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시라유리 언니, 이거 정말 있던 일 그래도 쓴거 맞지?"


닥터는 시라유리의 수첩 페이지를 넘기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밤샘근무를 마치고 침대로 들어가려다 닥터의 호출에 불려온 시라유리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어라, 한솥밥 먹던 사이끼리 의심하기에요? 제가 거짓말이라도 적었을까봐요?"


"그냥 해본 말이야. 나도 어이가 없어서 그래."


"어느 부분이 말인가요."


닥터가 가리킨 건 수첩의 마지막 문단이었다. [마리오네트가 두 번째 인간을 제외하고 스스로 반응을 보인 건 몽구스 팀의 미호와 홍련이 유일함.]


"그 마리오네트는 우리 오빠가 다가가도 눈길 한번 안줬어. 유일하게 반응을 보인 건 그 둘째 오빠 뿐이었지. 그런데, 이제는 둘째 오빠 뿐만 아니라 미호랑 홍련한테까지 반응을 보였다고? 그냥 눈 앞에 아무나 있어서 쳐다본 건 절대 아니야. 그랬다면 포티아나 다른 사람이 지나갈 때도 눈길을 줬을테니까. 그런데 왜 그 둘한테만..."


"그래봤자 그냥 고개 돌려서 몇 초 쳐다본 것 뿐인걸요. 그리 호들갑 떨 필요가 있나요?"


"명령도 안떨어졌는데 스스로 움직였다는 부분이 문제야!"


"그게 뭐 이상할 게 있나요? 결국은 미호니까, 동형기나 몽구스 팀에게 반응을 보일 법도 하죠. 그 부대가 가족같은 분위기인 건 당신도 잘 알잖아요."


"그 마리오네트가 미호의 유전자를 베이스로 만들어졌다 해도 미호 언니가 되는 건 아니야. 스스로가 미호라는 자각도 없고, 몽구스 팀에 관한 기억도 전혀 없다고."


"그렇지만 실제로 반응을 보였는걸요."


"그래! 그러니까 이상한거지! 대체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거지? 마리오네트한테는 자아가 없을텐데? 대체 정체가 뭐야? 무슨 트리거가 있는 건가?"


"흐음... 그냥 반대로 생각하면 되지 않나요? 마리오네트에게 자아가 있다고."


시라유리가 툭 던진 말에 닥터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니, 그럴리가... 언니도 알잖아, 마리오네트는 근본적으로..."


"후천적으로 자아에 눈뜨게 된 AI도 드문드문 보이잖아요? 예를 들어 Mr. 알프레드라던가. 그 특이한 마리오네트도 그런 케이스라고 보면 되지 않을까요?"


"그건... 으음, 그건..."


닥터는 랩실 의자에 풀썩 앉아서는 턱을 짚고 의자를 빙글빙글 돌렸다. 잠시 후 시라유리에게 수첩을 돌려준 그녀는 자신의 통신용 단말기를 집어들었다.


"확인해봐야겠어... 확인해보면 알겠지...!"


***


날이 밝자마자 닥터의 호출이 들어왔다. 덕분에 나하고 마리오네트 미호는 하루만에 닥터의 연구실을 재방문하게 됐다. 


"저게 지금 뭐하는 거야?"


나는 MRI 비슷하게 생긴 기계에 누워있는 미호를 가리키며 물었다.


"마리오네트의 메모리 모듈에 접속해서 데이터를 읽어내는 거야. 이렇게 하면 블랙박스보다 더 많은 정보를 읽어낼 수 있으니까."


"남의 동의도 없이 기억을 엿보겠다고?"


"마리오네트는 어차피 동의 못해. 둘째 오빠가 정식으로 쟤 보호자인 것도 아니고. 이게 다 오르카호의 안전을 위해서 이러는거니까 이해해줘."


"...좋아 그럼, 왜 하는건데?"


"둘째 오빠, 어제 몽구스팀 대원들이랑 만났지?"


"미호랑 홍련하고만. 그게 왜?"


"마리오네트가 둘째 오빠 뿐만 아니라 그 둘에게도 스스로 반응을 보였다고 보였어. 평범한 마리오네트라면 불가능한, 명백한 이상행동이야. 

