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오르카호가 내 존재를 눈치챘다. 그 유명한 무적 함대가 이 작은 배 한 척을 노리고 몰려왔다. 

포위된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도망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전면전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는 더욱더 아니고. 


"망할..."


"대장, 미리 말해두겠는데, 저번처럼 말빨로 구워삶아보겠다고 항복하는 건 절대로 안돼. 대장이 우리 살리겠다고 레모네이드한테 스스로 붙잡힐 때마다, 우린 정말로 대장을 잃을 뻔 했어. 그것도 두번씩이나. 두번이면 충분하고도 넘쳐." 


"트리아이나 양이랑 잠수정에 타서 해저로 피하세요. 그럼 저 사람들이 배에 들이닥쳐서 수색한다 해도 문제없을 겁니다."


엘븐과 이그니스가 차례대로 말했다. 바다 밑으로 피신이라, 용의 무적함대는 잠수함도 여러척 보유하고 있으니 소용없을 거다. 당장 오르카호도 잠수함이고. 어떻게든 싸움을 피할 방법을 찾으려고 애를 쓰던 때였다. 배의 조종간에 탑재된 통신장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아무도 싸울 생각은 안하는 거냐.]


줄곧 갑판 위에서 침묵하고 있던 트리톤이었다. 두 손으로 외로운 십자가를 꽉 쥔 유미가 말도 안된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싸운다니요...! 냉정하게 생각해보세요, 이건 승산이 없는 싸움이라고요!"


[냉정히 생각해야 할 건 너희들이다. 이 정도로 궁지에 몰렸으면 결사항전하는 수 밖에 없다. 펙스, 오르카, 철충, 그 모든 세력을 적으로 돌리고도 자유를 쟁취할 거라면 그에 상응하는 각오를 해라.

너흰 포세이돈의 함대를, 그리고 레모네이드 감마를 성공적으로 따돌렸다는 걸 기억해라. 소수정예로 이루어져 있는 게 이 팀이다.]


한없이 진지한 목소리. 트리톤이 원체 감정이 적은 로봇이라서가 아니었다. 그는 진지하게 이 전쟁에 응할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어, 저기...! 누군가 오고있어!"


내가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더치걸이 창 밖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비행형 바이오로이드로 보이는 두 명이 곧장 이리로 날아오고 있었다.


***


오르카 저항군과 적대 바이오로이드 세력과의 첫 교전이 펙스도 아닌 이런 작은 집단일 거라는 건 누구도 예상못한 일이었다. 전쟁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일방적인 유린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압도적인 병력차. 용은 상대방을 빠르게 항복시킨다면 불필요한 피해를 최소화시킬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인간과 그 LRL이 있다면 그 둘만 잡아갈 것이다. 다소의 저항은 있겠지만 이것이 인류를 위한 일이다. 만약 인간도 LRL도 없고 저들이 무고한 자였으면 정중히 사과하고 보상할 생각이었다.


[운디네, 테티스. 배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항복을 종용하시오. 문제없겠지?]


""그럼요~!""


마치 소풍이라도 온 것 마냥 경쾌한 대답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상대는 군함도 아닌 작은 군수지원함 한 척이었으니까. 얼마전에 상대한 포세이돈의 대함대에 비하면 이런 건 자기들만으로 침몰시킬 수 있을 정도로 작고 약해보였다.


한 발 앞서 날아간 운디네는 갑판 위에서 대기중인 와쳐를 향해 한 쌍의 리볼버 기관포를 겨눴다.


"거기 와쳐, 꼼짝마! 이륙하는 순간 나의 벨 에포크가 불을 뿜을 거라구!"


"...남이 위에서 내려다보는 상황은 불쾌한 감정을 유발하는군요."

 

와쳐가 움직이지 않을 것 같자 운디네는 고개만 살짝 돌려 테티스를 불렀다.


"테티스, 해버려!"


"맡겨만 두라고! 꺄하핫, 터져라~!"


테티스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머금고 미사일을 쐈다. 두 대의 미사일은 각각 함수, 함미에 하나씩 자리잡은 발칸포에 정확히 명중했다. "한번도 못쓴건데!" 발칸포가 터져나가자 함교 안에서 그렘린이 머리를 쥐어짜며 울부짖었다.


