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만대 위에서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렇게도 아름다웠던 목소리는 언제그랬냐는 듯 고통만이 가득한 신음으로 바뀌고

산파의 지시에 따라서 이윽고 거센 호흡으로 바뀌었다.


그러기를 몇 시간, 분만실에선 마침내 죽어있던 세상에 경종을 울리는 울음소리가 태어났다.

산파는 난생 처음으로 안아보는 자그마한 생명에 어떤 감상을 표해야 할지 어리둥절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프네 모델이 의료지식을 베테랑 인간 의료인 수준으로 갖췄다고는 하지만

그녀에게도 오르카에게도 새로운 인간의 탄생은 아주 낯설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두 손에 안은 이 핏덩이의 아이가 자신의 조카이니 더욱 큰 감상을 느낄만도 했다.


"리제!!!" 


멀리서 아이의 아버지 더 나아가 신인류의 아버지가 내는 기쁨에 가득찬 목소리가 들린다.


"오빠! 분만실인데 살균도 안하고 가려고!!!"

그리고 그런 그를 막고 살균을 시켜주는 닥터의 목소리가 뒤이어 들렸다.


아이의 아버지는 허겁지겁 무균처리를 마치고 분만실 문을 열고 달려왔다.


"주인님...!" 

리제는 기진맥진한 목소리로 나지막히 사랑하는 그를 불렀다.


"리제! 고마워! 너무 수고했어! 고마워!" 

사령관은 리제의 손을 잡고는 연신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언니! 주인님! 예쁜 공주님이에요!"

다프네는 언니의 품에 오르카의 새로운 주인을 안겼다. 


"정말..정말... 예뻐요. 주인님...."


"그래! 너를 닮아서 정말 예뻐! 모든 힘을 다해서 사랑해 줄거야! 필리아...! 우리 딸 이름은 필리아야! 예전부터 맘에 정해놓고 있었어..!"


"필리아.. 필리아... 너무 예쁜 이름이에요...! 필리아..필리아...우리 딸..."


마치 아주 오래전 미생물이 바닷속에서 물고기로 변하고 

육상동물이 되어 포유류가 되고 인간이 되었듯이, 

태평양 깊숙한 곳에서 새로운 인류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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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는 그 이름답게 오르카 호 모두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다.


철충의 존재도 별의 아이의 위협도 보이지 않는 지구에서 사령관은 필리아를 시작으로 자신의 후대를 늘려나갔다.


사령관은 자신의 모든 아이들을 사랑했다. 


그 반대도 그러했다. 


사령관은 모두에게 늘 그랬듯이 다정했고, 

늘 그랬듯이 엉뚱했고, 때때로는 엄격했고, 

여태 그래왔던듯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훌륭했다. 


그렇기에 아이들은 아버지를 사랑했다. 


어린 필리아 역시 아버지를 사랑했다. 


그 반대도 그러했다. 


사령관에게 필리아는 아픈 손가락이었다. 다른 손가락이라고 아픈 손가락은 없었지만 필리아는 유독 더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럼에도 사령관은 편애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세 자리수에 다다르는 자식들이 태어난 지금도 사령관의 뇌리엔 아주 깊게 박혀있었다,

그 작디 작은 손이 처음으로 아버지의 검지 손가락을 잡던 때를 말이다.


사령관의 자식들은 장성해갔다. 


콘스탄챠, 아스널, 레프리콘, 포츈, 백토, 카멜 등


계급 직책을 불문하고 많은 바이오로이드들과 사령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하나하나 그 어미와 아비의 기질을 물려받아 건강하고 슬기롭고 엉뚱하게 자라났다.


그런 아이들의 큰언니이자 큰누나인 필리아는 어느덧 어머니보다 키가 커져 어엿한 숙녀가 되었다.

멸망전 기준으로 보면 고등학교에 다닐 법한 나이였다. 


알렉산드라는 제 어머니가 그랬듯 집중력 하나만큼은 일품이라며 필리아를 칭찬했다. 


