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AGS 수색대를 보내고 좀 기다리자 몰타 섬 지하에 숨겨져있던 삼안의 연구소를 찾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경비 AGS 따위와의 교전을 예상했었는데 막상 들어가보니 적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드림 워커라는 기계도 찾았지만 아틀라스라는 AI하고는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딱히 대화를 거부한다던가 하는 게 아니라 문자 그대로 외부에서 접촉할 수단이 없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언더와쳐같은 케이스인 것 같다.


나는 현장을 가능한 한 건드리지 말고 보존해놓으라는 지시를 내린 뒤 엔지니어들과 호위로 그룹을 꾸려 진입하기로 했다. 실내에 찬 수면가스는 레아의 능력으로 지울 수 없지만 카멜롯에서 방독면을 있는대로 쓸어왔으니 문제없다. 거기에 나도 같이 가기로-


"기다리거라."


-했는데 글라시아스가 만류했다.


"맹우여, 좀 더 스스로를 소중히 할 수는 없겠느냐. 그대는 지금처럼, 항상 안전한 곳에 있었으면 좋겠구나."


"지금 가는 곳도 안전하다고 생간하는데... 먼저 간 애들이 위험할 건 하나도 없다고 했잖아?"


"내 그들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나, 그럼에도 불안감을 차마 떨쳐낼 수가 없구나. 그대는 필요하다면 스스로 위험 속에 뛰어들기를 마다하지 않으니 말이다."


글라시아스가 근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건 아닐거라고 생각하는데... 난 무모한 모험같은 건 안하는 성격이라고."


"그대는 영국이 끝이 안보이는 철충의 손에 떨어졌음을 알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들어가지 않았더냐. 오로지 거기 갇혀있을 사람들을 위해."


"그건 다른 얘기지. 내가 안가면 누가 가? 더 지체됐으면 희생자가 늘어났을텐데, 오르카가 알아서 찾아가기를 기다리라는 거야?"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내가 걱정하는 거란다."


나는 바로 반박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글라시아스가 말을 이었다.


"맹우여. 어떤 위험이 있어도 굴하지 않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달려가 손을 내미는 그 성품은 고귀한 것이나, 언젠가 그대 자신을 해하지 않을까 두렵구나."


"...과대평가야. 난 안전할 거라는 확신이 있으니까 움직였던 거라고."


"암, 별 일 있겠수? 문자 그대로 위험할 건덕지가 없다는데. 동굴 내에 보강재를 덕지덕지 발라놓았다고 하니 지반이 무너질 일도 없을테고. 막말로 저 친구가 발을 헛디뎌서 넘어질 뻔 해도 주변에서 잡아줄테니 코든 뒤통수든 어디 깨질 일도 없을거요."


페레그리누스가 글라시아스의 날개를 툭툭 쳐서 시선을 끌고선 어깨를 으쓱했다. 글라시아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스피커를 열었다.


"맹우여. 이번에도 네가 가야만 한다는 필요성을 느낀 것이느냐."


"어쩔 수 없잖아. 삿갓이랑 제대로 만나본 게 나밖에 없으니까."


섬 안에서 잠들고 드림 워커의 가상 공간에 갇혔다가 늦게 깨어난 바이오로이드들은 꿈 속에서 삿갓 쓴 로봇을 봤다고 입을 모아 증언했다. 모래사장에서 적대적인 AGS들이 나타나자 원진을 치고 농성하던 중 삿갓이 나타나 AGS들을 베어버리며 도와줬었다고. 다만 상황이 워낙 급박해서 말 한마디도 못나눴다고 했다.


알키오네나 아틀라스에 대해 우리보다 더 잘 파악하고 있는 게 삿갓이니 그의 도움을 받아야만 일을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다. 그러니 내가 가서 만나봐야 얘기가 빠를거다. 삿갓도 구조대상 중 하나기도 하고, 약간 알프레드같은 과로 보이는 게 적은 아닐 것 같다. 애초에 공모전 캐릭터인데 설마 스작이 얘를 악당으로 써먹겠어.


