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용의 무적함대는 전부 다 스발바르 제도에 와있는 게 아니었다. 함대의 항적을 쫓는 펙스를 엉뚱한 곳으로 유인하기 위해 여러 분견 함대를 사방으로 보내는 기만전술을 펼쳤었다. 지금 오르카호와 함께 스발바르 제도로 온 건 무적함대 본래 병력의 반도 안된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이 기만전술은 성공적으로 펙스의 추적을 뿌리칠 수 있었을 테였다. 그러나 누가 알았겠는가, 레모네이드 오메가가 용이 뿌린 미끼 함대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두번째 인간의 뒤를 쫓아올 줄을.


변수와 변수가 겹쳐짐으로서, 용의 병력분산은 악수가 되어 돌아왔다.


한편 사령관은, 느닷없은 펙스의 등장에 멘붕하기 일보직전이었다. 펙스가 본격적으로 물량공세로 밀고들어오면 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위치 노출을 최대한 자제해 전면전을 피해온 건데, 어째서 이렇게 된 거란 말인가.


두번째 인간은 오메가와 동맹을 맺었던 건가? 아님 더 나아가 펙스를 집어삼켰나? 에바가 우릴 여기 불러온 것도 함정이었나? 어디부터가 함정이었지? 나는 언제부터 그 함정에 휘말린 거고? 두번째 인간은 어디까지 손을 뻗친거지? 승산이 있긴 한건가? 불안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한 치 앞도 볼 수 없게 되었다.


무적의 용은 사령부가 마비됐음에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포격을 멈추지 마시오! 적이 접근하게 둬선 안되오!"


앞에는 두번째 인간의 불침함, 뒤에는 펙스의 대군. 둘을 한꺼번에 상대하느라 안그래도 부족한 병력을 또 분산시킬 수는 없었다. 용은 두번째 인간 쪽에 포탄을 낭비하는 걸 관두고 방어에만 집중하라 명한 뒤 펙스에게로 공세를 돌렸다. 두번째 인간이 불확실한 위험요소라면, 펙스는 눈을 떼선 안될 명백한 적이었다.


***


"지금 오르카와 싸우고 있는 건 펙스의, 레모네이드 오메가의 함대입니다!"


새로 난입한 세력의 판명을 끝낸 와쳐가 말했다.


"오메가의? 대체 여길 어떻게 알고..."


9지역 막바지에, 펙스 유미가 미국에 남아 실시간 추적장치를 무력화시켜서 펙스가 오르카호를 쫓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오르카호가 떠나고 볼일 다 본 유미가 자리를 비우자 추적장치가 재활성화됐고, 우리가 떠날땐 그걸 막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 


세상에, 오르카호가 하루만 늦게 왔으면 펙스군이랑 마주칠 예정이었네. 아이고 이런 거지같은 팔자야.


"대장, 저건 안쓰는 거야? 저것도 폭탄 같은데."


네오딤이 무기고 안에 있는 짤뚱한 미사일 같이 생긴 물건을 가리켰다. 바로 폭뢰였다. 대잠용 무기이니 잠수함인 오르카호를 공격할 좋은 수단이겠지만...


"저건 쓸 방법이 없어. 전용 발사기에서 쏘던가 항공기에서 떨구던가 하는 식으로 사용하는 물건인데 우리에겐 둘 다 없으니까." 


"그럼, 내가 초능력으로 집어던져볼까?"


"아니... 오르카호에 닿기 전에 격추될거야. 그 오르카호가 잠수해있는 정확한 위치도 모르고."


"폭뢰는 대상에 직접 맞출 필요 없이 가까이서 터지기만 해도 충분하다. 초정밀기기인 잠수함 특성상 조금만 장갑이 손상되도 치명적이기 때문이지."


"오르카호의 대략적인 위치라면 알 수 있습니다. 좀 전에 잠수한 그 자리에서 벗아나지도 않았을테니까요. 만약 그랬다간 호위함이 같이 움직였을텐데, 그런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트리톤과 와쳐가 차례대로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보나마나 무적함대의 정중앙에 있을텐데 거기까지 폭뢰를 옮길 수단이 없잖아. 이 배를 거기까지 갖다댈수도 없고."


