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사령관은 피해보고서를 읽으며 머리를 짚었다. 함대 병력 중 거의 절반이 만신창이가 된 것도 문제지만, 역시 오르카호가 침몰한 게 가장 컸다. 그 안에 들어있던 수많은 물자와 설비가 한꺼번에 날아갔으니까.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용이 타고다니던 호라이즌의 기함에 있는 회의실이었다. 오르카호의 넓은 회의실과는 달리 여긴 네 명 정도만 쓰던 작은 회의실이라 사령관을 포함한 간부들이 전부 들어오자 평소보다 좁다는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현재 우리가 가진 장비로 오르카호 자체를 인양하는 것은 불가능하오. 본관의 함대에 크레인선은 포함되지 않으니 말이오. 잠수부대가 최대한 물자를 찾아 건져올리고는 있소만, 그것도 대부분 침수되어 못쓰게 돼버렸으니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거요."


"제 케스토스 히마스도 여분까지 합쳐 두 대 다 잃어버렸으니, 예전같은 전자전은 무리겠네요."


사령관은 보고서를 탁자에 내려놓고 용과 알파에게로 눈을 돌렸다. 탈출정엔 사람만을 싣느라 물건을 넣을 자리는 없었다. 그 결정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나, 뼈아픈 손실인 건 사실이었다.


"새로 만들 수는 없는건가?"


마리의 물음에 알파는 고개를 저었다.


"설계도도 유실됐을테고, 무엇보다도 오르카 기술부 전원 반파된 군함을 고치느라 남는 손이 없으니까요."


"으음, 하지만 수복할 자재도 부족할텐데... 병력 중 일부의 전투모듈과 장비를 해체해서 부품을 충당하는 건 어떤가?"


"그렇게해서 얻을 수 있는 자원은 군함을 수리하기엔 턱없이 부족할 것이오. 일단 기술부엔 급한대로 운항만 가능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소."


"스발바르 제도에서 얻을 수 있는 자원은... 거의 없다고 봐야겠군요."


현재 스발바르 제도의 항구는 난민 캠프로 가득 매워져 있었다. 원래부터 오르카호에 상주하던 승무원들, 요안나 아일랜드가 망해서 옮겨온 이들, 오메가의 영토에서 데려온 지 한달 채 안지난 난민들이 무분별하게 섞여있었다.


언제 오메가나 델타가 나타날지 모르는 이상 스발바르 제도를 거점으로 쓴다는 당초의 계획은 버려야만 했다. 그나마 기억의 방주에서 므네모시네를 만나 에바가 함정을 판 게 아닐까 하는 오해는 풀 수 있었으나, 정작 방주는 델타의 손에 파괴된 지 오래여서 건질 수 있는건 거의 없었다.


"무기랑 의약품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식량이 부족한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안그래도 전 요안나 아일랜드 거주자들과 펙스 난민들을 받아들여 인원이 폭증했으니 말입니다."


"본관의 함대엔 3만여명의 병사들이 쓰기위한 식량이 비축돼있으니, 그걸 나눈다면 당장은 괜찮을 것이오.

그리고 주군. 기존 오르카호 승무원들은 남는 호라이즌의 배에 나눠타야 할 것이오. 그 모든 인원을 한번에 수용할 수 있는 배는 없으니 말이오."


"알파나 아르망은 내정 담당이니 사령관과 한 배에 타야겠지만, 블랙리버 출신 지휘관들은 굳이 그럴 필요 없지? 용을 제외한 부대 지휘관들은 각각 다른 배로 옮겨타야겠네. 원격회의 설비 정도는 다 갖추고 있을테고."


"윽, 하지만 그건..."


"사심은 넣어둬, 마리 소장. 나도 달링이랑 다른 지붕 아래서 잔다는 게 달가운 건 아니니까."


마리가 우물쭈물하자 레오나가 냉정하게 말을 끊었다. 그렇지만 그녀 자신도 표정에 불만이 드러나는 건 감출 수 없었다. 레오나 못지않게 불만어린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있던 메이가 입을 열었다.


"두번째 인간이랑 다시 조우하게 될 경우도 대비해야지. 정황상 그 인간이 펙스랑 손을 잡은 건 아닌 것 같지만, 지금 상태만으로도 쉬이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소수정예로 꽉 차있는데 더 세력을 불렸다간 정말 위험해질걸."


