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잘 쉬고 오셨나요? 그럼 강의를 재개하겠습니다.”

 

40분 뒤 리마토르는 다시 강단에 섰다. 피로가 풀려 한결 개운한 모습으로 강의를 시작한 그는 화면에 새로운 사상가의 얼굴을 띄웠다.

 

“쉬는 시간 전까지 푸코와 데리다를 살펴봤습니다. 이번에는 프랑스의 포스트 모더니즘 3인방 중 마지막인 질 들뢰즈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질 들뢰즈는 셋 중에서 가장 포스트 모더니스트다운 철학자로 평해집니다. 미셸 푸코의 사상이 푸코 본인이 부정했던 것과는 별개로 후기 구조주의에 많이 걸쳐있다고 평가받고, 자크 데리다의 사상이 포스트 모더니즘보다 해체주의로 분류되기 때문이죠.

 

지금 앉아서 강의를 듣고 계신 분들 입장에서는 수박 품종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다 비슷한 이야기로 들릴 겁니다. 제 입장에서는 ‘다 다른 점이 있다’라고 반박하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세 사람의 사상은 정말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특히 난해하기로 악명 높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하죠. 앞에서 본 데리다만큼이나 어렵다는 평을 받는 철학자가 들뢰즈입니다.”

 

리마토르가 웃으면서 농담을 던졌지만 편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강의를 보조하는 하르페이아조차도 그가 포스트 모더니즘 3인방을 ‘편하게’ 설명하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처럼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자신의 의도대로 따라오지 않자 리마토르는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흠흠, 농담은 이쯤하고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들뢰즈는 존재론을 넘어 윤리학, 유물론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미학, 문학, 평론 등 다양한 분야에 자신의 족적을 남겼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철학사에서 비주류로 분류되던 스피노자, 니체, 베르그송을 재해석했죠. 미셸 푸코는 들뢰즈를 가리켜서 ‘20세기는 들뢰즈의 시대로 불릴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니 얼마나 거물인지 더 말하지 않아도 감이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들뢰즈의 사상이 왜 대단하다는 평을 받을까요? 그건 들뢰즈가 기존 서양 철학의 흐름을 꿰뚫어 보고 자신만의 흐름을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규칙과 구조, 기존 체계를 무너뜨리는 데서 의의를 찾는 포스트 모더니스트답게 당대 서양 철학에서 받아들여졌던 세계관을 갈아엎고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재배치했습니다. 앞서 본 데리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해체’를 시도한 거죠.”

 

“교수님, 그럼 들뢰즈도 데리다와 같은 해체주의 철학자인가요?”

 

하르페이아는 강의 초반부터 머리가 꼬이는 느낌이 들자 바로 손을 들었다. 이해가 안 되는 느낌을 방치했다가 어떤 눈덩이가 되어 굴러올지 모를 일이었기에 그녀는 질문하는 행위에 거리낌이 없었다. 리마토르는 좋은 질문이라며 그녀의 질문을 받았다.

 

“좋은 질문입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뢰즈도 데리다처럼 해체주의를 주장한 철학자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실존을 다룬 야스퍼스와 사르트르가 범주가 겹칠지언정 같은 주장을 한 철학자가 아닌 것처럼, 들뢰즈도 데리다와 포스트 모더니즘 철학자라는 큰 범주가 겹칠 뿐 같은 주장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조금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자면 데리다는 해체주의를 기반으로 문학 평론 및 미학을 다루었고, 들뢰즈는 철학을 다루었다는 차이가 있죠.

 

서론이 많이 길어졌습니다. 본격적으로 들뢰즈의 사상을 톺아보겠습니다.”