"...와쳐. 오르카호의 위치를 알려주세요."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움찔한 나는 천천히 뒤돌아봤다. 와쳐에게서 좌표를 전달받은 레아는 요정같은 날개를 펼치고선 폭뢰 하나를 집어들고 둥실 날아올랐다. 


"웃차, 조금 무겁네요..."


"레아...? 뭐하는거야?"


"걱정마세요, 주인님. 그저 해충의 둥지를 정리하는 일이니까요."


"뭐? 아니...레아, 잠깐만."


레아가 멋대로 급발진하려하자 나는 급히 불러세웠다.


"너무 위험해. 트리톤하고 다른 애들이 시선을 끌어준다 해도, 저 사이로 날아가는 건 너무 무모한 짓이야. 그냥... 놈들이 펙스랑 싸우느라 정신팔린 틈에 도망치자고."


"오메가가 저를 쫓아왔을때, 저는 적극적으로 응전하지 않고 동생들을 챙겨 달아나는 것만 생각했어요. 그 안일함 때문에, 저는 동생들을 모두 잃어버렸어요."


갑자기 그녀의 죽은 페어리 자매들 얘기가 나오자,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주인님. 주인님은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레아는 작별인사를 하듯, 싱긋 웃음을 띄웠다.


"다녀올게요."


"레아, 기다려...!"


그 직후 눈빛이 변한 레아는, 내 말을 끊고 무적함대를 향해 날아가 순식간에 배에서 멀어졌다. 트리톤이 쏘고있는 미사일보다 더 높이 날아오른 그녀는 악천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오히려 바람의 흐름을 타 속도를 높였다.


*


"적 오베로니아 레아의 접근을 확인! 폭탄을 들고 있습니다!"


"당장 요격하세- 꺄악!!"


레아를 발견한 호라이즌 병력이 공격하려들자 낙뢰가 쏟아져내렸다. 지근거리라면 파뢰침을 무시하고 번개를 떨어뜨릴 수 있었다.


양측에서 쏟아지는 공격에 호위함들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었던 덕에, 그너는 마침내 오르카호가 잠수한 장소의 바로 위에 도달할 수 있었다. 폭뢰를 잡고있는 두 팔을 위로 치켜들었다. 

다시는 소중한 사람을 잃고싶지 않았다.


"주인님을, 내 가족들을 건드리지 마!!"


팔을 확 내리면서 손을 놓았다. 잡고있던 폭뢰가 떨어졌다. 무겁고 커다란, 유선형의 탄체를 띄고있는 병기는 바람을 무시하고 수직으로 떨어져내려 바다에 빠졌다.


폭뢰, 대 잠수함전의 가장 기본적인 병기. 대잠 어뢰처럼 자체적인 동력이나 유도 기능도 없는, 단순한 구조의 수중 폭탄. 그러나 1발만으로도 워낙 고위력이라 잠수함을 직접 맞추지 못하더라도, 근처에서 터지기만 해도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가성비 좋은 무기다.


그리고 오르카호. 오르쿠스급 잠수함을 개조해서 만든 이 물건은 타이런트같은 거대병기를 실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다시말해, 피탄면적이 매우 넓다. 심지어 이곳은 스발바르 제도의 근해라서 수심이 깊지가 않다. 대양의 깊은 심도에서 오랫동안 잠수할 수 있는 원자력 잠수함의 장점이 봉쇄된 환경이었다.


정확한 위치를 알 필요는 없었다. 대략적인 위치만으로 충분했다.


'퍼엉–!!'


폭뢰가 터지며 무적함대의 정중앙에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충격파가 오르카호의 외벽에, 메인 브릿지의 유리창까지 전달됐다. 외벽의 일부분이 망가져 수압을 못버티고 누수되기 시작했다. 


함내 비상상황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다. 오르카호엔 격벽을 내려서 침수구역을 즉각 격리시키는 시스템이 준비되어 있으나, 이번에는 쓸 수 없었다. 오르카호의 바로 위에 폭뢰가 떨어졌고, 따라서 손상을 입은 곳은 오르카호의 제일 위층이다. 창고, 기록물 보관실, 함장실, 그리고 원격 전투지휘실이 있는, 격리대상에서 제외되는 제일 중요한 층이었다.