리제와 가장 트러블이 많았던 리리스는 그에 대한 반동인지 제 아들만큼이나 필리아를 아껴주었다.


소완은 가끔 아우로라를 시켜 필리아에게 요리 교습을 시켜주곤 한다. 

소완의 평에 따르면 가르치는 보람이 있는 제자라고 했다. 엄마보다 아빠를 더 닮았다나 뭐라나.


레아를 비롯해 페어리들은 필리아를 보면 한번씩 안거나 뽀뽀를 하거나 선물을 주든, 항상 애정을 표하곤 한다. 

가르침 또한 아끼지 않았다. 레아는 농업을 비롯해 작물을 가르쳐주었고 

다프네는 의학을 알려주었다. 드리아드와 아쿠아는 작물을 가꾸는 법을 알려주었다. 


페어리의 농원 중심에는 필리아를 위한 작은 텃밭이 마련되어 있었다. 

필리아의 첫 작물이 싹을 틔웠던 날은 밤새 페어리의 숙소가 시끌벅적하곤 했었다.


필리아는 그 이름답게 모두에게 사랑을 받는 아이었다. 


그 반대도 그러했다.


필리아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모두를 사랑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눈동자 빛깔이 섞인 적갈색의 눈동자의 눈에 비친 것들은 모두 필리아가 사랑하는 것들이었다.

어린 시절 자주 다투었던 리리스의 아들마저도 필리아의 눈엔 사랑하는 동생이었다.


어머니는 항상 돌아오면 자신을 품에 안고 머리를 빗어주었다. 

어머니의 붉은 빛이 감도는 붉은 눈동자는 자신을 항상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리제는 가장 사랑하는 그와 함께 만든 가장 큰 보물을 아주 세심하고 정성스럽게 단장해줬다. 

딸과 함께 있는 리제는 오르카가 흔히 알던 문제아가 아닌 딸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 반대도 그러했다. 


필리아는 아버지가 사랑했고 사랑하며 사랑할 어머니를 그저 깊게 눈에 담았다.


아버지가 사랑한 어머니의 머릿결

아버지가 사랑한 어머니의 눈동자

아버지가 사랑한 어머니의 입술

아버지가 사랑한 어머니의 자태

아버지가 사랑한 어머니의 손길


그 모든 것이 자신을 이뤘고 자신을 키운 사실을 필리아는 살결에서 느껴지는 어머니의 따듯한 손길마다 되뇌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런 여성이 되고 싶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필리아는 아버지를 사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럴 법 하기 때문이며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며 

그리 되는 것이 당연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령관은 종종 페어리의 숙소에 찾아와 리제와 필리아를 보곤했다. 


그 반대도 그러했다. 


필리아는 가끔씩 함장실을 찾아왔다.


사령관은 종종 아이들을 모아 아주 커다란 침대 위에서 낮잠을 자곤 했다. 


그 반대도 그러했다. 


태풍이 불어 오르카에 무서운 소리가 들릴때 즈음 필리아는 같이 놀던 동생들의 손을 잡고 아버지의 침실을 찾아가 같이 잠을 자곤 했다.


사령관은 종종 아이들에게 맛있는 간식을 선물해주었다. 


그 반대도 그러했다. 


필리아는 아우로라가 가르쳐준 디저트를 아버지에게 선물해준다.


사령관은 종종 아이들 생각을 하다가 업무를 대충 본 적이 있다. 


그 반대도 그러했다.


사령관은 종종 아이들이 미래에 어떤 사람이 될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 반대도 그러했다.


사령관은 아이들을 사랑했다. 


그 반대도 그러했다.


사령관은 아이들을 사랑했다. 


그 반대도 그러했다.


사령관은 필리아를 사랑했다.  


그 반대도 그러했다.


필리아는 사령관을 사랑했다. 













그 반대는 그러지 않았다.






필리아는 가끔 함장실을 찾아왔다. 사령관의 자식은 경호팀의 별 다른 제지없이 함장실을 비롯 사령관의 근처에 다가가는 것이 허가되었다.

