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웠다, 너무나도.

극심한 추위에 정신을 차리자 설원 한복판에 서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뭐야, 여기가 어디야? 내가 언제부터, 아니, 어떻게 여기 와있는 거지? 꿈인가?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했다. 살을 에는 추위에 몸이 덜덜 떨렸으니까. 본능적으로 양 팔을 쓸려다가, 오른손에 폰을 쥐고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곧장 폰을 켰지만, 하필이면 통화권 이탈 표시가 떴다.

상황을 파악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지만 어느덧 그건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꿈이든 현실이든 간에 진짜로 얼어죽을 것 같았으니까. 나는 무작정 앞을 향해 걸었다. 바람을 피할 곳을 찾아야만 했다. 눈에 발이 푹푹 빠지며 발자국이 남겨졌다.

얼마나 걸었을까, 뒤돌아보니 내가 지나왔던 흔적이 하늘에서 내리는 눈에 덮여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발에 무언가가 부딪히자 나는 놀라 앞을 돌아보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발에 채인 것은 딱딱하게 얼어붙은 사람의 시체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복장으로 보아 분명히 민간인 같은 건 아니었다. 무슨 SF장르에 나올법한 특수부대를 연상케 하는 검은색 슈트와 얼굴을 가리는 바이저, 하얀 단발머리. 어딘가 낯이 익다 했더니, 얼마 안있어 어디서 본 건지 떠올릴 수 있었다.

마리오네트, 라스트 오리진에 나온 적. 나는 그제서야 내가 라스트 오리진 세계에 와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 지는 제쳐두고서 말이다.

여기 있는 건 이 마리오네트 하나만이 아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마리오네트의 시체가 무수히 널브러져 있었다. 그렇다면 여긴 설마... 스발바르 제도? 레모네이드 델타가 기억의 방주를 습격한 이후의?

입에서 하얀 입김을 내쉬며 죽은 마리오네트들 사이를 지나가던 중, 바위에 등을 기댄 채 쓰러져있는 한 마리오네트가 눈에 띄었다. 몽구스 팀의 미호를 베이스로 만들어진 게 분명한, 마리오네트 저격병이었다.

"......"

나는 홀린듯이 그 마리오네트에게로 걸어갔다. 왜냐하면 이 마리오네트의 원본 되는 미호는... 내 라오 최애캐였기 때문이다. 내게 여친이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만약 있다면 미호같은 여친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여러번 할 정도로.

그렇기 때문에, 그 미호를 쏙 빼닮은 눈앞의 마리오네트를 보자 마음이 착잡해졌다. 모처럼 라오 세계에 들어왔는데, 이런 모습의 미호를 보고싶진 않았다.

가까이 다가간 나는 무심코 손가락을 들어 마리오네트의 뺨을 콕 찔렀다.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죽었을테니 당연한 거겠지...

아, 이럴 때가 아닌데. 진짜로 추워서 죽을 것만 같다.. 그렇지만 주변에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장소는 안보인다. 이제 한계다. 난데없이 이세계로 전이됐는데 하필 시작지점이 설원 한복판이라 그대로 얼어죽다니, 너무나도 어이가 없고, 억울했다.

문득 이것이 마지막이라면, 미호의 얼굴을 실물로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미호가 아닌 마리오네트라도 좋으니. 나는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있는 가면을 벗기기 위해 손을 뻗었고,

그 순간, 마리오네트가 내 손을 덥석 낚아채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


온 몸에 소름이 쭈뼛 돋았다. 손에 쥐고있던 폰을 놔버려 마리오네트의 몸에 툭 떨어졌다.

시체가 아니었다고? 살아있었어!? 마리오네트는 내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이내 손을 놓고 대신 옆에 떨어져있던 저격총을 잡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폰도 떨어졌다. 마리오네트가 뭘 할지 몰라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는데, 정작 마리오네트는 내겐 눈길도 주지않고 어디론가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그 방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날 공격하지 않아...? 어디로 가는거지? 기억의 방주? 아님 델타의 본거지? ...따라가면 뭐든 나오지 않을까. 나는 폰을 주워들어 주머니에 넣고 마리오네트를 뒤쫓았다.

그러려고 했다.

춥다. 너무 춥다. 몸이 뜻대로 안움직인다. 의식이 흐려진다. 다리가 멋대로 주저앉아 버리더니, 곧이어 상체도 땅에 풀썩 쓰러졌다. 묵묵이 앞만 보고 걷고있는 마리오네트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쫓아가야 하는데, 갈 수가 없다. 이런 어이없는 방식으로 죽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눈이 감긴다.

춥다.

*

<1%>

마리오네트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입력된 명령어에 따라 기억의 방주를 공격하러 가려고 했으나, 그녀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피어오른 무언가가 그 명령을 따르는 것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갑작스럽게, 그따위 명령보다 더 우선시되는 무언가가 생겨났다.

마리오네트는 뒤를 돌아봤다. 한 인간이 쓰러져있었다.

***

스발바르 제도, 오르카 저항군 전초기지.