그러니 확인해봐야지. 뭐가 저 마리오네트를 움직이게 만드는 건지, 단순히 고장난건지 아니면 정말로 자아를 확립한 건지 두뇌정밀검사를 실시해서 알아볼 생각이야."


닥터가 버튼을 누르자 기계가 작동되기 시작했다. 빛이 미호의 몸을 발끝에서부터 머리까지 쓸고 지나가면서 전신을 스캔했다.


"흠. 일단 몸 상태는 아주 건강한데? 그럼 머리 쪽은... 어디보자..."


닥터의 앞에 있는 홀로그램 화면에 뭔지모를 글이 주르륵 떴다. 그러더가 갑자기 멈추더니, 빨간색 X자 표시의 에러창 같은 게 떴다. "어라?" 닥터가 에러창을 끄고 자판을 두드려봤으나 또다시 에러창이 뜰 뿐이었다.


"이상하네... 어떻게 된 거지?"


"미호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어?"


"...나도 모르겠어."


"뭐?"


"마리오네트의 데이터 중 일부를 읽어들이는 데에 실패했어. 비록 해독할 수 없는 부분은 전체 중에서 5% 뿐이지만... 대체 왜 이런 문제가 생긴거지? 기기 쪽에는 문제가 없는데."


"그러면 혹시 미호가 머리를 다쳐서 메모리 모듈이 망가졌다거나, 그런건가? 흔히 보이는 usb 드라이브도 단자부분 손상되면 내용물 못읽어내고 그러잖아."


"글쎄... 머리에 그정도로 심한 부상을 입은 흔적은 없었어. 지금은 작은 상처조차 안남아있고.

거기다 마리오네트가 오르카호에 들어온 이후로의 기억은 전혀 업데이트 되지 않았어. 아마 그 5%가 새로 추가된 기억이 아닐까 싶은데."


닥터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화면을 끄고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쩝, 아무래도 현재로선 더 밝혀낼 수 있는게 없어보이네. 어쩔 수 없지~ 오늘은 여기서 검사 종료! 이만 돌아가도 돼."


"엉? 이대로 끝이야?"


"답이 안나오는데 별 수가 있나. 다른 연구 할 것도 많고. 그치만 포기하겠다는 건 아니고, 마리오네트 건강검진도 할 겸 주기적으로 체크해보고 싶으니까 다음주에도 또 데리고 와줘."


"그래? 그런거라면야 뭐... 알았어. 미호야, 가자."


나랑 닥터가 얘기하는 내내 가만히 누워있던 미호는 내가 부르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닥터한테 인사한 뒤 미호를 데리고 연구실에서 나갔다.


***


둘이 연구실 문턱을 넘고 자동문이 도로 닫히자마자 닥터은 곧장 여유로운 표정을 지우고 화면을 다시 켰다. 일부가 누락되었다 한들, 두뇌에서 직접 추출한 데이터는 고글의 블랙박스보다 더 많은 정보를 담고있었다. 섣불리 두 번째 인간한테 알려줘선 안될 정보까지.


"저 마리오네트의 현 명령권자는 분명히 레모네이드 델타로 설정돼있어. 그리고 기억의 방주를 점령하라는 명력까지 입력되어있었지만... 마리오네트가 스스로 명령을 비활성화시켰다고?

게다가, 유사시엔 인간 생포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인간의 명령권이 통하지 않도록 만들어졌는데 어째서 둘째 오빠의 말은 듣는거지?

말이 안되는 일들 투성이잖아...!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감정을 깨우쳤다기엔 분명히 학습모듈이나 감정모듈은 내제되어 있지 않은데. 그냥 고장난 인형이라고 봐야하나? 처음부터 무슨 결함품이었던 건가? 아니면 반대로 개량형? 두뇌의 5%를 차지하고 있던 그 데이터는 정말 새로 추가된 기억만 담고있는 건가?"


