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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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러니까."


사령관은 멍한 표정으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지금, 날 조종하는게... 라붕씨라고?"


"...네?"


예상치 못한 되물음에 당황한 라붕이는 멍한 표정으로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아니... 라붕씨가 그랬잖아? 라붕씨가 사령관...을 조종해서 '라스트 오리진' 이라는 게임을 플레이 해왔다면서?"


"그...런 셈이죠? 근데 그게 왜요?"


"그럼, 지금도 나를 그... 조종하면서 플레이 중이라는... 뜻이려나?"




................




".....뭔 개소리야."


"에."


진심으로 어이가 없다는듯 희한하게 자신을 쳐다보자, 사령관은 그저 굳어버린채 대답을 하지못했다.


"난 지금 대놓고 여기 있잖아요. 근데 어떻게 내가 그쪽을 조종해요."


"아니아니..! 라붕씨가 방금 본인 입으로 그렇게 말했잖아! 라붕씨가 날 조종해 왔다면서!"


"게임속 사령관을 조종해 왔다는거지, 사령관님을 조종했다는 뜻이 아니잖아요."


"그게 그거 아니야?! 이미 우리들을 게임속에서 다 거쳐왔다면서! 게다가 라붕씨가 나... 사령관이었다면서?! 그래서 다 알고 있는거라고 했잖아! 펙스나 철충, 심지어... 별의 아이와 휩노스 병에 대한 것까지! 그래서 자신이 곧 죽을거라는 것도 진작에 알고 있었다면서!"


"...하아아아..."


"???"


어지간히도 답답했는지 머리를 뒤로 쓸어넘긴채 의자에 등을 기댄 라붕이는 천장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건 게임을 말한거지, 내가 사령관님을 조종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게임속 스토리야 뭐... 진작에 다 깬거니까 알고 있는거고,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령관님 본인은 게임같은게 아니라 '진짜'잖아요."


"......."


술잔을 응시하던 사령관은 그가 여러번 도전하고 도전했던 모의전의 결과물들을 되짚으며 중얼거렸다.


"...그럼, 이전 모의전에서 철충의 특성에 대해 이미 어느정도 파악하고 있었던 이유도 그러한 사정덕분 이었다는 거구나. 라붕씨는 이미... 게임속에서 그 철충들을 격파한 경험이 있었다는 뜻이니까."


"뭐, 말 그대로 턴제로 진행되는 게임일 뿐이라 현실의 모의전과는 괴리감이 심하지만요."


"으, 응..."


지끈거리는 머리를 잠시 식히고 난 뒤에서야 겨우 입을 연 사령관은 그가 자신에게 말해준 정보들을 차근차근 나열하며 중간정리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라붕씨는 2023년 대한민국에서 살아오던 성인이고, 우리를 전부 알고 있었던 이유가... 라스트 오리진 이라는 게임 덕분이었다는거지?"


"예아!"


"......."


잔을 들어올리며 경쾌하게 긍정하던 라붕이는 내용물을 한번에 들이키고서 말을 이어나갔다.


"라스트 오리진 이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당신을 뜻하는 거에요. 최후의 인간, 사령관."


"........"


"제가 말했죠? 이 세상에 남은 인간은 오직 당신뿐, 그렇기에 게임의 이름이 라스트오리진 이라고."


"하지만, 나 뿐만이 아니라 라붕씨도..."


"나는 원래라면 없었을 존재니까."


"........."


"말 했잖아요. '라스트'오리진 이라고. 당신들도 이미 옛날에 결론을 내리지 않았나요? 살아있는 인간 생존자는 사령관님 하나뿐 이라고."


"...결론 말이지."


공식에서 몇번이고 강조한 최중요 설정이자, 이 세계의 근본.


"이 세상에, 당신 외의 인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요. 그건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바뀌지 않는 '공식'이니까."


"......."


"아 물론, 철의 왕자라는 놈도 따지자면 인간이 맞긴 한데... 그 놈은 엄밀히 따지자면 이미 완벽하게 철충화된 인간이었던 것 이니까, 그 놈은 따로 구분해야겠죠."


"...철의 왕자... 말이구나."


철의 유적에서 대립했던 그 남자가 떠오른 사령관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라붕이에게 묻기 시작했다.


"...라붕씨."


"예아!"


"..?! 어... 그럼 있잖아."


"예아?"


"...그 철의 왕자... 그 이후엔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 수 있을까? 만약 라붕씨가 게임에서 본 그... 우리들의 행적과 진짜 우리들의 행적이 일치한다면, 어쩌면..."


"몰라요."


"에."


상상 이상으로 김빠지는 대답을, 그것도 짧고 굵은 단답형으로 되받은 사령관은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라붕이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까 말 했잖아요. 이 게임, 스토리 진행 엄청 느리다니까?"


"......."


"그 다음은 스토리 업데이트도 안돼서 스작이 아닌 이상 그 이후의 미래따윈 누구도 몰라요."


"스작..? 그게 누군데?"


"스토리 작가."


"아... 그, 그래."


"뭐, 결론은, 혹시라도 내가 팩스나 철충, 혹은 별의 아이의 다음 행동을 미리 알고 있을거라고 기대하지는 말라는거죠. 애초에 거기까지 스토리 진행 된것도 아니라 아는 사람 1도 없거든요."


"...응."



.......



"그게 다에요?"


"어? 뭐가?"


"...??"


사령관의 다음 말을 기다리던 라붕이는 당사자의 김빠지는 반응을 희한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뭐가가 아니고, 더 할말 없어요? 믿기 힘든 말들이나 내뱉고 있는데."


"...아..."


그제서야 질문의 의미를 파악한 사령관은 잠시 술을 한모금 들이키고 난 후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서, 딱히 어느쪽이든 상관없다고 해야할까?"


"...뭐?"


"물론, 너무나도 현실성 없는 이야기라서 내가 못따라가는 것일 수도 있지.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중요한건 그게 아니니까."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자신이 예상했던 반응과 상이한 모습만 보이는 사령관에게 라붕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혼란스럽지 않아요?"


"응? 갑자기 혼란스럽지 않냐니, 뭐가?"


"......."


여전히 태평한듯 무덤덤한 모습이었기에, 매우 민감한 문제를 직설적으로 꺼내들었다.


"본인들이 사실은 창작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요."


"........."


"태연하게 상관없다는 투로 말을 하는데, 정말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건가요?"


어찌보면 당사자들에게 말하기에는 매우 민감한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라붕이는 아랑곳 하지않고 직설적으로 쏘아붙이듯 물었다.


"내가 왜 그래야하는데?"


"...네?"


"내가 왜 동요하고 무서워 해야하냐고."


"그, 그거야...! 그렇잖아요! 게임 이라니까요?!"


"그래서?"


"그 증거로, 제가 당신들의 족적을 모두 알고 있는것으로 증명해 줬잖아요! 철충이나 레모네이드, 별의 아이까지 전부 다 알고 있다고!"


"응. 아까 다 했던 말들이야."


"전부 다 게임속 이야기라구요! 그리고 그 캐릭터가... 바로 당신들이고!"


