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이 빛을 쳐다봐. 좋아... 그렇지..."


닥터는 수술대에 누워있는 미호의 눈에 빛을 비추며 동공 반사 테스트를 진행했다. 동공이 수축하고, 빛이 움직이는 대로 눈동자가 따라가는 걸 확인한 닥터는 손전등을 껐다.


"이제야 내 말을 들어주는구나. 처음 들어왔을 땐 내 말을 다 무시해서 시신경이 정상작동한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는데. 둘째 오빠 데려오기 전엔 청각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었다고."


"..."


"쩝, 여전히 수다는 못떠네."


"덕분에 난 혼잣말이 늘어났지..."


오르카호에 들어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간 얌전히 지낸 덕인지 드디어 오르카호 대원들의 나를 보는 시선이 나아졌다. 막 수근거리지도 않고, 길 걷다 마주치게 되면 저쪽에서 먼저 살갑게 인사를 건네기도 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미호도 변했는데, 먼저 날 쳐다보는 빈도가 줄어들었다. 예전에는 날 빼면 몽구스 팀이나 장화같은 특정 인원만 인식하고 나머지는 전부 무시했었는데 이젠 모두에게 반응을 보이게 됐다. 덕분에 미호에 대한 인식이 위험분자에서 흥미대상 정도로 바뀐 것 같다. ...적어도 일반 대원들 사이에선 말이다.


"그래서, 미호 몸은 좀 어때? 건강한 거야?"


"아무 문제 없어. 아주 건강해... 이상할 정도로..."


"응?"


"아무것도 아냐. 그럼 이번 건강검진은 여기서 종료! 이제 가봐도 돼."


수술대에서 일어난 미호는 탁자에 놓여져있던 고글을 집어들어 얼굴에 썼다. 


"그런데 둘째 오빠, 언제까지 오르카호 안에만 았을거야? 심심하지 않아?"


"그건, 뭐... 심심하긴 하지..."


내가 아무리 집돌이라도 인터넷이나 게임이 없으면 버티는 데에 한계가 있다. 여기서 접속할 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라곤 오르카넷 뿐이고, 할 수 있는 게임은 스틸라인 온라인 뿐이니까.


오르카넷은 눈팅해보니까 념글 대부분이 [싱글벙글 두번째 인간 근황] 이딴거라서 내 입장에선 되게 떨떠름하다. 나 오기전엔 념글의 절반이 사령관 얘기였던데 그 놈은 어떻게 저 많은 관심을 버틴건지 참 대단하다. 그리고 스틸라인 온라인은... pvp겜이라서 싫다. 난 똥컨이라 pvp는 잘 못한단 말이다. 그러니까 라오나 했지.


"우리가 기억의 방주에 거점 차렸다는 건 들었지? 이젠 둘째 오빠를 나쁘게 보는 사람도 얼마 없는데, 나가서 여러 사람 만나고 좀 그러는 게 어때? 바깥공기도 좀 쐬고."


"흠, 그럴까?"


"그렇게 해. 오빤 검사해보니까 비타민D가 부족하더라. 마리오네트 걱정할 때가 아니라고."


"엑, 진짜냐..."


"일단 비타민D 알약도 처방해줄테니까 매일 오전에 먹도록 해. 그리고... 아니, 아무것도 아냐."


"...? 뭔데, 뭘 말하려고 했던 건데?"


"미안! 하지만 아직은 말해줄 때가 아닌 거 같아. 다음에 알려줄게."


"뭐야, 궁금하게스리..."


노골적으로 말을 얼버무리자 나는 의아함을 느꼈지만 붙잡고 캐물을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나랑 미호는 닥터를 뒤로한 채 연구실을 나왔다.


***


두 번째 인간과 마리오네트가 나가자 닥터는 연구실 의자에 풀썩 앉았다.


"생체 재건은 아직도 미룰 생각인가... 적어도 둘째 오빠 쪽은 더 의심할 필요도 없어보이는데."