"하하, 걱정도 팔자군. 우리 사령관이 직접 머리박고 사과하면 좋게좋게 끝낼 수 있는 상대 아닌가!"


아스널이 사령관의 뒤통수를 철썩 후려치면서 호쾌하게 웃었다. 얼얼한 통증에 사령관은 눈을 흘겼으나, 결국 그녀덕분에 살아있는 몸이기에 아무말도 못하고 뒤통수만 문질렀다.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기도 하고. 


리리스도 마찬가지로, 사령관을 구한 건 자신이 아닌 아스널이었기에 아니꼬운 눈으로 째려보기만 할 뿐 터치하진 않았다.


"주인님, 들어가도 될까요?"


노크소리와 함께 콘스탄챠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령관이 허락하자 콘스탄챠가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라비아타 언니와 칸 소장님께 연락을 마쳤어요. 에바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는데, 더 기다리지 않고 즉시 귀환하겠다고 해요."


"음. 그렇다면 그들이 도착하는대로 출항할 수 있도록 준비해놔야겠군. 행선지를 추려보도록 하지."


"철충과 펙스 둘 다로부터 안전한 땅이 더 있기는 할까... 꼭 옛날로 돌아온 것 같네."


"어딜 가든 두번째 인간 세력이랑 마주치지만 않았으면 좋겠구려."


***


"어딜 가든 오르카 세력이랑 마주치지만 않았으면 좋겠네."


놈들이 날 쫓아오기를 관둔다면 좋겠지만, 저번처럼 방심하지 않고 각잡고 칼을 갈고 온다면 못이길테니까.


지금 이 배는 명확한 목적지 없이 바다 위를 떠돌고 있다. 오르카호처럼 첨단시설로 도배해놓지 않는이상 평생 배 안에서만 살 수는 없다. 안전한 땅을 찾아 자리를 잡아야만 한다.


나는 태블릿에 원작 오르카호의 이후 행보를 생각나는대로 적었다. 스발바르 제도에 자리잡은 다음엔 카페 차리고 놀고, 역바니 소동 벌이며 또 놀고, 데이트 공모전하며 계속 놀고, 아쿠아 랜드 짓고 실컷 놀고... 포스트 아포칼립스물 맞나 이거... 


그러다가 바르그가 스파이로 들어오면서 델타와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었는데, 전부 다 배경이 스발바르 제도였으니 이젠 일어나지 않을 일이 되겠군. 행선지를 예측할 수 없게됐다.


다만 그 다음에 오는 안개나라 이벤트는 다르다. 배경이 영국이니까. 


눈 먼 공주와 안개의 나라, 내가 라오 세계에 들어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봤던 이벤트. 오르카호가 멀린이 보낸 구조신호를 받고 영국에 와서 블라인드 프린세스와 멀린 일행을 구하는 내용이었지.


하지만 이 내용을 미리 알고있어봤자 내겐 의미가 없다. 영국은 특히나 철충이 바글바글한데, 거길 돌파하려면 오르카호 정도의 병력을 갖고있어야...


아니 잠깐, 잠깐 기다려봐. 저번 싸움으로 오르카 병력이 상당한 타격을 입지 않았던가? 오르카호는 침몰, 무적함대는 반파. 이렇게 너프먹은 상태로 영국의 철충 대군을 상대할 수 있나? 사령관놈이 여력이 안된다고 영국을 포기하기로 결정해버리는거 아냐? 아니, 그전에 오르카가 스발바르 제도를 포기하고 떠나서 멀린의 구조신호가 안닿는 데로 가버리기라도 한다면...


블프와 멀린이 구조되지 못하고 죽어버린다면 그건... 내게도 책임이, 없는 건 아닌가? 못 본 척 해도 되는건가...?


아니,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물론 블프와 멀린에 프리드웬까지 손에 넣으면 큰 전력이 되겠지. 하지만 무슨 수로 얻느냔 말이야. 너프당한 오르카보다도 훨씬 작은 게 우리인데.


그렇다고 나까지 포기한다면...


"......"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십니다."


달그락. 시키지도 않았는데 소완이 내 앞에 찻잔을 놓았다. 무슨 정해진 티타임이라도 있는건가. 소완이 약차차로 악명높긴 하지만, 이 시국에 냅다 약 먹일 정도로 어리석은 인물은 아니다. 나는 찻잔을 들어 후 불었다.


"바로 드실 수 있도록 알맞은 온도로 식혀놨사옵니다."


