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짐은 왜 여기 있는 것이냐?"

"어머, 작은 저. 제 둘도 없을 친구가 이렇게나 속상해하는데, 제가 아니면 누가 위로해주겠어요?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고들 하잖아요? 저와 멀린 뿐이라면 반이지만, 작은 저까지 하면 삼등분이 된다구요?"

"자~ 자, 그런 얘기는 됐고! 빨리 짠 하자 짠!"


작은 좌탁에 부려 놓은 짭짤한 육포와 마른 안주들 위로 맥주캔 세 개가 캉! 하는 소리와 함께 맞부딪혔다. 불과 10분 전에 번개처럼 성사된 술자리임에도, 블라인드 프린세스가 항상 구비해 놓는 주전부리들과 보리차(본인 주장대로라면) 덕분에 조촐해 보여도 꽤나 풍성했다.


처음 만나는 조합일 테지만, 어딘가 그리우면서도 익숙한 느낌이었다. 마치 이베리아 반도에서 탱고를 추는 여인이 느닷없이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보통 친구의 친구를 소개시켜 주면 분위기가 어색해지기 일쑤일 텐데도, 사이클롭스 프린세스와 멀린은 어떤 빌드업도 없었음에도 서로 위화감 없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갈 수 있었다.


데자뷔가 느껴지는 만남. 이 새로운 만남의 발단을 설명하자면 30분 앞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 



"으아악! 이러다 늦겠어! 블프! 내 카츄샤 못 봤어?"

"멀린, 당신 물건인데 당신이 간수해야죠. 애초에 맹인인 제가 봤을 리가..."

"진짜? 혼자서 맥주 까다가 깔아뭉개서 다 휘어먹은 거 모른척 하는 거 아니고?"

"에헤이, 아무리 그래도 제가 그럴 리가..."


분주하게 숙소에서 몸단장을 하는 멀린에게 블라인드 프린세스는 볼멘소리를 내며 핀잔을 주었다. 저렇게 호들갑을 떨어대는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부러움을 숨길 수 없었던 탓이다. 그래도 멀린에게는 나름대로 몇 달간의 준비를 거친 대규모 프로젝트의 결실을 보는 단계였기 때문에 이해할 수는 있었다. 이 기회를 만들어 보겠다고 위험을 무릅쓰고 저런 옷까지 입고 사냥개들 틈바구니에서 치이기도 했으니까.


"내가 파티를 좋아하긴 하지만... 멋없게 그럴 수는 없지. 이럴 땐 엠프레시스 하운드끼리 찐~한 시간을 보내는 게 더 의미있고 좋지 않겠어? 그럼 좋은 시간 보내!"


게다가 눈치 좋게 멋진 퇴장까지. ...양보해 줄 때야 내심 흐뭇했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대악당답지 않게 남 좋은 일만 하고 다 떠먹여주느라 얻은 것은 없었더랬다. 그래도 멀린은 대악당의 덕목은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하는 것이라며 스스로 위로했다. 다음에 열게 될 카페 포세이돈의 포석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때가 되면 분명 나도, 같이 서빙하고 있을지 모를 감마 대장님과 함께...


"아, 멀린. 엠프레시스 하운드 애들 호라이즌 분점 여는 거 도와줬다면서? 너도 고생 많았어. 뒷풀이에 너만 빠진 게 좀 그래서 그런데... 오늘 밤, 둘이서만 볼래?"

"...당연하지! 바로 갈게, 아서!"

"아하하, 지금은 아직 낮이잖아. 좀 이따 일 끝나면 보자?"


미안해요, 감마 대장! 원래 이런 정글에서는 오는 기회를 놓쳐선 안 되는 법이라서!


대면해 본 적도 없는 상관에게 닿지도 않을 사과를 속으로 웅얼거리며, 멀린은 그 이후로 점심부터 지금까지 몸단장을 하고 있었다. 물론, 메이드복도 빼먹지 않았다. 그게 핵심이었으니까. 나름대로 아서의 시선을 끌어 보겠다고 제복 하의도 내던져버리고 갔는데, 사실 그게 오르카 호에서는 노출 축에도 들지 않았다는 것을 함장실에 난입하자마자 깨달았던 뼈아픈 과거를 되풀이하진 않을 생각이었다.


빡세게 한 풀메이크업을 마지막으로 다시 거울을 보며 고치는 멀린의 분주한 뒷모습을 느끼고, 블라인드 프린세스는 안 보이는 눈임에도 형식적으로나마 카츄사를 찾아 방바닥을 짚었다. 그리고 아니나다를까, 뭔가 하늘하늘하면서도 이리 접히고 저리 접혀서 형편없이 꼬인 금속과 천 덩어리가 손끝에 만져졌다. 블라인드 프린세스의 몸이 흠칫 굳었다.


어느새, 멀린의 움직임 또한 멎어있었다. 블라인드 프린세스는 침을 삼키며 이 비극을 어떻게 전해야 할 지 잠시 망설였다.


