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일단 첫 번째 관문은 통과로군...'


이번에 오르카호에 새로 들어오게 된 엠프레시스 하운드의 처형자, 바르그. 물론 그녀가 델타가 보낸 스파이라는 건 이 글을 읽고있는 모두가 알고있을 사실이었다.


심문이 끝나고 승선이 허가된 그녀는 같은 부대 소속인 장화, 천아와 같은 숙소를 쓰게 되었다. 딱히 남들과 어울릴 생각은 없지만 스파이인걸 들키면 안되는 만큼 가능한 한 눈에 띄는 행동을 자제하고 조용히 지낼 생각이었다.


"야 신입! 돈 줄 테니까 매점가서 빵 사와!"


눈 앞에서 참치캔을 흔들며 밉살스럽게 웃는 천아를 보자마자 한껏 해이해진 기강을 바로잡고 싶어졌지만 눈을 지긋이 감고 마리아 리오보로스의 얼굴을 떠올리며 꾹 참았다.


"네놈도 손과 발이 달려있다면 직접 가서 사와라. 남한테 시키지 말고."


"풉, 얘 좀 봐. 친목활동인데 뭘 그리 진지빠냐? 그리고 갈 수 있으면 진작에 갔지. 우린 근신중이라 맘대로 못나간단 말이야."


"근신...?"


눈을 뜬 바르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문을 표했다.


"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다닌거냐?"


"그냥 두 번째 인간이랑 좀... 불화가 있었지. 장화가 그 인간한테 가서 시비걸려다가 역으로 걔 마리오네트한테 개털렸거든. 나는 뭐, 방관해서 공범으로 취급됐고."


"...뭐라고?"


"에이씨, 그 인형년만 아니었어도...! 하루동안 방 안에만 있었는데, 이제 충분한 거 아냐? 언제까지 근신하라고 날짜 정한것도 아니잖아!"


"븅신아, 눈치 챙겨! 최대한 반성하는 모습 보여야 한다고! 너 진짜 핫팩한테 버림받고 싶어?"


"윽..."


불만스럽게 혀를 찬 장화가 고개를 홱 돌렸다. 한편 바르그는 장화한텐 전혀 신경쓰지않고 질문을 던졌다.


"두 번째 인간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인간은 사령관 한 명만 있는게 아니었나? 거기다 마리오네트라고?"


"아, 넌 이제 들어와서 모르겠구나? 몇 주 전인가 그 인간이 새로 발견됐거든. 그놈 따까리인 마리오네트랑 함께."


"마리오네트는 분명 레모네이드 델타의 병사일 터, 어째서 그 인간을 따른다는 거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솔직히 우리가 봐도 의심스럽지, 근데 위에서 그 마리오네트는 적이 아니라고 하니까 별 수가 있나. 그 인간이 펙스의 간부라거나 그런 것도 아니라던데, 대체 뭔 수로 마리오네트를 부리는 건지 진짜 알 수가 없다니까?"


인간이 둘이나 있다는 건 델타의 정보망에도 잡히지 않은 소식이었다. 바르그는 천아와 장화를 통해 두 번째 인간에 대한 정보를 있는대로 모으고, 정리했다. 


델타가 내린 임무는 휩노스 병을 막은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이 오르카호에 있다는 인간을 생포하라는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그 사령관을 붙잡을 생각이었지만, 그 두 번째 인간도 얼마든지 사령관을 대체할 수 있었다. 결국 살아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든 상관없으니까. 오히려 철통같은 호위를 받고있을 오르카호 최고사령관보다 아무런 직위도 없는 식객 신세인 두 번째 인간이 더 잡기 수월할 거다.


문제는 이 두 명이 두 번째 인간을 공격하려고 들었다는 점이었다. 그 자가 엠프레시스 하운드를 전부 싸잡아서 경계한다면 그 소속인 바르그 본인 역시 경계받을 게 뻔했다. 접근하지 못하면 납치도 못한다.


