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武)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궁리해보지 않은 무인은 진정한 무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답을 구하기 위해 공기가 희박한 백운고산(白雲高山)에서 좌선(坐禪)하여 주화입마가 될 지경까지 내공을 수련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바위를 치고 나무를 뜯어내고 달군 모래에 손가락을 담구며 외공을 단련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온갖 내단(內丹)을 탐욕스럽게 씹어삼키는 자도 있을 것이고, 그 따위는 별 거 아닌 일로 치부할 수 있을 정도로 입에 담기도 힘든 사특(邪慝)한 지름길을 걷고 있는 자도 있을 것이다.


허나, 무(武)의 신이란 변덕스럽기 그지없어, 그 답을 쉬이 주지 않는다.


백운고산에서 식음도 전폐하며 참선하고 있을 수십 갑자의 고수에게는 단전을 바수며 평생 기를 운용하지 못할 정도의 토혈을 안겨주기도 하고,


바위를 치고 나무를 뜯어내고 달군 모래에 수도를 꽂아 넣고 대들보에 정강이를 박아 넣는 호기로운 무림초출에게는 골병을 내려 반병신 앉은뱅이로 만들기도 하고,


온갖 좋다는 영물들을 구해다가 양식으로 삼는 명문 무가의 금지옥엽에게는 내장이 뒤집혀 피오줌을 싸며 돌연사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게 하기도 하고,


당장 노모의 허기를 떼우게 해 줄 죽 한 그릇도 없는 무지렁이 농사꾼들을 병을 낫게 해주느니 하는 말로 꼬드겨 등쳐먹는 마교(魔敎)의 교주를, 그보다 더 낫다 할 수도 없을 녹림(綠林)의 우두머리의 눈먼 칼끝에 꿰어버리기도 한다.


선한 방법을 추구하며 꾸준히 정진하는 자가 성취를 이루는 것 같지도 않고, 악한 방법을 택해 편한 길로 돌아가려는 자가 꼭 응보를 받는 것 같지도 않았다.


허나, 단 하나. 분명한 것은...


그걸 추구하고자 하는 길은 이미 이전 순례자들의 땀과 피와 통곡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답에 가장 근접한 소녀가 여기 허름한 객잔에 앉아 있다.


틀어 올려 거칠게 한 데 묶은 머리는 비녀도 아닌 나무 젓가락으로 고정하고 있었고, 소매가 없고 한쪽 다리를 드러낸 기복(旗袍)으로 속곳(본인은 속곳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이 훤히 보이는 것도 아랑곳않고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소면과 탁주를 번갈아 들이키고 있었다.


팔다리의 움직임에 걸리적거리는 천을 최대한 제거한 그 도복으로 미루어 보아, 권각(拳脚)을 즐겨 사용하는 문파에서 사사받았을 것이라는 정도는 칼을 처음 쥐어 본 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근골(筋骨)은 제대로 잡혀 있고 발걸음에는 힘이 넘치나, 동작은 깔끔하지 못하고 호흡은 정순하지 않아 아직 풋내기라는 것까지는 무림명숙이라면 어렵잖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태양혈이 높게 솟아 있고, 막 피어나기 시작한 내공이 근육과 살집이 알맞게 붙은 내퇴(內腿: 허벅지)에 서려 있는 것을 보면, 그 혈기를 잘 누르며 십여 년 이 바닥에서 구르면 자못 볼 만한 무공을 갖추고 자신과 합을 나눌 정도는 되리라는 것을, 두 갑자 수준의 고수는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운이나 겁대가리 둘 중 하나가 지나치게 없으면...? 


당장 다음 날 불의를 참지 못하고 호기롭게 도전한 산채의 우두머리의 피둥피둥한 털투성이 몸에 깔려, 뚱뚱한 양물에 꿰뚫리며 천박한 신음을 내뱉고 있더라도 이상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뛰어난 소질이지만, 제일인(第一人)을 논하기에는 지나치게 시기상조이다. 


허나, 그런 그녀가 지금 모두가 바라마지 않는 무학(武學)의 극에 가장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은... 그녀 자신을 포함해서 이 세상 누구도 모를 것이다.


"점소이! 여기 탁주 두 병이랑 소면 한 그릇 더!"

"네네~ 갑니다~"


그런 건 꿈에도 모른 채로, 티에치엔(鐵拳)은 주린 배를 허겁지겁 채우며 제법 반반해 보이는 점소이를 눈으로 쫓고 있었다.


