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영국에서 호주까지 배를 타고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아프리카 끝지락의 희망봉을 돌아서 가던가, 아님 지중해를 거쳐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던가. (왔던 길 유턴해서 북극항로를 빙 돌아가는 건 미친 짓이니까 논외.) 결론부터 말하자면 수에즈 운하를 통해서 가기로 했다.


사실상 난민이나 다름없는 영국의 저항군을 받아들이면서 인원수가 폭증했는데, 비축된 식량이 충분치 못한 상황이다. 이 배는 바다 위에서 오래 버틸 수 없다. 그런데 희망봉을 돌아서 가는 건 너무 오래 걸린다. 가는 도중에 보급하겠다고 아프리카 같은데에 내렸다가 철충한테 공격당할 수도 있는 노릇이고.


모처럼 프리드웬은 아슬아슬하게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있도록 설계된 배이기도 하니, 우리는 수에즈 운하를 거쳐 호주까지 최단거리로 가기로 했다.


물론 이렇게 하면 레모네이드 델타의 눈에 띌 위험이 있다. 지중해 바로 위에 있는 유럽이 바로 델타의 영토니까. 그렇지만 우리에겐 레아가 있다. 원작 10지역에서도 검증된 방법인, 레아의 기상 조작 능력을 써서 배를 중심으로 짙은 안개를 깔아 펙스의 시야를 가릴 수 있었다.


다만 워낙 큰 배라 육지에 근접할 때 눈에 띄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인지, 지브롤터 해협을 거쳐 지중해에 진입할 때 북쪽의 이베리아 반도에 있는 철충의 어그로를 좀 끌어버리고 말았다. 


근데 별 탈 없이 격퇴했다. 프리드웬이 기본적으로는 수송함이긴 해도, 군수기업 투탑인 블랙리버와 포세이돈의 합작이라 그런지 함포만 없을 뿐 온갖 병기가 내장되어 있었는데다 어나이얼레이터와 같은 재질의 합금으로 만들어져 내구도도 엄청났다. 대포를 맞아도 표면이 그슬리기만 할 뿐 꿈쩍도 안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이베리아 반도에 철충이 둥지틀고 있다는 뜻은 델타 등신년이 집청소를 제대로 안해놨다는 뜻이다. 이는 반대로 생각해보자면 델타가 유럽을 전부 장악하고 있다는 게 아니라는 증거다. 델타의 눈을 피해서 갈 수 있다.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하고 지중해에 들어오고나자 상황이 안정되었다. 배는 빠르게 나아가되 우리는 어깨에 힘을 조금 뺄 수 있었다.


***


"-그래서 레프리콘 씨가 프린세스라고 부르자 저하고 작은 저가 동시에 뭐죠? 라고 대답한 거 있죠!"


"그러니까 블라인드 프린세스랑 사이클롭스 프린세스랑 같이 있다가 레프리콘이 블라인드 프린세스를 줄여서 프린세스라고 불렀는데 블라인드 프린세스랑 사이클롭스 프린세스가 둘 다 자길 부른 줄 알았어서 레프리콘이 프린세스는 사이클롭스 프린세스가 아니라 블라인드 프린세스라고 정정해줬다는 얘기구만."


"바로 그거에요! 역시 잘하네요, 멀린."


"에잉, 이 몸의 천재적인 지능을 뽐낼 기회가 간장공장장 놀이밖에 없다니... 그보다 니들 둘이나 있으니 이름이 헷갈리잖아! 너무 길기도 하고!"


블라인드 프린세스는 사이클롭스 프린세스와 함께 멀린이 있는 중앙통제실에 와서 술판을 벌여놓으며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캬아~ 녹는다아아~!" 양반다리로 앉은 블라인드 프린세스가 캔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자 사이클롭스 프린세스는 반쯤 포기하다시피 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블라인드 프린세스는 블프라고 줄여부르고 있으니, 사이클롭스 프린세스는... 사프? 어감이 별론데."


"그런 프린세스 대신 블라인드라고 부르는 건 어떤가요?"


"그럼 짐은 사이클롭스가 된다만... 영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그건 그래. 사이클롭스만 떼어놓고 보면 아무래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외눈박이 거인이 먼저 연상되버리지. 그걸 제쳐두고서라도 남성틱한 이름이고."


