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보존식만 까먹으며 지낸 것이옵니까? 생존자 분들을 살펴보니 전부 단백질과 비타민을 섭취하지 못한 지 오래 된 것 같사옵니다만."


"어버버... 그, 그게..."


카멜롯의 주방. 소완은 자연스럽게 주방장으로 군림하면서 저항군의 포티아와 바닐라를 휘어잡고 있었다. 원체 소심한 성격인 포티아가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굴리자, 그녀와는 반대로 전혀 주눅들지 않았던 바닐라가 대신 입을 열었다.


"가진 게 그것밖에 없으니 그렇죠. 우린 지하가 바다로 이어져 있다는 것도 며칠 전에 처음 알았거든요."


"어쩔 수 없군요. 저희 주인의 배에 생선을 포함한 해산물이 좀 저장돼있으니 이걸 나눠드리겠사옵니다. 급한대로 단백질 부족은 해결할 수 있겠군요."


"아, 다행이다...! 다들 기뻐할 거에요, 분명."


뜻밖에도 소완이 호의를 베풀자 포티아는 곧 얼굴에 화색을 띠었고, 바닐라는 눈을 약간 크게 떴다.


"의외네요. 당신이라면 당신 주인만 먹인답시고 식재료를 독점할 줄 알았는데."


"안그래도 주인께 진상할 요리를 위한 제일 신선한 식재료는 소첩이 따로 관리하고 있사옵니다. 어디까지나 남는 것들을 주는 것이니 착각하지 마시길. 그리고 이제부터 저의 주인은 당신의 주인이기도 하니 말을 주의하시지요."


"...실례했군요."


바닐라는 머쓱하게 헛기침을 했다. 포티아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양 손을 짝 부딪혔다.


"그, 그러면 메뉴는 피쉬 앤 칩스로 하죠! 튀김 요리라면 빠른 시간안에 많은 양을 만들기도 쉽고, 누구나 다 좋아하는 음식이니까요."


"흐음... 괜찮은 이유군요. 채택하겠사옵니다. 포티아는 기름과 튀김옷을 준비하고, 바닐라는 감자를 썰어놓으십시오. 생선을 손질하는 건 소첩이 맡겠사옵니다."


"네, 주방장님!"


"알겠습니다. 웨지로 썰어도 되겠죠?"


"피쉬 앤 칩스라면 웨지가 어울리는 법이니, 그리 하시지요."


주방에서 새어나오는 밝은 목소리에, 근처를 거닐던 블라인드 프린세스는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라스칼의 목을 따고, 블라인드 프린세스의 저항군이 정식으로 대장의 휘하에 들어가게 된 지 하루가 지났다. 블라인드 프린세스는 다들 별 일 없는지 살펴보기 위해 카멜롯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철충을 몰아내고 나면 죽은 동료들을 땅에 묻어주는 게 일과였다. 


동료들을 하나둘 잃어가며 모두들 점차 지쳐가고, 잘 웃지 않게 됐었다.


그러나 대장이 오게 되면서 모든 게 변했다.


첫날에는 다소의 부상자는 있어도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철충을 몰아냈고, 둘째날엔 그 지긋지긋한 철충 우두머리의 목을 치는 데에 성공했다. 남은 철충들은 소극적으로 변해서 전황은 자연스레 소강 상태에 들어섰다. 덕분에 사정이 많이 나아지면서 다들 조금씩 웃음을 되찾게 되었다.


한편 블라인드 프린세스는 기쁘면서도 싱숭생숭했다.


"오, 프린세스. 무슨 일 있어? 표정이 묘한데."


"그 목소리는... 클로버 씨군요."


자신을 향해 곧장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에 블라인드 프린세스는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딱히. 그냥 눈에 띄길래 말 걸어본 것 뿐이야. 그보다 무슨 일 있냐는 건 내가 물은 질문인데?"


"아, 죄송해요. 반사적으로 그만."


긴급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밤낮 가리지 않고 불려가는 게 일상이었었다. 블프는 거기까진 말하지 않고 머쓱한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라스칼의 목을 직접 치지 못한 게 분해서 그래?"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실감이 안나서 그래요."


"하긴, 예상했던 것보다 되게 빨리 끝나긴 했지. 대장은 종종 우리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를 낸다니까. 내가 지켜줘야 할 정도로 작은 세력이었던 게 엊그제였던 것 같은데, 이젠 대장이 모두를 책임지고 지켜주고 있다니. 새삼 자랑스럽게 느껴지는걸."


