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알키오네와 삿갓을 무사히 잠에서 깨웠으나 우리는 아직 몰타를 떠날 수 없었다. 삿갓은 제기한 어떤 의문 때문이었다. 


알키오네는 자신이 어떻게 드림 워커 안에 들어가게 된 건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녀는 델타의 저격수한테 공격당해 머리에 총알이 박히며 의식을 잃었고, 그 뒤부턴 꿈 속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의식을 잃은 알키오네를 드림 워커에 집어넣은 거란 말인가? 설마 델타가 그래줬을리는 없고 말이지."


"그건... 확실히 이상하네. 머메이드는 그 때 탈출하느라 섬에 없었을테고."


"뿐만 아니라 델타가 기껏 몰타를 점령해놓고서 다시 버렸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 몰타에 전진기지를 지어놓았더라면 추후 아프리카 방면으로 진출할테 큰 도움이 될텐데."


"...그러게? 그년이 아무리 머저리라도 그정도 지능은 있을텐데. 애초에 그러려고 침공했던 거잖아?"


"그리고 한가지 더. 자네들을 잠들게 만든 그 수면가스의 출처도 의문일세."


"그건 그냥 가스 탱크가 부숴져서 수면 가스가 새어나왔기 때문이잖아."


"내가 짚고자 한 건 그 부분이 아니라네. 몰타 섬은 바람이 많은 편일세. 수면 가스가 공기보다 무거운 기체라고 해도 계속 바람이 불고있는데, 수십 년동안 섬 전체를 수면 가스로 뒤덮은 채로 유지시켰다고?"


"...아틀라스가 의도적으로 수면 가스를 계속 생산해서, 살포했다?"


"그렇게 보는 편이 타당하겠지. 상처 하나 없이 죽어 있던 마리오네트들의 시신을 보고나서 나는 한가지 가설을 세웠네. 

델타는 몰타를 점령했으나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걸세. 누군가가 아틀라스를 가동시켜 섬 전체를 잠에 빠뜨렸기 때문일세."


"그 누군가는 알키오네 본인일 리도 없고, 델타일 리도 없으니... 몰타에 우리가 모르는 제 3자가 있었다는 거군."


"바로 그걸세. 그리고, 만약 이 모든 의문에 대한 해답을 알고있는 자가 있다면 그건 분명 아틀라스일걸세. 연구소엔 감시카메라가 설치돼 있었으니, 분명 아틀라스의 데이터베이스에 그 자에 관한 게 찍혀있을걸세."


"원래는 여유가 생기면 시작하려고 했지만... 계획을 앞당겨야겠군. 최대한 빨리 아틀라스를 복원해야겠어."


삿갓이 턱을 짚고 잠시 뭔가 생각하다 다시 스피커를 열었다.


"그러고보니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자네는 어째서 아틀라스를 데려오기로 한 건가? 드림 워커에 관심이라도 생긴건가?"


"딱히. 애초에 미완성인 물건이고, 우리 선에서 완성시키는 것도 힘들걸. 가상현실 놀이가 하고싶었으면 비스마르크에서 만는 드림 캡슐이라도 찾았겠지. 아틀라스를 데려온 건 그냥 걔도 생존자라서 챙겨왔을 뿐이야."


"...그도 몰타의 생존자, 인가..."


"난 AGS도 사람으로 보는 주의라서."


아틀라스가 아직 말하는 게 좀 어눌하긴 하지만 학습모듈이랑 감정모듈 달아주면 차차 해결되겠지.


"과연. 자네같은 사람이 있으니 이곳 AGS들의 지적 수준도 월등한 것이겠군. 그 작은 수리용 드론마저도 유창하게 대화가 가능할 정도라니, 내가 알고있던 세상은 정말로 우물 안이었더구만."


따지자면 드론 걔는 오메가 작품이지만... 그냥 그런걸로 했다. 나는 여기라면 배필을 찾을 수 있겠다며 흥분한 삿갓과 함께 공방으로 이동했다.


***


프리드웬 안에 위치해있는 공방. 포츈을 비롯한 엔지니어들과 삿갓, 알키오네, 그리고 나는 한 슈퍼컴퓨터 앞에 모여 서있었다. 그렘린이 선 연결을 마치고 OK사인을 보내자 포츈은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화면이 밝아지면서 스피커에서 낯익은 음성이 나왔다.


"시스템 부팅 중... 부팅 완료. 아틀라스, 가동."


"안녕, 아빠!"