레모네이드 델타가 남기고 떠난 마리오네트 부대를 처리하고 기억의 방주를 손에 넣은 이후,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는 남은 철충이나 마리오네트의 혹시모를 습격에 대비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어...!?"

정찰 드론을 띄워 주변을 살펴보던 베라가 흠칫 놀라더니, 고개를 돌려 레오나를 불렀다.

"레오나 대장님, 보고드립니다! 마리오네트 1체 접근 중! 타입은 저격병!"


"고작 1체? 그렇다면 잔당인가보네. 본대에 보고할 필요도 없겠어. 발키리? 처리해."

"예."


레오나가 별 놀란 기색 없이 의자에 앉은채로 차를 홀짝이는 한편, 발키리는 저격총을 들고 망원스코프 역할을 하는 왼눈만을 떴다. 마리오네트가 시야에 잡혔다. 방아쇠에 손을 걸고 침착하게 머리를 조준하던 도중, 그녀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대장님,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뭔데?"

"마리오네트가 누군가를 품에 안고 있습니다."

레오나의 한쪽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마리오네트가? 명령받은 대로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못하는 그 인형이? 마리오네트가 그런 행동을 하고있다는 것도 이상했지만, 레오나가 물을 질문은 그게 아니었다.

"누구를? 다른 마리오네트를?"

"아니요. 저건... 검은 머리의... 인간... 남성...?"

"뭐!?"

눈을 크게 뜬 레오나가 벌떡 의자에서 일어났다. "베라, 스코프 좀 줘봐!" 망원경을 건네받고 눈에 갖다대자, 발키리가 말한 그대로의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사령관 이외의 또다른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발할라는 즉각 비상이 걸렸다. 레오나는 발할라 전 대원들에게 무기를 겨누되 쏘지는 말고, 해당 마리오네트의 움직임을 계속 주시하라는 지시를 내리고선 사령관한테 연락을 넣었다.

마리오네트는 곧장 이리로 걸어오고 있었다. 두 손 위에 축 처진 한 사람을 올려놓은 채로.

*



마리오네트가 오르카 전초기지의 코 앞까지 다가왔다. 발할라 부대원들이 일제히 총구를 겨누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마리오네트는 전혀 위축된 기색이 없었다.

"거기 너, 당장 걸음을 멈추도록 해. 내 말은 알아들을 수 있어?"

레오나는 발키리를 대동하고서 정면에 나섰다. 마리오네트가 양 손으로 인간을 드느라 비무장 상태였기도 했고, 정말로 인간인지도 확인했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마리오네트가 일정 거리 안에 들어서자, 레오나를 포함한 발할라 대원들은 미약하게나마 인간의 뇌파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인형이나 시체가 아닌 진짜 인간이란 게 판명된 이상 그들은 섣불리 공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저 인간은 누구지?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있는 거지?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지? 펙스와는, 저 마리오네트와는 무슨 관계지? 레오나의 머리속에 끊임없이 의문이 피어올랐으나, 척 봐도 기절한 게 분명한 저 인간은 그녀의 의문에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그 이상 접근하지 마십시오."

발키리가 총구를 들어올렸다. 그녀에게 있어 인간을 피해 마리오네트만 맞추는 건 쉬운 일이었다. 명령만 떨어진다면 인간마저도.

그러나 마리오네트는 위협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기는 한건지, 걷는 속도에 변함이 없었다. 마치 기계같았다. 발키리가 흘긋 레오나 쪽으로 눈동자를 돌리자 레오나는 일단 대기하라고 눈짓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리오네트가 걸음을 멈췄다. 레오나와 발키리로부터 1m 가량 떨어진 곳에서. 거기서 마리오네트는, 자신이 들고있는 인간을 내밀었다.

"...!?"

레오나와 발키리는 마리오네트의 행동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뭐지? 무슨 의미지? 저 인간을... 받으라고? 둘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다, 이내 발키리가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제가 받겠습니다."

발키리는 두 손을 내밀어 조심스럽게 인간을 건네받았다. 인간이 발키리의 품으로 넘어간 그 순간, 마리오네트는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그 자리에서 힘없이 쓰러졌다. 적잖게 당황한 발키리의 뒤로 레오나가 다가왔다.

"발키리, 그 인간은?"

"...숨은 붙어있습니다만, 저체온증 상태입니다."

"당장 의무실로 옮겨. 알아내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니까."

"대장님, 저건요?"

베라가 눈 위에 쓰러져있는 마리오네트를 가리켰다. 아직 살아있는지조차 불명이었다.

"...달링, 보고있지?"

[일단 저 마리오네트도 수복실로 옮겨줘. 구속하는 거 잊지말고.]

"알겠어."

이어피스를 통해 사령관의 명령이 하달되자 발할라 대원들은 무기를 거두고 미동도 없는 마리오네트한테 수갑을 채워 옮겼다. 오르카 저항군에 두 번째 인간과 한 마리오네트가 들어온 순간이었다.



두번째 인간 장편문학 네번째. 

이세계 전이되자마자 죽을뻔한 라붕이, 구사일생! 이번작의 스타팅 파트너는 마리오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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