 

리마토르는 강의 교안 화면을 넘겼다. 화면 왼쪽부터 3권의 책이 빨강, 노랑, 파랑 각기 다른 바탕색과 함께 놓여있었다. 맨 앞줄에서 강의에 집중하던 아스널은 “저 순서대로 어려워지는 건가?”라며 농담을 흘렸다. 옆자리에 앉은 칸이 “그러겠지”라고 말을 받았지만 둘 다 그 말이 농담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둘의 농담을 들은 하르페이아가 강단 아래에서 씁쓸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었다. 하르페이아의 미소가 마치 후배 석사 과정생을 본 선배 박사 과정생의 복잡미묘한 그 표정과도 같았기에 칸과 아스널은 동시에 이번 강의도 두통약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들뢰즈의 사상은 크게 이 3권으로 대표됩니다. 들뢰즈의 단독 저서인 <차이와 반복>, 이후 정신분석학자 펠릭스 가타리를 만나고 공동 집필한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 이 순서대로 들뢰즈의 사상이 심화됩니다. 오늘 제 강의는 <의미의 논리>나 <디알로그>처럼 심도 있는 내용을 제외하고 들뢰즈라는 철학자의 주장을 크게 볼 수 있는 이야기 위주로 진행될 겁니다.

 

먼저 <차이와 반복>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차이와 반복>은 들뢰즈가 1968년 박사 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20세기 대륙철학의 걸작 중 하나입니다. 그럼 무슨 내용일까요? 제목 그대로의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차이’와 ‘반복’이죠. 어때요, 참 쉽죠?” 

 

리마토르는 그림을 다 그린 밥 아저씨처럼 어깨를 으쓱 올리며 말을 맺었다. 하지만 그와 밥 아저씨 사이에는 오르카호가 몇 척은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넉넉한 거리가 있었다. 특히 뭔가 엄청난 걸 보여주고 겸손하게 말하느냐, 아무것도 없는데 허세를 떠느냐는 점에서 그랬다. 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대부분 후자로 받아들이자 리마토르는 마이크를 고쳐 쥐며 말을 이었다.

 

“이거 죄송합니다. 앞선 강의가 너무 어렵다고 하길래 이번 강의는 농담을 많이 섞어봤습니다. 다시 강의로 돌아가기 전에 잠시 생각해봅시다. 1968년의 프랑스라, 뭔가 떠오르는 게 없으신가요?

 

인문사회학을 공부하신 분들이라면 순간 움찔하셨을 겁니다. 맞습니다. 1968년은 프랑스 파리에서 68혁명이 벌어진 해죠. 들뢰즈는 68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인사 중 한 명입니다. 들뢰즈는 동성애자 권리와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 같은 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참여와 동시에 국가 박사 학위 논문으로 <차이와 반복>과 부논문인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를 제출했습니다. 기존의 구조와 억압에서 탈피하는데 주력한 68혁명에 참여한 학자인 만큼 학술연구에도 68혁명의 색채가 있다고 이해하면 이후의 이야기를 듣기 한층 편해질 겁니다.”

 

“그렇구나. 이제 무슨 말인지 알겠네.”

 

화면으로 강의를 듣던 샐러맨더는 술을 휘휘 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옆에서 담배를 피던 워울프는 샐러맨더의 잔을 자연스럽게 뺏어 마시며 한 마디를 보탰다.

 

“교수가 농담을 잘했으면 강의 듣기 더 재밌었겠네.”

 

“그건 그렇지. 하늘이 모든 능력을 몰아준 건 아닌가 봐.”

 

퀵카멜이 워울프의 말을 받으며 숙련된 손놀림으로 잔을 뺏어 한 모금 마시는 사이 리마토르는 그림 하나로 화면을 가득 채웠다.


 



 

“이 작품은 팝 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의 작품입니다. 작품의 모델은 당대 최고의 배우였던 마릴린 먼로죠. 앤디 워홀은 같은 대상인 마릴린 먼로를 색을 바꿔가면서 여러 번 그렸습니다. 아래 보이는 건 실제 마릴린 먼로의 사진입니다. 어떤가요? 앤디 워홀의 작품이 실제 마릴린 먼로를 완벽히 따라 그렸나요?”

