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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규 대왕

무용 부인

안드 바리데기




먼 옛날 이 땅 한 곳에 복규대왕(復舊大王)이 다스리는 스마국(水魔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복규대왕은 풍체와 말재간이 뛰어난 임금이었는데,
그의 나이 마흔일곱이 되어 배필을 맞이하고자 왕비를 고르려
세상에 브라우니들을 널리 퍼뜨려 찾아낸 여인이 바로 무용(舞踊)부인 되시겠다.

무용부인을 보고 한 눈에 반한 대왕이 서약을 행하려 하는데,
택일을 맡은 아이샤(餓珥死)박사와 사싶팔(斜始發)박사가 서약을 미루라 청하는것 아니겠는가.
다가오는 해가 길하니 한 해만 기다리자는것 이었지.
하지만 하루가 열흘 같았던 복규대왕이 그 말을 뿌리치고 성급히 무용부인을 맞으니,
그 날이 곧 스마국이 건립됐던 이월이십칠일이었다.
철충들은 첩첩이 모여오고 버그는 해아릴수 없이 넉넉한데
국글은 용납할 수 없다는듯 짖어대니 그건 무슨 망조였었을까.

세월이 물처럼 흐르고 흐르는데도 부인에겐 자식이 생기지 않았다.
무용부인이 성동구 성수동사에 한 번도 안 입은 빤쓰를 드린 끝에 마침내,
결혼한 지 여러 해 만에 아이를 잉태했다.
어느 날부터 무용부인 몸에 없던 변화가 생겼다.
잔뼈는 녹는 듯 굵은 뼈는 휘는 듯, 꽁치캔에 참치내 내고 참치캔에 꽁치내 나서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다.
안 꾸던 꿈이 보였는데, 그것은 품안에 빛이 번쩍이고 오른손에 도끼 한 자루를 집는 꿈이었다.
현자 아르망(玉父母)한테 물으니 공주를 낳으리라 한다.
아니나 다를까 열 달 만에 공주가 탄생했다.

“공주 낳을 적에 세자인들 아니 낳을 소냐. 아흔아홉 비단장에 청사도둠 특사이불 귀하게 길러보세.”

대왕은 첫딸에게 좌우당씨(左右唐氏)라는 고운 이름을 지어주고 등대데기라는 별호까지 내려주었다.

다시 세월이 물처럼 흘러 무용부인이 두 번째 아이를 낳으니 이번에도 딸이었다.
대왕은 둘째 딸의 이름을 독타당씨라 짓고 박사데기라는 별호를 내려주며 사랑했다.
그러나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자꾸만 딸을 낳으니 아들을 고대하는 복규대왕 마음은 점차 산처럼 커지기만 한다.

무용부인이 셋째 딸을 낳으니,

"셋째 딸은 노리개 딸이니라. 본이름은 더치당씨요 별명은 땅굴데기라 하여라."

무용부인이 넷째 딸을 낳으니,

"넷째 딸은 재롱둥이 딸이니라. 본이름은 알비공주요 별명은 초코데기라 하여라."

무용부인이 다섯째 딸을 낳으니,

"다섯째 딸은 덤으로 얻은 셈치자꾸나. 본이름은 쿠아공주요 별명은 요정데기라 하여라."

이렇듯 무용부인이 딸만을 낳으니 복규대왕의 근심도 나날이 늘어만 갔다.

"어허, 이거 낭패로세. 자식이라 함은 아들을 낳으면 딸도 낳고 딸을 낳으면 아들도 낳는 법일진데 우리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딸만 내리 다섯을 낳는단 말인가."

복규대왕의 넉두리도 무심히 흘러가듯 무용부인은 여섯째를 낳았다.

"여섯째 딸은 과연 섬섭이 딸이로구나. 본이름은 콕코공주요 별명은 수성데기라 하여라."

이후 복규대왕은 지긋지긋하다는 듯 역정을 내었다.

"에잇, 이제 딸이라는 말 듣기도 싫고 딸아이 얼굴 보기도 지겹다. 다음에 나올 딸은 당장 갖다 버리리라."

