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스발바르 제도에 도착하고나서 하루가 지났다. 지금은 이른 새벽이기에 자고있는 니키를 대신해 드론이 망을 보는 중이었다. 우좌는 다른 애들이랑 잘 지내고있을까 궁금해하던 도중, 아무것도 없던 수평선에 회색빛 물체가 줄지어 모습을 드러내자 드론은 곧장 렌즈의 조리개를 최대한 좁혔다.


군함이 한 척도 아닌 여러 척이, 다시말해 대함대가 접근하고 있었다. 선수에 새겨진 호라이즌의 문양으로 저것이 오르카 저항군이라 자칭하는 이들임을 알 수 있었다. 드론은 냅다 동굴 구석에 세워진 텐트로 들어갔다.


"니키! 당장 일어나게!"


"으음...?"


드론이 니키의 머리에 제 몸을 콩콩 부딪히면서 스피커 음량을 높이자 그녀는 안일어나고 배길수가 없었다.


니키는 드론이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말을 들으며 잠기운을 몰아낸 뒤 목을 쭉 내밀어 바깥을 살펴봤다. "벌써 왔나..." 상황파악을 마친 그녀는 얼굴을 살짝 찡그린채 무전기를 꺼내들었다.


"본대 나와라, 여기는 니키 트레이시. 오르카 함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반복한다, 스발바르 제도로 접근중인 오르카 함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


"-라는데요, 대장님..."


식은땀이 삐질 흐르는 유미가 내 안색을 살피면서 말했다. 너무 이르잖아, 여러모로... 


"수색팀 쪽은?"


"그게, 아직 못찾았다고 하는데요...?"


고작 하루 앞지른 걸로는 부족했었나... 설령 이제와서 방주를 찾아냈다 하더라도 가서 뭘 건져오기엔 너무 늦는다. 우리 입장에선 오르카 세력과 마주치지 않는 게 최선이다. 므네모시네는 얼굴도 못봤지만 어쩔 수 없지.


"방주를 포기하고 철수한다. 전원 배로 돌아오라고 해."


"아, 예! 지금 전달할게요!"


"포츈, 애들이 돌아오는 대로 출항할 수 있도록 준비해줘. 놈들이 오는 반대쪽 방향으로 가자."


"그렇다면 서쪽이구나. 맡겨만 주는 거거든?"


포츈이 배를 조작하는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오르카호 눈에 띌까 전전긍긍해하며 숨어다녀야 하는거지? 영원히? 우리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땅이 있을까?


"저, 대장님. 와쳐는 바로 돌아올 수 있는데, 수색팀은 섬 안 깊숙이 들어가서 돌아오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하는데요...?"


유미의 목소리가 멋대로 울적해지려던 내 정신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줬다.


"드론, 니키. 아직 통화 연결돼있지? 저쪽이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아?"


[함대는 섬에서 거리를 두고, 대신 작은 보트 여러대를 보냈어. 십중팔구 정찰대겠지. 와쳐 모델로 보이는 정찰기도 여러대 띄워서 사방으로 날려보냈어.]


[오르카호도 확실하게 와있군. 칙칙한 군함 한가운데에 밝게 도색된 잠수함이 떡하니 올라와있으니 확 눈에 띄는구만.]


[선발대가 상륙했어. 보트에서 바이오로이드가 잔뜩 내리고있네. 아, 방금 오르카호가 도로 잠수했어. 안전이 보장되기 전까진 물 밑에 숨어있을 생각인가봐.]


"누군가 아는 얼굴이라도 있어?"


[몰라. 멀어서 얼굴은 안보여.]


[스틸라인과 발할라, 그리고 시티가드 바이오로이드들로 이루어져 있군.]


[뭐야, 아저씨는 보이는거야?]


[최대한 줌인하니 조금은 알아볼 수 있겠구만. 선발대의 절반은 바로 섬 안으로 들어갔고, 나머지 반은... 교두보를 확보하려는 모양이군. 벌써 임시 기지도 세우기 시작했네.]


"주인님, 섬 전체에 안개를 깔까요? 한 치 앞도 못보게 만들 수 있어요."


뒤에서 레아가 다가와 슬쩍 얼굴을 내밀었다.


