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잠에서 눈을 뜬 그녀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몰랐다. 다만 일어났을 때 가장 보기 싫은 것이 눈앞에 있어 다시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장시간의 수면에 의한 사망으로 수척해져 있는 인간의 시체, 그녀의 주인이었다.

넓은 방공호에 시체와 반쯤 시체 같은 자신,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3년 전 철충에 의한 습격이 시작되었을 때 그녀의 주인은 거대 기업의 임원으로서 당연히 이 전쟁에서 다시 한 번 인류가 승리할 것이고, 그로인해 더 부자가 될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철충들은 일주일도 안 되어 그가 살던 도시 까지 밀려들어왔고, 주인은 몇 년 전에 구입해둔 깊은 방공호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의 호위를 맡은 게 지금 눈물도 말라버려 시체처럼 눈을 감고 있는 삼안 산업의 블랙 리리스였다. 

 

그녀의 마음은 헌신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주인을 지키기 위해 폭발 속으로 망설임 없이 몸을 던질 수 있었으며 날아오는 총탄과 칼을 몸으로 막을 만큼 충직했다. 주인 또한 그런 그녀를 마음에 들어 했고 그녀를 귀엽게 바라보았다. 무엇보다 그녀는 마음 속 깊이 자신의 주인을 사랑하고 있었다. 

 

이 생산된 지 3년도 되지 않은 순진한 존재에게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정말 마음 깊이 주인을 사랑하고 있는지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주인의 명령을 받았고 자신이 주인과 단 둘이 방공호로 들어간다는 것, 그것이 그녀에게는 무엇보다 행복한 일이었다.

 

지하 깊숙이 지어진 방공호는 다행히 철충의 눈을 피해간 듯싶었다. 그녀는 방공호에서 소중한 주인님의 수발을 들며 그를 위해 통조림을 까서 먹을 만하게 만들고 정수 장치를 돌렸으며 그를 즐겁게 할 만한 일은 모두 다 했다. 하지만 행복은 얼마 가지 않았다. 

 

라디오를 비롯해 바깥을 연결해 주는 모든 것이 끊겨버렸으며 주인은 점점 미쳐가기 시작했다. 그는 리리스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자신의 비관적인 처지에 대한 울분을 풀었지만 그때도 그녀는 그를 더욱 더 사랑하고 이해주었다. ‘주인님께서는 지금 아프신 거야. 내가 받아드리고 나중에 바깥에 나가 좋은 의사 선생님에게 치료를 받으셔야 해.’ 라고.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그녀에게 울분을 풀지도 않고 밥도 먹지 않으며 점점 잠만 자기만 했다. 그리고 불안에 떠는 리리스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 자신이 죽으면 여길 나가 어떻게든 살아남아 새로운 좋은 주인을 찾으라고, 그에게는 귀여운 자신의 경호원에게 남기는 마지막 선물이었으나, 리리스에게는 비수가 되어 꽂혔다. 주인님이 죽는다고? 주인님 말고 새로운 주인을 찾아?

 

그때 당시에는 주인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했다. 그녀의 주인은 곧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좌절에 빠졌다. 어떠한 강력한 폭탄에서도, 아무리 빠른 총알이 날아와도 주인님의 목숨을 지켜줄 수 있다고 자부한 그녀였다. 하지만 그를 죽인 건 결국 그녀가 손댈 수도 막을 수도 없는 길고 긴 잠이었고 결국에는 영원한 잠에 빠져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녀의 심장에 꽂힌 비수는 다시 한 번 비틀어 꽂혔다. 마지막 명령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애수의 파도가 그 명령을 쓸고 지나가 버렸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수척해질 때까지 울었다. 비단결 같은 머리칼은 모래처럼 푸석해졌고 살이 올라 그녀의 주인이 귀엽게 꼬집었던 볼은 푹 꺼져버렸다. 그리고 그런 망령 같은 모습이 되어서야 다시 마지막 명령이 떠올랐다. 그녀는 처음에 죄책감으로 도망치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권총으로 머리를 날려버리려 했지만 그것 때문에 그녀의 손은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새로운 좋은 주인을 찾는 것, 이제 그것이 그녀의 삶의 원동력이자 가장 강력한 구속구가 될 터였다. 비척거리며 일어난 그녀는 먼저 통조림을 비틀어 열었다. 그리고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꾸역꾸역 입에 쑤셔 넣었다. 지상의 자매들처럼 죽음으로 도망치지 못하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주인에게 속죄하기 위해 마지막 명령을 수행하는 것뿐이었다.

 

커다란 생존용 배낭을 꺼내어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챙긴 건 자신의 주인을 추억할만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너무 소중하지도 너무 크지도 않은 것이어야 했다. 너무 좋아했던 것을 가져가면 별로 안 좋아하실 것이라 생각했고 크기가 큰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고민 끝에 그녀는 그가 평소 즐겨 쓰던 금도금 라이터를 챙겼다. 아무 무늬도 없이 금만 도금된 구식 지포라이터였다. 그 다음으로는 자신의 머리를 날리려고 했던 AP2090 Mamba Pistol 두 정과 탄약을 다른 가방에 따로 잔뜩 챙겼다. 생존용 배낭에는 구급품과 무게 대비 칼로리가 높은 비상식량 그리고 정수 알약과 수통을 챙겨 쓸리지 않게 등에 단단히 고정했다. 

 

방공호를 나서기 전 그녀는 주인의 시체를 깨끗하게 빨아 말린 옷으로 갈아입혔고 보송보송한 이불로 덮어두기 전 라이터를 손에 쥐었다. 그녀는 무서웠다. 누를 길 없는 두려움이 절로 솟아났다. 바깥의 철충들이 무서운 게 아니었다. 주인이 없는 세상이 무서웠다. 그녀는 얼굴을 주인의 얼굴에 가까이 가져갔다. 하지만 입술로 향한 것은 아니었다. 죽은 주인은 그녀의 이마에 키스하였고 리리스는 마지막 눈물과 함께 중얼거렸다.

 

“나쁜 리리스를 지켜주세요. 주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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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써보는거라 설정오류가 많을거 같다. 댓글로 지적해주면 달게 받음. 맞춤법도 마찬가지.

아포칼립스 월드를 살아가며 성장해나가는 리리스의 이야기가 될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