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좌우좌에게서 글라시아스와 조우했다는 보고를 받고 시간이 흐른 뒤, 수색대 대원들을 등에 태운 글라시아스가 날아오는 게 보였다. 글라시아스는 배의 갑판 대신 가까운 땅에 부드럽게 착륙해서 애들을 내려줬다. "오, 누님 왔수?" 갑판에 걸터앉아있던 페레그리누스가 손을 흔들자 글라시아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나를 응시했다.


"반갑구나. 나는 글라시아스. 용살자의 벗이자, 인류의 수호자란다."


"아, 음. 반가워."


페누나 트리톤으로 거대로봇은 나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글라시아스가 양옆으로 날개를 펼치니 워낙 커다래보여서 조금 놀랐다. 그런 내 반응을 눈치챈 글라시아스는 다소곳이 날개를 접었다.


"후후, 아이들에게 들었던 대로구나."


글라시아스는 키차이로 인한 눈높이를 고려해서인지 얘기를 시작했음에도 배에 오르지 않았다.  페레그리누스가 배에서 내려 글라시아스의 옆에 섰다.


"이쪽이 바로 내가 말했던 글라시아스 누님이야. 아~주 기품있고 아름답고 고지- 흠흠. 

그리고 누님, 여기 이 친구는 이 생존자 집단의 대장. 멋진 친구지. 그리고, 그... 우리가 들었던 소문의 그 인간이 아닌 또다른 인간이라고 하더라고."


"...다른 인간?"


글라시아스의 고개가 페레그리누스에게로 돌아가자 페레그리누스는 나를 한번 쳐다보고선 스피커를 열었다.


"얘기가 좀 복잡하게 됐수다, 누님."


페누가 내 사정을 요약해 전달해주는 한편 좌우좌와 수색대 일행이 배로 올라왔다.


"아직 방주는 찾지 못했어. 잠깐만 쉬었다가 바로 다시 출발할게."


"다리도 아플텐데 푹 쉬었다 가. 몸도 녹이고, 배도 채우고. 나는 글라시아스랑 할 얘기가 있으니, 먼저 들어가서 쉬고있어."


"속 편한 소리 하지 마, 우리 서둘러야 하는... 아니, 인간 말대로 할게. 좀 쉬는게 좋겠다."


그리고 우좌는 내 옆에 서서 내 팔을 꼬옥 끌어안았다.


"...안쉬어?"


"이게 쉬는거야. 추우니까 나 좀 뎁혀줘."


왠지 요즘 우좌가 애교부리는 빈도가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


"후후... 그 푸른 머리의 소녀는 계속 낯을 가렸었는데, 그대가 곁에 있을때만큼은 아이다운 모습을 보여주는구나."


"뭐... 어쩌다보니?"


"아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자랑스러워해도 좋다."


인자하게 후후 웃던 글라시아스가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얘기는 들었다. 참으로 얄궃은 운명이로구나... 이곳에 온 건 기억의 방주를 찾기 위함이느냐?"


"그래. 여러모로 일손이 부족해서 유전자 씨앗이나 좀 구하려고 왔지."


"페레그리누스가 말했다시피, 우리는 기억의 방주를 지키기 위해 이곳까지 날아왔단다. 물론 방주의 위치도 알고있지."


"그럼 방주 위치 알려줄 수 있어?"


알비스가 눈을 반짝였다. 글라시아스는 잠깐 고민하다가 무겁게 말을 꺼냈다.


"그 전에 묻고싶은 것이 있는데, 괜찮겠느냐?"


"상관없어."


뭘 물어볼지는 대충 예상 가니까.



"복수를 원하느냐."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


"미묘한 대답이구만. 그렇다면, 너는 복수를 이루기 위해 뭘 할 생각이지?"


"아무것도."


"아무것도? 무슨 의미지? 그 인간이 자멸하길 기다리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복수보다 더 중요한 건 우리 식구들의 안전이야. 애초에 복수할 힘은 커녕 당장의 생존도 불명확한 상황인데, 굳이 내 사적인 바램을 위해 애들을 위험속으로 몰아넣고 싶지는 않아."


"흐음, 마음에 드는 대답이군. 하지만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너에게 힘이 생긴다면 어떻게 할 거지? 그 때도 복수를 미룰건가?"


"...장담은 못하지."


"이 겉멋만 든 깡통새끼들이, 그럼 인간한테 뭘 바라는건데? 복수같은 건 부질없다는 소리나 지껄이려는 거야!? 인간은 그 잘난 사령관 자식한테 목숨을 잃을 뻔 했다고!"


좌우좌가 내 팔을 더 강하게 끌어안으며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페레그리누스는 두 손바닥을 펼쳐보여 진정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어이쿠야, 보기보다 입이 험한걸."