"킥킥, 벌써 침몰시킬까봐 쫄았어? 이런 하품나오는 배를 상대로는 전력으로 나설 것도 없다고!"


"너희 무기는 전부 무력화됐어! 모든 승무원들은 갑판으로 나오도록 해!"


"안그랬다간 더 아픈 꼴을 보게될걸? 꺄하핫!"


운디네는 완전히 긴장감을 놓은 건 아니지만 여유만만했으며, 테티스는 하도 손쉽게 제압이 끝나자 까불거리는 천성이 튀어나왔다.


"흐응~ 저녀석들, 겁먹은 건지 선내에 틀어박혀서 안나오는데요? 함장님, 어쩔까요?"


[위협 사격을 실시하시오. 속전속결로 끝내겠소.]


"예, 함장님!"


테티스는 히죽 웃으며 기관총을 들었다. 총구가 함교의 조종실 창문을 향했다. 어차피 포세이돈제 배니까 당연히 방탄유리일테고, 창문에 총알자국 좀 남겨주면 바싹 쫄겠지 하고 생각했다. 방아쇠에 하얀 장갑을 낀 손가락이 걸렸다.


테티스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오싹하고 위기를 느낀 테티스는 총을 쏘려던 걸 멈추고 황급히 후진했다. 거대한 쇳덩이가 그녀가 있던 자리를 쾅 내리쳤다. 테티스는 자신을 노려보는 청록빛 안광과 눈이 마주쳤다. 다연장 로켓포와 미사일 발사대로 도배를 한, 낯익은 AGS였다.


"트, 트트...! 트리톤!!? 어째서 저게 여기에 있는거야!?"


운디네가 기겁하며 소리질렀다. 위장을 풀고 일어선 트리톤이 파리 쫓듯이 묵직한 팔을 휘두르자 운디네랑 테티스는 맞지 않기위해 허둥지둥 피했다. 와쳐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곧장 날아올라 개틀링건을 갈겼다. 운디네는 어떻게 피한 반면, 기동력이 느린 테티스는 미처 못피하고 프로펠러가 총알에 맞아 부러졌다.


"꺄악!"


"테티스!!"


운디네는 냅다 날아가 떨어지던 테티스를 붙잡고 자신들의 배로 도망쳤다. 이제 운디네와 테티스 너머로 보이는 건 적 함대 뿐이었다. 트리톤의 모든 포문이 일제히 열렸다.


"표적 확인. 최대 화력 전개."


포격이 시작됐다. 무수한 로켓과 미사일이 긴 곡선을 그리며 호라이즌 함대 위로 빗발쳤다. 대공포와 네레이드들이 다급히 화망을 펼쳐 미사일들을 허공에서 걸러냈다. 그럼에도, 트리톤 하나가 퍼붓고 있는 미사일의 수가 너무 많았다. 


미사일은 네레이드가 탄띠를 교체할 틈도 안주고 쉴 새 없이 쏟아졌다. 곧이어 화망을 뚫고 호라이즌의 군함에 착탄한 미사일이 차례차례 폭발했다. 쾅, 콰앙. 폭음이 바다를 진동시켰다.



"보고! 아군 선두 함선, 화재 발생. 침수 확인!"


"함선 네 척이 완전히 정지됐습니다! 엔진이 당한 모양이에요! 함장님, 지시를!"


트리톤의 기습적인 등장에 호라이즌은 시작부터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 트리톤은 포세이돈의 기함에서만 운용하는, 알바트로스나 로크처럼 사실상 단일개체라고 볼 수 있는 AGS였다. 두번째 인간이 펙스의 손을 잡았을 것이라 확신한 용은 처음 세웠던 계획을 전면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선두 함선이 그대로 정지되는 통에 길이 막히다니, 이전에 포세이돈이 당했던 거랑 같은 꼴이군. 감마같은 미치광이가 아닌 이상 아군 함선을 '치워버리고' 진군할 수는 없었다.


"오르카호는 지금 당장 잠수하시오! 안전이 보장되기 전까진 수면 위로 나와선 안되오!