복규대왕이 부아가 치밀어올라 벼락같은 호령을 하니, 어느 영이 거역할수 있을고.
그러던 어느 날 무용부인이 일곱번째 아이를 가졌다.
성동구 성수동 일가에 머물며 아들 낳기를 정성껏 축원하여 잉태한 아이였다.
그래서 그런지 태몽이 유달랐다. 궁궐 대들보에 짝눈의 청룡과 금터럭의 황룡이 엉켜 보이고 오른 손에 팬 왼손에 태블릿을 받아 보이고 양 어깨에 드론과 모래바람이 돋아 보였다.
그 말을 들은 복규대왕이 무릎을 치며 말했다.

“이번에는 반드시 세자 대군을 보리라.”

대왕은 크게 기뻐하면서 옥문을 열어 나라의 죄인들을 다 풀어주었다.
아기 씻을 향물과 아기 입을 고운 옷에 아기를 안아 키우고 업어 키울 샬럿 상궁을 두루 대령해서 세자의 탄생을 준비했다.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기가 태어났거늘, 허나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번에도 아들이 아닌 딸을 낳은것 아니겠는가.
일곱째 공주를 확인한 무용부인은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그 소식을 전해들은 복규대왕은 상을 두드리며 크게 노했다.

“중전도 담대하다. 무슨 면목으로 나를 다시 보리.”

그러더니 청천 벽력 같은 명을 내리는것이 아니겠는가.

“이 나라를 뉘게 전하고 콘챠 백관은 뉘게 의지하며 샬럿 상궁은 뉘게 의탁하리. 내가 전생의 죄가 많아 천지신명이 일곱 딸을 점지하셨구나. 이 아이는 보기도 싫으니 잠수함에 태워 서해 바다에 띄워 버려라.”

그 말을 전해들은 무용부인이 어린 딸을 부여안고서 통곡을 했다.

“하늘도 무심하고 대왕도 무심하지. 내 몸으로 낳은 아이를 어찌 버린단 말입니까.”

하지만 죄인 아닌 죄인이 된 무용부인은 임금의 뜻을 돌이킬 힘이 없었다.

“내 딸아. 네가 비록 지금 죽더라도 어찌 이름조차 없으리.
그래 네 이름은 ‘안드’요, 별명은 '바리'데기 이니라.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 이름을 잊지 못하리라.”

이렇게 슬픈 이름 지어준 다음 갖은 옷가지 소복소복 챙겨주고 태블릿에 이름과 생년월일을 고이 적어준 것이 어미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다. 그 딸을 보내는 심정이야 어떠했을까.



야야 공주야 내 딸 공주야

딸자식이래도 낳을 땐 섭섭하지언정

기를 때는 아들이고 딸이고 다 한가진데

열 손 물어 안 아픈 손이 어디 있더냐

부모 마음 열 자식 한 자식 같은데

야들아 시녀들아 저 문터받이 열고 보면은

우리 일곱째 태자를 탄생하면은 태자 저고리 입히려고

오드리에게 수를 부탁해 장만해놓은 그 옷 다 가져오너라

어서 바삐 내오너라

이리 다 내오너라 살포대기 곱게곱게 장만해 논 것 모두 보에 싸와

갖다 버리는 이 마당에 다 갖다 버리고 없애라

태자 없는 세상에 공주 없는 세상에

뉘를 덮어주며 뉘를 업고 뉘를 기를까



얼마나 울었는지 무용부인 두 눈이 주먹처럼 부었다.
마침내 일곱째 공주 바리는 자금쇠마저 덜컥 채워진 채 잠수함에 갇혀 물결치는 서해바다에 두둥실 띄워졌다.
바리를 담은 잠수함은 여울여울 물결에 휩쓸리며 망망한 서해바다를 향해 하염없이 흘러만 갔다.