준비를 마친 우리는 배에서 내려 다시 몰타의 땅 위에 발을 디뎠다.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기에 바닐라가 우산을 들고 내 옆에 바싹 붙었다. 모래사장을 빤히 쳐다봐도 이번엔 아무것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여긴 현실이니까. 우린 모래사장을 뒤로한 채 AGS 수색대가 보내준 좌표로 이동했다.


***


오래전에 버려진 게 분명한 삼안 연구소 내부는 제법 을씨넌스러웠지만, 전에 버뮤다 팀 연구소에 들어갔을 때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나는 드림 워커라고 새겨져있는 캡슐과, 그 안에 잠들어있는 바이오로이드의 얼굴을 살펴봤다. 지금 방독면을 쓰고있어서 잘 안보이긴 한데... 단정한 흑발 머리에 좌우대칭을 이루는 두 줄의 은색 브릿지. 아마 얘가 바로 삿갓이 말한 알키오네인 듯 하다.


여기 강제종료 버튼도 있으니 이걸 누르면 바로 깨어날 듯 하지만, 삿갓이 알키오네의 정신에 들어가있는 상태로 깨웠다간 무슨 일이 생길 지 모른다. 알키오네의 몸에 삿갓의 인격이 들어가 이중인격이 된다거나, 아님 둘의 인격이 섞이거나, 삿갓의 인격이 알키오네 머리속에 갇히거나... 포츈은 아무리 그래도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대장님, 잠깐 이리로 와보실래요?"


휑하니 열린 문 너머에서 그렘린이 손짓했다. 그녀를 따라 문턱을 넘자 드림 워커의 서버실이 나왔다.


삿갓의 본체는 여기에 전원이 꺼진 채로 쓰러져 있었다. 그것도 드림 워커 입력 포트에 지 머리카락(으로 보이는 부위) 중 한 다발을 꽃아넣은채로. 보아하니 저걸 무슨 신경삭처럼 쓰는 모양이다. 프로토스냐고.


나는 삿갓에게서 눈을 떼고 드림 워커 본체에 달라붙어 작업중인 엔지니어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렘린이 드림 워커랑 케이블이 연결된 태블릿을 들어 보여줬다. 태블릿에는 검은 바탕에 흰 글씨가 잔뜩 나열돼있는 명령 프롬프트 화면같은 게 띄워져 있었다.


"아틀라스라는 AI와 교신하는 데 성공했어요. 원래는 드림 워커의 가상공간에 들어가야만 만날 수 있는건데, 직접 본체에 연결해보니 어떻게든 되더라고요."


"이건... 채팅으로 대화해야 하는건가?"


"일반적인 AGS처럼 스피커와 마이크를 통해 말하는 기능은 처음부터 고려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아무튼 얘기도 나눠보고 여러모로 정밀진단을 해봤는데..."


그렘린에게서 들은 내용을 정리해보자면,


아틀라스는 애초에 고장난 적이 없었다. 아틀라스는 정말로 알키오네를 치료하는 중이었다. 


알키오네는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중이라 도무지 상태가 호전되질 않았고, 치료기간이 워낙 길어진 탓에 삿갓이 그녀를 감금하고 있는 거라 오해한 거였다.


현재 삿갓은 알키오네의 꿈 속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나, 아틀라스는 기체 노후화로 인해 본래 기능의 대부분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라서 삿갓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가 없다.


인간과 삿갓이 공격당한 건 아틀라스가 알키오네의 정신을 보호하기 위해 비정상적인 루트로 들어온 이들을 침입자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했다시피 아틀라스는 알키오네를 제외한 접속자의 신원 확인이 불가능한 상태였어서, 사실상 자동 보안 프로그램에 맡겨놓고 방임한 상태였기에 인간이 공격당하는 사고가 발생해버리고 만 것이었다.


"이거... 무슨 기능 제한이 이리 많아? 노후화가 그리 심각해?"


"아틀라스가 현실에 개입할 권한은 없어서 자가 수복도 못했다고 하네요..."


"직접 보는 게 빠를걸. 봐봐."


스카라비아가 그리 말하며 옆으로 비켜줬다. 아틀라스 본체의 덮개를 뜯어내어 드러난 내부는, 회로가 불그스름하게 녹슬어있는 게 딱 봐도 상태가 안좋아보였다.


"오..."


