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뭐라고 하셨죠?"

"으으느으... 으므 긋도 으느... 으윽!"


움찔! 하고 감마의 케스토스 히마스의 건틀릿이 크게 흔들렸다. 본래 말 그대로 주인의 오른팔이 되어 든든히 적을 분쇄했을 케스토스 히마스 : Type combat의 PPG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오히려 몸을 내리누르는 하중이 되어 주인의 신체를 압박하고 있었다. 건틀릿의 올바른 착용법을 비웃기라도 하듯 감마의 발바닥 위에 얹혀서.


"어? 떨구시는 거예요? 떨구면 5시간 추가인데?"

"느으으윽...!"


기우뚱 넘어가려는 케스토스 히마스의 부품들은, 감마가 한껏 용을 쓰자 부들거리며 다시 중심을 찾아나갔다. 오른손 검지손가락 하나만을 지지대로 삼아 거꾸로 물구나무를 서며 다리로는 케스토스 히마스의 부품들을 지탱하는, 감마의 신체능력으로도 견디기 힘든 얼차려. 게다가 지금은 근력을 보조해 줄 케스토스 히마스조차도 쓸데없는 무게추이자 짐덩이가 되어 감마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이를 악문 감마의 턱끝에서 굴러떨어지는 땀방울이 만든 웅덩이가 이 기합이 적게 잡아도 수 시간은 계속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지금까지 감마 본인의 입을 빌려 알려진, 감마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었던 존재는 지구상에서도 단 둘 뿐이었다. 그 중 하나는 여전히 배양액 속에 잠들어 있었고, 또 하나는 저 바닷속 어딘가에서 유유히 잠항하는 범고래에 몸을 싣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새로이 추가된 한 명. 그 정체는...


타앙!


움찔!


범고래였다.


바닥을 꼬리로 세게 내려치는 소리에 감마의 몸이 다시 한 번 떨렸다. 메로페의 심기가 아직도 크게 불편하다는 뜻이었다. 멸망 전의 회장님조차도 시키지 않았을 굴욕적인 체벌에 삐질삐질 육수를 뽑아내고 있는 감마 앞에서, 메로페는 단호하게 팔짱을 끼고 감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저한테 말도 않고 포세이돈 기계화 함대를 끌고 나갔다가... 벤쿠버 앞바다에서 어나이얼레이터와 트리톤과 고속정들과 초계함들과 기타 귀중한 정보자산들과 자원들을 날려먹고 온 이유를 아직도 말 못 하시겠다?"


메로페의 꼬리가 아직도. 라는 말을 강조하듯 위협적으로 휘둘렸다. 감마는 지리멸렬하게 변명을 주절댔으나...


"무, 무적의 용이 이끄는 오르카 저항군 휘하의 호라이즌 함대에게..."

"뻥을 쳐도 좀 그럴듯하게 치세요. 전력 차랑 화력 차가 얼만데. 그 쪽에서 우릴 전술적으로 무력화하는 데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사통장치를 못 써먹게 만들어서 전함을 깡통으로 만들었거나, 위험을 무릅쓰고 어나이얼레이터에 도선해서 주포만 날려버리거나 하는 정도였겠죠. 그 호라이즌 물개들 화력으로는 포세이돈의 기계화 함대들을 이렇게 깔끔하게 지워버릴 수가 없다구요! 이건 감마 님이 멍청한 수준을 넘어서 아예 그 자리에 허수아비를 세워 놨어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건데?!"


놀랍게도 메로페는 그 전장에 있지 않았어도 전황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물론, 그런 메로페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에 감마가 저러고 있었을 것이다. 설마 기뢰에 발이 묶인 선발 병력들을 자기 주포로 궤멸시켰을 것이라고는 그 메로페도 감히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럭저럭 전술적 안목을 갖춘 감마도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소모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행위였으나, 수십 년만에 재회한 적수를 앞에 두니 눈이 뒤집혀서 저지른 극단적인 광기의 발로였다. 당연히 감마는 이 짓거리를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여기 군도 쪽 구역에서 있었던 교전 기록이랑 블랙 박스는 왜 다 지워 놨어요? 뭐 저한테 못 보여줄 거 있었어요? 증거 인멸을 할 거면 아예 싸그리 하시던가, 여기만 이빨 빠진 것처럼 쏙 빠진 게 더 수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아니, 진짜 다 파괴돼서..."