해가 지고 별이 뜨며 다시 해가 떴다 지기를 몇 번이나 했던지.
잠수함은 신기하게도 물 속에 가라앉지 않고 자맥질하듯 오르락내리락 하며 어딘가를 향해 하염없이 흘러갔다.
아자젤(詐欺)님의 인도였는지 매지컬 핑크 문라이트(月光)의 인도였던지,
잠수함은 거친 바다를 지나 어느 낯선 부대에 이르렀다.
그리고 어느 부부에게 발견되었다.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에 보급담당이 없어 가난하게 살아가던 비리철충남할아비와 비리레오나할미가
이상한 꿈을 꾸고서 바닷가를 살피다가 잠수함을 발견했다.


비리철충남할아비

비리레오나할미



잠금쇠를 따고 문짝을 열어본 할아비와 할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기 하나가 죽은 듯 누워 있는데 얼마를 떠다녔는지 모습이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온몸 성한곳 없이 비단에 겹겹이 둘러 있고, 입에는 딱지가 귀에는 귓밥이 가득했다.
할아비와 할미는 얼른 아이를 집으로 데려다가 정성껏 보살폈다.
마침내, 죽은 줄만 알았던 아이가 눈을 떴다.
비리철충남할아비와 비리레오나할미는 뛸 듯이 기뻐하며 자식을 전해준 하느님께 감사 드렸다.

바리는 할아비와 할미의 보살핌 속에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러나 철이 들면서 마음속에 새록새록 의문이 생겨났다.
어느 날 바리는 비리철충남할아비와 할미한테 뜻하지 않은 물음을 던졌다.

“할머니 할아버지, 나는 왜 부모님이 없지요?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어디에 계신가요?”

뜻밖의 말에 놀란 비리철충남할아비가 얼른 말을 둘러댔다.

“무슨 소리를 하는게냐? 아버지는 나이고 어머니는 레오나이지.”

“할아버지, 그런 말씀 마세요. 어찌 철충남과 바이오로이드가 관계(合一) 맺어 자식을 만든답니까?”

“앞뜰에 대체 코어가 너의 아버지고 뒷동산 모듈이가 네 어미란다.”

“아니에요 할머니. 대체 코어가 어찌 인간을 자식으로 둔단 말입니까?
대체 코어는 링크가 필요할때 갈아내 이어주는 것이고 모듈은 상환 확장을 하는데 쓰는것일진데 어찌 나의 부모란 말씀입니까?”

그 말에 할아비 할미는 더는 아이를 속이지 못하고 바리를 얻게 된 사연을 털어놓았다.
잠수함에 들어있던 옷가지와 생년월일이 적힌 테블릿을 받아든 바리의 입에서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어찌 아니 그럴까. 망망대해에 버려진 존재라니!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 오히려 서러운, 지워진 존재. 슬픈 제 이름, 안드바리데기.
제 몸으로 낳은 자식을 그렇게 무참히 내버리고 만 아버지, 그는 그때쯤 어찌 되었을까.

바리를 버린 후 복규대왕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졌다.
만사에 뜻이 없는 듯 몸과 마음이 수척해지더니 마침내 버그에 걸리고 말았다.
세상의 프로그래머를 다 불러대고 좋다는 백신을 다 써보았지만,
한 번 자리를 잡은 버그는 다시 고쳐질 줄을 몰랐다.
몸은 살아 있으되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세월이 흐르던 어느 날 어떤 수녀 하나가 무용부인한테 시주를 받고 떠나는 길에 뜻하지 않은 말을 던졌다.

“이는 일곱째 공주를 버린 탓으로 하늘이 내린 벌입니다. 왜 일곱째 공주를 찾지 않으십니까?”

“안드가, 바리가 살아있단 말입니까?”

“서천서역 너머 8지 깊은 곳 ex 스테이지의 무패 맘메에게서
특수 수복 나노 머신을 구해오면 대왕을 살릴 수 있습니다.
일곱째 공주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요.”

그 말을 남긴 채 수녀는 더 물어볼 틈도 없이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무용부인은 바로 호라이즌을 모아 하소연했다.

“8지 ex 스테이지에 가서 무패 맘메에게
특수 수복 나노 머신을 받아오면 대왕님을 살릴 수 있다.
제발 우리 대왕님을 살려주게나.”