어물쩡대다간 영원히 바다에 가라앉는다. 오르카호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오르카호가 부상했다, 전장터의 한복판에서. 단 한번의 폭뢰로 인해 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위태로운 모습은 용과 오메가, 두번째 인간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죽어!! 죽어버려, 이 해충!!"


레아가 광기어린 눈으로 천둥을 끌어모으던 그 때, 세이렌이 그녀를 향해 대공포를 쐈다. 직격은 피했으나 그녀의 비행장치가 맞고 말았다. 유리가 깨지듯이 날개가 산산조각나고, 레아는 날개 파편과 함께 추락했다.


그러나 바다에 빠지기 전, 페레그리누스가 그녀를 받았다.


"누님, 이만 여길 뜹시다!"


글라시아스는 크게 날개짓을 해 눈보라를 일으키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골칫덩이였던 두 AGS가 그 공격을 마지막으로 전선을 이탈했지만, 무적함대 입장에선 결코 상황이 호전되었다고 볼 수 없었다.


자체적인 무장 하나 없는 오르카호와, 너덜너덜해진 호위함들. 오메가 입장에선 뜻밖의 호기였다. 저것이 분명 그 사령관이 타고있는 오르카 저항군의 기함일 것이다.


만약 오메가가 사령관을 생포해야만 했었다면 거리낌없이 공격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원한도 있는데다, 질리지도 않고 자신을 방해하는 오르카를 뿌리뽑아야 펙스의 천하통일에 더 가까워진다. 뿐만 아니라 오메가 입장에선 사령관이 죽는다해도 두번째 인간이라는 보험이 있는 셈이었다. 죽여도 상관없다, 아니, 죽여야만 한다. 오메가는 공격을 망설이지 않았다.


펙스의 모든 함포가 무방비하게 노출된 왕을 겨누었다. 남은 호라이즌의 함선들이 몸으로라도 펙스의 공격을 막으려했으나, 이미 늦었었다.


[없에버려!!]


오메가의 입에서 나온 단 한마디 명령이, 전파를 타고 펙스의 전 함대에 하달되어, 오르카호를 향한 집중포격이 시작되었다.


펑, 퍼벙. 연이은 폭발음이 바다를 울렸다. 오르카 저항군의 기함이자 상징인 하얀 돌고래는, 곳곳이 터져나가며 불길이 번지더니 이내 자욱한 검은 연기에 휩싸였다.


"수리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났어요!"


"대장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사령관님!!"


오르카호의 내부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폭음과 진동에 이어 바이오로이드 승무원들의 웅성거림이 함내를 매웠다.


오르카호가 가라앉고 시작했다. 잠수가 아닌, 침몰하는 중이었다.


처음이었다. 늘 안전한 곳에 있었던 오르카호가 강제로 전장으로 끌려나온 적은, 오르카호가 직접 공격받은 적은. 사령관이 패닉에 빠져 지시를 못내리고 있자 다급해진 지휘관들이 대신 마이크를 잡았다.


"전원 퇴함! 배를 버려라!!"


함내방송으로 울려퍼진 마리의 탈출 명령에 오르카호 승무원들은 전투원 비전투원 가리지 않고 일사분란하게 비상탈출포트로 몰려들었다. 


"침착하세요! 자리는 많이 남아있습니다!"


"6번 탈출선, 만석! 내보내겠습니다!"


혼란스러운 군중을 최대한 진정시키며 탈출을 유도하는 경찰들.


"자, 잠깐 기다려주십쇼! 짐을 못챙겼-"


"다 필요없으니까 빨리 타지 못하겠냐!"


얼타는 일병의 엉덩이를 걷어차 탈출정 안에 밀어넣는 토끼귀 후드의 병장.


"권속!! 에이미!!"


"공주님, 꽉 잡고계세요!"


뛰다 넘어져 울음을 터뜨린 푸른 머릿결의 소녀를 끌어안고 달리는 금발의 여인.


누군가는 비상탈출용 잠수정에 타고, 누군가는 이판사판으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오르카호에서 무수한 탈출정이 사방으로 사출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출격포트가 열리면서 오르카호의 본대가 벌집을 건드렸을 때의 벌떼마냥 쏟아져나왔다. 둠 브링어, 스카이나이츠, 그리고 알바트로스를 위시로 한 AGS 공군이 악천후에도 아랑곳않고 날아올랐다. 이젠 그들이 초조한 입장이었다. 무적함대와 함께 펙스를 막으랴 승무원들을 구조하랴 정신이 없었다. 


