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뜸을 들인 베타는 여전히 이곳저곳에 물웅덩이가 남아 있는 카라카스의 전경을 돌아보았다. 깨진 창문으로부터 습한 밤바람이 물 냄새를 싣고 들어와 대통령궁의 중앙 계단을 휘감았다. 물기를 머금은 베타의 머릿결은 어느새 폭 가라앉아 있었다.


한밤중인데도 복구 작업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가로등 하나 없는 밤거리에서 토미 워커의 전조등이 드문드문 보였다. 마침, 불이 비추고 있는 곳에 페어리 시리즈 너댓이 있었다. 공원 한가운데에 있는 데스 스토커의 잔해를 치우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힘이 달려, 그저 흙탕물만 튀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까지 어둠 저편에 있던 램파트 한 기가 빛으로 걸어 들어왔다. 이들이 용을 쓰며 실랑이하는 것을 지켜보다 못해 다가온 것인지, 아니면 도시가 잠기기 전부터 습관적으로 돌던 순찰을 다니다가 우연히 길이 겹친 건지는 모를 노릇이었다.


옹기종기 모인 페어리 시리즈들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와 함께 베타의 마음도 절로 움츠러들었다.


아직 이 도시가 물에 잠기기 전, 베타의 머리카락이 도시 곳곳에 쳐진 거미줄처럼 드리워 있던 시절. 줄이 팽팽해지거나 심상찮은 진동이 느껴지는 곳에는 머지 않아 시티 가드가 들이닥쳤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 쳐져 있던 거미줄을 조금 건드려서였을까? 아니면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친절하게 인사를 나누었던 마리아 씨의 고발 때문일까? 알 방법은 없었다. 그저 달갑지 않은 시티가드의 심문과 더더욱 달갑지 않은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조심하면서도 이웃의 감시자가 되는 방법밖에 없었다. 


거미줄, 시티 가드, 서로에게 향하는 감시의 눈. 거미줄이 당겨지거나, 누군가의 고발이 들어오면, 그 곳으로 시티가드가 찾아간다. 카라카스가 돌아가는 이치였다. 카라카스에서 수십 년을 살아 온 주민이라면 시티가드를 보고 마음을 조일 수밖에 없었다.


얼어붙은 페어리 무리들 앞으로 램파트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램파트가 걸어가는 만큼, 페어리들은 뒷걸음질쳤다. 곧, 잔해 앞에 도달한 램파트가 멈췄다. 페어리들은 마치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처럼 치맛자락을 쥐며 긴장감에 숨을 삼켰다.


이내, 램파트는 잔해에 손을 짚고는 한 번 가볍게 밀었다. 꿈쩍도 않자, 들고 있던 방패를 지렛대 삼아 어깨를 맞대고 우직하게 힘을 넣기 시작했다. 잔해는 한 번 기우뚱 했으나 그뿐이었다. 땅에 단단하게 박힌 스토커의 다리가 살짝 뽑히며 흙에 젖은 끝이 드러났다.


모두가 주저하던 그때, 아쿠아가 먼저 나서서 램파트를 거들기 시작했다. 보호자로 보이는 다프네는 무심코 만류하려다가 손을 거뒀다. 팔을 걷어부치고, 고사리 같은 손이 흙투성이가 되는 것도 아랑곳않고, 밑둥을 껴안아 받치며 낑낑거렸다. 아쿠아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잔해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다프네가 합류해서 반대쪽 다리를 붙잡았다. 한두 번 힘을 넣었을까, 어느새 리제의 팔이 아쿠아가 붙잡고 있던 다리 위를 껴안고 있었다. 이어서 드리아드가 지렛대 삼은 램파트의 방패를 같이 밀어올리고 있었다.


점점 움직임의 폭이 커지던 데스 스토커의 잔해는, 두어 번 기우뚱하더니 맥없이 옆으로 넘어졌다. 더러운 물보라가 잔뜩 튀고, 그 밑에 깔려 있던 자그마한 화단이 드러났다. 이 난리통에도 용케 짓밟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우연히 그 위로 주저앉은 채로 기능정지한 스토커 덕분이었을까? 관리하던 화단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아쿠아의 눈이 반짝였다. 안도의 한숨을 쉰 드리아드는 허리를 쭉 펴곤 앞치마로 얼굴의 땀을 훔쳤지만, 이미 흙에 절어 있던 터라 도리어 더 더러워졌다. 다프네가 작게 입을 가리며 웃었다. 리제는 조용히 멀어지는 램파트를 흘긋 보고는, 아쿠아를 챙겨 주려 몸을 굽혔다. 


주인님의 말씀대로, 가로등 하나 없는 밤거리치고는 꽤 괜찮은 풍경이었다. 베타는 그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한 걸음씩 주인님께 다가갔다.


아버지의 명령을 받아 데스 스토커를 조종해 시민들을 '진압'하던 때가 떠올랐다. 클론의 허용 개체 수를 늘리기 위해 아버지에게 자결이나 다름없는 행위를 명령 받던 때가 떠올랐다. 이 지옥 같은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피를 쏟아가며 만들어지고 죽던 자매들이 떠올랐다. 이 모든 것이 아버지를 막지 못한 내 탓이라고 몸부림치며 자책하던 때도 있었다. 자신 뿐만 아니라 카라카스에게까지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냐며 아버지를 원망하던 때도 있었다. 종국에는 그렇게 자책의 눈물도 원망의 눈물도 말라붙어 번진 자국만 남았다.


아버지로부터 말미암은 자신의 죄 때문에,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은 눈물을 흘린 도시였다. 그럼에도 죄를 씻어내기에는 부족했는지, 지금처럼 도시 일부가 잠길 지경까지 왔다. 망집에 뒤덮여 있던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다. 자신이 카라카스 산업의 회장으로서 다시 태어난 그날, 불로 세례를 받았던 거라고.


베타는 다시 한 번 카라카스의 전경을 돌아보았다. 도시 군데군데에 남은 눈물 자국이 조명과 별빛을 반사하며 반짝였다.


아버지가 낳은 이 도시 또한, 물로 세례를 받고 다시 태어났다.


...마치 아버지처럼.


베타는 이번 세례로 도시 구석구석에 남아 있던 죄악의 그림자가 씻겨지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가 정치범을 가두기 위해 만든 지하감옥도, 불온분자들의 진압을 위해 생산된 데스 스토커들도, 시티가드와 주민들 사이에 자리잡은 뿌리 깊은 불신조차도... 모두 물밑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이 도시를 낳은 아버지와 그로부터 이어받은 나의 죄뿐이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죄는 내가 대속해서 짊어지고 가겠지만,


베타는 조심스레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앞으로는 이 도시가 대신 눈물을 흘릴 일은 없으리라.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