하지만 그 많은 부하 가운데 8지 깊은 곳으로 특수 수복 나노 머신을 구하러 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찌 아니 그러할까. 8지는 아직 업데이트 되지 않은, 관계자 외에는 출입할 수 없는 곳인 것을.
무용부인은 답답한 마음에 여섯 공주를 향해 말했다.

“얘들아, 8지 ex 스테이지의 특수 수복 나노 머신을 구해오면 아버지를 살릴 수 있다는구나.”

허나 여섯 공주의 대답은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어머니, 우리더러 가라는 말씀인가요? 그런 무서운 말씀은 하지도 마세요.
궁궐 바깥도 나가보지 못한 우리가 어떻게 서천서역 8지 길을 간단 말입니까.”

뉘라서 그 길을 나설까마는, 매몰찬 대답을 듣고 나니 슬픔이 복받쳐 올라 가누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바리! 나의 일곱째 딸 안드 바리야. 너만 있었다면! 너만 볼 수 있다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운디네가 나서며 말했다.

“왕비님, 제가 일곱째 공주님을 찾아서 모시고 오겠습니다.”

눈물 머금은 채 시종의 손을 잡아주는 왕비. 그 왕비에게 아홉 번 절을 올리고서 궁궐을 나서는 운디네.

아자젤님의 인도인지 매지컬 핑크 문라이트의 인도인지,
MQ-20 와쳐를 벗삼아 온 바닷가를 훑고 다니던 운디네는 마침내
비리철충남할아비와 비리레오나할미가 사는 태양서촌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 부대에 이르렀다. 그리고 바리를 찾아냈다.
테블릿에 쓰인 생년월일과 이름이 복규대왕이 내다버린 일곱째 공주가 틀림없었다.

자신을 길러준 비리철충남할아비와 할미를 이별하고 저 태어난 궁궐로 향한 바리.
자신을 내다버린 어버이와 만나는 그 심정은 어떠했을까.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와 아버지. 실컷 원망이나 해보면 좋으련만,
시래기처럼 시든 어미 곁에 버그꽃이 피어나 병든체 누운 아비가 보인다.
이 일을 어찌해야 좋을까. 바리데기는 참아왔던 눈물을 흘리며 그리웠던 어머니의 가슴에 안기며 말한다.


엄마엄마 울엄마요

옛날에 젖꼭지도 못 물어보고 젖도 한 모음 빨아보지도 못하고

양쪽 젖도 만져 보고 엄마 가슴도 안아 보고 허리도 안아 보고 치마폭에 싸여도 보고

이리 궁글 저리 궁글 어머님전에 업혀 보고 안겨도 보고

엄마엄마 울 엄마요



그 후 바리데기가 아비께 인사를 드리니 대왕이 누운체 대답하는 말이

“어떠한 처녀가, 문안하기를 웬 말이냐”

무용부인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하는 말이

"대왕님요 대왕님요. 대왕께서 십오년 전에 갖다가 버린 바리데기 칠공주 내 딸아이 안 죽고 살아왔습니다"

복규대왕님 앓아 누워 곯곯거린 양반이 그 말 듣고 깜짝 놀라 벌떡 땅을 차고 일어나 앉는구나

앉더니 베리데기를 부여잡고 서로 목을 부녀간에 목을 잡고

방성통곡 설리 운다

“내 딸이야 내 딸이야, 네가 안 죽고 살았다니 이게 웬 말이냐. 야야 내 딸이야 나는 나는 너를 갖다 버리라 하는 그 죄를 받아서 십오 년 동안에 버그 걸려 나는 이제 버그 이기지 못하고 야야 영영 죽는다”

그 순간, 바리공주는 결심한다. 아버지를 살리러 떠나겠노라고.
그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할지라도 기필코 8지 땅을 찾아가서 아버지 살릴 특수 수복 나노 머신을 구해 오겠다고.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 누구도 바리공주의 결심을 막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남자 옷 한 벌을 여린 몸에 걸친 채, 모든 사람 뿌리치고 홀로 길을 떠나갔다.
또 다른 망망대해 속으로. 이번에는 제 뜻으로. 