"기다려봐. 우리 애들까지 길을 잃으면 큰일이야. 아직은 날씨에 손대지 말고 있어줘. 드론, 정찰은 이제 됐으니 너희들도 이만 돌아와. 짐은 버리고 와도 돼."


[오케이. 너무 늦지 않게 들어가도록 할게.]


드론 대신 니키가 대답하면서 통화를 끊었다. 그런데 뭔가 니키가 말한 어조가 이상하다. 지금 출발하면 탐색대 애들보다 빨리 돌아올 수 밖에 없을텐데. 늦을만한 이유라도 있나?


***


"자, 서둘러 돌아가도록 하세! 우리 위치가 발각되기 전에!"


"으음~ 그렇지만 지금 당장 돌아오라는 명령은 아니었었지 분명?"


"지금 무슨 말을 하고있는 건가?"


드론이 의문을 표하자 니키가 눈동자만 옆으로 돌려 드론을 보면서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자고로 적은 약올리고 튀어야 제맛 아니겠어?"


"뭣이 어째!?"


"하하, 농담이고. 그냥 계획이 잘 흘러갈 수 있도록 좀 거들 뿐이야. 어차피 수색팀 애들 돌아오기까지 시간도 남았는데 일찍 돌어가봤자 할 일도 없잖아?"


니키는 다시 항구를 내려다봤다. 어느새 오르카 선발대의 임시기지 건설이 끝나가고 있었다.


"난데없이 선발대랑 연락두절되어버린다면 본대의 움직임이 제한될 수 밖에 없겠지?"


"니키, 아무리 자네라도 저 많은 수를 다 해치울 수는 없을걸세."


"워워, 내가 언제 싸우겠다고 했어?"


니키는 손가락으로 저 아래서 일하고있는 오르카 유미 개체들을 가리켰다.


"그냥 통신 중계기만 살~짝 망가뜨리고 나올 뿐이라고."


"...빠루로?"


"더 좋은거."


니키가 코트 지락을 쥐고 윙크했다. EMP, 그녀가 가진 비장의 능력이었다. 드론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마지못해 스피커를 열었다.


"알겠네, 나도 거들지."


"응? 아니,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데? 이런 건 전문가한테 맡기라고."


"스파이로 일해본 적이 있는게 자네 하나뿐인건 아니라네."


겉모습은 수리용 드론, 그러나 실체는 오메가의 손에 의해 탄생한 스파이 드론. 드론의 출신을 기억해낸 니키는 씩 웃었다.


"통신설비를 있는대로 전부 무력화시켜아하는데, 좀 맡겨도 될까? 한 반의 반 정도?"


"내가 크기는 작아도 1인분일세. 반 맡기게나."


***


[대장님. 보고드립니다. 후미에 오르카 와쳐가 붙었습니다.]


와쳐에게서 통신이 들어왔다. 아무래도 뒤를 잡힌 모양이다. 혼자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고 있다보니 쉽게 눈에 띄는건가.


[이대로 배로 귀환해도 괜찮겠습니까? 요격할까요?]


"...못 본 체하고 돌아와, 그거 하나 잡아봤자 오르카호 경계태세만 올라갈테니까. 계획대로 간다."


[알겠습니다.]


"포츈. 트리톤은 잘 숨어있지?"


"물론이지. 그건 걱정할 필요 없거든? 천을 들춰보지 않는 이상 위에서 보면 평범한 화물로밖에 안보일 거거든?"


"좋아 그럼... 이제부터가 관건이군."


유리창 너머로 와쳐가 날아오는 게 보였다. 그것도 똑같이 생긴 두 대가. 앞서 날아오던 와쳐가 갑판에 착륙하고, 거리를 두고 뒤쫓아오던 와쳐는 배 위를 빙빙 돌았다. 저 와쳐는 아마 오르카호에 수상한 배가 있다고 보고하는 중이겠지.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조금 지나자 외부로부터 통신이 걸려왔다. 역시 냅다 공격하진 않는군.


[포세이돈 소속 선박은 들으십시오. 여기는 오르카 저항군 소속 세이렌 부함장입니다. 무장을 해제하고 항복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무력으로 제압할 것입니다.]


스피커 너머에 있는 건 세이렌이었다. 내가 포츈에게 신호를 보내자 포츈은 목을 한번 가다듬고선 마이크를 켰다.