"이 정도면 수명이... 길어봐야 대충 1년 정도 남았다고 볼 수 있겠네."


스카라비아가 고물이나 폐품을 자주 다뤄와서 그런지 금방 견적이 나왔다. 1년이라.


"고칠 수 있겠어?"


"이 정도면 싹 다 뜯어고쳐야 하는 수준이거든? 그것도 핵심이 되는 회로는 교체하지 않는 이상 답이 없는데, 얘는 삼안제 회로를 쓰는 기계라서 우린 당장 가지고 있는 게 없거든?"


"시간과 자원도 문제지만... 오버홀 진행하면서 저 드림 워커 꺼지지 않게 유지하는 것도 일이야. 실수로라도 강제종료됐다간 안에 있는 바이오로이드한테도 영향이 갈 걸."


"설령 고친다 해도 또 배로 옮길 걸 생각하면 그냥 설계도 찾아서 새로 만드는 게 더 나을거에요. 쉐이드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아틀라스 AI를 옮겨담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 전에 알키오네랑 삿갓을 깨우는 게 문제라니까..."


일단 아틀라스가 적은 아니라고 하니 다행이네. 근데 얘는 알키오네의 치료가 끝나기 전에는 깨울 수 없다는 입장인데다 스스로 삿갓을 찾을 방법이 없다고 하고.


"일단 삿갓이랑도 얘기 좀 해봐야 겠는데. 정보도 공유하고. 거기 삿갓 본체랑은 얘기할 수 있어?"


"그건 안되더라고요. 데이터가 쏙 빠져나가서 텅 비었어요."


"그러면... 씁, 내가 다시 잠들어야겠네. 수면가스는 이미 퍼져있으니까 그냥 방독면 벗고 숨쉬면 되겠지? 알키오네 꿈에 들어가서 삿갓을 찾아봐야-"


"뭐라고요?"


바닐라가 어이없다는 어투로 쏘아붙이며 내 말을 끊었다.


"그 꿈 안에서 왠 총 든 로봇들한테 쫓겼다면서, 다시 거길 들어가시겠다고요? 제정신입니까? 꿈이라서 다 만만해보여요? 예?"


"아, 아니, 물론 안전은 확보하고 들어갈거야. 그렘린, 내가 인간이란 것만 인식시키면 아틀라스한테 공격당할 일은 없는거지?"


"네. 아틀라스는 로봇 공학 3원칙을 준수하거든요. 인간에게 해를 끼치기는 커녕 인간을 보호하고, 봉사하도록 프로그래밍돼있어요."


"그걸 못하는 고장난 기계니까 이러는 거잖습니까!"


바닐라가 고개를 홱 돌려 그렘린을 째려보자 그렘린은 움찔하고 놀랐다.


"그, 이 연구실 안은 아틀라스의 눈이 닿는 데라서 이번엔 인식이 될 거에요. 그렇지만 대장님, 저도 걱정되긴 하는데요..."


"접속자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보안 프로그램 끄고 그 파도로 리셋하는 것도 멈추라고 해. 그럼 문제없을거야."


어차피 지금 안에 있는 접속자래봤자 알키오네 빼면 삿갓밖에 없는데 뭐. 지금 들어가서 알키오네랑 삿갓 찾아 깨우는데 방해만 되기도 하고.


"우리 동생이 원한다면 누나도 전력으로 서포트할 생각이거든? 삿갓의 전례도 있으니, 우리쪽 AGS 아가들을 같이 안에 들여보낼 수 있을 거거든? 대장 혼자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도움이 될 거거든?"


"만일의 경우엔 아틀라스를 물리적으로 해체해버릴 수도 있고 말이지."


포츈과 스카라비아도 내 의견에 동조하는 분위기로 흘러가자 바닐라는 마지못해 한마디 더 덧붙였다.


"한번 잠들면 스스로 깨어나지 못한다는데, 그건 어떻게 해결하실 생각이죠?"


"내가 잠들면 10분 후에 깨워줘, 그럼 되잖아. 그렘린? 아틀라스한테 내 말 좀 전달해줘."


"에, 잠시만요...."


그렘린이 태블릿 자판을 두드려 내가 얘기한 내용을 입력하자 아틀라스의 답변이 주르륵 출력됐다.