닥터는 제 컴퓨터에 들어온 마리오네트의 데이터 사본을 해킹하려고 했으나 무슨 수를 써도 그 5%에 접근하는 게 불가능했다. 이전에 노획한 레모네이드 오메가의 케스토스 히마스가 가진 펙스의 방화벽을 뚫을 때는 어렵긴 해도 어떻게 뚫어야 할 지 갈피라도 잡을 수 있었는데, 이 마리오네트의 데이터는 도무지 답이 없었다.


논리적으로 해명이 안되는 일의 연속. 알 수 있는 거라곤 알 수 없다는 사실 뿐. 또다시 눈앞에 나타난 에러창을 보며 머리를 쥐어짜던 닥터는 일단 사령관한테 새로 알아낸 정보라고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마리오네트의 감시를 결코 소흘히 하지 말라는 조언과 함께.


***


자, 그러면... 오늘은 또 뭐하면서 시간을 보낼까. 대부분의 오르카 대원들이 기억의 방주에 가있어서 그런지 오르카호 안은 제법 한적했다. 나야 오히려 좋지. 솔직히 나까지 방주에 얼굴 비추기엔 아직 이르지 않을까 싶다. 특히 카페 호라이즌 같은데엔... 시선 둘 데가 없어서 차마 갈 엄두가 안간다. 사령관이나 합법적으로 종업원 테이크아웃 해가지, 내가 갔다간 음흉하게 쳐다본다고 괜히 욕먹을거 같다.


그럼 오르카호 안에서 할 만한게 뭐가 있지, 편의시설이 이것저것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오르카호 지도앱을 키고 뭐 볼만한 거 없나 찾아보던 중 한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사격연습장이었다.


그러고보니 미호는 원래 저격수였지. 마리오네트 버전도 저격병으로 운용됐었고. 저격총 쥐어주면 솜씨 발휘하지 않을까? 한번 보고싶어졌다.


그렇게 사격연습장에 들어가자 먼저 와있던 몇몇 바이오로이드들이 나를 눈치채고 힐끔거렸다. 또 이 패턴이냐. 대충 신경끄고 사격장 인테리어를 두리번 거리던 중 누군가 나를 불러세웠다. 두꺼운 방한 코트를 벗고 제복만 입은 채로 저격총을 들고있는 발키리였다.


"반갑습니다. 두 번째 인간님. 저번보다 안색이 많이 좋아지셨군요."


"...우리 구면이던가?"


"아, 그 때 당신은 기절해있었죠. 실례했습니다.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의 저격수, T-8W 발키리라고 합니다."


"발할라... 아, 날 여기 데리고 온 게 너희들이구나. 들었어. 감사인사를 해야만 하겠네."


"신경쓰지 마십시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까요."


발키리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음, 첫인상은 괜찮게 박힌 것 같다.


"여기엔 사격 연습을 하러 오신겁니까? 인간님이 직접 총 쏠 일은 없을거라고 봅니다만."


"내가 하려고 온 거 아냐. 그냥 미호가 총 쏘는 거 구경이나 해보고싶어서 왔어. 얘도 저격수니까."


"그렇습니까... 문제될 건 없겠죠. 총기는 챙겨오셨습니까?"


"어? 그건 진작에 압수당했는데. 개인지참이야?"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여기서 대여하는 것도 가능하니까요.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발키리는 총을 어깨에 매고 사격장 규칙이나 사용법 등을 친절하게 알려줬다. 겸사겸사 잡담도 좀 섞으면서.


"오늘은 비번인거야?"


"그렇습니다."


"오전부터 사격 연습이라니, 열심이네."


"여가시간이라도 딱히 할 일이 없다보니 자꾸 여기에 오게 되더군요."


대여받은 저격총을 미호에게 쥐어줬다. 실탄이 나가는 총이 아니라 시뮬레이터와 연동되는 모형 총이라고 한다. 저격수용 사격연습장은 스크린 골프장같은 형식이었다. 저격수와 표적 사이에 최소 1km는 둬야 하는데 아무리 오르카호가 넓다한들 사격연습장에만 그만한 공간을 할당할 수는 없었으니까.


미호가 자리에 서고, 발키리가 무슨 스위치를 누르자 홀로그램으로 풍경이 바뀌었다. 허허벌판이었는데 표적같은 건 어디에도 안보였다. 발키리 말로는 지금 미호가 서있는 위치로부터 정면 1km 밖에 사람 크기의 표적이 하나 있다고 한다. 