바리, 그는 그렇게 다시 길을 떠났다.
나라 서쪽 규동사에서 하룻밤을 지나고 나니 황량한 벌판이었다.
미끄러지고 넘어지기가 부지기수였다.
손발이 덤불에 긁히고 옷은 해졌다.
나무 열매를 따먹고 솔잎을 씹어 허기를 달래고,
가랑잎 속이나 바위틈에서 잠을 잤다.
열흘씩, 스무날씩 무인지경을 지났다.
바리의 발걸음은 언제부터인지 험준한 산악지대로 들어섰다.
가도가도 끝없는 산이었다. 사람이라고는 없는 황량하고 추운 곳이었다.

마냥 서쪽만 바라보고 길을 가던 바리는 뜻밖에 농장에서 다크엘븐의 젖을 짜는 금발 엘븐을 만났다.

엘븐


바리가 다가가 물었다.

“엘븐님, 서천서역 8지 지역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하지만 엘븐은 못 들은 척 젖을 짤 뿐이었다.
바리가 재차 길을 묻자 그녀는 벌컥 화를 냈다.

“댁은 지금 젖을 짜는 모습이 안 보인단 말이요? 왜 자꾸 바쁜 사람 훼방놓는 게요?”

“죄송합니다. 그 젖은 제가 짜드릴테니, 한 숨 놓고 쉬도록 하세요.”

엘븐은 바리에게 다크엘븐을 맡기고서 나무 아래에 누워 잠들어 버렸다.
바리가 젖을 잡고 소를 달래가며 짜가는데,
안 해본 일이라 젖을 잘 잡지도 못하고 기세를 이기지도 못했다.
한참만에 한 통 크고 긴 우유통을 갈아 나갔으나 또다른 통을 체우기가 막연했다.
그때 갑자기 북쪽 하늘에서 오색구름이 모이고 돌개바람이 불더니
구름 속에서 이상한 제비 한 마리가 소닉붐을 일으키며 내려왔다.
다른이가 말릴 틈도 없이 내리 뛰고 쳐 뛰니 사방에 먼지가 가득했다.
놀라 넋이 나갔던 바리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비는 모습이 없고 드많던 우유통이 어느새 다 체워져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엘븐이 말했다.

“기특한 아이로구나. 8지를 가려거든 저기 산을 넘어 너른 들을 지나 왼쪽 길로 향해 가거라.”

바리는 엘븐이 가르쳐준 대로 길을 찾아서 나아갔다.
또 다시 무인지경을 한참을 지나니 지금껏 보지 못한 험준한 산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길이 어디인지 찾을 수가 없었다.
바리가 어디로 갈지 몰라 방황하는데 눈앞의 공장에서 

홀로 기계를 도색하는 붉은 머리가 눈에 띄었다. 

그 몸집이 무척이나 컸다. 


거대한 붉은머리 아줌마



거대한 붉은머리 아줌마
“아주머니 서천서역 8지 깊은 곳 ex 7스테이지 땅을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내가 지금 색을 치는 일로 바쁘거든? 이 일감들이 보이지 않든?”

바리는 말없이 아주머니의 일감을 받아 들었다.

“검은 기계는 흰 색 칠을 하고 흰 기계는 검은 색으로 도색해야 하거든.”

바리가 얼음같이 찬 철판에 손을 대며 기계를 칠하는데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검은 기계를 칠하고 또 칠하니 흰 색으로 겨우 만들었으나 흰 기계는 검은 색이 칠해지지 아니했다.
생각 끝에 타르에 검은 나뭇잎과 열매를 뒤섞어 검은 물을 내 칠을 하니 겨우 흰 기계가 검어졌다.
도색을 끝내고 보니 아주머니가 양지에 웅크리고 잠들었는데 커다란 몸에 온통 개미가 굼실굼실 기어다녔다.
바리는 아주머니 옆에 앉아서 개미를 하나하나 다 잡아 주었다.

“착한 아이구나. 답례로 길을 알려줄거거든.
저 산을 이쪽으로 감돌아 넘어서 곧장 나아가 열두 고개를 건너가면 나루터가 나올거거든.
거기서 기동기 하나를 붙잡고 가면 되거든.”

