 함께 살아오고 겪으면서 알게 된 리리스야."


"주인님...."


"난 지금의 내가 아니고, 또 지금의 리리스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리리스도 지금의 내가 좋은 게 아니야?" 


그녀가 얼른 대답한다.


"다, 당연하죠. 주인님은 어떤 모습이든 좋지만, 저도 지금의 주인님이 제일 좋아요."


남자가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그래, 그래. 솔직히 이런 말을 한다고 해도 나 역시 후회를 안 하는 것도 아니니까.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이랑 앞으로를 열심히 사는 거겠지. 뻔한 말이지만."


부드러운 머릿결을 매만지는, 마음만큼이나 따스한 손의 감촉을 즐기던 그녀가 문득 살며시 웃었다.


"그럼, 주인님이 지금 한가지 해주실 게 있어요."


"뭔데?"


리리스는 눈을 빛내며 속삭이듯 말했다. "안아주세요, 서방님."


그 말에 남자가 마다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기꺼이 그녀를 감싸 품에 끌어안아 주었다. 그녀 또한 모든 것을 맡기려는 듯이 그를 마주 안아 왔다.


역시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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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슥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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