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다시 눈을 떴을 땐 따듯하고 푹신한 침대 위였다. 역시 그건 악몽이었나, 하고 생각했으나 눈을 똑바로 뜨고 보니 내 집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병실을 연상케 하는 하얀 방과 환자용 침대, 내 팔에 꽃혀있는 링거...


"아, 인간님. 깨어나셨군요."


그리고 타이밍 좋게 들어오는 간호사복 차림의 다프네까지... 더 부정할 수도 없게됐군. 나는 라오세계에 들어온 게 분명하다.


시발.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인간님...? 괜찮으세요?"


"아, 예. 그냥 좀... 여러모로, 혼란스러워서요. 그나저나 여긴..."


"여긴 스발바르 제도에 위치해있는 기억의 방주에요. 그리고 저는 오르카 저항군에 소속된 간호사 다프네라고 합니다."


진짜냐... 그래도 펙스에 붙잡힌 채로 눈 뜬 건 아니여서 다행이네. 아무래도 지금 시점은 오르카호가 방주에 정착한 이후인 것 같은데, 그럼 난 두 번째 인간이 되는건가? 옘병. 일단 의심부터 받고 시작하게 되겠군. 신체재건은 아직 안한건같은데, 익숙한 내 원래 몸인거 보면.


...그보다 난 대체 어떻게 여기에 들어오게 된거지?


다프네는 실례하겠다는 말을 하더니 내 체온이나 맥박을 재는 등 대략적인 신체 상태를 체크했다.


"상태가 좋아보이네요. 인간님, 우선 여기 처음 들어오신 분들은 필수적으로 면담을 하셔야 하는데, 걸으실 수 있겠어요?"


역시 이런 흐름인가. 난 두 번째 인간이고, 사령관은 내가 좆간인지 아닌지 판단하려고 하는... 시간을 끌어봤자 나아질 것도 없을테니 나는 빨리 끝내자고 마음먹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괜찮습니다. 면담실로 안내해주세요."


***


"반가워. 이번에 면담을 맡게 된 리앤이야. 그리고 이쪽은 면담 일지를 작성할 세이프티고..."


면담실 안에는 세 명이 들어가있었다. 자비로운 리앤과 미스 세이프티, 그리고 면담 대상인 두 번째 인간. 방 밖에선 사령관과 엔젤이 매직미러로 방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저 두 번째 인간을 정식으로 오르카호에 들이기 전에 구인류같은 악인인지 아닌지, 혹은 펙스같은 적대 세력의 스파이가 아닌지 확인해야만 했다. 사령관이 그의 속내를 파악하기 위해 불러온 건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닌 리앤과, 타인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엔젤이었다.


엔젤은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 읽어낼 정도로 독심술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대신 상대가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아님 거짓인지 분간하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


"네가 맡은 역할이 커. 잘 부탁해, 엔젤."


"맡겨주세요 구원자님! 앗...! 저 사람..."


면담을 시작하기도 전에 엔젤이 탄성을 내뱉자 사령관은 금새 불안해졌다.


"왜그래? 뭔데?"


"저 사람, 리앤 씨의 가슴을 보고 속으로 감탄하고 있어요!"


"...그런건 일일이 말 안해줘도 돼."


면담은 무난하게 진행됐다. 먼저 오르카호나 인류멸망 후 단 둘만 남게된 인간 등 대략적인 사정을 설명해준 뒤 질문을 시작했는데, 엔젤의 말로는 그는 약간의 두려움을 느끼며 위축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리앤에게 경계심을 느끼고 있었다고 하는데, 리앤이 심문을 진행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딱히 거짓말을 하진 않아서 그의 이름을 포함한 대략적인 정보는 알아낼 수 있었지만, 정작 중요한 정보에는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러면 다음 질문, 여기엔 어떻게 오게 된 거야?"


"지금 말한 '여기'란 게 기억의 방주를 말하는 건가요, 아님 스발바르 제도를 말하는 건가요?"


"음, 그렇네. 우선 스발바르에 어떻게 오게 된 건지 알 수 있을까?"


"저도 모르죠. 그냥 눈 떠보니 눈밭에 쓰러져있던데."


"뭐?"