"...서비스 좋네."


한모금 호륵 마셨다.


"근데 이 배에 찻잎이 있던가? 이거 뭘로 만든거야?"


"미역으로 만들었사옵니다."


"미역차구나. 처음 먹어봐."


한모금 더 마시고 책상에 내려놓았다. 근데 소완은 왜 아직도 여기있는거지.


"항로를 정하지 못했나이까?"


"음."


건성으로 대답하자 소완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주인이시여. 외람되오나 그것 말고도 근심거리가 있어 보입니다만..."


"...티가 나?"


"무엇이 주인을 앓게 만드는 것인지 소첩에게도 들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건... 좀...

내가 대답하지 못하고 있자 소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주인께서 홀로 속을 앓고 계신다면, 소첩은 애틋한 마음에 그만 차에 자백제를 탈 지도 모르옵니다."


"...하지 마라?"


"주인께서 원하신다면야 그리 해야지요. 자백제를 쓰지 않는것도, 비밀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도."


소완은 눈을 지긋이 감고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주인이시여. 소첩은 결코 주인을 추궁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주인께서 품고있는 마음의 짐을 덜어드리고자 할 뿐이옵니다. 만일 소첩이 들어선 안될 내용이라고 판단하셨으면 말씀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은 잘해요..."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너 입 무겁지."


"물론이지요. 소첩이 어찌 주인의 기대를 실망시킬 수 있겠나이까?"


소완이 눈을 반짝 빛내며 생글생글 웃었다. 혼자서 고민하다 결단을 못내려서 이러고 있으니... 나는 소완의 눈빛에 못이겨 입을 열었다.


"지금 영국에 바이오로이드 생존자 집단이 있는데... 철충한테 포위당해서 굉장히 위태위태한 상황이야."


"주인은 그걸 어찌 알고 계시는 것인지요?"


그걸 설명할 수가 없으니까 다른 애들한테 못말하고 있는 거란다, 라고 대답하는 대신 급조한 변명을 꺼냈다.


"레모네이드 감마한테 들은 정보야."


소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지워졌다.


"그 작자의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


"믿으니까 이러고있지...? 아무튼, 그걸 알고 도와주러 갈 수 있는 건 어쩌면 나 하나 뿐일지도 몰라. 하지만 역시 너무 위험해서... 구하러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돼서 그래."


소완은 내 말에 생각하는 듯 흐으음, 하는 소리를 냈다.


"굳이 가야합니까? 소첩은 주인만 계신다면 다른 식충이들은 필요 없사옵니다. 깔끔하게 무시하시지요."


소완이 태연하게 꺼낸 말에 한쪽 눈썹이 절로 올라갔다. 


"야인마... 무시하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 반응으로 보아하니 이미 등 돌릴 생각은 없는걸로 보입니다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떠본거였냐. 내가 할 말을 찾는 사이 소완이 말을 이어나갔다.


"만약 그들을 돕지 않기로 결정하고, 그들이 죽게 된다면 어떨 것 같사옵니까?"


"후회하겠지, 그야..."


"그렇다면 가시옵소서."


순간 내가 잘못들었나 싶어 소완을 빤히 쳐다봤다. 그 독점욕 강한 소완이 이런 소리를 해? 소완은 저가 말하면서도 내키지 않는건지 약간 착잡한 얼굴이었다.


"...괜찮아?"


"괜찮을 리가 있겠사옵니까? 소첩은 주인께서 안전한 곳에만 머무르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허나 소첩또한 주인의 그 성격 덕에 구원받은 몸인 이상, 더 반대의견을 내는 건 너무 염치없는 짓이지요.

주인이시여. 미래에 후회하실 바에야, 여기서 후회하지 않을 결정을 내리소서."


나는 잠시 멍하니 그녀를 마주보다가, 미지근해진 차를 한입에 벌컥 마시고 찻잔을 도로 소완에게 건네줬다.


"고마워. 덕분에 머리가 정리가 됐어."


"도움이 되었다니 소첩이 더 영광이지요."


소완이 기품있게 허리를 한번 숙이고서 방을 나가자 나는 태블릿에 세계지도를 띄웠다. 거기서 영국 남부를 확대하고 낯익은 지명을 찾으며 안개나라 스토리를 더 자세히 기억해내려고 애를 썼다.


런던, 이 곳에 블프가 이끄는 바이오로이드 생존자들이 모여있다.