인간이 휩노스 병을 막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생체 재건 시술. 지휘관 회의에서 두 번째 인간은 위험인물인지 아닌지 좀 더 지켜보고 판단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에 생체 재건은 보류하고 대신 매주 소량의 오리진더스트를 처방하는 걸로 휩노스 병을 막고 있었다.


닥터는 의자를 반바퀴 돌려 책상에 올려진 몬O터 캔을 들이키고는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마리오네트의 2차 정밀검사 기록이 띄워져있었다.


"이상하네... 슬슬 장기 과사가 시작했어야 하는건데, 어떻게 아직까지 멀쩡한거지? 게다가 신체능력이 더... 향상된 것 같은데?"


이상할 정도로 건강한 마리오네트의 신체도 그렇지만, 정말로 닥터를 골치아프게 만드는 건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였다. 마리오네트의 명령권자가 여전히 레모네이드 델타로 설정돼있는 것도 미심쩍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마리오네트의 데이터 중 해독불가능한 영역이... 10%로 늘어났어...? 저번엔 분명 5%였는데?"


처음 그 마리오네트를 데려왔을 때는 그것에 관해 전부 파악해뒀으니 별 문제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행동원리도 단순하고, 어차피 수명도 얼마 안남았으니까. 실제로 지난 일주일 동안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긴 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 분명하다. 닥터가 볼 수 없는 수면 아래에서. 정밀검사가 소용없는 건 물론이고, 아무리 지켜본다 하더라도 저 비정상적인 마리오네트의 속내를 알아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설령 두뇌를 물리적으로 해부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기분이 언짢아진 닥터는 몬○터 캔을 거꾸로 뒤집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시고서 쓰레기통에 던졌다. 일반 쓰레기통에 들어간 바람에 나중에 에이미한테 잔소리를 듣게 되었다.


***


기억의 방주 안, 그 중에서도 생태 보존 구역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넓었다. 바깥은 구름이 짙게 껴서 흐린 하늘이었는데도 이 안은 인공 태양이 화창하게 비추고 있었고, 실내임에도 정원처럼 잘 가꾸어놓은 게 소규모의 생테계를 재현해놨다는 게 빈말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덕분에 경치 구경하는 데 질릴 일은 없었다. 


산책로를 따라 하염없이 걷다가 다리가 피곤해지자 벤치에 앉아 광장 중앙의 분수대를 멍하니 구경했다. 한 시간 쯤 걸은 거 같은데, 슬슬 돌아갈까. 자리에서 일어서자 미호도 따라 일어섰다.


"미호야, 이만 오르카호로 돌아갈래? 아님 마지막으로 가보고 싶은 데리도 있어?"


미호가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손 끝이 향하는 곳은... 카페 호라이즌이었다.



"...아니, 저긴 안갈거야. 여러모로 좀... 곤란하단 말이야. 그냥 오늘도 오르카 카페나 가서-"


몸을 돌려서 방주 출입구로 가려다가 미호한테 팔을 붙잡혔다. 미호는 한번 더 카페 호라이즌을 가리켰다.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미호를 째려봤지만 미호는 고글때문에 표정을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어차피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겠지만. 눈에 힘을 풀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휴우... 좋아. 대신 마실 것만 살거다? 테이크 아웃으로."


미호가 내 팔을 놓아주자 나는 카페로 발을 옮겼다. 대체 언제부터 마리오네트가 떼를 쓰게 된거지.


*


치링. 카페 문을 열자 벨소리가 울렸다. 처음 와보지만 게임에서 본 적이 있는 익숙한 풍경, 사람이 적어 삭막했던 오르카호와는 다른 밝은 분위기, 그리고 낯익은 비키니 메이드 점원들. 문에 가까이에 있던 점원 한명이 뒤돌아섰다.


"어서오세냐... 앙...?"