전 함대, 정지된 아군 함선을 우회해서 진군하시오!"


여기서 끝을 봐야만 한다. 용은 그렇게 생각하고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다시, 두번째 인간의 배. 수평선을 매운 함대 곳곳에서 새까만 연기가 피어오르는 광경을 본 트리톤은 포격을 멈추고 다음 공격을 위한 각도 조정을 시작했다.


"와쳐. 오르카호는 보이는가."


"방금 막 잠수했습니다. 거리가 멀어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적인 좌표값은 추정할 수는 있습니다."


"부정확한 정보라면 됐다. 집중포격은 포기해야겠군. 관측 데이터를 지속해서 전달해라."


"화망 때문에 접근은 불가능합니다."


"시야를 높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알겠습니다."


[트리톤, 잠깐!]


놀란 건 호라이즌만이 아니었다. 통신망에 대장의 목소리가 들리자 트리톤은 발사각 조정을 멈췄다.


[아직 포격명령 안내렸어!]


"내가 명령을 잘 따르는 성격이었으면 아직 레모네이드 감마 밑에 있었겠지."


트리톤은 호라이즌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대답했다.


"존재를 들킨이상 신경전은 시간낭비다.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결단을 내려라."


아직도 고민하는 것인지, 대답은 바로 돌아오질 않았다. 트리톤은 자기가 알아서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중, 호라이즌의 군함들이 어느새 무력화된 선두를 지나쳐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전 함대, 포격 개시!!!"


용의 호령에 호라이즌과 머메이드의 수많은 함포탑이 일제히 발포했다. 트리톤이 남은 미사일로 화망을 펼쳐보려 발사대를 위로 올렸다.


"그럴 필요 없어."


네오딤이었다. 그녀가 하늘 위로 양 손바닥을 펼치자 날아오던 수많은 포탄이 미끄러지듯 궤도를 틀었다. 배를 비껴나간 포탄 중 일부는 스발바르 제도에 착탄해 눈이 폭발하듯 터졌다.


"...아차, 돌려보냈어야 했나?"


"아니, 충분히 잘했어! 네오딤은 배를 지키는 데에 집중해줘. 레아, 폭풍을 일으켜! 적들이 함재기를 띄우지 못하게 해!"


"그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주인님!"


네오딤뿐만 아니라 대장과 레아까지 갑판으로 나왔다. 레아의 페어리 드론이 하늘 위로 올라가고, 얼마 안있어 호라이즌 함대 위로 먹구름이 생겨났다. 바람이 점점 거칠게 휘몰아치고 비가 주륵주륵 내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폭풍우가 호라이즌 함대를 덮쳤다. 갑판에 나와있는 호라이즌의 병사들은 비에 쫄딱 젖은채로 북극해의 얼어붙을 것 같은 기온을 맛보니 순식간에 사기가 바닥을 쳤다.


"네오딤에, 오베로니아 레아...!? 대체 어디서 저들을 구한거란 말인가?"


망원경으로 두번째 인간의 배를 관찰하던 용의 눈이 크게 떠졌다. 네오딤의 능력이라면 함포도 레일건도 막아낼 수 있다. 공격 수단이 크게 제한되어 버렸다. 


물론 오르카호에도 초능력자 바이오로이드는 많이 있다. 네오딤의 자기장을 더 강력한 초능력으로 덮어씌우거나, 레아가 바꾼 날씨를 다시 쾌청하게 되돌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오르카호 안에 있다. 그들을 내보내기 위해선 오르카호를 부상시켜야만 한다. 트리톤의 공격을 완전히 차단할 수도 없는데 총대장을 섣불리 노출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르카호를 도로 불러야하나 고민하던 사이, 트리톤의 다음공격이 시작되었다.



"트리톤! 미사일은 얼마나 남았어?"


"공격을 한 시간 정도 지속한다면 잔탄이 소진될 거다."


"...대체 안에 얼마나 들어있는 거야?"


"수소폭탄도 준비되어 있다. 필요하면 명령만 내려라."


"굉장하네. 그보다, 잠깐 멈추고 옆으로 좀 비켜봐. 니가 바닥을 막고있잖아."