"그것도 이미 다 했던 말이야."


"그런데 왜 그런 말이나 하는건데요?! 그냥 생각을 포기한거에요?! 아니면 그냥 믿기 싫어서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는건가?!"


"아니, 그런적 없어. 난 언제나 진지하게 라붕씨의 말을 듣고 있으니까."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


"그러니까."


잔뜩 흥분하며 소리치는 라붕이와 대조되는 모습의 사령관은 여전히 무덤덤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었다고해서, 내가 왜 그렇게까지 동요해야 하냐고."


"........."


"우리랑 완전히 같은 게임이 있고, 라붕씨가 그걸 플레이 해왔기에 우릴 전부 다 알고 있다, 라붕씨가 몇번이고 말 한거잖아."


"그런...데요?"


"확실히, 내용 자체는 라붕씨가 경고한대로 놀랍고 황당무계한 이야기인건 사실이야. 방금 말했다시피 지금 나도 티만 내고 있지 않을뿐이지, 엄청 놀란건 엄연한 사실이거든."


"........."


"하지만 말이야."


오히려 당황하는 라붕이의 말을 끊은 사령관은 그와 상반되는 침착한 모습으로 대답해주었다.


"라붕씨가 지금 입이 닳도록 말하는 그거 말인데, 그건 그냥 "게임"이잖아?"


"...네?"


"지금 라붕씨가 설명하고 있는건, 라붕씨가 플레이하고 조작해 왔던 게임을 말하는거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자체를 말하는건 아니잖아."


".........."


"방금 라붕씨 본인이 한 말도 기억을 못하는거야?"


"..!"


"지금 라붕씨 눈 앞에 있는 난, 게임같은게 아닌 '진짜' 라면서."


"...그렇죠."


"라붕씨 말대로라면, 우리 대원들은 물론 나 또한 게임속 캐릭터 같은게 아닌 현실의 진짜니까. 그런데 내가 왜 혼란스러워 해야 한다는건데?"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런 반응은 너무..."


"맞아 아니야."


"...네?"


"내 말이 맞아 아니야."


"마, 맞습니다..."


"그치? 틀린거 하나 없지?"


"......."


"뭔가, 라붕씨는 우리와는 확연히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느껴지긴 했는데 설마 그런 사정이 있었을줄은 예상 못했네."


혼자서 너무 급발진한 것이 무안했던 걸까. 괜히 시선을 피하려고 애쓰는 그가 무안하지 않도록 사령관도 자연스럽게 시선의 방향을 허공으로 전환하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당신이 말한 대로야. 허무맹랑하고, 황당하고, 믿기 힘든 이야기 투성이야."


"...그런데도 왜 아무런..."


"믿기로 약속했으니까."


"......."


"당신이 그런걸로 거짓말 할 사람이 아니라는걸 잘 아니까. 그리고 그 어느때 보다도 진지하게 털어놔주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믿을거야."


등받이에 몸을 기댄 사령관은 살며시 눈을 감고서 중얼거렸다.


"라스트 오리진... 우리를 본따서 만든 게임이라고 했던가?"


"본땄다... 그건 본딴거라기 보다는... 좀 다른 느낌이긴한데, 아무튼 그게 왜요?"


"라붕씨는 그 게임을 엄청 좋아했다고 했었지?"


"...네 뭐, 지겹게 달고 살아온 꼴 보면 그런것 같네요."


"어째서 그렇게 좋아한거야?"


"......."


"어째서, 당신은 우리가 나오는 그 게임을 그렇게나 좋아한건지 물어봐도 돼?"


"...좋아한 이유요."


일부러 살짝 대답에 텀을 두기위해 입에 술잔을 가져다 댔으나, 타이밍 나쁘게도 잔은 이미 진작에 텅 비어버린 뒤였다.


"......글쎄요. 그런걸 왜 그렇게나 좋아했냐고 물어도, 뭐라 말해야 할지."


일개 모바일 게임에 불과한 그것을 왜 그렇게나 좋아했던 걸까. 자신도 간혹 그런 생각을 해보긴 했지만 이내 털어버리길 반복했었다. 애초에 그런 고민 자체가 의미 없었으니까.


"이유 같은게 딱히 필요한가요."


"........."


"좋아하는 것에, 굳이 거창한 이유 같은건 필요 없어요. 그냥, 오르카 호가 좋았고, 모두가 만들어 나가는 세상을 함께 지켜보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좋았으니까."


언제나 괴로운 역사속에서 고통 받아가며 슬픔속에서 끝을 맞이하였던 모두가, 이 곳에서는 행복하게 웃으며 지내고 있다.

어쩔 때는 바보처럼 우스꽝스럽게. 또 어떤 때는 진지하면서도 멋있게. 그런 모두를 바라보는게 마냥 즐거웠다. 설정구멍 때문에 늘 욕먹고, 게임은 늘 허점 투성이에 오글거리는 편의주의적 설정 범벅이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좋아하니까.


"....그리고, 그 애도 날 좋아해 줬으니까."


"........"


그 애가 해준 말들을 되새기며 말을 이어나갔다.


"네. 맞아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밝히는 것에, 더 이상 부끄러워 하고 싶지도 않고 피하고 싶지도 않다.


"이쯤 되면 대충 눈치챘죠? 내가 사랑해 온 사람, 그 안에 있었어요. 실제가 아닌 게임 속에."


"......."


왼손의 약지를 바라보며 처음 서약을 했던 날을 떠올린다. 아마 그때였겠지. 처음으로 서약 대사 라는것을 들었을 때.


"당신들과 같은 '진짜'가 아니라, 내가 해온 '게임'속에 있는 사람이에요. 현실이 아니니까 닿지도 못하고, 만질 수도 없으니까 이야기 조차도 할 수 없는... 게임 속."


하염없이 바라고 순수하게 좋아하던 순간에도, 속으로는 참을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웠다. 실제로는 존재조차 하지 않는것에 애정을 쏟으며 기뻐하고, 그와 동시에 이 이상은 닿을 수 없다는 것에 슬퍼하며 허무함을 느끼던 자신이.


"...창피했거든요. 그렇게나 좋아했다던게 결국, 게임 속의 캐릭터였다는걸 밝히는게. 그래서... 말 못했어요. 다른 이유 같은건... 딱히 없어요."


의심을 살 것 같다던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것 같다던가... 그런건 다 그럴싸한 변명이다. 그냥 창피했던것 뿐이다. 현실에서 눈 돌리고 집착해온 결과물을 들키는게 너무나도 부끄럽고 창피했던것 뿐이다.


"당신이라면 이미 짐작했겠죠. 내가 게임 이야기를 꺼낸 시점부터."


마치 반지가 끼워져 있는것 마냥 왼손의 약지를 쓰다듬으며 그녀의 이름을 읊조렸다.


"......'라스트 오리진'의 히루메. 제가 좋아했던 사람이에요."


"...응."


"그래서 당신이 미웠습니다. 질투하고, 시샘하고, 멀리하고... 내 자리가 저 곳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고 생각하면서."


"........."


