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왓슨, 진심이야?"


"설령 두 번째 인간이 무해하다고 해서 그 마리오네트까지 안전하다고 볼 수는 없어. 마리오네트가 무슨 짓을 벌이지는 않을 지 관찰해야만 해. 마침 어제 장화와 천아의 일로 이걸 건네줄 빌미도 생겼으니 잘됐지."


오르카호의 함장실. 리앤과 사령관은 책상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작은 상자가 올려져있었다.


"휴우, 그것도 그렇네. 알았어. 그럼 이건 내가 전달해줄게."


리앤이 상자를 집어들었다.


"어? 네가 직접 가져다주려고?"


"응. 마침 물어볼 것도 있거든."


그 인간이 어제 기록물 보관소에서 찾아본 건 오르카호의 행적 뿐인데, 어떻게 장화를 알고있었던 건지 말이야.


***


"발키리, 어젠 너무 안일하게 접근했어. 그 두 번째 인간이 너한테 무슨 수작이라도 부렸으면 어쩔 뻔 했어?"


"그렇게까지 경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둘 다 비무장 상태였습니다. 실제로 제게 손을 대지도 않았고요."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의 숙소. 레오나는 티테이블 반대편에 앉아있는 발키리에게 어제의 행동에 대해 주의를 주고 있었다. (사실 큰 의미없는 잔소리였다.) 


"대장님, 발키리 씨 말도 일리가 있지 않나요? 이젠 그 사람도 오르카호 식구인데, 평생 담 쌓고 지낼 것도 아니잖아요.


"그 오르카호 식구에 마리오네트도 포함되는 걸까?"


"그건..."


보다못한 베라가 슬쩍 끼어들어봤지만 레오나의 반응은 냉담했다. 베라가 말꼬리를 흐리자 찻잔을 비운 레오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선 거리를 두고 관찰하라는 달링의 지시도 내려왔으니, 당분간은 괜히 접근하지 말도록 해."


소파에 드러누워서 게임하던 그렘린은 접근하지 않으면 관찰도 못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라 말해도 레오나의 뜻은 완고할 것 같았기에 그냥 조용히 있었다.


"다른 자매들한테도 알려줘야겠네. 안드바리는 지금쯤 창고에 있을테고. 알비스는 나갔나?"


"앗, 네. LRL이랑 같이 놀고오겠다고 했는데요."


"...LRL이랑?"


"네..."


레오나는 눈을 지긋이 감았다.


"혹시 모르니까 창고에 한번 가봐야겠네."


***


레오나는 숙소를 나서 물자 창고로 이동하던 중 우연찮게도 리앤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다지 말을 섞은 사이도 아니라서 가볍게 인사만 나누고 서로 갈 길을 가려고 했으나, 둘이 같은 방향으로 걷고있다는 걸 느끼자 점점 서로가 신경쓰이게 되었다. 먼저 운을 띄운 건 리앤이었다.


"있지, 레오나 소장님은 어디로 가는 길이야?"


"물자 창고로. 그쪽은?"


"두 번째 인간을 찾는 중이야. 할 얘기가 있거든. 전달할 물건도 있고."


리앤은 옆구리에 작은 상자를 끼고있었다.


"흠? 그 인간을 왜 여기서 찾는거지?"


"감시카메라 기록을 돌려보니까 이 근처에서 찍혔더라고."


"뭐? 설마... 그 인간이 창고로 향한 건가?"


그 수상쩍은 인간이 창고의 물건을, 더 나아가 창고를 지키는 안드바리를 노리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레오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예상한 대로, 창고가 보이기 시작할 즈음 사령관이 아닌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번째 인간이 누군가와 얘기하고 있었다. 레오나와 리앤은 복도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그가 누구랑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는건지 지켜봤다.


***


(십몇 분 전.)


오르카호에 들어온 지 오늘로 3일째. 점심 먹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엘리베이터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보니 아직 오르카호 탐방이 안끝났지, 워낙 넓다보니까. 어젠 기록물 보관소 가는 길에 윗층을 대충 둘러봤으니 오늘은 아랫층이나 한번 구경해볼까, 방에 가봤자 할 일도 별로 없으니.