"가다려주세요! 저희는 펙스가 아닙니다! 펙스에서 도망친 난민들입니다!"


[어? 네?]


"믿어주세요! 저희는 결코 오메가를 따르지 않습니다!"


포세이돈의 배에 난민들이 타고있는 줄은 미처 몰랐는지, 아님 형식적인 항복 권고가 진짜로 효과가 있어서 놀란건지 세이렌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잠시 후, 스피커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바뀌었다.


[여긴 오르카 저항군 소속 용 중장이오. 그쪽의 대표와 대화하고 싶소.]


용? 용이 직접 나섰다고? 포츈은 침을 한번 삼킨 뒤 대답했다.


"제가 대표입니다. 저는 이 배의 선장을 맡고있는 포츈입니다."


[그쪽은 펙스에서 탈출한 난민 그룹이라고 들었소만, 맞소?]


"네, 맞습니다."


[그 배는 분명 포세이돈의 군수지원함인데, 어떻게 그 배를 구한 것이오?]


"얼마 전에 당신들, 오르카와 펙스가 미국 서부 해안에서 싸울 때 반파된 배를 찾아 저희끼리 탈취했습니다. 그 뒤 배링해를 건너 북극해를 떠돌다가 이곳에 정박하게 됐습니다."


나는 올리비아의 태블릿을 빌려 오렌지에이드라는 글자를 쓴 뒤 포츈에게 보여줬다. 그걸 보고 작게 탄성을 뱉은 포츈이 말을 덧붙였다.


"오렌지에이드라는 분을 불러주세요. 저희 중 그녀와 만났던 이들이 있습니다. 그 분이 저희 신원을 증명해줄겁니다."


용이 잠시 기다려달라는 말을 남기고 침묵했다. 1분 정도 지나자 다시 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보단 부드러워진 어조였다.


"확실히 당시 오르카에 합류하지 않았던 난민들에 대한 보고가 있군. 무사히 도망쳤었다니 다행이오.

그렇지만 모처럼 다시 만났으니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권유하겠소. 여긴 철충 및 펙스에 대항하는 오르카 저항군이오. 우리는 마지막 인간을 발견하여 그의 지휘를 받고있소이다.]


용은 생존자 조우 시의 지침같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인간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포츈의 미간이 꿈틀했다. 카메라 꺼놔서 다행이다.


[우리는 당신들을 해 할 의사가 없으며, 당신들이 합류하기를 바라고 있소. 이는 강제되는 것이 아니며 합류를 하지 않아도 협력을 한다면 합당한 보상을 줄 것을 약속하오.]


"...저희의 대답은 저번과 같습니다. 저희는... 멸망 전에는 인간님들의 밑에서, 멸망 후에는 레모네이드의 밑에서 노예같은 삶을 살아왔습니다. 더는 누군가의 밑에서 일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흰 저희끼리 평화롭게 살고 싶을 뿐입니다."


[그렇군... 알겠소.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더 묻지 않겠소. 심문하는 듯한 어조를 취한 점은 사과하겠소. 만약 뜻이 바뀌거나 우리의 지원을 필요로 하다면 언제든지 연락해주시오. 오르카호는 항상 열려있다오.]


"네, 신경써주어 감사합니다. 그럼..."


통신종료 버튼을 누른 포츈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창 밖으로 오르카 와쳐가 돌아가는 게 보였다.


"휴... 저쪽이 어떻게 나올지 되게 조마조마했는데, 아무래도 잘 넘어간 거 같거든?"


"긴장 풀자마자 원래 말투 나오는구나."


"어머, 얘는! 누나 그렇게 든든거리지 않거든!?"


포츈이 부끄럽게 웃으면서 내 등짝을 찰싹 후려쳤다.


"멸망 전의 노예같은 삶이라, 누난 멸망 후에 제조돼서 잘 실감이 안나는데 말이야. 동정심 자극 작전이 효과가 좋긴 하나봐. 아, 참고로 마지막에 우리끼리 평화롭게 살고싶다고 한 건 사실이야. 누나 맘 알지?"


"알지, 나도 같은 마음인데."


"으응~~~ 우리 귀염둥이 동생!!"


포츈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따듯하고, 숨 막힌다...

이제 스발바르 제도를 떠나도 오르카호가 쫓아올 것 같지는 않으니 밖에 나가있는 애들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더이상 남은 변수는 없겠지?