"그리고, 동시에 안심했어요. 당신 처럼 좋은 사람이라면... 그 애도 행복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 그래서 당신에게 감사했어요. 고마웠으니까."


단순히 가지지 못한걸 질투하고 열등감 속에서 어떻게든 헐뜯으며 자기합리화 하며 외면했다. 그렇게 하면 편안했고, 납득할 수 있었으니까.


"그럼, 이 세상에 라붕씨 말고도... 라붕씨가 사랑했던 히루메도..."


"글쎄요. 그것 만큼은 저도 모르겠네요."


"......."


"열심히 찾아 다녔거든요. 진심으로 사랑해서 서약했으니, 어쩌면... 아주 어쩌면 나와 이어져 있기에 이 곳에 함께 떨어지진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찾지는... 못했구나. 그 전에 우릴 만나게 된거고."


"...네. 결국은 틀린거겠죠. 내심 기대했던게."


이 세상이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은 시점에서 직감은 하고 있었다. 이 곳은 창작물이 아닌 생생한 현실. 주연은 커녕 조연조차 되지 못하는 엑스트라를 위한 편의주의적 보정은 없다.

애초에 그런 거창한 무대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다. 설령, 만에 하나라도 나를 위한 무대가 있다면... 조금도 버티지 못하고 도망칠게 뻔하니까. 그러니까 부러워한 것이다. 난 평생 닿지도 못할 세상이니까.


"뭐, 예상은 해왔어요. 그렇게 원하는대로 흘러갈 리가 없죠. 난 애초에 주인공이 아니니까."


"그럼, 라붕씨가 사랑해왔던 히루메는..."


"사령관과 함께 있겠죠."


"..........."


"차이가 있다면, 당신 곁에 있는 대원들은 게임 같은게 아닌 '진짜'... 라는 차이일까요. 그게 참 부러웠어요. 질투가 날 정도로."


가상화면 속의 일러스트나 데이터 파일이 아닌, 생생하게 살아숨쉬면서 함께 웃고, 떠들고, 사랑할 수 있는 진짜.

반면... 난 절대로 만질수도, 말 한마디 하는것 조차 불가능한 벽.

불합리하다고 느끼며 질투했다. 두 번째 라던가, 첫 번째 라던가... 그런 것 이전의 그저 단순한 부러움.


"우스꽝스럽지 않나요? 게임속의 여자를... 현실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게."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애초부터 현실에 있지도 않은 캐릭터 따위에 뭘 그렇게 미련 가진건지.

지금 이 순간에도 후회감을 느끼고 있다. 차라리 그런 유사게임을 시작조차 하지 않았더라면, 애초부터 쳐다보지도 않았더라면 이런 미련 따위 갖지도 않았을텐데.


...왜 그렇게나 좋아해 버려서 사서 고생을 하고 있는걸까.


"대답하기 애매하면 무리해서 할 필요 없어요. 누구라도 이런 말을 들으면 난처할테니까."


"............."


"그러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도 돼요. ....속으로 뭐라 생각하든 전혀 신경 안쓰니까."


애초에 믿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다. 그냥 내가 홀가분 해지기 위해서 내뱉는 혼잣말에 불과하니까. 거기에 굳이 긍정도, 부정도 필요없다.


"............."


비어버린지 오래인 잔을 멍하니 쳐다보던 그를 바라보던 사령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붕씨."


처음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마지막에 다다른 이제서야 자신에 대한 것을 알려준 그를 바라보며 말한다.


"당신은 창피하다고 말했지만, 난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


"게임 속의 사람이라던가, 현실이 아니라던가, 실제가 아니라던가, 그런 이야기는 관계없어."


딱히 배려를 해주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단순하게, 사령관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입에 담았다.


"진심으로 사랑한거잖아? '히루메'를."


"............"


"바라봤던 대상이 어떤 대상이든간에, 진심으로 사랑했던건 틀림없는 사실이잖아."


"...그렇게 보였나요. 이런 이상한 말들이나 늘어놓고 있는데."


눈앞의 당사자는 여전히 사령관이 아닌 아래만을 쳐다보고 있었으나 사령관은 아랑곳 하지않고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진심으로 사랑했으니까 그렇게 괴로워하고, 그리워한 거잖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해주고 싶은 말을 건넸다.


"부끄러워 하지마."


"...?!"


"당신이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최소한 그딴 말은 입에 담을 생각 하지 말라고."


"하지말라니. 이제 와서 뭔..."


"그럼 왜 그렇게 좋아한건데?"


그의 눈에 자신이 위선자로 보일지라도 상관없다. 처음으로, 드디어 그에게 힘이 될 수만 있다면.


"그렇게 말하는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잖아. 지금 이 순간도 보고싶어서 힘들어 하고 있잖아."


"보고 싶다...라."


줄곧 아래만 바라보던 라붕이는 정면의 사령관을 주시하며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밖에 있는 애들한테 히루메를 찾아오하고 시킨건가요?"


"...?!"


하하하... 반응 참... 내가 그걸 모를줄 알았어?


"나 들어왔을때, 화들짝 놀라면서 감출때부터 무의식적으로 짐작했어요. 확신을 하게된건... 그 애들이랑 대화 끝내고 난 직후고."


"....라붕씨. 난..."


"괜찮아요."


행여나 이 사람좋은 양반이 부담느끼지 않도록 먼저 선수를 친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요."


"..........."


"말 했잖아요. 그 애는 없다고."


"...확신하는 근거라도 있는거야?"


근거라... 그야 당연히...


"아뇨."


".........."


"증거나 근거같은건 없어요. 하지만 알거든요. 없다는걸."


"시도 조차 해보지도 않고 포기 한다는거야?! 도대체 왜 그런 말을...!"


"그 애는 진짜가 아니니까."


"....!!"


"여러번... 말했죠? 당신들은 '진짜'. 결코 게임 따위가 아니라고."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애써 외면해온 사실을 한번 더 상기시킨다.


"라스트 오리진은 게임이에요. 진짜가 아니야."


"........."


"하지만 당신들은 현실이니까. 현실을 살아가는 너희가 가상에 얽매일 필요는 없어. 게임은 이제 끝났으니까. 그러니까, 이제 괜찮아."


시나리오가 정해져 있는 픽션이 아닌 너희들은, 여태것 그래왔듯이 진짜 현실을 살아가주길 바라니까.

나 하나 때문에 허구에 휘둘리는 일 없이, 나아가길 바라니까. 그러니까...


"이젠 정말 괜찮아. 사령관."


"............"


"너한테 전부 털어놓은 것만으로도, 이제 미련같은건 없으니까. 그러니 이제 그 애한테도 거리낄것 없이..."


"근데 라붕씨."


후련한 표정으로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던 라붕이의 말을 자른 사령관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까부터 계속 거슬리는 부분이 있는데."


"응? 거슬리는거?"


예상치 못한 대답에 몸이 살짝 굳은 라붕이는 의아한 표정으로 사령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곧 죽을 사람 인것처럼 달관하듯이 말하는거야?"


"...어?"


시종일관 말하는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그런지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좋은 예감은 들지 않았다.