 

리마토르는 말을 끊고 청중들을 바라보았다. 그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이들이 ‘그렇지 않다’면서 부정의 의사를 표했다. 예측한 답이 나온 그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 생각한다며 말을 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 생각합니다. 제가 비평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이 아니라 앤디 워홀의 작품이 갖는 예술성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할 처지는 되지 못합니다만, 적어도 앤디 워홀이 초상화를 사진처럼 매우 정교하게 그린 사람이 아니라는 점은 말할 수 있겠습니다.

 

자, 여기서부터 생각해봅시다. 앤디 워홀의 작품은 마릴린 먼로를 보고 그린 겁니다. 그럼 마릴린 먼로는 원본이고, 그림 작품은 복제품이죠. 맞나요?”

 

칸은 리마토르의 질문에 ‘네’라고 크게 대답해주었다. 한 번 한 번의 강의가 끝날 때마다 돌아오는 피드백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서 전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강의를 하려는 그의 모습이 그녀에게는 그 순간 가장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청중들과 눈을 마주치다가도 그녀와 시선이 교차한 그가 은은한 미소를 짓는 짧은 시간조차도 교감의 기회였다. 바라볼 이가 있는 그녀처럼, 바라봐주는 이가 있는 그는 서로의 눈동자에 상대가 비치는 순간마다 몸에 힘이 채워지는 걸 느꼈다.

 



“좋습니다. 그럼 또 다른 질문을 던져보죠. 앤디 워홀이 그린 마릴린 먼로 중 첫 번째를 A, 두 번째를 B라고 하겠습니다. A와 B 중에서 원본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건 뭘까요?”

 

리마토르는 다시 질문을 던졌지만 이번에는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다들 말할 수 없는 고민에 빠진 상태임을 확인한 그는 선택지를 추가했다.

 




“답을 하지 못하시는군요. 그럼 선택지를 추가하겠습니다. 세 번째를 C, 네 번쨰를 D라고 하겠습니다. 앞서 제시한 A, B, C, D 중에서 가장 원본 마릴린 먼로와 가까운 건 뭔가요?”

 

답을 할 수 없는 질문을 계속해서 제시하는 리마토르를 보며 아스널은 대체 어떤 답을 줄지 기대된다면서 손깍지를 끼고 그를 바라보았다. 리마토르는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듯 다시 말문을 열었다.

 

“답을 제시할 수 없죠? 그게 정답입니다. 4개의 그림에는 원본을 얼마나 ‘잘’ 묘사했는지가 없습니다. 4개의 그림에는 그저 ‘차이’가 존재할 뿐이죠. 앤디 워홀의 작품은 원본을 자세히 그리는 게 아니라 어떻게 다르게 표현하는데 의의를 둔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맨 처음에 보여드린 수많은 마릴린 먼로 그림들은 원본을 ‘모방’한 복제품이 아니라, 각자가 의미를 갖고 서로 다를 뿐인 ‘차이’를 가진 고유품이 됩니다.

 

슬슬 과목명이 미술 비평론으로 바뀌는 것 같으니 본론으로 돌아가죠.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주장한 내용이 바로 이겁니다. 들뢰즈는 플라톤 때부터 이어진 ‘동일성’의 철학을 뒤집고자 했습니다. 세계는 이데아 같은 ‘원본’과 ‘복제품’으로 나뉘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차이의 반복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죠. 여기서 동일성이란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컨대 플라톤은 세상 모든 것의 원본인 이데아가 있다고 했으니 주장이 하나의 결론으로 모이는 것이죠.

 

그리고 하나 더. 제가 앞에서 들뢰즈가 스피노자, 니체, 베르그송을 재해석했다고 했죠? 이 세 명의 사상가가 가진 공통점이 ‘동일성’의 거부입니다. ‘신’이라는 중심을 죽인 철학자 니체, 신을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연 속 원리에 가깝게 이해한 스피노자, 공간을 중시한 기존 서양 철학과 달리 시간을 중시한 철학자 베르그송, 이들의 주장에서 공통점이 보이나요? 모두 기존에 하나로 이어지던 결론을 거부하고 새로운 결론을 제시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들 모두 신과 같은 원본의 존재로 대표되는 선험적이고 절대적인 원리를 부정하고 끊임없는 순환과 생성을 긍정했습니다. 니체는 영원회귀를, 스피노자는 무한한 양태를, 베르그송은 시간의 지속을 말했으니 ‘순환’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죠? 들뢰즈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존재를 초월하는 어떤 보편자나 원리도 없다는 존재론을 주장합니다.