그렇지만 미호는... 그냥 방에 남겨두고 나혼자 가도 되지 않을까. 같이 다녔다가 주변에서 우리 보고 수근거리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얘는 뭐 혼자 둔다고 심심해 할 것 같지도 않은데.


"미호야, 난 아래층이나 한번 둘러보고 갈 생각인데 넌 어떡할래? 먼저 방으로 가있어도 되고... 한가하면 나랑 같이 갈래?"


대답이 안돌아올 걸 뻔히 알면서도 그냥 물어봤다. 보나마나 아무 말 없이 졸졸 따라오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7%>


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방금 분명... 고개를 끄덕였어? 미호가 보인 뜻밖의 반응에 나는 놀라 굳어버렸다. 뭐야, 얘가 의사표현을 한 건 처음인데? 어떻게 된 거야?


"...나랑 같이 가고싶다고?"


미호는 이번엔 침묵했다. 뭐지, 대답은 한번만 해주겠다는 건가? 더 물어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떨떠름하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


아래층의 분위기도 다른 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느긋하게 복도를 따라 걷던 도중 뒤에서 들리던 발소리가 멎었다. 미호가 걸음을 멈추고 딴 데를 쳐다보고 있었다. 


"...? 왜그래? 뭐 있어?"


"..."


나는 옆에 서서 미호가 쳐다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특별히 시선을 끌만한 건 아무것도 안보였지만, 가만있으니 미약하게 무슨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 인가?"


미호가 다시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미호를 돌아봤다가 다시 귀를 귀울였다. 사람 두 명, 아니 세 명? 이 무슨 말다툼을 하는 것 같은데. 피해갈까?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뭐하러. 무슨 소란이 일어난건지 궁금하기도 했던 나는 일부러 소리가 나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미호는 묵묵히 내 뒤를 따라왔다.


이윽고 내가 발견한 광경은... 좌우좌랑 알비스가 히루메를 붙잡고 떼를 쓰고있는 모습이었다.


"사부님! 저희에게 가르침을 주십쇼!"


"몇 달 간 들키지 않고 창고를 털었다는 그 솜씨를 보고싶느니라!"


"시, 싫다 이놈들! 첩은 더이상 그런 짓은 안할거다! 또 사고치면 앨리스 언니가 꼬리털을 다 뽑아버릴 거라고 으름장을 놨단 말이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잠깐 서서 떠드는 걸 들어보니, 정리해보자면... 먼저 좌우좌랑 알비스가 히루메한테 접근했고, 사부님이라 불리자 우쭐해진 히루메는 무심코 꼬꼬마들을 따라왔고, 창고로 데려와서 긴빠이 솜씨 좀 보여달라 하자 히루메가 기겁해서 내빼려하니 붙잡고 안놔주고 있는 것 같다. 그럼 저 문이 창고문인가? 안에 안드바리가 있다면 이미 들켰을 것 같은데.


음. 지금은 별로 엮이고 싶지 않군. 애들한테까지 ㅈ간 아니냐는 소리 듣고싶지는 않다. 조용히 유턴할까 하는 생각을 하던 도중 셋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화를 멈추더니 거의 동시에 나를 돌아봤다. 놀래라, 뭐야 갑자기. 뇌파로 들킨건가?


"아, 새 인간님이다!"


제일 먼저 알비스가 삿대질로 나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미호? 아니... 마리오네트인가!"


히루메가 눈살을 찌푸리며 애들을 제 뒤로 숨겼다.


"마리오...? 가 무엇이느냐?"


좌우좌만이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마리오네트를 본 적이 없는건가? 생각해보면 좌우좌가 전장에 나설 일도 없을테고 누가 굳이 알려줬을 것 같지도 않네.