"우린 어떻게든 당신 살리려고 잠도 안자고 밤새우면서 머리 쥐어짜내고 개고생 하고 있는데, 뭘 멋대로 저승갈 준비하고 있냐고."


이제와서 자세히 살펴보니, 사령관의 미간의 주름이 처음 대화할 때와는 확연히 큰 차이가 있었다.


"저, 저기... 사령관님?"


"아,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짜증나네."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내리며 술을 병째로 들이키기 시작한 사령관은 혼자서 소주병의 반을 비워버리고 난 뒤에야 다시 라붕이를 노려보았다.


"자세히 돌이켜보니까, 라붕씨 나랑 갑판위에서 밥 먹으면서 속으로 내 욕 엄청 했지?"


"...에?"


"그 뒤에 같이 AGS공방 견학시켜 줄때도 뭐씹은 표정만 지으면서 호응도 전혀 안해주고, 그 이전에도 내 얼굴만 보면 우선 도망갈 생각부터 하기 바빴고."


"...?! 아... 그 때는 그... 뭐라 해야하나..."


갑자기 지난 날의 흑역사를 끄집어내는 사령관때문에 나갈 타이밍을 놓친 라붕이는 갈팡질팡하며 말을 더듬었으나 그런 그의 모습은 아랑곳 하지않고 사령관은 술기운에 몸을 맡긴 채 여태것 쌓아두었던 감정을 하나하나 끄집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마지막이니 뭐니 지 멋대로 헛소리만 하고 있네."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사령관의 목소리 톤이 점점 내려가는것이 티가 나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지금 상황이 매우 안좋은 상황이라는 것을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다.


"뭘 지 혼자 후련하게 떠들고 멋대로 끝내고 자빠졌어."


"저, 저기..."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들은거야? 닥터가 당신 살리려고 오리진 더스트 아예 새로 만든다고 하잖아. 근데 뭘 벌써부터 분위기를 장례식장으로 만드는건데. 눈치는 어따 팔아먹었냐고."


"어... 그런 말을 한 걸 기억은 하는데... 아니 근데 난 딱히 그런 의도로 한 말은 아니고..."


"나, 당신이랑 말 놓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알긴 알아?"


"그쪽은 처음부터 나한테 반말깠잖ㅇ..."


(쾅!!!)


"히익..?!"


살짝 어이없는 마음에 작은 반박이라도 내뱉으려는 순간, 신경질적으로 술병을 책상위에 내리찍은 사령관은 이마를 짚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괘씸하네."


"네?"


"나도 그렇고, 우리 대원들도 그렇고, 모두 당신 하나만 보고 이렇게 노력을 하는데..."


이미 진작에 비워버린 주제에 비어버린 술병을 잔에다가 갖다대다 뒤늦게 빈 병이라는걸 알아챈 사령관은 신경질적으로 병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을래?"


"...??"


장화나 워울프도 아니고 사령관이라는 작자한테 맞고 싶냐는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했기에 제대로 된 대답은 하지 못하고 얼어붙고 말았다.


"라붕씨."


".....네?"


"진짜 맞을래?"


"???"


아니 이 새끼가 술 들어가서 대가리가 작살났나? 도대체 왜 이래?


"저.... 사령관님...?"


"잠깐 이리와봐. 해볼게 있어."


한 손에는 술병을 거꾸로 집은 사령관은 정색하고 라붕이의 멱살을 부여잡았다.


"자자자자잠깐...! 진정해....! 너 취했어취했어!!!"


"나 게임 아니야!!!"


"아 알아 미친놈아!! 누가 모른데?! 술병 내려놓으라고!! 그거 아직 개봉도 안한 새삥인데...!"


게임에선 술 들어가도 이 정도로 망나니 새끼는 아니었는데...!


"이, 일단 물부터 마셔..! 응?! 나머진 진정좀 하고 얘기하자...! 응?!"


"나 안취했어!!!!"


"취했다고 병신아!!!"


"장화가 한거 나도 그대로 좀 해보자! 솔직히 나 이 정도는 때릴 자격 충분히 있잖아!!"


"어어어... 안된다..! 사령관이라는 놈이그런걸로 환자를 패려고 하노..!"


"아니! 넌 좀 맞아야 정신을 차릴것 같으니까 딱 3대만 맞아!!"





















(대충 20분 뒤.)
















"머리는 괜찮아?"


"...이제야 술 좀 깼냐?"


머리에 또 추가되어버린 혹을 매만지며 퉁명스럽게 대답한 라붕이는 새로운 맥주캔을 개봉하며 투덜거렸다.


"그러게 누가 분위기잡고 헛소리 하래? 뭘 그런식으로 폼잡고 있어?"


"...참 나. 누구는 각오하고 용기낸건데, 꼭 그런 식으로 말을 해야겠냐?"


"아 그러니까 너 아직 포기하는거 이르다고 했잖아! 닥터가 지금...!"


"내 전용 오리진 더스트 만들고 있다면서. 알았으니까 그만 좀 말해. 귀 닳겠다."


하도 들어서 귀에 딱지가 생길 지경인 라붕이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며 덧붙였다.


"미리 말해두는데, 니네가 하는 말을 무시한다던가, 닥터가 못 미덥다던가 그런 이유로 그랬던건 아냐."


"......."


이미 김이 다 빠져버린 미지근한 맥주를 입에 대며 무덤덤하게 물었다.


"일단 가능성이 낮은 계획이잖아? 그거."


"니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니 표정이 다 알려주던데."


"......."


"나보다 니 표정이 더 초상집이더만~ 솔직히 옆에서 보면 내가 아니라 니가 죽는줄 알겠다 새꺄."


"...너 사실 다 나은거지? 엄청 멀쩡해 보인다?"


라붕이의 비아냥에 입을 삐죽 내민 사령관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중얼거렸다.


"...그럼 있잖아."


대수롭지 않게 잔에 담긴 나머지 내용물을 입에 털어넣는 라붕이를 말없이 바라보던 사령관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묻기 시작했다.


"날 무서워한 이유는 뭐야?"


"콜록! 콜록! 어...?!"


예상치 못한 질문을, 그것도 최대한 잊고 싶었던 그 흑역사를 오늘 점심 뭐 나오냐고 묻는것 마냥 무덤덤하게 물어보는 사령관 때문에 사례가 들릴뻔한 라붕이는 눈을 크게 뜨고 사령관을 쳐다보았다.


"아니 너, 나 엄청 무서워했잖아?'


"......."


"나랑 눈 마주치는 것도 엄청 질색했었고, 멀리서 내 그림자만 보여도 빛의 속도로 도망갔잖아."


"...어... 그게..."


"혹시 그것도 게임이랑 관계가 있는거야? 게임속에선 내가 악역으로 나왔다던가."


"........."


아니, 게임... 때문이라고 해야할지.


"그...건 아니고. 그러니까..."


언젠가는 이걸 얘한테도 말은 해야하지 않을까 고민을 하긴 했는데...


".....좆..."


"응? 조.. 뭐라고?"


"......."


진짜 돌겠네.


"그... 좆간... 아니아니... 그러니까..."


"족간? 그건 또 뭔데."


"...이거 꼭 말해야 하니?"


