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점심은 돼지국밥이다. 소완에게 부탁해 돼지 뼈와 살코기를 넣고 푹 우려낸 녀석에다가 막창 순대와 머리 고기까지 들어가 푸짐했다.


  평소라면 고염분인 탓에 아르망에게 압수당할 게 뻔했으나 꼭 읽고 싶다던 서적을 이번 작전에서 찾아 삼일밤낮을 교섭한 결과, 오늘 하루만큼은 허락받았다.


  얼마나 먹고 싶던 음식이었는가. 사령관의 시선은 우유처럼 뽀얀 빛깔의 국물에 향했다. 사골 특유의 향과 쿰쿰한 돼지 냄새를 코로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군침이 돌기 시작했다. 새우젓갈을 떠서 국물에 던져 숟가락으로 휘휘 섞었다. 소금으로는 돼지국밥의 맛을 끌어낼 수 없다. 새우젓갈은 돼지국밥에 있어서 빠져선 안 될 중요한 조역이었다. 해산물 특유의 비릿한 향은 육수에 들어감으로써 감칠맛으로 승화된다.


  드디어 한 숟갈.


  조심스레 떠서 입에 넣어봤다. 입술이 달라붙는 돼지 특유의 젤라틴이 짜릿하게 느껴졌다. 뒷맛이 깔끔했지만 그렇다고 경망스럽지 않았다.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나온 털털한 이성처럼 꾸밈없이 솔직한 매력이 있었다.


  여기에 후추만 뿌려도 완벽한데 사령관은 다데기까지 넣어 먹고자 했다. 양념통 안에 담긴 자그마한 수저를 뜬 사령관은 순간 멈칫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토끼 같은 눈을 매섭게 부라리고 있는 아르망이 서 있었다.


  “아르망?”

  “예, 폐하.”

  “나 이제 밥 먹을 건데 돌아가도 돼.”

  “아닙니다. 보좌하겠습니다.”


  전혀 보좌하는 태도가 아닌데.


  사령관의 등골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허락을 맡긴 했으나 소녀 부관은 영 탐탁지 않아 했다. 그래도 이미 끝난 약속 아닌가? 그런데 밥 먹는 자리에 와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사령관의 내면에 회의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수저를 내려놓은 사령관이 단호하게 명령했다.


  “아냐, 불편해. 조금 있다가 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진지한 눈빛의 아르망이 물음을 꺼내왔다.


  이럴 땐 어떻게 해도 막을 수 없단 걸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는 사령관이 손가락으로 깍지 끼웠다. 빨리 답변하고 보내려는 계획이었다.


  “뭔데? 국밥 식기 전까진 어울려줄게.”

  “그렇습니까?”


  싱긋, 웃어 보이는 아르망이 첫 번째 손가락을 세웠다.


  “세 가지 질문하겠습니다. 국밥은 따뜻할 때 먹어야 합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당연히 국밥은 뜨끈뜨끈할 때 먹어야 제맛 아니겠는가? 따뜻한 아이스크림을 상상할 수 없듯, 식은 국밥도 상상할 수 없다. 답이 정해진 질문에 사령관은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그렇군요.”


  아르망은 별다른 반론 없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국밥을 먹지 못하게 수작을 부릴 거로 예상했는데 그건 아닌가 보다.


  “그럼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국밥을 먹지 못할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가 알아서 처리해도 되겠습니까?”


  옳거니.


  첫 질문은 함정이고, 두 번째 질문이 본심이구나.


  사건을 일으켜 먹지 못하게 만들 속셈이다. 아르망의 간계를 꿰뚫어 본 사령관은 속으로 부관을 가소롭게 여기며 피식 웃었다.


  “물론이지.”


  지금 당장 먹어치울 테다. 국밥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세 번째 질문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질문을 재촉했다. 당장 국밥을 먹고 싶어 안달났다.


  “그럼 마지막 질문은? 빨리, 아르망. 국밥 식겠다.”


  히죽이며 닦달하는 사령관에게 아르망은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냥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으며, 이윽고 만면에 환한 웃음을 띄워낸 후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지금 제가 도망치라고 하면 들으시겠습니까?”