[아틀라스는 인간의 명령을 따릅니다. 인간이 원한다면 보안 프로그램 및 리셋 시퀀스를 해제하겠습니다. 그러나 보안 프로그램을 해제한 상태로 오랫동안 두는 것은 권장드리지 않습니다. 비정상적인 루트를 통해 환자 알키오네의 꿈에 접속하는 행위 또한 권장드리지 않습니다.]


"니가 치료를 못하고 있으니까 이러는 거잖아. 뭐 별 거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일단 깨우고 보겠다는 건데. 삿갓이랑 알키오네 둘 다 무사히 깨울 좋은 방법 있으면 말해보던가."


-라고 써라 그렘린.


[제안. 아틀라스를 수리해서 정지된 기능을 복구시키면 인간이 접속할 필요없이 ID 데카르트 보이저 삿갓의 추적이 가능합니다.]


"우린 여기 느긋하게 눌러앉아서 너 고치고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거든? 델타가 눈치까기 전에 최대한 빨리 여길 떠야 한다고."


이번엔 바로 아틀라스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릴 시간도 아깝다. 나는 방독면을 벗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럼 다녀올게. 몸은 여기 두고, 정신만..."


"주인님. 작전을 다시한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바닐라가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내가 알키오네의 꿈 안에 들어가서 삿갓을 찾고, 걔랑 상황을 공유하고, 아틀라스의 도움을 받아 삿갓을 온전히 로그아웃 시키고, 삿갓이 현실에서 눈을 뜨면 나도 깨우고, 그 다음에 드림 워커를 꺼서 알키오네를 깨우는 거지."


"그리고 저흰 10분이 지나면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주인님을 깨우면 되는거죠?"


"맞아."


"하아... 알겠습니다. 그냥 주인님이 잠꾸러기인걸로 치죠. 자요, 누우세요."


바닐라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무릎배게를 준비해줬다. 나는 말없이 웃으며 그 위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


"이보게, 일어나게나. 내 말 들리나?"


펍헤드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눈을 깜빡이며 상체를 일으켜세우자 두통이 왔다가 금방 사라졌다. 제대로 들어온 것 같군. 아까와 같은 삼안 연구소. 그러나 내 곁에 있는 건 펩헤드와 램파트 뿐이었다.


"...우리쪽 펍헤드?"


"맞네. 영국에서 줄곧 멀린의 대타를 뛰었던 바로 그 펍헤드일세. 여기있는 램파트는 최근에 제조된 친구고."


"반갑습니다 대장님. 이 안에서의 경호는 맡겨주십시오."


램파트가 철컥 소리를 내며 각잡힌 경례를 했다.


"나하고 램파트는 현실쪽과 이어져있네. 밖에 있는 이들에게 전할 말이 있으면 우리를 통해 얘기하게나. 참고로 전화하듯이 얘기하는 건 안되고, 메시지를 보내는 정도만 가능하다네."


"음. 우선 아틀라스는? 걔도 여기있어?"


[긍정. 아틀라스는 응답합니다.]


현실에선 챗 GPT처럼 대화해야 했으나 이 가상공간 안에선 아틀라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근데 여기서도 딱히 모습은 안보이고 목소리만 들린다.


"좋아 그럼. 우선 삿갓은 몰라도 알키오네는 어디 있는건지 아는거지?"


[긍정. 환자 알키오네는 드림 워커 안에 잠들어있습니다.]


"알아. 그래서 지금 어디있냐고."


[환자 알키오네는 현재 드림 워커 안에 잠들어있습니다.]


"아, 그러니까 이 꿈 안에서 어디있냐니까..."


"대장님. 와서 이걸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드림 워커 기기 옆에 서있는 램파트가 불렀다. 가까이 다가간 나는 드림 워커 안에 잠들어있는 알키오네를 발견할 수 있었다. 뭐야 이거.


"...우리가 지금 얘 꿈 속에 들어와있는 거 아니던가?"


[긍정. 이곳은 환자 알키오네의 정신 안입니다.]


"근데 얘는 지금 꿈 속에서 또 자고 있다고?"