리앤은 순간 당황했다. 거짓말이라기엔 너무 조잡했고,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 캐물을까 하다가 이어피스에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라는 사령관의 말이 들리자 리앤은 빠르게 표정을 정리했다.


"으흠... 그렇구나. 그러면 이 방주에는 어떻게 찾아오게 된 건지 말해줄 수 있어?"


"그건 그쪽이 더 잘 알겠죠? 당신들이 절 데려온 거잖아요."


"엥?"


"...아니에요?"


"잠깐만, 아까 분명이 눈 떠보니 설원 한복판에 있었다고 했지."


"그런데요."


"혼자?"


"혼자."


"너를 따르는 바이오로이드라던가, 아무도 없었어?"


"전 그런 거 없는데요."


"그러면... 스발바르 제도에 떨어진 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려줄 수 있을까?"


"그냥 뭐, 상황 파악하고 나서 바람 피할 곳 찾아 무작정 걷다가... 추워서 더는 못움직이게 돼서, 의식을... 잃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눈떠보니 병상이었고요."


방 안의 대화를 듣고있던 사령관은 슬쩍 엔젤을 쳐다봤다.


"사실이에요. 그는 사실만을 말하고 있어요."


엔젤 본인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한 채로 대답했다. 사령관은 머릿속을 정리하면서 다시 방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리앤이 질문을 이어가고 있었다.


"설원을 걷는 동안 아무 일도 없었어? 뭔가 발견했다거나, 누구랑 만났다거나..."


"아, 그러고보니... 음... 그 뭐냐, 하얀 머리의 바이오로이드가 잔뜩 쓰러져 있는 걸 보긴 했는데요. 그 중에 살아있는 애도 하나 있었고."


"...!! 그래서, 그 살아있는 애랑 만나서, 어떻게 됐어?"


"그냥 저 무시하고 지 갈 길 가던데요. 아마 그 때쯤에 기절한 것 같아서 그 이후는 모릅니다."


"어... 그래?"


리앤은 난감해했다. 뛰어난 통찰력과 추리력으로 상대방이 숨기고 있는 정보를 파악하는 데엔 자신이 있었지만, 상대방이 처음부터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고 있다면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이번엔 제가 뭐 좀 물어봐도 될까요?"


"응? 물론이지! 뭐가 궁금한 건데?"


"제가 어떻게 여기 와있는거죠? 아까 반응 보니까 당신들이 절 찾아서 데려온 건 아닌 것 같은데."


두 번째 인간의 질문에 리앤은 여기서 승부수를 던져보기로 했다. 그녀는 단말기에 그를 데려온 마리오네트 저격병의 머그샷을 띄워 그의 앞에 내밀었다.


"이 바이오로이드가 기절해있던 너를 데리고 우리를 찾아왔어. 뭔가 아는 거 있어?"


만약 이 마리오네트가 이 자의 부하라던가 하는 등의 접점이 있다면 그는 분명 반응을 보일 것이다. 아는 척을 하든, 시치미를 떼든. 그러나 그는 사진을 보고서 미간을 구기더니 뭔 말같지도 않는 소리를 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리앤을 쳐다봤고, 리앤은 이건 꽝이군 이라고 직감했다.


***


면담 결과, 두 번째 인간은 적어도 구인류와 같은 부류의 악인은 아닌 걸로 보였으나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의문점이 많았다. 사령관은 두 번째 인간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고 그를 임시 숙소로 돌려보낸 뒤, 엔젤과 함께 닥터의 연구실로 향했다. 방문객들을 발견한 닥터가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앗, 오빠! 엔젤 언니도 왔네. 어서와~ 기다리고 있었어."


"안녕 닥터. 마리오네트는?"


"저~기."


닥터가 가리킨 손가락 끝에는 실험대에 구속된 채로 눕혀져있는 마리오네트 저격병이 있었다. 오르카 저항군이 사상 처음으로 생포한 마리오네트였다.