 

아까 앞에서 보았던 앤디 워홀의 작품 <마릴린 먼로>를 떠올려봅시다. 우리가 <마릴린 먼로>를 볼 때는 ‘회화(繪畫)’라는 대범주 아래 ‘초상화’라는 소범주로 분류하거나, 장르에 따라 ‘팝아트’라고 분류하죠. 그러면 앤디 워홀의 작품은 ‘초상화1’, ‘팝아트1’처럼 같은 범주에 속한 여러 대상 중 하나가 됩니다. <마릴린 먼로>라는 작품을 고유한 작품으로 보기에 앞서 먼저 제시된 개념들로 해석하는 행위죠. 

 

들뢰즈는 이를 비판합니다. 존재의 의미를 존재의 외부에서 찾는 행위 자체가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것처럼 엉뚱한 행위라는 거죠. 왜냐? 존재는 범주처럼 먼저 제시되는 개념이 아니라 오로지 존재 내부에서, 외부에서 개입하는 규정 없이 찾아야 하거든요. 이 주장에 기반해서 앤디 워홀의 작품을 보면 ‘초상화’니 ‘팝아트’니 하는 개념에 얽매이지 않고 <마릴린 먼로>라는 작품 그 자체로 보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마릴린 먼로>는 존재로서의 고유성을 인정받게 되죠. 동시에 <마릴린 먼로> 작품에 있는 색이 다른 마릴린 먼로 그림들은 하나하나가 다른 그림들과 ‘차이’를 갖게 되죠. 그러면서 여러 개의 그림이 반복되니 ‘차이 그 자체가 반복’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겁니다.”

 

리마토르는 잠시 말을 멈추고 목을 축였다. <차이와 반복>에 대한 강의가 절정에 이르러 가는데 청중들은 데리다 강의를 들었을 때처럼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이대로 넘어갈 수 없었던 그는 머리 속에서 새로운 예시를 꺼내들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죠? 더 쉬운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어제 알비스가 초코바를 하나 먹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초코바를 하나 먹었습니다. 이때 어제의 알비스가 느낀 쾌감과 오늘의 알비스가 느낀 쾌감이 100% 같을까요?”

 

“...아!”

 

칸은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 감탄했다. 꽉 막혔던 머리가 일순간 개운하게 뚫리며 맑아졌다. 아스널도 핑거 스냅으로 자신이 이해했음을 표현하자 동시다발적으로 다른 청중들도 각자 나름대로 이해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자신이 든 비유가 효과가 있었음이 증명되자 리마토르는 뿌듯한 심정으로 강의를 이어갔다.

 

“그렇죠. 완전히 같을 수는 없습니다. 어제의 쾌감과 오늘의 쾌감은 분명 차이가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초코바를 먹는다는 동일한 행위를 통해 반복되고 있죠. 이게 바로 들뢰즈가 말한 반복(répétition) 개념입니다. ‘차이’가 되풀이되지만 완전히 동일하지 않고 계속해서 차이가 발생하는 것, 줄여서 ‘차이의 반복’이죠.

 

이처럼 들뢰즈는 존재를 정지한 대상이 아니라 운동 과정이라고 봤습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를 잘 기억해두세요. <차이와 반복>은 들뢰즈 단독 집필 시기를 마무리하는 저서인 동시에 나중에 나올 <천 개의 고원>을 이해하는데 기반이 될 겁니다.”

 

리마토르는 마이크를 내려놓고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차이와 반복>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 지었다. 칸이 갖다준 새 와이셔츠가 땀에 젖어가는 걸 느끼면서도 그는 쉴 틈 없이 다음 저서인 <안티 오이디푸스> 강의에 착수했다.