특히 리리스 아주머니가 보내주는 애정에 힘 입어 필리아는 다른 아이들보다 매우 '자주' 함장실에 출입할 수 있었다.


페어리들의 지식은 여러 면에서 도움이 되었다. 


어떤 풀이 어떤 효과가 있는지 어떻게 배합해야 하는지 인체에는 어떻게 작용하는지. 어떻게 길러야 하는지


모든 것이 그녀들이 필리아에게 전해준 지식들이었다. 


소완이 가르쳐준 디저트는 훌륭했다. 

오리진 더스트로 강화된 인간이 먹어도 효과가 드는 강한 약재조차 숨길 수 있는 깊은 맛을 자랑하는 디저트는 

필리아가 가장 공을 들여 만든 디저트였다. 


필리아는 종종 이 계획을 어떻게 성공할지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수업시간에 딴짓을 해본적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생각했다. 그의 옆에 있을 자신의 미래를. 


어머니를 닮은 강한 집중력으로 계획을 짜고

어머니를 닮은 강한 집중력으로 계획을 수행했다. 


어릴 때처럼 폭풍우치던 그날에 말이다. 


그 육중한 오르카호에 미세한 진동이 일정도의 폭풍우가 치던 날 


필리아는 조용히 함장실의 문을 열고 폭풍우때문에 도통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오리진 더스트로 강화된 신체를 가진 사령관은 실제 나이와는 다른 30대 초반의 미청년의 모습이었다.


사령관은 장녀를 살갑게 맞이했고 메이드에게 부탁해 잠이 잘 오는 라벤더차를 부탁하려고 했지만 

필리아는 사실 본인이 간식거리를 가져왔다며 사령관에게 건넸다.


필리아의 정성스런 간식을 좋아했던 사령관은 기쁘게 간식을 손에 집었다, 


장녀가 따라 먹지 않는 것을 눈치채지도 못 한 채 말이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몽롱한 기분. 사령관은 오래된 기억 속에서 이 기분과 똑같은 상황을 떠올렸다.


그래.. 오르카 요리대회를 열 때 즈음이었다. 

그 때는 참 힘들었지. 


아니, 


그런데 


지금 왜 이렇게 몽롱해지는 것이지.........!


사령관이 눈치를 챘을 때즈음엔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었다. 


필리아는 행복했다. 사랑하는 어머니가 그랫듯 사랑하는 남자의 품에 안길 수 있게 되었다.


"그...만ㅎ.." 


사령관은 명령을 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그의 딸이었다. 


인간이었다.


약물은 마치 아무일도 없었단 듯이 하룻밤의 기억을 지워주었고 사령관은 다음날 뻐근하고 몽롱한 채로 잠에서 일어났다.


필리아는 사랑을 멈추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랬듯이. 


사랑할 수만 있다면 어떤 수를 쓰더라도 사랑하려고 했다.


필리아는 끝없이 그를 갈구했고 탐닉하려 했다. 





그렇지만 모든 것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다.


13번째 계획을 마친 뒤 필리아의 배는 마치 당연히 그랬어야 했듯이 불러왔고, 

필리아의 사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에게 밝혀졌다.


리제는 정신을 잃었고 사령관은 몇달을 폐인처럼 지냈다.


지휘부는 그녀가 사령관의 자식임을 감안해 오르카를 벗어나 외딴 곳에가서 다시는 오르카와 접촉하지 않은 채 살아가라며 


그녀를 추방하려했다.


그녀를 인솔할 브라우니가 방의 문을 열었을 때 필리아는 부푼 배를 안은 채 웃는 모습으로 가만히 있었을 뿐이다.


브라우니는 그녀에게 다가갔고 


브라우니는 신인류 최초의 음독 자살자를 목격할 수 있었다.


유서도 유품도 없는


교훈도 의미도 없는


덧 없고 허무한 이야기의 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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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딸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 반대도 그러했다.


필리아는 사령관을 남자로서 사랑했다. 


그 반대는 그러지 않았다. 


그 반대는 그러지 않았다.


그 반대는 그러지 못했다.


그 반대는 그럴 수 없었다.


Vice Ver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