사령관은 천천히 실험대로 다가갔다. 마리오네트는 고글을 벗겨놔서 맨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몽구스 팀의 저격수인 미호의 얼굴을 쏙 빼닮았으나 머리카락은 단발인데다 흰색이었고, 눈동자는 초점없는 회색을 띄고 있었다. 마리오네트는 옆에 인간인 사령관이 왔는데도 눈길도 주지 않고 멍하니 천장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눈을 깜빡이거나 호흡을 하는 걸로 살아있다는 것 만큼은 알 수 있었다.


"일단 의식은 회복한 것 같네. 몸 상태는 어때?"


"치료는 끝내뒀어. 타박상에, 골절상, 동상 증세까지... 뭐하고 다닌건지 참 골고루 얻어맞았더라. 듣자하니 먼 길을 걸어왔다던데, 통각을 느낄 수 있었더라면 못움직였을걸."


"통각을... 못느낀다고?"


"그렇게 만들어졌더라고. 델타는 그게 임무 수행에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지. 통각도 다 중요한 기능인데! 아무튼, 영양액 공급하니까 체력을 회복한 모양인지 조금 전에 막 눈을 떴어."


마리오네트의 팔에 꼽힌 링거에서 영양액이 계속 들어가고 있었다.


"대화는 가능할까?"


"불가능해 오빠. 마리오네트는 말을 할 수가 없어."


"뭐? 혀가 잘렸다거나, 그런거야?"


"그런 게 아니야. 발성기관은 멀쩡해. 단지 스스로 생각하고 말을 한다는 행위를 할 수 없는 것 뿐이지. 컴퓨터에 스피커가 달려있다 해서 컴퓨터가 스스로 얘기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으음... 대화로 정보를 알아내는 건 역시 불가능한가... 엔젤? 어때, 뭔가 느껴져?"


사령관의 물음에 엔젤은 마리오네트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눈을 지긋이 감자 머리 위의 헤일로가 빙글빙글 돌아갔는데, 뭔가 잘 안된 모양인지 엔젤의 눈썹이 절로 찌푸려졌다.


"아뇨... 아무것도 안느껴져요. 감정도. 생각도. 마치, 텅 비어있는 것만 같아서... 꺼림칙해요."


"으음..."


"정 필요하다면 두뇌를 스캔해야지. 바이오로이드의 메모리 모듈은 안의 데이터를 읽어낼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니, 마리오네트도 별반 다르지 않을걸."


"두뇌를? 그건 좀..."


"어휴, 오빠. 내가 뚜따하겠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기억 백업하는 거랑 같은 거라고. 뭐, 정 내키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도 있어!"


닥터가 그리 말하며 손에 든 건 마리오네트 저격병이 얼굴에 쓰고있던 조준 보정용 고글이었다.


"이 고글엔 블랙박스 기능이 내장되어있어. 마리오네트의 기억을 직접 들여다볼 필요도 없이, 블랙박스 데이터를 추출하면 더 쉽고 빠르게 정보를 알아낼 수 있지."


"오...! 닥터, 데이터 해독을 부탁해도 될까?"


"그럴 줄 알고 이미 끝내놨지! 오빠도 볼 수 있도록 영상 공유해놓을게. 덧붙여서 저 마리오네트가 입고있는 장비를 분석해 석 달 전에 제조됐다는 사실도 알아냈는데..."


닥터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가라앉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엔젤 언니. 우리 바이오로이드의 수명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


"네? 그게 분명... 한 1000년 정도죠?"


"맞아. 그러면 오빠. 마리오네트의 수명은 어느정도게?"


"그건... 1년? 아니, 너무 갔나? 10년...?"


"1년도 안돼. 마리오네트는 제조되고나서 몇 달 밖에 못살아."


무슨 얘기가 나올 지 어렴풋이 눈치챈 사령관은 입을 다물었다.


"이 마리오네트의 수명은 한 달 채 안남았어. 얼마 못가 장기가 과사하기 시작할거야. 전에도 말했다시피 마리오네트를 평범한 바이오로이드로 되돌려놓는 건 불가능해. 더 볼 일이 없다면 차라리... 안락사 시키는 걸 권장해."


닥터가 무겁게 꺼낸 말에, 사령관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기다려줘, 닥터. 그 마리오네트가 두 번째 인간과 무슨 접점이 있을지 모르니까.

...두 번째 인간이 펙스, 특히 레모네이드 델타의 스파이일 가능성은?"