고양이 비키니 메이드 장화냥이는 나랑 눈을 마주치자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제 겨우 익숙해지려 했던 접객용 미소에 쩌적하고 금이 간 그녀는 눈은 사백안이 되어 쉴새없이 떨렸고 얼굴은 지 머리색 만큼이나 새빨개졌다.


"너... 너...! 너어!!"


"...너 여기서 일하고 있었냐..."


장화가 카페 호라이즌에서 일한 게 역바니 소동 때부터였던가, 그럼 지금 시점이면 여기 있는 거 맞네. 깜박 잊고있었다. 


보자마자 든 기분은 예쁘다, 야하다 따위가 아닌 껄끄러운 상대를 마주친 어색함 뿐이었다. 아니, 솔직히 웃기기도 하네. 장화의 저 스킨 처음 봤을때가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


"너! 여긴 왜왔어!"


"카페에 마실거리 사러오지, 뭐하러 오겠냐 그럼? 계속 길 막고 있을거야?


"이씨...! 누가 너한테 판대!? 니 인형 데리고 썩-"


"장화 씨! 손님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에요!"


카운터에 있던 세이렌이 호통치자 입을 다문 장화는 나랑 미호를 한번 쏘아보고선 "칫!" 혀를 차며 자리를 옮겼다. 들어가자마자 쓸데없이 장화랑 기싸움하느라 시선을 끌어모아버렸다 망할. 빨리 마실 것만 사고 나가야겠다.


"저기, 저희 알바가 실례를 끼쳐 죄송합니다 손님."


카운터 앞에 서자 세이렌이 대신 사과했다. 비키니 메이드라, 되게 과감한 복장인데도 본인은 익숙한 건지 딱히 불편하단 티를 안냈다.


"아니 뭐, 됐어. 나야말로 도와줘서 고마워. 주문해도 될까?"


"네, 말씀해주세요."


나는 시선을 위로 올려 메뉴판을 봤다. 어디... 맛있어 보이는 게 많이 있네. 밀크쉐이크도 있고. 못먹어본지 오래 됐는데, 저걸로 해볼까.


"나는 엘븐 밀크쉐이크로 할게. 미디엄 사이즈로."


"알겠습니다. 옆에 분도 같은 걸로 드릴까요?"


미호는 손가락으로 메뉴판 한 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는 미호 옆에 가까이 붙어 손가락이 어딜 향하는 지 자세히 보려고 애썼다.


"어디... 다크엘븐 밀크쉐이크? 저거 맞아?"


손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으로 보니 저게 초코맛인가 보다. 네 입맛은 진짜 한결같구나.


"아, 네. 엘븐 밀크쉐이크와 다크엘븐 밀크쉐이크요. 주문 받았습니다. 편한 자리에 앉아 기다려주세요."


계산하고 난 뒤 적당히 창가쪽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가게 안을 슥 둘러봤는데, 이쪽을 힐끔대던 애들이 눈을 마주치자 안그런척 고개를 돌렸다. 오르카호의 단 하나뿐인 마리오네트라 그런지 구경거리가 되는 건 아직 어쩔 수 없는 건가. 


장화는 음료 서빙하면서 눈만 돌려 우릴 째려보고 있었지만 보는 눈이 많아서 그런지 더 시비 걸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일단 사이좋게 9시 스프리건 뉴스에 나오는 꼴은 면했구만. 대걸래질 중인 네레이드는 신기하단 눈으로 대놓고 쳐다보고있고.


그리고 미호는 할 일이 없어서인지 내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있다. 너도 주변 좀 구경하고 그래라 좀.


"...실내에선 그거 좀 벗지?"


미호는 말없이 고글을 벗어 탁자에 놓고 계속 쳐다봤다. 나는 어색하게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방주엔 오르카호 바이오로이드 말고도 여기서 키우는 동물 같은 게 돌아다녀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저기 언덕 위에 독수리같이 생긴 거대 로봇도 보이는 거 같은데, 혹시 페레그리누스인가.