 

“1968년, 68혁명과 함께 <차이와 반복>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들뢰즈는 1년 뒤인 1969년에 미셸 푸코의 뒤를 이어 교수가 됩니다. 이때 정신과 의사 겸 정신분석학자였던 펠릭스 가타리와 교류를 시작하죠. 들뢰즈와 가타리는 서로 의견이 잘 맞는 걸 확인하면서 공동 집필 작업에 손을 댑니다. 그 결과 1972년에 출판한 저서가 <안티 오이디푸스>입니다.”

 

“1972년 11월 21일...”

 

TV로 강연을 듣던 워울프는 피식 웃으며 조용히 읊조렸다. 자신이 즐겨봤던 옛 한국의 드라마 마지막회를 대표하는 대사가 자동으로 머릿속에서 들려오자 그녀는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음? 뭐라고?”

 

“워울프는 오랜 지병인 술병으로 쓰러졌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퀵카멜이 옆에서 되묻자마자 워울프는 활기차게 웃으면서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술잔을 비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워울프가 진짜 바닥에 대(大)자로 뻗자 상식이 정지한 느낌을 받은 퀵카멜은 급하게 워울프를 깨웠다.

 

“워울프! 정신 차려!”

 

“아아, 겨우 ‘한 잔’에 가버리다니... 녀석은 우리 중에 최약체였지.”

 

당황한 퀵카멜을 뒤로 하고 하이에나는 상어 이빨을 가득 드러내는 미소를 짓더니 한 번에 두 잔을 채웠다. 언제가 어디선가 들었던 대사를 멋지게 말한 그녀는 한 잔은 먼저 떠난 전우를 위해, 한 잔은 그녀 자신을 위해 원샷했다. 하이에나가 워울프처럼 바닥에 쓰러지게 되는 데는 3초면 충분했다.

 

“으아아아!! 이게 다 뭐야?!?!”

 

그 와중에 두 바보의 뒤처리를 뒤집어쓰게 된 퀵카멜만 연달아 벌어지는 상식의 장례 행렬에 어찌할 줄을 모르고 머리를 싸매 쥐었다. 호드의 방에서 벌어지는 혼돈을 알 턱이 없는 리마토르는 TV 속에서 강의를 계속 이어갔다.

 

<안티 오이디푸스>는 68혁명의 영향 아래에 놓인 저서입니다. 그리고 오이디푸스라고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인물을 비판하는 책이기도 하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라, 떠오르는 인물이 없나요?”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있지.”

 

아스널은 리마토르의 질문을 망설임 없이 받아쳤다. 심리학도라면 당연히 알아야 하는 인물이었기에 아스널은 별 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겸손한 표정을 지었다.

 

“정답입니다. 혹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설명도 부탁해도 될까요?”

 

“물론이라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남자아이가 3살에서 5살 사이에 처음 만나는 이성인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고 집착하며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고 한다는 이론이라네. 하지만 아이는 자신보다 우월한 아버지에게 반항하면 성기를 거세당할 것이라 생각하고 아버지를 두려워하면서도 증오하게 되지. 

 

이러한 갈등을 겪다가 결국 어머니를 향한 욕망을 포기하고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선망으로 바꾸어 자신과 동일시하는 방식으로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성장하게 되지. 이 과정에서 슈퍼 에고(초자아)가 성장해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생긴 결핍을 채우고자 평생 발생하는 욕망을 무의식적으로 자제하는 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이라네, 그대여.”

 

“훌륭합니다. 박수 한 번 주세요!”

 

아스널의 깔끔한 설명에 리마토르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스널은 아까처럼 절제된 미소로 답하고 다시 리마토르에게 마이크를 돌렸다.

 

“아스널 씨께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잘 설명해주었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저서 <안티 오이디푸스>는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듯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프로이트가 욕망을 우스꽝스러운 3류 드라마로 만들었다고 비판합니다. 