작게 심호흡하고, 최대한 불쌍하면서도 죄송하게. 블라인드 프린세스는 카츄샤(였던 금속 덩어리)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머, 멀린. 미, 미안해요. 그게... 아마 이거 같은..."

"아하하, 블프. 괜찮아."

"...네?"

"취소됐어."

"그, 그건 무슨...?"

"...아서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나 봐."


애써 쾌활함을 가장한 목소리였지만, 블라인드 프린세스는 한 번도 본적 없음에도 멀린의 쓰게 웃는 얼굴을 어렵지 않게 상상해낼 수 있었다.


"됐어, 술이나 먹자 그냥!"



**



"아서도 진짜 보는 눈 없다니까! 아무리 일이 좋아도 그렇지, 나 같은 여자를 바람 맞히고... 그냥 일에 밥 비벼먹고, 일이랑 같이 살고, 일이랑 결혼까지 하고, 그대로 일에 파묻혀서 죽어버리라지!"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요... 멸망 전엔 그런 말도 있었다잖아요? 그... 똥차 가고 벤츠 온다던가?"

"어, 어... 너희들 지금 동침 일정 밀린 것 때문에 이러는 거 맞지? 그게 지금 상황에 알맞는 비유인지 모르겠다만..."


어느새 헤어진(?) 전남친을 두고 여자 모임에서 같이 욕해주는 듯한 상황이 된 것에 사이클롭스 프린세스는 적잖이 떨떠름했다. 블라인드 프린세스는 진작에 맞장구를 치며 분위기를 타고 있느라 자기만이라도 그런 현실 인식을 바로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사이클롭스 프린세스는 튀긴 건빵을 깨작거리며 꼭지만 아슬아슬하게 가린 그 파렴치한 메이드복을 흘긋거렸다. 보통은 처음 보는 사람의 젖꽃판 색깔까지 알게 되는 게 흔한 일은 아닐 것이지만... 오르카 호에서는 이상하게도 그런 일이 너무도 흔했다.


"그나저나, 참 장난 아닌 복식이구나... 아무리 멸망 전에 소돔과 고모라같은 도덕적 해이가 팽배해 있었다고 하지만서도... 이런 환경에 그 아이는 주욱 노출돼 있었던 건가...? 누군가가 제대로 된 의식을 함양하도록 바로잡아 주었어야 할 텐데..."

"그렇지? 그렇지? 이렇게까지 입고 나 같은 미소녀가 좋다고 달려드는데도 글쎄, '미안, 긴급하게 지휘 요청이 들어와서 이건 꼭 내가 직접 봐줘야 할 거 같아.' 라니! 물론 그런 진지한 점도 멋있어서 좋아하는 거지만! 그래도 아서 미워!"

"음, 멸망 전부터 살아왔긴 하지만, 저야 눈이 이래서... 옛날 바이오로이드들 노출도가 그렇게 심했나요? 그래서 지금 오르카 호도 비슷한 거고요?"

"이 천재 참모가 확인해 주자면, 뭐... 상품으로서 가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예전부터 바이오로이드들의 복장은 대체적으로 그런 경향이긴 했지. 그래도, 그런 쪽으로의 어필이 그닥 필요가 없는 나 같은 군용 바이오로이드들에게는 해당 사항이 아니었다고? 솔직히 오르카 호의 노출도는 멸망 전을 봐온 나조차도 기겁할 정도니까..."

"에, 그럼 멸망 전보다 지금 오르카가 훨씬 더..."


맥주 캔을 가볍게 홀짝인 멀린이 사이클롭스 프린세스를 보며 끄덕였다.


"그런데, 어느 정도는 당연한 현상이야. 마치 군비 경쟁과 같지. 옆 나라에서 탱크를 들여 오면, 우리 나라에서는 재블린을 들여 오고... 대륙간 탄도 미사일에 대응해서 방어 체계가 발전하고, 핵무기에 대응해서 핵우산이 개발되는 것처럼... 치킨 게임이 될 수밖에."


지금 오르카의 풍기에 대해 통찰 있는 혜안을 남기며, 멀린은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끄응, 그런데... 그런 급박한 전장에서 이렇게 한 번 기회를 놓쳐버리면..."

"너, 너무 낙담하지 말거라. 성녀가 말했듯이, 나중에 더 좋은 기회가 있을 지도 모르지 않느냐? 게다가 용살자는 이런 식으로 미룬 그대의 일을 잊을 리가 없기도 하고..."

"그래요, 멀린. 그 전까지 카츄샤도 다 고쳐 놓을게요."

"에으, 됐어. 눈도 안 보이는데 무슨 수로? 내가 다시 펴 놓을게."


잠시 무거워진 분위기를 느낀 멀린은, 눈치를 살피고는 캔을 들어올리며 다시금 외쳤다.