"청각 수용 기관, 이상 없음. ID 알키오네, 인식됨.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잠은 푹 잤어?"


"부정. 아틀라스는 AI입니다. 아틀라스는 수면을 취하지 않습니다."


"비유지, 비유! 하여간 정말이지..."


알키오네는 히죽 웃으며 아틀라스와 얘기를 나누었다. 이젠 드린 워커의 가상 공간 안에 들어가지 않고도 아틀라스와 말을 주고받을 수가 있다.


"잘 작동하는 것 같네."


"엣헴, 당연하지. 누구 솜씨인데."


삿갓이 턱을 위로 척 치켜세웠다. 나는 무시했다.


"요청하신 대로 드림 워커 자체를 복원하는 건 미루고, 일단 아틀라스랑 대화만 할 수 있도록 만들어놨어요. 아틀라스의 드라이브에 저장된 데이터를 읽어내는 데에도 문제없어요."


"수고했어 그렘린. 일정 서두르게 해서 미안해, 계속 고생만 시키네."


"헤헤, 그럼 이제 쉬어도 되는거죠?"


"조금만 더 기다려봐. 일단 물어볼 것부터 물어보고..."


내가 삿갓과 나눴던 얘기를 들려주기 위해 정리하던 그 때, 아틀라스와 알키오네 사이의 얘기에서 그냥 넘겨들을 수 없는 단어가 나왔다.


"알키오네. 당신 앞으로 남겨진 음성 메시지가 있습니다. 파일을 재생하겠습니까?"


"뭐? 메시지? 왠 메시지? 누가 보낸건데?"


"부정. 외부로부터 전달받은 게 아닙니다. 몰타의 연구소 내에서 녹음된 파일입니다."


"그래? 그래서, 누가?"


"녹음자 ID: 메로페 입니다."


"뭐!?"


눈을 크게 뜬 알키오네가 아틀라스에게 몇 걸음 다가섰다.


"메, 메로페가... 메로페가 살아있는거야 그럼!?"


"메로페...? 메로페라면 분명... 네 자매들 중에 그런 이름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맞아, 내 동생이야! 아틀라스! 어떻게 된 거야!?"


"아틀라스는 메로페가 남긴 메시지를 직접 들어볼 것을 제안합니다. 파일을 재생하겠습니까?"


알키오네는 절박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당장 듣게 해달라고. 굳이 허락 안구해도 되는데. 

어쩌면 이게 내가 찾는 미싱링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일을 재생합니다."


이윽고 처음 듣는 소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 알키오네 언니. 나야. 메로페.]


알키오네는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으며 숨을 삼켰다.


[이건... 언니가 내가 생각한 것보다 일찍 깨어날 때를 대비해서 남긴 녹음이야. 아니면... 내가 언니를 깨우러 갈 수 없는 상황이 되거나. ...되도록 이걸 듣게되는 상황이 없었으면 좋겠네. 그치?]


그리고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다시 메로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비로소 우리는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있었다.


***


(다 아는 내용이니까 생략)


녹음된 파일이 끝나고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에야 나는 입을 열었다.


"이거 참... 일이 이상하게 됐는걸. 감마라니..."


그렇지만 우리가 저번에 잡혔을때는 범고래 꼬리를 단 바이오로이드는 본 적이 없는데. 다른 배에 타고있었던 건가? 하긴, 감마가 가진 배가 몇 척인데 승무원 전부 어나이얼레이터에 몰빵할 필요는 없었겠지.


"메로페..."


문득 옆에서 선글라스를 벗고 안면을 문지르고 있는 알키오네가 눈에 들어왔다.


"알키, 괜찮아?"


"응, 그냥... 되게 복잡한 기분이네. 기쁘기도 하고, 화나기도 하고. 누가 복수해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왜 저리 위험한 짓을 하냔 말이야. 몸도 약한 주제에..."


다시 선글라스를 쓴 알키오네는 결심이 굳은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님. 다음에 델타든 감마든, 레모네이드 누구든 싸울 때가 오게된다면... 나도 데려가 줄 수 있을까?"


"델타는 알겠지만, 감마랑 싸울 때도?"


"응. 메로페 이 바보를 잡은 다음 꼬리를 잔뜩 때려서 정신 차리게 해줘야겠어. 내가 사고칠 때마다 마이아 언니가 그랬던 것처럼."


"펙스랑 싸우는 건 오르카에 맡기고 우린 마주치지 않는게 제일이지만, 만약 그럴 날이 온다면... 그렇게 하도록 할게."


