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색머리의 소녀는 제 표정만큼이나 멍하니 앉아 하늘을 올려보고 있었다.

소녀는 혼자다. 드문 일이었다. 

시도때도 없이 성욕을 당당히 분출하는 대장이야 바쁘니 그럴 수 있다지만, 

언니들, 특히 유독 그녀를 아끼는 붉은 머리의 부대장도 없었으니까.

아니 사실, 혼자라는 표현에는 어폐가 있다.

그녀의 곁에는 강철 아가리를 지닌 괴물이 같이 있었다.

등애(XENOX)라는 이름과 달리 현존하는 모든 장갑을 부술 수 있는 소녀의 친구는 평소처럼 주인을 위에 태운 채였다.

하늘에서 친구에게로 소녀는 시선을 돌렸다.

강철로 된 차가운 친구는 비틀린 금속음 하나 내지 않았건만 그녀는 무언가 들은 모양이었다.


"응. 시원해. 제녹스도 그래?"


강철 괴물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소녀 역시 되묻지 않는다.

그상태로 잠시간, 소녀는 존재하지 않는 친구의 눈을 바라보았다.

곧 소녀가 말했다.


"맞아. 응 가을이래. 그래서 시원한거라고 했어."


소녀는 이제 평야로 시선을 돌렸다.

황금색 물결이 땅을 가득 채운 채, 일렁이고 있었다.

물결은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목욕 중인 자신의 머리칼처럼, 이리저리 줏대 없이 흔들렸다.

다른 점이 있다면 물살 대신 바람살이라는 것일 뿐.


"대장이 그랬어. 우리가 뿌린 씨가 자란거래."


그녀의 말에 답하듯 멀리서 황금물결이 재차 흔들렸다.

물결 사이로 낫을 듯 그림자가 날아올랐다. 

그녀처럼 만들어진 인간인 바이오로이드, 개중 드리아드다.

드리아드는 물결을 이루던 작물 일부를 한아름 안고서 지평선 너머로 소리없이 사라졌다.

드리아드는 한명이 아니다.

둘, 셋, 농작물을 관리하는 그녀들이 만개한 꽃을 품듯 조심스레 작물을 옮겨가며 대열을 이뤘다.

그것을 홀린듯, 멍하니, 소녀는 보았다

작게 입을 열고서 보고 있는 소녀 뒷편서 풀을 밟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지만 소녀는 대열에 정신이 팔려 눈치채지 못했다.

발걸음 소리는 소녀 곁에 멈췄다.


"안녕 에밀리"


소녀는 그제야 제 곁에 앉은 사내를 보았다.


"안녕 사령관."


멍한 표정도, 목소리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녀의 적보라색 눈동자는 작게 활기를 뗬다.

사내는 옆구리에 낀 태블릿을 꺼내며 소녀에게 물었다.


"여기서 뭐하는 중이야?"

"응?"


소녀는 주변을 돌아본 후, 잠시간 입을 다물었다.

사내는 소녀에게 재촉하는 대신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태블릿에 달린 터치팬을 꺼내 태블릿의 결제서류를 정리했다.

서류를 3개쯤 정리했을 즈음, 소녀가 답했다.


"농땡이."


사내는 소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후 맞장구쳤다.


"나랑 똑같네."


소녀는 의아한 표정을 한 채 사내의 태블릿을 보았다. 사내의 태블릿은 여전히 결제서류가 떠 있었다.


"아니야. 사령관 일 하는 중이잖아. 그렇지?"


소녀는 제 강철친구에게 동의를 구했다. 

강철친구는 아무 말 하지 않지만 소녀는 이렇게 말했다.


"응 제녹스도 어딜봐서 쉬는거냐고 물었어."

"쉬는건 사람마다 다른거야. 누구처럼 늘어져라 자는 게 좋을 수도 있지만..."


사내는 태블릿을 보이며 멋쩍게 웃었다.


"나처럼 일하는게 쉬는거인 사람도 있는 거지."