"으응? 어딜 보고있는거에요 손님? 손님한텐 저희 카페 제복의 자극이 너무 강했나봐요? 꺄하핫!"


반대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테티스가 얄미운 웃음을 지으며 쟁반에서 음료를 내려놓고 있었다. 입 놀리는 거랑은 별개로 목 아래로는 착실하게 일하고 있구만.


"어 그래그래, 잘 마실게. 고마워."


"뭐에요, 반응은 그게 끝? 재미없어~"


건성으로 대꾸하자 흥미가 식은건지 아님 그냥 바빠서인지 테티스는 혀를 삐쭉 내밀며 자리를 떠났다. 금방 끝나서 다행이긴 한데, 이래서 여기 오기 싫었던 거다. 저런 장난은 나 말고 사령관한테나 치지. 왜 나한테 그러는거야 곤란해지게.


음료도 받았으니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나는 앞을 보고선 선 것도 앉은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멈칫했다. 마주편에 앉아있는 미호는 일어설 생각은 커녕 초코 밀크쉐이크를 제 앞으로 가져왔다. ...명백히 여기서 먹고 가겠다는 의사표현이었다.


"아니 미호야, 가져가서 먹자니까?"


미호는 내 말을 무시한 채로 초코 밀크쉐이크에 꽃힌 빨대를 입에 물고 쪼옥 빨아들였다.


"미호야?"


미호는 입 안이 가득 찼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상태였다. 아니, 원래부터 말을 못하긴 했지. 내가 그냥 일어서서 나간다면 알아서 쫄래쫄래 따라나올 것 같기는 하지만...


'꿀걱' 입안에 든 밀크쉐이크를 삼킨 미호가 입맛을 다시더니 다시 빨대를 물었다.



...나는 못이기는 척 도로 자리에 앉아 내 몫의 밀크쉐이크를 내 앞으로 당겼다. 그냥 빨리 먹고 나가야지.


마셔보니 이 밀크쉐이크 바닐라맛이 아니라 우유맛이었다. 기대한 것보다 밍밍하지만... 이것도 나름 맛있긴 하네. 먹다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문득 앞을 보니 미호가 먹고있는 초코 밀크쉐이크가 보였다.


"그건 맛있냐."


그러자 미호는 입에서 빨대를 빼고 초코 밀크쉐이크를 내 쪽으로 슬쩍 내밀었다. ...뭔데, 무슨 의미인데? 직접 먹어보라고?


"...아니 됐어, 너 먹어 그냥."


미호는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손가락으로 내 밀크쉐이크를 가리켰다. 그러니까 이번에 하고자 하는 말은...


"뭐, 내 거 먹어보고 싶다고?"


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잠시 미호를 마주보다가 내 밀크쉐이크를 미호 쪽으로 밀었다.


"...한 입만 먹어."


미호가 내 밀크쉐이크를 받았다. 아 잠깐만, 저거 내가 쓰던 빨대인데. 빨대 하나 더 갖다달라고 종업원을 부르려했으나 하필이면 당장 보인 게 장화밖에 없었고, 미호한테 잠깐 기다리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내 눈에 들어온건 이미 빨대를 입에 문 채 밀크쉐이크를 마시고있는 미호의 얼굴이었다.


꿀꺽 삼킨 미호가 내 밀크쉐이크를 돌려줬다. 그러니까 이거... 마리오네트하고... 간접키...


주변에서 이쪽을 보는 눈빛이 한층 더 강해진 것 같았다. 슬쩍 옆을 보니 가까운 테이블에 앉아있던 스프리건이 내 시선을 눈치채고 씨익 웃었다. 그 와중에 스프리건이 들고있는 오르카폰의 카메라 렌즈는 이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같이 앉아있던 블러디팬서가 꿀밤을 먹이며 뭔가 주의를 줬다.