일단 멀린한테도 이 사실을 알려줘야 겠는데... 잠깐만, 그러고보니 방금 내용에서 아틀라스가 분명...


"아틀라스. 알키오네가 총 맞고 죽어가던걸 네가 치료했다고? 너는 심리 치료용 기계 아니었어?"


"아틀라스는 인간과 바이오로이드를 가리지 않고 종합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개발된 AI입니다. 심리 치료를 위한 드림 워커는 미완성이었지만 육체의 손상을 수복하는 기능은 이미 완성된 상태입니다."


"그러면... 좀 어려운 수술같은 것도 가능해?"


"가능합니다."


"...드디어 멀린의 몸을 되돌려줄 수가 있겠어...!"


지금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치료는 다프네나 오드리같은 간호사들이 약을 처방해주거나 밴드 붙이고 붕대 감아주는 정도밖에 안됐었지만, 마침내 상황이 바뀌었다.


의사 AGS인 닥터 아틀라스가 합류했다.


"휴가는 날아갔네..."


스카라비아는 재떨이 위에 담배를 툭툭 털었다.


***


멀린에게 의사를 찾았다는 얘기도 해주고, 그 의사인 아틀라스가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도록 엔지니어들과 삿갓에 아틀라스 본인까지 전부 달려들어 프리드웬의 수복실을 뜯어고치기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난 후였다.


"아, 반가워요 대장. 찾고있었어요."


나는 복도를 걷던 중 블라인드 프린세스와 마주쳤다.


"블프. 무슨 일이야?"


"그냥 얘기나 좀 하고 싶어서요. 혹시 바쁜가요?"


"아니, 한가해. 어차피 바지사장인데 뭐. 항해든 지휘든 멀린한테 맡겨놓고 있고..."


"정말,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에요. 여긴 당신을 구심점으로 모두 모인 곳이니까. 옆에서 같이 걸어도 될까요?"


"그럼. 알될 거 없지."


블프는 내 곁에 서서 나와 보폭을 맞추었다. 이젠 프리드웬 내부에 익숙해진 모양인지 지팡이를 짚지 않고도 능숙하게 걷게 되었다.


"배에서의 생활은 어때? 편해?"


"그럼요. 편하고말고요. 칼을 끌어안고 쪽잠을 잘 필요도 없고, 작은 소리에 놀라서 깰 필요도 없죠. 편한 옷을 입고 술도 마시고, 잠도 푹 잘 수 있고... 거기다 제 친구의 오랜 염원까지 이루어졌는데 더 바랄게 어디있겠나요."


"아, 나도 그 기분 잘 알지. 발 뻗고 편히 자는 것 만큼 좋은 게 없다니까. 진조는 요즘 어때?"


"좌우좌라는 그 아이가 자기랑 비슷한 구석이 있다며 흥미가 생겼다고 하던데, 나중에 또 물어보니 둘이서 얘기하면서 친해졌다고 하더라고요. 종종 붙어서 드래곤 슬레이어 얘기 하는것도 들었고요."


그러고보니 최근에 우좌가 그런 말도 했었지, 드래곤 슬레이어 시리즈 보기 시작했다고. 오르카 좌우좌처럼 스스로를 사이클롭스 프린세스라 칭할 정도로 광팬이 된 건 아니지만 같은 좌우좌라 취향저격 포인트는 같은건지 재밌게 봤다고 한다. 거기다 원래 좌우좌처럼 양 옆으로 머리도 묶고 다니던데, 어쩌면 진조가 좀 꾸미고 다니라면서 묶어준 걸지도 모르겠다.


블프는 잠시 말을 쉬었다가 본론을 꺼냈다.


"멀린, 되게 기뻐했어요. 목소리 만으로도 흥분된 게 느껴지더군요. 라스칼을 해치웠을 때도 그 정도로 들뜨진 않았던 것 같은데."


"응. 수십년전에 만들어뒀던 버킷 리스트도 꺼내오겠다던데, 그런게 있는 줄도 몰랐네."


"저희 모두 당신 손에 구원받게 되네요. 당신은 정말 불가능할 것 같은 일들만 해내시는군요. 멀린도 그렇고, 저번 영국에서의 싸움도... 저는 아직도 그 날의 승리가 생생하게 느껴진답니다."


"나도 그래. 영국에서의 승리는 나한테도 뜻깊은 날이었거든."