***


"네... 네, 알겠습니다! 유의해둘게요!"


선글라스를 쓴 켈베로스가 무전기를 내리고, 윗선으로부터 전달된 정보를 분대원들과 공유했다.


현재 이 스발바르 제도에, 방주에 머무르고 있을 므네모시네 외에도 또다른 바이오로이드 그룹이 와있다. 그들은 오르카에 합류하기를 원하지 않으니 마주치더라도 상대측이 적대적으로 나오지 않는 이상 크게 신경쓰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으음... 아무리 그래도 왜 저러는 건지, 역시 이해하기가 힘드네요."


"켈베로스, 억지로 합류를 강요하는 건 규정에 어긋납니다."


세이프티가 단호하게 말하자 켈베로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거 말고요. 왜 사령관님이, 인간님이 있다는데도 합류를 마다하는 걸까요? 안전과 의식주도 제공해주는데. 생각해보면 이번이 합류를 거절한 첫번째 사례잖아요. 저번에 장화가 떠나긴 했었지만, 언젠가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고 들었었는데. 이번처럼 완강히 거절한 건 처음이죠?"


"저쪽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죠. 이만 임무에 집중합시다."


이 화재로 더 얘기를 이어나가긴 힘들어보였다. 켈베로스는 잠시 입을 삐쭉 내밀었다가 이내 눈앞의 산책(수색)에 집중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구름이 하나도 없는 날이라 새파란 하늘과 흰 눈이 두껍게 쌓인 땅의 대비가 유독 도드라졌다.


켈베로스가 속해있는 수색 분대는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섬의 안쪽으로 나아갔다. 철충의 잔해를 빼고는 별로 눈에 띄는 것도 없었다. 그 때, 레이더 상에 바이오로이드 생존자의 생체신호가 감지되었고, 이내 그들은 오르카 소속이 아닌 게 분명한 바이오로이드 5명과 마주했다.


"어? 뭐, 뭐야!?"


"물러서! 너흰 누구야?"


"아, 당신들이 그..."


양측 다 서로를 보고 놀라 이동을 멈추고 대치했다. 그렘린이 놀라 품에 안고있던 탑돌이를 떨어뜨리고, 이그니스가 슬쩍 화염방사기의 포구를 들었다. 켈베로스가 빠르게 상대측 맴버들을 훑어보던 도중 한 소녀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어...!?"


켈베로스는 저 소녀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옛날 오르카 교도소에서 두번째 인간과 함께 탈옥했던 펙스의 첩자, LRL. 다른 LRL 모델과 착각했을 리가 없다. 저 날카로운 눈빛을 분명히 기억한다.


좌우좌는 저 여자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옛날 오르카 교도소에서 막 감옥문을 열고 나온 그 순간, 제 앞에 있었기에 빛을 쏴 실명시키고 전기진압봉으로 지져서 기절시켰던 감옥의 간수.


""너...!!""


동시에 얼굴이 굳은 둘은 서로를 향해 손가락을 치켜들며 노려봤다. 탈옥범은 발견 즉시 체포해야만 한다는 원칙에 따라, 그리고 개인적인 원한을 담아, 켈베로스는 곧장 전기진압봉의 전원을 켰다.


"탈옥범! 체포합니다!!"


둘 중 먼저 공격한 것은 켈베로스였다. '카앙!' 그러나 좌우좌를 향해 휘두른 진압봉이 둘 사이에 난입한 알비스의 방패에 막혔다. 뒤이어 좌우좌가 방패밖으로 몸을 내밀고 소방도끼로 내려쳤으나 이번엔 켈베로스가 진압방패를 들어 막았다. 오르카 대원들은 순간 머뭇거렸으나, 교도소에서 근무하던 세이프티 또한 펙첩 좌우좌를 기억해내고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곧바로 홀스터에서 권총을 꺼냈다.


"목표 확인! 진압하겠습니다!"


세이프티가 발포하기 시작하자 좌우좌는 알비스의 방패 뒤로 몸을 숨겼다. 탑돌이가 기관포를 꺼내 응수하자 사디어스와 소니아가 장갑판을 앞으로 내세워 급히 엄폐물을 형성했다.


"어이쿠야, 깜빡이도 안키고 난리났는걸?"