"...바닥?"


포격음이 멎었다. 대장이 훠이훠이 손짓하자 트리톤은 의아해하면수도 쿵쿵 소리를 내며 자리를 옮겼다. "포츈, 문 열어줘." 대장이 통신기에 대고 말하자 갑판이 양 옆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뭘 하려는 거냐?"


"아, 너한텐 이 배가 뭘 저장하고 있는지 말을 안해줬구나."


대장은 직접 확인해보라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갑판의 문이 반 이상 열리자 배의 무기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뢰, 폭뢰, 기뢰. 무기고는 해전용 병기들로 가득 채워져있었다. 밑에서 니키와 그렘린이 대장과 트리톤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세팅은 다 끝마쳐뒀어요! 바다에 넣기만 하면 활성화될 거에요!"


"수고했어 그렘린. 식량보다 병기가 더 많은게 기쁜 날이 올 줄은 몰랐네. 네오딤, 좀 도와줄래?"


"응. 뭐할까?"


네오딤이 둥실 날아왔다.


"기뢰를 설치할거야. 우선 기뢰부터 꺼내줘. 조심스럽게 꺼내."


"기래?"


"저기 동그랗고, 뾰족뾰족한 것들."


"이거?"


네오딤이 손을 까딱 위로 올리자 보랏빛 기류에 휩싸인 기뢰가 떠올랐다.


"이걸 던져서, 저기에 맞추면 돼?"


"맞추지 않아도 돼, 쟤들 앞에 빠뜨려. 바다에 울타리를 설치한다는 느낌으로. 바람은..."


"이미 저쪽으로 불고 있답니다!"


레아가 싱긋 웃었다. 네오딤은 기뢰를 있는대로 꺼낸 뒤 던지는 시늉을 하자 모든 기뢰가 호라이즌을 향해 날아갔다. 호라이즌 쪽에서도 대공포로 몇 개는 허공에서 터뜨렸으나 그러지 못한 기뢰는 그들의 앞에 첨벙 빠졌다.



"기, 기뢰 설치 확인! 레이더에 부유기뢰 뿐만 아니라 계류기뢰도 확인됐습니다!"


"전 함대, 정지! 부유기뢰는 접근하기 전에 폭파시키고, 소해용 잠수함은 시급히 계류기뢰를 제거하시오!"


기뢰는 깔려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일대 해역을 봉쇄해야 할 정도는 가성비가 좋은 무기다. 군함측은 침몰을 각오하지 않는 이상 움직일 수 없게된다. 그 잘난 전술도, 진형도 무용지물이었다.


트리톤이 질리지도 않고 재차 포격을 개시했다. 저번처럼 직접 적함에 승선해서 싸운다면 모를까, 기뢰원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원거리서 포격만 주고받는 이 전황은 트리톤이 마음놓고 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무대였다. 


적이 마음대로 설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호라이즌 역시 함포를 계속 쐈지만 거의 소용없는 짓이었다. 네오딤의 방어막 때문만이 아니었다. 거센 풍랑에 군함이 휘청이면서 함포의 조준이 계속 틀어지고 있었다.


군함의 수가 이리도 많은데 저 작은 배를 격침시키지 못하고 있다니, 무적의 이름이 울 지경이었다. 날파리인줄 알고 가볍게 잡으려했는데 알고보니 말벌이었다.


"함장님! 스발바르 제도에서 미확인 비행체가 출현했어요!"


느닷없는 테티스의 보고에 용의 시선이 섬 쪽으로 쏠렸다. 정체불명의 비행체 두 대. 철충인가 했지만 관측 화면을 확대해보니 감염된 흔적이 없는 AGS였다.


"교전할까요?"


"기다리시오. 배에서 나오지 않은 걸 보면 두번째 인간과 무관할 가능성이 있소. 계속 주시하되 저쪽이 먼저 공격해오지 않는다면 건드리지 마시오."


용은 그리 말하며 화면에 비춰진 두 AGS를 주시했다. 거대한 새 로봇과, 그보다 더 큰 드래곤의 모습을 한 로봇이었다.



