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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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라붕씨...?!"


갑작스럽게 등장한 의외의 인물에 적잖게 놀란 사령관은 헐레벌떡 모니터의 전원을 끄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안녕하세요?"


"으, 응..!"


그렇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지나서 다시 만난 두 남자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어색한 인사를 주고 받았다.


...호오...



아스날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두 남자를 번갈아보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선약이 있던 모양이구나.



옆자리에 앉아있던 칸도 자연스럽게 퇴장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희도 여기 있었구나. 회의중이었어?"



의외라는 표정으로 묻는 라붕이에게 아스널은 별거 아니라는 듯 너스레를 떨며 미소지었다.


아니. 그냥 사령관 얼굴좀 보러 들른것 뿐이다. 너도 같은 이유로 여기 온거겠지?



"그...렇지?"


그렇다는군. 사령관.


............


안 그래도 우린 슬슬 가려고 했으니까 말이야. 둘이서 재밌게 시간들 보내라.


라붕아. 다음에도 우리 숙소에 놀러와라. 모두들 기다리고 있으니까.

특히 에밀리도 널 또 보고싶다고 하더군.



"응? 어... 알았어. 그런데 너희ㄷ..."


우리 부하들도 너랑 또 한잔하고 싶다고 하니까, 기왕 가는거 우리쪽도 들르도록 해라. 기다릴테니까.



간략하게 인사를 마친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유유히 사령관실을 나가버렸고, 그 덕에 시끌벅적했던 사령관실은 순식간에 고요함에 휩싸였다.




...................




결국 보다못한 사령관이 먼저 운을 떼고 나서야 멈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우선은 앉지 그래? 서 있지만 말고."


사령관이 자연스럽게 경로를 터준 덕에 다행이 하루 종일 애매하게 서서 이야기를 나눌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실례합니다."


"어, 응."



"........."

"........."



미치겠네 진짜.


"...라붕씨?"


"아 넵."


"..........."


두 남자의 대화는 3마디 이상을 넘기질 못하고 있었다.


'이럴줄 알았으면 키르케한테 적당한 대화소재 같은거라도 조언받고 올걸 그랬나...'


이것저것 충고해준 키르케 덕분에 여기까지 오는것 정도는 어떻게든 해냈지만, 정작 어떤 식으로 이 사람과 대화를 해야할지 아직은 생각해 놓은게 없었다는걸 여기 들어오고 나서야 깨달았다.


"저... 사령관님."


"..! 응!"


사령관도 갑작스러운 만남으로 인해 할말을 쥐어짜내느라 두뇌를 풀가동하고 있던 상황이기에 차라리 먼저 말을 꺼내준 라붕이에게 오히려 감사할 지경이었다.


"저 들어오자마자 급하게 패널 전원 꺼버리시던데, 뭐 하시던 중이였어요?"


"음? 아... 다른건 아니고, 잠시 바깥에서 임무수행 중이던 알바트로스 일행이랑 화상통화 중이었어."


"그럼, 아까 저 오자마자 급하게 숨겼던게 얘네랑 대화하던걸 감추려고 했던거에요?"


"하하하... 딱히 숨길 생각은 아니었는데, 하도 놀라서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꺼버렸다고 해야하나? 내가 얘네들을 라붕씨에게 숨길 이유도 없고."


머쓱하게 웃으며 패널의 모니터를 라붕이를 향하고서 다시 패널의 전원을 켜자, 사령관은 물론 이제는 라붕이에게도 친숙한 얼굴이 여럿 보이기 시작했다.



오랜만이군 김라붕.



"오오, 최강 오랜만."



격납고에서 강렬한 임팩트를 선사해주었던 알바트로스와 또 다시 만난 라붕이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반갑게 인사했다.



"흐흐흐... 오늘은 하찮은 도전자들이 귀찮게 안굴었어?"


...그 이야기는 그만하도록 하지.



기계답게 표정만큼은 변화가 없었으나 떨떠름한 목소리는 어지간히도 그 때의 기억이 부끄러웠는지 슬쩍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당신과 정식으로 인사하는군요.



패널의 구석에 보긴 했으나 정식으로 인사는 나누지 못한, 또 하나의 익숙한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응. 정식으로 인사 주고받는건 이번이 처음이네. 로크."


뭐... 모 최강께서 제가 나오자마자 바로 날려버리는 바람에 인사할 기회를 놓쳤으니까요.


........


아무튼, 이제라도 인사를 나누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르카의 두 번째 인간, 김라붕.