사령관과 두 번째 인간 중 누굴 목표로 할 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지만, 만일을 대비해 두 번째 인간의 경계심을 풀 필요가 있었다. 장화와 천아가 저지른 일에 대해 사과하겠다고 하면 되겠지, 바르그는 속으로 그리 생각했다. 물론 진심으로 그 둘이 저지른 일에 대해 책임질 생각따윈 없지만, 지금은 저자세로 나갈 때다. 그 인간이 화풀이로 주먹을 휘두르거나 물건을 집어던진다 해도 어느 정도는 맞아줄 생각이었다.


이미 그 기증스런 레모네이드 델타한테도 고개를 숙인 몸이다. 여제님을,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 수모쯤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그는 어디서 찾을 수 있지?"


"뭐야, 관심 있어? 오늘은 이미 통금시간 지났어. 내일 가."


"상관없다. 어디로 가야 그를 볼 수 있는 건지나 말해라."


***


느닷없는 폰의 진동소리에 잠에서 깼다. 울린 건 오르카폰이 아니라 내 원래 폰이었다. 잠이 덜 깨 몽롱한 채로 폰을 집어들었는데 시야가 흐려 화면이 제대로 안보였다.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나서야 겨우 시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침 7시. 아직 알람이 울릴 시간이 아닌데. 내가 부스럭거리자 앉은 채로 자던 미호도 잠에서 깬 건지 천천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 미안... 깼어? 아직 일어날 시간 아니니까 계속 자도 돼."


미호는 내 말을 무시하고 날 멍하니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러려니 하며 폰의 잠금을 풀었다.


알림이 와있었다. 


내 뇌는 정보의 중요도를 정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모양인지 라오 캐릭터랑 스토리는 다 외워도 현실에서의 중요한 일 같은 건 종종 까먹기 일쑤였다. 그래서 그런 중요한 일정은 스마트폰 달력 앱에 기록해놓았었다. 당일이 되면 알림이 오면서 그 날 일정을 상기시켜 주었기에 참 편했다. 


이 날에 무슨 일정을 적어놨던 간에 지금이랑은 상관없는 일이지, 그렇게 생각하고선 뭐였는지 확인만 하고 도로 자려고 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아..."


달력에는 엄마 생일이라고 적혀있었다.


여지껏 잊고있었던, 잊고싶었던 잔인한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나는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어버렸고, 우리 부모님은 나를 잃어버렸다.


스무살 넘도록 어머니 생신도 못외워서 달력에 적어놓고 다녀야 하는 놈이었는데도 지극정성으로 아껴주고, 최선을 다해 키워주셨다. 이런 식으로 이별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받았던 사랑을 아직 충분히 돌려주지도 못했는데.


방 온도가 그리 낮은 것도 아닌데도 몸이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한참동안이나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러자 검게 물든 시야로 가족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이미 감은 눈을 더 꾸욱 감아도 그들의 얼굴은 사라지지 않았다.


더이상 볼 수 없는 얼굴들이었다. 만나고 싶다. 목소리만이라도 듣고싶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휴대폰엔 가족 모두의 전화번호가 저장돼있는데도, 전화조차 할 수 없다.


참 새삼스럽게도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 날 스발바르 제도 한복판에 떨어진 건 나 하나 뿐이라는 걸. 결국 이 세계에서 나는 혼자라는,


'턱'



손등에 느껴진 온기에 눈을 떴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미호가 내 손 위에 자기 손을 포개고 있었다. 늘 초점없이 흐리멍텅했던 두 눈동자는 나에게 똑바로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


"..."


말없이 시선을 교차하기를 잠시, 나는 숨을 고르다가 미호에게서 손을 빼고 얼굴을 쓸었다. 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폰을 도로 협탁에 올려놓고선 몸을 벽 쪽으로 돌려 누웠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졌다. 그래서 그러기로 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몸을 웅크렸다.