...눈을 찌푸려봤지만 역시 내 눈엔 전혀 안보인다. 아니, 어차피 홀로그램 배경이고 실제로 저 벽까지의 거리는 100m 남짓이잖아. 아무리 시력이 좋아봤자 1픽셀짜리 점이 크게 보이는 정도 아니야? ...아닌가? 아무튼 뭔가 개쩌는 미래 기술력이라고 보면 되나? 일단 맞추기만 하면 알아서 점수가 기록된다고 한다.


"그럼 미호야, 실력 좀 보여줘."


"..."


"...미호야?"


미호는 총구를 들어올리지도 않은 채로 가만히 서있었다. 이름 부르니까 이젠 앞이 아니라 나를 쳐다본다.


"미호야, 뭐해. 한번 쏴보라니까 왜 자세도 안잡고 있어? 표적이 안보여서 그래? 그 고글 안쓰고있어서? 대신 총에 망원조준경 달려있잖아."


"난이도를 낮춰볼까요? 표적의 거리를 조금 앞당기겠습니다."


발키리가 무슨 단말기를 조작하니 풍경이 살짝 바뀌었다. 그런데 미호는 여전히 총을 겨누는 시늉조차 안하고 있었다.


"..."


"...아무래도 쏠 생각이 없어 보이는군요."


"아니 왜그러는건데..."


결국 미호는 저격수 훈련에서 빵점을 기록하고 어색해진 나는 발키리한테 시간 내줬는데 미안하다는 말만 남긴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


기본적으로 오르카호 내에서 사령관이 모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비록 호드가 장기임무 중이라 탈론 페더의 비공식 감시망은 정지된 상태긴 하지만 대신 080 기관이 밤낮으로 수집하는 정보는 모두 사령관 앞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사령관이 막 접한 가장 최신 정보는 두 번째 인간이 마리오네트 저격병을 데리고 사격연습장에 갔다가 0점을 기록하고 나왔다는 소식이었다.


"흠. 마리오네트의 전투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쏴서 빗나간 것도 아니고 아예 쏘지를 않았다니, 이상하네. 분명 전투모듈은 분해하지 않고 놔뒀을텐데."


마리오네트는 신체능력 만큼은 바이오로이드보다 뛰어나다. 레모네이드 델타가 철저히 군사목적으로 쓰려고 설계했으니까. 마리오네트 저격병을 예로 들자면 원본인 미호는 태생 A급인 반면 마리오네트 버전은 태생 SS급이라고 할 수 있었다.


"혹시나 마리오네트에게 임무를 맡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봤는데, 이래선 무리겠네. 어차피 두 번째 인간이랑 떨어뜨려놓으면 제대로 움직일 것 같지도 않고."


...그 둘이 정말 한 편인지조차 의문이지만. 두 번째 인간의 사격 명령을 무시했다는 건 그도 정식 명령권자가 아니라는 증거였으니까.


사령관은 화면 한켠에 띄워놓은 닥터의 보고서를 다시 훑어봤다. 마리오네트가 무얼 숨기고 있는건지 전부 파악할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마리오네트가 위험해보이지는 않았다. 두 번째 인간을 졸졸 따라다니는 것 빼고는 아무런 활동도 안하고 있으니.


"뭐, 조심해서 나쁠 건 없긴 하지... 아르망, 네 생각은 어때?"


사령관이 슬쩍 그의 비서에게로 시선을 던지자, 아르망은 제 무릎 위에 올려둔 책을 펼치지 않고 덮어둔 채로 대답했다.


"두 번째 인간님과 그 마리오네트가 들어온 지 이제 이틀째라 데이터가 부족하긴 합니다만... 현재까지의 행보를 기반으로 분석해보자면 그들이 어떤 방향으로든 오르카호에 위험을 끼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폐하."


"0%는 아니라는 건가?"


"인간님 쪽은 비교적 파악하기가 쉬우나 마리오네트는 기존에 수집한 데이터에서 벗어난 행동만을 반복하고 있기에 쉽사리 예지할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


아르망이 담담하게 내놓은 답변에 사령관은 살짝 입을 다물고 생각하는 듯 으음, 하는 소리를 냈다.