...이미 들킨 마당에 무시하고 뒤돌아서면 되게 이상하게 보이겠지? 나는 하는 수 없이 대충 인사만 하고 슥 지나가자고 생각하며 비적비적 걸어갔다.


***


레오나와 리앤은 거리를 두고 숨어서 두 번째 인간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 인간, 알비스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두 번째 인간이 어린애들한테 다가가자 레오나는 여차하면 쏠 생각으로 홀스터에 손을 갖다댔다. 리앤은 어차피 명령 안떨어지면 못쏘지 않냐고 물으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고 두 번째 인간의 행동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기로 했다.


그리고 잠시 후, 리앤은 살짝 미소를 머금은 채로 레오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흐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


"어, 반가워 얘들아. 이번에 새로 오르카호에 들어오게 된-"


"우와...!"


좌우좌는 히루메를 제치고 도도도 달려와 미호를 이리저리 살펴봤다. 그리고선 컨셉도 잊은 채 원래말투로 미호에게 질문 공세를 던졌다.


"언니는 이름이 뭐야? 무슨 일 해? 그 옷은 뭐야? 특수부대 같은거야? 숨겨진 기능 있어?"


중세 판타지 계열의 캐릭터가 아닌데도 흥미를 끄는건가. 음, 흑백 배색이다보니 눈에 띄긴 하지. 그런데 미호는 좌우좌한텐 눈길도 안주고 허공만 보고있다. 아니, 허공이 아니라... 히루메를 보고있는 건가? 히루메는 몸은 옆으로 돌리고 고개만 이쪽을 향한 채로 나랑 미호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분위기 더 어색해지기 전에 내가 나서야겠다.


"어흠. 이쪽은 마리오네트... 미호라고 해. 직접 대답해주지 못하는 건 이해해줘. 미호는 말을 못하거든."


"엥? 왜?"


"글쎄, 태어날때부터 이랬을걸."


"그렇구나... 아!"


문득 날 쳐다본 좌우좌는 뭔가 깨달았다는 듯 작게 탄성을 내뱉더니 잽싸게 중2병스런 포즈를 잡았다.


"큭, 큭, 큭... 잘도 이 오르카호에 당도했구나 인간이여! 짐은 진조의 공주! 사이클롭스 프린세스이니라!"


그리고 한 박자 늦게 컨셉 잡힌 소개문구를 내뱉었다. 귀엽네.


"해서 인간이여, 저 마리오... 미호?가 그대의 권속인 것이더냐?"


"뭐, 그런 셈이지?"


"인간님은 마리오네트랑 친해?"


경계심이 조금 풀린 모양인지 이번엔 알비스가 다가왔다.


"음, 아마도? ...그럴걸?"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말 한 번 섞어본 적이 없어서. 알비스는 내 어정쩡한 대답에 신경쓰지 않고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럼 마리오네트는 뭘 좋아해?"


"다른 마리오네트는 모르겠는데, 여기있는 미호는 초콜릿을 좋아해."


"진짜? 알비스랑 같네! 초코바 나눠줄게!"


해맑은 미소를 지은 알비스가 탄입띠에서 초코바를 꺼내 내밀자 미호가 반응을 보였다. 미호는 알비스가 손에 쥐고있는 초코바를 잠시 쳐다보다가 건네받고선 그 자리에서 냅다 까먹기 시작했다.


사실 미호랑 알비스랑 좋아하는 초코바는 종류가 다르긴 하다. 미호가 좋아하는 건 판 형태로 가공된 초콜릿이고, 알비스가 좋아하는 건 안에 견과류나 카라멜이 들어간 고열량 에너지바 타입이니까. 하지만 초코는 초코라 그런지 저런 초코바도 잘 먹는 것 같다.


***


"...? ...!?"


마리오네트 미호가 태연히 알비스의 초코바를 건네받는 장면을 목격한 레오나는 당황한 듯 동공을 떨었다. 그녀가 여지껏 봐왔던 마리오네트는 싸우는 것 이외엔 어떠한 상호작용도 불가능했기에 틀림없이 알비스의 호의를 무시할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리앤은 레오나가 저 특별한 마리오네트의 관찰 기록을 접하지 못했다는 걸 짐작하고 살짝 웃었다.