"자, 여기 탁주 한 잔이랑 소면 한 그릇 나왔습니다~"

"응응, 고... 우물우물."


소면 맛도 그럭저럭이고, 탁주는 그냥 적당히 취하기 나쁘지 않고, 새로 들어온 점소이는 꽤나 몸이 탄탄하고 볼만하여 자주 올 만했다. 소면 그릇을 가져다 줄 때에 그릇을 쥔 엄지를 반쯤 국물에 담가 놓는 짓거리를 다른 점소이가 했다면 경을 쳤겠지만, 얼굴을 보아 넘어가기로 했다. 오히려 어떤 요상한 취향에 눈을 뜬 것인지, 그날따라 소면이 더 맛나고 몸에 기운이 충만해지는 느낌이었다.


좋아, 때를 봐서 한 번 말이나 걸어 볼까. 티에치엔은 적당한 구실을 붙여 추가로 한 병을 더 주문하기 위해 손을 들었다.  


...다 비운 소면 그릇 안에 둥둥 떠서 담긴 한 올의 터럭만 아니었으면.


"...주인장 나와아아아앗!!!"


객잔의 지붕이 들릴 정도로 쩌렁쩌렁 울리는 불호령. 점소이가 다급하게 달려 나와 두 손을 모으며 비굴하게 응대했다.


"소, 소협. 무, 무슨 일입죠?"


꽤 마음에 들게 생겼지만, 그래도 이건 그것과 별개의 일이었다.


"네가 눈깔 똑바로 뜨고 봐라, 이게 무슨 일인지! 여기 그릇에 이 머리털이 안 보이느냐!"

"헉...! 소, 손님! 죄, 죄송합니다!"

"아~ 됐고 주인장 나오라 해! 고작 점소이가 뭐 돈이라도 물어줄 텐가?"


쾅!


점소이가 땀을 뻘뻘 흘리며 쩔쩔매던 그때, 굉음이 가게에 울려퍼졌다. 퍼져나가는 울림과 함께 가게의 모든 의자와 식기 따위가 한 자씩 치솟아 떠오르고는, 다시 떨어졌다.


탈그랑!


"..."


땅울림이라도 일어난 듯한 충격의 여파와 어울리지 않게, 다시 있던 곳에 안착한 요리들은 국물 하나도 그릇 밖으로 튀지 않고 예쁘게 있던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방금 탁자를 내리친 여걸이 한 박자 늦게 노성을 토했다.


"어떤 무뢰배가 이 어르신의 식사를 방해하느냐!"


뱃심으로부터 호기롭게 울리는 사자후. 그냥 적당히 밥값만 받아내려던 티에치엔은, 재수 없이 제대로 걸렸다는 것을 직감했다.


"...뭐야?"

"객잔에 와서 술 쳐먹었으면 곱게들 쳐먹고 갈 길 가면 되지, 왜 취해서 애꿎은 점소이에게 화풀이를 하나? 덕분에 이 어르신의 술맛까지 다 버리는군."


하지만 공기관(公機關: 퍼블릭 서번트) 문파는 걸어 온 시비를 피하지 않았다. 물론, 따지고 보면 시비는 그녀 쪽에서 먼저 걸어 온 거긴 했다.


"거기 자네, 적당히 하고 가시게. 보아하니 어디 시골 문파에서 막 초출한 애송이인가본데, 크게 다치기 싫으면 조용히 계산하고 나가."


소리를 질렀던 갈색머리 여걸 뒤에 조용히 시립해 있던 적홍빛 머리의 수행원이 점잖게 티에치엔을 타일렀다. 티에치엔은 단번에 그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개노니어(慨努旎御)의 장문인, 노알(怒揠) 아수날(牙獸捏)...!"

"허허, 이 어르신의 별호가 이런 촌구석 거렁뱅이에게도 퍼졌나! 그거 참 기쁘군! 문외한이면 이 주먹 맛을 꼭 봐야 물러나던데... 그럴 수고로움은 덜었군."


힘 쓰는 모습이 마치 위풍당당하게 펄럭이는 깃발처럼 웅장위맹하여, 그 아래 무수한 문하생을 거느리고 있는 신흥 명문, 개노니어(慨努旎御). 장문인이자 관주인 아수날은 그 별호만큼이나 호방하고 강맹한 손속을 자랑하며, 그 무공만큼이나 자유분방한 호색한이라고들 한다.