"일눈이랑 영눈이는요?"


"...성녀인 짐이여, 그건 자폭이지 않느냐..."


"저만 할 수 있는 개그에요."


사이클롭스는 프린세스는 한숨을 한번 내쉬고선 캔맥주를 홀짝였다.


"참고로 용살자는 짐을 진조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있느니라."


"오, 그거 괜찮은데?"


"진조의 공주에서 따온 건가보네요. 그럼 전 빛의 성녀니까... 빛이 되는 건가요?"


"아니, 넌 이미 블프라고 불리고 있잖느냐."


"그보다 이런 호칭은 아서나 우리끼리만 친하니까 쓸 수 있는거지. 레프리콘처럼 예의 차리는 애들은 여전히... 아, 잠깐만 있어봐."


느닷없이 멀린이 얘기를 멈추고 침묵했다. 블프가 캔맨주를 한번 더 들이키고 입에서 뗄 때까지 조용히 있자 궁금함을 못참고 물었다.


"멀린,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전방에 섬이 포착됐어. 델타가 점령한 데인지는 멀어서 분간이 안되네. 일단 아서한테도 말해야겠다."


"섬이요? 무슨 섬인지 알 수 있겠나요?"


"어디 보자, 지도에 대비해보자면... 여긴가? 섬 이름이 그러니까..."


*



"몰타라고?"


멀린의 보고에 나는 또한번 놀랐다. 락 하버만큼은 아니더라도 제법 생소한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몰타 섬이라면 분명 9지역에서 지나가듯이 언급됐었지. 엠피시아 자매가 거기 갇혔다가 식량이 부족해 쫄쫄 굶으며 지냈다던가. ...왠지 멸망 후 버려져서 아무것도 없는 무인도일 것 같은데.


근데 그게 지중해에 있는 거였어? 지도에서 찾아본 적이 없어서 몰랐다. 하필 경로상에 그게 딱 위치해있냐. 펍헤드 머리 위에 달린 스피커를 통해 멀린이 말했다.


"어떡할래? 델타가 점령하지만 않았다면 잠깐 세워서 보급 좀 하고싶은데."


"굳이...?"


"아서, 우린 식량이 부족한 상황이거든. 하다못해 식수만이라도 구할 수 있다면 큰 수확이야."


아니 그러니까 아무것도 없을 것 같다니까... 그렇지만 그걸 어떻게 아냐고 물으면 답할 방법이 없고, 식량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긴 하다.


"...알았어. 와쳐를 띄워. 단, 마리오네트든 AGS든 델타군이 상주하고 있다는 낌새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당장 귀환시키고 몰타는 우회해서 간다."


"전적으로 찬성! 지금 와쳐한테 얘기할테니까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시간이 좀 흐른 뒤, 와쳐가 보내준 정찰 결과는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었다.


[보고드립니다. 펙스의 병력도, 철충도, 그리고 생존자도 누구 하나 없습니다. 오래 전에 멸망한 것이 분명합니다.]


와쳐가 찍은 사진에 나온 몰타는 폭격이라도 맞은건지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건물이 하나도 없었다. 남은 거라고는 과거 그 자리에 건물이 세워졌었다는 흔적 뿐이었다.


"위험 요소는 없지만... 건질 것도 없어보이는데."


"자세한 건 직접 상륙해서 조사해봐야 아는거지. 상공정찰로 모든 걸 알아낼 수는 없다고."


[멀린 대령의 의견은 타당합니다. 숨겨진 지하시설 따위가 존재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실제로 몰타 섬은 지질학적 특성 때문에 동굴이 많기도 합니다.]


"...멀린 대령? 너 계급 대령이었어?"


"이제와서!?"


펍헤드가 펄쩍 뛰었다.


"뭐, 그건 그거고... 혹시모를 숨겨진 물자나 자원이 있을지도 모르니 잠깐 쉬었다 가자는 거지?"


"그렇지. 거기다 다들 긴 항해로 지쳐있으니 땅에 발도 디디고 바람도 좀 쐬고. 겸사겸사 지브롤터 해협 지날때 철충한테 맞으면서 손상된 부분도 좀 고치고."