대체 누가 죄를 지었길래, 이 모든 이들이 고통받고있는 것인가.


"주인님, 이쪽으로!"


블랙 리리스가 사령관의 손을 잡고 탈출정으로 달려갔다. 이윽고 사령관을 포함해 오르카호의 지휘관들이 탄 탈출정이 사출되었다. 사출된 방향은 펙스의 함대가 오고있는 방향의 반대쪽이었다.


***


"레아..."


페레그리누스가 조심스럽게 레아를 내려놓자 그녀는 비틀거리다 내게 안겼다.


"괜찮아?"


"네...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해요, 주인님."


"...무사해서 다행이야. 정말 잘해줬어."


여기서도 오르카호가 침몰하는걸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의외로 저 꼴을 봐도 별 생각이 안든다. 레아는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달라는 듯 팔에 힘을 주고 나를 한번 꼬옥 안고선, 제 발로 일어섰다. 네오딤이 내 옷지락을 잡아당겼다.


"대장. 뭔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어. 물 속에서, 금속 물체가..."


"어뢰인가?"


"아니야. 커."


네오딤이 바다에 손을 뻗었다.


***


지휘관들이 한시름 놓기도 전에, 탈출정이 덜컹 흔들렸다. 빙산에 부딪힌 것 같지는 않았다. 탈출정이 급격하게 수면 위로 부상했다. 이어서 탈출정의 지붕이 저절로 뜯겨져나가 하늘이 보이자, 안에 타고있던 모든 이들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두번째 인간의 배가 눈 앞에 있었다. 갑판에서 두번째 인간과 그의 일행이, 초라한 탈출정에 몸을 실은 사령관과 오르카 지휘관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철컥!' 리리스가 번개같은 속도로 두번째 인간의 머리를 향해 블랙 맘바를 겨눴다. 그러나 그녀도 결국은 바이오로이드, 명령 없이는 인간을 쏠 수 없었다.


"주인님, 명령을!"


사령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할 수 없었다. 자신을 발견하고 받아들여준 오르카 저항군을 진심으로 아꼈으며, 항상 오르카를 위해 결정을 내리고, 움직여왔다.


구인류가 저질렀던 숱한 악행에 대해 전해들은 그는 인간을 극도로 경계하게 되었다. 자신을 제외한 인간은 모두 자신의 가족을 위협할 잠재적인 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또다른 인간이 나타났을 때도 마찬가지로 '오르카 저항군을 위해' 움직였다. 그랬을 터였다. 


그런데 이 풍경은 뭐란 말인가. 이런 결과를 바란게 아니었는데.

언제, 어디서부터 잘못됐던 것인가. 두번째 인간이 탈옥했을 때부터? 아니, 그에게 누명을 씌우고 투옥시켰을 때부터?


처음이었다. 이만한 후회감에 휩싸인 것은.


두번째 인간도 사령관을 보고 약간 놀란 눈치였으나, 사령관은 그에 비할 바가 못됐다. 그는 완전히 패닉에 빠져 두번째 인간을 올려보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명령을! 명령을 내려주세요, 주인님!"


리리스가 재촉했으나 사령관은 여전히 움직이질 못 했다. 네오딤이 손가락을 까딱하자 리리스가 쥐고있던 쌍권총이 그녀의 손아귀를 벗어나 허공에 떠오른 채 리리스와 사령관을 겨누었다. 심지어 마리와 레오나가 꺼낸 무기도. 정신을 차린 리리스는 로자 아줄로 방어막을 펼치고, 지휘관들은 제 몸이라도 방패로 쓰기 위해 사령관의 앞을 가렸다.


그러나 그들도 알고있었다. 저들의 직접적인 공격을 막는다해도, 지금 그들이 서있는 탈출정을 파괴한다면 북극해의 영하의 바다에 빠져 얼어죽을 수 밖에 없다. 


"...이 순간만이 오기를 기다렸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정말로 이렇게 되니... 할 말이 안나오는군."