"당신은 제법 오랫동안 그를 곁에서 지켜봐왔나 보군요."


"그렇지. 대장과 제일 오래 알고지낸건 저기있는 좌우좌지만 말이야."


클로버는 고개를 돌려 텃밭을 바라봤다. 페어리 시리즈의 바이오로이드들이 텃밭의 꽃을 하나하나 정성껏 옮기고 있었는데, 그 중 저항군 아쿠아는 대장과 같이 들어왔던 어린애들에게 꽃을 옮겨심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클로버는 그 아이들 사이에 포함돼있는 좌우좌를 보고 중얼거렸다.


"훗. 저 아이도 성장한다는 건가..."


"제가 모르는 이야기가 있나보군요. 나중에 여유로워지면 그가 겪어왔던 이야기를 꼭 들어보고 싶네요."


"아아, 물론이지! 대장의 모험담이라면 하루종일 들려줄 수도 있다고! 여길 뜨는 것도 얼마 안남았으니 조금만 더 힘내자."


라스칼을 포함해 상당한 수의 철충을 해치웠는데도, 영국엔 여전히 무수한 철충이 남아있다. 


레프리콘은 아직 전시상황이라며 브라우니들을 데리고 성벽을 순찰하러 나갔는데, 그 브라우니들도 대장이 있으면 두려울 게 없다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게 되었다. 몇 년 만에 들어보는 노랫소리였다.


정말 그 말대로였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기적처럼 나타나, 압도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보란듯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라면 언제나 방법을 찾아낼 것이고, 블라인드 프린세스는 그가 언제나 승리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바쳐 그를 도울 생각이었다.


"그러고보니, 어딜 가도 대장의 기척이 안느껴지던데... 혹시 프리드웬에 가있는 걸까요?"


"음? 아마 그럴걸? 멀린이랑 할 얘기가 있다는 모양이더라."


***


라스칼의 시체는 몸통이랑 머리 둘 다 회수했다. 이유는 언젠가 오르카와의 거래에서 쓸모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오르카는 궁극적으로 철충과 싸워 이기는 게 목적이다. 알터리움 광물로 강화된 신종 연결체는 해부해서 연구할 가치가 있는 귀중한 샘플이니 분명 관심을 보일거다. 비싸게 팔아먹어야지.


"꼴 좋다, 인마! 내가 몸만 멀쩡했으면 침이라도 뱉어주는 건데. 그나저나 몸통은 판다 해도 머리는 장대에 걸어서 효수하면 철충들 엿도 먹이고 재밌을 것 같지 않아? 아님 박제해서 트로피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고."


아직 통조림 모드인 멀린이 벽에 달린 스피커를 통해 떠들었다.


"완성품이여야 더 가치있을 테니까. 언젠가 딴 놈 잡으면 그 때 그렇게 하자. 머리랑 몸은 각각 다른 용기에 넣어서 엄중하게 보관해. 감시도 붙이고."


AGS들이 라스칼의 시체를 가지런히 정리해 임시 용기에 담았다. 일단은 프리드웬의 영창을 적당히 개조해서 라스칼 보관실로 쓰기로 했다. 철충의 시체는 유기물이 아니니 부패할 것 같지는 않지만, 나중에 출항하고 나면 방부제 만들어서 절여놓을 생각이다.


그건 그렇고, 슬슬 두 번째 라스칼이 나타날 때인 것 같은데... 원작 스토리에선 모리아티가 알고보니 두 놈이어서 하나를 잡았는데도 다른 하나가 마지막까지 오르카를 압박했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이 라스칼을 죽인 뒤로 철충한테선 딱히 공격해오려는 기색이 안보인다.


그래서 쉐이드를 시켜서 철충 진지에 정찰보냈는데...


"앗. 아서, 방금 막 쉐이드가 귀환했어."


"딱 좋을 때 왔군. 들어오라고 해."


문이 양옆으로 열리며 쉐이드가 걸어들어왔다.


"보고드립니다. 명령하신 대로 추가적인 적 연결체를 찾아봤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전에 제거한 특이 연결체가 아닌 일반 연결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 음... 알았어. 정찰 수고했어."


"자세한 정찰 결과는 프리드웬 인트라넷에 업로드했습니다."


...뭐라고 해야하나, 아직 딱딱한 느낌이네.