"응."


"......."


"원래라면 딱히 안물어보려고 했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하도 괘씸해서라도 들어야겠더라. 그러니까 이 기회에 솔직하게 말해줘."


"말 안하면 안돼..?"


"안돼. 말 해."


"...썅놈."


"뭐?"


"아무 말도 안했어."


분명 무어라 중얼거린게 확실했으나 지금 중요한건 그것이 아니었기에 사령관은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안 웃을거지?"


"내가 그런걸로 널 비웃을 사람으로 보여?"


"..........."


이제는 뒤로 뺄 기회도 수단도 없다는걸 직감한 라붕이는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어차피, 언젠가는 솔직하게 말해야 할 것이기도 하고.


"...딱 한 번만 말 할거니까, 똑바로 들어. 좀 길어질테니까."

































"...그러니까."


사령관은 라붕이가 간단하게 설명한 그 이유라는걸 차근차근 되새기며 요약을 시작했다.


"결론만 말하자면, 과거의 구인류가 나쁜 짓을 많이 했으니까, 우리가 너를 과거의 악인으로 미리 단정지을거라 생각하고 우릴 그렇게 무서워 했다?"


".........."


"다른 대원들이랑은 마음 놓는일이 있어도, 최종 통수권자인 내가 널 죽이려 하거나, 그..... 숙청이라는걸 하려고 마음먹으면 다 부질없는 짓이니까 날 그렇게나 무서워 한거라고?"


"ㅇㅇ..."


"............."


그 무엇보다도 듣고 싶었던 속마음 중 하나를 드디어 당사자로부터 전해듣게 된 사령관은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


"....?!"


"..........."


어느 정도 예상은 한 답변이었기에 그렇게 놀라거나 하진 않았다. 이전에 갑판에서 처음으로 서로 마주보고 이야기할때 이미 느꼈던 거니까. 하지만...


"...내가 정말로 그런 짓을 할거라고 생각해?"


"...아니."


"......."


어찌나 부끄러웠는지 시뻘개진 얼굴을 아래로 내리깔고선 고개를 들 생각을 안하는 바보를 착잡하게 바라보던 사령관은 무안한 분위기를 완화시키기 위해서라도 새 술병을 개봉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괜찮으니까 얼굴좀 들어."


"........"


"뭐... 좀 난감한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가 나쁘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니까."


"...화 안내냐?"


"화내면 뭐 어쩔려고?"


"........"


"그리고, 애초부터 화나지도 않았고, 나쁘게 본 적도 없어. 이건 진심이니까 이제 그만해도 돼."


새로운 술병을 개봉한 사령관은 자신의 잔이 아닌 옆의 잔에 먼저 채운 뒤, 뒤이어 자신의 잔을 채우며 말을 이어나갔다.


"뭐... 솔직히 서운했던건 사실이지만."


"응..."


"나도 그렇고, 우리 대원들도 그렇고, 장담컨데 널 그런식으로 단정짓고서 나쁘게 본 사람은 단 한명도 없어. 이건 내 모든걸 걸고 보증할게."


"....굳이 그럴 필요없어. 니가 강조 안해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하하! 조금만 더 일찍 알아채 줬다면 더 좋았을텐데~"


"미, 미안하다니까..."


"아니."


말을 이어나가기 전에 시원함이 감도는 소주로 목을 축인 사령관은 옆에 의기소침하게 앉아있는 유일한 동성 친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야말로 미안해."


"....어?"


뜬금없는 타이밍에 갑자기 사과를 건네는 사령관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진 라붕이였으나, 그런 그의 모습은 아랑곳 하지 않고서 꿋꿋히 사과를 멈추지 않았다.


"너가 날 의도적으로 피해다닌 만큼, 나도 일부러 너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것도 이미 알고 있지?"


"........"


"걱정했거든. 괜히 내가 또 니 앞에 나서면 너가 그만큼 더 힘들어 할거라는걸 잘 알았으니까. 그래서 일부러 난 나서지않고, 대원들에게 맡겼어. 우리 대원들이라면 너의 마음을 열어줄 수 있을거라고 믿었으니까."


잘못을 한건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또 자신에게 사과를 건네는 사령관에게 라붕이는 정정하듯이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니가 사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한다면 내가 해야겠지. 너랑 대화 한번 제대로 해볼 생각도 안하고 너한테 상처만 줬으니까."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아. 그렇게 따지면 나도 똑같으니까. 나도... 너랑 대화하는게 무서워서 피한건 사실이잖아?"


"무슨 말도 안돼는 소릴..."


"미안해."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사령관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널 만나고 나서 은근 들떴었거든. 나와 같은 인간 남성... 동성 친구라는 거 말이야. 물론, AGS들과도 그런 사이로 잘 지내고는 있지만, 역시 나와 같은 인간 남자는 감회가 새롭다고 해야 할까? 암튼 그런거 있잖아."


"......."


"그런데, 널 처음 마주하고 나서부터... 도무지 니 앞에 멀쩡히 설 용기가 나질 않았거든. 뭘 해도 널 겁주는 결과가 되어버리고, 그만큼 양쪽의 사이가 틀어지기 바빴으니까. 그래서 차라리 난 뒤에서 너희를 지켜보는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합리화 하면서 정작 난 나서지도 않았어. 그런 행동이 결국 이런 결과를 만든거나 다름없어."


처음부터 다 가지고 시작한 자신이 혼자였던 이 사람에게 섣불리 다가가 어정쩡한 위로의 말을 건넨다면, 상대방의 입장에선 결국 위선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그러한 우려도 있었기에 더더욱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다.


"그래서 나한테 사과하는거야? 다가가지 않고 피해서 미안하다고."


"...그런 행동이 널 더 힘들게 한건 사실이니까."


".....하하 참."


늘 느끼는 거지만, 대화를 나눠가면 나눠갈수록 자신이라는 존재가 초라해지는 느낌이다. 물론, 딱히 거부감은 없지만.


"...역시 그 애가 좋아할만 하네."


"응?"


"서약은 그 애 하고만 한거야? 아니면, 다른 애들하고도?"


"서약? 아... 다 들었구나. 히루메에게."


"키킥... 니 얘기 나오니까 부끄러워 하는게 아주 볼만하더라~ 언제 한거야? 최근에?"


"...?! 아...하하하... 시간이 좀 지나가지고... 좀 오래되긴 했지."


왠일로 얼굴을 붉히며 쑥쓰러워 하는 사령관의 모습에 신기함을 느낀 라붕이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술잔을 비웠다.


"다른 대원들이라... 응. 당연히 했지. 그것도 아주 많이."


"호오...? 누구누구?"


"가, 갑자기 그런걸 묻는거야?!"


"왜. 그건 또 부끄러워?"


"아니... 그런 의미는 아닌데..."


"........"


술기운 때문일까. 아니면 정말로 부끄러워서 일까. 살짝 빨개진 사령관의 얼굴을 말 없이 바라보던 라붕이는 무심하게 다른 질문을 건넸다.


"첫 번째는 히루메 맞지?"


"...응."