"물론 우리에게 그대의 복수를 부정할 자격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허나 인류를 수호한다는 사명을 안고있는 이상, 인간끼리 죽고 죽이는 일을 도울 수는 없는 입장이란다."


글라시아스는 담담하게, 하지만 슬픔이 실려있는 어조로 말했다. 


"사령관이 펙스 회장만큼 악독한 인간이라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일단 우리도 직접 보고 판단해야봐야지. 그리고... 우린 사정이 있어서 저쪽 인간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거든."


"페레그리누스."


"아 왜요, 이정도는 말해도 문제 없지 않슴까."


가볍게 한번 투덜거린 페레그리누스는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단적으로 말해서, 네가 기억의 방주에서 얻은 병력을 복수에 쓰지 않겠다는 보장이 없는 이상, 우리는 방주의 위치를 알려줄 수 없어."


아님 힘으로 알아내볼래? 페레그리누스가 반쯤 농담조로 던진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상대가 악인이라면 모를까, 정의를 위해 싸우는 애들이랑 척 질 생각은 없어."


"...이래도 우릴 정의라고 불러주는구나. 위선자 취급받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힘이 되어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뭐, 그렇다고 무조건 저쪽 편을 들거란 소린 아니야. 저쪽이 널 괴롭힌다면 우리가 막아주겠어. 이른바 중립이란거지."


페레그리누스와 글라시아스가 날개를 펼치고 허공에 몸을 띄웠다. 보아하니 딱히 날아다니는데 날개짓할 필요는 없는 모양이었다. 로봇이니까.


"만나서 즐거웠어 친구. 오늘은 이만 가볼게. 섬 청소가 아직 안끝났거든."


"잠깐만, 벌써 가려고요? 글라시아스 씨! 수리는 받고 가요! 아까 만져보니까 동체에 이상이 있던데!"


"페레그리누스,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리오네트 부대와의 교전 중 입었던 손상이 남아있잖습니까."


그렘린과 와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둘은 결정을 번복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신경써주어 고맙구나. 하지만 지금은 마음만 받도록 하마. 또 보자꾸나, 인간이여."


"통신 포트 열어놨으니까 볼 일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해!"


페레그리누스가 팔콘폼으로 변신한 뒤 내륙으로 날아가고, 글라시아스도 그를 뒤쫓았다. 그들이 빠른 속도로 시야에서 벗어나자 와쳐가 말을 걸었다.


"추적할까요? 저들의 행동 반경 내에 방주가 위치해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됐어, 알려주기 싫은 모양인데 쟤들도 경계는 하겠지. 들키지 않게 미행하기도 힘들고. 우린 우리끼리 방주를 찾아보자."


"인간.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네? 아쉬워할줄 알았는데."


"...어느정도는 예상했거든."


애초에 쟤들은 에바의 부탁을 받아 사령관놈을 도우러 온 거였으니까. 심지어 므네모시네도 이미 에바한테 언질을 받은 상태고.


사령관은 나에게 누명을 씌우고 투옥시킨다는 1번의 악행을 저질렀음에도 수많은 바이오로이드를 거둬들여 지켜주고 철충과 맞서싸웠다는 99번의 선행이 남아있다. 쟤들 입장에선 그리 악인으로 보이진  않겠지, 회장에 비하면 선녀기도 하고. 시발 생각하니까 열받네, 그렇게 선하신 양반이 왜 나한테만 지랄인건데.


결국은 원점이군. 동료가 늘어나지도 않았고 방주도 못찾았다. 오르카호가 오기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을텐데. 아무래도 아무런 수확도 못건지고 나가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 같다.


***


"흐음, 오늘은 별 탈 없이 지나갈 것 같네."


대규모 함대가 정박할 수 있을 정도로 큰 항구의 근처. 니키가 오르카호가 오지 않는지 감시하기 위해 자리잡은 곳은 항구를 포함해 인근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지만 반대로 항구쪽에선 잘 눈에 안들어오는 언덕 위였다.


하루종일 바다를 쳐다봐도 배는 코빼기도 안보이고 유빙만 유유히 떠다녔다. 딱히 낚시를 해본 적은 없지만 바다가 가까웠다면 낚시대라도 늘어뜨릴 수 있었을텐데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니키가 한가함을 주체하지못해 하품을 할 무렵 뒤에서 드론이 슈웅 날아왔다.


"곧 해가 질테니 슬슬 야영 준비를 하세. 눈에 띄지 않는 작은 굴을 찾았으니 그 안에 텐트를 치지. 내일 아침까지는 내가 망을 보고 있겠네."


"오, 드디어 교대할 시간인가? 하루종일 한 자리에만 머무르려니 몸이 엄청 뻐근했는데 이제야 좀 살겠는걸."