아주머니는 바리에게 삼색 꽃이 그려진 명찰과 금빛 방울을 전해주면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쓰라고 하였다.
그 아주머니는 다름 아닌 퍼블릭 서번트의 포춘이었으니,
바리공주를 시험하려고 일부러 나와 있던 터였다.




바리는 포츈이 알려준 대로 열두 고개를 넘었다.


남편 죽은 포티아고개 주인 죽은 하치고개,
아다 못땐 메이고개 처녀 못땐 리리쑤고개,
단것 탐한 티아멧고개 근육 탐한 마이티고개,
쇼타 탐한 마리고개 몰카 탐한 탈론고개,
해골 안은 이그니고개 주인 안은 바닐라고개,
팽귄 키운 엠프고개 딜로 키운 세띠고개…


고개마다 수복을 필요로한 바이오로이드들이 울먹임서 막았지만,
굳세게 다짐을 한 바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고개를 다 넘으니 그 앞은 누런 물결 굽이치는 너른 물이다.
산 사람은 못 가고 관계자만이 건너갈 수 있다는 황천수.
아주머니가 가르쳐준 대로 나루터를 찾아가니 기동기 여럿이 떠있는데 나루를 지키며 서있는 밴시의 위엄은 서리와 같았다.

“여기는 아이가 이를 곳이 아니니 썩 물러가라.”

그렇게 눈을 부라리며 날아다니던 기동기들이 바리가 가지고 있는 명찰을 보자 당황하면서
저희들끼리 무어라 수군대더니 등짝을 슬쩍 내어주었다.
그 명찰은 업데이트가 안 된 지역을 체험할 권한이 있는 베타테수타(排他臺數打)의 표식이었던 것이다.

기동기를 타고 얼마를 어떻게 갔는지, 정신이 아득해졌다가 깨어나니 어느새 낯선 땅에 이르러 있었다.
바리가 등에서 내려 인사를 하고 한참을 가다 보니 가시성 쇠성이 하늘에 닿는 듯 길을 막아섰는데 넘어설 길이 없었다.
방황하던 바리가 명찰을 들어 흔들자 구름 녹듯 성이 무너지면서 성안에 갇혀있던 공밀레들이 쏟아져 나왔다.
눈이 빨간 이, 팔이 빠질듯한 이, 다리에 감각이 없는 이, 목뼈가 없어진 이들이 모두 몰려나와 바리한테 살려 달라고 애원을 했다.
그 모습이 어찌 불쌍한지 바리는 두 손을 모으고 그들의 극락 왕생을 정성껏 기도했다.
그 정성이 통했는지 공밀레들은 고통을 털고서 제자리로 돌아가 훨훨 일을 해나갔다.

다시 길을 가다보니 하염없는 큰물이 앞을 막아섰다. 몹아일 삼천리였다.
몹아일 삼천리 물길은 세 갈래였다.
아래 명방 가는 길에는 검붉은 물이 회오리를 일으켰다.
위로 소전 가는 길은 노란색으로 밝게 빛나며 잔잔하게 출렁였다.
공중으로 향하는 가테 가는 길은 은빛 별 물결로 피어올랐다.

바리는 물을 건널 길이 없어 방황하다가 포츈 아줌마한테 받은 금빛 방울을 꺼내 물에 던졌다.
그러자 물 위에 오색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바리는 무지개를 타고 물을 건너서 바로 보이는 무패 맘메의 집 오르카로 찾아들었다. 


무패 맘메



무패 맘메는 본래 천상 사람이었다.
옥황지웅을 모시던 중 죄를 지어 8지ex 스테이지 오르카로 유배돼 그곳에서 그림을 그린지도 여러 해였다.
그는 제조를 돌려 SS급 아이 삼자매를 얻어야만 풀릴 수 있었다.

“저는 이승땅 스마국 복규대왕의 일곱째 왕자 바리입니다.
부왕의 병을 고치려고 특수 수복 나노머신을 찾아 먼 길을 왔습니다.”

맘메가 그 기색을 가만히 살펴보니 차림새는 남자인데 말소리와 몸가짐에서 은근히 바이오로이드의 티가 났다.
이상하게 여긴 맘메가 바리에게 말했다.