***


"후후후... 짐의 함정에 걸렸구나, 인간이여!"


"엥?"


"그대의 권속이 진조의 하얀 마수가 내건 제물을 받아들였으니 이로서 거래는 성사되었도다! 따라서 그대는 짐의 권속이 되어야만 하느니라!"


"엑..."


양 허리에 조막만한 주먹을 올리고 등을 꼿꼿이 핀 좌우좌가 소리쳤다. 사령관도 냅다 권속으로 삼더니 결국 나까지 이렇게 되는건가. 애들이랑 놀아주는 건 잘 못하는데... 그냥 오늘 하루만 장단 맞춰주자. 나는 연극하듯 과장된 몸짓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프린세스. 명령을 내려주시지요."


새로운 권속을 얻게되자 신이 난 좌우좌는 방방 뛰면서 내 손을 잡고 끌고갔다. 창고문 쪽으로.


"후힛, 그러면 짐의 새 권속이여! 그리고 권속의 권속이여! 오늘은 특별히 짐의 위험천만 보물창고 습격 대작전에 동참시켜주겠노라!"


"...? 그 보물이란 게-"


"바로 참치캔이다!"


"그리고 초코도!"


역시 그거였냐! 나는 끌려가지 않도록 다리에 힘을 줘서 버텼다.


"아니, 잠깐, 잠깐만! 설마 저 창고를 털겠다고? 그건 안되지!"


"걱정할 거 없다! 오늘은 도둑질의 대가이신 히루메 사부님도 함께이니 신참이 끼더라도 문제 없느니라!"


"처, 첩은 안 갈 것이다!?"


가만히 듣고있던 히루메가 놀라 소리질렀다. 그보다, 내가 버티니까 좌우좌가 더 세게 당기는데 뭔 꼬마가 나보다 힘이 세...!


"아니 근데, 알비스! 넌 아까 초코바 준 거 보면 이미 갖고있는 모양인데, 왜 굳이 창고를 털겠다고 하는거야?"


"아, 인간님은 모르는구나. 며칠전에 초코가 잔뜩 저장된 창고를 찾았거든! 덕분에 새로운 초코과자가 잔뜩 입고됐어!"


"초코... 창고?"


"이름이 뭐더라, 오라오였던가?"


"엥, 오리오 아냐?"


"...오레오이니라."


"맞아, 그런 이름이었어!"


기억의 방주에 이어 오레오 방주도 찾았던 거냐 니들. 델타가 거긴 관심을 안보여서 손대지 않았다고 했던가.


"알비스는 빨리 오레오란 걸 먹어보고 싶어! 찾으면 인간님한테도 나눠줄게, 같이 가자!"


"저기, 얘들아? 우리 법에 저촉되지 않는 다른 놀이 하면 안될까?"


"후후, 필멸자들이 세운 규칙따윈 진조의 공주에겐 적용되지 않느니라!"


"흐음. 재밌는 말을 하는걸. 나도 껴도 될까나?"


"물론이지 대장님! ...어?"


느닷없는 레오나의 난입에 미호를 제외한 모두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미호는 무표정 그대로 다 먹은 초코바 포장지를 주머니에 우겨넣는 한편, 히루메는 "히에엑!?" 꼬리가 펑 터지듯이 부풀어올랐다. 9개 다.


"그래서, 뭐라고 했지? 우리 알비스는 새로 들어온 초코 과자를 어디서 찾을 생각이었을까?"


"아, 아냐! 알비스 아직 안훔쳤어!"


"아직?"


"아차!"


"지, 짐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나서 이만 가보겠다는 것이다! 또 보자꾸나 권속과 권속의 권속이여!"


"아, 알비스도 급한 일이 생긴 거 같아! 같이가!"


좌우좌와 알비스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후다닥 자리를 떠났다. 나는 둘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 레오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보니 리앤도 와있었네, 뭐야 이 조합.