[긍정.]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아니, 그보다 이게 말이 돼? 나는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가, 밑으로 주륵 내려 얼굴을 쓸었다. 


"...깨워도 되냐?"


[부정. 환자 알키오네는 현재 치료 하에 있습니다.]


"그 치료에 끝이 보이기는 하고?"


[...현재로선 확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점점 아틀라스가 못미더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일단 삿갓이라도 찾아봐야 겠네."


"우리 셋이서 섬 전체를 수색해야 하는건가? 아니면 바깥의 정비사들이 아틀라스를 수리하기를 기다리면 되나?"


"생각이 있어. 아틀라스. 이 장소는 현실의 몰타 연구소를 그대로 베낀 거지?"


[긍정.]


"그러면 여기엔 분명 섬에 안내방송 따위를 하기 위한 확성기 같은 게 있을테지?"


[긍정.]


"안내해. 삿갓보고 이리로 오라고 시켜야지."


***


"이거 참... 상당히 당황스러운 전개로군. 무사히 탈출했나 싶더니 다시 돌아와서는 아틀라스를 구워삶다니."


"인간이라는 신분이 참 사기긴 하더라고."


"확실히 그렇긴 하군. 해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삿갓과 나는 나란히 서서 꿈 속에서 꿈을 꾸고있는 알키오네를 내려다봤다. 삿갓이 턱을 짚었다.


"일단, 알키오네의 정신은 매우 연약해진 상태네. 꿈 속에서조차 진실을 마주하지 못해, 또 꿈 속으로 도망칠 정도로. 이 정도로 심각한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다면 억지로 흔들어 깨우는 건 괜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겠군."


"만일의 경우엔 드림 워커를 직접 분해해서 꺼내는 방법도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그 방법은 봉인해야 겠네..."


"알키오네를 깨우려면 그 전에 그녀의 정신을 치료해야만 하네. 그러기 위해선 그녀와 마주해야 하니, 우리도 다시 한 번 드림워킹을 하는 수 밖에."


[부정. 아틀라스는 반대합니다. 꿈 속의 꿈은 일반적인 꿈과는 다릅니다. 꿈이 현실에 적용될 수 있는 드림 워커 속에서는 극도로 위험한 곳이 됩니다. 아틀라스는 환자들이 위험에 처하는 것을 방관해서는 안됩니다.]


"...일리가 있군."


"뭐? 이게 위험할 건덕지가 있어?"


혼자 끄덕거리던 삿갓이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음... 이론상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영역이긴 하다만... 내가 대신 설명해주자면, 꿈 속의 꿈이라는 건 사실 불가능하네. 인간이나 바이오로이드의 뇌는 멀티태스킹이 가능한 기관이 아니거든. 꿈과 그 안에서의 꿈이라는, 두 가지 꿈을 동시에 꿀 수는 없지."


"그래...? 근데 알키오네는 지금 실제로 꿈 속에서 꿈을 꾸고 일잖아."


"그건 드림 워커를 쓰고 있어서 가능한 걸세. 꿈 속의 꿈을 만들어내는 건 알키오네의 뇌가 아닌 기계가 하는 일이니까. 반면 자네가 여기서 또 드림 워킹을 시도했다간, 자네의 뇌는 혼란에 빠져 현실과 꿈의 경계를 잃어버릴 수 있다네. 영원히 꿈을 꾸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일세."


[환자 알키오네가 처한 상황과 동일합니다. 따라서 아틀라스는 인간의 두 번째 드림 워킹을 허용할 수 없습니다.]


생각보다 일이 복잡해질 것 같다는 생각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보다 좀 더 근본적인 문제로 넘어가서, 아틀라스? 알키오네가 대체 누구고 무슨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건지 설명 좀 해봐. 요약해서."


[알키오네는 삼안 연구소 몰타 지부에서 최초로 개발된 가디언 시리즈의 바이오로이드로, 범고래 유전자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플레이아데스 7자매의 삼녀입니다.]


뭐야, 가디언 시리즈였어? 게다가 범고래 유전자? 그럼 등에 지느러미라도 달려있는 건가? 아니면 꼬리? 캡슐 안에 들어있는 채로는 얼굴밖에 안보여서 모르겠네.


