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휴, 이거 지치네.”

 

리마토르는 갈라지는 듯한 목의 건조함에 급히 수분을 보충했다. 강의에 열중한 시간이 상당히 길었음을 증명하듯 차가웠던 물은 어느새 미지근해져 있었다. 그가 선풍기를 틀고 몸의 열기를 식히고 있는 동안 그의 옆에서 상냥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생했어, 당신.”

 

“아, 여기까지 왔어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리마토르는 반색으로 화답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청중들을 상대로 중간에 끊임없이 강의하느라 기진맥진했던 모습은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사라졌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본 칸은 들고 온 와이셔츠를 건네며 웃음으로 말을 띄웠다.

 

“당연히 와야지. 화면 너머로 봐도 느껴질 정도로 당신이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데 내가 보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

 

“고마워요. 덕분에 남은 강의도 힘을 낼 수 있겠어요.”

 

때로는 큰 물질적 지원보다 소소한 일상 속의 지원이 더 강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리마토르는 배려로 포장된 그녀의 내조를 감사히 받아들였다. 축축하게 젖은 와이셔츠 대신 뽀송뽀송한 새 와이셔츠로 갈아입은 그는 옷깃을 여미며 다음 강의를 위한 기합을 넣었다. 칸은 아까보다 힘이 들어간 그의 모습을 보며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당신이 기운찬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네. 내가 들고 온 좋은 소식을 들으면 더 기운이 날 거 같은데?”

 

“새 와이셔츠보다 더 좋은 소식이 있다고요? 뭔지 기대되는군요.”

 

“당신 밑에서 수학(修學)하길 원하는 학생이 한 명 더 생겼어. 우리 호드의 카멜 알지? 아까 당신이 데리다의 해체주의를 설명하는데 아주 훌륭한 논리구조로 답을 제시하더라. 조금 더 학식을 쌓아야 한다고 하던데 당신이 한번 지도해보면 어때?”

 

“음, 어려운 문제를 스스로 생각해보면서 접근한다니. 대단히 훌륭한 학생의 자세군요. 칸이 아주 훌륭하다고 평할 정도면 어느 정도 뒷받침이 될 테고, 카멜 씨면 평소에도 근면히 강의에 출석했으니 제가 관측한 바로도 좋은 자질이 보이네요.

 

좋은 소식 고마워요. 이번 강의가 끝나는 대로 카멜 씨와 대학원 진학을 두고 진로 상담을 해봐야겠군요.”

 

“고맙긴, 교육자의 입장에서 뛰어난 학생을 가르치는 일만큼 보람된 일이 또 있겠어.”

 

작전실에서만 그녀를 만났던 이라면 지금 그녀가 짓고 있는 표정을 보고 틀림없이 놀랐을 터였다. 칸은 늘 짓던 진지한 얼굴 대신 악동 같은 미소를 얼굴에 아낌없이 걸고 있었다. 장단을 맞춰주던 리마토르는 그녀의 얼굴에 만개한 웃음꽃을 보더니 자신도 같은 장난꾸러기의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부하를 철학과 대학원생으로 만들려고 하다니 너무한 거 아니에요? 저는 분명 호드가 가장 동료애가 강한 부대라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뭐야, 그렇게 티가 많이 났어?”

 

“칸이 그런 장난을 위한 표정을 짓는데 분간이 안 갈 리가 있나요. 제 눈을 피해 갈 수는 없답니다.”
 
“이런, 완벽한 위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네.”

 

다시, 웃음이 그녀의 얼굴에 만연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티끌 없이 맑은 웃음이었다. 깊은 밤 구름이 덮고 있던 달이 모습을 드러내 은은하게 지천을 비추었을 때처럼 칸은 밝게 미소 지었다.

 

“장난도 칠 줄 알 정도면 행복할 용기는 충분히 달성한 것 같네요. 다행이에요.”

 

“내가 봐도 그런 거 같아. 당신과 함께 있는 지금이 행복하니까.”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자연스럽게 나오는 칸의 달달한 말을 받으며 리마토르는 다시 목을 축였다. 휴식 시간이 끝나감에 따라 그의 머리는 이어서 강의할 부분을 재조립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설명했던 내용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던 그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나 칸에게 질문을 던졌다.

 

“칸, 그러고 보니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내용 중에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었나요?”

 

“음.... 아무래도 데리다의 해체주의가 이해하기 어려웠지. 해체라는 말을 사례로 보면 대충 알겠는데 전부 종합해서 보려니 이해가 안 돼. 그 부분만 다시 짚어줄 수 있겠어?”

 

칸의 말에 리마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교육자로서 미숙한 자신이 발전할 수 있도록 조언을 준 그녀에게 감사를 표하며 그는 어떻게 설명할지를 곱씹었다.

