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장화와 마리오네트 미호의 함내교전이 일어난 그 날 저녁, 오르카호의 함장실.


사령관을 마주보는 위치에 있는 소파에는 장화와 천아가 그의 눈치를 보며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이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제대로 고개를 들 수 있는 건 사령관 한 사람 뿐이었다.


"잠수함 안에서 폭탄을 터뜨리려 한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두 번째 인간을 공격하려 했다는 거야.

너희가 바이오로이드고 그가 인간이라서 이러는 게 아니야. 너흰 더이상 테러범이 아니라, 오르카 저항군의 일원이야. 그 사람과 마리오네트도 마찬가지고. 인간뿐만이 아니라, 오르카호 그 누구의 안전을 위협하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어. 내 말 잘 알아들었어?"


"응... 그, 미안해. 내가 경솔하게 행동해버려서..."


"사과해야할 대상은 내가 아니잖아."


"윽..."


장화는 고개를 푹 숙인채로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닥터가 보내준 영상 속의 살기등등한 모습은 이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래선 더 화낼수도 없군. 사령관은 작게 한숨지었다.


"장화, 천아. 너희는 숙소로 돌아가서 근신하도록 해. 당분간은 머리 좀 식혀. 카페엔 내가 얘기해놓을테니까."


"으, 응..."


"알았어.."


장화와 천아가 자리에서 일어서 함장실을 나서고, 잠시후 아르망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르망. 그 둘이 또 사고를 칠 가능성이 있을까?"


"폐하께서 직접 따끔하게 얘기하셨으니 일단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비록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는 건 아니지만, 폐하에게 밉보이는 것 만큼은 피하고 싶을테니까요."


"으음... 그 둘같은 과격파가 더 있을거라고 생각해?"


"바이오로이드는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니, 두 번째 인간님을 고깝게 보는 자들이 있다 하더라도 직접적인 위협을 가할 자는 더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마리오네트까지 공격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죠."


"그 사람을 부사령관 자리에 앉혀두면 안전해지겠지?"


"물롭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기에 그를 부사령관으로 즉위시키는 건 너무 노골적이죠. 폐하께서 그를 편애하신다는 인식을 줄 수 있습니다."


"장화와 천아한테?"


"그리고 두 번째 인간님이 부사령관의 자격이 있다고 납득하지 못한 지휘관 분들께도 말이죠."


감시카메라에 찍힌 그 영상은 닥터가 발빠르게 대외비로 부쳐둔 덕에 현재로서 그 사건에 대해 아는 건 사건의 당사자와 사령관을 비롯한 오르카호의 간부진 뿐이었다.


"끙, 그렇네... 말 나온 김에, 그 마리오네트 말인데... 싸울 수 있는 거였구나. 전혀 그런 모습을 보여주질 않았어서 무해할 줄 알았는데."


마리오네트 미호가 점차 감정을 깨우쳐가는 모습을 보이면서 오르카호 내의 마리오네트에 대한 시선 또한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좋은 마리오네트는 죽은 마리오네트 뿐'이라는 말의 단 하나뿐인 반증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시기였기에 사령관은 닥터가 보내준 영상을 확인했을 때 제법 놀랐었었다. 마리오네트가 오르카호에 들어온 이후로 무력을 행사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 변수는 예상한 범위 안이랍니다? 여태 저희가 봐왔다시피 마리오네트가 싸울 수 있다는 건 당연한 사실이었고, 그 마리오네트도 전투모듈을 분해하지 않고 남겨뒀었으니까요.

다만... 마리오네트가 장화를 죽이지 않고 제압했다는 건 다행인 거랑은 별개로 큰 변수네요. 적을 죽이지 않는다는 결정을 할 정도의 지능이 생겼다는 뜻이니까요. 그게 실제로 가능할 정도의 무력을 갖췄다는 것도 눈여겨볼만한 변수고요."


마리오네트가 한 행위의 옳고그름을 따지기에 앞서, 두 번째 인간을 따르고 그를 지키기 위해 자의로 무력을 사용했다는 건 상황에 따라 오르카호에 피해를 입힐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이번 사건은 장화가 선제공격한 것이기에 마리오네트에겐 책임을 묻지 않았지만, 그 마리오네트가 앞으로도 자기방어만 할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덕분에 지휘관들 사이에서도 마리오네트의 위험성에 대한 갑론을박이 오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마리오네트와는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니, 마리오네트가 이곳이 위험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안전한 환경을 조성하는 게 제일 평화적인 방법이겠군요."


"무슨 야생동물 다루는 것처럼... 뭐, 그건 그렇고. 부사령관 안건은 그 마리오네트에 대한 여론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려야겠네. 다음주면 되려나? 그 때 한 번 더 찔러봐야지."