[신장 199cm에 체중은 121kg, 쓰리 사이즈는...]


"됐으니까 트라우마 부분으로 넘어가."


[몰타 섬은 과거 레모네이드 델타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알키오네는 살아남았습니다만, 플레이아데스 7자매는 단 한 명을 제외하고 전멸했습니다.]


뭐, 델타? 델타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 내 눈이 크게 떠졌다.


[레모네이드 델타는 플레이아데스 시리즈를 개조해서 만든 마리오네트들을 전선에 투입했고, 알키오네는 제 손으로 직접 그들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잠깐, 잠깐만 멈춰봐... 얘 자매들을, 마리오네트로 개조해서, 그러니까..."


씨발.


델타 개씨발년이 진짜.


역겹지만 꿈 속이라 토할 수가 없네.


[설명을 계속 들으시겠습니까?]


"아니, 충분히 알아들었어."


알키오네가 얼마나 끔찍한 트라우마를 안고있는지 말이다. 이래선 내가 어찌저찌 알키오네를 만난다 쳐도 대체 무슨 수로 얘 정신을 치료해야 할지 감이 안잡힌다. 나는 심리 치료사가 아니란 말이다 제길.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지? 알키오네를 포기해야 하나? 삿갓만이라면 데려갈 수 있을 거다. 


만약 알키오네를 두고 갔을 경우, 1년 안에 치료가 안끝나면 아틀라스는 수명이 다해 기능을 정지하고 알키오네도 죽게 되겠지. 설령 그렇게 되도 분명히 내 책임은 아닐거다.


애초에 알키오네는 일면식도 없는 애다. 꼭 구해야 할 가치가 있을까?


"...있지."


"음? 뭐라고?"


네 있어요 씨발 가치가 있어요. 이 거지같은 혐성 세계관에서 고통받은 모든 바이오로이드들은 애호받을 자격이 있어요. 여기까지 와놓고서 시도도 안해보고 포기할 수는 없다.


"아틀라스. 기계의 힘을 빌려서 두 번째 드림 워킹을 할 수 있는거라면, 네가 도와주면 나도 가능한 거 아냐?"


"아니, 자네 설마..."


[부정. 아틀라스는 인간이 위험에 처하는 일을 도울 수 없습니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난 너 말고도 AGS 친구들 많이 있거든."


슬쩍 펍헤드 쪽을 쳐다보자 펍헤드는 화들짝 놀랐다.


"아, 아니 잠깐 기다려보게! 나나 램파트는 직접 현장에서 뛰는 게 일인 육체파 로봇이란 말일세! 멀티 태스킹이 가능하기야 하지만 드림 워킹이라니, 뭘 어떻게 해야할지 감도 안잡히는데!"


"...아무래도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군."


삿갓이 말했다.


"내가 그대와 같이 꿈에 들어간다면, 그대가 꿈에 매몰되지 않도록 길잡이 역할을 해줄 수 있다네."


"도와주겠어?"


"물론이지. 나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마음가짐으로서는 평생 배필을 찾지 못하고 외로이 방랑하기 될걸세. 무엇보다도,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도 손을 내미는 정의가 살아있음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나."


그렇게 말하는 삿갓은 왠지 웃고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직후 진지한 분위기로 돌아온 삿갓이 다시 스피커를 열었다.


"허나 아틀라스는 인간을 보호해야 한다는 로봇 3원칙에 근간해 자네가 위험 속으로 들어가는 걸 막을걸세. 틀림없이 방해공작을 펼치겠지. 최악의 경우 알키오네를 안락사시켜 드림 워커를 강제종료할 수도 있다네. 그러니 나는 내 의식을 절반으로 분리해 반은 알키오네를 막는 데 쓰고, 나머지 절반은 자네가 꿈에 휩쓸리지 않게 하는 것에 쓸 생각일세.

불행히도 아틀라스는 상당한 고성능 AI일세. 자아를 깨우친 나만큼 대단한건 아니지만... 아틀라스를 막고 자네를 인도하는 두 가지 작업을 병행하려면 내 모든 연산장치를 기동해야 할 터, 당분간 나는 여기서 움직이지 못할걸세. 그 사이에 아틀라스가 방어 프로그램을 가동해 내 데이터를 파괴한다면... 알키오네를 구할 기회는 사라지는 걸세."