"니년들, 펙스의 끄나풀이었군...! 당장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바닥에 엎드려! 안그럼 전부 그을음으로 만들어줄-"


'까앙-!!'


클로버가 로켓 해머를 휘둘러 치자 사디어스는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장갑판이 우그러들면서 스파크가 파직거렸다. 내장된 테이저건이 손상된 모양이었다.


"버디!!"


"무슨 오해를 하고있나본데, 뭐가 어찌됐든 간에 내 친구를 건드리겠다면 가만있지 않겠어!"


클로버가 다시 한번 망치를 휘두르자 소니아는 뒤로 뛰어서 피했다. 한 쌍의 유탄발사기를 겨누고 쏘려는 자세를 취하자 이그니스가 앞으로 달려나왔다.


"다들 물러서세요!"


화염방사기를 들고 부채꼴로 불을 뿜자 오르카 대원들은 불길의 열기와 압박감에 본능적으로 물러섰다. 세이프티는 탄약집에서 고압가스탄을 꺼내 리볼버에 장전했다.


'번쩍-!'


"윽...!?"


좌우좌가 안대를 벗고 빛을 쐈다. 미처 못피해 시력이 마비된 세이프티는 최루탄이 장전된 권총을 떨어뜨렸다. 허나 무력화된 건 세이프티 하나뿐. 켈베로스는 LRL과 다시 마주칠 때를 대비해 선글라스를 쓰고있었고, 소니아는 원래부터 폼으로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던 게 우연히도 도움이 됐다. 사디어스는 좌우좌가 안대를 벗자마자 곧바로 제 눈을 가려 실명되는 꼴을 피할 수 있었다.


알비스가 방패 손잡이의 버튼을 꾹 눌러 연막탄을 사출했다. 여기서 싸우면서 시간을 낭비해선 안된다. 오래 끌수록 적들이 더 몰려올 것이다. 그렘린이 탑돌이를 잽싸게 집어들자마자 그들은 곧장 자리를 벗어났다. 연막 너머로 인기척이 멀어지는 걸 감지한 사디어스는 무전기를 들었다.


"여긴 사디어스, 선조치 후보고한다. 탈옥범인 그 LRL이 여기에 와있다. 교전을 벌였으나 놓치고 말았다, 지원을 바란다!"


***


과거 오르카 교도소에 수감됐었으나 탈옥했던 펙스의 간첩 LRL, 그녀가 거론되자마자 오르카 사령부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여지껏 뭘 하며 살아남았는지,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건지 등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 LRL을 떠올리자 반사적으로 두번째 인간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기 때문이다.


그 LRL이 두번째 인간과 같이 도망쳤던 그 사건을, 사령관은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무렵엔 펙스 유미로부터 구조요청 메시지를 받아 펙스 난민 수송 작전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내버려두고 있었지만 잊은 건 아니었다.


저 생존자 그룹에 두번째 인간과 LRL이 섞여있었던 건가. 그 바이오로이드들이 이미 다른 인간의 명령권 아래에 있던 거라면 오르카에 합류하는 걸 완고히 거절하는 이유가 설명이 됐다.


"각하. 시급히 두번째 인간을 확보해 저희들의 관리 하에 둬야만 합니다."


"펙스 출신인 LRL과 함께 나간데다 지금 포세이돈의 군함을 쓰고있는 걸 보면, 이미 펙스의 산하로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잡아야만 해요!"


지휘관들은 저 LRL을 포함한 생존자들을 붙잡을 것을 제안했다.


어쩌면 기우일지도 모른다. 두번째 인간은 이미 죽었거나 LRL과 헤어져서, 저 배의 생존자들과 연관된 건 LRL 하나 뿐이고 두번째 인간은 없을 수도 있다. 혹은 정말로 무고한 난민들 사이에 LRL이 정체를 숨기고 들어갔을 가능성도 있다.