의외로 부정도 얼버무림도 없이 무덤덤하게 긍정한 사령관에게, 라붕이는 의외라는 듯 그를 향해 물었다.


"그건 또 순순히 알려주네?"


"뭐... 이것 만큼은 왠지 너에게 숨겨도 큰 의미가 없을것 같아서."


"응? 왜?"


"넌 이미 눈치챘잖아? 내 첫 번째가 히루메라는걸."


술잔에 내용물을 채워주는 것 대신, 사령관은 술병을 통째로 라붕이에게 건내며 그와 동시에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흐흐흐... 역시 우리 사령관님은 눈치가 참~ 빨라. 이 정도는 되야 총사령관 해 먹는건가?"


"하하! 칭찬 고마워. 왠일로 너한테 좋은 평가를 다 받네."


사령관에게 건네받은 술병으로 사령관의 비어있는 잔을 채운 라붕이는 다음으로 자신의 잔을 채우는 것 대신, 병 째로 한모금 들이켜 목을 축였다.


"뭐... 눈치랄게 있나. 그냥 그 애 표정 보니까 그럴것 같더라고. 이 애가 '첫 번째' 구나~ 하고."


"........."


허심탄회한 표정으로 실실거리며 대답하는 라붕이를 바라보던 사령관은 잔을 내려놓고서 조심스럽게 묻기 시작했다.


"...힘들지 않아?"


"뭐가."


무심하게 대답하며 또 다른 술병을 만지작 거리기 시작한 라붕이는 눈치보는 듯한 사령관을 대신해서 그가 하려던 말을 대신 이어나갔다.


"내가 히루메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


"뭐... 확실히, 놀랍긴 하더라. 나랑 서약했던 애랑 똑같은 애가 대놓고 떡하니 내 앞에 나타나질 않나, 꼬리 만져볼래? 라고 하질 않나, 차 마시다가 갑자기 표정 어두워져서 뛰쳐나가질 않나,

...그러고서 갑자기 달려와서 웃으면서 선물을 챙겨주질 않나."


처음으로 히루메에게 간식봉투를 선물로 받았을때와 그 날 느꼈던 여러 기분들을 되새기던 라붕이는 진심으로 느꼈던 감정을 조용히 읊조렸다.


"...아니, 기뻤다고 해야할까. 드디어 소원이 이루어 졌다고 느꼈으니까."


비록 자신의 사람은 아니었다고 해도 나에게 웃어주었으니까. 그렇게나 좋아하던 사람이, 나를 보면서 상냥하게 웃어주었다. 그저 그것만으로 하늘을 날아갈 만큼 기뻤다. 평생을 꿈꿔온 소원이 이루어 졌으니까. 그리고 그와 동시에...


"슬프기도 했지. 난 더 이상은 못 만나는 사람이니까."


사령관의 히루메는 여기에 있으나, 내가 사랑한 그 애는 없으니까. "히루메"는 현실이 아니기에 이 곳에 없다. 굳이 꼽자면... 그게 제일 힘들었으려나.


"그게 그렇게나 신경쓰였구나."


"........."


"그럼 묻겠는데, 너 언제부터 알았냐? 내가 히루메랑 관련이 있다는거."


"음... 말해도 돼?"


"말 안하면 뭐, 비밀로 하게?"


"...정확히는, 히루메랑 너가 처음 만난 그 날 부터였지. 그 날을 기점으로 너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으니까."


"참 나. 결국 처음부터 알고 있었단 얘기구만."


어이없는듯 실소를 흘리며 술을 들이키던 라붕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사령관의 질문에 대답했다.


"신경 안써도 돼."


"..........."


"그야 뭐, 당연히 아예 잊고 살순 없겠지. 하지만 잘 알거든. "히루메"는 게임이니까. 당연한 이야기야. 현실의 사람이 게임 속의 사람과 맺어진다는건 불가능한 일이잖아?"


너무나도 당연하고 상식적인 이야기다. 아무리 창작물을 사랑해도 그것과 이어질 수는 없다. 지극히 당연한걸 굳이 여러번 설명할 필요는 없지.


"하지만 말이야. 그것 때문에 니가 날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야. 애초부터 이건 그럴 필요조차 없는 문제니까. 그럼에도 부탁 하나만 하자면..."


그럼에도 굳이 바라는 것이 있다면, 딱 하나 이 녀석에게 부탁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지금처럼 대해줘."


"...!"


"니가 말했듯이... 이전처럼 눈치보지말고, 자연스럽게 다가와줘. 이제는 나도 너에게, 너희들에게 전력을 다해서 다가갈테니까. 그러니까 너도 히루메도, 내 사정 따윈 신경쓰지 말고 날 대해줘. 그게 내 유일한 부탁이야."


나의 과거를 의식하느라 눈치보는 사령관의 모습따위는 보고 싶지않다. 그냥 지금처럼, 실없이 웃으면서 날 바라봐주길 원하니까.


"...고마워.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긴. 내가 더 고맙지."


편안하게 웃는 사령관의 얼굴에서 나름의 안심을 느낀 라붕이는 마찬가지로 만족하며 조용히 미소지었다.


"새끼. 그게 그렇게나 신경쓰였어?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는데."


"야, 내가 널 얼마나 생각했는지는 알긴 아냐?! 너 건강도 안좋지, 늘 속으로 힘들어하지, 보고만 있어도 조바심이..."


"그래그래. 니 맘 다 알아요 임마."


"...또 깐죽대긴."


킥킥거리며 술잔을 만지작거리던 라붕이는 잠시 침묵하다가 은근 눈치보는듯한 어조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럼 있잖아. 그... 말 나온김에 하는 말인데."


"응?"


나름 여유롭던 라붕이가 갑자기 술병을 내려놓고 멋쩍은 표정으로 바뀌기 시작하자 사령관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당장 최근까지 답답하게 살던 날 호되게 혼내주고 정신차리게 해준 애가 있었는데."


"...호오...?"


설마설마 했던 사령관은 매우 흥미로운 표정으로 라붕이에게 밀착하며 다음 말을 경청했다.


"결국 그 애한테는 끝끝내 말 못했거든. 그걸 다른 애한테는 털어놨지만, 정작 그 애한테는 아직도 말을 안했어."


소주와 맥주를 적당한 비율로 섞어가며 재주좋게 배합한 결과물을 천천히 들이키며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그 애는 말하기 힘들면 무리해서 말할 필요는 없다고 늘 강조해 주긴 했지만, 다른 사람한테는 털어놓고 정작 그 애한테는 말하지 않았다는게 지금도 미안하달까, 죄책감이 느껴진다고 해야하나."


"응응."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그 애한테 만큼은 마지막까지 나라는 사람을 전부 털어놔야 한다고 생각은 늘 해왔어. 그래서... 그 애 방에서 내가 어디서 왔는지, 뭐하던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전부 말해줬지만, 정작 제일 중요한 이 이야기는 끝내 말 못했어. 역시... 그게 제일 후회스럽더라. 하하."


무의식적으로 들이킨 맥주가 벌써 비어버린 것을 뒤늦게 인식하자, 타이밍 좋게 사령관이 비어있는 잔을 채워주며 조용히 물었다.