그리고 런던에서 남서쪽으로 내려가면 나오는 포츠머스, 여기엔 멀린과 프리드웬이 묶여있다.


아마 원작 스토리를 따라가는 게 안전빵일테니... 일단 런던에 가서 블프 일행을 챙기고, 아니, 그전에 철충의 눈에 띄지 않고 영국 안에 들어가려면... 채널 터널. 그래, 프랑스와 영국을 잇는 해저터널을 썼지. 프랑스쪽 출입구는 델타가 관리하고 있으니, 어떻게든 거길 점령한다면... 아니지, 지금 입장에서 델타한테 시비거는 건 너무 위험한데.


가만, 이 스토리에 다른 길이... 뒷문이 있지 않던가?


포츠머스엔 프리드웬을 숨겨놓은 비밀 항구가 있다. 그리고 거긴 프리드웬이 언제든지 출항할 수 있도록 바다와 이어져있지. 다시말해, 바다에서 배를 타고 포츠머스로 바로 들어갈 수 있다는 거다. 바다를 꺼리는 철충은 해로를 봉쇄하지도 못할테니까.


하지만 그 항구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구나. 애초에 펙스와 블랙리버가 철저히 숨겨놨을 테고.


...그녀석이라면 혹시 알고있을까.




조종실 문을 열자 포츈이 나를 뒤돌아봤다.


"포츈?"


"어머, 왔어? 어디로 갈 지 결정한거니?"


"아직. 그 전에 트리톤이랑 상의 좀 해봐야겠어."


"트리톤이랑...?"


포츈은 뜻밖의 인선에 의아한 듯 했지만, 굳이 캐묻지 않고 일단 통신을 연결해주었다.


[무슨 일이냐.]


"프리드웬에 대해서 알고있지?"


[안다.]


칼같이 대답이 돌아왔다. 이거 당첨인 것 같은데?


"그럼 그게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엥?"


[본 개체는 전쟁병기로서 운용되었기에 기밀정보는 가지고있지 않다. 알고있는 건 프리드웬이라는 이름의 배가 포세이돈 제 2함대의 기함이 될 예정이었다는 것 뿐이다.]


"아..."


[프리드웬의 위치를 물으려했던 거라면 유감이군.]


"아니 뭐, 사실 대략적인 위치는 알고있거든... 영국 포츠머스 어딘가에 숨겨진 항구가 있고, 거기 프리드웬이 잠들어있다는 것만 알아. 그 비밀 항구의 정확한 위치를 몰라서 그렇지."


[포츠머스라고?]


트리톤이 잠시 말을 멈췄다.


[...레모네이드 감마가 한 번 어나이얼레이터를 이끌고 그곳에 간 적이 있다. 결국 상륙은 커녕 싸우지도 않고 간만 보다가 물러났었지만.]


"뭐? 그 말은..."


[숨겨진 항구가 있다면 분명 마지막으로 배가 정박했던 곳 근처겠지.]


좌표 데이터가 필요한가? 트리톤의 물음에 나는 확답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근데... 가까이 갔다가 집중포화 맞는거 아냐?"


[첫째. 너희가 철충이라 부르는 존재는 바다를 극도로 두려워한다. 육지에서 거리를 유지하기만 한다면 놈들은 우릴 지켜보기만 할 뿐, 공격하진 않는다. 그렇기에 레모네이드 감마가 방문했을 때도 교전없이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들째. 본 개체의 설계목적은 해전이 아닌, 해안을 정리해 본대가 상륙할 수 있도록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이다. 내가 있으면 철충이 공격할 수 없는 거리 밖에서 포격을 퍼붓는 것이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오베로니아 레아 모델까지 있는 이상 적의 수적 우위는 의미가 없다.]


...설득력이... 있어...!

아주 자연스럽게 레아를 본인같은 비대칭 전략병기 취급하고 있지만. 직접 거기 코앞까지 갔다온 녀석의 경험담이니 믿어도 될 것 같다.


"트리톤. 좌표를 전달해줘."


항로가 정해졌다. 배는 영국을 향해 남하하기 시작했다.



소완은 남들이 모르는 라붕이의 속마음을 자기가 제일먼저 독점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남몰래 우월감에 도취했다고 한다


지금부터 안개나라 스토리 역주행을 실시한다!

그나저나 표식이라도 찍힌건지 저번화 비추 오지게 박혔더라. 이게 뭔일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