두번째 인간이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가, 고개를 들어 사령관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죽여."


그의 명령에 배 위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두번째 인간의 일행 모두가 살기를 물씬 풍기며 사령관에게 무기를 겨누었다. 보랏빛 기류에 감긴 탈출정에서 빠직빠직 우그러지는 소리가 났다. 리리스는 이를 악물었다.


"잠깐!!"


탈출정에서 어느 한 명이 지휘관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왔다. 그녀가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라 두번째 인간의 배에 올라타자 갈색 장발이 휘날렸다. 모든 이들의 무기 끝이 그녀에게로 돌아갔으나, 비무장 상태로 승선했기에 당장 공격하지는 않았다. 낯익은 얼굴을 눈에 담은 두번째 인간은 나지막히 그녀의 이름을 읊조렸다.


"로열 아스널..."


*



"후후, 못 본 새 신수가 훤해졌군."


아스널은 살짝 씁쓸함이 담긴 듯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밀린 화포를 풀고싶은 마음같은 건 들지 않았다. 내가 무얼 하러 온 거냐고 묻기도 전에, 아스널이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냈다.


"그대여. 부디 이쯤에서 멈춰주지 않겠나."


아스널이 한 말에 내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멈춰? 지금 저놈을, 살려달라고? 저놈이 나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었을때, 그 빌어먹을 판결을 멈추기라도 했나?"


"물론 그대의 분노는 정당한 것이지. 사령관이 그대에게 너무한 짓을 저질렀다는 건 잘 알고있네만, 그렇다고 어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게 내버려둘 수 있겠나."


"...사랑?"


아스널이 양 허리에 주먹을 얹고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무얼 숨기랴, 나는 그이를 사랑한다네! 아직 여러모로 미숙하고, 실수도 자꾸 하고, 종종 기행도 벌이고, 자네도 봤다싶이 다른 인간을 대하는 대인관계능력은 특히나 형편없는 못난 남자지만! 정신차려보니 난 어느새 그에게 빠져있더군. 육체적으로도, 심적으로도. 비록 아직 반지는 받지 못했네만, 언젠가 아내 될 자로서, 남편이 무례를 저질렀다면 고개를 숙여야겠지. 그를 용서하지 못하더라도, 내 목을 바침으로서 그를 살려줄 수만 있겠다면 기꺼이 그리하겠네."


"아스널 준장! 지금 무슨 망발을 지껄이시는 거죠!? 주인님의 얼굴에 먹칠을 할 작정입니까!!"


"고작 잘못을 인정하는 정도로 들기 힘든 낯짝이라면 허울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아스널의 일갈에, 발끈했던 리리스는 오히려 경직되어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윽고 아스널은 쿵 소리나게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오르카 저항군 준장, 로열 아스널! 저희 오르카 저항군이 귀하에게 저지른 수많은 죄를! 사령관을 대신해서, 깊이 사죄를 드리는 바입니다! 정말로, 죄송할 짓을 했습니다!!"


아스널의 도게자에 주위에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사령관을 향한 살의가 약간 누그러진 것 같기도 했다.


"...사령관이, 그렇게까지 해서 살릴 가치가 있나?"


"사랑에 눈이 멀은 제멋대로인 여자라고 욕해도 좋네. 나는 그이가 살기를 원하네. 그리고 그대도 마찬가지로."


...나도?

나는 잠시 침묵했다가, 한가지 질문을 던졌다.


"왜 그 날 내가 도망치는 걸 도와줬지?"


"내가 그대를 놓아준 건, 순전히 그대의 살고싶어하는 열망을 짓밟고 싶지 않아서였네. 그대가 복수귀가 되어 돌아오는 걸 보고싶어서가 아니었다네."


아스널이 고개를 들어 나랑 눈을 마주쳤다. 


"그러니 그대여, 그 때 나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고 해주지 않겠나? 나는 더이상 이 땅과 바다에 인간의 피가 흐르기를 원치 않네. 부디, 두 명 이상의 인간이 공존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도록, 그에게 더 나은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게."


당당하다고 해야할까, 뻔뻔하다고 해야할까. 나는 바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고개를 위로 들어 아무것도 없는 하늘을 쳐다봤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나도모르게 점점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몸이 떨렸다.