'툭 툭'


...어느새 도로 잠들었던 모양이다. 누군가 내 몸을 두들기자 의식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눈을 살며시 뜨자 내 위로 몸을 굽히고 있는 미호가 보였다. 미호의 마리카락이 내 얼굴에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뭐야 시발.


허리를 핀 미호가 시계를 가리켰다. 12시였다. ...뭐, 점심시간이라고? 그러고보니 오늘 아침도 걸렀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입에 넣고싶지 않았다.


"...난 입맛 없으니까 혼자 가서 먹고와."


"..."


미호는 말없이 문을 열고 나갔다. 방이 조용해지자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쿵 쿵 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또 잠에서 깼다. 망할, 이번엔 또 뭐야... 시계를 슬쩍 보니 아까로부터 30분 채 지나지 않았었다. 미호가 돌아온 건가? 방 비밀번호라도 까먹었나? 뭐하자는 거야 대체... 미적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줬다.


문 앞에 서있던 건 바르그였다.


"반갑-"


1초간의 대략적인 상황 판단이 끝나자 냉큼 문을 닫으려했으나 바르그가 문을 콱 붙잡고 버텼다. 손 찍히기 싫으면 놓으라고 할 수도 없었다. 얘가 나보다 힘이 쎘다.


"야, 손 떼...!"


"기다려라. 그냥 얘기나 하려고 온 거다."


"난 할 얘기 없어!"


"장화와 천아가 너한테 결례를 끼쳤다고 들었다. 엠프레시스 하운드의 일원으로서, 그들을 대신해 사과하려고 왔다."


"결례는 니가 지금 하고 있는 짓거리가 결례고!"


바르그가 입을 다물더니 갑자기 손을 놨다. 덕분에 문이 쾅 닫혀버렸다. 포기한건가 생각해던 차에 밖에서 다시 문을 두들겼다.


"불쾌하게 만들려던 생각은 아니었다. 나도 이제부턴 오르카호에서 살게 되었으니 앞으로 너하고도 자주 얼굴을 보게 될텐데, 엠프레시스 하운드 소속이라는 이유만으로 기피당하는 건 피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미리 그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 사과를 해두고 싶다."


말은 참 잘해요, 스파이로 들어온 주제에...! 나 납치하려고 각 재는 거 아냐? 분명 그렇겠지? 그렇지만 바르그는 워낙 신중한 성격이니 냅다 일을 벌이진 않을테고, 난 얘가 스파이란 걸 몰라야 하는데 너무 경계하면 그건 그거대로 이상해 보이나? ...제길. 사과든 뭐든 빨리 용건만 들어주고 돌려보내야겠다.


다시 문을 열자 아까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는 바르그와 눈이 마주쳤다.


"들어가도 되겠나?"


"...빨리 끝내."


"알았다. 실례하지."


바르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았다. 의자를 끌고오려하니 필요없다며 손을 젓길래 그냥 내가 앉았다.


"나를 보자마자 문을 닫으려한 걸 보면 나에 대해선 이미 들은 모양이군. 자잘한 소개는 생략하겠다."


...아직 안들었는데. 난 지금 바르그를 모르고있어야 하지 참. 너무 성급하게 행동했다. 다행히 바르그 빼면 아무도 안보고있었기는 하지만... 좀 조심해야지.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지. 어제 일어났다는 사건에 대해서는 들었다. 장화와 천아가 큰 사고를 친 모양이더군."


바르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허리를 직각으로 숙였다. 어제 사령관이 한 사과보다 더 정중한 태도였다. 표정은 전혀 아니었지만.


"엠프레시스 하운드의 일원으로서, 그 둘이 저지른 일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마. 두번 다시는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내가 둘을 철저히 교육시켜 놓겠다."


니가 제일 불미스러운 일을 저지를 예정이잖아요 이 예비배신자련아, 라고 말 할 수는 없어서 정정한 대답을 내보냈다.