버뮤다 팀 연구소에서 얻은 설계도를 토대로 만든 쉐이드 2호. 철충에 감염된 메모리 칩에선 데이터를 추출해낼 수가 없어 '그' 쉐이드의 기억을 이어받을 수는 없었다. 대신 1호는 그 녀석을 기리는 의미에서 영구결번으로 남겨뒀다.


쉐이드 2호는 감정모듈과 학습모듈을 달기는 했지만 아직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성격이다. 문 밖에서 네오딤이 관심갖고 갸웃갸웃 거리는데 얘는 눈길도 안주고 있다. 이 쉐이드도 1호처럼 감정이 생기려면 몇 년이 지나야 하는걸까.


"오, 지금 들어왔네. 어디보자... 흐음, 흐음. 역시 그렇군."


스피커 너머의 멀린이 중얼거렸다.


"뭔가 알아냈어?"


"카멜롯을 중심으로 둘러싸서 진을 치고 대기하고 있어. 하지만 뭔가 꾸미고있는 모양새는 아냐. 명령을 내릴 사령탑이 사라졌으니 철수도 못하고 공격도 못하고 우왕좌왕 하고있다는 느낌이네. 

비유하자면... 좋아하는 선배를 위한 고백편지를 썼는데 정작 전달하지는 못하고 발만 동동 굴리는 부끄럼쟁이 여중생같은 상태라고나 할까?"


"왜 하필 비유가 그거야..."


뭐 아무튼 간에,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네. 쉐이드의 눈에 띄지 않은 것도 그렇고, 멀린이 저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두 번째 라스칼은 아직 움직이지 않은 것 같은데, 뭐하고 있는거지? 나는 통에 담겨 옮겨지는 라스칼의 시체를 보면서 안개나라 후반부 스토리를 최대한 자세히 떠올리려다가, 한 가지 이유를 추측할 수 있었다.


첫째, 원작에서 모리아티를 연구한 닥터의 말에 따르면 그 모리아티는 만들어진지 1년 채 안됐다고 했었다.

둘째, 원래 안개나라는 겨울 이벤트다. 그 때에 마리아랑 레이시 크리스마스 스킨이 나왔으니 분명하다. 

셋째, 겨울의 방주도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겨울 이벤트다. 다시말해 겨울방주 시점으로부터 1년 후에 멀린의 구조신호를 받아 안개나라 이벤트가 시작되는 거다.


그런데 난 겨울방주에서 다 건너뛰고 냉큼 영국에 와버렸으니 원작 시점보다 1년 일찍 도착한 셈이다. 다시 말해... 두번째 라스칼이 만들어지기 전에 말이다.


와, 나 되게 일찍 온 거였네.


***


시간은 빠르게 흘러, 마침내 프리드웬을 출항시킬 준비가 끝마쳐졌다. 열흘만에 지하 항구의 문이 열리고 저항군과 스트롱홀드 군단을 실은 프리드웬은 바다로 몸을 내밀었다. (감마한테서 긴빠이친 배도 버리고 가기엔 아까워서 같이 끌고 나왔다.)


그 열흘의 시간동안, 또다른 라스칼이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칙커맨더나 센츄리온같은 지휘관 개체가 제 나름대로 병력을 규합해 몇 번 덤벼들긴 했는데, 멀린의 평가에 의하면 라스칼이 직접 지휘할 때에 비해 숫자도 전술도 애교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냥 멀린 선에서 정리가 됐었다.


배는 점점 영국에서 멀어졌다. 선내에 모인 모든 저항군 대원들은, 후미를 비추는 화면을 통해 작아져가는 육지를 바라봤다.


"드디어 끝난 거군요..."


블라인드 프린세스가 말했다. 


"그래... 끝났지."


"...영국은 강인한 땅입니다. 비록 지금은 철충의 손에 넘겨준 채로 떠나게 되지만... 언젠가 영국으로 돌아와 모든 철충을 몰아내고 저 토대 위에 재건만 한다면, 모든 이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줄-"


'콰과과광—!'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엄청난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요."


나는 화면에 비춰진 이 광경을 블프에게 설명해줘도 되나 잠깐 고민했다가, 입을 열었다.


"카멜롯이 성대하게 폭발했어. 버섯구름도 피어올랐네."


"네!? 왜요!?"


"하하핫! 토대까지 날아가버렸네. 유감이양~!"


