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두 번째 인간과 그의 마리오네트가 오르카호에 들어온 지 2주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닥터의 부름을 받아 연구실에 방문한 사령관은 한 화면을 유심히 보면서 닥터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이게 처음 마리오네트의 메모리 모듈을 스캔했을 때의 기록이야. 전체 데이터 중 해독할 수 없는 부분이 5%지."


닥터는 패널을 조작해 다음 화면으로 넘겼다.


"이건 저번주에 검사한 기록인데, 해독 불가능한 부분이 10%로 늘어났어. 그리고 이게..."


화면에 띄워진 내용이 한번 더 바뀌었다.


"이게 오늘 검사한 기록이야."


"해독할 수 없는 데이터가... 25%로 늘어났군."


"그것도 단순히 새 데이터가 추가된 게 아냐. 기존의 데이터를 덮어씌우면서 두뇌 속에서 차지하는 영역을 확장해나가고 있어."


"뇌 속에 나노머신이나 그런 뭔가가 들어있는 건가? 철충이 AGS 코어 내부에 기생해 안에서부터 감염시키는 것처럼?"


닥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머리뿐만 아니라 전신을 스캔해봤지만 그런 건 흔적조차 없었어. 이상한 건 그 뿐만이 아니야. 마리오네트의 신체도 내부에서부터 변하고 있어. 

일반적인 마리오네트의 수명을 고려해보면 그 마리오네트는 이미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아. 그런데 내부 장기가 과사하긴 커녕 매우 건강해. 오히려 신체 능력이 향상됐어. 오리진더스트 강화시술이나 코어링크를 한 것도 아닌데도 말이야. 덕분에 예상 수명이 대폭으로 늘어났어."


"어떻게 그게 가능한거지?"


"모르지! 과학적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현상이야. 

그렇다고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진화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야. 어떤 면에선 과거에 비해 효율성이 떨어졌거든. 관찰한 바에 의하면, 마리오네트의 식사량과 수면시간이 처음 들어왔을 때에 비해 현저히 늘어났어. 딱히 에너지 소비할 일도 없는데 말이야."


"마리오네트가... 바이오로이드가 되어가고 있다는 거야?"


사령관이 넌지시 던진 물음에 닥터는 침묵으로 답했다. 사령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마리오네트의 뇌 속에서 자라고 있는 데이터가 100%가 되면, 무슨 일이 생기는 거지?"


"...무엇 하나 확답을 내릴 수가 없어 오빠. 전례가 없거든. 하지만 외부에서 관찰한 바에 의하면, 마리오네트에게 자아가 생기기 시작한 건 거의 확실해."


"오르카호에 위협이 될 가능성은?"


"현재까지 보여준 모습에서 더 나아진다고 가정한다면 한없이 낮기는 해. 그래서 구속하지 않고 방관하는 거고."


사령관은 턱을 짚었다.


"위험이 될 것 같지는 않다, 라... 일단은 안심해도 될 것 같네 그럼."


"응, 그렇지."


"두 번째 인간을 부사령관으로 임명한다고 해도 이걸 빌미삼아 반발할 일도 없겠지?"


닥터의 고개가 슬쩍 사령관 쪽으로 돌아갔다.


"그건... 잘 안될 것 같은데..."


***


"안됩니다 각하! 너무 섣부른 판단입니다!"


"아직 그 인간에 대해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남아있소. 그런 수상쩍은 인간에게 부사령관이라는 자리를 준다는 건..."


"얘들아, 제발 좀... 벌써 한 달이 다되어가는데 언제까지 의심할거야? 내가 봤을 땐 그리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던데."


오르카호의 회의실. 사령관의 입에서 두 번째 인간을 부사령관으로 삼자는 안건이 나오자마자 지휘관들은 강한 우려를 표하며 반대표를 던졌다.


"그렇다 하더라도, 전시상황에 군권이 두 개로 갈라지는 건 혼란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부사령관이라니까, 사령관이 아니라. 너희들의 사령관은 나고, 명령권자도 계속 나야. 혼란스러울 게 뭐있어? 그리고, 전시상황이니까 더더욱 일손을 늘려야지. 안그래도 펙스나 철충에 비해 약소세력인 판국인데. 언젠가 스카이 나이츠나 아머드 메이든의 지휘관이 들어와도 지휘관 늘어나면 혼란스러워질 거라면서 반대할거야?"