소녀는 멍한 눈을 평소보다 조금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그거. 알아. 일중독이래."


사내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거 누가 가르쳐줬니?"

"아르망이, 계속 그러면 몸이 망가진댔어."


사내는 아르망이나 여타 참모진이 아이들의 교육도 담당하고 있다는걸 떠올렸는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소녀는 제 친구에게서 내렸다. 소리없이 풀을 밟은 그녀는 사내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태블릿에 손을 뻗었다.

사내는 진즉 눈치챘음에도 소녀가 태블릿을 쥘 때까지 말없이 있었다.

곧 소녀는 태블릿을 양팔로 감싼 채 제 가슴팍에 붙였고 그 상태로 사내의 가랑이 사이에 앉았다.


"그러니까. 지금은 안돼."


평소와 같이 멍한,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였다.

소녀는 제녹스를 보며 말했다.


"제녹스도 그렇게 말할거야."


기쁨 반, 난처함 반 섞인 얼굴을 한 사내를, 소녀는 올려다보았다.


"사령관 망가지는건 싫어."


사내는 작게 한숨을 쉰 후 소녀의 머리를 매만졌다.


"그래. 그럼 같이 바람이나 쐬며 있을까?"

"응"


둘은 함께 평야를 보았다. 

드리아드의 행렬은 어느새 없어졌고 작물로 이루어진 황금색 물결만이 일고 있었다.

소녀가 말했다.


"제녹스는 이런게 처음이라고 했어."


사내가 제녹스를 흘겨보는 동안 소녀는 말을 이었다.


"제녹스는 부서진것만 봤댔어, 땅이든, 풀이든, 나무든, 자기가 부순거든 남이 부순거든. 그래서 어색하다고 했어."

"...에밀리도 그래?"


사내의 질문에 소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는 물었다.


"사령관. 저것도 그렇게 될까?"


찬바람이 둘 사이를 지나갔다. 사내는 제 외투를 벗어 소녀에게 걸쳐주며 입을 열었다.


"영원한건 없어 에밀리."


소녀는 사내를 보았다.


"하지만 너와 제녹스가 본 것과, 걱정하는 것과는 다를거야. 곡식이 자라고 없어지고 다시 자랄테지만, 그건 우리가 물을 주고 길러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으니 그런거지. 불태우고 짓밟아서 그런건 아닐거야."

"응. 그렇구나."


소녀는 사내의 외투를 강하게 쥐며 말을 이었다.


"그럼 사령관은? 영원한건 없다면 사령관은 어떻게 되는거야?"

"음. 그건 철학적인 질문인걸."


사내는 장난기 어린, 그럼에도 진지한 어조로 소녀의 질문을 받아주었다.


"언젠간 나도 끝이 있겠지. 사람은 늙고 병들어 죽으니까. 바이오로이드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에밀리"


사내는 소녀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나는 네가 원하는 만큼 언제나 곁에 있어줄테니까, 아스널이나 비스트 헌터처럼."


소녀는 안다, 명확한 해답이 아니라는걸.

그러나 소녀는 캐 묻지 않는다. 

사내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걸 잘 아니까.

대신 이렇게 말했다.


"응 그럼..."


소녀는 황금색 물결을 보았다.


"내년에도 저걸 같이 봐 줄거야?"

"물론이지."


곧바로 대답한 사내는 이렇게 덧붙였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이렇게. 언제나 있을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마."


소녀는 아무 말 하지 않는다.

그녀의 입술이 작게 움직인 것을 빼면 표정도 크게 바뀐 건 없다.

하지만 자그마한 변화가 말해주는 큰 의미를 사내는 알기에 사내는 소녀와 뺨을 다정하게 비볐다.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평야에서 소녀와 사내는 그렇게, 쭉 이어졌으면 하는 하루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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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대회용임.

요즘 분위기도 영 거시기한데 라오 쭉 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어간듯.


좆구린 필체 언제나 봐줘서 감사합네다 꾸벅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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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가을맞이 창작대회 (10.1 ~ 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