"그렇다면 저와 퍼피가 지켜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바깥에 계신 분들도 도움을 줄 겁니다."


"자네들이 나눈 대화 내용은 바깥에 한 마디도 남김없이 전달했다네. 말 나온 김에, 대장? 바닐라로부터 온 메시지가 있는데, 읽어줄까?"


...바닐라가...? 왠지 불안한데.


"...해봐."


"주인님, 미쳤습니까? 제가 분명-"


"잠깐 타임, 그거 혹시 길어?"


"다 읽으면 1분 정도 걸리겠구만."


...1분간의 무호흡 매도 연타라고?


"나중에 들을게, 나중에..."


"마음대로 하게. 어차피 1분 15초 지나면 10분 돼서 자네 한번 일어나야 하네."


"뭐?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어떡하겠나? 미뤄달라고 할까?"


"으... 그냥 지금 깨워달라고 전해줘. 작전 시작하기 전에 얼굴 한번 비추지 뭐."





"...인님! 일어나세요!"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내 머리 위에 고개를 숙인 채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파란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잘 주무셨습니까? 일어나시자마자 참 뻔뻔한 낯짝을 들이대시는군요. 그 안에서 얘기하는 내용 듣는 내내 심장이 조마조마했는데, 저희 심정은 생각해보셨습니까?" 


"아니, 얼굴 들이밀고 있는 건 너잖아...? 그보다 방독면은 왜 벗었어?"


"그야 주인님 얼굴 잘 보려고... 논점 돌리지 마세요! 주인님 배로 돌아가실 생각 없으시죠? 또 꿈 속에 들어가서 위험천만한 모험 하실 생각이죠? 제가 말려도 안들으실거죠? 제 말은 말같지도 않죠?"


"...낮잠 한시간 연장이요. 알람시계 역할 잘부탁해."


"주인님!!"


"믿고 기다려줘, 반드시 돌아올게. 약속."


나는 오른손을 들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바닐라는 말없이 내 손을 쳐다보다 이내 뾰루퉁한 표정으로 제 새끼손가락을 살포시 감았다.


"...주인님이 주무시는 동안 제가 곁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응, 고마워..."


"만얀 안돌아오시면...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만약이란 건 없으니까요.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믿습니다."


"응..."





그리고 다시 정신차려보니 꿈 안이었다. 내 앞에 서있는 삿갓이 말을 걸었다.


"왔군. 인사는 잘 나누고 왔는가."


"물론."


"미련은 없나?"


"썩어넘칠 정도로 많지! 오기로라도 성공해서 살아돌아간다!"


"좋은 자세군. 그렇게 나와야지."


"이보게 대장. 일단 묻겠네만, 지금이라도 결정을 번복할 생각은 없는가?"


펍헤드가 다가와 물었다.


"없어."


"이 사실을 글라시아스가 알면 전압이 올라 퓨즈가 나가겠구만..."


"오. 인간의 혈압이 오른다는 표현을 로봇에 덧대 비유한 건가? 자네도 비유법에 통달한 모양이군 그래."


"내가 말한 건 문자 그대로의 의미라네."


펍헤드의 말에 삿갓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자세를 잡았다.


"뭐, 자세한 건 나중에 듣기로 하고. 어디한번 시작해볼까! 마음의 준비를 하게!"


이윽고 삿갓의 몸이 동영상 정지 버튼을 누른 것 마냥 굳어버려 미동도 하지 않게 되었고, 동시에 주변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경고. 경고. 관리자 권한에 침투하려는 행위가 감지되었습니다. 공격자 ID, 데카르트 보이저 삿갓 확인.

비합리적인 선택입니다, 인간. 스스로에게 영구적인 정신 손상을 남길 수 있습니다.]


"나는 예전부터 줄곧 애호파 사령관이었어 이 새끼야."


[...이해 불능. 인간의 정신이 오염됐을 가능성 존재. 인간의 정신 보호를 위해 방어 시스템을 가동합니다. 제거 대상은 데카르트 보이저 삿갓. 데이터 말소 작업을... 방어 시스템 실행 불가. 보안 프로그램을 찾을 수 없습니다. 검색 중... 보안 프로그램 삭제됨. 원인 판명 중...]