"그건 완전히 다르지! 능력과 충성심이 보증된 바이오로이드와는 달리 그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인간이잖아! 그가 부리는 마리오네트도 마찬가지고."


"메이, 그 마리오네트는 적이 아니라니까. 자료 봤잖아."


"현재로선 그것도 추측일 뿐이오.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그 출처불명의 데이터가 100%가 되는 순간 델타의 스파이로 각성할지도 모르는 일이지."


마리와 메이, 용은 끝까지 반대했다. 단순히 그 인간이 음흉한 속내를 감추고 있지 않을까 정도의 의심 때문이 아니었다. 어째서 그 마리오네트는 일면식도 없을 터인 그 인간을 따르는가, 도대체 무슨 수를 써서 그 마리오네트를 변화하게 만든건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계속 벌이니 지휘관들은 의심과 경계를 거둘 수가 없었다. 그러나,


"왜, 괜찮은 생각인 거 같은데. 한 번 맡겨보지? 부족한 부분은 훈련시키면 될테고. 애초에, 언제까지 날백수로 냅둘 생각이야?"


레오나가 한 말에 회의실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그녀는 저번 회의때만 해도 신중파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정적을 깬 건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은 아스널이었다. 


"자네가 찬성표를 던질 줄은 몰랐군. 분명 그 인간을 경계하는 쪽 아니었나?"


"그랬었지. 하지만 실제로 그간 아무런 사고도 안쳤잖아? 의심받을 짓을 하지 않아서 더 의심스럽다고 하는 것도 한두번이지, 언제까지 붙잡고 늘어지려고?"


레오나는 두 번째 인간이 알비스를 비롯한 어린아이들을 건드리지도 위협하지도 않고 어울려준 걸 본 뒤로 그에 대한 경계심이 많이 누그러졌었다.


그렇다해도 과반수가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전했다. 알래스카에서 장기임무중인 라비아타와 칸이 이 자리에 있었어도 결과가 바뀌진 않았을 것이었다. 사령관은 어쩔 수 없이 한 발 물러섰다.


"일단 넌지시 제의 정도는 해보죠. 그가 권력을 눈 앞에 두고 어떻게 반응할지 보는 것도 그를 판가름하는 방법 중 하나니까요."


알파가 그리 말하며 읽고있던 파일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사령관은 잠시 텀을 두고 대답했다.


"알았어. 그 사람을 부사령관으로 만드는 건... 미루도록 할게. 하지만 생체재건시술은 더 안미룰거야. 이의 없지?"


"없습니다, 각하."


"좋아. 닥터한텐 내가 얘기해놓을게. 그럼..."


회의가 끝나고, 사령관을 비롯한 지휘관들은 회의실을 떠나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로 돌아갔다.


'부사령관직이라니... 그 인간에게...'


그러나 단 한 명, 심란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한 홍련은 바로 몽구스 팀의 숙소로 가지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홍련은 평소엔 이성적이고 냉철한 지휘관이더라도 자신의 가족과 관련되면 감정적으로 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탓에 자신의 딸과도 같은, 미호를 쏙 빼닮은 마리오네트를 부하로 부리는 두 번째 인간에게 자꾸 언짢은 감정이 생겨나기 일쑤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령관이 동성 친구가 생긴 탓에 너무 들떠 성급한 결정을 내린 것만 같았다.


홍련은 머리나 좀 식힐 생각으로 오르카 카페에 들어갔다. 오르카 카페는 기억의 방주에 있는 카페에 비해 사람이 적어 조용했기 때문이었다. 주문한 아이스커피를 받고 자리에 앉아 마시던 중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오더니, 자신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왜이리 죽상이야 언니?"


홍련은 슬쩍 고개를 들어 자신을 언니라 부른 이와 눈을 마주쳤다.


"아, 장화... 그냥 좀, 심란한 일이 있네요."


"흠."


장화는 휙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나더니, 잠시 후 제 몫의 아이스커피를 들고 홍련과 합석했다.