"프리드웬을 손에 넣었기 때문에요?"


"결과적으로 보면 그런것도 있지만, 좀 달라. 그동안 우리팀은 에이스 한두명에 의지해서 간간히 살아남던 신세였는데, 영국에서는 모두가 각각의 역할을 맡고 활약한 덕에 이긴 싸움이었어. 우리가 하나의 세력으로서 궤도에 올랐다고 볼 수 있게 됐지."


"당신에겐 감회가 깊겠네요. 좌우좌랑 드론, 대장 셋이서 맨땅에서부터 시작해 셋방살이를 전진해가며 여기까지 성장한 거니까요."


"긴 시간이었지..."


"그 길고 힘들었을 시간을 버텨와준 덕에 저흰 구원받을 수 있었어요. 당신에게 받은 은혜에 아무리 감사해도 모자를 지경이에요."


"신경쓰지 마. 그리고 감사해야 하는 건 나야. 내가 알키오네를 설득할 수 있었던 건 블프 네 덕분이니까."


"제가 뭘 했나요?"


"아주 큰 도움이 됐지."


"으음, 뭔진 모르겠지만 도움이 됐다니 기쁘네요."


"사실 나중에 형편 나아지면 치맥 들고 찾아가서 감사인사 전하려고 했지만 뭐, 지금 말하게 됐네. 그래도 언젠가 치맥은 들고갈게."


블프가 고개를 갸웃했다.


"치맥...이 뭐죠?"


"치킨과 맥주. 맛있어."


"흐음. 딱히 그 조합으로 먹어본 적은 없네요. 기대할게요. 하지만 육류를 구하려면 먼저 육지에 도착해야겠죠. 그러려면 먼저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야 할테고.

...전에 지브롤터를 지나갈 때는 해안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었다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기 힘들거라고 들었는데요. 아무래도 그곳을 건널때면 저희도 싸워야 되겠죠?"


"그건 걱정안해도 돼. 딱 좋은게 있거든."


***


수에즈 운하의 입구에 근접했다. 여기도 델타의 마리오네트 병사들은 안보이고 철충만 진을 치고 있었다. 델타 얘는 진짜 유럽만 먹고 아프리카 대륙엔 손도 안댔나보다. 몰타를 전진기지삼아 아프리카로 진출하려던 계획이 백지화돼버렸다고 하니...


프리드웬은 수에즈 운하를 아슬아슬하게 통과할 수 있는 사이즈인 만큼, 레아가 안개를 깐다 하더라도 들키지 않고 지나간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프리드웬이 지나가는 동안 운하 양옆으로 배를 호위해줄 병력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우리에겐 병력이 넘쳐났다. AGS 격납고에 들어가 단상 위에 서자 한 눈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스트롱홀드 군단이 보였다.


"다들 주목. 너희들 중 지휘관기라던가, 대표가 누구지?"


"모든 스트롱홀드는 지휘관 모듈을 기본적으로 탑재하고 있네. 하지만 그 중 하나를 골라야한다면..."


스트롱홀드들이 양 옆으로 물러서 길을 트더니, 곳곳에 페인트칠이 벗겨진 스트롱홀드 한 대가 앞으로 나왔다.


"본기 스트롱홀드 156호가 귀하의 부름에 응답하겠네. 본기는 현존하는 스트롱홀드 중 실전 성능 테스트를 포함해 제일 많은 전장을 헤쳐온, 가장 연식이 오래된 기체라네. 이 정도면 귀하의 기대에 응할 거라고 본다만."


"음, 충분해. 가능하면 좀 더 일찍 너희가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싶었지만... 사정이 여의치가 않았지."


"영국에서 출전하지 못한 점에 대해선 유감을 표하네. 만약 우리가 나갈 수만 있었다면 차를 끓이는 것보다 더 짧은 시간 안에 침략자를 몰아낼 수 있었을걸세."


"자신감 넘쳐서 좋군. 그만큼 실력도 확실할 거라고 본다."


"그럼 명령을 내려주게. 우리가 무슨 임무를 수행하면 되는건가?"


스트롱홀드 156호의 발광부에서 푸른 빛이 반짝였다.


"수에즈 운하의 양 옆 땅에 상륙해서, 프리드웬이 지나갈 동안 배를 위협하는 적들을 말소해. 자잘한 현장 지휘는 그쪽에 일임하도록 할게. 운하를 통과하고 홍해에 들어서면 다시 너희를 전부 싣고 뜰 생각이야. 할 수 있겠지?"