 

왜냐? 이를 알기 위해서는 프로이트가 제창한 정신분석학을 간단히 봐야합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에서 욕망 그 자체인 이드(id)와 이드를 통제하려는 욕구인 에고(ego)가 있고, 이드와 에고를 잡아 세우는 사회적 규범인 슈퍼에고(Superego)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가볍게 봤을 뿐인데 프로이트가 말하는 욕망은 매우 막연하고 어디로 튈 줄 모를 것 같은 느낌이 들죠? 들뢰즈와 가타리는 바로 이 점을 비판했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이 추상적인 결핍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결핍이라고 보았습니다. 프로이트가 말한 욕망이 ‘뭔가 하고 싶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나 ‘아무거나 먹고 싶은데 아무거나 먹기는 싫어’처럼 뜬구름 같은 이야기라면,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 욕망은 ‘노래를 잘하고 싶어’나 ‘전역하고 싶어’처럼 목표가 명확하게 제시된 것입니다. 이런 욕망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는 생산적인 힘이자 존재의 원천입니다. 제가 <차이와 반복>을 설명하면서 들뢰즈가 존재를 정지한 대상이 아니라 운동 과정이라고 봤다고 했는데, 그 주장이 한 단계 심화된 것이 욕망 이야기입니다.

 

욕망의 여러 속성 중 들뢰즈와 가타리가 가장 핵심으로 꼽은 건 ‘무엇과 접속하느냐’였습니다. 예컨대 ‘전역하고 싶다’는 욕망을 보겠습니다. ‘전역’은 ‘군인 신분을 그만둠’에서 ‘자유의 결핍’과 접속하면 ‘민간인으로서의 자유’로 이어지고, ‘내 삶을 살고 싶다’와 접속하면 ‘대학원 입학’이 되죠. 다양한 속성과 결합함으로써 욕망은 다양한 양상을 띱니다. 이 부분이 바로 뒤 내용과 이어지니 기억해두시길 바랍니다.”

 

리마토르는 마지막 책으로 자료 화면을 넘겼다. 한눈에 봐도 가장 어려워 보이는 책이었기에 청중들은 이해를 위한 두통의 고통이 찾아올 것에 대비했다. 포스트 모더니스트 3인방 강의의 끝에 도달한 리마토르도 끝이 보인다는 생각에 강의에 박차를 가했다.

 

“들뢰즈의 저서 중 가장 핵심으로 꼽히는 <천 개의 고원>입니다. 앞서 본 <안티 오이디푸스>처럼 이 책도 펠릭스 가타리와 공동 집필했죠. 들뢰즈의 주요 주장들이 이 책 한 권에 다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들뢰즈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책입니다. 그럼 이번에도 찬찬히 살펴보도록 하죠.

 

들뢰즈는 이 책에서 ‘나무라면 진절머리가 난다’라고 말합니다. ‘나무’가 뭘까요? 들뢰즈가 말하는 ‘나무’전통적인 서양 철학의 세계관입니다. 식물인 나무는 뿌리를 두고 위로 뻗어나죠. 이처럼 기존 서양 철학은 가장 근원적인 개념을 두고 근원 개념에서 파생되는 식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벌써 오늘만 몇 번이나 언급되는 플라톤만 해도 이데아-현실 세계라는 사고방식을 보여주었고, 그리스 후기 철학자인 플로티누스는 만물의 근원인 ‘하나(The One)’에서 흘러넘쳐서 정신이 만들어지고, 다시 영혼과 물질이 나온다고 보았죠. 데카르트는 Cogito, ergo sum으로 대표되는 이성을, 헤겔은 절대정신을 중심에 두고 자신의 철학을 전개했습니다.

 

들뢰즈는 이를 마뜩잖게 봤습니다. 나무의 사고방식을 따르면 중심 이론과 다르게 전개되는 ‘차이’는 전부 ‘오류’가 됩니다. 들뢰즈가 영향을 받은 68혁명이 모든 억압에서 탈피하는 걸 골자로 했음을 생각해보면, 차이를 오류로 몰고 가는 것 역시 폭력이자 억압입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나무의 사고방식을 대체할 새로운 논리를 제시합니다. 바로 리좀의 사고방식이죠.