"쩝... 일리가 있네. 알았어. 몰타에 정박하자. 그래도 언제 델타가 눈치 깔 지 모르니 오래 머물지는 말고."


"그야 물론이지! 휴게소 들르는 느낌으로 한 몇 시간 정도만 쉬는 셈 치자고."


***


몰타의 항구에 들어온 프리드웬이 닻을 내렸다. 레아가 섬 주변에 깐 안개로 수평선은 뿌옇게 가려져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섬 안은 안개가 옅어 수색이 가능했다.


몰타를 수색할 대원들뿐만 아니라, 환기를 원하는 이들도 배에서 내려 해변에 모였다.


"아, 좋다~! 역시 사람은 쨍쨍한 햇볓 밑에서 살아야지! 화창한 날씨가 아닌 건 아쉽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야."


"으응, 그러게."


"숲도 있었으면 완벽했을텐데. 나중에 호주에 가면 실컷 산림욕이나 해야지."


중장비를 벗어던진 엘븐이 한껏 밝아진 얼굴로 기지개를 쭉 폈다. 탁 트인 야외라면 마냥 좋은 더치걸도 그녀 옆에서 헤실거렸다.


다만 모두가 휴식을 만끽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몰타 수색을 담당하게 된 대원들 외에도, 엔지니어들과 드론은 프리드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수리에 전념해야만 했다.


"하아... 분명 쉬러 온 거라고 들었는데, 왜 우리가 쉴 수 있는 시간은 한정돼있는거람..."


"지브롤터 해협을 지날때 제법 얻어맞았으니, 이 참에 확실히 보강해놔야 하거든? 배에 타고있는 동안은 제대로 고치지 못했으니까."


"귀찮아... 운항에 지장이 갈 정도도 아닌데, 굳이 해야 하나...?"


"일찍 끝낼수록 쉴 시간이 늘어나는 거니까 열심히 하는 거거든?"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때 또 공격당할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일세."


나는 공순이들에게 속으로 유감을 표하며 배에서 내렸다. 일단 수색대를 제외한 이들에겐 언제든지 떠날 수 있도록 멀리 가지 말고 가능한한 항구와 해변 근처에 머물러달라고 일러뒀다.


"굳이 주인님까지 나오실 필요 있습니까? 자신이 단 하나뿐인 인간이란 걸 자각해주셨으면 합니다만."


경호 목적으로 따라나온 바닐라가 말했다. 말투는 퉁명스럽긴 했어도 날 걱정해줘서 말하는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딱히 위험할 것도 없다고 하니까... 그냥 바람이나 좀 쐬려고 그래. 그리고 따지자면 유일한 인간은 아니지?"


"지구상 어딘가에 다른 인간이 있든 말든 저랑 무슨 상관입니까. 본 적도 없고, 볼 일도 없는데."


"...그건 그런가? 아무튼, 나도 멀리 안 갈 거야." 


"그거 참 다행이네요. 주인님은 배에서 눈 닿는 데에 둬야 다들 안심할 수 있거든요. 해변 산책이라도 하시겠습니까?"


"글쎄... 하암... 그러려고 했는데, 피곤해서 낮잠이나 좀 자고싶네."


하품이 나오는 입을 닫고 조용해진 바닐라를 돌아보자 그럴거면 왜 나왔냐 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주인님의 저질체력으로 침대 밖은 너무 가혹한 환경이었나보군요. 배로 돌아가시렵니까?"


"아니, 지금은 움직이기 귀찮은데... 그냥 여기 좀 드러눕지 뭐."


"예 뭐,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유턴하면 그건 그거대로 꼴사납겠죠."


바닐라는 툴툴대면서도 기다렸다는 듯 피크닉 가방에서 돗자리를 꺼내 척척 폈다.


"자. 유감스럽게도 배게를 안가져왔으니 대신 이걸 쓰시죠. 주인님 수준에 딱 맞는 배게입니다."


무릎꿇고 앉은 바닐라가 제 허벅지를 톡톡 두드렸다. 표정은 무심해보였지만 얼굴이 살짝 불그스름해진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기꺼이 호의를 받아들여 바닐라의 허벅지에 머리를 베고 누었다. 바닐라는 한 손에 든 양산으로 하늘을 가려주었다.