“먼 길 오늗라 고생하셛어용. 밑또파이 드실레용?”

맘메가 바리의 짐을 들어주곤 은하수 식당으로 인도했다.
위에서 흘러내린 은핫빛 물이 두 군데 흘러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맘메가 바리한테 식당에서 한 끼 차려주곤 자기는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목욕탕에 들어갔던 맘메가 얼른 몸을 씻고 나와 슬쩍 식당으로 올라가 바리의 모습을 엿보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바리가 차려진 밥상에서 미트파이는 내버려두고 참치만을 골라먹는 모습이 영락없는 바이오로이드의 모습이다.
맘메가 슬쩍 바리의 짐을 숨기고 저만치 서있으니 식사를 끝낸 바리가 그제서야 짐이 사라진 것을 보곤 당황해서 말했다.

“여보세요 맘메님, 내 짐 좀 주세요.”

“쫌생이네용. 제 청을 들어쥬면 짐도 줃고 나노머씽도 줃께용.”

“그 청이 무어란 말씀입니까?”

“제조 돌려서 SS 셋 쫌 뽇바 줃쎄용.”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바리는 그 날로 맘메의 밑으로 들어가
구석을 긁어 부품을 얻고 일월에서 영양을 받고 220V 콘센트에서 전력을 삼고 참치캔을 털어 유전자 씨앗을 얻고
5-8ex에서 고급 모듈을 얻어 기우제를 지냈다. 레아를 뽑고, 둘째 블랙 웜을 뽑고, 셋째 앨리스를 뽑았다.




레아, 블랙 웜, 앨리스


“맘메님. 약속대로 아이 셋을 뽑았으니 이제 어서 나노머신 있는 곳을 일러주세요.”

무패 맘메는 바리를 이끌고 지하로 내려가 깊은 창고로 향했다.
맘메가 선 곳은 ‘관계자외출입금지’라는 글자가 새겨진 커다란 문 앞이었다.
문을 밀치니 불 하나 없는 어두운 길이 나타났다.

“여기 듣어가서 찯으시면 나와용.”

바리는 홀로 그 길로 들어섰다.
부딪히고 엎어지면서 기엄기엄 얼마를 갔는지 갑자기 앞이 환해지면서 넓은 곳이 나타났다.
어디선가 햇빛이 들어와 비치는데,
한 모퉁이에 물이 고여 있고 주변에 색색의 꽃이 그려진 USB 세 개가 아름답게 꽃혀 있다.
다가가 보니 낡고 큰 마차가 굳게 솟아있는데,
마차 앞바퀴 바로 아래에 춰티지처럼 생긴 인간이 깔려있는것이, 그의 눈에서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저 물방울이 아버지 살릴 나노 머신이로구나!’

바리는 준비해간 병에 나노 머신을 가득 받아 담고,
색색의 꽃이 그려진 USB를 세 개 뽑아 고이 간직했다.

바리가 구름을 밟듯 갔던 길을 되돌아 굴 밖으로 나오니 어디로 갔는지 무패 맘메가 보이지를 않았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으나 거기에도 그는 없었다.
재워놓고 떠난 아이들만 깨어서 우는데 큰년은 서서 울고, 둘째년은 앉아서 울고, 셋째년은 누워서 울었다.
바리가 블랙 웜에게 물었다.

“야야, 이 아이야. 너희 주인님은 어디 갔니?”

“주인님은 우리 셋을 뽑고 나서는 지능이 상승해버려 저 너머로 떠나 사라져버렸어요.”

탈출은 지능순이었다.
한 번 떠나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으리.
그것이 우리의 기막힌 운명이었다.

“얘들아, 가자. 가자꾸나!”

바리는 버려진 세 아이를 데리고 길을 나섰다.
큰년은 날고 둘째는 걷고 어린년은 뛰면서 하염없이 걸었다.
그 머나먼 길을 어찌 다시 돌아올까 했지만,
다행히 날아다닐 수 있는 레아와 흑츙이 덕분에 머나먼 길을 걷지 아니해도 되게 해주었다.