"일단 알파 언니로부터 받은 펙스의 고위 임원 리스트 중에 그 둘째 오빠는 없었어. 친인척 중에서도 말이야. 애초에 펙스는 삼안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한국인은 절대 간부직에 앉혀주질 않았다고 들었어.

만약 레모네이드 델타가 멀쩡한 인간을 보유하고 있었다면 실험쥐로 썼으면 썼지, 뜬금없이 스발바르 제도에 버렸을 리가 없잖아? 마리오네트의 명령권을 줄 이유는 더더욱 없고."


"그 인간이 자신도 모르게 스파이일 가능성은?"


"그랬다면 델타 쪽에서 그 인간이 보고들은 정보를 수집할 수 있도록 무슨 장치를 심어놓던가 했을텐데, 신체검사 해본 결과 그런 개조의 흔적은 전혀 없었어. 사이보그는 커녕 오리진더스트 시술 한 번 받아본 적 없는, 완전히 평범한 인간이야."


아니면 무슨 영화처럼 특정 키워드를 들려줘서 스파이로서의 인격을 활성화시킨다던가, 이런 걸 기대하는 건 아니지? 닥터가 실실 웃었다.


"으음... 그렇다면, 마리오네트는 대체 왜 그 사람을..."


"일단 오빠도 그 영상 한번 봐봐. 그게 판단을 내리는 데에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


***


사령관은 마리오네트의 블랙 박스에 기록된 영상을 재생했다. 제조실로 보이는 어두컴컴한 곳에서 영상이 시작되고, 다른 마리오네트들과 함께 수송기에 탑승했다. 사령관은 이 쯤에서 빨리감기 아이콘을 클릭했다. 


스발바르 제도로 보이는 설원에 상륙한 마리오네트들이 줄을 지어 이동하던 도중, 하늘에서 글라시아스가 나타났다. 글라시아스는 마리오네트들의 집중포화에도 아랑곳않고 매섭게 싸웠고, 마지막에 그녀가 날개를 크게 펼쳐 휘두르자 눈보라가 휘몰아치면서 화면이 암전됐다. 마리오네트는 이 때 의식을 잃은 모양이었다.


화면이 다시 켜졌을 땐 눈 앞에 바로 그 두 번째 인간이 있었다. 마리오네트가 기절해있던 시간을 고려해보면 부상 따위의 이유로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되자 휴면 상태에 들어갔던 것으로 보였다. 사령관은 빨리감기를 끄고 정상속도로 영상을 재생했다.


발견됐을 당시의 그 복장 그대로, 추위에 피부가 하얗게 변해 조난자같은 행색을 하고있던 그 두 번째 인간은 누가봐도 당황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리오네트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시야가 높아졌다. 사령관은 침을 꼴깍 삼키며 자신의 궁금증을 풀어줄 장면을 기대했는데, 정작 마리오네트는 두 번째 인간을 무시하고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령관이 이게 아닌데? 하며 속으로 혼란스러워 하던 도중, 마리오네트가 갑자기 멈춰섰다. 그리고선 뒤돌아 눈밭에 쓰러져있는 그 인간을 보았다. 마리오네트는 도로 그 인간에게 다가가더니, 조심스럽게 안아들어 아까 가려던 그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조금 빠른 속도로. 


마리오네트가 도착한 곳은 바로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가 지키는 전초기지였다. 그리고 마리오네트가 발키리에게 두 번째 인간을 건네준 그 순간, 영상이 완전히 종료됐다.


"..."


어느새 자신이 허리를 앞으로 숙여가면서까지 영상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그는 허리를 펴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영상의 내용은 분명히 발할라 대원들과 그 두 번째 인간이 진술한 상황과 일치했다. 그렇기에 납득이 안됐다. 마리오네트가 왜 갑자기 돌변해서 두 번째 인간을 챙긴건지.


확실히 닥터의 말대로 펙스가 뭔가 수작을 부렸다거나, 저 인간이 펙스의 고위 간부라던가 하는 건 아닌 걸로 보인다. 마리오네트의 돌발행동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단순히 마리오네트가 버그나 일종의 에러를 일으킨걸까?