니키는 간이 의자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을 했다. 어깨를 움직여 팔을 위로 쭉 뻗었다 당기고, 목을 몇바퀴 돌리고선 재차 말했다


"기억의 방주는 아직 발견 못했대?"


"유감스럽게도 그렇다고 하더군."


"그럼 퇴근은 물건너갔군. 맡은 임무를 대충 할 생각은 없지만, 이런 엘리트 요원을 고작 망보기 역할로 부려먹다니. 대장도 유례없는 호사를 누리는걸."


"나쁘게 생각하지 말게나. 얼마나 오랫동안 감시해야 될 지도 모르는데, 이 환경에서 계속 외근하려면 자네정도로 튼튼해야 한단 말이지."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도 알고있어. 조사팀 쪽엔 클로버가 따라갔는데 나까지 가는건 과잉전력이기도 하고..."


니키는 잠시 입을 다물고 석양이 지는 바다를 한번 흘겨보고선 다시 드론을 쳐다봤다.


"만약 우리가 볼 일 다보기 전에 오르카호가 와버린다면, 들키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


"힘들걸세. 설령 놈들이 섬 반대편에 정박한다 해도 말일세. 공군이나 정찰 드론을 띄워 금새 군도 전체를 스캔할 테니까, 아무래도 섬에서 나가려는 배 같은건 금방 눈에 띄겠지."


"쯧, 그럼 충돌은 불가피하단거군..."


"들킨다면 인간이 없는 펙스 난민 그룹인척 변명해서 넘어가려는 게 작전일세."


"저번에 포세이돈 함대 앞에서 비슷한 방법 썼다가 망하지 않았던가?"


"감마는 오메가한테 대장에 관한 정보를 사전에 공유받았던 모양이지만 오르카는 아닐걸세. 우리 대장이 여기있다는 사실만 모른다면 별 탈 없이 넘어갈 수 있을거라고 보네."


"계획대로 된다면 좋겠지만, 과연 어떻게 될런지..."


니키는 한 손으로 중절모를 벗고 반대쪽 손으로 뒷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그러고보니 낮에 대장이 만났다던 AGS들 말이야. 그 사령관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했었다지. 만약 오르카에 가서 우리 대장이 여기 와있다고 다 불어버리면 큰일이잖아. 늦기전에 손을 써둬야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으음, 나는 잘 모르겠구만. 그들 스스로는 중립이라고 했지만... 우리가 오르카호랑 충돌하게 된다면 어떤 변수로 작용하게 될 지 모르겠군."


정보가 너무 부족하니 말일세. 드론의 말에 니키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


스발바르 제도에서 가장 높은 설산의 정상. 거대한 새 로봇과, 그보다 더 큰 드래곤 로봇이 이곳에 날아 올라왔다. 이 장소는 철충도 마리오네트도 없어 페레그리누스와 글라시아스가 편히 쉴 수 있는 장소였다. 늘 섬 구석구석을 감시하던 페레그리누스는 평소랑은 달리 대장 일행이 정박한 곶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페레그리누스, 잠시 괜찮겠느냐."


글라시아스가 부드럽게 부르자 페레그리누스가 몸을 돌렸다.


"얘기를 나눌 필요가 있어보이는구나."


"...티가 났수?"


잠깐 머쓱해하던 페레그리누스는 이내 팔콘폼에서 하피폼으로 변신해 머리를 긁적이는 시늉을 했다. 로봇이라 머리가 가렵지도 않고, 손으로 긁어봤자 딱히 시원하지도 않지만 태생이 연극용 로봇인만큼 무의식적으로 인간의 행동을 모방하기 일쑤였다.


"예, 뭐... 솔직히 조금, 아니 많이 심란합니다. 안그래도 철충에 펙스에 골치아픈데 딱 둘 남은 인간이 서로를 못잡아먹어 안달이라니. 일단은 중립을 표방했지만 우리가 언제까지 이럴수는 없잖수. 결국은 한 쪽을 선택해야 할 거고, 한 인간을 위해 싸우는 순간 다른 한 인간을 공격하게 될 거 아니요. 계속 둘 사이를 중재하고 다닐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방관할 수도 없고. 거 누구 편을 들어줘야 할 지..."


인류를 지키기 위해선 아이러니하게도 지구상에 남은 인류의 절반을 없에야만 하는 꼴이었다. 과연 이것이 인류의 수호를 위한 정답인가? 두 인간이 한 세력에 속해있었다면 이런 선택을 강요받을 일이 없었을테지만, 그렇게 되기엔 너무 멀리 온 것이 분명했다. 제 3자의 눈으로 봐도 말이다. 한 세력만 남는 경우라면 한쪽이 괴멸당하던가, 아니면 과거 펙스가 그랬듯이 한쪽을 일방적으로 합병하던가 이 두 개 뿐이었다.