"아이고, 저 미친 놈들이 오자마자 이게 뭔 개난리래!"


스발바르 제도에 불발탄이 떨어지고 나서야 이변을 눈치챈 페레그리누스와 글라시아스가 황급히 날아왔다. 글라시아스는 배 한 척이 대규모 함대를 상대로 포탄을 주고받는 광경을 내려다봤다. 희한하게도 함대 쪽에만 폭풍우가 치고 있었고 두번째 인간의 배가 있는 곳은 아주 쾌청했다.


"저들을 멈춰야만 한다! 페레그리누스, 너는 그 자에게로 가보거라! 나는 오르카쪽을 말리겠다!"


"뭐요!? 아니 누님, 잠깐 좀 기다려보쇼! 지금 진짜로 전쟁 터진 거 안보입니까! 지금 끼어드는건 자살행위요!"


화들짝 놀란 페레그리누스가 글라시아스를 앞질러 날아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말리지 않으면 더 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을 것이다!"


"아직 저쪽 인간이 지킬 가치가 있는 인간인지도 확인 못했잖수!"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이러는 것이 아니겠느냐!"


페레그리누스를 일갈한 글라시아스는 그를 지나쳐 폭풍치는 먹구름의 아래로 들어갔다.


"누님!! 아이씨, 돌아버리겠네 진짜!"


글라시아스의 뒷모습을 보며 소리를 빽 지른 페레그리누스는 잠시 허둥대다가 마지못해 그녀의 뜻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싸움을 멈추거라! 나는 기억의 방주를 지키는 글라시아스! 제3세력이지만 이 싸움을 막기 위해 왔다! 대화를 요청한다!"


글라시아스는 호라이즌의 함대 앞을 가로막았다. 스피커 음량을 최대치로 키운 그녀의 목소리는 비바람을 뚫고 후미의 함선에게까지 닿았다.



"야, 타임! 타임!! 니들, 잠깐 멈춰!!"


페레그리누스는 두번째 인간의 배 앞에 나타나서는 하피 폼으로 변신했다. 포격을 멈춘 트리톤의 포구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호라이즌도 마찬가지로 공격을 멈춘 덕에 비로소 소강 상태에 들어설 수 있었다. 


"방해하다니, 무슨 짓이냐. 오르카의 편을 들 셈인가."


"넌 언제부터 있었던... 아니, 그건 중요하지 않고! 난 싸움을 말리려고 온 거야. 화난 건 알겠는데, 일단 좀 진정들해봐!"


페레그리누스는 잠깐 트리톤을 쳐다보다가 대장한테 시선을 고정했다.


"저기 쟤들 꼬라지 좀 봐. 벌써 군함 십 몇 척은 개박살났다고.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어?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누가 들으면 우리가 이 싸움을 시작한 줄 알겠군. 우린 방어하는 입장이다. 단지 생존을 위해서라도 상대방을 무력화시켜야만 한다. 

이제와서 싸우지 않을 방법을 찾는 건 무의미하다."


"...나도 트리톤 의견에 동의해. 물론 전쟁같은 건 안하는 게 제일이지, 하지만 내가 이 망해버린 세상에 떨어진 뒤로 내 뜻대로 되는건 별로 없더라고. 이번도 마찬가지야. 이건 이미 멈추고 싶다고 멈출 수 있는 싸움이 아니야." 


"아니, 그건... 그렇지만... 에휴, 난 이런건 잘 못하는데..."


페레그리누스는 제 손으로 얼굴을 덮고 밑으로 주륵 내렸다. 니드호그가 부활해서 미드가르드의 운명을 걸고 한판 더 싸우는게 차라리 속이 편하겠군. 그래도 이미 이렇게 왔으니 설득해보기로 했다.


"저기, 들어봐. 지금 우리 누님은 저쪽에 가서 말리고 있거든? 그래서 쟤들이 싸움 멈추겠다고 하면 이번엔 무승부로 하고 그냥 넘어가지 않을래? 우리도 일단 입장이라는 게 있어서..."