"폐하. 다음주엔 아쿠아 랜드가 완공됩니다만."


"아쿠아 랜드?"


사령관이 눈을 살짝 크게 뜨고 끔뻑거렸다.


"벌써 그렇게 됐나?"


"그렇게 됐습니다. 다들 축제를 즐기는 동안 두 번째 인간님만 부사령관이 돼서 쉬지도 못하고 인수인계에, 즉위식에, 온갖 일거리까지 떠안게 되는 건 너무한 처사가 아닐까요?" 


"...아무래도 좀 더 미뤄야겠네."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폐하. 그런데, 그 사건에 대해선 두 번째 인간님께도 끝까지 숨기실 생각인가요?"


"음. 아니, 그 사람도 당사자인 만큼 알 필요가 있지. 장화한테 더 강한 처벌을 바란다거나 공론화를 주장한다면... 내가 한 번 말려봐야겠지만."


사실 이 사건을 숨긴 이유 중에는 마리오네트 말고도 이제 겨우 나아지려던 장화에 대한 평가가 급락할 것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그러면 우선 영상 공유하고... 얘기도 좀 나눠봐야겠네."


"내일 면담 일정을 잡을까요?"


"아니, 괜찮아. 내가 찾아갈테니 내일 내 일정만 비워둬. 사과해야 하는 입장인데 저쪽을 부를 수는 없지."


***


어제 내가 나도 모르게 죽을 뻔 했다는 사실은 하루가 지나고서야 알 수 있었다. 덕분에 장화에 대한 내 인식이 멘헤라 미소녀에서 정병싸패년으로 바뀌었다. 미호가 막아줬기에 천만다행이지. 


...그런데 어떻게 그게 가능했던 거지? 마리오네트가 동급의 바이오로이드보다 신체능력이 뛰어나다는 설정은 들었지만, 그렇다 해도 맨손으로 장화를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의 차이가 압도적이진 않을텐데.


그리고 또, 내가 피해자인데 왜 나한텐 한 발 늦게 알려주는건데? 닥터는 진작에 알고있었는데도 사령관이 내가 봐도 된다는 허가를 내리고 나서야 영상을 보내줬다. 내가 당일날 알면 안되는 이유라도 있나?


마음이 심란해진 탓에 나가지도 않고 방 안에서 미적거리고 있었는데 누군가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누구든 간에 돌아가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안에 있어? 나야, 사령관. 들어가도 될까?"


...차마 입구컷할 수가 없는 대상이었다. 여러가지 의미로. 

문을 열어주자 수행원 한 명 없이 혼자서 온 사령관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그냥 얘기나 좀 하려고. 어제의 그... 사건에 대해서. 보내준 영상은 봤어?"


"봤지... 들어와."


사령관을 들여보내고 문을 닫았다.


"실례할게. 마리오네트도 안녕."


"..."


눈길도 안주고 상큼하게 씹었다. 사령관은 대충 예상했던건지 별 말 없이 머쓱 웃었다. 그건 그렇고,


"전부터 느꼈던건데, 니들은 절대로 미호라고 안불러주는구나."


"...그야 미호가 아니니까. 저 마리오네트가 미호와 닮았다고 해서 미호가 되는 건 아니야."


딱 선을 긋는 모습에 괜히 빈정상했다. 물론 나도 머리로는 알고있지만, 가슴으로는... 다르게 느껴진단 말이지. 의자를 끌어다 앉은 사령관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아무튼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어제의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해 사과하려고 왔어."


그리고선 꾸벅 머리를 숙였다. 비록 앉은 채로지만. 명색이 이 집단의 최고사령관인데도 거리낌없이 머리를 숙이는 모습을 봐서 그런가, 약간 놀랐다.


"네가 그 정도로 위협받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어. 사전에 예방하지 못해서 미안해. 다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오르카호와 방주의 치안을 강화하도록 할게. 

장화와 천아는 내가 혼내뒀어. 지금은 근신중이야. 지은 죄질이 비해 처벌이 가볍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 아이들은 제대로 성장하질 못했거든. 아직 배워야할 게 많아. 그러니, 한번만 반성할 기회를 주지 않을래?"


요지는 장화한테 중징계를 내리고 싶진 않으니 이 정도로 넘어가달라는 거군.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일단 직접 피해입기 전에 미호가 역관광시키기도 하고, 사령관이 직접 찾아와서 머리까지 숙였으니... 이쯤에서 합의봐야 하나. 나는 잠시 머리를 긁적였다. 적어도 근신중이라면 당분간은 걔들이랑 마주칠 일 없겠네.