"...어 그래, 알았어. 사과 받아줄게, 이만 가봐."


"아직도 화가 안풀렸나?"


"풀렸어, 풀렸다고. 어제 사령관이 와서 사과했기도 하고. 그러니까 좀 가, 더 얘기할 마음 없으니까! 하다못해 다른 날에 오던가, 왜 하필 오늘 찾아오는 건데?"


"오늘이... 무슨 날인가?"


아 시발 

욱해서 또 되는대로 지껄어버렸다


"...넌 몰라도 돼."


"오늘은 아무런 기념일도 아닌 걸로 알고있다만, 너에겐 무슨 특별한 날인가? 내가 실수로라도 결례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알려주지 않겠나?"


나는 잠시 바르그를 마주보다가,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 생신이다."


"...!!"


바르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제대로 사랑한다는 말도 못남긴 채 영영 볼 수 없게 됐지. 정신 없어서 신경 못쓰고 있었는데 오늘 달력을 보니... 그냥... 기분이 많이 착잡하더라."


"...그런가..."


바르그는 한참이나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유감이군."


"...그래."


너에겐 남일이 아니겠지. 마리아 리오보로스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일테니까. 물론 아는 척 하진 않고 말을 아꼈다. 그렇지만, 마음 속 응어리진 걸 입 밖으로 내고나니 꽉 막혀있던 속이 조금이나마 풀린 느낌이다.


바르그는 뭔가 더 말하려다 말고 또 보자는 말만 남긴 채 방에서 나갔다. 네 마음 속에서 떠오른 말들 중 해도 되는 건 무엇 하나 없을테지. 준비되지 않은 채로 부모와 헤어지게 된 것 뿐만 아니라 정체를 숨기고 들어와있다는 점도 일치해서인지, 괜히 동질감이 생겨났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말자.


자리에 멍하니 앉아있는데 다시 문이 열렸다. 바르그가 뭐 두고갔나 했더니, 들어온 건 미호였다.


"밥은-"


잘 먹고 왔냐, 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미호는 손에 종이백을 들고있었는데, 나를 지나쳐 탁자에 종이백을 내려놓고 거기서 음식이 담긴 플라스틱 용기를 두 개 꺼냈다.


"...포장해온거야?"


미호는 두 용기 중 하나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 

난 지금은 별로 먹고싶지 않았는데, 미호는 제 몫의 음식에 손도 대지 않고 나를 빤히 바라봤다. 내가 안먹으면 자기도 안먹겠다는 건가.


"...알았어. 식기 전에 먹자."


김서린 뚜껑을 열자 먹음직스러운 볶음밥이 보였다. 오르카호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미호와 같이 먹었던 그 볶음밥이었다. 내가 뚜껑을 딴 걸 확인하고서야 미호도 자기가 먹을 볶음밥을 꺼냈다.


문득 완전히 혼자인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뚜벅, 뚜벅. 

바르그는 한적한 복도를 거닐면서 방금 전까지 대면했던 그 인간과 나눈 얘기를 떠올렸다.


'어머니라...'


괜한 동질감을 느껴서일까, 순간 그 인간은 목표 후보에서 제외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직후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눈을 질끈 감았다.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거냐. 그 인간이 무슨 일을 겪었던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내가 신경써야 할 건 여제님 뿐이다. 여제님의 부활을 위해서라면 누구든 희생시키는 걸 마다해선 안된다. 다시 눈을 뜬 바르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뚝뚝한 표정으로 복도를 계속 걸었다.


'...그러고보니 마리오네트에 대해선 아무것도 못물어봤군.'


시간은 많다. 마리오네트에 대한 조사는 천천히 해도 될 것이다. 어차피 마리오네트 하나 쯤은 큰 위협도 아니니까.



TMI: 사실 오르카호 문은 자동문이라 안팎에서 문고리 잡고 힘겨루기 하는 묘사는 못 써야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