"설령 여기서 관두고 자리를 벗어난다 한들, 그건 싸움을 미루는거지, 멈추는 게 아니야. 다음엔 어떻게 될까? 이번처럼 방심하지 않고, 나를 죽이기 위해 더 확실한 전술전략을 짜서 공격하겠지."


"으음... 이 정도로 했으면 '건드리면 좆된다'는 인식은 박히지 않았을까?"


"이 정도로 겁먹을 애들이었으면 펙스나 철충한테 싸움 걸지도 않았지. 차라리, 여기서 최대한 많은 피해를 입혀서 날 쫓아올 엄두도 못 내게 만들어야지."


"으... 어떡하지 진짜."


페레그리누스가 끙끙대던 중, 네오딤이 말을 걸었다.


"대장. 배들이 옆으로 넓게 퍼지고 있어. ...이러면 힘들어. 막기가."


네오딤이 커버할 수 있는 건 한 방향 뿐이다. 적 함대가 한 곳에서 공격한다면 모를까, 넓게 퍼져서 공격한다면 막기 힘들어진다. 포위해서 사방에서 쏜다면 말할 것도 없었다. 대장 입장에선 그렇게 되기 전에 손을 써야만 했었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건... 협상결렬이란 뜻인가?"


대장이 한 말에 페레그리누스의 고개가 돌아갔다. 




"기억의 방주의... 그렇군. 하마터면 스발바르 제도에 떨어진 불발탄 때문에 방주에 피해가 갈 뻔 했구려."


용이 뚜벅뚜벅 비바람이 몰아치는 갑판으로 걸어나오자 글라시아스는 그녀의 앞에 착륙했다. 용 본인이 타고있는 기함인 만큼 워낙 커서 글라시아스가 서있을 자리는 충분했다. 둘은 차분히 서로를 마주보는 반면, 주변에선 호라이즌의 병사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사령관으로부터 이 함대의 총지휘권을 부여받은 용이라고 하오. 이번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내 진심으로 사과하겠소."


"다행스럽게도 방주는 무사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허나 내가 이 자리에 온 것은 방주 때문이 아니다."


"그럼 무엇 때문이오?"


"저 배엔 너희들의 사령관 이외의 또 다른 인간이 타고 있다. 그를 향한 공격을 중지해다오."


용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녀는 비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귀 뒤로 넘겼다.


"...이 포화 속을 헤쳐나온 기개를 높이 사 본관이 직접 나온 것이오만, 설마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구려. 분명 제3자라고 들었소만, 어째서 그를 감싸는 것이오?"


"나에겐 인류를 수호한다는 사명이 있기 때문에, 인간끼리의 동족상잔을 결코 두고볼 수가 없었다."


"설령 그 대상이 악인이라도 말이오?"


"어째서 저 자가 악인이라고 생각하느냐?"


"그 두번째 인간은 이미 펙스의 밑에 머리를 숙였소. 펙스의 대의는 옳지 않소. 인류재건의 비원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지. 그렇기 때문에-"


"기다리거라. 어째서 저 자가 펙스의 밑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저 배에 타고있는 트리톤이란 AGS는 포세이돈의 기함에서만 사용되는 원 오프 타입이오. 바로 그 트리톤을 부리고 있다는 건 펙스로부터 병력을 받았다는 뜻일수밖에 없지."


용은 자신의 판단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글라시아스는 스피커에서 한숨소리를 한번 내고선 말을 이었다.


"용, 그 이름은 나도 들어봤다. 무적의 불패함대를 이끄는, 블랙리버제 지휘관 바이오로이드."


"무슨 말을 하고싶은 것이오?"


"그대는 지금도 앙헬 리오보로스을 위해 싸우느냐?"


"아니, 그렇지 않소! 본관이 블랙리버 사에서 만들어졌다 한들, 지금 본관이 섬기는 건 오르카호의 사령관 단 한사람 뿐이오."


"그래, 그 말이 옳다. 출신은 다 과거의 일이다. 원 오프 타입이라도 말이다."


글라시아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눈치챈 용의 눈이 살짝 크게 뜨였다.