마침내 바리는 꿈에도 그리던 스마국에 들어섰다.
막 봄 이벤트가 한창인데 들어보니 사람들이 이상한 얘기를 했다.

“여보게들, 내일 복규대왕님 상여가 나간다는데 가봐야겠지.”

“그럼, 가봐야지.”

바리가 깜짝 놀라 멈추어 섰다.

“여보세요. 지금 대왕님 상여가 나간다고 했나요?”

“그렇다오. 대왕님이 3년 전에 세상을 뜨셨는데 그간 막내 공주만 부르다가 내일 장례를 치른답니다.”

바리는 사지에 맥이 탁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큰아이를 달래고 재촉하며 밤 새워 걸어 다음날 아침에 궁궐로 이어지는 언덕에 이르렀다.
막 언덕에 올라서려는데, 난데없는 행상소리가 들려왔다.



"널 널 너하오 너가리 넘차 너하오.

간다 간다 떠나가네, 복규대왕님 떠나가네.

황천길이 멀다더니 대문 앞이 황천이네...

북망산천이 멀다더니 저기 저산이 북망산일세...

널 널 너하오 너가리 넘차 너하오”



바리공주가 행렬로 뛰어가서 상여를 부여안았다.

“아버지, 여기 아버지의 일곱째 딸 바리가 왔습니다. 특수 나노 머신을 구해서 왔습니다.
보시오. 여러 님네들, 우리 아버지 모습 좀 뵙게 해주시오.”

일곱째 공주 바리라는 말에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여섯 언니가 나서서 동생을 밀치려는데 무용부인이 썩 나섰다.

“내 딸 바리야. 네가 죽지 않고 왔구나. 그래 보거라. 뵙고서 보내 드려야지.”

상여가 멈추어지고 관 뚜껑이 열렸다.
복규대왕은 뼈만 앙상히 남은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바리가 두개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의 딸 바리입니다. 서역 만리 8지에서 나 노머신을 구해왔습니다. 일어나서 저를 보세요.”

바리는 품에 간직했던 색색의 USB들을 아버지의 몸에 꽂아주기 시작했다.
바리가 푸른 꽃 USB를 다리에 꽂자 골수까지 빠져있던 낡은 뼈들이 덜컥 덜컥 제 자리를 찾아서 붙었다.
바리가 노란 꽃 USB를 배에 꽂자 녹았던 풍만한 살들이 구름처럼 뭉실뭉실 피어났다.
바리가 빨간 꽃 USB를 머리에 꽂자 붉은 핏줄이 돋아나며 피가 돌았다.
바리가 병을 기울여 아버지 입에 특수 나노머신을 흘려넣으니 막혔던 숨이 쾅 하고 터졌다.
복규대왕이 숨을 몰아 쉬면서 번쩍 눈을 뜨고 일어나 앉았다.

“여기가 어딘데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모였는가?”

완연히 병들기 전의 음성이었다. 무용부인이 눈물을 흘리며 일곱째 딸 바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복규대왕 또한 바리를 끌어안고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 아버지, 그 사이 허락도 없이 제조를 해서 아이를 셋이나 뽑았습니다.”

“어허 이게 웬 말이냐. 어디 그 아이들 얼굴 좀 보자꾸나.”

복규대왕은 눈 앞의 SS 바이오로이드들을 하나씩 품에 끌어안았다.
아버지한테서 버림받은 아이가 제조한 아이들을. 힘차게.

그 후 바리는 어디로 갔는가.
나라도 마다하고 부귀도 물리치고 아비 어미의 품을 떠나가서
바리를 주워 키운 비리철충남할아비와 비리레오나할미가 소속된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의 보급을 맡는 병사가 되었다고 한다.
바리가 뽑은 세 아이들은 뒤에 스마국의 든든한 병사가 되어 나라를 지켰다고도 한다. 무패 맘메의 소식은 알 바가 없다.

바리, 발할라에는 그녀가 있다.
우리의 영혼이 육신을 떠나 저승으로 들어가는 날 그녀를 만나게 될것이다.



발할라를 향해.


이야기 끝