"킥킥... 그래. 나도 반가워. 사실 그 때 어떻게든 너한테 말을 걸어보고는 싶었는데... 니 자기장이 알바트로스한테 썰려나가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쳐버렸네."


아니, 그건 사령관이 시켜ㅅ...


어이어이! 설마 벌써 우리를 잊은건 아니겠지?


간만에 너를 보는구나. 식사는 잘 챙겨먹었느냐.


으하하하하!!! 이 사고뭉치 녀석! 푹 자고 일어났느냐!



"키킥... 일어나긴 무슨. 지금 해떨어져가는데."


음!!! 그렇다면 곧 저녁식사 시간이로군!


너 처럼 중환자일수록 삼시세끼 챙겨먹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러니 이 화면을 보고있는 너희들! 절대로 밥은 거르지 마라! 잠도 하루에 최소 7시간 이상은 자야..!


어어어..! 아직 한참 말하고 있으니까 비켜라!


HI~! 라붕씨~! 잘 지내고 있나용~?!



한창 신나게 떠들던 골타리온의 얼굴을 옆으로 밀어내며 유쾌한 목소리로 인사하는 알프레드에게 마찬가지로 웃으며 답해주었다.



"킥킥... 그래, 잘 지낸다. ...근데 너 언제 그렇게 커졌냐?"


아아... 그러고보니 당신에게 이 모습을 보여드린건 이번이 처음이군요!

어떠십니까! 저의 이 우람하고 듬직하면서도 아름다운 보디ㄱ...

어어어..! 밀지좀 마십쇼! 가뜩이나 자리도 좁은데!


어이 친구! 예전에 격납고 견학 갔다온 이후로 한 번도 안 찾아 왔더라?! 솔직히 좀 서운하거든?!


나도 동감이다! 이제부터 함께 마왕군을 재건하여 새로운 세상을 지배할 동료이거늘! 어떻게 한번도 코빼기를 안비추는 거냐!

니 연봉계약서에 먼지만 쌓여가지 않느냐!



"어어... 그게, 너네 나오자마자 알바트로스한테 최강펀치 맞고 널부러져서 한동안 잊고 있었지."


..........


푸훕..! 확실히... 죄다 나오자마자 그대로 뻗어버려서 누워만 있었죠~?!ㅋㅋㅋㅋㅋㅋ



"흐흐흐... 농담이야 농담~ 다 기억하지! 그 난리법석을 떨었는데 니들을 어떻게 잊냐."


.....하아...


후훗... 너무 마음쓰지 말거라. 그대가 입원해 있는 병동과 우리가 상주하는 격납고는 거리가 상대적으로 많이 떨어져 있으니까. 그러니 다시 얼굴을 맞대고 재회하는건 건강해 지고나서 해도 늦지 않단다.



"....응. 고마워. 빙룡 누나."


저 또한 당신과의 재회를 기대중입니다. 당신과는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요. 그러니 빠른 시일내로 건강을 회복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그래! 다음에도 내 쪽에서 찾아갈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후후후...! 요양하는 동안 원하는 근로조건과 희망연봉을 생각해 놓도록 해라! 그리고 겸사겸사 인감 파놓는것도 잊지말고!


골타리온씨... 그거 아직도 포기 안한겁니까?


포기는 무슨! 저런 탐나는 인재를 내가 왜 포기를 한다는거냐!


아~ 그거? 라붕이를 마왕군의 비서로 채용한다는 계획?


흐음... 함께 하는것은 좋다만, 너무 무리하지는 말거라.


.....김라붕.



묵묵히 모두의 대화를 지켜보던 알바트로스는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응. 알바트로스."


본 기체 또한 너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날을 고대하고 있다.



"........."


우린, 널 포기할 생각이 없다.



"........응."


그러니, 너는 아무것도 신경쓰지마라. 그저 회복만을 우선시 여기고, 무사히 돌아와라. 그 외에는... 우리가 전부 짊어질테니까.



"....그래. 고맙다."


..........


자~ 그럼! 우린 슬슬 이동해야 해서 말이야! 아쉽지만 오늘의 인사는 여기까지 하는걸로!


언제 한번 문안 인사라도 하러 가도록 하마. 페레그리누스와 알바트로스, 로크는 몸이 커서 병실로 들어갈 수 없지만 우리들은 비교적 자유로우니까.


이래뵈도 난 소완 스승에게 요리를 전수받은 몸! 그 때는 널 위한 산해진미를 잔뜩 준비해서 쳐들어 가겠다! 


뭐... 그렇군요. 당신이 이전에 저희쪽으로 먼저 와주셨으니, 다음엔 저희가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저희들의 크기가 크기인지라 장소가 야외일 경우의 이야기지만요.