어쩌면 이 의문에 대한 답을 꼭 찾을 필요는 없을수도 있다. 마리오네트를 처리하고 기록을 말소한 뒤 아무것도 모르는 두 번째 인간을 잘 대해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렇게 한다면 인류부흥을 위한 한 걸음을 나아가면서도 혹시모를 내부의 위험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사령관은 그 방법은 선택하지 않았다. 의문이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사령관은 고민하다가 결국 최후의 수를 쓰기로 결심했다.


두 번째 인간과 그 마리오네트 저격병을 다시 만나게 해보자고.


***


다행히도 내 소지품들은 폰은 포함해서 다 돌려받을 수 있었지만, 폰은 뭔가 데이터가 상당히 날아가있었다. 특히 라오 앱은 앱 아이콘이 하얀 박스로 대체돼있었고, 키면 그냥 흰 화면만 나온다. 


게다가 갤러리에 라오 스샷이나 팬아트 저장해놓은 것들도 어째 하나도 안남았다. 오르카 쪽에서 건드린 건 아니라고 하는데... 추위에 노출되면서 맛이 갔나. 그렇지만 쟤들이 라오 앱 보고 이건 뭐냐고 묻는 일은 안생겨서 다행이긴 하네. 와이파이는 터지지만 인터넷에 들어가봐도 라오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심심하다. 식객 신세라 할 일도 없다. 인간이라고 냅다 부사령관 자리에 앉혀주지는 않았다. 라오챈에 올라왔던 두번째 인간물 중에서 부사령관이 아닌 두번째 인간은 어떻게 되더라... 한가하니 혼란스러운 마음이나 앞으로의 걱정 따위가 더 커지는 것 같다. 일단 사령관이랑 얘기해보니 날 크게 경계하지는 않는 것 같지만, 다른 바이오로이드들 생각은 다를지도 모른다. 특히 지휘관들.


침대에 누워서 의미없이 폰이나 만지작거리던 중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페로였다. 사령관이 나를 호출했다면서 연구실로 와달랜다. ...왜지? 왜 하필 연구실이지? 설마 실험대에 묶어놓고 새로운 방식의 심문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페로의 안내를 받아 연구실에 들어가자 SF물에 나올법한 뭔지모를 첨단기계로 도배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신기해서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중, "둘째 오빠! 여기야~!" 나를 부르는 듯한 소녀의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닥터가 있었다. 그리고 사령관에 리리스, 엔젤이랑 수술대 같은거 위에 눕혀져있는 마리오네트... 미호도.


"안녕안녕! 나는 오르카 기술부를 총괄하는 천재 미소녀 박사, 닥터! 그냥 닥터라고 불러줘."


"에... 반갑습니다, 닥터...?"


"그냥 편하게 말해도 돼. 난 어색한 분위기 싫어하니까."


"어, 응. 그럼... 반가워, 닥터."


"히힝. 만나서 반가워, 둘째 오빠. 우리 오빠랑은 이미 인사했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 여기있는 게 바로 둘째 오빠를 데리고 우릴 찾아왔던 마리오네트야. 한번 보고싶어할 것 같아서 부른건데, 어때? 뭔가 떠오른다거나, 그런 거 있어?"


닥터의 말에 나는 수술대에 누워있는 마리오네트 미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2%>


고글이 벗겨진 얼굴을 내려다보자 그녀 역시 고개를 돌려 내 눈을 마주보았다. 얘가 나를 데려왔다고? 분명 날 두고 떠났었는데.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대체 내가 기절한 다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느닷없이 뒤에서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째 마리오네트 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


"아,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보다도, 그 마리오네트를 보고 무슨 느낌 안들어?"


사령관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나는 다시 마리오네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느낌이라, 음...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느낌 밖에 안드는데... 일단 얘가 날 살려줬다는 건가? 그러면... 인사라도 해야 하나?


"...고마워?"


대답이 없다. 날 빤히 쳐다보는 걸로 보아 무시하는건 아닌 거 같은데. 난 다시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래서... 이제 뭐하면 좋지?"


"음, 그게 말이지... 아무래도 이 마리오네트는 평범한 마리오네트와는 다른 것 같거든?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널 따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가?"