"그래서, 다른 몽구스 애들한텐 그 얼굴 보여줄 수가 없어서 혼자 여기 와서 끙끙대고 있는 거고?"


"네, 그렇죠 뭐... 그나저나 당신은 지금 알바하고 있을 시간 아니었나요?"


알바하는 도중에 온 거라기엔, 지금 장화가 입고있는 옷은 카페 호라이즌의 제복이 아닌 평소 그녀가 입고다니던 사복이었다.


"휴가냈어. 요즘은 좀 카페에서 떨어지고 싶어서."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그 인간이 카페에 얼굴 비추기 시작했거든."


홍련은 장화가 말한 '그 인간'이 사령관을 뜻하는 게 아니란 것 쯤은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그 인간이... 무슨 짓이라도 한 건가요?"


"...딱히... 별로 얘기하고 싶지는 않네."


그 인간이 사랑하는 사령관의 자리를 위협하지는 않을까 의심스러운 것도 있지만, 사령관한테 보여주기 위해 큰맘먹고 입은 비키니☆메이드★장화냥이 차림을 의도치않게 그 인간한테 보여지게 된 탓에 최근들어 괜히 싫은 감정이 더 커졌다. 


물론 두 번째 인간이 잘못한 건 아닌지라 대놓고 불만을 표출할 수는 없었다. 허나 그녀가 말을 아낀 탓인지, 홍련은 그 인간이 장화에게까지 부당하게 손을 댄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적어도, 자신과 같이 그를 경계하는 부류인 건 확실했다.


"그래서, 언니는 뭔 일 있었던 건데? 누가 뭐라고 했어?"


홍련은 눈만 움직여 주변을 훑어봤다. 카운터의 아우로라가 이쪽을 신경쓰지 않고 있다는 걸 확인한 그녀는 장화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다.


"두 번째 인간이... 조만간 이곳의 부사령관이 되게 생겼습니다."


장화의 눈동자가 흠칫 떨리더니, 이내 눈이 가늘어졌다.


"...자세히 말해봐."


***


닥터한테 불려서 연구실에 가보니 드디어 내 생체재건 허가가 떨어졌다고 한다. 참 오래도 걸렸다. 그래도 이젠 지휘관들 사이에서도 내 의심이 풀렸다고 봐도 되는거겠지? 그보다 이번에도 미호 관련해서 얘기하려는 줄 알고 미호도 데려왔는데, 데리고 올 필요 없었네.


"이게 바로 생체재건장치야. 이것만 쓰면 둘째 오빠도 휩노스 병에 면역인 몸을 가질 수 있다, 이 말이지."


닥터가 보여준 건 사람 한 명은 충분히 들어갈 정도의 유리 원통이 붙어있는 기계장치였다. 뭔가 바이오로이드 제조기 비슷하게 생겼네.


"이 안에 들어가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생기는 거지? 뇌를 꺼내서 새 몸에 옮겨담는다거나, 뭐 그런거야?"


"비슷해. 이 안에 들어가면 먼저 전신마취부터 하고, 안에 배양액이 차올라서 오빠 몸을 완전히 담구고, 그 다음엔 오빠의 두뇌를 포함한 중추신경계만 제외하고 몸을 전부 세포단위로 분해할거야."


"뭣."


"그 다음엔 오빠의 신경계를 기반삼아 그 위에 새로운 몸을 만들어 씌우는 거지. 몸 만드는 건 바이오로이드 제조 과정이랑 비슷해."


...이거 정말 안전한거 맞나? 하는 눈빛으로 닥터를 쳐다보자 닥터는 그런 반응도 이해한다고 했다.


"걱정마. 실제로 써본건 딱 한 번 뿐이긴 하지만 결과적으론 우리 오빠도 이걸로 무사히 새 몸을 얻었고, 기계 자체에 대한 분석도 진작에 끝내놨으니까."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거지?"


"그럴 일은 없어. 정비점검도 완벽히 끝내놨고, 설령 오르카호에 정전이 난다 하더라도 이 장치엔 별도의 발전기가 붙어있어서 안전해. 나도 계속 모니터링할거고. 물론 누가 시술 도중에 장치를 때려부순다면 죽겠지만, 그건 무슨 수술이든 마찬가지지?"