"혹시, 괜찮다면 끝내 털어놓지 못한 이유... 물어도 될까?"


"...그거야 뭐..."


아주 단순한 이유.


"그 애가 날 이상하게 보는게 무서웠으니까."


"......."


"그야 물론, 내가 생각해도 내 이야기는 믿기 힘든 이야기 투성이라는 걸 나도 잘 아니까. 그래서 머리로는 그렇게 여겨진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생각은 해왔어.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하고 납득해도 마음이 그걸 받아들이는건... 도저히 안되겠더라."


"..응."


"그래서 그냥 말 안했던거야.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그 애 한테만큼은 그냥 이대로... 계속 사랑받고 싶었으니까."


술을 너무나도 좋아하지만, 가급적이면 누군가와 같이 있을때 먹는 것은 자제해 왔다. 이유는... 취하면 취할수록 쓸때없이 솔직해 지는것이 싫었으니까. 하지만 어째서인지 사령관 앞에서 솔직해 지는건 그다지 싫지 않았다.


"뭐, 그 애라면 성격상 절대 그런 짓은 안할거라는건 내가 제일 잘 알고는 있는데, 사실 앞서 말한건 다 허울좋은 핑계 같은거고, 그냥 겁나서 변명하는것 뿐이지. 그냥 내가 도망가기 쉽도록 깔아놓는 구차한 변명."


"........"


"그러니까 너한테 전부 말하는 거야. 더 이상은 숨기기 싫으니까."


이런 나를 끝까지 지탱해준 그 애에게 만큼은, 더 이상 무언가를 숨기고 싶지 않다. 사랑했던 사람이든, 허무맹랭한 이야기든, 전부 그 애한테 털어놓고 싶다고 다짐했으니까.


"너한테 전부 털어놓고, 마지막으로는 그 애한테 가서 전부 말할 생각이었으니까. 내가 좋아했던 사람, 그리고 내가 진짜로 어디에서 왔고, 또 어떻게 너희들을 자세히 알고 있는지."


라붕이의 옆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단 사령관은 한 손에 턱을 괴며 슬며시 입을 열었다.


"천아 맞지? 너가 의식하고 있는 그 사람."


"...역시 다 알고 있네."


"하하! 너네 둘 썸타는거 오르카 호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걸? 그렇게 대놓고 알콩달콩 해놓고서 모를거라 생각하는게 바보 아냐?"


"......."


문득 게임속의 천아가 떠오른 라붕이는 자신과 함께 해왔던 천아와 게임속의 천아를 겹쳐보다 이내 피식거리며 중얼거렸다.


"나도, 설마 그 애와 그렇게까지 가까운 사이가 될 줄은 몰랐어. 다른 이도 아닌 마리아의 엠프레시스 하운드의 사냥개와 말이지."


물 다음은 엘븐 밀크를 하나 개봉하여 입에 털어넣다 시피한 라붕이를 향해 사령관은 미소지으며 물었다.


"역시, 다음 행선지는 천아구나?"


"뭐... 그런 셈이지. 이건 처음부터 정해놓은 거니까."


"킥킥... 그래서 술을 이렇게 많이 마시는걸까? 그 애 앞에선 긴장하기 싫으니까."


"눈치 빠르다고 칭찬한거 취소다."


"반응 참 정직하네~ 그냥 친구끼리 솔직히 말하면 될걸 가지고."


"...하긴. 니 앞에선 굳이 숨길 필요도 없긴 하지."


나름 만족스러운 반응에 마찬가지로 미소지은 사령관은 이번에는 술 대신 물을 건네며 넌지시 그에게 물었다.


"...몸은 어때. 아프거나 그러진 않고?"


"그래. 니한테 쳐맞은 대가리 빼고는 다 멀쩡하다 새꺄."


"짜식, 완전 팔팔하네."


라붕이의 어깨를 툭 친 사령관은 자신도 마찬가지로 술대신 물을 입으로 넘기며 말을 이어나갔다.


"휩노스 병을 앓게되면 반드시 악몽을 꾸게 되어있어. 그것도 자신에게 있어서 제일 두려운 형태의 악몽을. 넌 이미 다 알고 있지?"


"그렇지."


"아자즈와 이터니티가 만들어준 신경 안정화 장치, 그리고 닥터가 처방해준 약들... 전부 너의 증상을 완화시키기 위한 목적인건 너도 알고 있을거야."


"응. 잘 알제."


"..........."


그 다음 질문은 사령관의 입장에선 여전히 꺼려지는 질문이었으나 외면할 수는 없었기에 각오를 다듬고 물어보았다.


"요즘도, 악몽을 꾸고있어?"


"악몽... 이라."


사령관이 따라준 물을 한번에 들이킨 라붕이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을 거듭하다가 겨우 입을 열기 시작했다.


"꿈을... 꾸긴 꿨는데, 지금은 이제 안꿔. 옛날에 끊겼거든."


휩노스 병의 증세가 말기에 가까워 지면 가까워 질수록, 더 이상의 꿈은 꿀 수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어둠만이 있을 뿐.


"정확히는, 내가 사령관으로서 살아가는 꿈이야."


"사령관..."


자신이 꿨던 꿈을 잠시 되새기는 과정을 거친 라붕이는 여전히 대수롭지 않다는듯 무심하게 대답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오르카 호의 사령관으로서, 모두를 이끌어 나가는 꿈을 꿨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꿈."


"...지금까지 계속 그 꿈만 꿔온거야?"


"응. 근데 이제는 더 이상 안나와."


억지로라도 잠들려고 아무리 애써도 더 이상은 꾸고 싶어도 꿀 수 없게 되었던가.


"다 죽었거든."


"...?!"


"어떻게든 우리 애들 살려보려고 노력은 해봤는데... 역시 난 주인공은 못되나봐. 아무리 기를 쓰고 애를 써도, 너 처럼은 안돼더라."


"........."


"철충들을 상대하면서 사상자 0이라는 거창한 목표는 커녕, 사소한 탐색임무 조차도 버거웠어. 말 그대로 하루하루를 목숨걸고 싸웠으니까."


아니, 도망쳤다고 해야할까. 싸우면 죄다 죽을테니까.


"그렇게, 놈들로부터 도망치고, 또 도망치다가... 나 하나 빼고는 전부 죽어버렸거든. 죄다 나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 사령관으로서의 나의 이야기는, 그게 전부야. 그 다음 같은건 없어."


발 끝을 까딱거리며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천장을 바라보며 오랜시간 꿔온 꿈을 무덤덤하게 요약한 라붕이를 향해 사령관은 시선을 내리깔고서 사과를 건냈다.


"......미안."


"...괜찮아. 어차피 진짜도 아니니까."


어째서 많고 많은 악몽중에 이런 악몽일까. 본인도 늘 그런 생각을 해 보았으나 짐작가는건 없었다.


"아마, 내가 '진짜' 사령관 이었다면 펼쳐졌을 미래일지도 모르지. 그렇게 보면... 참 현실적 이기도 해. 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니까."


자신이 제일 두려워하는 형상을 구체적인 악몽으로 나타낸다. 그것이 휩노스 병의 제일 두려운 점.