"저 점소이에게 수작 걸 요량이면, 내가 대신 손목을 비틀어 주지."


역시나 그녀도 눈독들이고 있는 청년이었나 보다. 나중에 어떻게 해 보려고 점수를 따기 위해 먼저 곤경에서 구해주려는 수작이겠지. 그 와중에도 아수날은 잊지 않고 점소이에게 눈짓으로 추파를 던졌고, 점소이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그녀 앞의 상대도 만만치는 않았다.


"...딱 좋군."

"뭐라?"

"내 첫 비무로 부족함이 없다고 했다."

"호오~"

"잠깐, 관주님! 이런 건달들에게 일일이...! 차라리 제가 대신 나서겠습니다!"


흥미롭게 쳐다보는 아수날을 수행원이 막아섰다. 하지만, 티에치엔은 지지 않고 도발했다.


"왜, 겁나나?"


어차피 언젠가는 꺾으리라 다짐하고 있던 목표였다. 한두 계단 앞당겨지긴 했지만, 강함에 목마른 그녀로서는 계기가 어떻게 되었건 원하는 바였다.


아수날은 이 새파란 무인의 도발에 눈 하나 깜짝 않고 겁 없이 웃으며 수행원을 팔을 들어 물렸다.


"후후, 겁 없는 하룻강아지는 싫지 않아. 됐다, 비헌(枇獻). 식후 운동이라고 치지. 운동거리나 되려나 모르겠지만."

"따라 나와!"


티에치엔은 그릇을 들어 남은 국물을 들이키고는 떨쳐 일어났다.


...아차, 머리카락.



**



"자~ 나는 보는 눈에 많아야만 힘이 나는 성격이라서. 거기 점소이, 혹시 가게 일이 바쁘지 않으면... 심판으로서 오늘 이 자리를 빛내주겠나?"

"어, 어... 네..."

"후후, 귀엽긴. 이름이 뭔가?"

"저... 그, 도극경(倒戟鯨: 범고래) 객잔의 철남(鐵男)이라 합니다..."

"하하, 그래. 오늘 이 승리는 그대에게 바치겠다."


비무 상대를 싸그리 무시하듯, 남자에 정신이 팔려 희롱하기 바빴다. 티에치엔은 호승심에 불타며 가볍게 어깨를 풀었다.


"자, 첫 3수를 양보하지."

"...내 문파와 이름도 듣지 않는 것이냐?"

"들을 가치가 있는 이름이라면 끝나고 듣지. 말해 줄 의식이나 있으려나 모르겠지만."


가볍게 손을 내밀어 손짓으로 들어오라는 듯 두어 번 까닥였다. 그와 동시에, 티에치엔의 발끝이 지면을 비틀며 아수날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쾅!


"이걸로 한 수."

"크윽...!"


기수식도 취하지 않고 선 자세로 티에치엔의 각법을 받아낸 아수날은, 막은 손목을 가볍게 털며 티에치엔의 발뒤꿈치를 떨쳐냈다.


"기세와 속도는 나쁘지 않다만, 너무 직선적이고 허초가 부족하군."


그럼 바라는대로 해 주지. 처음 주먹을 맞대고 티에치엔은 이미 상대가 아득한 격상의 경지에 있다는 것을 체감했으나,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은 인정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갈 지(之)자를 그리며 매끄럽게 거리를 좁히고, 땅을 휩쓰는 다리걸기에 이어 공중으로 몸을 솟구쳐 중심을 잃은 상대를 날려버리는 질풍 같은 발길질. 첫 수를 몸을 띄워서 피하면, 피할 곳이 없는 공중에서는 정타가 들어갈 수밖에 없는 연격. 티에치엔의 특기이자 가장 자신 있는 초식이었다.


터턱!


"이번 것은 두 수로 치면 되나?"

"...!"


쿠당탕!


발바닥에 어처구니없이 가로막힌 첫 휩쓸기와, 허공에서 몸을 비트는 동작 도중에 엉덩이를 짓밟듯 밀어내어 불발된 두 번째 차기. 형편없이 나귀처럼 땅을 구르던 티에치엔은 재빨리 몸을 퉁겨 올려 자세를 잡았다. 깔끔한 파훼였다.