"문제없다."


타이밍 좋게 통신 패널이 울리며 멀린으로부터 연락이 들어왔다. 트리톤이 해안 방어병력을 일소했으니 언제든지 상륙할 수 있다는 보고였다. 프리드웬이 수에즈 운하에 들어서고, 격납고의 문이 무거운 소리와 함께 천천히 열리면서 어두컴컴했던 실내에 햇빛이 비춰들어왔다.


"일단 수리팀 대기시켜놓을게."


"하하하. 농담도 잘하는군. 철충이라도 치료해줄 생각인가?"


우리는 스트롱홀드일세. 그 말과 함께 스트롱홀드 군단이 이집트에 상륙했다.


***


그렇게 스트롱홀드 군단의 호위를 받으며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동안 나는... 늘 하던대로 백수생활이나 이어갔다. 지금은 멀린도 부재중인데도 나한테 별다른 보고가 안들어오는거 보면 스트롱홀드들이 알아서 잘 하고있는 것 같다. 자동사냥이 편하긴 하네. 막 눈뜨면 개판 오분전이고 나도 현장에서 뛰어다니던 게 엊그제같은데.


무릎에 좌우좌 올려놓고 볼따구나 만지작거리면서 시간 때우고 있을 때 바닐라가 와서 말을 걸었다.


"주인님, 곧 식사시간입니다. 드시고 싶은 건 있습니까?"


"어차피 맨날 물고기잖아... 우좌야, 넌 뭐 먹고싶은 거 있어?"


"응? 어... 참치캔? 참치캔이랑 밥."


"그러면, 참치볶음밥이나 먹자. 바닐라 너는?"


"저도 같은 걸로 먹겠습니다. 주인님 드실거라고 하면 주방장이 제일 좋은 재료 써서 만들테니까요. 참치볶음밥 3인분이라고 전달하겠습니다."


바닐라가 패널을 들고 주방에 연락 넣으려는 그 때였다.


"아아아서어어어어어~~~!!!"


멀린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스피커가 아닌 성대를 통해 나오는 목소리가.


[경고. 경고. 환자가 의료동을 탈출했습니다. 멀린 환자는 즉시 의료동으로 돌아오십시오.]


이어지는 아틀라스의 함내방송까지.


보아하니 수술은 잘 됐나보다. 아틀라스가 아니었으면 어떻게든 오르카를 찾아 협상해서 닥터의 유전자 씨앗이라도 구해왔어야 할 판국이었는데.


한 1분 정도 기다리니 문 밖이 소란스러워졌고, 아니나다를까 문이 벌컥 열리며 양 입꼬리가 귓가에 걸린 소녀가 쳐들어왔다.


"아서!! 아서아서아서아서! 이것봐! 내 몸! 되찾았어! 우리팀의 브레인! 완전부활 퍼펙트 멀린 님의 등장이시다!! 아, 방금건 자학개그인가? 그보다 이거! 내 이마 보이지? 흉터 하나 안남기고 뚜따 자국 말끔하게 지웠지 뭐야! 수복실 성능이 아주그냥..."


숨도 안쉬고 말을 이어가던 멀린은 말이 안나오게 되자 숨을 몰아쉬며 폐에 산소를 채워넣었다. 이제야 진정된 모양이다.


그보다 아틀라스가 일 잘하기는 하나보네. 오드리랑 올리비아도 델타한테 당한 흉터가 잔뜩 남아있는데 깨긋하게 치료해줄 수 있는지 물어봐야겠다. 특히 올리비아는 혀도 원상복구할 수 있으면 더 좋고.


"헤엑... 이 몸으로는 숨 쉬어가며 말해야 하는구나. 워낙 오랜만이라 잊고 있었네. 그래서, 아서! 어때? 소감은? 응? 얼굴 자체는 보존액에 담겨있던 때에 이미 봤겠지만 이 생기 넘치는 모습을 보니 완전 색다르지?"


"...치마는 왜 안입고 왔어?"


"뛰기 불편해서 안입었엉! 그보다 얼굴! 내 얼굴 어때? 블프처럼 쭉빵한 미녀는 아니지만 완전 귀염상이지?"


"그야 뭐, 예쁘긴 하지. 여기에 안예쁜 애가 어딨다고... 눈이 참 특이하네."


"훗, 그 반응을 기대했어! 상대방한테 위압감을 주기 위해 이렇게 만들어졌다더라."