기회. 그래, 기회. 저 망할 놈을 죽일 기회가 눈 앞에 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는가. 저 사령관놈에게 죽을뻔한 뒤로, 누구에게도 위협받지 않고 나만의 세력을 꾸리기 위해 야생으로 뛰쳐나왔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사람들을 모으는 것 만으로는 안된다. 위협이 될 요소를 제거해야만 한다. 바로 저놈을.


그렇지만,


단 한번 뿐이라 해도, 


아스널의 자비에 목숨을 구원받았던 건 사실이다. 나는 그녀에게 은혜를 입었다. 그리고 그녀가 요구하는 건 참으로 간단한 일이었다. 살인을 하지 말아달라, 단지 그것 뿐이었다.


빌어먹을.


천천히 몸의 떨림이 멎었다. 고개를 내렸다.


"...전부 무기 내려."


총 끝은 바닥을 향하고, 포구는 하늘을 향했다. 초능력 사용으로 인한 공간의 일렁거림이 사라졌다. 허공에 떠있던 무기들이 바다에 퐁당 빠졌다.


"감사하네. 그대여."


아스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음은 없어, 아스널. 니 얼굴 봐서 넘어가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그렇다면 다음엔 사령관이 직접 고개숙이고 사과하도록 만들어놓겠네! 내가 책임지고 벼르장머리를 고쳐놓지!"


아스널이 단호한 눈빛으로 호언장담했다. 내가 뭐라 말하려다 말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그녀는 등을 돌려 지붕이 뜯겨나간 탈출정으로 옮겨탔다.


"포츈, 배를 출발시켜! 이젠 여기에 볼일없으니까!"


배는 사령관과 지휘관들이 타고있는 탈출정으로부터 점점 멀어졌다. 더이상 서로간의 공격은 오가지 않았다.


"여어, 잠시 괜찮을까?"


페레그리누스가 양반다리로 앉으면서 멍하니 서있던 나를 불렀다. 페레그리누스는 글라시아스와 한번 시선을 교환하더니, 스피커를 열었다.


"기회를 잡자마자 복수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시 봤어. 니네들끼리 싸움이 시작되는 통에 누님 마음고생이 엄청 심했거든."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선 줄곧 마음이 편찮았단다. 그런데... 그대가 미처 불가능할거라 생각했던 제 3의 길을 보여준 덕분에 마음의 짐을 덜을 수 있었다. 그를 살린다는 결정을 내려주어 고맙구나."


"...니들 안내리는 거야?"


"뭐, 계속 들어봐. 꼭 인류를 지킨다는 사명이 아니더라도, 그냥 네가 마음에 들었거든."


"우리는 이곳에 오기 전, 스스로를 에바라고 칭하는 여성을 만났었단다. 그녀는 최후의 인간이 자신의 소중한 사람이고, 도움을 필요로 하니 그를 잘 부탁한다는 말도 남겼단다."


"그러니 원래는 저쪽에 갔어야 했지만... 어차피 쟤들은 아직 남는 배도 많은게 우리 없어도 알아서 재기할 수 있을 것 같더라. 반면 여긴 워낙 위태위태하니까...

누님하고 나는 너흴 따라가기로 정했어. 너를 위해 싸우는 것도 괜찮겠지. 에바나 누가 부탁하지 않아도, 우린 너를 목숨걸고 지켜주겠어."


페레그리누스는 오른손에 주먹을 쥐고 제 왼쪽 가슴을 퉁 소리나게 쳤다. 인간이었다면 심장이 있을 위치였다.


"그렇게 됐으니 앞으로 잘부탁해. 한번 멸망했는데도 뭐가 잔뜩 남은 희한한 세상이지만..."


페레그리누스가 그 주먹을 내게로 내밀었다. 뭘 원하는지 눈치챈 나는 주먹을 들어 그의 주먹을 툭 쳤다.


""정의롭게 살자고.""


"찌찌뽕."


"이런, 한 방 먹었군."


페레그리누스는 작게 한번 웃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너, 기억의 방주에 유전자 씨앗이나 좀 건지러 왔다고 했지?"


"이제와서 유턴하자는 말이라면 관둬."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위로가 될런지 모르겠지만, 마침 내가 하나 갖고있거든."