"폐하. 설령 두 번째 인간님 혹은 마리오네트가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둘은 존재만으로도 예의주시 대상이니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을겁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우선은 자신에 대한 의심이 풀리기를 기다리겠죠."


"은밀하게 관찰하는 수 밖에 없다는 건가... 하지만 규정상 방 안에는 카메라를 설치할 수도 없는걸. 만약 몰카를 설치했다가 들켰다간 관계도가 최악으로 파탄날테고. 그렇가고 계속 시라유리한테 환풍구에서 밤 새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그렇다면 감시수단을 선물의 방식으로 전달해주는 것은 어떻습니까?"


사령관은 살짝 고개를 돌렸다.


"선물?"


사령관과 아르망이 마리오네트 감시수단에 대해 논의하던 중 사령관의 폰이 울렸다. 리앤으로부터 온 연락이었다.


"리앤? 무슨 일이야?"


[어 왓슨, 지금 시간 돼? 지금 두 번째 인간이랑 같이 있는데...]


***


미호한테 뭘 보여줘야 반응을 보일까. 오르카호 지도앱을 키고 오드리의 의류점이나 보련의 미용실 등등 이것저것 검색해봤지만 이거다 싶은 건 없었다. 


그러다 문득 기록물 보관소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다. 역시 이것도 있구나. 한번 가볼까? 오르카 애들 앞에서 나도 모르게 원작 지식 나불거리다가 '말해준 적도 없는데 니가 그걸 어떻게 아냐' 소리 듣지 않으려면 미리 오르카호 역사 공부한 척 좀 해놔야지. 아, 근데 들어갈 수 있기는 하나? 막 기밀정보 들어있는 중요한 곳이라 난 못들어가는 거 아냐?



그런 생각을 하며 복도를 거닐다보니 유리로 된 벽 너머로 물고기떼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 조명이 있는 수족관이 아니라 바다속인데도 오전이라 그런지 밝았다. 정박중이라 얕은 바다기도 하고. 


나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내가 걷던 반대방향으로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를 쳐다봤다. 물고기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다른 물고기가 나타나지 않을까 유리 밖을 쳐다봤지만 시퍼런 바닷물밖에 안보였다. 조용했다. 나는 슬쩍 옆에 있는 미호를 쳐다봤고, 미호는 처음부터 물고기는 안중에도 없었는지 나만 쳐다보고있었다. 눈이 마주쳤는데도 두근거리기는 커녕 뻘쭘했다.


"안녕안녕! 둘이 뭐하고 있어? 수족관 데이트?"


느닷없이 나타나 어색한 침묵을 깨준 건 리앤이었다. 눈을 마주친 리앤은 살가운 미소를 지어보였고, 나는 전에 리앤과 말 놓기로 했어서 편하게 대답했다.


"음, 그냥 기분 좀 내보려고 했는데 물고기가 하나도 없네. 안녕, 리앤. 여기서 뭐해?"


"그냥 순찰 돌다가 눈에 띄길래 말 걸어봤어! 어때, 오르카호에는 잘 적응했어? 뭐 필요한 건 없고?"


"아, 그러고보니 마침... 물어볼 게 있었는데. 이 기록물 보관소란 데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거야?"


"기록물 보관소? 거긴 오르카호 대원 인식증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데. 인식증은 받았어?"


"아니..."


그게 필요한 거였나.


"뭘 찾고있길래 그러는건데?"


"구체적으로는 없고. 그냥 전반적인 정보 좀 알고싶어서 그래."


"전반적인 정보라니?"


"난 지금 이곳에 관해 두리뭉실한 정보밖에 못들었거든. 대충 세계가 멸망했고 우리들만 남아서 철충이랑 싸우고 있고 뭐 그런거. 우리가 뭐하는 집단인지, 여기에 누가 있는지, 무슨 일을 겪어왔는지 자세히 좀 알고싶어졌거든. 나도 이젠 이 오르카호에서 살아가야 하니 알 건 알아야지."


"아하. 그런 거라면야... 내가 같이 가줄게!"