"이야, 진짜로 좋은 배게네. 준비성이 아주 철저한걸."


"쓰, 쓸데없는 소리는 됐으니 주무시기나 하시죠."


"그래... 출발할 때 되거나 무슨 일 생기면 깨워..."


나를 내려다보는 바닐라의 얼굴을 충분히 눈에 담은 뒤, 지긋이 눈을 감았다. 잠에 드는 건 금방이었다.




"...어나게."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두통이 엄습해왔다.


"일어나게. 지금 위험한 상황이니까."


눈을 뜨자 난생 처음보는 로봇의 얼굴이 보였다.


뭐야 시발.


바닐라는, 다른 애들 다 어디갔어.


*


처음엔 삿갓을 쓴 희한한 인간형 AGS, 그 다음에 나타난 건 뜬금없이 모래사장에서 솟아난 적대적인 AGS 무리. 삿갓 로봇의 뒤를 따라 적들을 뿌리치고 도착한 곳은 이 녀석이 은신처로 쓰고있다는 무너진 건물 지하였다. 그리고 난 그제서야 상황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정리해보자면,


"몰타엔 삼안 연구소가 있고, 거기엔 드림 워커라는 의료 기기가 있는데."


"으흠."


"아틀라스라는 AI가 맛이 가서 알...카에다? 라는 바이오로이드를 감금중이고?"


"알키오네일세. 알카에다는 20세기 테러집단 명칭이고."


"그래, 알키오네. 아무튼 나는 수면가스에 당해 우연히 알키오네의 꿈에 들어오게 되었고."


"그렇지."


"누가 깨워주지 않는 이상 스스로 잠에서 깨어나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거지."


"정확하네."


"시발."


"어허. 비속어를 쓰면 안되지."


삿갓이 점잖게 핀잔을 주었다. 아니 그치만 존나 말도 안되는 설정이잖아. 머리에 무슨 장치를 붙이거나 마키나 낙원때처럼 캡슐 안에 들어간 것도 아닌데, 이 섬 안에서 잠든 것 만으로도 사람의 '의식'을 뽑아내 기계에 옮겨담을 수가 있다고? 별의 아이가 악몽으로 영혼을 수확하는 거나 다름없잖아. 인류의 기술력은 영혼에 간섭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했었던 거야? 그럼 비스마르크는 사람을 일일이 캡슐에 집어넣어야 할 정도로 무능했던 거고?


...그나저나 삿갓이라, 분명 공모전 캐릭터 중에 김삿갓 AGS가 있긴 했었지. 내가 라오 세계에 들어오기 전에는 만들어지지 않은 캐릭터였는데, 여긴 처음부터 존재했던 건가? ...이 부분은 내가 생각해서 뭘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냥 넘어가자.


"뭐... 나 말고 다른 애들도 많이 왔으니까, 걔들이 깨워주길 기다려야겠네."


"자네의 일행은 아마 바이오로이드일 테지? 아무리 바이오로이드가 인간에 비해 약물 내성이 높다한들, 그녀들도 머지않아 수면가스에 당할걸세."


"AGS도 많이 데려왔으니 걱정마."


"흐음. 그렇다면 그들이 제한시간 안에 오기를 기대해야만 겠군."


"...제한시간?"


귀에 잡힌 불길한 단어에 몸이 움찔하자 삿갓이 문을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따라오게. 설명해주겠네."


삿갓을 따라 폐허 밖으로 나오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붉었던 저녁 하늘이 어느새 검게 물들어있었다. 


거기서 삿갓이 해준 설명에 나는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밤하늘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섬 전체를 덮을 정도로 거대한 파도였다. 


저 파도가 섬을 휩쓸고 지나가면 섬의 모든 것이 초기화된다고 한다. 삿갓은 외부에서 들어온 AI라 그런지 초기화의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나는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일이다. 기억이 초기화되던가, 아니면... 이물질로 인식당해 소멸당하던가.


"...파도가 오기까지 남은 시간은?"


"약 여섯 시간 정도. 아침 해가 뜨는 동시에 초기화가 진행되는 걸세."


여섯 시간이라. 여유로운 건지 아닌건지 모르겠네. 여섯 시간 안에 섬 수색이 안끝나거나, 내가 그냥 꿀잠 자는건 줄 알고 깨우지 않는다면...


