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리리스, 내가 말한 인원들로 파견했지?”

 

“네, 주인님께서 지목하신 스노우 페더와 하치코를 보냈어요.”

 

“잘했어. 그 둘이라면 큰 문제 없겠지. 하치코 성격이야 오르카호에서 손꼽히는 순둥이고, 스노우 페더도 현 시점에서는 리마토르가 그나마 덜 경계하는 컴패니언 대원일 테니까.”

 

“이번에도 주인님의 인선은 좋았어요. 그렇지만... 스노우 페더를 고르신 건 마음에 걸리네요.”

 

옷매무새를 다듬던 사령관은 리리스의 말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 자신이 망가뜨렸던 블랙맘바 대신 새 블랙맘바를 만지작거리며 리리스는 찜찜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스노우 페더는 계속해서 리마토르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왔어요. 괜히 이렇게 보냈다가 그쪽에서 포섭되는 건 아닐지...”

 

“그러지는 않을 거야. 오히려 모두가 YES를 이야기할 때, 홀로 NO를 얘기할 수 있는 용기가 있으니 더 객관적으로 사건을 파악하겠지. 

 

멸망 전 교황청에는 복자나 성자로 지정하는 시복 및 시성 심사 때 반대편에 서서 철저한 검증을 요구하는 ‘악마의 변호사’ 제도가 있었다고 해. 스노우 페더에게 그 역할을 맡겨보자고. 우리가 바라보는 시선을 넘는 이야기를 해줄 사람이 있다는 건 아주 중요한 사실이야.”

 

사령관은 말을 마치고 넥타이를 꽉 조였다. 스스로 보기에도 오늘이 미시적으로는 오르카호, 거시적으로는 새로운 인류가 향할 방향을 바꿀 분기점이 될 것이 자명했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에드워드 카의 말이 그의 귓가에 맴돌았다. 지나간 과거를 평가하는 현재, 다시 과거가 될 현재를 평가할 미래. 끊이지 않고 지속되는 시간 속에서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아르망, 리마토르의 강의에 대한 반응은 어때?”

 

“문자 그대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폐하의 존재에 도전을 내미냐는 부정적인 반응부터 패러다임의 전환을 시도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혼재되어 총평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그래, 그럼 여기서 내 반응이 여론에 미칠 영향은 어느 정도로 예측되지?”

 

“폐하께서 표명하신 입장에 따라 리마토르 교수가 거취를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리마토르 교수를 궁지로 모는 것도 가능합니다.”

 

“절대적이라는 뜻이군. 잘 알겠어.”

 

아르망의 말을 들은 사령관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흘끗 시계를 바라보니 긴 분침이 반 바퀴를 향해 돌고 있었다. 20분 남짓한 시간이 참 길게도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리마토르의 강의를 듣고 느꼈던 혼란과 감탄 사이에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에 20분은 넉넉한 시간이 아니었다.

 

‘모순인가. 아니면 중첩인가.’

 

정반대되는 감각이 동시에 느껴지는 자신의 내면을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각기 다른 감정이라도 가리키는 결론은 한 방향이었다. 사령관은 옷매무새 정리를 마친 뒤 늘 앉아서 업무를 보는 의자로 향했다. 중요한 담화를 발표할 때면 항상 자신을 찾아오는 탈론 페더와 스프리건의 방송용 카메라가 오늘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무게감을 잡은 목소리와 중후한 눈빛으로 페르소나를 덧입은 사령관은 자신을 비추는 카메라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친애하는 오르카 저항군 여러분. 사령관입니다. 저는 현재 우리 모두가 처해 있는 특별한 상황 속에서, 모든 오르카호 저항군 여러분께서 최대한 문제 없이 일상을 영위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오늘 있었던 리마토르 교수의 발표에 대해 많은 분들이 혼란을 느끼시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모든 오르카호 저항군의 수장으로서 제 휘하 전 장병 및 오르카호의 보호를 받는 민간인이 침착하시기를 짧고 간결하게 당부드리는 바입니다.”

 

“서론이 길군요. 사령관님이 할 말이 많은가 봅니다.”

 

화면을 바라보던 리마토르는 상당한 길이를 차지하는 사령관의 서론을 들으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오르카호의 혼란과 평상심 유지를 공개적으로 언급한 점에서 그는 자신이 아스널로부터 들은 것 이상으로 자신의 강의가 갖고 온 파급이 큼을 간접적으로 재확인했다. 점점 커지는 위험에 따라 돌려받는 보상도 커져감을 느끼며 리마토르는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화면보다 리마토르에게 더 시선을 맞추었던 칸은 그의 목덜미에 흐르는 식은땀을 보고는 손을 뻗어 땀방울을 훔쳤다.