"그건, 그렇지만... 쩝, 별 수 없나."


몸을 갈아끼운다는 행위에 거부감이 들긴 하지만 안그러면 평생 오리진더스트 조금씩 투여하는 임시조치로 연명해야 하니까. 별의 아이라도 멸종시키지 않는 이상.


"알았어. 지금 바로 시작하는 거야?"


"응. 이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안에 들어가서 누우면 돼."


"아, 옷 입고 들어가도 되는거야?"


"원랜 다 벗고 들어가야 하는데, 둘째 오빠가 부끄러워 할까봐 해주는 소소한 배려일 뿐이야. 어차피 옷도 다 분해되거든. 나올 때는 알몸일 테니까 알아둬."


"...그래, 말해줘서 참 고맙다."


나는 탈의실에 따라들어오려는 미호를 제지한 뒤 안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귀중품은 닥터 쪽에서 맡아준다는 모양이지만, 내 원래 폰 만큼은 맡기기가 좀 그렇다. 라오랑 관련된 데이터는 싹 백지화됐지만, 만약이란 게 있잖아. 또 폰을 조사했는데 라오 앱을 복원하는 데에 성공하기라도 했다간 진짜 곤란해진다. 방 안에 두고 올 걸 그랬나. 이걸 둘 만한 데가...


나는 흘깃 닥터 쪽을 봤다. 닥터는 생체재건장치를 세팅하는 듯한 작업을 하느라 이쪽을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나는 미호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한 뒤 내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중요한 거니까, 잃어버리지 말고 잘 간수해."


미호는 말없이 손을 내밀어 폰을 받고는, 텅 빈 탄입대에 집어넣었다. 아직도 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건지 알 수가 없어서 불안한 감이 있긴 하지만, 결국 믿을 수 있는 게 너밖에 없구나. 이내 준비가 끝난 닥터가 나를 불렀고, 나는 그리로 걸어가려다 잠시 발을 멈추고 미호를 돌아봤다.


"내가 자고 일어날 동안 사고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야 한다?"


미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30%>


***


장화는 두 번째 인간을 신뢰하지 않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를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탓에, 윗선에서 그를 차기 부사령관으로 염두해두고 있다는 정보는 그녀에게 있어 굉장히 탐탁치 않은 소식이었다. 그가 부사령관이 됐다간, 사령관의 자리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더 커지는 것이 아닌가?


"부사령관이라고...? 웃기지 마... 웃기지 말라고...!"


장화는 자신의 무장을 갖춘 채로 오르카호 복도를 성큼성큼 걷고있었고, 천아는 곧장 그녀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야 야, 뭐하려고? 무기까지 챙기고서는. 진짜로 하게?"


"죽일거야... 사령관한테 손 대기 전에 죽여버리면 되겠지...!"


"와, 진짜네 이거. 눈 돌아간 거 봐라. 뭐, 재밌어보이니 말리지는 않겠지만."


겨우겨우 찾아낸 자신의 보금자리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장화의 시야를 흐리게 만들었다. 애초에 장화는 테러 목적으로 제조되어 살인에 대한 제약도 없는데다, 두 번째 인간이 생체재건시술 중이라는 건 그를 죽이기에 최적의 타이밍이란 뜻이었다.


천아는 장화보다는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한 편이었으나, 사실 그녀 역시 장화와 같은 이유로 두 번째 인간을 안좋게 보고 있었다. 천아는 장화가 그를 죽이지는 않게 말리되 적당히 겁 좀 주면서 재미나 좀 볼 생각을 하며 킥킥댔다. 그녀는 두 번째 인간이 중요한 수술 중이라 저항할 수도 없는 상태란 건 듣지 못한 상태였었다.


***


오르카호의 연구실. 