"빨리 좋은 방법을 생각해보게. AGS나 다른 적으로부터는 지켜줄 수 있어도, 저 파도를 상대로는 나도 답이 없으니."


"...그보다 여긴 알키오네란 애의 꿈 속이라고 했잖아? 걘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거야?"


"그건 나도 모르겠군. 이 섬에서 몇 년을 돌아다녔지만 여지껏 자네를 제외한 다른 생물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다네. 

하지만, 확실히... 그녀를 찾아 꿈에서 깨게 만든다면 우리도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모르네. 어떻게든 찾아봐야겠군."


"그전에 우리 애들부터 찾고 싶은데... 걔들도 잠들면 이 안에 들어오게 되는거지?"


"그렇다네. 바이오로이드라고 해도 지금쯤이면 잠들었겠지."


내가 느닷없이 사라졌으니 분명 당황했을 거다. 모아서 안심시키고 상황 설명 한 뒤 다같이 알키오네를 찾아봐야지.


"헌데 만날 방법은 있나?"


"니가 날 찾았던 해변, 거기에 다들 모여있을 거야."


삿갓이 날 깨웠던 장소는 내가 잠들었던 그 자리였다. 이런 상황을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마침 수색대를 제외한 모두에겐 해변에 모여있으라고 얘기해뒀었다.


"알겠네. 먼저 그곳부터 들리도록 하... 아니, 자네 몸이...!?"


"? 내 몸이 왜..."


삿갓의 말에 내 몸을 내려본 나는 기겁했다. 내 손과 발이 유령처럼 반투명해져 있었다. 삿갓이 괜찮냐며 손대려 하자 진짜로 유령이라도 된 것 마냥 삿갓의 손이 내 몸을 통과했다.


"이, 이건 또 뭐야!?"


"으음... 나도 모르겠군. 뇌파를 조종해서 꿈을 컨트롤 하는데 성공한 건가?"


"난 아무것도 안했어!"


"아직 초기화까진 시간이 남았거늘, 무슨 버그인 건가? 전에 봤을 땐 아틀라스의 회로가 상당히 부식된 상태이긴 했었지. 버그 같은 게 아니라면, 드림 워커 서버와의 연결이 불안정해졌다거나."


"그게 무슨 뜻이야?"


"그러니까 내 말은-"


*


"일어나거라!!"


누군가 내 어깨를 붙잡고 탈탈 흔들자 눈이 번쩍 뜨였다. 눈 앞에는 진심으로 당황한 얼굴을 한 사이클롭스 프린세스가 있었다. 나는 눈을 끔뻑거리며 고개를 흔들고, 상체를 일으켜세웠다.


"...아이고 머리야... 뭐야...?"


"용살자여! 짐을 알아보겠느냐!? 이제 다 괜찮다! 안심하거라!"


"진조야, 잠깐만, 알았으니 일단 손 좀 떼고... 여긴..."


"프리드웬입니다."


사이클롭스 프린세스를 떼어놓고 나니 바닐라를 공손히 안아든 블라인드 프린세스가 보였다. 곧이어 나타난 펍헤드(멀린)가 설명을 덧붙였다.


"수면가스야. 섬 전체에 수면가스가 퍼져있었어. 그래서 섬에 들어간 사람들은 아서를 포함해 전부 잠들어버렸더라고."


"뭐...!?"


"같이 간 다른 애들은 AGS 시켜서 회수하는 중이니까, 안심해."


수면가스? 이게 대체 무슨 소리... 잠깐,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아 맞아, 꿈에서 분명 삿갓이... 그 꿈!

그건 그냥 개꿈이었나? 아님 꿈 속의 삿갓이 말한 게... 사실인가? 


소완이 얼음물이 담긴 컵을 가져다주었다. 얘는 배 안에 머무르고 있어서인지 수면가스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냉수를 입안에 흘려보내면서 머리를 식혔다.


...바닐라.


나는 몸을 일으켜세워 블프에게 안겨있는 바닐라를 흔들어 깨웠다.


"바닐라, 일어나. 바닐라!"


"으... 주... 주인님...?"