 

“저도 오늘 진행된 리마토르 교수의 발표를 실시간으로 전부 시청했습니다. 많은 분이 느끼시는 바와 같이 이 주장은 기존에 제시되지 않았으며, 신선한 만큼 큰 충격을 동반했습니다. 특히 ‘모든 인간의 종말을 통한 바이오로이드의 해방이 반드시 필요하다.’라는 대목이 현재 뜨거운 논의의 중심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문장을 두고 리마토르 교수가 주장하는 철학이 저를 부정하는 내용이라고 말씀하는 분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멀지 않은 과거에, 근거가 불분명한 자료에 기대 리마토르 교수에 대한 폭력 사태까지 벌어진 전례가 있습니다. 저는 불미스러운 일의 반복을 막기 위해서도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철학을 대하는 태도를 명확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령관의 입에서 문장이 나오는 순간마다 오르카호의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귀를 열었다. 짧게 끝날 자리일 터였지만 말하는 이에게도, 듣는 이에게도 상당한 체력이 요구되었다. 그 자리에 있는 이들 중 어떤 이는 뚜렷하게, 어떤 이는 어렴풋이, 어떤 이는 무의식 중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철학은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를 그리는 학문입니다. 지나간 시대에 칼을 대어 분석하고, 지금의 시대를 조망하고, 다가올 시대를 제시합니다. 우리는 철학을 지금 드러난 내용만으로 판단할 수 없음을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철학이 제시한 개념을 적용해서 평가해보고, 그에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새로운 가치를 도출하는 변증법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이전에 쓰인 철학의 평가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변증법이 언급된 김에 헤겔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 입니다.”

 

“와, 사령관님도 교수님과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데요?”

 

사령관의 입에서 나온 말에 하르페이아는 감탄하며 리마토르를 바라보았다. 예상 밖의 동일한 발언에 리마토르는 신선한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화면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아스널은 긍정적인 결과가 예상된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칸은 드디어 리마토르의 주장이 빛을 보는 것이냐며 한껏 부푼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제가 리마토르 교수에게 철학 연구에 한한 면책권을 수여했음을 모든 분이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면책권의 수여는 앞서 말한 철학의 사후성(事後性)에서 기인한 결과며, 개개인에게 요구되는 인내심에 갈음하여 제가 사령관으로써 공적 영향력을 행사한 것입니다.

 

리마토르 교수의 이번 연구도 면책권의 적용 범위에 해당하며, 이에 따라 저는 리마토르 교수에 대한 어떤 음해 및 출처 불명의 비방도 바람직하지 않음을 이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바입니다. 또한 저는 리마토르 교수가 제안한 철학적 도안을 받아들일 의향이 있으며, 이번 연구도 수용 여부에 대해 적극적으로 검토할 예정입니다.

 

이상입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자신의 입에서 흐른 마지막 말을 끝으로 방송이 종료되었다는 신호가 나오자 사령관은 탁자 위에 있던 물잔을 집었다. 마른 입안에 수분이 보충되자 담아두었던 긴장이 날숨을 타고 밖으로 나왔다. 탈론 페더와 스프리건이 수고 많으셨다는 인사를 남기며 철수하자 사령관은 똑같이 고생 많았다는 인사를 남기고 다시 물잔을 채웠다. 차가운 물을 식도로 넘기며 그는 자신의 담화가 끼칠 영향을 생각했다. 

 

자신이 공개적으로 신호를 보낸 만큼 리마토르의 입지는 필연적으로 영향을 받을 것이 자명했다. 어쩌면 그게 위협으로 돌아올 가능성도 있지만, 사령관은 그것만으로는 자신이 표명한 입장이 철회되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리마토르의 그릇을 보았기에 자신이 그를 받아들였던 이유에 따라 기회를 주는 것이 옳다고 여겨졌다. 사령관은 잔을 비우고 리리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생방송을 옆에서 전부 들은 리리스는 불만과 우려가 가득한 표정으로 그에게 시선을 보내는 중이었다. 사령관은 리리스에게 다가가 팔을 둘렀다. 자신의 품 안에 끌어안은 그녀에게 그는 확신을 담은 어조로 말했다.

 

“괜찮을 거야.”

 

“...괜찮으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아도 리리스가 괜찮게 만들어드릴 거에요.”

 

리리스는 싱긋 웃으며 사령관에게 자신의 팔을 둘렀다. 따뜻한 온기가 교차하는 감각이 일방적인 전달과는 사뭇 달랐다.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던 아르망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다.

 

“이런 로맨스의 가능성도 괜찮겠죠.”

 

 

같은 시각, 리마토르는 칸의 지휘용 패드 화면을 껐다. 검은 화면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눈으로 훑은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에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실로 머나먼 길을 돌아왔는데, 마침내 결실이 맺히기 시작했다. 리마토르는 그 자리에 있는 모두의 얼굴을 한 번씩 찬찬히 살피고는 입을 열었다.

 

“아까 하지 못했던 강의를 마저 해야겠군요.”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어둠을 가르고 비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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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에피소드 끝. 이제 내부 반응 에피소드로 넘어가볼까. 다음 에피소드부터는 여태까지 진행된 것처럼 철학적인 이야기가 계속 나오면서도 정치물로서의 분위기가 더 첨가될 예정이야. 개인적으로 이 소설의 이야기를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패러다임이 적용되는 과정까지 다루고 싶은 욕심이 있어서, 패러다임이 어떻게 자리 잡는지도 써보고 싶더라. 물론 중간중간 쉬어가는 에피소드도 있을 예정이야.


복귀 전까지 한 편이라도 더 쓸 수 있도록 노력할게. 글 읽어줘서 정말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