그런 의미에서! 그때는... 잘 부탁 드려요~?



"흐흐흐... 그래그래. 기다리고 있을게. 그럼, 너희도 몸조심하는거 잊지말고!"



(-)



마지막으로 서로 한 번씩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서 화상통화를 종료한 라붕이는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사령관님."


".....응."


멍하니 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사령관을 향해 나직이 물었다.


"저 대충 얼마나 남았어요?"


"........."


"이미 닥터한테 들으셨죠? 저한테 남은 시간이 대략 어느 정도인지."


"...라붕씨."


"알려주면 안될까요?"


"..........."


무어라 대답할 거리를 찾지 못한 사령관은 결국 때가 왔다는 것을 직감하고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보름 이하."


"........"


"최근에 닥터가 계산한 남은 시간이야. 그리고 그 이후로 시간이 좀 지났으니까, 아마... 열흘 안팎이겠지."


"흐음.... 그래요."


어찌보면 참담한 사형선고임에도 정작 본인은 대수롭지 않게 긍정할 뿐이었다.


"제 신체 재건은, 역시 가망이 없었나보네요."


"....알고 있었던거야?"


"뭐... 애들 얼굴만 봐도 상황이 안좋게 흘러간다는건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거든요. 그리고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아니까"


의자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면서 몸을 간단하게 풀고서 주전자의 물을 컵에 따르며 사령관에게 질문했다.


"이제 와서 묻긴 좀 뭐한데... 막힌 이유가 뭐였데요?"


".......라붕씨의 신체가 오리진 더스트를 받아들일 수 없는 체질이라는 결과가 나왔어."


"............"


"부작용을 감내하고서라도 신체재건을 강행하는 시뮬레이션도 수도 없이 해보았지만, 결과는 라붕씨의 영구적인 뇌사상태 혹은 말단 신경계 괴사로 인한 사망 뿐이었어. 제일 기본적인 오리진 더스트 사용이 불가능 해지면서... 모든 가능성이 사라져 버렸거든."


"호오..."


"오리진 더스트를 사용하는 방법 외에 다른 수단을 어떻게든 적용해 보려고는 했지만... 라붕씨의 신경계를 오리진 더스트로 이루어진 금속 신경계로 재건하지 않으면 휩노스 병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으니까."


"냉장고에 별게 다 있노."


"하지만..! 아직 희망을 버릴 정도까진 아냐! 닥터가 가능성이 높은 해결방법을 찾았거든! 라붕씨의 체질에 맞는 오리진 더스트가 없다면, 아예 우리가 새로 만들면 되는거니까! 그러니까...!"


"와 씨... 이거 아까전에 키르케가 물처럼 마시던 맥주잖아. 엄청 맛나던데. 땡잡았농ㅎㅎ"


"......???"


고개 숙이고 이 악물고서 쓰라린 현실을 고백하던 사령관은 아랑곳 하지않고, 당사자는 어느새 사령관실 구석에 비치되어 있는 냉장고에 머리를 집어놓고서 주머니에 하나씩 술병을 긴빠이 치고 있었다.


"저기.... 라붕씨...?"


"예아!"


"...?! 어... 내 말 잘 듣고 있는거 맞지...?"


"사령관님. 의외로 술 좋아하나봐요? 잘 못먹는 타입인줄 알았는데."


"...라붕씨. 진지하게 들어줘. 지금 닥터가 라붕씨를..."


"하아아... 탄산 맥주를 뚜껑 따놓고 냉장실 구석에 꼴아박은겁니까? 믿을 수 없을 만큼 돌아버린 사람인지..."



(쾅!!!)



"라붕씨!!!"


결국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여버린 사령관은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치고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예, 예아...?"


"지금 그런 장난칠 때가 아니잖아! 내가 지금 어떤 심정으로 당신한테 이 이야기를 하는건지 알긴 하는거야?!"


"........"


그제서야 자신의 뒤쪽으로 뒤를 돌아보니 원작에선 절대로 보여주지 않았고 앞으로도 볼 일 없었을 모습으로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는 사령관이 있었다.


"난 당신이 지금 당장이라도 또 쓰러질까봐 격정되서 미칠것만 같다고. 그런데 왜 당사자는 그렇게 만사태평 인건데!"


"....사령관님."


"그 와중에 라붕씨는 내가 하는 말은 제대로 듣지도 않고 냉장고 앞에서 장난이나 치고! 도대체 왜 그러는거야?! 나는 라붕씨가 이 소식을 듣고 무너져 내리지는 않을까 엄청 무서웠는데... 라붕씨는 내가 지금 장난치는 걸로 보여?!"