 

리좀(Rhizome)은 ‘뿌리줄기’를 의미하는 영단어입니다. 썩 친숙한 단어는 아니죠. 나무의 사고방식이 아래에서 위로 뻗어 올라가는 형태라면 리좀의 사고방식, 다시 말해 뿌리줄기의 사고방식은 어떨까요? 나무처럼 중심이 있을까요? 그렇지 않죠. 중심뿐만 아니라 질서도 없습니다. 뿌리줄기들은 서로 연결되고 끊어지고를 반복하며 뒤엉켜있습니다. 다시 말해 나무처럼 어떤 위계질서가 있는 게 아니라 모두 평등한 관계를 맺죠.

 

모두가 평등하면 ‘무엇이 중요하다’라는 질문은 힘을 못 씁니다. 대신 ‘어떤 관계를 맺느냐’라는 질문이 힘을 쓰게 되죠. 존재의 성격은 여러 존재와 관계를 맺으면서 바뀌게 됩니다. 예를 들어, 총이라는 존재가 군인과 결합하면 병역의 의무가 되고, 범죄자와 결합하면 테러리스트가 되는 셈이죠. 전술한 <안티 오이디푸스> 끝자락에서 나왔던 이야기를 기억해두라는 게 바로 이 이야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어떤 관계를 맺느냐’의 질문은 뒤에서 또 나옵니다.”

 

“관계 이야기가 또 나온다고? 이쯤 되면 들뢰즈가 포스트 모더니스트인지 구조주의자인지 모르겠네.”

 

리마토르의 강의를 듣던 칸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녀 자신이 전문가는 아니지만 포스트 모더니즘과 구조주의는 다른 사상으로 알고 있었는데 포스트 모더니스트라는 들뢰즈가 계속 구조주의 같은 이야기를 하니 머리에 있던 개념이 흔들거리면서 헷갈렸다.

 

“관계의 접속으로 존재가 동적인 상태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들뢰즈의 주장은 후기 구조주의와도 맞닿아 있어. 포스트 모더니즘의 특성이 이성 같은 거대한 서사의 폐기를 주장하며 해체와 상대주의로 나아가는데, 후기 구조주의는 푸코와 들뢰즈의 사상에서 나타났듯이 상대주의로 흐르니 포스트 모더니즘과 겹쳐 보이는 현상이 발생하지. 하지만 둘은 다른 사상이 맞아.”

 

칸의 질문을 들은 아스널이 옆에서 답을 달아주었다. 심리학뿐만 아니라 철학까지 설명할 수 있는 아스널의 모습에 칸은 이런 건 언제 공부했냐면서 놀랐다. 아스널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설명했을 때처럼 겸허히 웃으면서 말했다.

 

“대학원에 다니면 많은 역량이 요구되더군.”

 

“...그랬던 건가.”

 

뜻밖의 대답에 칸은 잠시 뭐라 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면서도 다양한 분야를 망라할 수 있는 교육을 행하는 리마토르의 연구 지도가 대체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지 호기심이 들었다. 칸이 자신도 한 번 진지하게 철학을 배워볼까 고민하는 사이에도 리마토르의 설명은 끊기지 않았다.

 

“들뢰즈는 존재들의 관계 맺기를 통해 사건(Simulacre)이 발생한다고 보았습니다. 사건존재에 의미가 접속해서 발생한 사태와 새로 발생한 의미를 포괄해서 말하는 개념입니다. 이렇게 보면 어려우니 예시를 들도록 하죠.

 

저는 학자입니다. 여기에 하르페이아라는 학생이 접속하면 저는 ‘교수’가 되죠. 학생이라는 의미가 추가되어 교수의 의미가 새로 발생했습니다. 여기에 칸이라는 의미가 접속하면 어떻게 될까요? ‘남편’의 의미가 새로 생겨납니다. 이렇게 접속을 통해 의미가 달라지는 현상을 일컬어 들뢰즈는 사건이라 불렀습니다.