무엇이 진실이든 간에, 그 답을 알아내려면 잡아서 확인해야만 한다. 사령관은 먼저 무적의 용에게 연락, 그 자칭 난민들이 타고있다는 배를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정찰 결과에 따르면 함포로 도배한 군함이 아닌, 최소한의 무장만을 갖춘 빈약한 군수지원함. 호라이즌이라면 손쉽게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펙첩 LRL. 그녀가 있는 스발바르 제도에는 이미 곳곳에 오르카호의 선발부대가 포진해있었다. 사령관은 그들에게 연락해 방주 수색을 미루고, 시티가드 분대와 합류해 LRL 일당을 잡으라는 명령을 내리려고 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섬에 들어간 선발부대 중 누구에게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호라이즌과의 통신은 문제가 없었으나, 스발바르 제도 안쪽과의 통신은 어느새 전부 끊겨있었다.


*


"에히히히하하핫!"


"정말로 해내버렸구만. 헌데 굳이 이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었던 건가..."


"근성 하나만으로 무사히 달아날 수 있는 적이 아니잖아?"


니키는 낄낄 웃으며 오르카 선발부대가 세운 임시기지에서 뛰쳐나왔다. 그녀는 뒤따라온 드론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저들의 배가 정박한 곶을 향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조용히 달려갔다. 


겉보기엔 멀쩡해보이나 속은 바싹 튀겨진 통신중계기와, 영문도 모른채 그걸 수리해야할 오르카 유미를 뒤로 하고서 말이다.


그 덕분에 방주 곳곳에 흩어진 오르카의 선발부대들은, LRL을 잡으라는 새로운 임무를 하달받지 못하고 방주 수색에만 전념했다. 사디어스가 요청한 지원군은 끝내 아무도 오지 않았다.


*


섬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건지 볼 수 없게되었다. 미지의 복병에 선발부대가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사령관은 섬에 추가병력을 투입할 것을 명령했다. 해상에서 대기하고 있던 함대 중 소형함 몇 척이 스발바르 제도로 이동했다.


두번째 인간의 생존은 이미 기정사실화됐다. 저 LRL을 놓쳤다 해도 아직 저 배가 남아있다. 저기에 그 인간이 타고있을테고, LRL도 한 패라면 그리로 올 것이다.


그리고, 호라이즌으로부터 막 바다로 나온 두번째 인간의 배가 시야에 잡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


방주 수색팀이 돌아왔다. 오는 길에 오르카쪽 수색대와 마주쳤는데, 하필 좌우좌를 아는 녀석이 있어서 교전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 켈베로스, 나도 기억한다. 왜 하필 걔가 여기 와있는 거냐. 요안나 아일랜드의 감옥에서 일하고 있던 애가... 아 맞다, 그 요안나 아일랜드가 망해서 거기 있던 애들 전부 실어왔지. 이런 젠장.


어떻게든 적들을 뿌리치고 배에 돌아왔지만 이걸로 오르카호에 내 존재가 알려졌을지도 모르겠다. 여차하면 우에엥 도와줘 페누에몽 해야지.


수색팀 다음으로 도착한 니키와 드론이 배에 올랐다.


"왜이리 늦었어? 좌우좌 쪽보다 너희가 먼저 도착했어야 했는데."


"어라, 농땡이 피우진 않았는데 이상하네. 에히힛."


"오르카 놈들이 차린 임시거점의 통신중계기를 망가뜨리고 왔다네. 미리 상의하지 않고 저지른 점은 미안하구만."


"그래? 들키진 않았고?"


"완벽하게 처리하고 왔지!"


니키가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그럼 문제없지. 출항하자! 빨리 여기서 벗어나자고!"


닻을 올린 배는 천천히 속도를 높여 곶을 떠났다. 조용히 바다로 나아가 육지에서 충분히 멀어지자 탁 트인 서쪽으로 뱃머리를 돌리려던 참이었다. 


동쪽에서 호라이즌 함대가 나란히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엇, 저녀석들 뭐야?"


"설마, 벌써..."


'뿌우우-!'


우렁찬 뱃고동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확성기를 통한 용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바다에 울려퍼졌다. 


[들으시오! 그 배에 두번째 인간을 숨기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소! 배를 수색할테니 당장 운항을 멈추시오. 미리 말해두자면 저항은 소용없소. 현재 수십의 함포가 그 배를 조준히고 있소. 수상한 움직임을 보였다간 일제히 발사될 것이오!]


씨발.


용 씨발년아 지금만큼은 감마보다 니가 더 싫구나.



(왜 아무도 안와...)

오늘도 쓸쓸이 손님을 기다리는 므네모시기

그나저나 최근들어 엘븐 비중이 공기가 되어버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