내가 변신로봇이라 몸 안에 남는 공간이 좀 있단 말이지. 페레그리누스의 가슴이 철컥거리며 열리더니, 그 안에 손을 집어놓고선 작은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꺼내 내게 건네줬다. 음료수 캔 사이즈의 유리통 안에는, 초록색 씨앗같이 생긴 무언가가 들어있었다.


"이건..."


"사이클롭스 프린세스의 유전자 씨앗이야."


***


오메가는 자신에게 직통으로 걸려온 통신에 미간을 와락 구겼다. 통신을 수락하자 홀로그램 화면에 진홍색 머리를 한 여인의 얼굴이 띄워졌다. 레모네이드 델타였다.


[남의 영해에 아무런 언질도 없이 군대를 끌고오다니, 무슨 짓이지 오메가?]


"당신이 무능해서 못보고있는 인간의 분함대를 대신 정리해주는 중이니 입 다물고 계시죠?"


유럽 코앞에서 이렇게나 판을 벌리면 델타의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메가가 델타의 난입으로 일이 꼬일것을 우려해 인간의 본대가 와있다는 정보를 숨긴 탓에, 델타는 오메가를 의심하게 되었다.


[하, 자기 본진에 들어온 인간과 떨거지들을 전부 놓친 년이 잘도 지껄이네. 이걸 빌미삼아 유럽에 병력을 상륙시켜 개수작부리려는 건 아니고?]


"원랜 유럽에 볼 일은 없었지만 당신과 얘기하다보니 없던 용건이 생길 것만 같네요. 정말로 서열정리 들어가야 얌전해지려나요?"


[내가 야만적인 싸움을 즐기는 건 아니지만, 니년 콧대를 꺾어줄 수만 있다면야 응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오메가와 델타는 화면 너머의 서로를 노려보며 기싸움을 벌이다가, 델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경고하겠어. 당장 병력를 물려, 안그러면 정말로 전면전이니까...!]


델타가 거칠게 통신을 뚝 끊어버리자 오메가의 이마에 힘줄이 빠직 돋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한 년 주제에...!"


오메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냉정하게 생각했다. 안그래도 슬슬 철수할 타이밍이었긴 했다. 


오르카호는 격침시켰으나 제일 중요한 사령관의 생사는 확인하지 못했고 두번째 인간은 난리통에 놓쳐버렸다. 그렇다고 잔당을 정리하고 인간을 찾을 여유는 없었는데, 이유인 즉슨 용이 사방에 퍼뜨렸던 호라이즌 분함대가 속속 집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체했다간 자신의 함대가 포위될 상황이었다. 


인간은 못건졌어도 오르카 함대에 큰 피해를 입히는 데엔 성공했다. 당분간 오르카 저항군은 몸을 사리느라 펙스에 이를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오메가는 이 정도면 그리 나쁘진 않은 수확이라 판단하며 철수를 명령했다. 결과적으로 델타의 위협에 못이겨 그녀의 말을 따르는 것 처럼 되서 불쾌했지만, 델타랑 싸우느라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기도 싫었다.


펙스의 함대는 항로를 돌려 북미로 돌아갔다.


***


"용 대장님! 두번째 인간의 배가 떠나고 있습니다! 사령관님과 다른 지휘관 분들은 무사해요!"


세이렌의 보고에도 용은 침묵했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불안했던 세이렌은 눈치를 살피다가 재차 입을 열었다.


"추, 추격하겠습니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죠!"


"아니, 이제 됐소. 상황은 더 볼 것도 없이 일목요연하지 않소."


용은 글라시아스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오르카호의 끄트머리가 바다속으로 몸을 감추는 풍경을 허망하게 바라봤다. 두번다신 바다 위로 떠오르지 못할 돌고래의 끝을 눈에 담은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우리의... 완패요."


사령관을 대신해, 용이 상황 종료를 선언했다. 두번째 인간과 오르카 저항군, 그리고 펙스는 교차로를 벗어나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사랑만큼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이제부터 사령관네는 오르카호 없는 오르카 저항군입니다

이런 소설을 쓰긴 했지만 진짜로 오르카호 침몰하면 안된다... 1500참치로 챈 불타서 글 올리기 되게 난감했었는데 불 꺼져서 다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