"실례했어. 우리 애들이 폐를 끼친 모양이네."


"아뇨, 딱히... 뭐... 조금 난처했었는데 타이밍 좋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흐응..."


레오나한테는 반말할 분위기가 아니여서 존댓말로 대답했는데 표정이 약간 풀린 걸 보니 아무래도 정답이었던 것 같다. 레오나 옆에 선 리앤도 한 마디 던졌다.


"아핫, 애들이랑 잘 놀아주던데?"


"글쎄... 그냥 장단 맞춰준 것 밖에 없는걸."


"그러니까 하는 소리지!"


"그래서, 그쪽은 창고엔 무슨 일로 왔던걸까?"


"그냥 선내 구경하다가 애들이랑 히루메가 떠드는 소리가 들려서 와봤는데요."


그 말에 모두가 히루메를 슬쩍 쳐다보자 히루메는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처, 첩은 결코 동조한 적 없다! 분명히 말렸느니라!"


"하하, 아무도 뭐라 안했어."


"아무튼, 창고에 더 볼 일은 없다는 거지? 그럼 이만 가던 길 가지 그래?


...쌀쌀맞은 거 봐라. 수상한 인간이 창고나 안드바리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철벽수비하고있네. 그렇지만 뭐, 무슨 소란인지 확인하려고 온 거였으니 볼 일 다 본 건 맞지.


"예 뭐, 저도 그만 방에 돌아가서 쉬고 싶네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미호야, 가자."


미호는 히루메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미호야."


한번 더 부르자 그제서야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있지, 나도 같이 걸어도 될까? 하고싶은 얘기가 있어서 말이야."


"응? 그러던가...?"


리앤은 또 나한텐 무슨 볼일이지. 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히루메가 나를 불러세웠다.


"기다리거라."


"어? ...왜?"


"거기있는 미호를 닮은 마리오네트는, 어째서 그대를 따르는 것이더냐."


"...나도 몰라. 아는 게 없어서 뭐라고 대답해 줄 수가 없네."


"그대가 모른다 하더라도 분명 이유가 있을테지. 자네는 모르지만 미호는 아는 이유가 말이다. 가령 예를 들자면..."


뭐야,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보다 히루메가 추리를 하는 캐릭터였던가? 나는 천천히 히루메를 돌아보며 귀를 기울였다. 히루메가 입을 열었다.


"둘이... 전생에 연인이었다던가...!"


"..."


그럼 그렇지, 얘 망상벽이 어딜 가겠어. 리앤은 어색하게 살짝 웃었고 레오나는 곧장 한심하단 표정을 지었다.


"그 아이가 나를 빤히 쳐다봤던 것도 분명 첩에게 동질감을 느껴서인 게 분명하느니라. 첩 또한 얼마전에 비로소 낭군님과의 전생의 인연을 떠올릴 수 있었으니 말이다."


"어..."


호접지몽 외전 스토리였던가 저게.


"아직 그대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지 못한 듯 하지만 거기있는 미호는 다른 모양이구나. 모든 기억을 떠올릴 때 비로소 그대의 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니라!"


"그래... 그럼 참 좋겠네."


나는 영혼없는 대답을 한 뒤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리앤은 내 옆에 서서 나란히 걸었다. ...얘는 대체 나한테 무슨 볼일인 거지.


창고에서 좀 멀어지자 리앤이 말을 걸었다.


"어제같은 일은 안일어나서 다행이네. 어제는 너무했지! 느닷없이 시비라니."


"...그러게."


"그래도 LRL이나 알비스랑 잘 어울리는 걸 보고 안심했어. 오르카호에 낯선 얼굴이 많아서 어색해할줄 알았는데. 아, 혹시 이미 아는 애들이었어?"


"어, 그렇지. 직접 만나본 건 이번에 처음이지만."


"그렇구나. 그럼 히루메도?"


"응. 걔도 마찬가지야."