"설마요. 당신이 그런걸로 장난 같은걸 칠 리가 없죠."


"그럼 왜 그런식으로...!"


"사령관님."


"...!"


감정이 격해진 사령관의 말을 잠시 끊어낸 라붕이는 방금 전에 꺼낸 술병을 흔들며 능청스럽게 미소지었다.


"술, 한잔할까요?"


"...뭐?"


"이렇게나 탐나고 좋은 술들이 있는데, 지금 아니면 언제 마시겠어요. 안 그래요?"


키르케에게 배운 말투와 어조로 여유롭게 제안을 건내자 어안이 벙벙해진 사령관은 말을 더듬으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니, 지금 라붕씨 몸 상태가 어떤 상황인데 술 타령을 하는거야... 지금은 그럴때가..."


"그런 걱정할 거 뭐 있노."


"...어?"


"나는 예전부터 사령관님이랑 술 마시고 싶었는데, 사령관님은 저랑 마시기 싫어요? 하아아... 그건 그거대로 괘씸하거든요?"


"저, 저기... 난 그런 의미로 말한게 아니라..."


"동의하지?"


".........."


어거지로 암묵적인 동의를 받아낸 라붕이는 제일 비싸보이는 술병을 직감으로 골라내어 병뚜껑을 뜯고서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맛좀 봐야지."


"그... 라붕ㅆ"


"앉아요."


먼저 자리에 앉아 선반에서 꺼내온 두 잔의 술잔중 하나를 사령관에게 건내며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앉아요. 당신이 나에 대해서 여태것 궁금해 했던 것들, 전부 말 해줄테니까."



































...그대에게는 몇번을 감사해도 모자랄 지경이구나.



창밖에 떠 있는 달을 손으로 천천히 쓰다듬으며 진심으로 감사를 건넸다.


첩으로서는, 도저히 저 아이의 마음을 구원해 줄 수 없었으니까.


아니, 오히려 첩과 함께 있는것 만으로도... 그 아이를 괴롭게 하는게 전부였다.



처음 만나서 함께 아침 식사를 한 날도, 우연히 길을 지나다가 마주쳐서 사소한 인사를 주고 받은 날도... 애써서 무심한 척 하는 그를 배려하기 위해 자신 또한 그저 웃으며 대해주었다.

그것 말고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으니까.


그런 라붕이가 품고 있던 외로움을, 네가 채워주었더구나. 그대의 옆에서 드디어 진심으로 행복한 미소를 짓는걸 보고, 깨달았느니라.













천아야.



..........



히루메의 등 뒤로 한 사람의 그림자가 서서히 달빛을 받으며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쩐지, 핸드폰 전원 꺼놓고 어딜 싸돌아다니나 했더니만,

걔 지금 사령관이랑 같이 있는거지?


그래. 그 아이는 지금 그이와 함께 있느니라.

어떠냐? 지금 들어가면 만날 수 있을 거란다.


...아냐. 딱히 상관없어.

그리고, 가끔은 남자들끼리 노는 날도 있어야지~ 거기에 눈치없이 끼어드면 쓰나.


...........



딱히 미련없다는 듯 시선을 창문으로 향하며 보름달로 시선을 돌리는 천아의 손에는 작은 봉투가 하나 들려있었다.


천아야. 손에 들고 있는 그건...


아, 이거? 별거없어. 그냥 걔가 좋아하는 군것질거리 몇개 사온거야.

걔랑 이거 먹으면서 대충 노가리 까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한발 늦었네.


후훗... 그래.


...........



슬며시 자신의 옆으로 다가와 마찬가지로 창 밖을 바라보던 히루메에게 넌지시 물었다.


...언제부터 알았어?


무엇을 말이냐.


걔가 좋아했던 사람이 너....


........


정확히는, 너와 같은 히루메 개체라는거.


...........


알고 있었지? 그것도 오래전부터. 언제부터 알았던거야?


....언제부터...인가.



처음으로 그와 만나서 인사를 나누었을 때,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던 그의 모습과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져있는 반지를 멍하니 바라보던 그 눈빛이 떠올렸다.


사실, 특별한 확신같은걸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느니라. 그냥... 넌지시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지.


그래도 한가지 확실한건, 그 아이가 첩으로 인해서 괴로워 했다는것. 그것 하나 만큼은 알수 있었으니까.


............


