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폐허가 된 시애틀 항구의 근해. 레모네이드 감마는 닻에 묶여 바다에 가라앉고, 두번째 인간 일행은 훔친 배에 타서 스발바르 제도로 출발한 직후의 일이었다. 

'촤악!' 바다에서 범고래를 닮은 신형이 튀어올라 가까운 군함의 갑판 위에 착지했다. 뒤에 범고래의 꼬리가 달려있는 여자는 들고있던 닻과 거기 한 세트로 붙어있는 백발의 여자를 쿵 내려놓았다.

"꼴이 말이 아니군요. 도대체 뭘 하고 다닌겁니까?"

"크핫, 설명하자면 길지!"

감마가 팔에 힘을 줘 쇠사슬을 뚜둑 끊어버린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케스토스 히마스 건틀렛을 벗고 물에 젖은 머리를 쥐어짜던 그녀는 자신을 건져올린 여자에게 눈길을 향했다.

"이거 참, 굳이 안도와줘도 혼자서 나올 수 있었는데 말이야."

"그냥 평범하게 도와줘서 고맙다고 하면 안됩니까?"

"크큭, 원한다면야. 참 고맙다, 메로페."

메로페,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범고래 유전자를 섞어 만들어진 바이오로이드로 원래는 삼안의 가디언 소속이었으나 지금은 포세이돈의 장교로서 근무하고 있었다.

"임무는?"

"잘 완수하고 왔습니다. 당분간 오메가는 저희쪽 움직임을 보지 못할 겁니다."

메로페가 이번 전투에 참전하지 못했던 건 감마로부터 부여받은 다른 임무를 하느라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었다. 메로페는 고게를 슥 돌려 까만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군함들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그래서 대체 뭘 하다가 저희 함대가 개박살이 난 건지 설명 좀 해보시죠. 어나이얼레이터 호까지 못쓰게 된 거 같은데, 그 호라이즌이란 놈들한테 진겁니까?"

"오르카 저항군의 호라이즌 함대 및 두번째 인간 패거리와 교전이 있었다."

메로페의 질문에 대답한 건 감마가 아닌 카리나였다. 바닷물에 적셔진 제복이 다 마르지도 않은 채로 다가온 그녀는 감마에게 수건을 한 장 건네줬다. "오, 고맙군."

"두번째 인간? 분명히 잡았다고 하지 않았나?"

"호라이즌과의 교전 도중 탈옥해서 선상반란을 일으켰다."

"...그레서 안팎으로 개털리셨다?"

"할 말이 없군."

카리나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적 중에 머메이드가 있다는 얘기는 꺼내지 않았는데, 이는 원체 카리나가 불필요한 수다는 잘 하지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이었다. (멀린이었으면 누가 묻지 않아도 머메이드도 있었다고 나불거렸을 거다.)

카리나가 더 말할 것 같지 않자 메로페는 수건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있는 감마를 돌아봤다.

"총력전 하겠답시고 제 관리하에 있는 함대까지 다 끌고가놓고선 그 결과가 이겁니까? 한번에 다 날려먹을 거였으면 제 함대는 남겨놨어야죠!"

"크흐흐...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그래서 전쟁이란 게 재밌는 거 아니겠나?"

"저거 다 수리하는데 들어갈 비용과 시간을 계산한 뒤에도 웃을 수 있나 보죠."

"내가 걱정할 게 뭐있나? 난 도장만 찍으면 되는데. 고생은 니들이 해야지."

감마가 카리나한테 수건을 던지듯이 건네주며 어깨를 으쓱하자 둘은 짜게 식은 눈으로 그녀를 째려봤다.

레모네이드 감마가 포세이돈의 총대장으로 군림하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모든 병력을 한꺼번에 관리하는 건 아니었다. 제 1함대 대장 카리나, 제 2함대 대장 메로페 이런식으로 그녀의 부관들이 함대를 나눠 관리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늘 그렇듯이, 고생하는 건 언제나 이들같은 중간관리직이었다. 물론 항의같은 선택지는 없었다. 카리나야 철저한 상명하복이 기본값인 예스맨이고, 메로페는 제 목적인 복수를 이루기 위해서라도 감마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었다.

"후... 그건 됐고, 트리톤은 또 어디갔습니까? 파괴된 겁니까?"

"두번째 인간이 데려갔다."

"노획당한 겁니까?"

"아니. 트리톤이 스스로 투항했다."

카리나가 대신 해준 대답에 메로페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포세이돈의 대우가 불만이라더군."

AGS가 불만도 품고 그러나? 아니, 그보다 왜 하필 오르카 저항군보다도 약한 두번째 인간한테 간 거지? 메로페가 머리속에 떠오른 의문을 정리하는 한편, 카리나는 도로 감마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감마님. 함대가 출전할 수 있는 상태가 되면 그 두번째 인간을 추적하실 예정입니까? 트리톤을 탈환하든 파괴하든 해야할테니."

"그쪽은 냅둬. 마음대로 활개치도록 두는 편이 더 재밌을걸."

"그렇습니까."

"...약속한 것도 있고 말이지."

감마가 작게 중얼거렸다. 마지막 문장을 제대로 못들은 카리나는 눈을 깜박거렸다.

"왜 아직도 여기있냐? 가만있음 배가 저절로 고쳐지는 줄 알아? 빨리 가서 일해!"

감마는 그녀가 되묻기 전에 선수를 쳤다. "난 좀 씻어야겠다~" 감마가 비키라고 팔을 내젓고선 함교로 성큼성큼 걸어가자 그녀의 부관들은 양옆으로 물러섰다. 메로페는 슬쩍 카리나한테 가까이 붙어 운을 띄웠다.

"왠지... 요즘들어 감마님 분위기가 바뀐것 같지 않아?"

"다른 레모네이드들로 스트레스 받다가 간만에 재미 좀 봤으니 기분이 풀어진 거겠지."

"감마님 기준으로 '재미'를 볼 때마다 우린 죽어나간다만..."

"즐기시게 놔둬."

카리나도 감마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메로페는 그런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둘 앞에선 차마 꺼내지 못했던 단어를 입에 담았다. 

"인간이라..."

천성이 인간을 모시고 보호하기 위해 설계된 바이오로이드라 한들, 다른 세력에 산 인간이 있다는 정보를 접해도 딱히 전향하고 싶다는 생각따윈 안들었었다. 그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델타한테 죽은 자매들의 원수를 갚는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 필요한건 막강한 무력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인간은, 분명히 약소세력일 터인 그 인간은 메로페가 인정한 무력을 지닌 포세이돈을 농락했다. 운인지 실력인지, 포세이돈과 호라이즌의 고래싸움 속에서 어부지리로 득을 보고, 아무런 손실도 없이 빠져나갔다는 그의 얘기에 조금 관심이 생겼다

트리톤이 무슨 생각으로 두번째 인간에게 간 것일지, 그는 지금 뭘 하고 있을지 괜히 궁금해졌다.



감마 부관이 메로페라고 공식설정 떠버려서 한번 써본 설정구멍 땜빵용 외전. 카리나는 포세이돈 제 1함대 대장이고, 멀린은 제 2함대 대장이었으나 부재중이라 메로페가 그녀 자리를 꿰찼다는 설정임

외전인 이유는 이게 실제 메로페 성격같은 설정에 맞는지 불확실해서 애매하게 남겨둔거. 시기상으로 39화랑 40화 사이에 냈어야할 에피소드라서 늦었기도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