"딱 하나, 괴로웠던게 있다면, 끝까지 사랑만 받았다는 걸까."


"...사랑?"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내는건 불가능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난 주인공이 아니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일개 조연조차 되지 못하는 엑스트라 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거겠지. 더빙도, 삽화도 없는... 설정조차도 짜여있지 않은 엑스트라는 결코 멋있는 영웅이 될 수는 없다는거야. 아마 모방조차도 불가능 하겠지."


어느새 부터인지 그런 꿈들의 연속이 이어졌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된건지는 나도 알 수 없다. 한가지 확실한건...


"미련이 생기니까, 이 꿈만 계속 꾸게 되더라고."


"...어떤 미련이었어?"


"소중한 사람들과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미련."


"..........."


"이렇게 무능한 나를, 그 애들은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사랑해 줬거든. 끝까지 웃으면서, 나한테 전부 맡겨줬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맞서 싸우는 것 대신 도망을 택하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도망다니다가 결국 허무하게 죽었다. 나만 제외하고.

 

"그렇게, 모두 나 하나만을 지키다가 전부 죽고 나만 살아남았어. 그리고 끝났지."


".............."


"그 꿈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난 죽지 않았어. 그 누구보다 깨끗하고, 건강하게, 계속 살아남았어. 그 이후로 더 이상 아무도 내 앞에 나타나지 않게 되었고, 아무런 꿈도 꾸지 않게 되었거든."


"....응."


".........."


본인 입장에선 대충 넋을 놓고 되는대로 중얼거렸을 뿐이었으나 그것을 듣고 있던 사령관의 얼굴빛은 그 어느때 보다도 씁쓸해 보였다.


"됐다니까."


"으, 응? 뭐가?"


"이건 그냥 꿈일 뿐이야. 그것도 질 나쁜 개꿈. 악몽도 뭣도 아니라고. 그러니까 또 그렇게 걱정좀 하지마. 내가 다 답답하다."


"......."


여전히 천장만을 바라보며 무심하게 내뱉는 라붕이를 바라보며 사령관은 넌지시 질문을 건넸다.


"...라붕아."


"왜."


"너, 이 다음에 천아에게 갈거지?"


"그렇겠지? 갑자기 왜?"


라붕이의 긍정이 나오기가 무섭게 사령관은 곧바로 그의 손을 두 손으로 꽈악 잡으며 두 눈을 마주치기 시작했다.


"...?! 아니 씨ㅂ... 갑자기 왜 이래 징그럽게!"


"라붕아."


"어?!"


갑작스런 사령관의 스킨십에 눈에 띄게 당황한 라붕이였으나 그런 그의 반응은 전혀 개의치 않는 사령관은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 애도, 널 기다리고 있을거야."


"...!"


"니 말 대로야. 더 이상의 망설임이나 불안함 따윈 필요 없는거야. 지금처럼 하고 싶은대로, 마음 가는대로 행동하면 돼. 그게 정답이니까."


"...뜬금없네."


"응. 꼭 이 말을 해주고 싶었거든."


라붕이의 손을 꼬옥 잡던 손들중 한 손을 그의 어깨에 얹으며 사령관은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덧붙였다.


"니 목숨은 반드시 우리가 구해줄게. 나하고의 약속이야."


"......."


"그러니까, 너도 천아와 잔뜩 약속 하는거야. 다 나으면 무엇을 할지, 또 어떤 일을 할지, 또... 어떻게 함께 살아갈지."


여러가지를 경험하고, 다 같이 웃으며 함께 살아가자는 약속.


"넌 반드시 내가, 우리가 구해주겠다고 약속할게. 그러니까... 너도 약속해. 절대로 죽지 않겠다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고."


"............."


순간 몸이 떨린 라붕이였으나 이내 티내지 않고 감정을 추스리며 마찬가지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령관을 똑같이 바라보며 대답을 건넸다.


"......알았어. 약속할게."


"........"


"천아하고도 잔뜩 약속 하고, 너 하고도 약속할게. 절대로 죽지 않겠다고."


"...그래. 기억했으니까."


그 무엇보다 듣고싶었던 대답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의 손을 놓아준 사령관은 마지막으로 라붕이의 등을 힘차게 두들기며 소리쳤다.


"자! 언제까지 술만 퍼마실거야! 이제 니 여친한테 가야지!"


거의 등떠밀다 시피 라붕이를 밀어버린 사령관은 씨익 웃으며 한마디 더 덧붙였다.


"우리 라붕이 팁 안 필요해~? 뭣하면 내가 좀 도와줄까?"


능글맞게 말하는 사령관과 그런 사령관을 어이 없다는 듯 쳐다보던 라붕이는 손사래를 치며 비아냥거렸다. 


"허이구, 카사노바께서 친히 어드바이스 라도 해주시게요?"


"안될 것 없지. 내 친구가 여자친구 앞에서 긴장된다는데."


"킥킥... 긴장은 지랄."


실없는 농담이 어지간히도 웃겼는지 실소를 흘린 라붕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하게 기지개를 켜고서 홀가분하게 웃으며 사령관실의 출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마음만 받으마. 이번에는 내가 알아서 할게."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그렇게 유유자적하게 사령관실을 나가려던 라붕이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서 사령관을 불렀다.


"...사령관."


"응?"


"다음에도, 나랑 또 술 한잔하자? 같이 놀아줄거지?"


후련한 미소를 띄우며 사령관을 향해 뒤돌아보는 라붕이에게, 사령관도 마찬가지로 상냥하게 웃으면서 대답해 주었다.


"...응. 다음에도 같이 놀자. 둘이서."


아주 살짝, 아쉽다면 아쉽고 뿌듯하다면 뿌듯한 표정으로 사령관실을 나서는 라붕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사령관은, 문이 닫히고 홀로 남겨진 채 그가 쓰던 술잔을 바라보았다.


"...갔네."


드디어, 말을 놓을 수 있었다. 드디어 진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


난 도움이 되었을까. 내 친구에게 만족할만한 대답을 줄 수 있었을까.


"...괜찮겠지. 이번엔 정말로."


라붕이 그 녀석... 본인 입으로는 그다지 술을 잘 마시는 편은 아니라고 했지만, 역시나 헛소리였다. 그 주량을 따라가느라 솔직히 고생 좀 했으니까.


"하하... 엄청 잘마시네. 키르케랑 죽이 아주 잘 맞겠어."


참고 참았던 술기운이 마지막에 되서야 올라오는 바람에 급히 소파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약속, 꼭 지킬테니까. 너도 반드시 지켜. 죽지않겠다는 약속."


친구 녀석이 들이키던 술잔을 치우기위해 손을 뻗었으나, 잠시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조금만 더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 미련이 남았던걸 티 내는걸 참았으니 이 정도는 괜찮을거라고 생각하면서.





















외전이나 후일담은 9만자가 넘도록 술술 써지는데 희한하게도 다음화는 구상 다 해놨는데도 귀찮아서 손이 안가네ㄷㄷ


아무튼 재밌게 봤으면 개추랑 댓글좀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