"우리 귀여운 애송이의 재롱은 충분히 봤군. 이제 이 어르신이 한 수를 베풀어 줄 터이니, 한 번 받아 보거라!"


쾅!


"뭣...!"


진각만으로 몸이 붕 뜰 정도의 충격. 티에치엔은 객잔에서 그녀의 주먹질 한 번에 떠올랐던 좌탁과 식기들을 떠올렸다. 천하에 그 명성이 자자할 정도로 파괴력이 강렬하고, 그 위력만큼 준비동작이 큰 강맹한 초식들을 개노니어는 어떤 이치로 적에게 적중시킬까?


쐐액!


순식간에 지척으로 다가온 인영. 티에치엔의 눈이 경악으로 휘둥그레졌다.


"뭘, 방금 네가 마지막으로 보여 줬던 초식과 원리는 크게 다를 거 없다."


정답은, 못 피하게 만들고 때리면 된다.


"으윽...!"


콰아아앙!


철포 같은 권격이 허공에서 자세를 바로잡으려 버둥대던 티에치엔에게 작렬했다.


"저런, 막혔나? 하긴, 갈빗대 나가는 것보다야 팔 부러지는 게 낫겠지."


무시무시한 위력을 뿜어낸 주먹을 매만지며, 아수날은 아까보다 격하게 땅을 구르고 있는 도전자를 내려다보았다. 간신히 구르던 것을 멈춘 티에치엔은 땅을 짚고 그 위에 한 바가지 쏟아냈다.


"우웩...!"


갈빗대 나가는 게 더 낫긴 무슨? 이미 방어한 팔이 무색하게 갈빗대도 팔뼈와 함께 사이 좋게 나가 있었다.


신경 쓰던 점소이 앞에서 속을 뒤집으며 못 볼 꼴을 보여주던 티에치엔은, 더없이 자신의 부족함을 통감하고 있었다. 같은 원리의 기술도 이렇게나 경지가 다르면 이런 차이가 날 수 있다니. 무의 끝이 멀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멀리 있을 줄은 몰랐다. 방금의 일격으로 티에치엔은 목표와의 거리를 희미하게나마 가늠할 수 있었다. 흙바닥에 쏟아지는 탁주의 시큼한 술지게미들의 고약한 냄새 때문인지, 아니면 그 일격으로 깨닫고 만 세상과 자신의 격차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티에치엔의 눈에 물이 어렸다.  


하지만.


꽈악.


"윽."


티에치엔은 구토반사에 저항하며 억지로 이를 악물어 간신히 소면만큼은 지켜냈다. 그래도 이렇게 꼴사납게 토사물을 쏟아낸 채로 패배할 수는 없었다. 입신양명이라는 극히 세속적인 가치를 노리고 무림에 나왔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근본부터 무인이었다. 


꿀꺽. 


입 안의 것들을 간신히 삼킨 그녀는, 억지로 땅을 쥐고 일어서 기수식을 취했다. 방어한 팔은 아직도 저릿거려 움직이지 않고, 오른쪽 갈비뼈는 숨을 쉴 때마다 칼로 후비는 것처럼 아팠다.


"이봐, 더 하면 크게 다친다네."

"닥... 쳐..."


말을 하니 통증이 더 심해졌다. 하지만, 티에치엔은 왼손에 진기를 불어넣으며 발가락으로 땅을 움켜쥐었다. 왼쪽 옆구리까지 당긴 주먹. 지르기의 겨냥은 상대의 명치로.


"허허, 하룻강아지. 본좌의 명치를 뚫고 싶으면, 적어도 팔이 닿는 곳까진 와야 할 거 아닌가? 허공에 헛손질이라도 하려고?"


그 말대로, 아수날과의 거리는 방금 한 합을 겨룬 여파로 백 보 떨어져 있었다. 가벼운 비웃음을 귓등으로 흘려내고 티에치엔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뼈를 깎는 고통을 참아내며 기를 운용했다. 뱃속에서 뜨겁고 맹렬한 기운이 용솟음치며 맴돌았다. 단전에 모인 기를 호흡을 통해 정제시키고, 충격을 터뜨리기 직전까지 어깨는 힘을 빼고 느슨히 한다. 점점 피어오르는 원기에 티에치엔의 머리칼이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피부에 어린 땀방울이 대기로 퍼져나가 산란되었다.


"...?!"

"관장님! 저건...!"

