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없이 돌아가던 볼펜의 움직임이 뚝- 끊겼다. 그리고 본래의 역할을 충실이 이행하던 펜은 이제 그 사용자의 움직임에 맞춰 온전히 움직임을 멈추고 톡- 톡- 서류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컴퓨터 워드 작업도 아닌 쓸데없는 부분에서 아날로그를 고집하는 주인처럼, 볼펜은 주인의 의지에 따라 움직임이 그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것이리라.


"음... 딱히?"

"뭐, 매일 이렇게 꿀이나 빠는 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기대했던 대답은 아니지만, 뭐... 솔직히 나쁘진 않다. 스스로도 말한 것처럼, 이렇게 하릴없이 그의 방에 찾아와 죽치고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은 편한 일이니까. 돌이켜보면 홀로 떠돌던 시기가 오히려 이상하겠지. 칼밥을 먹는다는 것은 여러모로 중노동 이었으니.


본래 내 주인 되시는 여제는 여러모로 냉정한 여자였다. 그녀는 사냥개들이 편하게 노니는 꼬락서니를 절대 용납하지 못하는 부류의 인간이었고, 덕택에 정말이지 쌍욕이 나오는 생활을 계속 이어나가야 했다. 잠시라도 찾아오는 대기 시간에는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훈련에 집중해야 했으며, 간혹 던져지는 임무는 누구 하나 죽어나가도 이상하지 않은 극한의 연속이었다.


'뭐, 실제로 많이 죽어 나갔지...'


그런 상황에서 살아남고 심지어는 새로운 주인이 되실 '생체 핫팩'을 만나 지금에 이르렀으니, 그리 나쁘지 않은 인생이라 할 수 있겠다. 똑같이 칼밥을 먹어온 다른 녀석들과 비교해도, 아마 밀리지 않는 행운을 얻은 것이리라.


"그보다 천아, 너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고민? 갑자기 왜?"

"갑자기 임무 타령을 하니까."


그의 눈빛이 걱정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보통 오르카의 다른 녀석들은 임무를 싫어하는 편인데, 오히려 맡길 일이 없느냐 물어보는 내가 그의 입장에선 무언가 고민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모양이다.


방금 전 임무를 하달 받은 스틸라인 녀석들이 죽을 상으로 출격하던 것을 핫팩과 함께 직관 하기도 했으니, 저 걱정도 어느 정도는 수긍하게 된다.


"그건..."

"그건?"

"그러니까...."


별 생각 없이 대답하려다 어느새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마치, '난 핫팩, 너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어!' 라고 스스로 어필하는 것 같은 알 수 없는 쪽팔림이 몰려온 것은 차치 하더라도, 그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은 이유인 '맡길 임무가 없다면 존재할 필요가 없다' 는 여제의 말이 떠올라 절로 입이 다물어져 버렸다.


분명 옛날과 같았다면 그의 입에서 '넌 필요 없다' 라는 말이 한마디라도 나온다면 망설임 없이 나가줬을 것이다. 아니, 그 이전에 이렇게 낯짝 두껍게 엉덩이를 오르카 호에 빌붙이고 있지도 않았으리라. 과거의 나는 누군가 에게 얽매여 있을 성격도 못됐고, 결정적으로 어느새 그는 내 가슴속에 너무 큰 존재가 되어 이제는 삶의 이유처럼 남아 있으니까.


그래서 지금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두려워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에게 버려질 가능성을.


"걱정 있는 거 맞지? 좋아! 어차피 중요한 서류도 아니니까... 자, 말해 봐!"

"거, 걱정은 무슨..."


평소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날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라며 비서실에 대항하던 저 일벌레 녀석이 두툼하게 쌓여 존재감을 과시하는 서류 뭉터기를 책상 구석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그만큼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경청의 자세를 잡고 내게 다시 한번 강조하듯 말을 이어나갔다.


"이런 서류들이야 나중에 처리해도 늦지 않고, 무엇보다 일을 좋아하는 이유도 너희들 때문이니까... 오히려 이런 잡무나 보다가 너희들의 고민을 놓친다면 그것이야 말로 주객전도라고."

"푸훕! 븅신...."

"걱정해 줬더니 그러기야?"


말로는 톡 쏘아붙이는 그였지만, 어느새 그의 눈에도 힘이 풀리고 입가엔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의 태도에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 나의 고민처럼, 그의 걱정도 순식간에 털어진 것이다.


마치 처음 마주쳤던 그 당시처럼.


그는 순식간에 다시 한번 내 마음을 녹여버렸다.


"아니~ 참 신기하지? 핫팩, 너를 보니까 괜히 고민했다! 이 생각이 들었어."

"고민이 해결된 건 참 다행인데, 그래서 고민이 무엇이었는지 말해주지 않았잖아."

"별거 아니었어."

"그 별거를 듣고 싶은 걸."


'참 질척거리네~' 라고 그를 향해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잠시 품어온 고민을 모두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마 평상시라면 절대 말하지 못했을, 그런 쪽팔린 심정과 감수성 예민한 소녀와 같은 낯 뜨거운 고민 모두를.


책상 구석에 놓인 탁상 시계의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적막감에 잠긴 이 장소에서, 나는 그에게 오직 진실 만을 털어놓았다.


나는 너에게 꼭 필요한 존재이고 싶다. 왜냐하면, 넌 내게 언제든 있어도 좋다고 말해 준 유일한 사람이니까. 길을 잃은 사냥개를 제 품에 품어준, 다시금 살아갈 이유를 준 녀석이니까. 그래서 가장 잘 하는 일로써 너의 곁에 내 자리를 만들고 싶었지만, 너는 내게 맡길 일이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불안했다. 두려워졌다. 


"불안했어. 너에게 내가 필요 없을까... 같은 생각이 들었거든."


그는 그저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 내게 다가올 뿐이었다. 그리고는 언제나 내가 불안해 하면 그래왔던 것처럼, 또다시 나를 제 품에 품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또다시 네 품에 안겨 응석을 부린다.


"두려웠어. 이제 나에게 너 없는 세상은 없으니까... 그래서 너를 떠날 수 없으니까."

"아이고~ 맨날 나한테 븅신이라더니... 이제 보니 천아, 네가 더 븅신이구나."

"뭐? 죽을래?"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 묻어 붉어진 얼굴을 숨기고, 쿵쾅이는 심장 소리를 그의 가슴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며 숨겼다.


'난... 모두 말했어. 핫팩, 네가 나에게 꼭 필요하다고...'


귀여운 응석을 받아주는 것처럼, 묵묵히 가슴을 내어준 그는 아무런 말 없이 기분 좋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넌 어때? 핫팩... 네 마음, 확실히 듣지 못했어.'


이윽고 내 손이 멈췄을 무렵, 그의 손이 조심스레 내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마치 명품 도자기를 어루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배려심이 느껴지는 따스한 손길. 그의 손길을 느끼며 결국 그의 대답을 듣는 것은 조금 더 나중으로 미루었다.


'그래도... 역시 지금은 됐어.'


그의 직접적인 대답을 듣지 못했어도, 충분히 따스한 마음이 느껴졌기에. 대답을 듣는 것은 보류하였다.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지만, 그 대신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오늘보다 나을 내일을 기다리게 되었으니까.


하루, 그리고 또 하루를 그저 죽지 못해 살아가던 하얀 뱀은, 외로움이라는 껍질을 탈피하고 새로운 양지에 둥지를 틀었다.


'언젠가, 네가 준비되면... 그때 들려줘. 언제든지 나는 네 곁에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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