다가가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힘들게 하고 말았느니라. 그래서, 그저 멀리 떨어져서 그 아이가 적응해 나가는걸 그이와 지켜볼 수밖엔 없었단다.


그대도 알다시피, 그 아이는 그이를 지나치게 무서워 했으니까.


에휴... 그러게 말이야. 뭘 그렇게 쫄보마냥 겁부터 집어먹고 헛짓거리를 한건지.

여기에는, 그 바보새끼 감싸주려는 애들 밖에 없는 곳인데.


후후~ 내 말이 그 말이니라. 첩이 오르카에 처음 숨어들어 왔을 때도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어, 그러고 보니까 너도 걔랑 비슷했다면서? 주변사람 죄다 의심하고, 툭하면 겁먹던거.


아... 하하... 그런... 적도 있긴 했지. 하지만 라붕이만큼 중증은 아니었느니라.

뭐, 어쨌든간에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 만큼, 어느 정도는 그 아이의 심정이 이해가 갔던 것은 사실이지만.


키킥. 하여간, 끼리끼리 논다더니.


후후후...



히루메도 이전의 서투르던 바보의 모습과 지금의 완전 달라진 그의 모습이 떠오르자 도무지 매치가 되질 않는 지금의 광경이 은근 웃기긴 했나보다.


그리고, 애초에 나 하나만 고생한 것도 아닌데 뭘. 다른 애들도 걔 챙기느라 엄청 고생 많이 했잖아.

특히 넌 말할 것도 없고.


.......


너야말로 괜히 눈치볼 필요 없어. 그 바보가 너와는 다른 히루메와 어떤 사이였든간에, 넌 그냥 평소 하던대로 걔랑 잘 지내면 되는거니까.


걔도, 분명히 그렇게 해주길 원할거야.


....그래. 그 아이라면 분명 그렇게 말해주겠지.



챙겨온 간식 봉투에서 과자 하나를 꺼내 포장지를 벗기며 무덤덤하게 질문했다.


하던건 잘 되가? 걔 몰래 "히루메"를 찾는 일.


...현재로서는 긍정적인 소식은 없구나. 이미 이 일대는 수십번 이상 탐색을 해보았지만... 그럴싸한 흔적 조차도 찾을 수 없었단다.


.....그래.



AGS수색대를 필두로 극비리에 전개되고 있는 수색작전을 알고 있는 극소수의 인원중 하나였던 천아는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답변을 듣고서 씁쓸하게 대답하는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것이 없었다.


...없는걸까? 정말로.


............


정말로... 그 애가 더는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라면, 그 때는 정말로 어떻게 해야할까.


.............


어떻게 해야 할까... 라고 하였느냐.


응?


결과가 어찌 되든간에, 우리가 해야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지 않느냐.


.........


설령, 정말로 "히루메"를 찾지 못하게 되더라도, 우린 끝까지 그 아이의 곁에서 함께 살아갈 거니까.


지나간 과거를 되돌리는 방법따윈 없다. 사라진 사람도, 과거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더 이상 옆에 있지 않은 사람도... 이제는 두 번 다시 되돌아 오지 않을테니까.


.............


그렇다면... 그 아이의 다음 페이지를 우리가 채워주면 될 일이다.

"첫 번째" 페이지를 되찾아 줄수 없다면, "두 번째" 페이지 부터는 우리가 옆에서 함께 그려주자꾸나.

그이와 나, 그리고 천아와 모두가, 다 함께. 


.........


응. 전부 니 말대로네.


그 멍청이가 흘려보낸 시간 만큼, 우리가 다시 채워주면 그만이니까.



간식을 쥐고있는 쪽의 반대쪽 손에 쥐고있던 핸드폰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그 바보가 그토록 좋아했던 "라스트 오리진" 이라는 것이 솔직히 어떤 것인지는 지금도 여전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단순한 여흥에 불과할지도 모를 그 게임이, 그 애한테 있어서는 그 무엇보다 소중했던 것이라는 것 쯤은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나는 "라스트 오리진"속의 캐릭터가 아닌 나 자신의 방식대로 채워줄 것이다. 나는 게임이 아닌, "진짜"니까.


뭐... 난 일일이 배려해주는 타입과는 거리가 머니까. 그냥 늘 하던대로, 평소대로 들이대면서 잔뜩 괴롭혀 줄거지만~!



틈만나면 귀찮게 하고, 옆에서 시비걸고, 욕하면서 때려주고... 심심할 틈 없는 정신 사나운 일상을 함께 보내자.

그러면, 그 애도 반드시 웃어줄 테니까.






































재밌게 봤으면 개추랑 댓글좀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