"크흐아아아압!"


표표히 팔짱을 끼고 있던 아수날의 손이 풀리고, 동공은 당황으로 수축했다. 티에치엔은 수만 번을 연습했을 단순한 동작을 습관처럼 되풀이했다. 닿을 리가 없는 거리, 닿을 수가 없는 일격. 하지만...


기(氣)를 다룰 수 있다면 백 보 밖의 적이라고 해도, 능히 요격할 수 있다.


"백보신권(百步神拳)!"


콰아아아앙!


주먹 끝에서 쏟아져 나가는 풍압의 격류를 느끼며, 티에치엔은 소리쳤다.



**



"허억, 헉..."


흙먼지가 걷히고, 티에치엔은 뻗은 주먹을 천천히 내렸다. 온몸에 탈력감과 노곤함이 쏟아졌다. 한 문파의 전설로만 전해내려오던 경지를 단 한순간 뿐이라지만 극한까지 펼쳐 냈던 대가는 작지 않았다. 티에치엔은 자신이 지금 수준에서 도달할 수 있을 리가 없는 경지에 그제야 의문을 가지며 뒤로 쓰러졌다.


"어, 어떻게 된 거지...?"


방금까지 기의 파도를 쏘아냈던 자신의 주먹을 아무리 쳐다보더라도 알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누운 채로 하늘을 향해 뻗은 자신의 주먹을 쳐다보던 티에치엔은, 그제야 백보신권에 직격당한 아수날의 몸뚱이가 객잔의 벽을 부수고 쳐박혀 있던 것을 보았다.


"헉...! 큰일났다!"


고수를 이기고 명성을 떨치는 것은 원하던 바였지만, 외벽 수리비를 물어내는 것은 결코 원하지 않았다. 티에치엔은 급하게 오른팔로 땅을 짚으며 일어나...


"...어?"


형편없이 덜렁대던 오른팔이 말끔하게 고쳐져 있었다. 혹시나 옆구리도 더듬어 보았으나, 역시나 늑골도 깨끗하게 붙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이상할 정도로 몸에 충만하던 진기, 깔끔하게 치유된 부상, 그리고 사용할 수 있을 리 없는 신권(神拳) 일시적으로나마 펼쳐낸 자신의 육체.


"내단이나... 비급? 하지만..."


그 새에 비급을 읽고 깨달음을 얻었을 리는 없었고, 먹었던 거라고는 고작 탁주 두 병과 싸구려 소면 두 그릇이었다. 그마저도 탁주는 다 땅바닥에 게워냈고, 소면은...


티에치엔의 머리에 번개가 튀고, 소면 안에 담겼던 머리터럭 한 가닥이 떠올랐다.


"...! 설마..."


티에치엔의 시선이 백보신권의 여파에 저 옆에서 기절한, 심판을 보던 점소이에게로 향했다.


"그럴 리 없어. 그렇지만..."


머리에 떠오른 일말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티에치엔이었지만, 자신이 신공을 펼칠 리 또한 만무하였다. 티에치엔은 어느새 기절한 점소이를 들쳐 매고 재빨리 자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가게까지 부수고, 반반한 점소이까지 보쌈해서 튀는 그 꼴은 어딜 보나 악당이었다.



**



으슥한 헛간에 대충 점소이를 내려 놓고 기절한 틈을 타 이것저것 확인을 마친 티에치엔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무공을 익힌 흔적도 없고, 기도 느껴지지 않아. 그냥 얼굴 반반하고 몸 볼만한 일반인일 뿐이야."


하지만, 자신이 그 점소이의 머리털을 먹고 백보신권을 펼쳐서 아수날을 쓰러뜨린 것은 정진정명한 사실이었다. 그 싸구려 소면은 이전에도 몇 번 먹어봤기에, 그게 특별한 무언가였을 리는 없겠다. 그랬으면 도극경 객잔을 들락거리는 무인들은 다 신공을 펑펑 써대는 괴물들이 되었겠지.


"...시험해 봐...?"


머리카락이 이 정도면, 손톱은...? 땀은...?


살풋 드러난 목덜미를 보며, 티에치엔은 군침을 삼켰다.


...피나 살점은?


허나, 잠시간 떠오른 그 무시무시한 인외마도(人外魔道)의 생각을 고개를 흔들어 떨쳐냈다.