사정은 들은 리앤이 선뜻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괜찮은 거야?"


"곤란해하는 시민들을 돕는 게 바로 시티가드의 일이니까. 아, 그런데 잠시만. 일단 왓슨한테 얘기 좀 하고."


리앤은 호주머니에서 제 휴대폰을 꺼내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어 왓슨, 지금 시간 돼? 지금 두 번째 인간이랑 같이 있는데, 기록물 보관소에 들어가보고 싶다고 하더라고. 괜찮을까? ... 걱정마! 나도 같이 갈 거니까."


잠시동안 사령관이랑 얘기하던 리앤은 이내 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렸다.


"음, 너는 들어가도 괜찮은데 마리오네트는 안된다고 하네. 그래도 괜찮을까?"


"...그래?"


나는 무해한 판정이지만 미호는 아닌건가? 아님 나도 의심 대상이지만 하나 뿐이라면 리앤 혼자 마크할 수 있어서 그런건가. 뭐, 필요한 것만 얻을 수 있다면 저쪽이 무슨 의도로 그랬는지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같이 들어가봤자 미호는 옆에서 멀뚱멀뚱 서있는 거밖에 안할테니까.


"상관없어."


"그래? 알았어. 가자, 안내해줄게."


가기전에 미호에게 먼저 방에 돌아가있지 않겠냐고 물어봤지만 이번에도 대답없이 나만 빤히 쳐다보길래 그냥 같이 가게 되었다.


***


오르카호의 최상층. 리앤이 패널에 제 인식증을 갖다대자 문이 스르륵 열리며 기록물 보관소의 내부가 옆에서부터 드러났다. 두 번째 인간과 리앤 두 사람이 안에 들어가자 문이 도로 닫혔다.


"꼭 무슨 서버실 같네. 내용물은 어떻게 봐야 되는거야?"


"지참한 단말기를 여기에 연결하면 돼. 오르카폰도 가능한데, 가져왔지?"


"잠시만..."


두 번째 인간이 주머니를 뒤지더니 구식 스마트폰을 꺼냈다. "아, 이게 아니고." 도로 주머니에 넣고 반대쪽 주머니에 손을 넣자 오르카폰이 나왔다.


"그 옛날 폰 아직도 들고다니는구나...? 버리기엔 정들어서 그래?"


"뭘 어쩌겠어. 나한테 남은 거라곤 이거뿐인걸."


두 번째 인간은 오르카호 서버에 접속하는 데 성공했지만 워낙 폴더가 많아 무엇부터 뒤져아할지 난감해했고, 그 모습을 본 리앤이 차분하게 도와주었다. 


라비아타가 이름없는 저항군을 창설하고, 폐허에서 (당시 기준으로) 최후의 인간을 발견한 뒤 오르카 저항군으로 정식으로 명명된 이후의 기록. 다만 제대로 기록이 남겨진 건 사령관이 신체재건장치로 몸을 고친 이후부터였다. 그 이전은 하루하루 살아남느라 바빴었기 때문에 제대로 기록을 남기지 못해 대략적인 내용만 적혀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인간은 상관하지 않고 오르카 저항군의 역사를 속독했다. 어차피 그에게 있어선 다 아는 내용이니, 기록물 보관소에서 읽어봤다는 명분만 있으면 됐다.


한편, 마리오네트 미호는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마치 마네킹처럼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고 조용히 서있을 뿐이었다. 그런 미호가 고개를 돌린 건 모퉁이 너머로 어느 두 명이 수다떨며 다가오는 걸 들었을 때였다.


대부분의 오르카호 대원들은 두 번째 인간을 탐탁치 않게 보고 있었다. 그를 직접 만나본 대원들은 손꼽힐 정도로 적다보니 대부분에게 있어서 두 번째 인간은 '마리오네트를 수하로 부리는 정체불명의 인간'이라는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지금 마리오네트 미호와 눈을 마주친 장화 또한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순간 몸을 굳힌 장화의 자줏빛 눈동자가 커지더니, 이내 인상을 구겼다.


"뭐야... 그 새로 들어온 인간의 섹돌이잖아?"


"뭐 진짜? 와, 대박. 진짜로 마리오네트네."