눈을 끔뻑거리던 바닐라는 나를 보더니 눈이 번쩍 뜨였다. 이내 그녀는 발버둥쳐서 블프의 품에서 내리더니 냅다 내 볼을 꼬집었다.


"주잉님! 무사하신 거죠? 이번엔 꿈이 아닌거죠!?"


"왜 내 볼을 끄즙으으으..."


나는 바닐라의 손을 떼어내고, 천천히 그녀의 손을 쓸었다.


"괜찮아, 난 여기 있어. 무서운 꿈이라도 꿨나봐?"


"...네."


"눈 뜨고 보니 내가 사라지고 없었어? 프리드웬도 없었고?"


"네..."


"그리고 시간은 어느새 저녁이 되어있었고, 모래사장에선 적대적인 AGS가 끊임없이 튀어나오고 그랬어?"


"네... 네? 그걸, 주인님이 어떻게 알고 계시는 겁니까?"


바닐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쩌면, 그거 평범한 개꿈이 아닐지도 몰라."


애초에 흔한 꿈이었으면 잠에서 깬 지 1분만에 꿈 내용을 다 잊어먹었을텐데, 아직도 삿갓과 같이 행동하고 얘기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바닐라는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뒤의 블라인드 프린세스도.


"...그런데 블프랑 진조 너네 둘도 섬에 내리지 않았던가? 어떻게 멀쩡한 거야?"


"근성으로 버텼죠."


"원래 바이오로이드는 약물 내성이 높기도 하고, 얘내 둘은 그 중에서도 특히나 튼튼한 애들이니까."


...안개나라 이벤트에서도 그런 내용이 나오긴 했었지, 그러고보니.


"그보다 멀린, 분명 위험요소는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 아니, 정찰했을 땐 진짜로 적도 생존자도 아무것도 없었단 말이야! 무슨 외계행성 가는 것도 아닌데 굳이 대기검사 같은걸 할 리도 없고!"


블프가 툭 쏘아붙이자 멀린이 황급히 변명했다. 진조는 보다못해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둘 다 그만두지 못하겠느냐. 지금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거늘. 이 수면가스가 어디서 나온건지가 관건이지. 혹여나... 레모네이드 델타가 파놓은 함정이 아닌가?"


"그렇다고 하기엔... 뭔가 이상해. 함정이었으면 아서가 잠들었을 때 복병이든 뭐든 튀어나왔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어. 문자 그대로 수면가스밖에 없는 상황이야. 

이건 내 추측이지만... 이 섬에 수면가스가 저장돼있는 시설 따위가 있었는데, 무슨 사고나 노후화 등으로 가스가 새어나온 거라고 봐야겠지."


"멀린 말이 맞아. 듣자하니 섬 지하에 삼안 연구소가 숨겨져있다는 모양이야."


다들 동시에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꿈에서 들었어."


"...주인님,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못믿겠으면 확인해보면 되지. 

잠든 애들 전부 다 깨워! 상황종료 될 때까진 자지 말고 버티라고 해!"


"뭐? 아서, 그게 무슨 말이야? 상황이라니, 무슨 상황?"


"AGS로 이루어진 수색대를 재편성해. 섬의 숨겨진 시설을 찾아봐. 레아! 잠깐 이리로 내려와봐!"


"네, 주인님~ 레아가 왔어요."


상공에서 섬을 덮을 안개를 유지하던 레아가 내 목소리를 듣고 날아와 사뿐히 착지했다.


"비로 섬의 수면가스를 씻어낼 수 있겠어?"


"물론이죠! 제게 맡겨만 주세요."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잠든 이들은 제 얼굴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에 하나 둘 눈을 떴다.


꿈 속에선 여러 제약이 있었지만 꿈 밖에는 그렇지 않다. 여기서부턴 우리의 턴이다. 쓸 수 있는 건 다 써야지. 아틀라스가 요정마을 이벤트의 로버트같은 미친 AI라면, 직접 가서 때려부수고 삿갓이랑 알키오네란 애를 꺼내오면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건 조금 나중의 일이었다.



그런가... 무사히 탈출한 건가... 나만 빼고...


참고로 이베리아 반도에 델타군 대신 철충이 자리잡고 있다는건 공식설정. 지브롤터 해협을 막을 해군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