"하긴, 히루메가 유명한 몸이긴 하지. 삼안에서 광고도 엄청 찍었다고 하니까. 하핫. 그럼 장화는 어때? 장화도 그냥 이름만 들어봤던 거야? 아님 직접 만나본 적 있어?"


"이름만. 직접 본 건 어제가 처음이고."


"흐~음. 어디서 들어봤는데?"


"뭐?"


순간 내가 움찔하며 걸음을 멈추자 리앤은 내 앞을 가로막아섰다. 어제처럼 피해자를 보는 측은한 눈이 아닌, 용의자를 보는듯한 냉정한 눈빛... 어...? 


"어제 분명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장화의 얼굴을 보고 이름을 맞췄지? 게다가 홍련이랑 자매기라는 것까지 이미 알고있었고. 꽤 많이 알고있나본데, 어디서 다 들은거야?"


어 아니 잠깐만...

흔한 가정용 바이오로이드도 아니고 불법 생산된 테러용 바이오로이드의 정체를 알고있다는 건... 존나 수상해보일 수 밖에 없잖아! 내가 어제 뭐라고 지껄였지? 분명... 홍련과의 연관점까지 나불거렸네. 이런 망할, 내가 왜 그랬지. 어영부영 넘어갈 수도 없게 됐다.


'아무튼 기록물 보관소에서 봤다'는 변명도 못쓴다, 하필이면 어제 같이 있었던 게 바로 여기있는 리앤이니까. 그것도 장화의 난입으로 끝까지 보지 못하고 중간에 나왔는데...! 날 의심하는 대원들 리스트에 리앤까지 추가되면 진짜 골치아파진다!


"어디서 들었냐니, 그건..."


형사모드 킨 리앤이 눈빛으로 대답을 재촉하고 있지만 게임에서 봤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었다. 게임 아니면 인터넷인데, 인터넷은... 음... 안될 건 없지 않나? 나는 모 아니면 도라는 심정으로 입을 뗐다.


"옛날에... 인터넷에서 봤는데."


리앤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진심이야?"


"그래. 장화가 시중에 풀린 바이오로이드도 아니니 그 존재를 알고있다는 것 만으로도 의심받을 만도 하지. 근데 진짜로, 인터넷에서 봤어. 이름이랑 사진이랑 이것저것, 그리고 얼굴 닮은거 보고 홍련이랑 자매기 아니냐는 추측글도 봤지."


거짓말은 안했다.


"으음... 그래? 무슨 사이트에서 봤는데?"


아씨 그것까지 물어보냐. 그건... 솔직하게 말해도 상관없겠지?


"라오챈에서 봤어."


어차피 니들은 절대 모를테니까.


"라오 챙? 무슨 중국인 이름같네?"


"챙이 아니라 챈! 니은 받침!"


"난 들어본 적이 없는데, 무슨 다크웹 같은거야?"


"절대 아니야. 그냥 바이오로이드 좋아하는 사람들 모여서 바이오로이드 얘기하는 커뮤니티 사이트였다고."


"그래...? 그런 사이트가 있는 줄도 몰랐네."


표정이 풀린 리앤이 다시 몸을 돌려서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좋아, 급조해낸 변명치곤 잘 만든 것 같다! 어차피 델타가 기억의 방주 박살내놔서 멸망 전 인터넷 아카이브 떠놓은 것도 다 날아갔으니 '그런 사이트 없던데?'하면서 교차검증도 못해!


"하긴, 도심에서 워낙 날뛰었었으니 민간 카메라에 찍혔을 수도 있겠구나. 마리아 리오보로스 파벌에서 정보통제한 기록도 있고."


리앤은 뭔가 지 알아서 납득하는 것 같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진 않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안심했다.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 우린 걸음을 멈췄다.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가 오길 기다리던 중 리앤이 다시 나를 돌아봤다.


"참, 그렇지. 장화하고 천아는 어제 일로 왓슨이 따끔하게 주의를 줬으니 안심해도 돼. 그리고 어제같은 일이 또 생기지 않도록 전해줄 물건도 있어."