봐봐, 이런것도 된다. 멀린이 눈을 부릅뜨자 동공이 세로로 찢어졌다. 고양이라기보단 사○론이 생각나는 눈동자였다.


"어때어때? 쥑이지? 이런건 처음보지? 응?"


"글쎄... 당장 사이클롭스 프린세스도 세로동공 갖고있는걸."


"아 맞다, 걔도 있었지."


"당신이 위압감을 주려면 입을 다무는 법부터 배워야 할 텐데요. 거 옛날엔 어디 군사기업의 참모였다면서 체면 차릴 줄도 모릅니까?"


"아, 바닐라도 있었네. 안녕! 나 어때보여? 쩔지? 아직 블프한테도 안보여줬다? 아차, 걔는 원래부터 못보긴 하지 참."


바닐라는 멀린을 째려보다가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순 없었는지 눈을 지긋이 감고 한숨을 쉬었다. 살짝 미소를 지은채로.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네요. 멀린."


"흐흥!"


멀린이 손가락으로 코를 쓱 했다. 그 때 멀린의 뒤로 펍헤드가 깡총깡총 뛰어오는 게 보였다. 머리에 붙인 스피커는 아직 철거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 참 다행이지. 그런데 그 건강을 도로 악화시킬 게 아니라면 얌전히 수복실로 돌아가주지 않겠나. 멀린 자넨 재활운동부터 해야한다네."


"오, 내 분신 펍헤드! 무슨 일이야?"


"자네 잡아가려고 왔지. 아틀라스는 수복실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몸이니 내가 대신 온거라네."


"켁, 좀 봐줘! 아직 자유를 만끽하지도 못했는데! 좋~은 전지 하나 줄테니까, 응?"


"어허! 경찰을 뇌물로 조종하려 들다니, 괘씸하군! 벌로 전지는 전부 압수해가도록 하겠네! 자네를 수복실에 도로 집어넣은 뒤에 말이지."


"그런 게 어딨어, 이 악당!"


"어디 사는 자칭 대악당한테 물들었다네."


"그럼 어쩔 수 없지!"


멀린은 히히 웃다가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아서! 이 팀 참모의 화려한 부활을 기념해서 파티 한 번 열어야... 으음, 그러고보니 전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우리도 제대로 된 명칭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


"응?"


"그 왜, 언제까지 생존자 모임이니 저항군이니 하는 적당한 이름으로 부를 수는 없잖아. 프리드웬까지 소유한 하나의 군벌인데. 세력 규모도 꽤 커졌고, 진짜 인간이 있는만큼 무게감도 남다르다고."


"그건... 그렇네. 슬슬 생각해볼 때가 되긴 했지."


고작 대여섯명이서 뭉쳐다니던 시절은 이미 지났지만 워낙 많은 일들이 있다보니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펙스는 기업명을 그대로 썼지만 우린 기업이 아니고. 뉴 포세이돈 같은 건... 감마 대장이 살아있으니 무리겠네. 뭐가 좋을까?"


"프리드웬은 어때?"


품안에 있던 좌우좌가 고개를 위로 올려 날 바라보면서 말했다.


"오르카는 지들 기함인 오르카호에서 이름을 땄잖아. 우리도 프리드웬 타고다니니까 여기서 이름 따서 팀 프리드웬, 어때?"


묘안이었다. 멀린도 옳다구나 맞장구를 쳤다.


"그거 좋네! 멸망 전에 펙스나 블랙리버에서 중요한 직책을 담당했던 바이오로이드들한텐 이 이름이 상징하는 힘을 과시할 수도 있고 말이야. 레모네이드 정도의 대규모 세력이나 오르카처럼 따로 인간 지휘관을 갖고 있는게 아닌이상 왠만한 바이오로이드 집단은 건드리기는 커녕 자발적으로 들어오려고 할 걸?"


그 정도인가...? 멀린이니 과장된 말일수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거절할 이유는 없다. 딱 좋네. 좀 늦은 감이 있지만 드디어 이 집단에 제대로된 명칭이 생겨났다. 그 ㅈ같은 오르카호에서 독립하고 긴 시간이 흘러, 마침내 나만의 세력이 정식으로 완성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멀린은 내 방에서 자고 가겠다고 떼쓰다가 펍헤드가 호출한 블프한테 베어허그 당하고 끌려갔다.



직책: 프리드웬의 참모 겸 프리드웬의 선장

이번 소설도 끝에 다와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