펍헤드가 블프 옆을 빙글빙글 돌면서 깐죽거렸다. 안전거리를 확보하자 멀린이 원자력 발전소를 원격으로 폭파시킨 것이었다. 화면이 엄청 밝게 빛났는데, 직접 보는 게 아닌 카메라를 통해 보는거라 실명될 위험은 없었다. 카멜롯 뿐만 아니라 포츠머스를 통째로 날려버릴 정도의 위력일 거라고 하니 진작에 내빼지 않고 진을 치고 있던 철충들도 다 쓸려갔겠군. 


"세상에, 나중에 저거 어떻게 복구하죠. 방사능 천지가 됐을텐데."


"어쩔 수 없었다고. 저 발전소에서 생산되는 전력이 얼만데, 철충한테 고스란히 넘겨줄 수는 없잖아?"


"그건... 으음, 그건 그렇네요. 모처럼 성녀스런 모습을 보이나 했더니..."


어처구니 없어하던 블프는 납득한 것 같으면서도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걸로 정말 다 끝난거니까, 긴장 놓고 푹 쉬어도 돼."


"네... 당분간은 그냥 아무 생각도 하지않고 푹 쉬어야겠어요. 그렇지만, 조금만 더 곁에 있어도 되겠죠?"


블프의 물음에, 나는 몸을 완전히 뒤로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물론, 상관없지."


그 다음으로는 그녀의 뒤에 있는, 이제부터 내가 이끌어야 할 수많은 저항군 대원들을 한명한명 천천히 돌아봤다.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길래 살짝 손을 흔들어줬다.


"인간. 이제 어디로 갈거야? 이렇게나 수가 많아졌으니 계속 배에서 살기는 힘들 것 같은데."


좌우좌가 물었다. 사람이 늘어날 때마다 자신의 자리가 사라질까봐 전전긍긍하던 모습은 더이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글쎄. 생각해둔 게 없는데... 누구 좋은 생각 있는 사람?"


"후후, 아무래도 이 초천재 참모님이 나설 때인 것 같군!"


펍헤드가 내 옆으로 깡총 뛰어왔다.


"아서가 원하는건 철충과 펙스 모두로부터 안전한 땅 맞지?


"맞아. 아는데 있어?"


"락 하버. 안전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곳이지."


굉장히 생소한 이름이 들리자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뜬 채로 끔뻑거렸다. 


"락 하버...? 그건 분명..."


"그래. 마지막까지 철충과 항전했던, 인류 최후의 보루. 전략병기도 막을 수 있을 정도의 지하 벙커까지 준비되어 있지."


"멀린. 하지만 거긴 결국 함락됐잖아요?"


"무너진 요새는 다시 세우면 되는 일이야. 철충한테 대항해가며 살아가는 전 세계의 바이오로이드들에게는, 인간이 이끄는 저항군이 그곳에 자리잡은 것 만으로도 의미가 있어."


락 하버라... 들어는 봤지만... 그거 사실상 맥거핀 아닌가? 대략적인 설정만 잡히고 스토리에선 제대로 나온 적이 없잖아.


"...괜찮은 제안이긴 한데, 정작 그게 어디 있는건지를 몰라선 갈 수가 없어."


"내가 알아. 호주에 있어."


"뭣."


"이래뵈도 멸망 전에는 펙스와 블랙리버의 높으신 분들 사이에서 부대끼던 몸이었단 말이지. 이정도 정보는 접할 수 있었어."


멀린이 태연하게 말했다. 락 하버가 호주에 있는 거였어? 대륙에 건설된 지하 요새고, 철충의 침입을 최대한 막으려면 사방이 바다로 둘러쌓여야 하니까... 그럴싸하네. 유라시아와 아메리카, 아프리카는 바다의 이점을 살리기엔 내륙이 너무 넓고, 남극은 인간도 버티기 힘든 곳이지. 만약 락 하버가 남극에 있었으면 찐컨이 세상물정 모른 채 고립됐을 일도 없었을테고.


그렇지만 락 하버라... 내게 있어선 사실상 완전히 미지의 땅이지만, 어차피 내가 아는 라오 스토리는 안개나라가 끝이니 이제부턴 어디로 가던 모르는 길일 수 밖에 없나... 결단을 내려야겠네.


"멀린, 항로를 호주로 설정해줘. 락 하버로 가자."



통속의 뇌는 머릿속의 뇌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에전에 챈에서 봤던 팬문학 내용중에 락 하버가 호주에 있다는 말이 있었는데, 따져보니 확실히 호주가 제일 그럴싸해서 여기서도 그 설정 차용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