***


"후후, 이미 하드웨어도 소프트웨어도 분석 거의 다 끝났거든? 우리 동생 괴롭히는 못된 프로그램은 다 지워버렸거든? 누나한테 저항해봤자 소용없거든?"


포츈이 웃으면서 태블릿을 톡톡 두드렸다.


[...대상 변경. 환자 알키오네의 치료를 강제 종료. 대상을 안락사시키겠습니다. 근이완제 주사 준비 중... 원인을 알 수 없는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기기와의 연결을 확인해주십시오.]


"어라아? 드림 워커에 쓸데없어 보이는 케이블이 몇 개 있길래 뽑아버렸는데, 혹시 중요한 거였나요?"


드림 워커에 팔을 얹고 기댄 그렘린이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외부의 방해 공작을 감지. 시설 내 환기 시스템 출력을 높입니다. 수면가스의 생산량을 늘리겠습니다.]


"아. 그 가스 합성시설 이미 다 분리해놨는데... 빨리 상황종료해야 나도 마음놓고 잘 수가 있어서."


진작에 방독면을 벗어던진 스카라비아는 컵에 커피를 따라 꼴깍꼴깍 마셨다.


[이해 불능. 아틀라스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 인간을 지키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까?]


"음, 뭐라고 해야할까... 우리 대장은 누구든지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어떻게든 구하려고 하는 사람이거든. 그런데 만약 구하지 못한다면 굉장히 슬퍼할 거거든? 그랬다간 누나도 마음이 찢어질 것만 같거든? 그러니 대장이 슬퍼할 일이 없도록, 그리고 우리가 구원받았듯이 다른 사람들도 구해질 수 있도록 서포트하는 게 우리 일이거든?"


"솔직히 그쪽이 방해만 안하면 훨씬 원만하게 진행될 걸요? 바닐라 씨도 한 마디 하실래요?"


그렘린이 흘긋 시선을 던지자 잠든 대장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던 바닐라가 고개를 들었다.


"...주인님 좋은 꿈 꾸는데 방해하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라져~"


***


정신을 차려보니 몰타의 해변이었다. 그것도 햇볓이 쨍쨍 내리쬐는 대낮이었다.


"그래서, 여기가 바로 두 번째 꿈이란 거지? ...삿갓? 어디있어?"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머릿속에서 삿갓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전자전 능력이 뛰어나긴 하지만 고성능 AI와 대결을 벌이면서 이 안에 내 모델링까지 구현해 넣기엔 무리일세.'


"...모델링 넣는 것도 수동작업이었어?"


'다행히 예상했던 것보다 아틀라스의 공세가 약하긴 하다만, 나를 직접 해킹하려고 드니 나도 방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네.

자네의 행동을 계속 보고들을 수는 있으니 내가 조언을 해줄 수는 있지만, 사실상 여기서부턴 자네 혼자서 헤쳐 나가야 하는 걸세. 문제없겠나?'


"어떻게든 해봐야지... 아, 마침 저기 보이네."


한 손에 낚시대를 든, 범고래 꼬리가 달린 여자가 해변으로 걸어왔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나를 발견한 여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안녕, 알키오ㄴ... 와 미친 쮸쮸짱커."


"하아!?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이 변태!!"


"뭐? 아,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아니, 그게 맞기는 한데... 미안, 말이 뇌를 거치지 않고 나왔다. 방금 건 잊어줘."


'잘하는 짓이다.'


'시끄러워, 불가항력이었다고...'


라오 캐릭 중에서도 탑티어에 드는 폭유인데 처음 보면 놀랄 수 밖에 없잖아 솔직히.


에, 아무튼... 알키오네가 형용할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걸 보아하니... 첫인상은 개망했군.


...설득할 수 있을까...



응원하자니 작두타기를 하고 앉아있고, 말리자니 말을 듣지도 않고, 새로 얻은 주인때문에 바닐라는 속이 타들어갑니다

그나저나 원작 내용을 그대로 담으려니까 대사가 존나 많아진다. 특히 삿갓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