 

“알려줘서 고마워요. 강의하면서도 그 부분이 어려울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듣는 이 입장에서도 실제로 그랬을 줄이야... 데리다의 사상을 한 줄로 압축하면서도 더 쉽게 풀어 말하는 방법이 없으려나...”

 

지식을 말과 글로 풀어 전달하는 소임을 충실히 해내기 위해 리마토르는 머릿속 매듭을 이리저리 잡아당겼다. 돌 사이에서 쌀만을 건져내듯 그는 수많은 단어 속에서 가장 적합한 표현을 건지기 위해 조리질을 멈추지 않았다. 고민은 길어지는데 명쾌한 답이 떠오르지 않자 슬슬 그의 머리에 쥐가 찾아왔다. 눈을 감은 리마토르의 얼굴에 점차 주름이 잡힐 때쯤, 그에게 가뭄의 단비 같은 조언이 들렸다.

 

“데리다가 말한 '해체'는 주장의 완벽함을 위해 기존의 틀을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재구성하는 거야. 가령 우리가 레고를 조립할 때 꼭 설명서대로 따라가야만 하는 건 아니지. 필요하다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변형을 가하면서 완성에 도달하기도 하니까. 그럼 설명서대로 만든 게 '진짜'고 우리가 창의적으로 변형한 건 '가짜'인가? 그렇다고는 할 수 없어. 둘 사이에는 '차이'만이 있을 뿐이야. 데리다는 이를 보여주기 위해 앞에서 본 '차연'을 취했고, 이는 곧 '참과 거짓이라는 이분법으로 나뉘지 않고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졌어. 그래서 데리다는 해석이 무수히 많아질 수 있다고 보았지.

 

이에 착안해 괜찮은 표현을 만들어보면 ‘해석을 추구하는 철학자’라는 표현은 어떤가?”

 

“호오, 괜찮은 표현인데요?”

 

꽃을 들고 온 아스널이 꽃 대신 말을 건네자 리마토르는 감탄했다. 그가 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번에는 뒤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의 교안을 들고 있는 하르페이아가 ‘데리다 특유의 꼼꼼함을 담아내는 표현도 필요하다’고 운을 띄우더니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데리다는 문자학을 심도 있게 연구한 경력자답게 작은 언어 표현까지 집중해서 살피는 방식으로 대선배들인 후설, 하이데거, 심지어는 스승인 푸코의 주장까지 모순이 있다고 주장했죠. 전체 주장을 보고 조금이라도 방향이 어긋나는 부분이 있으면 전체 주장이 오류가 있다고 말한 거에요. 그 예시로 데리다가 푸코의 저서 <광기의 역사>에서 데카르트가 광기를 배제한 방식이 이성이었다는 문장 하나를 갖고 1000페이지짜리 논문 전체를 불쏘시개라고 표현해서 둘 사이가 틀어졌던 이야기가 있죠. 


이렇게 데리다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글의 구조를 분해했다가 재조합하는 해체적 독해를 통해 주장에 충돌이 없는지를 찾았으니, 이에 근거하여 ‘완벽을 추구하는 철학자’라는 표현은 어떤가요?”

 

하르페이아의 말에 처음 의견을 낸 아스널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의 뜻을 표했다. 답답한 고민의 길에 활로를 터 준 둘의 도움에 리마토르는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음, 그것도 데리다를 설명할 수 있는 표현 같네요. 좋은 의견 고마워요, 하르페이아.”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혼자일 때보다 더 생동감이 넘쳐나는 논의의 장에서 리마토르는 자신의 생각이 아직 가보지 못한 지평으로 가지를 뻗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사랑으로 받쳐주는 이를 반려로, 지식을 논하고 탐구에 발을 딛은 이를 동료로, 아직 가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에 등불을 비추려는 이를 수제자로 맞아 걷는 자신의 삶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득 차 있었다. 뻗은 가지가 얽히고설켜 만든 새로운 지도를 더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의 의견이면 데리다에 대한 설명을 매듭짓기에 충분하겠죠. 이제 쉴 만큼 쉬었으니 들뢰즈까지 다뤄보고 제가 논문으로 어떤 주장을 하려고 했는지 설명해야겠습니다.”

 

“아직 쉬는 시간은 50분이나 남아있어. 더 안 쉬어도 괜찮아?”

 

휴식 시간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다시 일에 착수하려는 리마토르의 모습에 칸은 애정 섞인 우려를 표했다. 자신을 걱정해주는 그녀에게 그는 허세까지 섞어가며 괜찮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당당한 모습과 달리 칸의 눈이 포착한 리마토르의 눈가에는 내린 여전히 피로가 풀리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다크서클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당신도 참, 다크서클이 아직도 진하다고.”

 

“괜찮아요. 이 정도는 견딜만 해요.”