 

여기서 생각해봅시다. 학자였던 저는 다른 의미가 접속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합니다. 그럼 저는 고정된 존재인가요? 그렇지 않죠. 유동적으로 계속 바뀝니다. <차이와 반복>에서 보았던 존재가 운동 과정이라는 들뢰즈의 주장으로 이어지고,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보았던 접속 개념으로 이어진 결과죠. 들뢰즈는 존재 개념에서 더 나아갑니다. <천 개의 고원>에서 모든 존재를 ‘기계’라고 부르며 사건을 설명하죠.

 

자, 저희가 지금 있는 공간을 둘러봅시다. 여기에는 빔 프로젝터와 스크린, 교수인 저, 청중인 여러분, 마이크와 스피커, 의자 같은 기계가 접속해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기계들이 접속된 장소, 다시 말해 기계들이 접속해서 공간에 의미가 부여되는 것을 들뢰즈는 영토화라고 합니다. 영토화된 공간에는 새로운 규칙이 생성되죠. 이는 코드화라고 부릅니다. 마지막으로 영토화가 코드화가 관계를 맺는 걸 배치라고 하죠.

 

지금 영토화된 이곳은 강의를 듣는 의미가 부여되었습니다. 그러니 조용히하고 질문을 한다는 규칙이 생성되었죠. 제가 철학 강의를 함으로써 이곳은 강의실로 배치된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스카이나이츠의 공연이 접속하면 어떨까요? 이곳에 공연을 보는 의미가 부여되는 영토화가 벌어지겠죠. 그리고 기존의 조용히 하고 질문하는 규칙 대신 환호하고 감상하는 규칙이 생겨나는 코드화가 진행되고요. 즉, 강의실이 공연장으로 배치된 겁니다.

 

이런 배치는 모두 하나의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핵심 질문인 이유가 이 때문이죠. 기계들은 구체적인 욕망을 갖고 접속을 반복하기에 배치는 끊임없이 변하면서 사건도 계속해서 벌어집니다. 들뢰즈는 존재 하나하나의 속성보다 배치를 통해 벌어지는 사건이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존재론을 주장했죠. 그게 바로 사건의 존재론입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가 들뢰즈가 기존 서양 철학을 꿰뚫어보고 재배치했다는 평을 받는 이유입니다. 존재에 대한 질문을 사건에 대한 질문으로 옮김으로써 철학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거죠. 이렇게 들뢰즈에 대한 이야기까지 마치겠습니다.”

 

기나긴 이야기가 끝나자 청중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칸은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치면서 그에게 찬사를 보냈다. 목이 많이 말랐는지 물병을 물을 반이나 비운 리마토르는 긴 이야기에 가려져 모두에게서 잊힌 원래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긴 이야기를 듣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왜 이야기가 나왔는지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제가 해체주의를 통해 바이오로이드의 존재를 탐구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지금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다시금 깨달았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대로 모든 강의가 끝나는 줄 알았건만, 이제야 반이 왔다는 사실에 대부분의 청중들에게 그림자가 드리웠다. 하르페이아는 들뢰즈까지 듣고 쉬는 시간을 주었어야 했나 생각했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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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장 2달 만에 포스트 모더니즘 3인방 에피소드가 끝났다. 이제 보니 자크 데리다 한 명만 넣으면 되는데 왜 3명을 다 설명하고픈 욕망이 들었는지 내 자신이 이해가 안 되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어쩌겠나. 이번 에피소드에서 다룬 질 들뢰즈도 데리다만큼이나 난해하기로 악명 높지만 지난 데리다 에피소드가 너무 어렵게 쓰였다는 지적이 많이 들어와서 난이도를 많이 낮추려고 노력해봤어. 비유와 예시를 많이 넣었는데 가독성을 해치지는 않을까 걱정이네.


자... 이제 남은 원래 서사인 리마토르의 논문 에피소드로 돌아가야지. 제발 더 길어지지 말고 이번 휴가 때 매듭짓고 갈 수 있길 나 스스로도 바라고 있어.



글 읽어준 모두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기온이 떨어지고 있는데 감기 조심하고 오늘도 좋은 일만 가득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