장화와 같이 나타난 천아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미호를 빠르게 살펴봤다. 장화는 외투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로 미호한테 성큼 다가왔다. 눈 앞의 마리오네트가 자신의 새 보금자리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의혹에, 장화는 그녀를 신경실적으로 쏘아붙였다.


"야, 너... 델타인가 뭔가 하는 년의 꼬붕 맞지? 여기서 뭐하냐? 기밀정보라도 빼가려고?"


"..."


"야, 내 말 씹냐? 동태같은 눈깔 한 년이..."



장화는 미호의 어깨를 움켜쥐듯이 부여잡았다. (멱살을 잡으려다가 미호가 입고있는 슈트 특성상 잡을 수가 없어서 어깨를 대신 잡았다.) 옆의 천아는 말리기는 커녕 키득거리면서 구경하고 있었다.


"킥, 븅신. 쫄아서 아무 말도 안나오나봐? 꼬우면 니 주인한테 가서 일러바쳐보지 그래?"


"..."


장화의 위협에도, 천아의 도발에도, 미호는 아무런 대꾸 없이 장화를 응시할 뿐이었다. 장화는 마치 벽에다 대고 얘기하는 것 같은 불쾌감을 느꼈다. 


"앗, 너희들! 지금 뭐하는 거야!"


"미호야...!?"


그 때 기록물 보관소의 문이 열리며 두 번째 인간과 리앤이 나타났다. 바깥의 소란을 듣고 급히 나온 것이었다. 두 번째 인간만 있었다면 모를까, 하필이면 시티가드까지 이 자리에 있었던 탓에 장화는 대놓고 혀를 찼다. "칫..." 일을 더 크게 벌리기 싫었던 장화는 밀치듯이 미호의 어깨를 놓고서 뒤돌아섰다.


"니들, 기억해둬. 사령관한테 개수작 부리기라도 했다간 내가 직접 죽여버릴 테니까...!"


"뭐야? 너희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당장 안돌아와?"


리앤이 버럭버럭 소리질렀음에도 장화와 천아는 태연히 무시하며 자리를 떴다.


"야, 근데 넌 몽구스 팀이랑 화해한 게 언젠데 저 얼굴 보고 성질낼 수가 있냐?"


"지랄. 저게 어딜봐서 미호야, 그냥 되다만 인형이지."


둘이 모퉁이 너머로 사라지자 리앤은 뒤쫓으려다 말고 뒤를 돌아봤다. 두 번째 인간이 착잡한 얼굴로 마리오네트 미호가 어디 다치지 않았나 살펴보고 있었다.


"저기, 있지... 너무 신경쓰지 마. 쟤들이 좀 성깔있는거지, 모두가 저런 건 아니니까. 내가 꼭 잡아서 사과하게..."


"리앤. 솔직하게 말해줘"


"으, 응?"


"나랑 마리오네트에 대한 시선은... 저런 게 일반적인 건가?"


리앤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대답했다.


"...적지는 않아. 대부분이 너를 직접 본 적이 없어서 소문만으로 판단하고 있거든."


리앤이 해준 대답에 두 번째 인간은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는 홍련이 그러더니 이제는 장화라... 자매가 쌍으로 지랄이네 진짜..."


"...미안해. 내가 대신 사과할게. 그렇지만 모두가 네 적인 건 아냐. 나나 왓슨은 너희 편이니까, 상담할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줘."


두 번째 인간은 말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선 미호를 데리고 제 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어쩐지 어깨도 축 쳐져 보였다.


'기록물 보관소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을땐 기밀정보를 노리는 게 아닌가 의심했었지만... 아무리 봐도 그런 기색은 안보였어. 묵묵히 오르카호의 역사만 찾아본 걸 보면 정말로 그게 목적이었던 걸로 보여. 내가 옆에서 지켜보고있어도 꺼리기는 커녕 오히려 도와줘서 고맙다고 했고.'


두 번째 인간이 적이 아니라고 확신한 리앤은 하루빨리 다른 오르카호 대원들도 오해를 풀고 그를 받아들이길 바랄 뿐이었다.



미호는 이 일을 기억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