나는 빨대 끝을 닦고 먹을까 그냥 먹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이미 눈에 안띄는 건 글렀으니 생각하는 걸 그만두는 게 최선일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미호는 다시 자기 밀크쉐이크에 꽃혀있는 빨대를 입에 물었다. 날 쳐다보면서.


<12%>


그 날 오르카넷에 두번째 인간 관련 념글이 하나 더 올라갔다.


***


"페레그리누스. 무얼 그리 유심히 지켜보고 있느냐."


팔콘 폼으로 언덕 위에 자리잡아 어느 한 곳에 시선을 집중한 페레그리누스의 뒤로, 인간형 소체의 글라시아스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뭐긴, 그 마리오네트 데리고 다닌다던 두 번째 인간이지. 늘 오르카호에 틀어박혀있던 양반이 오늘은 왠일로 방주에 얼굴을 비췄지 뭡니까."


"...그가 나왔느냐?"


"지금 카페 호라이즌에 들어가있수다. 마침 창가쪽 자리에 앉아서 여기서도 보이네."


글라시아스는 페레그리누스의 옆에 서서 시각 센서를 초고배율로 맞췄다. 출처불명의 두 번째 인간과 마리오네트의 조합. 처음 그들이 들어왔을 때는 온갖 불길한 소문과 추측이 오갔으나, 테이블에 앉아 앞에 음료수를 하나씩 끼고 마시는 모습은 그런 소문과는 딴판이었다.


"난 저 마리오네트가 본격적으로 방주에 사보타주라도 하려고 모습을 드러낸 건가 했는데, 저 인간이랑 같이 산책코스 따라 걷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안하더구만요. 솔직히, 그냥 과묵하고 무뚝뚝한 괴짜 바이오로이드로밖에 안보입니다."


"그러느냐. 네가 지켜보고 내린 판단이라면 정확하겠지."


여지껏 마주쳐왔던 마리오네트들은 대화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했었기에, 싸우는 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런데 저기 있는 건, 마리오네트의 모습을 하고있다 한들 도무지 마리오네트로 보이지가 않았다.


"누님도 관심 있나본데, 가서 말이라도 걸어볼 생각이요? 스발바르 제도에서 찾은 마리오네트라면 십중팔구 우리랑 싸웠던 놈들 중의 생존자일텐데, 우릴 보고 무슨 반응을 보일 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원래는 그러려고 했다만, 지금은 둘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는 게 좋을 듯 하구나."


"허허 참. 아주 자연스럽게 저 녀석을 사람 취급하는구만요, 누님?"


"내 눈에는 '명령을 따르는 것 밖에 못하는 꼭두각시' 같은 건 어디에도 보이지가 않으니 말이다."


"하긴, 그건 그렇구만."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글라시아스가 다시 스피커를 열었다.


"신기한 광경이구나."


"동감이요. 대체 뭐가 저 마리오네트를 바꿔놓은 건지 원... 뭐, 제일 유력한 용의자라 하면 역시 그 두 번째 인간밖에 없죠."


"그래, 분명 그렇겠지. 하지만 어떻게 저 소녀가 변한건지 보다는, 앞으로 또 어떻게 변할 지가 더 궁금하지 않느냐?"


페레그리누스가 글라시아스를 쳐다보며 새처럼 고개를 까딱했다. 글라시아스가 카페 유리창 너머의 두 번째 인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이어 말했다.


"그가 심은 씨앗이 무엇으로 자라날 지... 한번 지켜보고 싶구나."


"...확실히 그게 더 궁금하긴 하네요."


페레그리누스와 글라시아스의 감시아닌 감시는 두 번째 인간과 그의 마리오네트가 오르카호로 돌아갈 때까지 계속됐다.



참고로 닥터의 마리오네트 미호 검사결과는 사령관과 080 기관, 지휘관급 간부들에게만 공유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