"1시간 추가."

"으으으윽...!"


그야, 당시 군도 쪽에서는 머메이드 함대가 지형을 활용해 유격을 펼치며 진격을 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메로페가 머메이드 함대원들 중에서 낯익은 얼굴을 찾아내는 일은 감마에게선 백해무익한 일이었다. 감마가 무적의 용과 싸우러 가는 길이 방해된다고 꼭지가 돌아서 자기 선발대를 날려버리는 미친 짓만 하지 않았어도 그럭저럭 가릴 수 있는 공백이었겠지만, 숨길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역으로 두드러져 보일 수밖에 없었다. 감마는 결국 그 댓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내가 미쳐 진짜... 여지껏 어지간히 허튼 짓 하고 다녀도 다 나름대로의 대전략 안에서 움직이시는 걸로 보여서 별 말은 안했는데... 이번 출격은 뭐죠? 소득도 없이 그냥 주력만 홀랑 까먹고 온 거잖아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겠지만, 그래도 감마에게는 히든 카드가 있었다. 곧 무너지려는 손가락을 다잡고 간신히 입이 열렸다.


"아, 아니... 소득은... 있었... 다만..."


지금까지 감마의 입에서 나온 소식 중 유일한 희소식에, 메로페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해놓은 짓이 있어서, 덥석 믿기 힘든 건 당연지사였다.


"허, 그 소득이라는 놈 제발 좀 보여 주시죠."

"그... 용과 교전 후에 찍힌 영상 데이터인데..."


기다렸다는 듯이 다급하게 메로페의 앞에 띄워지는 홀로그램. 마치 준비하고 있던 것 같은 약삭빠름에 메로페의 눈가가 살짝 찡그려졌지만, 영상이 담고 있는 내용은 그 께름칙함도 날려 버릴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새로운 태양이 떠올랐다! 신민들 고개를 조아려 그분을 맞이해라!"

"뭐, 뭐야 이거..."

"세계의 질서는 그분의 발 아래에 재편되리라! 무지한 자들은 그들의 가르침에 감사하라!"

"이 녀석들... 말도 할 수 있었어? 게다가 이건..."

"그분의 뜻에 따르지 않는 자는-키엑!"

"자기들끼리... 공격하고 있어..."


이 파격적인 정보를 해석하느라 메로페의 머리가 어지럽게 굴러가는 소리가 감마에게도 들릴 것 같았다. 감마는 메로페에게 보이지 않게 싱긋 웃었다. 협상을 하려면 지금 뿐이었다. 몰타를 두고 델타가 머메이드를 상대로 벌였던 그것보다 더 굴욕적인 협상이 되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가릴 때가 아니었다.


"어때... 굉, 끄응. 장하지..."

"..."

"그러니까, 나 좀..."

"..."


잠시 생각하던 메로페는 선심 쓰듯 말했다.


"...엄지손가락 쓰셔도 돼요."

"끄으응..."


감마는 그 쪼잔한 가감에 불만을 담은 신음을 흘렸지만, 몸은 냉큼 메로페의 말을 따라 엄지를 땅에 딛고 있었다.


"그, 드론 캐논만 덜어 주면..."

"안 돼요. 지금도 엄청 양보해 준 거예요."

"...내가 호랑이... 아니, 범고래 새끼를 키웠지..."

"뭐라고 하셨죠?"

"아, 아무 것도..."


지금은 그나마 손가락 하나만큼이라도 줄어든 부담을 만끽하는 것이 감마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