"그래서 이 마리오네트는 네 직속으로 붙여주려고 생각해 봤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 지 모르겠는데. 괜찮은 거야?"


"사실 우리로서도 이 마리오네트를 어떻게 취급해야 할 지 난감하던 차였던지라, 맡길 데가 너 밖에 없어."


아니 그거 말고. 얘는 델타의 병사잖아. 나랑 둘이 뒀다가 보쌈해서 델타 앞에 바치는 거 아니냐고.


"만약 내가 데려가지 않겠다고 하면?"


"그러면 마리오네트를 안락사시키는 수 밖에 없기는 한데..."


아니 이 새끼가 가불기를? 아무리 이 마리오네트랑 제대로 된 일면식도 없는 사이이긴 하도, 일단은 내 생명의 은인이라는 거잖아. 그런데도 그냥 살처분당하게 내버려두는 건... 영 찝찝한데... 


"씁... 알았어. 그러면, 내가 데려간다?"


사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미심쩍지만... 어쩔 수 없지. 얘는 무기도 없고, 저렇게 말하는 거 보면 안전은 확인된 거겠지?


"그래서... 움직일 수 있겠어?"


마리오네트 미호는 대답없이 상체를 일으키더니, 수술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발을 디뎠다. 일단 내 말을 들어주긴 하는구나. 근데 또 뒤에서 술렁거렸다. 뭔데 대체.


***


마리오네트 저격병의 무기도 압수했고, 움직일 기세를 보이지 않으니 위험요소는 없을 거라 판단해 구속은 풀어놨었다. 링거도 치웠고. 구속이 풀렸음에도 마리오네트는 얌전히 누워있었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마리오네트가 날뛰면 즉각 제압할 수 있도록 호위로서 리리스를 대동했다.


잠시 후, 두 번째 인간과 마리오네트를 대면시켰을 때, 사령관 일행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무엇에도 반응하지 않던 마리오네트가 스스로 고개를 돌려 두 번째 인간을 응시했다. 뿐만 아니라 두 번째 인간의 말에 응답해 스스로 일어서기까지. 


두 번째 인간이 마리오네트를 데리고 연구실을 떠난 직후에 사령관이 운을 띄웠다.


"마리오네트는 분명 레모네이드 델타의 말만 듣는 거 아니었어?"


"문리버 회장도 동면중일테니 그래야 맞지...? 하지만 그 둘째 오빠가 펙스의 간부라는 정보는 어디에도 없었어. 말이 안돼. 마리오네트가 스스로 기존의 명령권자를 거스르거나 바꿨다는 게 아닌 이상..."


"그 마리오네트랑 두 번째 인간님이 눈을 마주친 그 순간에, 분명히 마리오네트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어요.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안느껴졌는데 두 번째 인간님을 보더니,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따듯함이, 아주 살짝..."


엔젤이 덧붙인 말에 사령관은 심란해졌다. 두 번째 인간 앞에서만 보이는 연이은 마리오네트의 돌발행동.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었다.


"리리스, 네 생각은 어때?"


"저는 주인님만 있으면 충분해요. 다른 인간 따위는..."


"아니, 그거 말고... 그 둘이 위험할 거라고 생각해?"


"...전혀요. 그 두 번째 인간은 자체적인 무력도 형편없고, 야심같은 게 전혀 인보이는 평범한 민간인에 불과한걸요. 거기다 그 마리오네트는 비무장 상태고요. 만약 그 인간이 마리오네트를 시켜서 주인님을 공격하려고 해도 금새 둘 다 처리할 수 있어요."


리리스까지 저렇게 말하니 그 둘이 위험인물이 아니란 것 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사령관은 끙끙거리다가 이내 결론을 내렸다. 좀 더 면밀한 관찰이 필요하기는 하나, 두 번째 인간과 그의 휘하에 있는 마리오네트의 합류를 정식으로 승인하기로.



"...그러니까 얘가 제 파트너라고요?"


아직 해결해야할 숙제가 남아있긴 하지만 여차저차 두번째 인간+마리오네트 미호 정식합류

서로 의심하느라 너무 시간 잡아먹지 말고 좋게좋게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