두 번째 인간의 생체재건시술은 순조롭게 진행되어갔다. 어차피 장치가 다 알아서 하는 과정인지라 닥터는 혹시모를 사고를 대비해 자리를 지키고만 있으면 됐었다. 허나 그거랑은 별개로, 닥터는 마리오네트와 한 공간에 있는게 은근, 아니 상당히 불편했다. 몇 시간 째 아무것도 안하고 한 자리에 귀신처럼 서있으니 저게 정말 바이오로이드가 되어가는 중인 게 맞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새삼 불평불만 없이 저런 룸메이트랑 2주째 같이 살고있는 두 번째 인간이 다시 보였다.


마리오네트는 고개를 살짝 내려 생체재건장치 안에서 새 골격계가 형성되어가는 중인 두 번째 인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태껏 모은 관찰기록에 의하면 마리오네트가 위험이 되진 않을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었다.


그 순간, 마리오네트가 고개를 치켜들자 닥터는 움찔 놀랐다. 마리오네트는 몸을 돌려 연구실 문 쪽으로 걸어갔다.


"어, 어디 가는거야?"


마리오네트가 대답을 못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무심코 물었다. 마리오네트는 닥터가 예상한 대로 그녀의 질문을 무시한 채 문을 열고 나갔다.


"...화장실인가?"


닥터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태블릿에 감시카메라 화면을 띄웠다. 화면은 연구실 앞 복도를 실시간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다른 감시카메라 화면으로 돌릴 필요도 없었다. 마리오네트는 멀리 가지 않고 연구실 문 앞에 서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뭐야? 이번엔 또 뭐하는 거지?"


닥터가 마리오네트가 보인 돌발행위에 대한 원인을 찾은 건 잠시 후의 일이었다.


***


두 번째 인간이 있을 연구실의 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뜻밖의 상황을 마주하게 된 장화는 문으로부터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마리오네트 미호가 연구실 문 앞에 서있었다.


"뭐야, 할 말이라도 있어?"


"..."


마리오네트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자신을 응시할 뿐이었다.


저 마리오네트가 싸우지 못한다는 소문은 이미 퍼질대로 퍼진 지 오래였다. 무기를 압수당한 건 말할 것도 없고, 사격연습장에서도 0점을 기록한데다 이전에 장화와 천아가 시비를 걸었을 때도 아무런 반항도 못했었으니까. 천아는 우습다는 듯 혀를 낼름거리며 비웃었으나, 장화는 한껏 예민해진 탓인지 저번과는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번처럼 단순히 문 옆에 서서 주인이 나오기를 멍하니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었다. 명백하게 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자 장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까짓 게, 되다만 인형 주제에 나를 막겠다고?


"야... 당장 비켜."


"..."


불쾌했다. 모든 것이.


눈을 부릅 뜬 장화가 손을 펼쳐 손톱을 세우고 달려들었다. 금속 건틀렛의 손끝을 앞세워 마리오네트를 공격했으나, 마리오네트는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로 팔만 움직여 장화의 손을 쳐냈다. 공격하는 족족 막아내니 강화 와이어를 사출할 틈도 없었다.


짜증이 난 장화가 마리오네트의 얼굴을 노리고 공격하자 마리오네트는 역으로 장화의 손을 잡아채 옆으로 치웠다. 장화의 자세가 무너진 그 찰나에, 마리오네트가 장화의 목을 움켜잡아 들어올렸다. 손에 힘을 주자 장화는 곧장 숨을 쉴 수 없게 됐다.



"끅...!"


"뭐야!? 야, 야!"


천아가 나이프를 꺼내들고 난입하려하자 마리오네트는 천아가 서있는 쪽으로 장화를 던졌다. 제대로 낙법도 펼치지 못한 채 바닥에서 몇 바퀴 구른 장화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몸을 일으켰다.


"이 씨발년이...! 죽여버릴-"


이성을 잃은 장화가 코트 안지락에 손을 뻗었으나, 거기에 있어야 했을 수류탄이 어디에도 없었다. "야, 앞에!" 천아의 외침에 황급히 고개를 들자 이걸 찾냐는 듯 수류탄을 손에 든 마리오네트가 눈에 들어왔다. 그 짧은 순간안에 빼갔다는 사실에 놀랄 겨를도 없이, 마리오네트는 장화한테 수류탄을 휙 던졌다.