"알았어. 마음대로 해."


"...괜찮아?"


"이미 미호가 혼쭐을 내줬기도 하니 뭐... 대신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만 해줘. 그런데 미호 무기는 아직도 돌려줄 생각이 없는거야?"


"그건 좀 곤란한 게... 원래 함내에선 규정상 무기를 들고다니면 안돼. 허가받은 이들을 제외하면 임무 나갈때만 챙겨서 나가는거지. 그리고 마리오네트는 임무 나갈 일이 아예 없고."


"...장화는 뭔데 그럼?"


"장화는 숙소에 무기를 두고다녔다가 그 때 규정을 어기고 들고나온거야. 물론 지금은 압수했어. 설령 마리오네트의 총을 돌려준다 하더라도 방 안에 보관하는 것만 가능해."


"그럼 하다못해 호신용품이라도 지급해줘. 그 정도는 되잖아?"


"아니, 이 안에선 또 위험한 일이 없을테니까 그런 건..."


"니는 오르카호 안에서도 컴패니언이랑 가디언 시리즈한테 호위 받고 다니면서?"


"윽... 긍정적으로 검토해볼게. 크, 크흠! 그보다도! 아쿠아 랜드 소식 들었어? 다음주에 완공될 예정이야."


사령관이 되게 어색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렇지만 그냥 흘러넘길 수 없는 단어가 귀에 잡혔기에 따지진 않았다.


"아쿠아 랜드라고?"


"응. 네가 여기 오기 전부터 진행하던 프로젝트였지. 워터파크 뿐만 아니라 다양한 레저 시설을 갖추고 있어. 네 마리오네트는 아마 경험을 누적시킬수록 변하는 게 아닐까 생각되는데, 데려가서 다양한 경험을 시켜주도록 해. 즐거운 경험이 많을수록 더 밝아질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바이오로이드만 해도 똑같은 모델이라도 경험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니까."


워터파크 이벤트라, 벌써 그럴 때가 됐구나.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미호를 바라보면서 워터파크 이벤트에 나온 설들을 떠올렸다. 수영장 말고도 게임존에 푸드코트, 헬스장, 대욕탕, 마사지실... 내 기억력 아직 쓸만하군. 그럼 미호랑 같이 아쿠아 랜드... 데이트가 되는건가...?


"...재밌겠네."


진짜 미호가 아닌 마리오네트 미호지만, 나쁘진 않겠지.


***


함장실로 돌아온 사령관은 의자에 풀썩 앉아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바이오로이드인 장화와 천아에게 가벼운 처벌만 주겠다고 했는데도 노발대발하지 않은 걸 보면 역시 나쁜 사람은 아니다. 사령관은 이 일로 지휘관들이 그를 다시 보게 되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허나 그건 둘째치고, 그가 호신용품을 요청한 건 반대로 말하자면 오르카호의 치안을 믿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바깥도 아니고 저항군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오르카호 내에서 위험에 대비하도록 만들다니, 부끄러운 일이었다. 


'친구가 되고싶은데, 좀처럼 잘 안되네... 일단 호신용품을 달라는 요구 정도는 들어줘야겠지. 총이나 칼은 방어 목적에서 벗어난 흉기고, 전기충격기는... 그것도 위험할 것 같은데. 뭐가 적당할지는 리앤이랑 한번 얘기해봐야겠다.'


그 때, 사령관의 패널이 울렸다. 해안 경비를 맡고있는 머메이드로부터 들어온 긴급보고였다. 패널을 집어들어 통화 버튼을 누르자 화면에 엠피트리테의 얼굴이 떠올랐다.


"엠피, 무슨 일이야?"


"보고드립니다. 신원미상의 바이오로이드 한 명이 찾아와 합류를 요청했습니다."


"뭐?"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떠돌이 바이오로이드가 합류를 요청하는 건 흔한 일이었으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지금 오르카호는 비밀리에 스발바르 제도에 정박해있는데, 어떻게 여길 알고 찾아온 거란 말인가? 게다가 단신으로 북극해를 건너왔다고?


허나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어떻게가 아닌 누가 왔느냐는 것이었다.


"신원미상이라고?"


"예. 바이오로이드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지 않은 걸로 보아 불법제조 기종으로 보입니다."


"이름은 뭔데?"


"스스로를 바르그라고 밝혔습니다."


바르그라, 역시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었다.



그간 일상물스런 에피소드만 나왔었지만 슬슬 스토리물 궤도에 올릴 때가 됐지

워터파크 이벤트 이꾸욧


아 그리고 1화에서 역바니 이후 시점이라고 서술했던걸 데이트 공모전 이후 시점이라고 수정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