  “뭐?”


  앞선 두 질문과 다른 성향의 물음이었다.


  당황한 사령관이 진의를 물으려 할 때, 함장실의 문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젖혔다. 그곳엔 벗은 거나 다름없는 차림의 샬럿과 앨리스 두 사람이 서로 아웅다웅하고 있었다.


  “폐하는 오늘 저와 함께하실 거에요!”

  “어림없는 소리! 주인님은 저와 함께하실 거라고요!”


  이윽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이 물어왔다.




  [저희 둘 중에 누구랑 함께하실 건가요?!]




  황당한 사령관이 깍지 낀 손을 풀며 되물었다.


  “무슨 소리야?”


  금일, 동침계획이 없는 걸 확인한 사령관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연일 치약처럼 쥐어 짜이던 중 황금 같은 휴일에 국밥과 영접하려던 참인데 이게 무슨 일인가.


  분명히 아르망이 준 동침계획표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사령관은 재빨리 아르망을 쳐다봤다. 부관은 평소처럼 인상을 찌푸리는 게 아니라 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세상 누구보다 순진해 보이는 웃음이었지만 내면에 똬리 튼 구렁이가 자리 잡은 걸 깨달은 사령관이 절규했다.


  “아르망!!”


 /


  벌칙을 정하지 못해 동시에 진행하게 된 사령관은 두 처형인에게 질질 끌려나가고, 비게 된 방 안엔 아르망이 조심스레 수저를 들고 있었다. 젓가락을 사용하는 건 아직까지도 서투르나 수저는 양식에서도 많이 접해봤기에 낯설지 않았다.


  사령관이 넣으려던 다데기를 뽀얀 국물에 풀었다. 그러자 주황색 빛깔이 영롱하게 빛나며 돼지기름을 붉게 물들였다.


  뒤이어 한 숟갈 떠서 조심스레 입에 넣어봤다. 그러자 굴라쉬 같은 진한 고기 맛이 미뢰를 포옹했다. 고깃국물 특유의 만족감을 숨결에 담아 내뿜자 뜨끈한 국물에 가열된 마늘의 개운한 맛도 뒤따랐다.


  허겁지겁, 고기와 순대를 입에 넣고 씹어봤다. 결대로 찢길 만큼 부드러운 고깃점과 탱글탱글한 식감의 막창 순대가 새로운 미식 세계의 등장을 알렸다.


  금가루가 쏟아지는 도시 한가운데 붉은색 카펫 위에 선 것 같은 아르망은 상상 속에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곳엔 황금으로 조각된 커다란 돼지 상이 아르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앞에 두 손을 나란히 모아 합장한 아르망은 현실로 복귀해서 국물에 공깃밥을 넣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물 반, 쌀알 반을 수저로 떠 입에 옮겼다. 국물만으로도 한 그릇 비워낼 수 있었지만 고기를 빼놓기 아쉽다. 후발주자로 입장한 고기와 쌀알이 혀 위에서 춤췄다.


  당장이라도 춤을 춰 흥을 배출하고 싶은 걸 숟가락을 놀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쉬지 않고 숟가락을 움직이다 순간, 쟁반에 담긴 부추겉절이가 눈에 들어왔다.


  사령관의 식단을 제한하기 전, 부추겉절이를 국밥에 말아먹는 걸 본 기억을 떠올린 아르망은 망설이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겉절이는 겉절이대로 먹어야 한다고, 섞어놓으니 개밥 같다며 경을 쳤을 아르망은 김치찌개로 타락한 지 오래다.


  미식을 향한 여정은 폭풍우를 뚫고 나아가는 외딴 배나 다름없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할 모험가처럼 도전 정신 비슷한 것이 소녀의 마음 안에도 싹틔웠다.


  지체하지 않고 부추와 고기, 쌀알, 순대, 국물을 입에 넣자 급기야 아르망은 눈물까지 흘리기 시작했다.


  이 눈물이 위대한 돼지국밥과의 첫 만남에서 온 벅참 탓이었을까, 두 여인에게 끌려간 사령관에게 보내는 추모였을까.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전 세계에 아르망 추기경, 단 한 명밖에 없으리라.




국밥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