"에바 그 자가 먼저 와서 부탁했으니 사령관의 편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안드느냐?"


"우리가 뭐 선금 받고 일하는 것도 아니잖수. 그 땐 그 여자 표정이 워낙 절박해보여서 수락했지만... 그 대상이 악인이라면 재고해봐야지. 만약 레모네이드가 와서 즙짜면서 지 회장편 들어달라고 싹싹 빌어도 안들어줄건데.

낮에는 딱딱하게 말하긴 했지만, 솔직히 난 그 친구 마음에 듭니다. 거짓말하는것 같지도 않고. 이 망한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로 시작해 이렇게까지 세력 키우고 살아남은 건 대단한 업적이요. 레모네이드 둘을 눈앞에 두고 몸 성히 빠져나오다니, 소설로 써도 되겠던데."


"허면 사령관이라는 자는 어찌 생각하느냐?"


"펙스만큼은 아니더라도 대규모 세력을 이끌고 철충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고있다는 점에선 인류의 희망이라고 부르기엔 손색이 없겠지. 인품은 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회장만큼 악독한 건 아닌 거 같고... 거 여자한텐 신사인 모양인데, 같은 인간한테는 왜 거 참... 에휴."


페레그리누스는 허리에 주먹을 얹고 고개를 저었다. 아예 대놓고 펙스 회장급의 인간말종이었다면 고민할 것도 없었는데. 두번째 인간이 당한 일은 유감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령관을 공격하는 걸 도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찌됐든 그 한가지 결점만 빼고 본다면 사령관도 좋은 인간, 훌륭한 사람이었으니까.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면 그랬다. 허나 그럼에도 속으로는 '아니 그치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결국 다른 인간을 없애려는 인간이 남아있어선...'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마음의 저울은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진 모양이구나. 하지만 서둘러서는 안된다. 정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그릇된 선택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심사숙고해야만 한단다. 나는 네가 감성에 휩쓸려 섣부른 판단을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란다."


"압니다. 잘 안다구요. 저쪽 사령관도 우리 눈으로 직접 보고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거죠."


"아니, 그게 아니다. 내가 말한 건 우리가 먼저 만났던 그 인간을 말하는 거였단다."


"...그게 무슨 뜻이요?"


"분명히 그는 멸망 전의 인류와 비교할 것도 없이 선한 인물로 보였단다. 허나 우리가 봤던 건 그의 이성적인 면. 그의 감성적인 면은 아직 보질 못했지. 사령관이라는 역린과 마주하게 됐을 때 그가 어떻게 나올지, 그걸 지켜봐야 하지 않겠느냐?"


글라시아스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페레그리누스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뭐요? 아니 그럼, 그 친구가 사령관놈을 쿨하게 용서해주길 기대하는 거요? 아님 항복할테니 동료들은 건들지 말아달라는 영웅적인 희생이라도 하길 바라시오?"


"그런 것이 아니다.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그의 모든 면을 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을거라는 얘기지."


"답답하네, 그 때를 기다렸다간 너무 늦는거 아니요. 둘이 충돌하게 된다면 둘 중 하나는 죽을지도 모른다고요, 높은 확률로 우리가 먼저 만난 그 인간이. 만약 동귀어진이라도 했다간 진짜로 인류멸망이요. 누님, 너무 고지식하게 굴지 맙시다."


"나도 이러고싶지는 않단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신중해질 수 밖에 없구나."


"그 친구가 사령관을 보고 눈 돌아가서 죽여버릴테다~ 하면 내 생각이 바뀔거라고 보쇼?"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너에게 달려있지 않느냐?"


"...쩝, 그건 그렇지."


페레그리누스는 바닥에 털썩 앉아 턱을 괬다. 자신이 만났던 그 인간이 복수귀가 되면 어떤 모습일까 잠시 상상하다가 글라시아스를 불렀다.


"누님은 어떡할거요? 그 친구가 만약... 감성에 이성이 잡아먹힌다던가 하면."


"나는... 두번다시 인간의 목숨을 앗아가는 데에 이 힘을 휘두르고 싶지 않단다."


글라시아스는 과거 비스마르크 회장의 명령으로 연합전쟁에 참가해 인류의 동족상잔에 가담한 적이 있었고, 이는 그녀가 품고있는 큰 슬픈 기억 중 하나였다. 페레그리누스도 이를 잘 알고있었기에 더 묻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돌리고 스피커에서 긴 한숨 소리를 낼 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인류를 지킨다는 건 힘든 일이구만."



본격 밀당하는 로봇들. 쉽게 동료가 되어주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