흠칫 놀란 장화가 뒷걸음질치다가 제 발치에 떨어져 데구르르 굴러온 수류탄에 시선을 고정했다. 안전핀이 뽑히지 않은 상태였다.


"...!!"


실수로 안 뽑은 게 아니다. 저 마리오네트는 자신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봐준거였다. 장화는 그 사실을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다. 나이프를 거둔 천아가 장화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야, 관두자... 니가 졌어."


"이씨...! 웃기지마! 아직 안 끝났-"


"븅신아! 더 소란피우면 사람들 몰려온다고! 너 진짜 여기서 쫓겨나고 싶어?"


빠득 이를 갈며 마리오네트를 노려보기를 잠시, 천아의 만류에 장화는 홱 수류탄을 챙겨들어 코트 안주머니에 수납하고는 씩씩대며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조용한 년이 화내면 더 무섭다더니..."


천아는 질렸다는 듯한 표정으로 마리오네트를 힐끗 쳐다보다 이내 장화를 따라 사라졌다. 복도가 고요해지고 나서야 마리오네트 미호는 문을 열고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


"정신이 들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날 내려다보는 닥터와 미호의 얼굴이었다. 벌써 끝난건가? 상체만 일으킨 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려 내 손을 바라봤다. 손을 쥐었다 펴기도 하고, 손바닥과 손등을 돌려보기도 했다.


"자, 이걸로 몸 좀 가려."


닥터가 환자용 가운을 건네줬다. 그제서야 내가 아무것도 안 걸치고 있다는 걸 깨달은 나는 허겁지겁 옷을 받아 걸치듯이 입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기분이 어때? 두통이나 어지럼증같은 증세 있어?"


"아니... 괜찮은 거 같아. ...쪽팔린 것만 빼고."


"푸핫, 이제와서 뭘. 우린 둘째 오빠 내장까지 다 구경했는데."


"말을 해도 꼭..."


문득 아까 옷 입으면서 봤던 내 몸이 생각난 나는 내 배를 탁탁 두드렸다. 뱃살 붙어있던 게 쏙 빠졌네. 건강한 신체 상태로 리셋된 건가. "자, 거울." 닥터가 거울을 들어 내 얼굴을 보여줬다.


"얼굴은 별로 바뀐 게 없네."


"새 몸도 둘째 오빠 유전자로 만든 거니까, 당연하지."


"그렇군... 뭐, 낯설지 않아서 좋긴 하다. 나 자는 동안 별 일 없었지?"


별 생각없이 던진 질문이었는데 미호야 늘 그렇듯이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닥터는 뭔가 할 말은 많이 있는데 참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뭐, 둘째 오빠가 신경쓸 일은 아니야. 일단 피곤할 테니 둘 다 이만 숙소로 돌아가서 쉬도록 해!"


어린애같은 모습이라도 080 기관의 일원이라는 건지, 순식간에 표정을 정리한 닥터가 태연한 척 손사래쳤다.


"아니, 딱히 피곤하진 않은..."


나하고 미호는 닥터한테 등을 떠밀리다시피 해서 연구실 밖으로 내보내졌다. 요즘들어 닥터가 나한테 숨기는 게 많은 것 같은데, 기분탓인가... 그래도 짐은 챙겼으니 옷은 방에 가서 갈아입어야겠군. 아 잠깐,


"내 폰..."


미호를 돌아보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탄입대에서 폰을 꺼내 건네줬다. 다행이다, 닥터한테 압수수색 당하거나 하지 않고 잘 지키고 있었구나. 폰을 받아서 켜보니 6시간은 족히 지나가있었다. 미호는 이번에도 6시간 내내 내 곁을 지켜주고 있었던 걸까. 나는 폰을 주머니에 넣으면서 시선을 미호에게로 돌렸다.


"고마워."


"..."


미호는 앞장서서 숙소 방향으로 걸어갔고, 나도 따라갔다. 그러고보니 얘는 그동안 늘 내 뒤를 묵묵히 따라오기만 했는데, 미호의 등을 보고 걷는 건 이번이 처음 아닌가? 아무래도 미호가 점점 능동적으로 변하는 것 같다.



누구는 작은 미호를 건드리면 ㅈ되는 거에요

아주 ㅈ되는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