"내, 내가 그런 혈교(血敎) 놈들이나 할 법한 잔인무도한 생각을..."


무서운 발상을 머릿속에서 지운 티에치엔의 눈길이, 이제는 반들반들한 입술로 향했다.


"...침이나..."


그리고, 점점 내려가다가... 바지춤에서 흘긋 멈췄다.


"...아니아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마구 뺨을 때려 티에치엔은 남사스러운 생각을 머릿속에서 밀어냈다.


...아무래도 무(武)의 신은 이번에는, 이 무인으로 하여금 혈액이 아닌 다른 체액으로 얼룩진 길을 걷게 할 모양이었다.



**



"...네가 본 것이 사실이렷다?"

"네, 확실합니다!"

"호오, 그 아수날이 무림초출에게... 특이한 점은?"

"그... 현장에 있던 심판을 봤다는 점소이는 아직도 행방불명입니다. 더 자세히 들으려 했건만..."

"음. 현장에서 그 점소이만 사라졌다라..."


철선문(鐵線門)의 장문인 불굴(不屈)의 말희(沫姬)는, 고민에 빠져 특유의 금빛 머리칼을 꼬았다. 그리고 이내, 한 가지 착상에 사로잡혔다.


"...왜 그러십니까?"

"그 점소이는... 혹시 약관(弱冠: 스무 살)의 나이는 넘겼다고 하더냐?"

"어... 그건 저도 잘... 그게 중요한 정보입니까?"

"어떤 것도 놓칠 수는 없지. 서둘러 정보원을 풀어 알아보거라."

"존명!"


적두건(赤頭巾)이 사라진 자리를 눈으로 뒤쫓으며, 말희는 남몰래 입술을 핥았다.


"어떤 가능성이라도 배제할 수는 없는 법이지... 어떤 가능성이라도."



**



"그게 진짜면... 그 이름모를 초짜 녀석이 그것만으로 신공을 펼칠 만큼 강해질 수 있다는 거야?"

"아, 뭐. 제일 말이 안 되는 것 같으면서도 제일 말이 되는 가능성이긴 하죠, 문주님. 신체가 전부 내단처럼 되어서, 일부를 섭취하거나 체액을 몸에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양기(陽氣)를 상대에게 전달해줄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그 전설이 진짜라면요."

"그래도 특정 문파들의 오래된 비급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기록이잖아, 나인(裸仁). 그 옛날에 중원을 지배할 뻔했다는 천마(天魔)도... 와, 근데 소름끼치네... 식인(食人)으로 무공을 키운다니..."

"그거 아십니까, 메이(美) 문주님?"

"...뭘?"

"...먹을 필요도 없이, 그냥 살려놓고 정액만 뽑아내는 게 효율이 좋답니다."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지금 이렇게 여유 있게 있어도 됩니까? 그 풋내기 녀석은 남자 하나 잘 물어서 밥 먹고 떡 치는 것만으로 강해지고 있을 텐데?"

"조, 조용히 해! 난 그런 건 좋아하는 사람이랑만..."

"에휴, 어련하시겠죠."



**



"지팡구(日本國)라... 참, 여기 사람들은 우리 나라를 특이한 이름으로 부른다니까요."

"시라유리(白合), 다 왔어! 엥... 화산이라고 하더니, 분화구도 용암도 없는 돌산이네? 우리 화산이랑 다른 걸까?"

"...화산(火山)이 아니고, 꽃 화(花) 자를 써서 화산이에요. 그런 말 들으면 누가 크게 혼낼 거예요, 토모(友)."

"헤에~ 시라유리는 똑똑하네!"



**



"...그게 사실이라면, 극한의 음기(陰氣)를 운용하는 우리 북해빙궁(北海氷宮)에서 놓치면 안 되는 인재겠네."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야."

"여왕... 예전부터 중원 녀석들을 무너뜨릴 생각이었어. 자그마한 가능성이라도 놓칠 수는 없어. 뢰아(雷兒)... 증오스러운 자매인 너와 합종연횡(合縱聯橫)하는 굴욕이 있더라도."

"어머, 서운한 소릴. 난 오랜만에 동생 봐서 기분 좋은 걸?"

"...누가 동생이야? 부르지 말 걸 그랬어... ...꺼져."



발 없는 말이 천리 가듯, 소문은 바다 너머까지로 향하고... 그렇게 각 세력의 이목이 슬금슬금 중원을 향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