"펙스에서 만들어진 희귀한 AGS를 보유하고 있다고 해서 그가 펙스에 들어갔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 우리 AGS에게도 감정이 있고, 의사가 있고, 자유의지가 있다. 그 트리톤이라는 자가 펙스를 벗어나 스스로가 갈 길을 선택했을 수도 있지 않느냐?"


"...과연, 일리가 있군. 본관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맹점이었구려."


용이 턱을 짚고 수긍하는 듯한 모양새를 보이자 글라시아스의 푸른 안광이 은은하게 빛났다. 오해도 풀었으니 이 무의미한 전쟁을 끝낼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다음 용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의 기대를 배반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소."


"뭐라...?"


"지구를 되찾기 위해선 철충뿐만 아니라 별의 아이라는 미지의 적까지 상대해야 하오. 인간의 세력이 여러개여선 우리끼리 싸우느라 철충한테 이기지 못할 것이오. 

지구에서 비롯된 인류의 세력은 하나의 지휘관 아래에, 하나의 세력으로 통합해야만 하오. 그래야만 철충과 별의 아이로부터 지구를 되찾을 수 있소. 

언젠가 철충과의 결전을 치르기 전에, 펙스 역시 오르카 저항군에 편입시키던가, 아니면 몰락시키던가 할 것이오. 저 인간의 세력도 마찬가지오. 결코 내버려둘 수 없소이다."


"무슨...! 궤변은 집어치우거라! 멸망 전의 기업가들이 그랬듯이, 독재자가 되겠다는 뜻이 아니더냐!"


글라시아스의 목소리에 노기가 실렸다. 그럼에도 용은 기죽지 않고 냉정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착각하지 마시오. 이 모든 건 지구를 다시 인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결정이오."


[함장님! 기뢰 제거 작업이 끝났습니다!]


무전기 너머로 세이렌의 목소리가 들렸다. 용은 무전기를 입에 가져다댔다.


"수고했소. 소해함은 도로 후방으로 물러나시오. 들어라! 전 함대, 진군 재개!"


수십 척의 군함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글라시아스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용은 냉정하게 말했다.


"그만두거라!"


"이는 더이상 제3자인 당신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요. 이만 물러나시오. 전 함대, 포격 개시."


용의 명령을 내리자 사방에서 굉음이 울려퍼졌다. 글라시아스는 자기만큼 큰 함포가 요란하게 불을 내뿜는 광경을 망연자실하게 쳐다보다가, 자리를 떠나려는 용을 불러세웠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게 해다오."


용이 말해보라는 듯 걸음을 멈추고 글라시아스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대들의 사령관이라는 자도, 그대와 같은 의견이느냐?"


"그렇소. 주군의 뜻이 곧 본관의 뜻이니."


"...슬픈 일이로구나."


글라시아스는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고개를 떨구었다. 비가 그녀의 머리를 타고 흘러 뚝뚝 떨어지는 게 마치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용은 등을 돌리고 함내로 들어가려다, 뭔지모를 한기를 느끼고 홱 뒤돌아보았다.


"나도 이러고싶지는 않았단다. 허나 우유부단하게 굴기엔 상황이 녹록치가 않구나."


글라시아스의 몸에서 냉기가 새어나오며 날개에 하얗게 서리가 꼈다. 이윽고 뾰족뾰족한 얼음이 그녀의 거대한 날개를 덮었다.


"정녕 인류를 수호하기 위해 그들의 동족상잔에 가담해야만 한다면, 기꺼이 그 죄를 짊어지겠노라."


용이 미처 공격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글라시아스가 날아올랐다. 그녀가 일으킨 날개짓이 이 일대의 기온을 한층 더 떨어뜨렸다. 글라시아스가 한기를 두르고 돌진하자 그녀가 지나간 주변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안그래도 레아가 부른 비에 젖어 침수된 상태였기에 냉기에 취약해진 상태였다.


"저, 적대 AGS 판정! 대공부대, 요격하세요!"


"네리는 여기서 못움직여! 트리톤이 다시 막 쏴대기 시작했다고!"


"함포탑 두 개가 얼어붙었어요! 아, 레이더도...!"