"에이, 됐어! 지금 그런 재수 없는 얘기는 하지 말자고! 이렇게 진짜 벗들이 나와 함께 해 주는데 그깟 아서가 뭐가 중요해! 결국 남는 건 우정이라고!"

"아니, 실연한 것도 아니고 그냥 다른 일 때문에 밀린 건데 나중에 분명 용살자가 다시 불러 줄..."

"예이~ 그래요 멀린! 결국 남는 건 우정이라구요! 아무리 맨날 맥주 흔들어 놓고, 돼지라고 놀리고, 밉상인 말만 지껄여도... 카멜롯으로부터 수십 년을 쌓아 온 우리 우정이 어디 가겠냐구요!"

"하하하! 오늘 기분 최고다 그냥! 자~ 다같이 죽어 보자!"

"아니, 너희들 좀 진정..."

"휘우~ 오늘같은 날 따려고 준비해 둔 게 있죠!"


블라인드 프린세스는 몸을 기울여 방구석의 장판을 일부 들어냈고, 멀린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그녀의 비밀 와인 셀러가 드러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언제 한 번 비싸보이는 술을 혼자 홀짝이길래 조금 훔쳐 마셨던 적이 있는데, 그 날의 저먼 스플렉스로 침대 다리가 나갔었지... 그 이후론 도저히 찾을 수가 없길래 계속 어디다가 꿍쳐두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이런 식으로 밝혀지다니.


"아니, 대체 방에 무슨 짓을 해 놓은 게냐..."

"후후, 멸망 전에 영국을 떠돌면서 팬 사인회를 할 때부터 간직해 온 비장의 한 병이라구요? 이거 뭐라고 써 있는 거였더라... 저번에 샬럿 씨한테 읽는 법을 물어 봤었는데... 모엣 에 샹동?"

"오, 오오오...! 이거 돔 페리뇽이잖아! 이야, 블프, 너란 녀석 참...!"

"잠, 잠깐. 이거 라벨에 2110년이라고 적혀 있는데... 애초에 샴페인이 이런 숙성 기간을 버틸 수가 있는 것이냐? 먹, 먹을 수 있는 건지는 둘째 치고... 거의 멸망 전쟁 연도 즈음에 생산된, 구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온 성유물과도 같은 것인데...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어야 할 문화 유산 아니더냐? 이, 이런 오징어랑 땅콩 안주 따위랑 같이 마시려고 따기엔..."


펑!


"우와! 역시 시대의 명주! 아직도 기포가 살아 있어! 미쳤다 미쳤어!"

"짐은 이젠 모르겠다 정말..."

"후후후! 술은 원래 마시라고 있는 거라구요? 자~ 자~ 샴페인 잔도 챙겨 왔으니 다들 받으시고~"


사아아아-


호들갑을 떨며 잔을 채워주는 블라인드 프린세스와, 얇고 긴 샴페인 글라스에 채워지는 매혹적인 꿀빛 액체. 백여 년을 넘게 살았을 텐데도, 기적적으로 보존된 황홀한 거품이 마치 별빛처럼 유성우처럼 올라오고 있었다. 이미 딴 이상에는 늦었으니까. 호기심이 동한 사이클롭스 프린세스도 그렇게 합리화하며 얼른 잔을 내밀어 받았다. 잔에서 피어오르는 복숭아와 브리오슈 번 같은 풍미에 사이클롭스 프린세스는 남몰래 침을 삼켰다. 그리고 서로 잔을 부딪히려 할 때에-


띠리리리.


"음? 아, 잠깐만. 미안."


삑.


"어, 아서... 아니, 안 기다렸어... 어, 지금 일 끝났다구? 에헤헤, 나야 괜찮지~ 어, 지금 바로? 알, 알았어! 뭐? 아니야~ 나 뭐 하고 있는 거 없어~ 바로 갈게!"


샴페인 잔을 들고 굳은 두 프린세스 앞에서, 멀린은 서둘러 전화를 끊고 잔을 쭈욱 들이켰다.


"크으으~ 맛 끝내준다! 미안, 나 아서가 불러서 빨리 가 볼게! 아, 내 카츄샤! 블프! 나 가글 좀 빌릴게!"


우물우물우물!


백여 년을 살아남은 명주를 모독하듯, 멀린은 민트 향 가글액으로 입을 헹구며 블라인드의 손에서 뺏어내듯 받아든 카츄샤를 이리 저리 구부렸다.


고로로로록!


마무리로 목을 꺾어 올려 목구멍까지 깔쌈하게 씻어 낸 멀린은, 어찌나 급한지 가글액을 뱉어낼 생각도 못하고 꿀떡 삼키곤 폭풍처럼 방을 뛰쳐나갔다.


"...그래도 입이 줄어서 좋네요."

"...여자의 우정이 어쩌고 어째?"


휑한 방 안에는, 여전히 석상처럼 굳은 두 프린세스만이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