"전해줄 게 있다고?"


리앤이 계속 옆구리에 끼고있던 상자를 건네줬다.


"우선 오르카호 대원 인식증! 그게 있으면 오르카호 시설은 다 쓸 수 있어. 참고로 그건 네 거고, 마리오네트의 인식증은 아직 없어."


"아, 드디어 나왔구나. 인식증... 그리고 또?"


"후후, 상자 한 번 열어볼래?"


리앤의 말에 나는 별 의심없이 뚜껑을 열었고, 거기서 내가 발견한 건 원래 마리오네트 미호가 쓰던 고글이었다. 스타크래프트에 나온 유령을 연상케 하는 그 고글. 그러고보니 총 말고 이것도 압수당해서 못돌려받았었지.


"그 고글엔 블랙박스 기능이 있으니까, 누군가 부당하게 건드린다면 바로 녹화할 수 있어. 혹시모를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마리오네트한테 항상 그 고글을 쓰고 다니게 하는걸 추천해."


"...그리고 니들이 블랙박스 열어봐서 내 행적 읽어보는 용도로 쓸 수도 있고?"


"아하하... 부정은 못하겠네. 물론 그렇게 쓸 수도 있겠지. 하지만 블랙박스가 있는 건 네게도 나쁜 얘기는 아니잖아? 혹시 필요없어?"


"...아니, 필요해."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그럼 이만 헤어져야겠네! 나는 아직 이 층에 볼 일이 있거든. 얘기해서 즐거웠어, 다음에 또 봐!"


리앤은 손을 흔들어주며 자리를 떠났다. 나는 멋쩍게 손을 흔들고서 미호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다.


마리오네트의 고글이라, 일단 받기는 했는데... 아니 누가 선내에서 완전무장하고 다니냐. 게다가 얼굴을 가리면 괜히 상대방이 거리감을 느끼지 않나? 안그래도 주변에서 마리오네트라는 이유만으로 안좋게 보고있는데.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얘는 항상 죽은눈이라 얼굴 드러내고 다녀도 도찐개찐일 것 같기도 하다. 감정도 없어서 항상 무표정이고. 어차피 이제와서 돌려주기도 좀 그렇지


"...미호야, 어떡할래? 쓸래?"


고글을 슬쩍 내밀자 미호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선 고글을 받아 얼굴에 썼다. 내가 직접 씌워줄 필요는 없구나. 고글에서 조리개 돌아가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띵.' 엘리베이터가 숙소가 있는 층에 도착했다. 


***


"...알았어. 수고했어 리앤. 아르망, 물건이 무사히 전달되었다고 해."


"잘됐네요. 이제 그들이 무얼 보고 들었는지,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모든 정보가 기록될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볼 수 있는 방식으로요."


오르카 기술부가 마리오네트 저격병의 고글을 철저히 조사해본 결과 블랙박스 이외에 갖추고 있는 기능은 망원경, 조준 보정, 그리고 야간 투시 기능 뿐이었다. 통신 기능 같은 건 전혀 없었으니 돌려줘도 안전할 거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물론 고글을 쓴 것 만으로도 마리오네트의 행동폭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나, 오히려 이를 미끼로 쓸 수도 있었다. 만약 마리오네트가 어둠 속에서 움직일 수 있게 됐다고 본격적으로 스파이 활동을 개시한다던가 하면 그 순간 잡아들이면 되니까.


"반대로 마리오네트가 아무런 일도 벌이지 않는다면 다음주 건강검진 때나 블랙박스를 들여다 볼 수 있겠네요. 이젠 저희가 할 일은 기다리는 것 뿐입니다."


아르망이 담담하게 말했다.



대충 마리오네트 미호 표정콘처럼 만들어봤는데 무표정 원툴이라 표정 바리에이션을 넣을수가 없네


쓰고보니 이번화는 미호 비중이 너무 적은거 같다..

그러니 다음화는 다시 미호의 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