글라시아스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최대한 바이오로이드를 공격하는 건 자제하고 함선을 얼려 무력화시키는 데에만 집중했다. 적의 공격을 피해낼 정도로 기동력은 좋진 않았기에 자신에게 날아오는 총탄을 공중에서 얼려버리거나 맷집으로 버텨가며 계속 날았지만, 조금씩 데미지가 누적되어갔다. 세이렌이 글라시아스를 향해 주포를 겨누었다.


"제가 맡겠습니다! 주포 정렬!"


"부함장님, 조심해요! 그쪽으로-"


"우리 누님한테 뭐하는 짓이냐!!"


운디네들의 호위를 뚫고 난입한 페레그리누스의 킥에 세이렌의 포신이 직각으로 꺾였다. 페레그리누스는 자신을 뒤쫓아온 운디네들의 공격을 피해 곧바로 바닥을 박차 다시 날아올랐다.


"페레그리누스!"


"가세하겠수다, 누님!"


페레그리누스의 가슴에서 쏘아진 레이저가 얼어붙은 함포탑을 파괴했다. 이내 팔콘 폼으로 돌아온 페레그리누스는 글라시아스를 호위하며 폭풍 속을 종횡무진 누볐다.



"페레그리누스랑 글라시아스만 안맞출 수 있겠어?"


"불가능하다."


트리톤이 미사일을 펑펑 쏴가며 답했다.


"그럼 일단-"


"정말로 저들을 돕고 싶다면 공격을 멈춰선 안된다. 적의 대공병력이 저들에게 신경쓰지 못하도록 시선을 이리로 유도해야만 한다."


"...레아, 저쪽에 비바람이 그치지 않도록 유지하고 있어줘."


"네, 주인님."


계속 침수상태를 유지해야 글라시아스의 능력이 잘 먹힐테고, 둘 다 대형 로봇이니 춥거나 강풍이 불어도 무리없이 움직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 때, 상공에서 내려다보고있는 와쳐로부터 통신이 들어왔다.


[대장님, 보고드립니다. 적 함대의 후미에서 더 많은 함선이 접근중입니다.]


"뭐? 증원인가? 저놈들 병력은 끝이 안보이네, 진짜...!"


[...아니요, 적들의 움직임이 뭔가 이상합니다. 마치... 앗.]


"왜그래? 뭔데?"


[오르카 함대의 후미가 새로 등장한 병력과 교전을 시작했습니다!]


"뭐!?"


대장은 놀란 얼굴로 와쳐를 올려다보다, 멀어서 보이지도 않는 호라이즌 함대의 건너편을 보려고 눈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이, 아니, 누가 나타난 거야?"


***


"이거 참... 일이 재밌게 돌아가고 있는걸"


북미 오메가 산업 본사의 회장실. 레모네이드 오메가는 위성 카메라에서 전달된 사진과 제 함대의 기함에 설치된 카메라로 보이는 화면을 번갈아보며 턱을 괬다. 두번째 인간의 뒤를 쫓아가자 나타난건 안그래도 벼르고 있었던 오르카 저항군이었다.


우연인가, 아니면 두번째 인간이 정말로 오르카호의 행선지를 알고있었던 건가. 어느쪽이든 간에 결과적으로는 그가 오르카호에게로 안내해준 꼴이었다. 뜻밖의 수확에 오메가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오메가도 오르카와의 전면전을 상정한 건 아니었기에 전 병력을 동원한 건 아니었지만, 두번째 인간이 가진 트리톤이나 오베로니아 레아같은 전략병기를 물량으로 억누를 정도의 함대는 보냈다. 예정에도 없던 오르카 함대와의 조우라 해도 문제 없었다. 오히려 호기였다. 오메가의 관심은 금새 두번째 인간에서 오르카 함대에게로 쏠렸다. 


이 날만을 기다렸다. 오메가는 제 함대의 지휘 AI한테 명령을 내렸다.


"공격해. 하나도 남기지 말고 없에버려."


펙스의 항공모함에서 날아오른 인터셉터 편대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오르카호가 주도하는 질서, 그것을 거역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인간이 이끄는 독립 세력으로서 체면은 유지해야 될 거 아니겠습니까? 때때로 한 번씩 배짱이라도 내보일 수 있어야 될 거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