 

재차 조금 더 쉬기를 권했지만 리마토르는 다시금 거절 의사를 전했다. 어떻게 해야 그가 자신의 의견을 수용할지 고민하던 칸은 이윽고 좋은 방법이 떠올랐는지 종전에 지었던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꺼내들었다.

 

“그래? 그럼 오늘 밤에는 안 재워도 되겠네?”

 

유혹 가득한 말투가 지나간 그녀 자신의 입술을 혀를 살짝 내밀어 핥는 칸의 모습이 리마토르의 시야에 들어오자 그는 그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직관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여기서 또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간 오늘 밤에도 전투 체련을 하게 생겼기에 그는 빠르게 그녀가 원하는 답을 주었다.

 

“...조금 더 쉴게요.”

 

“잘 생각했어. 쪽잠이라도 잘래?”

 

“그렇게 하죠. 하르페이아, 이따가 시간 되면 저를 깨워주세요.”

 

“아니, 내가 깨워줄게. 하르페이아는 다음 강의 준비를 해주지 않겠나?”

 

친근한 어투 바로 뒤에 따라붙는 격식 차린 장성의 말투. 그게 뭘 의미하는지는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하겠다며 휴게실을 나선 하르페이아의 뒤를 따라 아스널도 방을 나갔다. 방문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아스널은 문틈에 발을 끼워 넣더니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여기서 정분을 나누면 밖에 소리가 들릴 거라네. 생각보다 방음이 안 되는 곳임을 유의하게나.”

 

“그럴 생각 아니니까 경고해줄 필요는 없어.”

 

“그래? 칸 네 얼굴에는 그렇게 안 쓰여 있어서 말이야. 모쪼록 과격하게만 하지 말도록.”

 

“...시끄러우니까 빨리 나가.”

 

아스널은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문을 닫았다. 왠지 자신의 마음을 간파당한 것 같아 썩 기분이 좋지 않은 칸은 리마토르에게 시선을 돌렸다. 안 좋은 감정을 전부 그와 관련된 상념으로 덮어버리고 싶었다. 그녀는 다리를 모으더니 허벅지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피곤하지? 여기에 누워.”

 

“...그 정도는 아니에요.”

 

“괜찮아. 내가... 해주고 싶은 거니까.”

 

칸은 일부러 잠시 말에 뜸을 들였다. 자신이 전달하려는 의사에 더 힘을 주어 말하는 화법이 효과를 받는지 주저하던 리마토르는 그녀의 허벅지 위로 머리를 뉘었다. 그 사이에 빨갛게 달아오른 그의 귀를 손끝으로 매만지며 그녀는 자신의 볼에 색을 이염(移染)했다.

 

“한숨 자. 고생 많이 했잖아.”

 

“알겠어요. 깨워줘야 해요.”

 

“물론이지.”

 

리마토르는 자신의 세상에 어둠을 덮었다. 단련된 근육의 탄탄함 위에 적절히 붙은 지방이 그녀의 여성성을 과시했다. 시각으로 즐거움을 주는 형상은 촉각으로도 같은 감각을 주었다. 부드러운 한편 자신의 머리를 받쳐주는 든든한 감각을 머리로 느끼며 리마토르는 점차 수면의 수면(水面) 아래로 가라앉았다.

 

“....”

 

복식호흡이 흉식호흡으로 바뀌자 칸은 왼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직이 코까지 고는 걸 보면 쉽게 깰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혹여나 자신이 그의 수면을 방해할까 갓난아이를 다루듯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했다. 그녀는 잠든 그에게 전해지길 바라며 조용히 속삭였다.

 

“아무래도 난 내 생각보다 당신을 훨씬 더 좋아하고 있나 봐. 

 

그래서 정말 다행이야. 당신이 내 남편이라서.”

 

칸은 밝은 곳에서 그가 조금이나마 더 푹 잘 수 있도록 그의 눈을 손으로 덮었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들숨과 날숨이 그녀를 간지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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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 나오기 전에 짧은 단편 한 편. 전편에서 데리다에 대한 설명이 너무 어렵다는 지적이 많이 나와서 이번 편에서 데리다를 짧게 정리해봤어. 전편에서 다룬 데리다의 사상은 전기 부분까지니까 이번 편에 나온 설명도 전기 데리다 사상까지만 해당하는 걸로 봐주면 좋을 거야.


다음 편은 언제쯤 나올지 모르겠다... 들뢰즈의 주요 사상 중 상당한 부분이 동료 철학자 펠릭스 가타리의 사상과 엮여서 제시되었기에 들뢰즈의 사상을 짚어보면서 가타리의 사상도 가볍게 보려고 하는데, 그러다보니 또 다시 분량이 너무 방대해지고 내용이 난해해지는 것 같아서 조정이 필요할 것 같아. 생각해둔 이야기는 한 무더기인데 진도가 너무 안 나가니 답답하네.


날씨가 점차 쌀쌀해지고 있다. 다들 감기 조심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